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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크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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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px-Angl-Canterbury-Arms.png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
파일:크랜머문장.png
제68대 윌리엄 워럼 제69대 성 토마스 크랜머 제70대 레지널드 폴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제69대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
Thomas Cranmer
파일:크랜머.png
출생 1489년 7월 2일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애슬록턴
사망 1556년 3월 21일 (향년 66세)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옥스퍼드
재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실 주재 대사
1532년 1월 ~ 1532년 10월 1일
제31대 톤턴 부주교
1532년 ~ 1533년 2월
제69대 캔터베리 대주교
1533년 12월 3일[1] ~ 1555년 12월 4일
문장
파일:크랜머문장.png
1544년경에 헨리 8세로부터 하사받은 문장. 방패 안에는 자신의 가슴을 쪼는 세 마리의 검은 사다새[2]가 놓여 있으며, 그 사이로 다섯 잎의 노란 꽃 문양이 새겨진 푸른 V형 장식이 가로지르고 있다.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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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부모 토마스 크랜머 (아버지)
애그니스 햇필드 (어머니)
배우자 조얀 크랜머 (1515년경 사별)
마거릿 크랜머 (1532년 7월 결혼)
자녀 마거릿 크랜머 (딸, 1533년경 출생)
토마스 크랜머 (아들, 1550년경 출생)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컬리지
(논리학, 고전문학, 철학 / B.A.)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컬리지
(르네상스 인문학 / M.A.)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컬리지
(신학 / Ph.D.)
사제 서품 1523년
캔터베리 대주교좌 승좌 1533년 3월 30일
성 스데파노 채플
존 롱랜드 주교, 존 베이지 주교, 헨리 스탠디시 주교 주례
칭호 종교 개혁 순교자
축일 3월 21일 }}}}}}}}}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과 대학 생활2.2. 헨리 8세의 조력자가 되다2.3.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다2.4. 토마스 크롬웰의 등장2.5. 주교들의 책과 슈말칼덴 동맹2.6. 권력의 쇠퇴와 부활2.7. 수록 참사회원의 음모2.8. 순교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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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신학자, 종교개혁가이자 제69대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이끈 선구자적인 인물로서 가톨릭이 아닌 성공회로서의 첫 캔터베리 대주교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으로 추대할 수 있는 종교적 기반을 확립함과 더불어 잉글랜드인 신자들이 복잡한 라틴어가 아닌 익숙한 영어로 전례를 드릴 수 있도록 성공회 기도서를 제작했고, 기존의 가톨릭 교리 및 체계를 과감히 다듬어 낸 성공회 39개 신조[3]를 작성함으로써 현재의 성공회 및 잉글랜드 국교회를 탄생시킨 주역 중 한 명이다.

이러한 그의 개혁적인 공헌에 따라 성공회와 루터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3월 21일.

2. 생애

2.1. 유년 시절과 대학 생활

토마스 크랜머는 1489년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의 애슬록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젠트리 가문 출신의 부유한 인물이었던 토마스 크랜머와 그의 아내 애그니스 햇필드의 막내 아들이었다.

크랜머의 어린 시절에 받았던 교육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이 없으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애슬록턴의 그래머 스쿨[4]에 다녔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가 14살이 되던 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진학해 지저스 컬리지에서 생활하며 8년 동안 논리학, 고전문학, 철학을 공부해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윽고 그는 같은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 나가 석사 과정으로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에라스뮈스 등과 관련된 르네상스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석사 학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1515년 그는 자신이 속했던 지저스 컬리지의 펠로우로 선정되었고, 머지않아 조안이라고 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이로 인해 당시 가톨릭 성향이 강했던 컬리지 특성상 크랜머는 사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펠로우 직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보금자리를 잃은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위한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모들린 컬리지의 조교수 자리를 구해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크랜머의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던 중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지저스 컬리지로부터 펠로우 직책을 얻었다. 하지만 슬픔을 좀처럼 떨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사목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1520년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 6년 뒤인 1526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서 지식이 풍부한 인본주의자로서 당시 유럽 곳곳에 퍼져 나가고 있었던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반감심을 지니고 있었고 에라스뮈스의 사상을 애호하고 있었다. 대학을 완전히 졸업한 그는 1527년경 당시 왕국의 재상이었던 토마스 울지 추기경이 주도한 유럽 외교 사절단에 발탁되어 신성 로마 제국으로 파견되었다.

2.2. 헨리 8세의 조력자가 되다

헨리 8세는 본래 왕위 계승자였던 형 아서가 요절함으로써 자연스레 왕위를 이어받음과 동시에 형의 아내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혼인을 맺게 되었다. 이 둘의 결혼은 곧바로 교황청에 의해 교리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캐서린은 이에 대해 자신은 전 남편 아서와 부부 관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라고 주장해 교황청은 이를 허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헨리 8세와 캐서린은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얻었지만, 훗날 메리 1세가 되는 딸 하나를 제외하고 남은 자식들은 모두 일찍이 잃었다. 잉글랜드 왕국은 살리카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메리가 여왕에 오르면 되는 일이었지만, 헨리는 장미 전쟁의 재발을 막고 튜더 왕조의 안정을 위해 왕비에게서 무조건 아들을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이미 50살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던 상황이어서 더 이상 후사를 기대하기 힘들자 헨리 8세는 이를 하느님의 분노라고 여겨 캐서린과의 혼인을 애초에 없었던 일로 무효화하는 선언을 받고자 교황청에게 접근을 했다. 혼인 무효 허가를 받아 이혼이 정당화되면 새로운 왕비를 들여 자신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점차 커져 끝내 소송전으로 발전했고 헨리 8세와 캐서린 간의 공방이 펼쳐졌다. 이에 국왕은 혼인 무효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울지 추기경에게 종교적 근거들을 물색하는 조사를 맡겼고, 추기경은 대학 출신 인물들로 조사단을 꾸려 해당 임무를 착수했다. 토마스 크랜머도 조사단의 일원 중 한 명이었으며 국왕의 혼인 무효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양한 근거들을 마련하는 데에 일조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529년 교황청은 재판을 무기한으로 연기하거나 로마로 직접 와서 시비를 가리라고 표명했다. 사실상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탄원이 교황청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국왕은 울지 추기경을 재상에서 파면하고 그 후임으로 토마스 모어를 임명했고, 자신을 위해 혼인 무효에 근거들을 제공한 개혁적 성향의 인물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해 케임브리지 일대에 전염병이 퍼지자, 크랜머는 자신의 친척들과 함께 에식스 지방에 있는 월덤 수도원으로 잠시 피신해 있었다. 어느 날 조사단 동료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가 그가 있는 곳으로 방문했고, 그렇게 모인 세 사람은 혼인 무효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크랜머는 교황청과의 법적 문제는 제쳐 두고 우선 유럽 전역의 대학 신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지지층을 얻자고 제안했다. 가디너와 폭스는 곧바로 헨리 8세에게 그의 제안을 전달했고, 자신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던 혼인 무효 문제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국왕은 이에 큰 흥미를 느껴 새로운 재상과의 협의 끝에 이를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크랜머는 여러 대학 측으로부터 의견들을 얻기 위해 국왕을 위해 소송을 도왔던 측근들이 있는 로마로 떠났고, 그곳에서 그는 이들과 함께 《충분히 풍부한 모음집(Collectanea satis copiosa)》을 저술했다. 해당 글은 헨리 8세 개인과 잉글랜드 왕국의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정당화하는 신학적·역사적 논거를 각종 문헌에서 찾아내 편찬한 모음집으로 수장령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크랜머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종교 개혁자들과 접촉을 했는데, 그는 스위스 바젤에 머물고 있던 독일의 신학자 지몬 그리나이우스와 더불어 울리히 츠빙글리,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등의 유명 종교 개혁 운동가들로부터 헨리 8세의 혼인 무효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얻어 냈다. 이들 중 크랜머의 열정에 감탄한 그리나이우스는 1531년 잉글랜드 왕국에 직접 방문해 국왕과 종교 개혁가들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이 일을 기점으로 크랜머와 그리나이우스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으며, 크랜머는 자신의 새로운 친구 덕분에 스트라스부르와 스위스에 머무는 많은 종교 개혁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

1532년 1월 헨리 8세의 신임을 크게 얻은 크랜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하는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황제는 자신의 영토를 한창 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황제가 잠시 머물고 있던 레겐스부르크로 떠났다. 레겐스부르크로 향하던 중 크랜머는 마르틴 루터의 개혁적 기질이 짙었던 뉘른베르크를 들렀는데, 그곳에서 그는 종교 개혁의 영향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뉘른베르크에서 제국의회가 개회되자, 황제를 따라 도시를 방문한 그는 그곳의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였던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만났다. 깊은 신학적 대화를 나눈 둘은 금방 사이가 가까워졌고, 그 해 7월 크랜머는 오시안더의 처조카 마르가레테와 결혼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사제였던 크랜머는 당시 성직자의 독신이 엄격하게 강조되었던 시대상으로 인해 마르가레테를 자신의 정식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

2.3.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다

토마스 크랜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함께 이탈리아 일대를 순방하던 중, 1532년 10월 1일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전임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의 죽음에 따라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는 서한을 받았다. 이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는 11월 9일 만토바를 떠나 이듬해 1월 초 왕국에 당도했다. 국왕 헨리 8세는 크랜머를 무척 총애했기 때문에, 그동안 교회 내에서 부수적인 직책만을 맡기만 했던 그에게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서열인 캔터베리 대주교에 오를 수 있는 명분을 주고자 교황의 칙령을 받기 위한 자금을 교황청에게 조달했다. 칙령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는데, 잉글랜드의 종교적·정치적 반항을 잠재우기 위해 최대한 국왕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려는 교황청의 속내가 그 이유였다. 칙령이 왕국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크랜머는 당시 국왕이 몰래 결혼한 새로운 왕비 앤 불린[5]이 임신을 발표하자 혼인 무효화와 관련된 업무를 서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33년 3월 26일 크랜머를 대주교로 승인한다는 내용의 칙령이 마침내 도착했고, 4일 뒤인 3월 30일에 성 스데파노 채플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승좌식이 거행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크랜머와 헨리 8세는 여전히 해결 과제로 남아 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법적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새로운 대주교와 국왕 사이에 재판의 절차와 그 판결과 관련된 내용의 수십 통의 편지가 오고 갔고, 이에 대해 서로가 합의하자 크랜머는 1533년 5월 10일에 잉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과 법조인들을 불러모아 교황청이 배제된 자체적인 재판을 열었다. 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에게 송환을 요청했고, 이에 원고와 피고는 각각 대리인을 법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비밀리에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5월 23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 간의 결혼은 하느님의 법에 위배됨을 판결하며 국왕이 왕비와 헤어지지 않으면 파문까지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로써 자신의 걸림돌을 제거하게 된 헨리 8세는 5일 뒤인 5월 28일에 크랜머의 인증에 따라 앤 불린과 정식으로 결혼을 성사했고, 6월 1일 대주교는 국왕의 새로운 아내에게 왕비 칭호를 부여했다.

이 같은 소식이 교황청까지 전해지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분개를 했다. 그러나 교황이 이를 완강하게 제지하는 것은 힘들었는데, 당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등을 비롯한 뭇 세력들로부터 여러모로 정치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독단적인 행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절대로 방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1533년 7월 9일 교황은 10월이 되기 전까지 앤 불린의 왕비 칭호 수여를 철회하지 않으면 헨리 8세와 크랜머를 비롯한 그 관계자들을 모두 파문하겠다는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앤의 왕비 지위를 유지시켰고, 9월 7일 이 둘 사이에 엘리자베스가 태어났다. 크랜머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곧바로 세례를 주었고 그녀의 대부가 되었다.

1534년 크랜머는 수장령이 통과됨으로써 교황청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신학적 노선을 설정하겠다는 암시를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관할 교구 내 성직자들을 휴 라티머와 같은 개혁주의자들로 구성함으로써 종교 개혁에 대한 지지를 서서히 표출했다[6]. 그는 종교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개혁적인 성직자와 신학자들을 지원했고, 이러한 그의 행보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실망감을 샀다.

2.4. 토마스 크롬웰의 등장

토마스 크랜머는 캔터베리 대주교 재임 초창기엔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그는 종교 개혁에 반감심이 있는 보수 성향의 주교들에게 종종 표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목 순시를 할 때면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주교들의 교구는 가급적 피했다. 1535년 뭇 주교들이 크랜머의 권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국왕이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대주교까지 덩달아 독립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보수주의자 주교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헨리 8세는 지난날 자신의 혼인 무효 문제와 수장령 공표에 지대한 공헌을 한 토마스 크롬웰을 영적 대리인으로 임명함으로써 이를 제지하고자 했다. 이 영적 대리인이라는 새로운 직책은 교회 내에서 그야말로 캔터베리 대주교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교회의 두 관구인 캔터베리요크를 통합적으로 관할하는 왕실 직속 사법 기관이 설립됨으로써 잉글랜드 교회 내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재판을 맡는 최고 판사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이는 결국 크랜머의 권력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었지만, 자신에게 다소 취약했던 정치적인 부분은 크롬웰이 맡았기 때문에 정작 그는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헨리 8세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 누구도 자신을 막을 자가 없다고 확신한 크롬웰은 국왕의 숙원인 잉글랜드 교회의 완전한 독립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토마스 모어, 존 피셔 주교 등을 비롯한 국왕의 뜻에 반하는 유력 인사들을 처형했고 가톨릭 수도원들을 강제로 해산하기 시작했다.

1536년 1월 29일 앤 불린이 아들을 유산하자 그녀에게 희망을 저버린 헨리 8세는 앤의 시녀인 제인 시모어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4월 24일 국왕은 크롬웰에게 앤과의 이혼 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크롬웰은 이전부터 앤 불린의 가문과 정치적인 대립을 세우고 있었기에 이 기회를 틈타 본격적으로 앤의 몰락에 공들였고, 국왕의 이혼을 확실히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를 남동생 조지 불린근친상간을 저지른다는 죄목으로 몰아갔다. 한편 이 사정을 모르고 있었던 크랜머는 크롬웰에게 사소한 문제에 관한 편지를 쓰고 있었고, 앤이 끝내 5월 2일 간통과 근친상간의 죄로 런던 탑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뒤늦게나마 헨리 8세의 이혼 결정을 알게 되었다. 분명 국왕 측에서 이혼을 하기 위해 왕비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짐작한 크랜머는 다음 날이 되자 헨리 8세에게 앤의 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크롬웰의 은근한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그는 5월 16일 런던 탑을 찾아가 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 다음 날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행했다. 이후 그는 공식적으로 헨리 8세와 앤 불린 간의 결혼은 무효함을 선언했고, 그로부터 이틀 뒤 앤은 처형되었다. 그렇게 희생양의 죽음을 목도한 크랜머는 진심으로 그녀를 추모했다.

헨리 8세와 크롬웰은 교황이 없는 가톨릭이라는 명목하에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에 대해 개혁적 성향의 성직자들과 보수적 성향의 성직자들 양측으로부터 지지를 얻어 교황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꾀하고자 했다. 1536년 국왕과 영적 대리인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기반으로 마르틴 루터필리프 멜란히톤 등의 독일 신학자들, 에드워드 폭스와 니콜라스 히스 등의 잉글랜드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로버트 반스 등의 잉글랜드 개혁주의자들이 협의를 통해 수정과 추가를 거듭하면서 작성된 10개 신조를 공포했다. 이는 헨리 8세의 잉글랜드 교회 내 모든 성직자들이 유념해야 할 10개의 조항들이었다. 초반 5개의 조항들은 7성사세례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만을 인정한다는 개혁적인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었고, 나머지 5개의 조항들은 성상의 역할, 시성, 전례, 그리고 연옥에 관한 가톨릭적인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대표였던 크랜머와 보수주의자들의 대표였던 커스버트 턴스톨 주교는 이 10개의 신조를 바탕으로 자신의 진영에 더욱 유리하도록 여러 차례 교정을 시도했는데, 이들은 이에 대해 종종 열띤 논쟁을 주고 받았다. 이로써 같은 해 7월 11일 크랜머, 크롬웰, 그리고 잉글랜드 모든 교구의 고위 성직자들은 양쪽 세력이 최종적으로 합의한 10개 신조를 승인한다는 공동 선언을 했다.

2.5. 주교들의 책과 슈말칼덴 동맹

1536년 말 잉글랜드 북부 지역은 은총의 순례라고 불리는 대규모 기독교 봉기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은총의 순례는 헨리 8세의 탈가톨릭 노선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봉기로 해당 시위대의 주된 대상은 다름 아닌 개혁주의자 토마스 크랜머와 토마스 크롬웰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자세를 취했는데, 크롬웰은 국왕과 함께 이를 진압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크랜머는 시위대를 설득하고 타이르는 방식을 택했다. 시간이 흘러 봉기가 잠잠해지자, 1537년 2월 크롬웰은 시노드[7]를 소집해 기존의 10개 신조가 여전히 가톨릭 신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보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위원회가 형성되었고 크랜머가 총책임자로 낙점되었다. 이후 한 달간의 종교 개혁주의자들과 가톨릭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치열한 토론 끝에 7성사가 모두 인정되고[8] 십계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 등이 포함되어 있는, 일명 《주교들의 책(Bishops' Book)》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진 《기독교인의 제도(The Institution of the Christian Man)》가 편찬되었다.

하지만 《주교들의 책》의 영향력은 이전의 10개 신조에 비해서는 미미했는데, 이는 헨리 8세가 개정된 신조에 대해 큰 지지의 뜻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국왕은 출판만을 지원했을 뿐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고, 오로지 그의 신경은 새로운 왕비 제인 시모어의 출산에 쏠려 있었다. 제인 시모어는 마침내 그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1537년 11월 12일에 거행되었고, 헨리 8세는 그제서야 《주교들의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해당 저서를 읽고 수정이 필요하다고 느낀 내용에 대한 자신의 첨언을 써서 크랜머에게 보냈으며, 크랜머는 국왕에게 그의 첨언은 자신의 동료 종교 개혁가들이 피력한 것보다 더 큰 논쟁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하는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이로써 헨리 8세와 크랜머를 포함한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신학적 의견 차이가 발생했고 결국 새로운 신조는 1543년이 될 때까지 정식 발표가 연기되었다.

1538년 헨리 8세와 크롬웰은 좀 더 영향력 있는 종교 개혁 세력들과 정치적 협력을 구축하기 위해 슈말칼덴 동맹[9]에 속한 루터교회 제후들과 회담을 나누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슈말칼덴 동맹에게 협조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이들을 대표하는 대사를 요청했고, 동맹 측은 기꺼이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를 비롯한 다수의 독일 종교 개혁 신학자들을 보냈다. 1538년 5월 27일 잉글랜드에 도착한 대사들은 헨리 8세, 크롬웰, 그리고 크랜머와 간단한 담소를 나눈 뒤 람베스 궁전에서 크랜머의 주재하에 어떻게 종교 개혁의 영향력을 강화할지에 대한 신학적 협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협의의 진척 상황은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는데, 이는 막상 슈말칼덴 동맹 대사를 부른 크롬웰이 다른 정치적인 문제들로 바빴고, 잉글랜드 측의 협상 진영에 개혁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도 포함되어 있어 의견 일치가 다소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맹 측의 독일 대사들은 크랜머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슬그머니 발을 빼고자 했고, 당시 세상을 떠난 전 추밀원 의장 에드워드 폭스의 후임으로 국왕은 자신의 최측근 중 하나이자 크랜머와 신학적으로 대립되는 커스버트 턴스톨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협의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잉글랜드가 친가톨릭 노선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노심초사했던 슈말칼덴 동맹의 대사들은 헨리 8세에게 서한을 보냄으로써 성직자 독신 강요, 사제의 성배 독점, 그리고 사적 예배 등과 같은 가톨릭 규율과 예식에 대해 우려를 표출하자 턴스톨은 이들의 의견을 거절하도록 국왕을 설득했다. 주교의 종용에 넘어간 헨리 8세는 끝내 대사들의 서한을 철저히 묵살했고, 협의를 어떻게든 지속시키려는 크랜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10월 1일 슈말칼덴 동맹의 대사들은 잉글랜드를 떠났다.

2.6. 권력의 쇠퇴와 부활

헨리 8세가톨릭 편향적 노선이 지속되자, 1539년 초 종교 개혁가 필리프 멜란히톤은 국왕에게 가톨릭의 성직자 독신 규율을 지지하는 그의 종교적 입장을 비판하는 서한들을 여러 차례 보냈다. 이후 같은 해 4월 멜란히톤와 같이 헨리 8세의 행보가 염려스러웠던 슈말칼덴 동맹루터교회 제후들은 새로운 대사를 잉글랜드 왕국으로 보냈다. 이에 발맞춰 토마스 크롬웰은 헨리 8세에게 새로이 파견된 대사의 임무 지지를 요청했고, 마침내 국왕은 다시 종교 개혁의 노선으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왕은 루터교회 대사 측과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보다는 도리어 보수주의자들에게 개혁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는 데에 열중했다. 1539년 4월 28일 크랜머는 참석했지만 크롬웰은 건강 이상으로 불참한 가운데 이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의회가 개회되었고, 5월 5일 귀족원은 잉글랜드 교회의 교리를 점검하고 조정하기 위해 개혁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세력 균형을 맞춘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위원회 내부에서 교리에 대해 좀체 합의를 보지 못하자, 헨리 8세의 전 왕비 앤 불린의 외삼촌이자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노퍽 공작 토마스 하워드가 위원회의 무용을 지적한 뒤 귀족원에서 6개의 교리 문제를 점검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왕국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대귀족의 개입으로 인해 귀족원은 권고에 따라 6개의 교리 문제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6개 신조를 수립했고, 그렇게 가톨릭 중심적으로 개정된 신앙고백이 의회에서 통과 직전에 놓였다는 소식을 들은 크랜머는 이제 보수주의자들의 칼날이 개혁주의자들에게 갈 것이리라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우선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안전한 해외로 보낸 후 그 자신은 켄트에 있는 포드 궁전에서 쥐 죽은 듯이 지냈다. 그리고 6월 말 6개 신조는 의회에 통과되었고, 크랜머의 종교 개혁 진영에 속한 일부 주교들이 자신의 교구장직을 그만두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득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신조가 공포되고 3개월이 지난 9월, 헨리 8세는 6개 신조에 대해 불만을 표출함으로써 자연스레 개혁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동안 잠시 물러나 있었던 크랜머와 크롬웰이 마침내 복귀했다. 1539년 4월 국왕은 다시 돌아온 대주교에게 라틴어를 읽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영어로 편찬되었던 잉글랜드 교회 대성경의 새로운 서문을 부탁했으며, 이에 크랜머는 신자들을 위한 설교 형식으로 서문을 작성했다. 한편 크롬웰에겐 희소식이 찾아왔는데, 다름 아닌 헨리 8세와 클레베 공작 요한 3세의 딸 클레베의 앤과의 혼인 계획이었다. 크랜머처럼 종교 개혁에 열망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크롬웰은 국왕이 클레베의 앤과 결혼을 하게 되면 루터교회와 연관이 깊은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다시 슈말칼덴 동맹과의 접점이 생길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크롬웰은 더욱 적극적으로 헨리 8세에게 그녀와의 결혼을 권유했다. 비록 1540년 1월 1일 국왕이 기존의 초상화와 다르게 생긴 앤의 실제 외모를 보고 분노를 해 잠시 혼인이 무산될 뻔했으나, 크롬웰의 끈질긴 설득으로 마지못해 1월 6일 이 둘의 결혼식이 크랜머의 주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8세가 혼인 무효를 제기함으로써 이 둘의 관계는 파행으로 치닫았고, 그에 대한 대가는 해당 결혼을 주선했던 크롬웰이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를 틈타 지난날 자신의 조카 앤 불린의 처형을 주도한 그를 원망했던 토마스 하워드는 자신의 숙적이 몰락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렇게 입지가 점차 좁아진 크롬웰은 끝내 6월 10일에 체포되었으며 자신의 동료들과 지지 세력을 단 하루아침에 잃었다. 크랜머는 크롬웰에게 동정심을 느껴 과거에 앤 불린을 위해 그랬듯이 그를 위해 사면을 요청하는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존재로 약화되었던 캔터베리 대주교로서의 교회 내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이에 크랜머는 7월 9일 시노드를 소집해 즉각 국왕의 혼인이 무효함을 천명함으로써 크롬웰의 과오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크롬웰은 1540년 7월 28일에 처형되었다.

크롬웰이 제거됨에 따라 크랜머는 실질적인 2인자에 오르게 되었다. 헨리 8세의 남은 재위 기간 동안 그는 국왕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교회 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541년 6월 말 헨리 8세가 새로운 왕비 캐서린 하워드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 지역으로 순방을 떠나자 그는 런던에서 토마스 오들리 재상과 에드워드 시모어 시종장[10]과 함께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국정을 잠시 돌보았고, 이를 기점으로 그의 활동 반경은 종교를 넘어 정치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0월의 어느 날 헨리 8세와 캐서린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 있던 사이에 존 라셀이라는 인물이 왕비가 국왕을 두고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음을 크랜머에게 제보를 했다. 크랜머는 곧바로 오들리와 시모어에게 이 소식을 전했으며 세 사람은 헨리 8세가 오기 전까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재상과 시종장은 국왕의 분노가 두려워 대주교가 직접 당사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기를 부탁했다. 이에 국왕 부부가 런던으로 돌아온 후 1541년 11월 1일에 열린 모든 성인들의 축일 미사에서 크랜머는 헨리 8세에게 왕비의 은밀한 비밀을 넌지시 이야기했고, 조사는 곧바로 착수되어 캐서린 하워드는 결국 1542년 2월 13일에 처형되었다.

2.7. 수록 참사회원의 음모

1543년 켄트의 수많은 보수 성향의 성직자들이 리처드 터너와 존 블랜드라고 하는 두 명의 종교 개혁가들을 고소했고, 이에 모자라 가톨릭 주교 스티븐 가디너의 조카인 저메인 가디너까지 공세에 합류했다. 이들은 1541년 같은 보수 성향을 지닌 수록 참사회원[11]들의 협조를 통해 교회 내 개혁 성향 세력의 중심 인물인 토마스 크랜머의 잘잘못을 나열한 고발장을 추밀원에게 보냈다. 이를 발단으로 저메인과 수록 참사회원들은 종교 개혁이 완전히 저지되도록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좌에서 축출하고자 음모를 꾸몄으며, 머지않아 공모자들은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한편, 이 사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당사자 크랜머는 켄트의 보수주의 성직자들로 촉발된 리처드 터너 재판 준비에 몰두해 있었고 끝내 피고가 무죄를 선고받도록 재판을 이끌자 종교 개혁 반대 진영은 더욱 분노를 했다.

이에 보수주의자들은 음모를 다방면으로 추진했다. 1543년 4월 20일 크랜머가 총책임자로 있던 《주교들의 책》 개정 위원회의 회의에서 대주교를 비롯한 개혁 진영 측에서 의견을 제시할 때마다 보수 진영 측에서는 무조건 이를 반대했다. 이로 인해 이전의 판본보다 훨씬 더 보수적 입장에 가까워진 내용으로 개정된 《모든 기독교인을 위한 필수적인 교리와 학식(A Necessary Doctrine and Erudition for any Christian Man)》이 5월 10일에 편찬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새로운 위기들을 맞았다. 의회에서 새로이 발효된 종교법을 통해 소위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서적들을 금하고 성경영어가 아닌 라틴어로만 읽을 것을 규정했다. 이는 사실상 지난날 개혁 진영에서 쌓아 올렸던 업적들을 한순간에 뒤집은 것이었다. 그리고 5월부터 8월까지 종교 개혁가들은 심문을 당했고,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그리고 감금되었다.

반면 헨리 8세는 보수주의자들의 횡포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는 1543년 4월 22일 밤에 음모의 주체들이 작성한 고발장을 입수한 뒤, 크랜머에 적대적인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기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9월이 되자 대주교를 호출한 국왕은 그제서야 그에게 고발장을 보여 주었다. 뒤늦게나마 이 모든 사건들이 자신을 몰락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간파한 크랜머는 곧바로 조사를 착수했고 장장 반년에 가까운 보수 성향 세력들의 만행이 하나의 음모에 비롯되었다는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는 조사를 적극적으로 주도함으로써 음모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인물들은 직급 막론하고 잡아들였고, 그렇게 주동자 저메인 가디너와 수록 참사회원들 전부를 체포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크랜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모자들 중 일반 사제들을 모두 용서했고, 이들이 계속 사목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수색에 묘한 두려움을 느낀 헨리 8세는 대주교의 칼날이 자신에게까지 가지 않도록 방지하고자 그에게 신뢰의 증표로서 특별한 반지를 선물했다. 이 반지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11월 크랜머가 지난날 음모의 주체들이 보냈던 고발장으로 인해 추밀원으로부터 심문에 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음에도 그가 착용하고 있던 반지 하나로 인해 고발 자체가 무산되었다. 그렇게 승리의 여신은 크랜머의 편을 들어 주었고, 그를 끌어내리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원대한 음모는 이를 계획한 수록 참사회원들이 감옥에 수감되고 저메인 가디너가 처형됨에 따라 철저히 실패하고야 말았다.

2.8. 순교

그러나 1553년 가톨릭교도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면서 핍박이 시작되었다. 이 핍박에는 헨리 8세의 의해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던 토마스 크랜머도 벗어날 수 없었고 라티머와 리들리 같은 개혁자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라티머는 사형장에서 리들리에게 "리들리 선생님, 위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남자답게 처신합시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을 영국에 점화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 두 사람은 기쁨으로 순교했으나, 죽음을 두려워한 크랜머는 배교했다.

그러나 배교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지 못한 크랜머는, 여왕에게 나아가 비열하게 신앙을 부정한 것을 취소한다고 말했다. 토마스 크랜머는 신앙을 철회하는 데 서명하였던 오른손이 불에 타서 재가 될 때까지 인내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3. 관련 문서



[1] 승좌식은 3월 30일에 이루어졌다.[2] 사다새가 자신의 가슴을 쪼는 행위는 기독교에서 희생을 상징한다.[3] 당시에는 42개 신조였다.[4] Grammar school. 영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학교 종류 중 하나이며 중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한다. 과거에는 라틴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수학, 자연과학, 역사 등 다방면으로 가르치던 복합적인 엘리트 교육 과정이었다. 현재는 여느 중고등학교처럼 일반 종합 교육화되었고 사실상 그 이름만 남게 되었지만 여전히 소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곳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5] 이 둘은 1533년 1월 24일 혹은 25일에 비밀 결혼을 했는데, 헨리 8세의 최측근 중 하나였던 크랜머조차 이 일을 14일 뒤에 알았다.[6] 다만 당시 크랜머는 존 프리스와 같은 급진적인 종교 개혁 사상은 거부했다. 참고로 존 프리스는 연옥의 존재와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쳐 화형을 당했다.[7] Synod. 주교를 비롯한 대표 구성원들이 모여 교회와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체다.[8] 다만 다시 복구된 견진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에 관해선 세례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와는 필요성에 차이가 있다고 구분지었다.[9] Schmalkaldischer Bund.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톨릭 윤리를 내세워 여러 자치도시들의 루터교회 신자들을 박해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결성된 루터교회 제후들의 동맹이다.[10] Lord Great Chamberlain. 왕궁의 대소사를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직이다.[11] Prebendary. 관구 성당의 전례, 시설 관리 등 전반적인 행정을 맡음으로써 급료를 받는 성직자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