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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폰 노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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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3333> 이름 John von Neumann/존 본노이먼 (영어)
Neumann János Lajos/너이먼 야노시 러요시[1](헝가리어)
Johann Ludwig von Neumann/요한 루트비히 폰노이만 (독일어)
거주지 미국
국적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생 1903년 12월 28일
출생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사망 1957년 2월 18일(향년 53년 52일)
사망지 미국 워싱턴 D.C. 월터 리드 육군 의료병원
종교 없음(불가지론) → 가톨릭
연구 분야 수학, 물리학, 화학, 컴퓨터과학,
통계학, 경제학
학력 퍼쇼리 김나지움 졸업
부다페스트 대학교[2] 수학과 Ph.D.(박사) (1921-1926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 화학과 박사 (-1926년)
소속 베를린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주요 업적 게임 이론
국소 볼록 공간
미니 맥스 원리
에르고딕 정리
폰 노이만 구조
폰 노이만 대수
폰 노이만 보편 구축자
폰 노이만 세포 자동자
폰 노이만 엔트로피
폰 노이만 전체
Direct integral
Stone-von Neumann theorem
Von Neumann extractor
Von Neumann regular ring
Von Neumann stability analysis
Von Neumann-Bernays-Gödel set theory
Von Neumann-Morgenstern utility theorem
Von Neumann's inequality
Nuclear Bomb Explosive Lens Technical Design

1. 개요2. 생애
2.1. 초기생애2.2. 미국 망명 전2.3. 미국 망명 후
2.3.1. 핵무기
2.4. 사망
3. 사생활과 사상4. 일화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존 폰 노이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출신의 미국인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컴퓨터과학자로, 그는 양자역학, 함수 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과학, 기하학, 수치해석, 경제학,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연산자 이론을 양자 역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선구자 중 하나였다. 맨해튼 계획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고 게임 이론과 셀룰러 오토마타의 개념을 공동 개발하였다. 또한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에 관여하는 등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일생 동안, 폰노이만은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순수 수학 60편, 물리학 20편, 응용 수학 60편이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컴퓨터와 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는 사망직전 병원에서 집필되었는데 집필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의 원고로 남게 되었고 훗날 책 형태로 출판되었다.

2. 생애

2.1. 초기생애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헝가리식 이름은 성씨가 이름 앞에 오는데, '너이먼[3] 야노시 러요시(Neumann János Lajos)'이며, 독일식으로 쓰면 '요한 루트비히 폰 노이만(Johann Ludwig von Neumann)'이다. 1913년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의 아버지였던 너이먼 믹셔(Neumann Miksa, 1873–1928, 귀족 작위 획득 후 막스 폰 노이만)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하면서 이름에 귀족임을 뜻하는 '(von)'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너이먼 믹셔는 자녀교육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 노이만과 형제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개인 가정교사를 들였는데, 수학과 더불어 자식들이 헝가리어 외에도 다른 언어들을 배워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가르쳤고 많은 양의 학문조기교육 시켰다. 8세의 나이에 폰 노이만은 미분적분에 대해 잘 아는 상태가 되었고 고대 그리스어라틴어도 능해졌다. 특히 역사학에도 흥미를 가져 빌헬름 옹켄(Wilhelm Oncken, 1838–1905)의 세계사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아버지는 이런 폰 노이만을 기특하게 여겨 방 하나를 개조해 개인 도서관으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산수, 언어, 암기의 분야에서 강한 능력을 보였다. 7살 때 여덟 자리 수의 나눗셈을 하였으며, 9살 때 미적분을 마스터하고 12살 때 13살의 유진 위그너[4]에게 정수론을 가르쳐줬다고(...) 독해력은 매우 빨랐고 무언가를 암기하고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폰 노이만의 부모는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폰 노이만의 암산 능력을 보여 주며 즐겁게 해 주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이자, 후에 물리학자가 된 너이먼 미하이(Neumann Mihály, 1907–1989)는 형이 당시 인기 있었던 빌헬름 옹켄의 44권짜리 세계사 시리즈에서 그가 읽은 부분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십 년 후 폰 노이만의 동료 한 사람은 폰 노이만이 옹켄의 책 중 한 챕터 전체를 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의 가족들, 폰 노이만 본인,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관심 없는 영역에 대한 기억력은 일반인들보다도 좋지 않아 수십년간 거주한 집에서 접시가 담긴 찬장이 어딘지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8세에 루터회 학교인 퍼쇼리 에벙겔리쿠시 김나지움(Budapest-Fasori Evangélikus Gimnázium)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부다페스트에서 제일 교육수준이 높은 엘리트 학교 중 하나였다. 수업 내용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예습 없이 수업에 참여해 다른 급우들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으며 여기서 훗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유진 위그너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당시 김나지움의 선생이었던 라츠 라슬로(Rátz László, 1863–1930)는 노이만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주목하여 일반적인 교육 수준에서는 노이만이 자신의 날개를 완전히 펴지 못한 채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의 아버지였던 너이먼 믹셔와 상담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는 폰 노이만이 정규교육과정을 생략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으나 뛰어난 학자를 들이는 데에는 찬성하였고 당대에 유명했던 헝가리의 수학자인 세괴 가보르(Szegő Gábor, 1895–1985)를 교육자로 선택해 고등 미적분학을 접하게 하였다. 세괴와 폰 노이만의 첫 만남 이후 세괴의 아내는 그가 집에 돌아온 뒤 노이만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감명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김나지움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체육 과목 성적은 저조하였고 김나지움 졸업 이후 19세에는 서수(ordinal number)에 대하여 논문을 냈다. 22세에 부다페스트 대학교 수학 주전공에 물리, 화학 부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수학자보다 공학자가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박사 학위와 동시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에서 화학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2. 미국 망명 전

독일의 교수자격 시험인 하빌리타치온을 최연소(25세)로 통과하였다. 20대에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나 《집합론의 공리화》, 《에르고드 이론의 연구》, 《실내 게임의 이론》 등을 저술해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이 되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창립 교수 4명 중 1명(당시 유일하게 20대였다.)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최초로 힐베르트 공간을 양자 역학에 도입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다. 현재는 이 네 저작들이 모두 분과학문이다.

1928년부터 베를린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Privatdozent)로 근무하였다. 1927년 한 해 동안 폰 노이만은 수학에 관한 주요논문 12편을 발표하였고 29년 말까지 주요 논문 36편을 발표했다. 1930년에 그는 미국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교에 가게 된다.

1930년, 27세의 폰 노이만은 마리에트 코베시(Mariette Kövesi)[5]와 결혼하였다. 결혼하기 전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는데, 이 시기는 아버지인 막스가 사망한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들은 슬하에 1명의 딸을 두었고 이름을 마리나라고 지었다. 7년 뒤 두 사람은 성격차이로 인해 이혼했고 폰 노이만은 부다페스트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직전에 만난 여성인 클라라 댄[6]과 재혼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고 독재 정부인 나치 독일이 탄생하면서 폰 노이만과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폰 노이만은 이름을 미국식 이름인 존(John)으로 개명했으며 독일식 귀족이름인 Von Neumann을 택하게 되었다. 다만 귀족적인 색채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은 각각 Neumann, vonneumann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2.3. 미국 망명 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있던 중 1943년부터 맨해튼 계획에 참가해서 고폭발성 렌즈를 발명했다. 폭축 렌즈라고도 하는데 이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팻 맨의 발명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2차대전 중에는 영국 수학자 G.I. 테일러와 함께 폭발파(Blast wave)에 대해 최초로 연구했다. 이후 다른 수학·물리학자들과 함께 이를 출판했으며 아직도 판매 중이다. 또한 유체 역학에 관련해 최초로 인공 점성(artificial viscosity)을 정의했다.

1944년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을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저술했다. 이 역시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는 서적. 이후로 게임 이론의 연구를 통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 여러 번 나왔다.

DNA, RNA의 구조를 최초로 예견하였으나 세부 사항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하여 빛을 보지 못했다. 컴퓨터 연구에 뛰어든 이후로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 디지털, 이진법이라는 기본적인 골격을 만들었으며 순서도와 서브루틴, 몬테카를로법을 최초로 사용했다. 전산학과라면 배울 병합 정렬(merge sort)을 1945년에 만들었고, 최초로 컴퓨터 기반의 pseudorandom process를 연구했으며 그 결과로 Middle-square method를 창시했다. 또한 Randomness extractor를 최초로 연구해 Bernoulli sequence를 이용한 Von Neumann extractor를 남겼다. 그리고 기상학과 관련해, 수학을 사용해서 일기 예보를 하려던 노력은 이전부터 있었으나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해 기상 예측을 시작한 사람은 폰 노이만이다. 이산 구조 등에서 배우는 ALU(arithmetic logic unit)도 폰 노이만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말년에는 인공 지능과 인공 생명에 관한 초기 연구를 남겼다. 그는 간단한 원칙만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복잡한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이를 오토마톤이라고 칭했다. 1949년에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오토마톤에 대해 처음으로 강의를 했으며 나중에 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를 발표했다. 폰 노이만이 만든 이 자기 복제 컴퓨터 프로그램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라고 평가받는다.

2.3.1. 핵무기

1937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고 나서 그는 당시의 2차세계 대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중위 시험인 미국 육군의 장교 준비 제도 이사회(USAR)의 간부시험에 지원하였다. 그는 쉽게 시험을 통과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나이로 인해 거부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노이만은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나치 독일과의 전쟁은 수치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육군에 자청하지만, 위에 말했다시피 불채용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폰 노이만은 폭발물 분야에서 수학적 연구의 전문가가 되고, 미국 해군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큰 폭탄에 의한 피해는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때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에 이용되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나가사키에 투하 된 플루토늄형 원자 폭탄 팻 맨을 위한 폭축렌즈의 개발을 담당했다. 1940년대에 폭발의 파면 구조에 대한 ZND 이론을 확립하였으며 이 이론을 바탕으로 10개월에 걸친 수치 해석을 통해 폭약을 32면체에 배치함으로써 원자 폭탄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폰 노이만은 미국과의 교전국이던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지점을 선정할 때 문화재가 많은 도시였던 교토에 대해 "일본 국민들에게 교토가 문화적 가치가 많다면 더더욱 그곳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폰 노이만이 만든 계획은 폭격기에 원자폭탄을 실은 뒤 교토 상공에 직접 투하해 도쿄 대공습과 같이 도시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교토에 신혼여행을 갔다왔었던 헨리 스팀슨 국방장관이 반대해 대신 히로시마로 정해졌다.

2.4. 사망

1955년 방사선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골수에 전이된 치명적인 췌장암에 걸려서 1957년에 사망했다. 이때 그는 인공 지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고 《컴퓨터와 뇌》를 저술하고 있었지만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특히 이 책에서 메모리 계층 구조가 필요해질 거라는 예측을 남겼다. 폰 노이만 구조의 컴퓨터 알고리즘은 병목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를 막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메모리 계층 구조도 1가지 방법 중에 하나이다.

암에 걸린 이후 폰 노이만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엄청난 통증을 겪으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고 이때 로마 가톨릭을 믿게 되었는데, 가톨릭에 귀의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파스칼의 내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파스칼의 내기란 쉽게 말해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다면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기독교 변증론이다.[7] 모든 종교를 믿는다면?

여담으로 미국의 군사 기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병원에서 면회할 수 있었던 인물은 소수였다고 한다.

3. 사생활과 사상

4. 일화

폰 노이만의 학문적 업적 그 자체들은 뛰어나다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고, 노이만 본인의 머리가 천재적으로 비상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기에 서술한 관련된 일화들은 사실이 과장되거나 후대에 와서 지어낸 얘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이 문단에 쓰여있던 글들인 "트리니티 핵실험 당시 폰 노이만이 폭발 에너지를 암산으로 가장 근접하게 맞추어 엔리코 페르미가 칭찬했다"는 것은 외국의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로 실은 엔리코 페르미가 가장 근접하게 맞혔다.[9] 노이만 뿐 아니라 대체로 많은 위인들이 그들의 업적과 관련된 일화에서 사실무근인 경우가 허다하니 무조건적으로 믿지는 말자.

5. 관련 문서




[1] [ˈnɒjmɒn ˈjaːnoʃ ˈlɒjoʃ\][2] 현재는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3] 모음조화가 존재하는 헝가리어의 특성상 '[ˈnɒjmɒn\](너이먼)'으로 발음한다.[4] 위그너 또한 13살에 정수론을 배웠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196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다.[5] 1909~1992. 즉 6세 연하다.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했다.[6] 1911–1963. 즉 8세 연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1931년, 1936년에 결혼을 했다 각각 이혼했고 폰 노이만과 3번째 결혼을 했다.[7] 신이 없다면 믿든, 안믿든 상관없다. 하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믿는게 낫다. 그러니 우리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믿는게 낫다는 결론이다. 다만 노이만은 진짜로 믿는건 아니었고, 그냥 죽기전에 "어~ 그럼 걍 믿지 뭐~ 그게 이득이니까~" 라는 느낌.[8] 록펠러가 세운, 현재의 엑슨모빌을 비롯한 여러 거대 석유회사의 전신. 이 회사는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수십 개 회사로 찢겨지기 전까지 미국 전체 석유 유통량의 95%를 쥐고 있었던 회사였다.[9] 실제 위력은 20~22킬로톤, 페르미는 10킬로톤, 노이만은 5킬로톤. 페르미 추정 항목 참고[10] 폰 노이만의 유일한 육성 녹음을 들어보면 영어 발음이 완벽하지 않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11] 사실 기자의 질문은 나름대로 타당하다. 많은 학자들이 헝가리에서 나왔다.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텔러, 레오 실라르드(실라드), 테오도르 폰 카르만이 있다.[12]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닐스 보어의 전기를 썼다.[13]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 명이자 8개 국어로 시와 소설을 쓰고 클래식 작곡도 상당한 수준인 무시무시한 천재다.[14] 현재 열차와 파리 문제 일화는 조건이 매우 다양한 값들로 변형되어 널리 퍼져 있다.[15] 쉽게 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기차가 서로를 향해 각각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이동하므로 200마일 떨어져 있는 두 기차가 만나는 데에는 2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파리도 경로와 상관없이 2시간을 시속 75마일로 이동했으므로 총 이동 거리는 150마일이 된다.[16] 무한급수로 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파리와 같이 출발하는 전차를 A, 반대편 기차는 B라 할 때 파리는 기차보다 1.5배 빠르므로 파리와 B가 만나는 지점은 200마일×(1.5)/(1+1.5)=120마일이며 걸린 시간은 120/75=1.6시간 이므로, 1.6시간 동안 이동한 두 기차사이의 거리는 200-(80×2)=40마일이다. 이때 시간이나 파리의 이동 거리 중에 어느 것을 초항으로 잡느냐에 따라 방법이 조금 달라진다. 남은 거리가 40마일이므로 처음 거리의 1/5의 상태가 되며 이를 통해 공비가 0.2가 됨을 알 수 있다. 무한급수의 공비의 절댓값이 1미만일 때 초항/(1-공비)=무한급수의 합이라는 공식을 이용하면 1.6시간/(1-0.2)=2시간 즉 시속75마일×2시간=150마일 또는 120마일/(1-0.2)=150마일이다. 또한 짝수 번째 항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고려하면 공비는 -0.2가 되는데 무한급수의 합은 총 이동거리가 아닌 파리의 현재 위치로 계산할 수 있다. 120마일/(1-(-0.2))= 100마일이 되며 정확히 중간 지점이 되므로 위의 과정이 맞음을 증명한다.뭔소리여[17] 오늘날 SCI-E로 분류되는 저널에서 1955년 나온 논문을 모두 모으면 83,726편이고, 그중 수학 및 응용 분야의 논문은 1,153편이다. 당시에는 SCI-E라는 개념은 당연히 없었지만, 그 정도 수준의 논문들 중 1년에 28%씩 읽는 것은 폰 노이만 같은 대학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95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약 50,000종류의 과학 저널이 있었으며 당시 모든 논문의 총량은 100~300만 편으로 짐작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수학 논문은 200만 편 중 28,000편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28,000편의 28%는 약 7,840편이다. 참고로 2015년에는 약 60,000편의 SCI-E급 수학 논문이 발표되었다.[18] 만약 인간을 초월한 지능을 가진 악마가 자신을 숨기고 인간을 연기한다면, 오히려 (지적으로)뭔가 어설픈 약점을 만들어서 보다 인간미 넘치게 보이게 만들었겠지만, 폰노이만은 인간미가 없다고 할정도로 극도의 지능을 뽐냈기 때문이다.[19] One conversation centered on the ever accelerating progress of technology and changes in the mode of human life, which gives the appearance of approaching some essential singularity in the history of the race beyond which human affairs, as we know them, could not continue.[20] 모두 어디 있지? 50쪽. Stephen Webb 저. 한승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