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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5:36:58

플로지스톤 가설

1. 개요2. 역사
2.1. 한계와 산소설의 등장2.2. 수정된 관점과 폐기 과정
3. 각종 매체에서의 플로지스톤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

플로지스톤 가설 또는 플로기스톤 가설(phlogiston theory)[1]18세기 초 게오르크 에른스트 슈탈(Georg Ernst Stahl, 1660~1734) 등의 학자들이 연소 반응이 일어나는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가상의 물질에 대한 가설이다. 18세기 중, 후반까지 유럽 과학계에서 유력하게 여겨졌으나, 1780년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발표한 산소설에 의해 논파되었다.

2. 역사

17세기 후반까지 인류가 발견한 과학적 성과는 '공기가 여러 성분으로 구성되었으며, 연소 현상과 생물의 호흡 현상이 공기의 특정한 동일 성분(이후 산소로 밝혀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들이 갓 드러난 시기였다. 당시 독일연금술사인 베허(J. J. Becher)는 아리스토텔레스4원소설을 수정하여 자신만의 원소 이론을 정립하였다. 베허의 제자인 슈탈은 스승의 연구결과를 물려받아 연구하였으며, 1703년 그 중 한 원소가 물질이 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원소라고 발표하고 그리스어 '플록스(phlóx, 타다)'에서 이름을 따 '플로지스톤(플로기스톤)'이라 이름지었다.
플로지스톤은 모든 타는(가연성) 물질에 들어있는 입자로, 물질이 연소할 때 빠져나간다. 연소 후 물질의 질량이 감소하는 것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플로지스톤이 모두 빠져나가면 연소 과정이 끝나며, 다시 연소하지 않는다.
파일:external/larvalsubjects.files.wordpress.com/phlogiston_large_01.jpg
플로지스톤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 기구.

당시에는 공기의 무게를 잴 수 없었으므로, 연소 과정이 산소와의 결합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재의 무게가 줄어들거나 금속이 성질을 잃어버리고 부서지는 것을 설명하는 이 이론은 직관성이 있었다.[2] 그 이후 1780년대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플로지스톤 가설은 정식 이론으로 인정받았다.

2.1. 한계와 산소설의 등장

플로지스톤 가설은 발표 직후 많은 과학자들에게 지지받았으나, 동시에 한계를 지적받았다. 플로지스톤 가설에 따라 나무나 종이 등이 타고난 후 재가 되면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므로 질량이 감소한다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금속이 타서 금속재가 될 경우에는 오히려 질량이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3]

이에 플로지스톤 가설을 보완하기 위한 추가 가설이 제시되기도 했는데, 일부 소수 학자는 플로지스톤이 '음의 질량을 가진다'라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 한편 다수의 지지파들, 가설을 발표한 슈탈 본인이나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 ~ 1804) 등의 학자는 플로지스톤이 실제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원리'에 가깝다는 견해를 보였으며, 따라서 질량 변화는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프리스틀리의 실험과정을 되돌아보면 그가 조금만 신중했다면 학설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프리스틸리는 1774년 우선 산화 수은을 가열해서 산소를 얻어냈다. 그러면 수은 금속재는 플로지스톤을 흡수한 것이 된다. 즉, 새로 얻은 공기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에서 수은을 연소시키면 플로지스톤이 다시 수은에서 빠져나가 공기가 돌아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호흡이나 연소가 불가능한) '열화된 공기(Vitiate air, 질소)'를 발견하였고, 탄산수를 발견했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요 신학자요 정치사상가였다. 프리스틀리는 1781년 '불꽃 공기(수소)'와 '불 공기(산소)'의 합성으로 을 생성하는데도 성공하였으나 역시 이것도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산소)'와 '플로지스톤과 물의 결합(수소)'가 만나 공기는 플로지스톤을 받고, 물은 물로 남는다는 복잡한 설명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지스톤 가설은 반박되기 직전까지 그 직관성 때문에 널리 지지되었다. 가설을 깨뜨린 라부아지에조차도 1770년대까지는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을 정도였다.[4] 그가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를 '산성을 만드는 공기'라는 뜻의 '산소(oxygen)'라고 부르게 된 것은 비금속 물질과 반응시켜 을 얻어낸 실험 이후의 일이다.[5]

라부아지에는 1783년에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제시하면서 질량 분석의 시대를 열었다. 이것은 그가 파리 과학아카데미에서 라플라스수학자, 물리학자와의 친분이 있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 해 연소에 필요한 것은 플로지스톤이 아니라 산소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내면서, 플로지스톤은 라부아지에의 산소설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789년 라부아지에는 <화학원론>을 펴내며 이 학문을 변하는 학문, 즉 chimie(시미)라고 정의하면서 새로운 과학분야인 화학이 정립되게 되었다.

단,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나온 후에도 플로지스톤 가설이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나이든 과학자들만 플로지스톤 가설을 고집하던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라부아지에의 이론으로 교육받은 한 젊은 과학자들이 플로지스톤 가설으로 전향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플로지스톤 가설이나 라부아지에의 이론이나 일장일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2.2. 수정된 관점과 폐기 과정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플로지스톤 가설을 고수한 사람들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어 보이지만, 그 당시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리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6] 암흑물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러한 Ad Hoc 가설은 과학적 방법론이 충분히 발달한 현대에도 적용되고 있다. 딱 봐도 인지부조화 같지만 이는 딱히 과학자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기존 가설을 폐기하면 일어나는 모순이 훨씬 많기 때문에 기존 가설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며 그럴듯한 설명을 찾기 때문이다. 관측이나 실험이 계속되며 이러한 모순이 쌓여 가다가 기존 가설을 수정하는 단계에 이르면 패러다임 전환 및 과학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플로지스톤 설은 산소의 존재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속적인 실험 결과에 의해 수정되었고, 암흑물질 가설은 중력 법칙이나 관측치가 잘못되었다는 근거를 찾으면 그때 수정될 것이다. 성급하게 기존 이론을 부정하는 개념을 새로 만드는 것은 반대로 그 개념이 틀렸을 확률도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1. 음의 질량? 너무 억지 주장 아닌가?
    일부 플로지스톤 가설가들은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면서 오히려 질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두고 플로지스톤이 음의 질량을 가진다고 주장했고, 이는 맹목적인 독단주의, 과학의 비판 정신을 결여한 Ad Hoc의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플로지스톤 가설가들은 플로지스톤이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질량의 변화는 플로지스톤과 별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보다는 미처 고려하지 못한 다른 요소 때문에 질량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른 요소를 상정해 반증을 회피하는 것도 Ad Hoc의 사례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론과 잘 맞지 않는 실험 결과를 발견했을 때, 바로 이론을 폐기하기보다는 실험에 결함이 있었는지, 이론을 조금만 수정하면 실험 결과를 잘 설명할 수 있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다. 이론에 반하는 실험 결과가 발견되자마자 이론을 폐기해버리면 어떤 이론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최근에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는 측정 결과가 나왔을 때, 과학자들이 상대성 이론이 틀려서가 아니라 측정이 잘못되어서 나온 결과라고 추정했던 일을 생각해보자. 이 일을 두고 아무도 비합리적이라고 하지 않았다.
  2. 비물질적인 원리? 너무 비과학적인 개념 아닌가?
    물론 플로지스톤이 "비물질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질량과는 별 상관 없다는 주장이 비과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화학 물질의 성질을 원리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플로지스톤 가설과 충돌하는 결과가 나오니까 부랴부랴 '플로지스톤은 사실 비물질적인 원리라서 상관 없어!'라면서 반증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플로지스톤 가설은 처음 나올 때부터 플로지스톤을 비물질적인 원리로 상정했다.
    게다가 라부아지에도 플로지스톤은 아니지만 다른 비물질적인 원리를 상정했다. 바로 '칼로릭'[7]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온도를 칼로릭의 함유량이라고 보았다. 즉, 칼로릭을 많이 가지고 있는 물체는 뜨겁고 적게 가지고 있는 물체는 차갑다는 것이다. 당연히 현대 과학에 비추어 보면 완전히 틀린 주장이다.[8] 플로지스톤 가설이 비물질적인 원리를 상정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라부아지에의 이론도 똑같은 이유로 비과학적이라고 해야 한다.
  3. 어쨌든 플로지스톤 가설은 완전히 틀린 것 아닌가?
    두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1) 정말로 플로지스톤 가설이 완전히 틀린 이론이었나? 2) 그럼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옳은 이론이었나? 대답은 둘 다 '아니오'이다.
  4. 플로지스톤 가설은 현대의 화학 이론과 의외로 상당한 정도로 대응시킬 수 있다. 현대 화학의 산화/반환 반응과 탈플로지스톤화/플로지스톤화 반응은 딱 맞아 떨어진다. 즉, 플로지스톤 가설은 여러 다양한 산화 반응들과 다양한 환원 반응들을 올바르게 분류해냈고, 이 산화 반응과 환원 반응이 방향만 다르다는 점까지 포착해낸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산화 반응과 환원 반응의 분류가 당연하게 생각되고, 산화/환원 반응이 서로 반대 방향의 반응이라는 점도 당연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점을 알아낸 것이 플로지스톤 가설이었다.
  5. 라부아지에의 이론도 상당히 많은 결함이 있었다. 라부아지에의 가장 큰 업적으로 뽑히는 것은 산소의 발견(?)인데,[9] 라부아지에는 산소에 대해 많은 것을 오해했다. 단적으로 '산소'(oxygen)이라는 단어는 '산을 만드는 원소'라는 뜻인데, 산소가 아예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산도 많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산인 염산(HCl), 청산가리라고 할때 그 청산(HCN) 등...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라부아지에도 칼로릭이라는 비물질적인 원리를 상정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이론을 내놓을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산소나 칼로릭은 라부아지에의 이론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들이었다는 것이다. 중심 개념이 틀린 이론을 옳은 이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플로지스톤을 고수한 사람들은 옳은 이론을 놔두고 틀린 이론을 고집했던 비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기보다는, 비슷한 정도로 틀린 이론들 중 자기에게 익숙한 이론에 머물렀던 것일 뿐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라부아지에의 산소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플로지스톤 가설을 고집한 과학자들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었다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플로지스톤 가설이 명백히 허황되어 보이고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옳아 보이는 것은 우리가 현대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충분히 합리적으로 행동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장하석과 같은 과학철학자는 근대화학이 발전도상에서 플로지스톤을 배척한 뒤, 전기화학에 이르러 이론적 요청에 의해 '전자'[10]라는 이름으로 이를 다시 도입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 각종 매체에서의 플로지스톤

마장기신 2편부터 등장한 에란 제노사키스의 기체 제르보이드의 무기 중에 플로기스톤 미사일이 있다. 사이바스터의 칼로릭 미사일과 유사한 에너지 사격무기. 라 기아스 세계관 자체가 에테르부터 정령, 영구기관까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니 오히려 자연스러운 명칭이다.

팀 포트리스 2에서는 파이로의 '플로지스톤 활성화 장치'라는 주무기에서 등장한다. 기타 화염방사기들과는 달리 직접 불이 뿜어져나가지 않고 주황색 광선을 뿜어내는데 이 광선에 맞아 플로지스톤이 활성화되어 연소된다는 설정.

연금술을 소재로 하는 아틀리에 시리즈에서는 초반부터 구할 수 있는 기본 아이템으로 자주 등장한다. 현실에서의 플로지스톤설에 걸맞게 폭탄이나 불꽃 등 뜨거운 것을 조합하는 재료로 쓰인다. 현실에서는 실제로 찾을래도 찾을 수 없던 가공의 원소였지만 여기서는 마을 대장간에서 50원 가량에 값싸게 살 수 있다.

4. 여담

5. 관련 문서


[1] '플로지스톤'은 영어식 발음. 이 말을 만든 독일어 발음으로는 '플로기스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주로 전자로 불린다.[2] 당시엔 금속의 산화는 (calx)가 되는 것, 즉 하소(calcination)라고 불렀다.[3] 산소가 금속과 결합하여 발생한다.[4] 역설적이게도 증명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결정적인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5] 현재는 이 현상은 수소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며, 덕분에 산화와 연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6] 이 항목의 내용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장하석 교수의 저서 <Is Water H2O?>를 주로 참고하여 작성하였다.[7] 오늘날 이야기하는 '칼로리'와는 다르다. 열소(熱素)라고 부르기도 한다.[8] 현대 과학에 따르면 열이란 물체를 이루고 있는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이다.[9] 굳이 '발견'이라는 말에 물음표를 친 이유는 누가 산소의 발견자라고 해야 하는지가 상당히 애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가 '산소'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 이전에 프리스틀리가 상당히 많은 사실을 밝혀냈었다. 게다가 최초로 산소를 분리해낸 것은 프리스틀리도 아니고 쉴레였다. 최초로 분리해낸 사람(쉴레), 많은 성질을 연구하고 최초로 학계에 발표한 사람(프리스틀리), 현대 이론과 유사하게 성질을 규명하고 현대에도 통용되는 이름 붙인 사람(라부아지에)이 각각 다르니 누구 하나를 꼭 집어서 발견자라고 하기가 어렵다.[10] 아닌게 아니라 산화-환원 반응에서 전자의 이동은 플로지스톤 가설이 설명하는 바와 의외로 유사한 점이 있다. 전자는 산화되는 물질로부터 이탈하여 '탈-플로지스톤 공기'(=산소, 산화제)로 이동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