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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되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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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에르되시 팔
Erdős Pál | Paul Erdős
파일:external/media-2.web.britannica.com/116778-004-AE1DEB53.jpg
출생 1913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사망 1996년 9월 20일 (향년 83세)
폴란드 바르샤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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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수학자
학력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 (박사)
수상 AMS 콜 상 (1951)
울프 수학상 (1983/84)
종교 무종교(무신론)[1][2]

1. 개요2. 생애3. 업적4. 일화
4.1. 약물 끊기 내기4.2. 상금 걸기4.3. 에르되시만의 언어
5. 에르되시 수(번호)
5.1. 유사 지수5.2. 홈런왕 행크 아론 이야기
6. 어록7. 관련 매체8. 출처

[clearfix]

1. 개요

헝가리수학자다.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수학자와 함께 수많은 공동 논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며, 세속적 가치를 떠나 순수 학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에르되시 팔'은 헝가리식 이름 표기이며 헝가리어권에서는 주변 언어권들과는 달리 한국처럼 성을 앞에 쓰므로 '에르되시'가 그의 성이다.[3] 영어식으로 그의 이름을 쓴 폴 에어디시(Paul Erdős)로도 많이 알려져 있으며 옛날 자료에는 에르도스라고 표기한 경우도 종종 보인다.

2. 생애

그의 부모님은 모두 수학 선생님이었다. 어렸을 때 음수와 소수의 성질을 스스로 이해했으며, 3살때 암산으로 3자리수를 곱하는 등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성씨가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유대인이라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소련을 피해 헝가리를 떠나야만 했다. 수학을 연구하는 것을 제외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학 이외의 것들에 무관심했으며, G. H. 하디와 함께 괴짜 수학자의 전형을 만든 인물 중 하나지만 의외로 시사지식이 풍부해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괴짜였기 때문에 대학에 을 두는 건 가능했지만 정식교수로 임용되지는 못했으며, 그 자신도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냉전 시대에도 자유롭게 공산권을 왕래하여 처음에는 스파이로 몰리기도 했으나, 후일에는 공산권을 쉽게 왕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아, 이임학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의 소식을 아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가장 친한 친구로 로널드 그레이엄이 있는데, 그레이엄 수의 그 그레이엄이 맞다. 사실 그레이엄이 20여살이나 어리기 때문에 삼촌-조카 뻘이나 다름 없었지만, 에르되시는 개의치 않고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에르되시는 공동 연구를 위해서 세계 각국에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장소가 그레이엄의 집이었다. 아예 자기집 마냥 썼다고 하는데, 예정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머물다가, 일이 있으면 갑자기 떠나곤 해서 그레이엄의 부인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에르되시와 그레이엄은 다수의 공동 논문을 작성하였기에 그레이엄의 에르되시 수는 당연히 1이다. 그레이엄은 에르되시 사후 그의 유산을 관리했으며, 에르되시가 건 현상금 수표를 지급하는 일도 담당했다.

3. 업적

1983/84년 울프상 수상 - 수상자 웹페이지 참고.

그 자신이 뛰어난 수학자임과 동시에 어린아이들, 특히 수학에 재능을 보이는 신동을 발굴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에르되시는 모두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몇 번이고 질문하곤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잘 안 풀리는 문제에 대해서 사소한 것까지 질문을 받다 보면 어느 새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nature.com/Paul_Erdos_with_Terence_Tao.jpg
21세기 가장 뛰어난 수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테렌스 타오(당시 10세)와 호주에서 함께 공부하는 모습

에르되시는 이산수학 분야를 중심으로 그래프, 조합, 수론, 해석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난제를 연구하였다. 그 스스로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풀리지 않던 난제를 해결하거나 동료 수학자들이 문제를 풀 수 있게 도움을 준 지대한 공로가 있다. 즉, 20세기 수학사에서 여러 수학자들에게 걸어다니는 촉매 노릇을 한 거물급 멘토였다. 정수론, 그래프 이론, 조합론 등 이산수학 관련 분야에는 에르되시가 떠올린 추측(Conjecture)이 많다.

그래서 레온하르트 오일러 다음으로 많은 연구저술을 남긴 수학자가 되었다.

3.1. 불가촉 수

불가촉 수(untouchable number)는 에르되시 팔이 창시한 개념이다.

어떤 수를 n으로 놓고 그 n의 진약수를 모두 합한 수를 m이라고 했을 때, m이 1이면 n의 해는 모든 소수가 되고 m이 3이면 n의 해는 4(1+2=3), 4이면 n의 해는 9(1+3=4), 6이면 n의 해는 6(1+2+3=6) 이런 식이 된다. 그러나 m이 2이거나 5일 때는 n의 해가 없다. 이 둘뿐만 아니라 n의 해가 없는 m 값이 많이 있는데, 이때의 m을 불가촉 수라고 정의했다.

자세한 내용은 불가촉 수 문서 참고.

4. 일화

4.1. 약물 끊기 내기

에르되시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치료를 위해서 58세부터 암페타민을 처방받았다. 그는 우울증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암페타민을 먹으니까 수학을 더 많이 연구할 수가 있다는 이유로 암페타민을 계속 복용했다. 그는 하루에 네다섯 시간밖에 자지 않고 계속해서 수학 연구를 했는데, 그러기 위해 커피와 암페타민을 수시로 복용했다고 한다. 암페타민은 중추신경 각성제로, ADHD 등의 치료에 사용되기도 하는 약물이나, 중독성으로 인해 현재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친구인 로널드 그레이엄이 약물 중독을 우려하여, 에르되시에게 한 달 동안 약물을 끊으면 5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에르되시는 결국 내기에 응했고, 결국 한 달간 참아내며 내기에는 이겼다. 하지만, 에르되시는 그 한 달 내내 제대로 수학 연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내기가 끝나고 로널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는 인류의 수학 발전을 한 달 늦춘 걸지도 모른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4.2. 상금 걸기

에르되시는 온갖 문제에 상금을 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개인적으로 문제의 가치를 측정해서 적게는 1달러 부터 많게는 수천달러까지 상금을 걸곤 하였다. 수학자 학회 등에서 다른 수학자가 에르되시에게 자신이 어떤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랑을 하면, 에르되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가 그 문제에 상금을 건 것 같다'라고 하고서는 상금액수에 해당하는 수표를 바로 지급해 주곤 했다고 한다. 그가 건 상금을 모두 합치면 수백만 달러에 달했고, 많은 수학자들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가 건 상금을 획득했다. 엄청난 상금을 지급하느라 에르되시가 재정적으로 곤란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에르되시는 상금을 '개인 수표'로 지급했는데, 이 수표를 받은 다른 수학자들은 에르되시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수표 그 자체를 더 가치있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환전하기 보다는 액자에 잘 모셔두고 자랑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한편 풀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금을 일부만 지급하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에르되시 사후에는, 상금이 걸린 문제를 해결할 경우에 친구이자 유산관리자인 로널드 그레이엄이 수표를 지급했다. 물론 그레이엄의 수표 역시 환전되는 일은 사실상 없다.(관련 내용) 로널드 그레이엄이 사망한 지금은 어떻게 되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에르되시 말고도 문제에 상금을 거는 수학자들이 종종 있는데, 이 현상금 때문에 해프닝이 발생한 적도 있다. 수학자 존 호튼 콘웨이가 1천 달러의 상금을 걸어놓은 문제를 콜린 맬로즈라는 수학자가 해결했다. 그래서 1천 달러의 수표를 지급하려 했는데, 갑자기 맬로즈가 그 문제에 1만 달러의 상금이 걸려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콘웨이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동영상을 확인해 보니 1만 달러의 상금을 건 게 맞았다. 말실수를 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기에 정확하게 1만 달러짜리 수표를 보냈다. 그런데 1만 달러를 받게 된 맬로즈도 1만 달러는 착각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생각지도 못한 1만 달러를 받게 되자 오히려 당황해서 수표를 돌려보냈다. 결국 두 사람은 1천 달러를 받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어차피 환금하지 않을 수표의 액면가가 1천 달러든 1만 달러든 그리 상관없었을 것이다. 맬로즈는 상금 수표를 현금화하지 않고 간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컴퓨터 분야에서는 TeX[4] 을 만든 도널드 커누스가 TeX 의 버그나 오타를 수정하면 상금으로 수표를 지급했는데, 이를 고친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들도 커누스의 사인이 들어간 수표를 액자속에 잘 모셔놨다. 수많은 수표를 지급했던 커누스도 이를 실제로 환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재정적인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5]

4.3. 에르되시만의 언어

에르되시가 이런 자신만의 언어를 쓰는 이유는 청년기를 보냈던 헝가리 왕국의 사정에서부터였다. 당시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의 독재에 시달리던 때에는, 마치 원나라마냥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렁탕을 먹지 않기 위해 비유를 사용했는데, 에르되시가 저명한 수학자가 되면서 수학자의 세계에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5. 에르되시 수(번호)

그는 생전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동 연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에르되시는 대략 1,500편의 논문[8]을 저술했는데 그 중 대다수가 공동논문이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수학자들은 두서너 단계를 거치면 에르되시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본격적으로 이를 연구하는 분야도 생겼다. 참고로 이를 연구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에르되시의 친구인 로널드 그레이엄이다.

일단, 에르되시 본인은 번호 0이 부여되었고, 에르되시와 공동논문을 저술한 사람에게는 에르되시 번호 1이 부여되었다. 참고로 1번을 가진 사람은 총 512명이다. 또한 에르되시 번호 1인 사람과 공동 저술을 한 사람에게는 에르되시 번호 2가 부여되고, 또 이 사람들과 공동 저술을 하면 3이 부여되는 식이다. 그리고 완전히 동떨어져서 연결점이 없는 수학자는 에르되시 번호 무한대가 부여된다.
번호 의미 비고
0 에르되시 본인 1명
1 에르되시와 공동논문 저술자 512명
2 1번을 가진 사람과 공동논문 저술자 12,600명
...
n n-1번을 가진 사람과 공동논문 저술자 -
무한대 에르되시와 전혀 연관 관계가 없는 학자 -
간혹 1번 중에서도 에르되시와 함께 논문을 n편 썼다면 번호를 1/n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분수 번호'는 모두 202명 있다. 최다 기록은 1/62를 보유한 언드라시 샤르쾨지(András Sárközy)로, 그의 아들인 가보르 사르코지(Gábor N. Sárközy)도 에르되시 번호 1을 갖고 있다.

수학 저널에 논문을 한 편이라도 기고한 수학자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8 이하의 에르되시 번호를 가진다고 알려져 있다. 상술한 에르되시의 친구 로널드 그레이엄은 당연히 1이며, 은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그리고리 페렐만도 의외로 번호 3이다. 무한대인 수학자를 제외하면 최댓값은 15였다고 한다.

필즈상 수상자 중에서 가장 큰 번호는 9였다. 즉, 수상자들은 모두 9 이하의 에르되시 번호를 가졌다. 그리고 필즈 메달리스트 정도의 거물 수학자들은 많은 이들과 공동연구 제의를 받고 실제로 논문을 내기 때문에 수상 시점의 번호는 커리어가 이어질수록 낮아지는게 보통이다. 2024년 기준으로는 보통 3~4를 넘지 않으며 2번은 한 10여 명 존재한다. 1번 필즈 메달리스트는 아직 없는데, 필즈상이 40세 이하의 수학자에게만 수여되는 것을 감안하면 필즈상 특별상 급의 예외가 일어나지 않는 한 에르되시 수 1번 메달리스트가 나올 기회는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9] 다만 3대 수학상까지 살펴보면 1번 중에 세메레디 엔드레(Szemerédi Endre)가 아벨상, 노가 알론이 울프상을 받은 적 있다.

위키백과에는 0번 본인과 1번을 시작으로 3번까지 부정확하게나마 번호별로 리스트를 만들어놨다.(위키백과 리스트) 리스트를 보면 존 호튼 콘웨이스타니스와프 울람, 에그베르 판 캄펜, 알프레드 타르스키라든가 메리 엘렌 루딘[10]수학과생들은 어딘가에서 분명히 들어본 낯익은 이름들을 알아볼 수 있다. 1번까지는 이산수학이나 조합론, 정수론 등 에르되시의 주요 관심분야에서 자주 만나던 학자들이 주를 이루고 언어가 잘 통하는 헝가리 및 중부 유럽 출신 학자들의 비율도 은근히 높은 편이나, 2~3번부터는 도저히 패턴이랄게 없을 정도로 전세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석학들이 등장하고 급기야 수학 외 다른 학문의 전문가들이 바글바글해지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낮은 에르되시 번호는 수학자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명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1996년에 에르되시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공동연구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11]. 또한, 이미 1번을 가진 수학자들도 에르되시와 동년배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낮은 에르되시 번호를 가지는 일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어려워지게 된다. 어떤 수학자들은 에르되시 번호를 돈 받고 팔기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자신이 속한 연구소 등에 기부를 하면, 공동논문 끝자락에 기여자 형태로 공동저술자로 포함시키는 형식이다. 아예 작정하고 공동 연구를 이베이에 판매하려 했던 사람도 있었다. 참고로 이 사람은 번호 4였는데, 낙찰받은 사람의 번호는 3이어서 결과적으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거래였다.

당시에는 논문을 공동 저술하는 것보다는 '단독 저자'로 논문을 내고 싶어하는 수학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일부 수학자들은 에르되시의 공동 논문 제의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이 열심히 연구해서 거의 논문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데, 에르되시가 나타나서 숟가락 얹으려고 한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에르되시 번호 1번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는, 말년에 크게 후회하는 수학자들도 있었다.[12] 일부 수학자는 저런 기회를 놓친 후에 에르되시가 관심 가질 만한 새로운 연구 업적을 이루고서는, 역으로 에르되시에게 공동논문을 제안하여 1번을 획득한 경우도 있다.

1번 보유자 중에 공동연구자가 가장 많은 사람은 520명을 뿌린 노가 알론(Noga Alon). 이분은 1번과 같이 연구한 1번의 수로도 58명으로 1위다. 한편 2번 보유자 중에 1번들과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은 린다 M. 레스니악이 19명으로 1위.

한국인 중에는 1번은 없고, 대신 2번은 꽤 존재한다. 한국계 유명 인물로는 김정한이 2, 허준이가 3, 이휘소가 4. 교수는 아니지만 12 Math도 3이다.

현대에는 수학자가 아니더라도 에르되시 번호를 가진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통계학, 암호학 같은 응용 수학 분야 또는 여러 이론물리학 등의 학자들이 수학자와 공동 논문을 썼는데, 그 수학자가 에르되시 번호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공동 논문 저자들 모두가 에르되시 번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물리학은 화학으로, 통계학은 여러 자연과학으로, 암호학은 컴퓨터 분야 등과 접점이 있으므로 점차 전파되어 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구글의 창업주 세르게이 브린래리 페이지가 번호 3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여파로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도 번호를 가진 사람이 200명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각 분야에서 번호가 제일 낮은 사람만 살펴보면 이렇다.
이과를 넘어서 문과 계열의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13] 철학자 중에는 칼 포퍼가 번호 4, 언어학자 중에는 놈 촘스키가 번호 4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의 세부전공이 수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학철학과 형식주의 언어학임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사회과학 쪽으로도 수학과의 접점이 가장 강한 경제학자들이 핵심 노드가 되어 뻗어나갔기 때문에 정치학자, 사회학자들 중에서도 에르되시 넘버 보유자들이 있다.

그 외 유명인 중에서는 일론 머스크가 번호 4[14], 물리화학 전공 화학박사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 총리가 번호 5를 가지고 있다. 한편 어떤 샴고양이는 번호 7을 얻기도 했는데, 무슨 일인지는 논문 문서 참조.

번호는 물론 과거로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다[15]. 과거에는 현대 같은 공동연구 출판의 개념이 없어서 따지기 애매한 면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인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리 퀴리가 번호 7,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번호 4,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번호 14.

5.1. 유사 지수

유사하게 미국 영화 배우 중에 엄청난 다작을 하는 케빈 베이컨이란 사람이 있는데, 다른 배우들이 이 배우와의 연결 정도를 계산한 '베이컨 수 (또는 케빈 베이컨 지수)'라는 개념도 있다. 간혹 에르되시 수와 베이컨 지수를 모두 가진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들을 가지고 이 두 값을 합친 에르되시-베이컨 수를 따지기도 한다. 수학자 중에 에르되시-베이컨 수 최소 기록자는 번호 3을 보유한 다니엘 클라이트만(Daniel Kleitman). 에르되시 수가 1이었는데, 굿 윌 헌팅의 수학 자문을 맡으며 영화에 잠깐 나왔고, 함께 나온 여배우 미니 드라이버가 케빈 베이컨과 <슬리퍼스>에 출연한 적이 있어 베이컨 지수는 2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서 일부 발췌) 배우 중에서는 콜린 퍼스가 6 (5+1) 으로 최소라고 한다. 나탈리 포트만,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7을 보유하고 있다 (둘 다 5+2).

한때 에르되시 본인이 베이컨 지수 4라는 말이 있었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한술 더 떠서 에르되시-베이컨-사바스 수라는 것도 있다. 이건 음악 밴드인 블랙 사바스와 같이 음악 작업한 것까지 따지는 것. 이쯤 되면 실존 자체가 의심될 지경이지만, 스티븐 호킹이 번호 8을 갖고 있다. 에르되시 수 4, 베이컨 지수 2, 사바스 지수 2인데, 그가 출연한 광고 음성을 핑크 플로이드가 샘플링한 적이 있어서 음악계에도 접점이 생긴 것이다. 그 외 리처드 파인만이 번호 10 (3+3+4). 공동작업의 정의를 최대한 넓게 가정할 경우, 스폰지밥이 번호 16 (8+3+5) 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이트에서 에르되시 수를 다양하게 연구 중이다. 연락 시 번호를 찾아줄 수도 있다고 한다. 수학자만 찾는다면 MathSciNet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5.2. 홈런왕 행크 아론 이야기

파일:aaron_erdos.jpg

홈런 타자 행크 아론이 에르되시 번호 1이라는 농담이 있다. 물론 행크 아론이 수학 논문을 썼다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 실제로 번호를 가진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이 쓰여 있는 무언가가 있긴 하다.

그 당시 통산 홈런왕은 야구의 화신 베이브 루스로 통산 714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행크 아론이 715개의 홈런을 쳐내며 이를 넘어서서 새로운 홈런왕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이 714와 715라는 수에 관심을 가진 칼 포머런스(Carl Pomerance)라는 수학자가 있었다. 714는 2*3*7*17로 소인수분해가 되고, 715는 5*11*13으로 소인수분해가 된다. 공교롭게도 두 수의 소인수를 합하면 2+3+7+17 = 5+11+13 = 29로 같다는 점도 발견했다. 그 외에 두 수의 곱은 17보다 작거나 같은 모든 소수가 한 번씩 사용된다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여, 2명의 제자와 함께 이런 성질을 띠는 "루스-아론 수"에 관한 논문을 공동 저술했는데 여기서 볼 수 있다. 포머런스는 루스-아론 수의 밀도가 0[16]이라는 추측을 제기했는데, 에르되시가 이것을 보고 포머런스와 공동연구로 이 추측을 증명해 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5년 에모리 대학에서 행크 아론과 에르되시 팔을 초청하여 명예 학위를 주었다. 칼 포머런스 교수도 이 행사에 참석하였고, 즉석에서 야구공에 두 사람이 공동으로 사인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두 사람이 사인하면서 행크 아론은 에르되시 번호 1을 가지게 되었다. 관련 내용(영어)

6. 어록

출처
My brain is open!
내 뇌는 열려 있습니다!
"나는 수학 연구를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가 수학 문제로 고심하지 않고 있을 때의 보통 인사라고 한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작은 여행가방 하나에 옷 몇 벌과 수학 노트만을 넣어 수학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집주인과 연구를 했다고 한다. 할로윈 데이의 trick or treat 같은 느낌의 인사 같다. 관련 서적 야밤의 공대생 만화 에르되시 편에서는 두유워너 빌더 페이퍼~?라는 대사로 패러디되었다.
This one's from The Book!
이건 그 책에 있는 것이군!
아주 아름답거나 뛰어난 증명을 봤을 때 그의 감탄사. 수학자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고 한다. "그 책"(The Book)이란 에르되시의 상상 속에서 신이 모든 정리에 대한 증명을 적어 놓고 혼자 감추어 놓고 있는 책을 말하는데, 한 강연에서 "당신은 신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Edna St. Vincent Millay라는 시인의 "Euclid alone has looked on Beauty bare. (유클리드 혼자만이 아름다움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 라는 에서의 "진짜 모습"과 비슷한 심상인 듯 하다.
Végre nem butulok tovább
"나는 마침내 더 이상 어리석어지지 않는다."[17]
에르되시의 묘비명

"수학자는 커피를 정리로 만드는 기계다."[18] 동료 수학자인 알프레드 레니의 말이다.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라는 책에 에르되시와 주변 수학자들의 일화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7. 관련 매체

다큐멘터리 영화: N Is a Number: A Portrait of Paul Erdős 영화 웹페이지 Youtube에서 시청하기

수학동아에서는 에르되시 팔을 다룬 '방랑 수학자 에르되시 팔'(글 그림 송진욱, 콘텐츠 조가현)이라는 만화가 연재 중이다.

수학을 사랑한 아이라는 어린이용 책도 있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한 유망주들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주는 모습으로 살짝 등장한다.

8. 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H70v&articleno=6042820
https://en.wikipedia.org/wiki/Paul_Erd%C5%91s
http://www.nature.com/news/maths-whizz-solves-a-master-s-riddle-1.18441
http://egloos.zum.com/AoKaje/v/4014877


[1] Erica Klarreich, “In Search of God’s Mathematical Perfect ProofsWired, 2010년 3월 24일.[2]Paul Erdős,”[3] 전세계적으로 이름+성을 쓰는 나라보다 성+이름을 쓰는 나라가 훨씬 적으며, 유럽에서는 헝가리가 유일하다.[4] 텍 이라고 읽는다.[5] 물론 이쪽은 실제로 환전한다고 치더라도 애당초 수표 액수 자체가 2.56달러의 소액이다.[6] 엉클 샘은 미국의 마스코트이자, 미국 정부를 나타내는 은어이기도 하다.[7] 소련의 절대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을 영어로 쓰면 조셉(Joseph) 스탈린이며, 는 조셉을 부르는 애칭 중 하나이다.[8] 참고로 수학 역사상 에르되시보다 더 많은 저술을 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레온하르트 오일러이다.[9] 이는 필즈상을 받을만한 주요 연구성과의 대부분이 에르되시의 주 관심분야와는 거리가 먼 분야에서 주로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대 필즈 메달리스트들의 연구주제를 살펴보면 가장 핫한 분야인 대수기하학을 중심으로 대수적 정수론, 호몰로지 대수학, 위상수학, 미분기하학, 복소기하학 등 전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출 수 없는 신선놀음급의 숫자 없는 수학 분야에서 쌓은 성과가 주를 이룬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주로 응용수학 부문에서 정평이 나 있던 소련 수학자들이 서구권으로 진출하면서야 동역학계, 조화해석학, 편미분방정식, 확률론, 최적화 이론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젊은 학자들에게도 필즈상이 돌아가며 대수기하학 인접 분야로의 편중현상이 조금씩 해소되는 형편이다.[10] 걸작 해석학 교과서를 쓴 그 월터 루딘의 아내. 남편 월터는 케네스 쿠넨을 거쳐 2번을 받았다.[11] 다만 사후 공동연구하던 논문을 출판한 사람은 1999년까지 쏟아져 나왔다. 21세기에도 다섯 명이 생겨났다. 가장 '최근' 1번은 2015년 나왔다. 주인공은 수학자 스티브 버틀러. 생전에 에르되시와 그레이엄이 같이 연구하던 '이집트 분수 문제'를, 그레이엄의 아내의 제자였던 버틀러가 그레이엄과 마무리지었다. 정작 버틀러 본인은 에르되시를 만나본 적 없다고 한다.[12] 예를 들어 기하학의 수식화되어가는 기조에 맞서 고전적 기하학을 지켜냈다고 평가받는 기하학자 H.S.M. 콕세터가 있다. 콕세터의 번호는 2.[13] 사실 문이과 구분은 고등학교 수준까지 통하는 이야기이고, 대학 학부 이상이 되면, 특히 학문을 업으로 삼는 학자가 되면 그게 수학이든 역사학이든 해부학이든 자신의 질문을 풀기 위한 방법론으로 유효하기만 하다면 배워서 써먹어야 하므로, 문과 쪽 학자들이 번호를 갖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14] 생물학자 파디스 사베티와 코로나19에 관한 논문을 같이 썼다. 2021년 발표.[15] 대학원생의 논문에 지도교수의 공저자로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에, 과거의 인물까지 계속 연결된다.[16]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니라, 숫자가 커질수록 밀도가 매우 희박해진다는 뜻이다.[17] 직접적으로 번역하자면 "더 멍청이(butul)가 될 일은 없겠군"에 가깝다.[18] 이 말을 이용한 복면산도 있다. COFFEE × 3 = THEOREM. × 4(해 4개) × 18(해 1개)버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