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mitet Obywatelski „Solidarność” | |
약칭 | Solidarność |
한글 명칭 |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 |
창당일 | 1988년 12월 18일 |
해산일 | 1991년 |
당수 | 브로니스와프 게레메크 |
당사 | 그단스크 |
이념 | 빅 텐트 자유민주주의 반공주의 |
종교 | 가톨릭 |
당색 | 오렌지색 (#ff9900, Oran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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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 9월 17일 그단스크의 조선소 노동자였던 레흐 바웬사 주도로 창립된 폴란드 인민 공화국 사상 최초의 비공산계열 '자유노조'. 1980년대초 폴란드의 자유화운동을 이끌면서 공산정권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정부에 저항운동을 펼친 결과 결국 폴란드에 바르샤바 조약 기구 소속 국가 중 처음으로 민주정부를 탄생시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2. 한국어 번역 문제: 폴란드 자유노조
창립 당시 냉전시대라 대한민국에서는 이 단체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돼 있었다. 공산권 여행금지가 풀린 게 1988 서울 올림픽 때부터이다. 1980년 당시에는 러시아어조차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 받은 사람이 적어서 러시아 인명들조차 영어식으로 쓰던 시대[1][2]인데, 폴란드어와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그 결과, 한국에는 이 단체를 폴란드 현지 기사가 아닌, 제3국인 영어권 기사들을, 그것도 일본어를 통해 3중역해서 들어온 단어인 폴란드 자유노조라고 불렀다. 이 단체가 세워졌을 때 마침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었던 터라
3.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 폴란드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공산정권에 대항한 쟁의들이 빈발했다.1956년 포즈난 항쟁 이후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어느 정도 자유화가 이루어졌으나 1970년의 권위주의적 통치 및 경제난에 따른 생필품 가격의 기습인상으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되어 고무우카가 물러나고 에드바르트 기에레크(Edward Gierek)가 집권하게 된다. 기에레크의 외채 도입을 통한 성장으로 한동안 폴란드의 경제가 나아지는 듯 하였으나 오일 쇼크 석유파동의 여파로 70년대말에 들어서면서 폴란드의 경제상황은 다시 최악의 상황으로 몰린다. 이 경제난으로 인해서 폴란드 내부, 특히 노동자의 불만은 더욱 더 높아졌으나 공산권의 노동조합은 사실상 당의 어용단체에 불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대변할 수 없다는 점에 착안, 1979년 말부터 폴란드 통일노동당의 통제에 놓여있지 않은 독립된 노조를 창립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한다.
4. 설립
1980년 8월 7일 이러한 움직임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그단스크의 여공 안나 발렌티노비치(Anna Walentynowicz)[3] 가 독립노조 설립 사실이 정부에 의해 발각돼 해고당하면서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여기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대규모 노동 쟁의가 발생한다. 투쟁이 격화되던 8월 31일 마침내 단결, 연대를 뜻하는 솔리다르노시치라는 구호가 시위대 사이에서 등장하면서 이 단어는 곧 폴란드 노동 투쟁의 상징이 된다. 여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쟁의를 단결시켜 조직화된 단체로 결성시킨 자가 바로 레흐 바웬사였으며 바웬사는 단순 노동 투쟁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가톨릭 교회와 연계해 비폭력 반 소련 운동으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움직임이 대규모로 확산되어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1980년 9월 기에레크가 사임하고 들어선 새 공산당 지도부는 솔리다르노시치를 인정하고 11월 10일 이를 공식적으로 등록시킨다.5. 탄압
그러나 이러한 자유화 움직임이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폴란드가 공산권에서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를 위시한 소련 정부는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1981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폴란드 공산당 내 온건파들이 대거 파면되고 통일노동당 서기장의 자리에 강경파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임명돼서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레흐 바웬사를 포함한 솔리다르노시치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된다. 계엄령은 1983년까지 지속되었으며 레흐 바웬사는 가택연금 와중에도 비밀리에 서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폴란드 내부의 상황을 알린다. 같은해 바웬사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6. 재기
1989년 동유럽에 자유화 바람이 불면서 야루젤스키 정권도 솔리다르노시치를 계속 탄압할 수 없었고 마침내 솔리다르노시치와의 원탁회의를 통해 민주화 논의를 시작해야만 했다. 자세한 내용은 1989년 동유럽 혁명 참조. 이를 통해 솔리다르노시치가 상원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서 폴란드는 동구권 최초로 비공산계열정권을 탄생시킨다.7. 몰락
공산주의 붕괴이후 경제난 속에 자유노조는 인기가 하락해서 1993년 총선과 1995년 대선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말았다. 공산정권 시절에 자유노조가 내건 경제노선은 사민주의에 가까웠지만, 당시 바웬사 정부도 외채문제에 대해 딱히 뾰족한 수가 없다보니 결국 정리해고와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였고, 결국 복지정책은 감축되고 실업률은 급상승하며,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던것. 나중에서야 이 정책(충격요법)이 폴란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며 찬양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4] 당시를 살았던 노동자들 입장에서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 때문에 자유노조의 지지층들인 노동자들이 이럴거면 뭐하려고 투쟁했냐며 실망하고 등을 돌린것.폴란드는 이원집정부제라서 총선과 대선이 둘 다 중요하다. 1993년 총선에서 폴란드 통일노동당(폴란드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Socjaldemokracja Rzeczypospolitej Polskiej)이 정권을 잡았고, 1995년 대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레흐 바웬사의 재선 도전을 지원했지만 바웬사가 경제를 말아먹어서 결국 사회민주당이 대권까지 잡게 된다.
1993년 총선-1995년 대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선거의 패배로 큰 충격을 받아서, 연대노조 내부에서 내분을 빚던 바웬사 계파와 카친스키 계파는 공산당 놈들[5]빨간 러시아놈들이 우리를 털어먹던 식민지 기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혐오한다. 당장 현재 폴란드를 가리키는 폴란드 제3공화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폴란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폴란드의 반러 감정은 무시무시하다. 이 반러감정은 물론 소련의 노골적 간섭의 탓이 크지만 그 뿌리를 타고가면 17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자유노조 인사들이 충격을 받은 것. 이후 사회민주당은 부패 스캔들로 자멸(....)하고 민주좌파연합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인민공화국 시절 공산당(통일노동당)의 후신이라는 점 때문에 군소정당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이 다시 정권을 잡는 꼴은 못 본다며 1997년 총선을 앞두고 극적으로 화해한다. 1997년 총선에서 연대노조는 33.1%를 득표, 201석을 차지한 다음 폴란드 자유연합과 폴란드 인민당 등을 합쳐 연립정부를 구성, 의석 수의 58%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정권을 다시 잡은 연대노조 인사들은 또다시 계파 갈등을 벌인다. 계파 갈등을 버티지 못한 인사들은 1998년부터 탈당을 준비했고 가장 먼저 레흐 카친스키 등 강경 우파가 1999년 5월 먼저 자유노조를 탈퇴, 2000년 초반 법과 정의당을 세운다. 이후 레흐 바웬사 등 리버럴 성향 우파가 2000년 4월 연대에서 탈퇴하여 2000년 하반기 시민 연단을 설립했다. 연대노조의 운명은 여기서 끝장났다. 연대노조의 핵심인 바웬사와 카친스키가 나가버렸는데 제대로 유지될 턱이 있나. 2000년 대선, 2001년 총선에서 연대노조는 궤멸적으로 참패한다.
2001년 총선 참패 이후 잔류 연대노조 인사 대부분은 시민연단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2003년 연대노조를 해산하고 잔여 인원과 재산을 시민 연단에 이전하게 된다. 결국 폴란드 정계에서 폴란드 민주화를 이끌었던 연대노조의 직접 후신은 시민 연단으로 여겨진다.
2005년에 사회민주당이 부패 스캔들로 몰락하고 그 자리를 PO와 PIS가 메우면서 보수양당제로 전환되었는데 이 두 정당의 출신기반이 연대노조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은 적지 않다. 그렇지만 둘 다 본래 연대노조의 성향과는 좀 동 떨어지는 편이라 할 수 있다.[6] PO는 PIS보다는 성향 면에서 리버럴하지만 경제자유주의 성향이 있는데다가, PIS는 복지정당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 배타적인 성향이 강해져서 그렇다.
8. 의의
구호와 투쟁 자체는 폴란드, 나아가 동유럽의 민주화를 상징하며 지금도 폴란드 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수도 바르샤바의 대통령궁 앞에는 솔리다르노시치의 엠블럼이 붙어있다.9. 선거이력
9.1. 대통령 선거
<rowcolor=#fff> 선거 | 후보 | 1차 득표수(득표율) | 2차 득표수(득표율) | 비고 |
1990년 | 레흐 바웬사 | 6,569,889표(39.96%) | 10,622,696(74.25%) | 당선 |
9.2. 세임 선거
<rowcolor=#fff> 선거 | 결과 | 비고 |
1989년 | 161석/460석 | 원내 제2당 |
9.3. 상원 선거
<rowcolor=#fff> 연도 | 결과 | 비고 |
1989년 | 99석/100석 | 원내 제1당 |
10. 대중 매체에서
10.1. 게임
- 보드게임 황혼의 투쟁에서 후기 냉전 미국 이벤트 카드로 등장한다. 영문판 명칭은 "Solidarity" 이지만 한국판 번역명칭은 "폴란드 자유노조" 로, 널리 알려진 번역어를 사용했다. 이벤트 발동 효과는 심플하게 폴란드에 미국의 영향력을 3 배치하는 것이다. 이벤트 한번으로 영향력을 3이나 집어넣는 아주 강력한 카드이지만, 대신 선결조건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출 사건이 이미 발동된 상태일 것을 요구한다. 아마도 폴란드의 반공/반소주의 운동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가진 강력한 상징성을 감안하여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의 교황 선출이 폴란드 내의 반공/반소주의 세력 결집의 계기와 구심점이 된 것을 표현하는 이벤트 효과일 것이다. 하지만 선결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건 발동 없이 사용가능한 카드이므로, 소련 플레이어가 자유노조 카드를 쥐게 될 경우 교황 선출 전에 사용해버리는 것으로 공짜 2op를 받을 수 있어 쓰기 쉽지 않은 카드. 그러나 제대로 발동만 가능하면 선결조건인 교황 선출 카드가 가진 <폴란드에서 소련 영향력 -2/미국 영향력 +1>에 이 카드의 <폴란드에서 미국 영향력 +3>까지 합쳐 <폴란드에서 소련 영향력 -2/미국 영향력 +4>, 결과적으로 안정도 3인 폴란드에 미국 영향력을 6 쏟아붇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므로 소련의 추가 영향력 투입이 없다면 폴란드의 통제권이 거의 확실하게 미국으로 넘어갈 정도의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특히 냉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면서도 세력 구도가 쉽게 변하지 않는 유럽에서 전장국가인 폴란드를 흔들어버릴 수 있기에 후기 냉전에서 소련 플레이어를 골치아프게 만드는 카드 중 하나이다.
[1] 이 당시엔 러시아어 등 공산권 언어를 배운다고 하면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감시 받던 시대였다. 그나마 배우는 사람들도 일본어, 영어교재로 배우는 탓에 제대로 알질 못했다.[2] 재미있는 점은 이게 폴란드나 러시아처럼 제2세계였던 곳도 마찬가지라, 오늘날까지 제2세계 출신 국가들은 발트 3국처럼 탈러시아 정책에 적극적인 곳이 아니라면 대체로 '아주 기초적인 영어'조차 못 알아듣는 편.[3] 1929 ~ 2010, 당시 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었으며 공산정권 붕괴 이후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지속했다. 2010년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 당시 정부 고위인사들과 함께 카틴 학살 추모단에 합류했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별세했다.[4] 물론 폴란드의 인구학자들은 이 정책의 후유증으로 출산율이 급속히 떨어지고 실업난으로 해외로의 대량 인구유출을 불러일으켰다고 깐다.[5]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시절을[6] 사실 이건 1990년대 폴란드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연대노조가 우경화된 것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