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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5:12:58

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

1. 개요2. 원문/해석3.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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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壞土室說[1]

토실을 허물어 버린 이야기. 한자를 그대로 읽어 "괴토실설"이라고도 한다.

이규보가 지은 글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 21권에 수록되어있다.

교학사제7차 교육과정 문학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2]

2. 원문/해석

十月初吉, 李子自外還, 兒子輩鑿土作廬. 其形如墳. 李子佯愚曰, 何故作墳於家. 兒子輩曰, 此不是墳, 乃土室也. 曰奚爲是耶? 曰冬月宜藏花草瓜蓏. 又宜婦女紡績者, 雖盛寒之月, 溫然若春氣, 手不凍裂, 是可快也.
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3]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아들들[4]이 땅을 파서 움막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양이 무덤 같았다. 이자는 아무것도 모른 체하고 말했다. "어인 일로 집에 무덤을 짓느냐?" 아들들이 말했다. "이건 무덤이 아니고 움집입니다." "움집은 무얼 하려고?" "겨울에 화초나 채소를 갈무리하기에 좋고 또 길쌈을 하는 부녀자들이 비록 혹독하게 추운 때라도 이곳에서는 봄 날씨같이 따뜻해서 손이 얼어 터지지 않으니 참 좋습니다."

李子益怒曰, 夏熱冬寒, 四時之常數也. 苟反是則爲恠異. 古聖人所制, 寒而裘暑而葛, 其備亦足矣. 又更營土室, 反寒爲燠, 是謂逆天令也. 人非蛇蟾, 冬伏窟穴, 不祥莫大焉. 紡績自有時, 何必於冬歟? 又春榮冬悴, 草木之常性, 苟反是亦乖物也. 養乖物爲不時之翫, 是奪天權也.
이자가 더욱 노해서 말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사계절의 한결같은 이치이다. 만일 이에 반하면 괴이한 일이 된다. 옛 성인이 만든 제도는 추우면 갖옷을 입고 더우면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 다시 움집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돌린다면 이는 하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사람은 뱀이나 두꺼비가 아닌데 겨울에 굴에 엎드려 지낸다는 것은 이보다 상서롭지 않은 것이 없다. 길쌈은 제 때가 있는데 하필 겨울에 하느냐? 또 봄에 꽃이 피고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한결같은 성질인데 만일 이에 반한다면 또한 철을 어긴 물건이다. 철을 어긴 물건을 길러서 때에 맞지 않게 즐긴다면 이는 하늘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此皆非予之志. 汝不速壞, 吾笞汝不赦也. 兒子等𢥠懼亟撤之. 以其材備炊薪, 然後心方安也.
이는 모두 내 뜻에 맞지 않는다. 너희가 빨리 헐어버리지 않는다면 내 너희를 용서하지 않고 때리겠다." 아들들이 두려워서 얼른 헐어버렸다. 그 재목으로 땔감에 쓴 뒤에야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3. 비판

저자인 이규보가 뛰어난 문인이며 이 글 역시 교과서에 실린 고전이라고는 하나, 위 수필에서 보이는 이규보의 생각은 무척 근거가 박약하기에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규보의 행동은 상당히 주제넘는 기득권 짓거리로 결론 내려진다.

이규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자연의 이치는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겨울엔 추운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토실을 만들어 겨울에 따뜻함을 누리려 하는 발상은 잘못되었으니 토실을 부수어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자연적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여름에 '더워야 한다'거나 겨울은 '추워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규보의 논리대로라면 토실과 같이 인간이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자연에 적응하고 환경을 바꾸려 한 모든 시도나, 기술과 문화의 발전은 좋지 않은 것이니 없애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의견에 설득력이 있거나 받아들일 만하다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 이 밖에도 옛 성인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거나 사람이 두꺼비처럼 살면 그게 상서로운 것이겠느냐는 곁가지 주장이 이어지지만 모두 같은 맥락에서 옳지 않다.

움막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며 갈굴 각을 잡기 시작하는 것 역시 오늘날의 지독한 꼰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럴듯한 해석은 아니지만, 얼핏 보면 무덤처럼 생긴 외관을 두번이나 언급한걸로 보아 외관상의 문제로 마음에 안 든 것이 아니었냐는 생각까지도 해볼 수 있다.

심지어 움막이라는 소재로 논의를 한정시켜도, 이규보 본인은 몰랐을 것이지만 인간은 움집에서 지낸 역사가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더 길었다. 움막 역시 원시 시대부터 인간이 추위를 피하고자 고안해 낸 지혜의 산물인 셈인데, '옛날에는 안 그랬다'며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격하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이규보의 오판인 것이다.

게다가 글 말미에는 '그 재목으로 땔감에 쓴 뒤에야\'라는 문구도 있다. 이규보는 토담집을 허물고 나온 나뭇가지를 자기 방 온돌을 덥히는 땔감으로 쓴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겨울에 추운 것은 당연한 것이라면서, 땔감으로 자기 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는 모순논리가 된다. 그래놓고 자기 혼자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고 하고 있으니 주장의 일관성 역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불을 피워 땔감으로 쓰는 것은 과거부터 해온 익숙한 일이니, 자연스럽고 올바르지만, 움막은 생소한 일이니 비판하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 한 점은, 그 소빙하기 이후의 온돌의 보급이 조선의 삼림 고갈을 가속화하고, 온 조선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는것. 오히려 이런 관점에선 움막이 더 자연친화적이다.

이러한 위 관점에서 버트런드 러셀 역시 노자의 자연사상을 비판한 바 있다. 정확히 말하면 노자나 장 자크 루소의 자연회귀 사상에서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그 작자가 익숙해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들이 사악한 인위라 부르는 것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즉, 노자는 길이나 다리, 나룻배로 통행을 편하게 하는 것이 인위로써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옷을 입거나 불로 음식을 익혀먹는 것과 같은 인위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므로 인위로 보지 않았다는 논리이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의 3.3번 문단 참고.

다만 러셀의 노자 비판과 이규보의 괴토실설에 대한 비판을 같은 맥락에서 보기는 힘든 것이, 노자의 자연사상에는 정치철학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위의 예시로 도로다리를 비판한 것은 그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역을 부과해야 하고, 이것이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기에 '그런 쓸데없는거나 만들지 말고 그냥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가만히 놔두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당대 기준으로, 잘 닦인 도로나 교량은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해줄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전쟁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집 하인들이 좀 편안하게 지내는게 아니꼬와 토실을 허물게 한 이규보의 행태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저자인 이규보의 삶이다. 오늘날 괴토실설이 '유교 탈레반 씹선비의 일화'쯤으로 여겨지고는 하지만, 정상적인 유교 사대부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규보는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이규보는 조선시대에서나 발견되는 정통 주자학자라고 볼 수 없는 고려시대 인물이다. 알다시피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부터였고(유학자 안향이 들여왔다.) 이규보는 고려 중기 최씨 무신정권 시절 사람으로 고려시대 유학자 중에서도 도가 사상에 상당히 경도된 편인 인물이다. 이규보의 해당 주장도 도가 사상에 근거한 바가 크므로 사실 이규보의 일화를 근거로 유교를 허학으로 비판하는 것은 상당히 엇나간 비판이다. 도리어 성리학이 득세한 이유가 도가 사상의 이러한 측면을 허학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실학으로 내세우면서이기 때문에, 도리어 적극적 성리학자일수록 이러한 행태에 비판적일 수 밖에 없다.

이규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출세하지 못하다가 최충헌무신정권기에 들어서야 최충헌에게 발탁되는 것을 시작으로 비로소 고위직을 밟게 된다. 최충헌의 아들이자 제2 대 최씨 집권자 최우강화도 천도 후 섬에 빙고를 지었다. 자기 집에 세워진 토실은 부숴 버리려 한 이규보도 최우의 빙고 건설에 손을 대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이규보는 겨울에 길쌈을 할 필요 없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는 상류층이면서도, 아들들(혹은 머슴들)이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쉽게 해 보려 하니까 이에 공감하고 도와주진 못할 망정 오히려 엉뚱한 의견을 내세우며 방해를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소박한 자연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명문장가의 작품'으로 배웠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였으나, 커서 다시 보니 '무신 정권 부역자 꼰대의 억지 가득한 수필'이라는 비판적 해석이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비교적 늘어났다.

다만 기술의 발전을 탐탁잖게 여긴 전근대인은 생각 밖으로 많았다. 온실을 헐어 버리라고 명했던 조선의 성종이 그 예시다. 동양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기술의 발전이 최종적으로 사회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지지만, 이 '상식'이 본격적으로 정립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칼 마르크스의 이론과 1860년대 2차 산업혁명이 나타났던 19세기 중후반까지는 가야 한다. 그 이전 시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다른 것들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개념 자체가 없거나 매우 희박했으며, 이는 중세 이후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월등히 앞서나가기 시작했던 서구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술의 발전을 탐탁치 않게 여긴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화승총을 들 수 있는데, 화승총을 처음 개발하고 도입했던 서구권에서조차도 초창기에는 '평민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고귀한 귀족을 한 방에 죽여버릴 수 있다'는 이유로 불명예스러운 무기라고 여기는 인식이 종종 있었다. 화승총이 있어야 전쟁에서 승리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과는 별개로 널리 쓰이기는 했으나, 초기에만 해도 인식의 발전이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또한, 아예 인성과 별개로 이규보의 슬견설 같은 작품을 거론하며 그의 글재주와 논리를 옹호하는 오늘날의 사람도 많다. 그 외에도 그가 내세운 논리와는 별개로, 단순히 집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면는 하인들이 멋대로 지어놓은 무덤같은 움막이 집의 미관을 해치는 걸로 보인다면, 이를 철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집주인의 정당한 권리니 움막 철거 자체만 놓고 보면 뭔가 대단히 불합리한 갑질은 아니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보인다. 하지만 위의 본문은 자연의 이치 운운하며 추하게 굴었기에 까이는거지 미관상 안좋다고 했으면 이렇게 까지 욕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1] 무너뜨리다 괴, 흙 토, 집 실, 말씀 설[2] 같은 저자가 쓴 슬견설(蝨犬說)도 7차 교육과정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려있다.[3] 저자 본인을 말한다. 子는 공자, 맹자 같은 유교적 성인을 이르는 말인데, 자기를 그렇게 호칭한 것이다.[4] 후술할 교과서에서는 머슴들로 해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