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Flavius Antiochianus | |
출생 | 미상,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 |
사망 | 222년 3월,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신분 | 에퀴테스 → 노부스 호모 → 귀족 |
가족 |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아들) |
경력 | 레가투스, 총독, 집정관, 근위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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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 황제의 해,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군인,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장군, 집정관, 근위대장.엘라가발루스 황제의 폭정을 종식시키고자 222년 3월 11일 프라이토리아니가 봉기하자, 동료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과 함께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히에로클레스 등을 붙잡아 죽이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옹립했다. 하지만 황궁 정원에서 있던 수색 중 한 명령이 꼬투리잡혀, 율리아 마이사, 울피아누스의 명으로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미상이나, 개인이름은 티투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 출신 에퀴테스로, 조상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혹은, 셀레우코스 제국 아래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그리스 사람의 후손인, 그리스 혈통 로마인이다. 그의 이름처럼 일가는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로마시민권을 받았다. 아내 역시 신원은 불분명하나, 같은 기사계급이었다.
로마군에 일찍이 입대해, 능력을 바탕으로 백인대장까지 지내다가,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 로마군 하급 장교들에게 원로원 문호가 개방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노부스 호모)'의 전형이다.
그는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기용된 직업 군인 출신 신참자로, 세베루스 황제 치세 말이던 211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보조군 사령관을 지냈고, 이후 오늘날 북아프리카 서쪽의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로 건너가 이곳 주둔 레가투스로 여러 군공을 세웠다. 게르마니아, 포에니쿠스 등 복무지 모두에서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덕장, 용장이라는 평을 두루 들었다. 따라서 기행, 실정, 폭정, 군부의 신뢰 하락 속에 위기에 빠진 엘라가발루스 정부는 그를 주목했다.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군대의 신망을 얻는 그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마우레타니아에 있던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두 시리아인 아우구스타는 안티오키아누스를 221년 집정관에 추천했고, 그의 임기가 종료되자마자,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면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까지 차지해 권세를 누린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의 동료 근위대장으로 지명했다.
이렇게 안티오키아누스는 엘라가발루스 아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끄는 근위대장이 됐다. 천상군인으로 세베루스 왕조에게 큰 은혜를 입어 귀족까지 신분이 오른 그는 충직했는데,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이 점을 파고 들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암살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코마존과 함께 알렉산데르를 지지했고, 황제를 보호하는 근위대에서 이런 식으로 선례를 만드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따라서 그는 이를 황제 모자에게 계속 명받자, 꺼림직하게 여겨 그 명을 받들길 망설였다가, 코마존과 함께 이 사실을 부하에게 알려, 222년 3월 황제 모자를 로마 근교의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오게 하여, 삼자대면 속에서 프라이토리아니 입장을 밝히겠다고 통보했다.
이 통보는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전체에서 황제 모자를 불신임한다는 뜻이었지만,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이른 아침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데리고, 당당하게 병영으로 찾아가, 그 자리에서 알렉산데르를 죽여달라고 하고, 자신을 지지하면서, 카라칼라의 유일한 아들임을 다시 한번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병사 전체는 일제히 이렇게 외쳤고, 곧 정변이 시작됐다.
"알렉산데르!"
안티오키아누스는 코마존과 함께 군을 나눠, 시종들의 보호와 희생 속에서 팔라티노 황궁으로 마차를 타고 도주한 황제 모자를 추격했다. 이후,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의 진두지휘 속에서 프라이토라이니는 나무궤짝에 숨어 있던(또는 황궁의 구석진 화장실에 몸을 숨긴)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엘라가발루스를 찾아내, 이들을 조리돌림 후 죽였다. 이후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는 이 사실을 원로원을 소집한 자리에서 보고했고, 곧 로마 전체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로, 엘라가발루스의 외할머니이며,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어머니인 율리아 마이사는 갓 근위대장에 취임하게 된 울피아누스의 이름을 빌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엘라가발루스의 협력자, 간신으로 몰아 처형했다.
위서로 유명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중 222년 정규 집정관이 되어 율리아 마이사를 제어하면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첫 재위년도를 도와준 마리우스 막시무스 기록을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안티오키아누스는 엘라가발루스를 죽이려는 프라이토라이니 병사들에게 엘라가발루스를 변호했고, 스페스 베투스 정원에서 수색하던 병사들에게 등장해 황제에 대한 맹세를 상기시키면서 그를 죽이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익명의 고발자들의 주장으로 고발당해, 그가 엘라가발루스 몰락 직후 어이없게 살해됐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어 언급했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에게는 동명이인의 아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가 있다. 아들 안티오키아누스는 엘라가발루스에게 아내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빼앗긴 뒤, 재판없이 누명을 쓰고 반역죄로 처형된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딸 폼포니아 움미디아와 결혼했다. 그는 군인황제시대의 혼란 내내 후대 황제들의 통치 기간 동안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