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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논란 배경3. 인품 관련 논란
3.1. 조카들이 주장한 난설헌의 오빠-올케 이간질 (1618년)3.2. 홍대용의 인품 언급 (1765년)3.3. 정만조의 인품 언급 (20세기 초)3.4. 남편 김성립 관련 논란 (21세기)
4. 표절 의혹 관련 논란4.1. 중국에서의 표절 의혹
5. 작품별 논란4.1.1. 유여시의 표절 제기 (1652년)
4.2. 조선에서의 표절 의혹4.2.1. 김시양의 표절 제기 (1612년)4.2.2. 이수광의 표절 제기 (1614년)4.2.3. 신흠의 표절 제기 (1600년대 초)4.2.4. 홍만종의 표절 제기 (1652년)4.2.5. 김만중의 표절 제기 (1687년)4.2.6. 이덕무의 표절 제기 (1795년)4.2.7. 이규경의 표절 제기 (1800년대 초)4.2.8. 한치윤의 표절 제기 (1823년)
4.3. 대한민국에서의 표절 의혹[clearfix]
1. 개요
조선의 시인이자 화가인 허난설헌의 사후 벌어진 논란을 다루는 문서이다.2. 논란 배경
"부인의 성은 허씨요, 스스로 난설헌이라 불렀다. 균의 셋째 누이로 저작랑 김성립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녀가 없다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매우 많은 글을 지었지만, 유언에 따라 불태워 버렸다.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으나 모두 동생 균이 베껴서 적어 놓은 것에서 나왔다. 그것이 오래되었고 더구나 망실되거나 화재를 입을까 걱정이 되어, 이에 나무에 새겨 널리 전하는 바이다. 만력 기원 36년(1608년) 맹하(4월) 상완(상순) 동생 허균 단보가 피향당에서 쓰다."
ㅡ 1608년 허균이 쓴 《난설헌집》 평 [1]
ㅡ 1608년 허균이 쓴 《난설헌집》 평 [1]
1563년 초당 허엽과 강릉 김씨의 딸 허난설헌 혹은 허초희는 조선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허엽 가옥에서 태어났다.
허난설헌은 문장에 재능을 보여서 "허씨 5문장" 중 한명으로 유명했으며, 시와 그림을 자주 그렸다.
1577년 안동 김씨의 자제 김성립과 혼인했다. 그러나 허균의 기록과 김성립의 묘비명 등 당시 기록으로 보았을 때 허난설헌은 시어머니와 남편 김성립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1589년 5월 3일(음력 1589년 3월 19일), 허균의 동복 누나 허난설헌이 장남 김희윤과 장녀 김씨를 여의고 요절했다. 1608년 허균이 직접 쓴 <난설헌집>의 평에 의하면 누나 허난설헌이 "자녀가 없다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매우 많은 글을 지었지만, (누나의) 유언에 따라 불태워 버렸다.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으나 모두 동생 균이 베껴서 적어 놓은 것에서 나왔다. 그것이 오래되었고 더구나 망실되거나 화재를 입을까 걱정이 되어, 이에 나무에 새겨 널리 전하는 바이다."라고 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의 오명제에게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리게 했다.
이후 1606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허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은 일본에도 200년 후 전해졌다. 허균 스스로도 누이의 유고를 모아 조선 최초의 여성문집인 <난설헌집>을 1608년에 출간했다. 이렇게 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선 난설헌의 시는 조선과 중국에서 대대적인 히트를 치게 된다.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열조시집>) "(당나라 대표시인)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고금야사>)는 극찬까지 이어졌다. 중국의 편집자들이 난설헌의 시를 앞다퉈 실었으니 가히 난설헌 열풍이라고 할 만 했다. 심지어 훗날 정조마저도 이를 읽고 감탄했다고 한다.
다만 이후 조선에서는 허균의 역모 때문에 애꿎은 허난설헌의 시집도 불태워졌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서 동래로 역수입 되는 얄궂은 상황이었다. 중국과 일본 찍고, 조선에서 다시 출판된 것이 1692년. 허난설헌이 죽은지 103년이나 지난 이후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선에선 정작 무시당했다고 일반에 알려진 바 와는 달리 조선에서도 허난설헌은 대단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애초에 뛰어난 시인이라고 칭송받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내려오는 표절 논란이 일어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표절 논란에는 동생 허균 본인의 문제도 있었다. 본문에 나오듯이 허균은 난설헌의 글을 모아서 출판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허균이 직접 '창작'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허균이 평범한 문인이어도 수상쩍은데, 하필 허균은 실록에서도 '문재가 뛰어나 붓만 들면 수천 마디의 말을 써내려간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더더욱 혐의가 강하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의 여동생, 허균(許筠)의 누나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견한잡록>, 심수경
근세에 와서 규수(閨秀)로는 허씨(許氏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로, 허엽(許曄)의 딸)가 제일 뛰어났고, 충의(忠儀) 이봉(李逢)의 서녀도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내 친구 조백옥(趙伯玉 원(瑗))이 데리고 살았다.[2]
<문소만록> 윤국형
숙종 4년에 칙사 시위(侍衛) 갈(噶) 등이 우리나라의 문적을 보여 달라고 하여 석주(石洲) 권필(權韠),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하곡(荷谷) 허봉(許篈),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김성립(金誠立)의 처 난설헌(蘭雪軒) 허씨(許氏),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의 문집 및 정기가(正氣歌), 《계원필경(桂苑筆耕)》, 《사략(史略)》, 《고문진보(古文眞寶)》 및 근대 묵각법첩(墨刻法帖), 우리나라의 과체(科體)인 표(表)ㆍ부(賦)ㆍ시(詩)ㆍ논(論) 12편을 사 가지고 갔다. 또 각 체문(體文)의 대자(大字) 진서(眞書)와 초서(草書)를 구하자, 제술관 14원(員)과 글씨 잘 쓰는 사람 8원을 차출하여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임하필기> 제17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유원
허경번(許景樊)은 자가 난설(蘭雪)이고 조선 사람이다. 그의 오빠인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은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8세 때 광한궁옥루상량문(廣寒宮玉樓上樑文)을 지었는바, 재주와 명성이 두 오라비보다 위에 있었다. 진사(進士) 김성립(金成立)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김성립이 국난(國難)에 죽자, 허경번은 마침내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다. 금릉(金陵)의 주 장원(朱壯元)이 동국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 그의 문집을 구해 돌아와 드디어 중국에 널리 전해졌다.
《해동역사》 인물고 허매씨, 한치윤
<견한잡록>, 심수경
근세에 와서 규수(閨秀)로는 허씨(許氏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로, 허엽(許曄)의 딸)가 제일 뛰어났고, 충의(忠儀) 이봉(李逢)의 서녀도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내 친구 조백옥(趙伯玉 원(瑗))이 데리고 살았다.[2]
<문소만록> 윤국형
숙종 4년에 칙사 시위(侍衛) 갈(噶) 등이 우리나라의 문적을 보여 달라고 하여 석주(石洲) 권필(權韠),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하곡(荷谷) 허봉(許篈),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김성립(金誠立)의 처 난설헌(蘭雪軒) 허씨(許氏),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의 문집 및 정기가(正氣歌), 《계원필경(桂苑筆耕)》, 《사략(史略)》, 《고문진보(古文眞寶)》 및 근대 묵각법첩(墨刻法帖), 우리나라의 과체(科體)인 표(表)ㆍ부(賦)ㆍ시(詩)ㆍ논(論) 12편을 사 가지고 갔다. 또 각 체문(體文)의 대자(大字) 진서(眞書)와 초서(草書)를 구하자, 제술관 14원(員)과 글씨 잘 쓰는 사람 8원을 차출하여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임하필기> 제17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유원
허경번(許景樊)은 자가 난설(蘭雪)이고 조선 사람이다. 그의 오빠인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은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8세 때 광한궁옥루상량문(廣寒宮玉樓上樑文)을 지었는바, 재주와 명성이 두 오라비보다 위에 있었다. 진사(進士) 김성립(金成立)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김성립이 국난(國難)에 죽자, 허경번은 마침내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다. 금릉(金陵)의 주 장원(朱壯元)이 동국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 그의 문집을 구해 돌아와 드디어 중국에 널리 전해졌다.
《해동역사》 인물고 허매씨, 한치윤
어쨌거나 난설헌의 시는 워낙 유명했고 중국,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다. 숙종 25년인 1695년에는 이미 20년전에 난설헌집을 가져오라 한적이 있던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직접 "최대한 조선 고금의 시문들을 얻어오되, 다른건 몰라도 동문선과 난설헌집, 그리고 최치원, 김생, 안평대군의 필적은 무조건 가져오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했고, 일본에서도 난설헌집 동래부(東萊府) 중간본이 처음 유출된 후 제발 난설헌시집을 좀 더 보내달라고 사정하다 결국 분다이야(文台屋次郎)에서 아예 직접 판목을 만들어 난설헌시집을 찍어내서 수많은 일본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3. 인품 관련 논란
3.1. 조카들이 주장한 난설헌의 오빠-올케 이간질 (1618년)
조선왕조실록(광해군일기(중초본) 132권, 광해 10년 9월 4일 기축 6번째 기사)에는 허난설헌이 어머니와 오빠인 허봉, 올케인 허봉의 아내 사이를 동생 허균과 함께 이간질하여 조카들과 사이가 나빠졌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역모와 연루되기 싫어서 '저 집안사람들은 패륜아 집안이라 일찍부터 연끊고 살았습니다' 하는 거야 종종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동복형제인 허봉의 자식들이 숙부 허균만이 아니라 역모와 별 관계도 없고 오래전에 죽었던 고모 허난설헌까지 언급했다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 중의 하나다. 그만큼 그녀가 형제들 사이에서도 꽤 강성인 성격이었고 남동생과는 잘 지냈지만 오빠에게 여동생으로서나, 올케에게 시누이로서나 그리 좋은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기록이 될 수도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실제로 허채와 허채의 형 허친을 비롯해 허봉의 아들들은 이 얘기가 사실로 여겨졌는지 광해군 시대에 연좌가 되긴 했지만 곧 연좌에서도 벗어나 양반 신분을 유지한채 살아남았고 비록 중간에 역적 허균의 조카라며 짤리긴 하지만 벼슬살이도 계속 이어갔다.인조실록 8년 10월 26일 기사허봉은 허난설헌과 허균에게 손곡 이달의 가르침을 받도록 도와줄 정도로 동복 동생들과 친한 관계를 유지했고, 1611년 허균이 함열에 있을 때 조카 허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허봉 사후 허채가 "함열 현감 한회일이 허균을 잘대해주지 않는다"고 한성부의 지인들에게 말해서 허균이 고맙긴 한데 너무 지나쳤다고 지적한 것을 보면 허봉의 자식들과 허균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 연끊고 살았다고 보기에는 허봉 사후 편지를 보내는 관계가 그렇게 보이지 않으므로 위의 허난설헌이 허균과 함께 이간질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3.2. 홍대용의 인품 언급 (1765년)
난공 : 귀국의 경번당(景樊堂)은 허봉(許篈)의 누이동생으로 시에 능해서 그 이름이 중국의 시선(詩選)에 실렸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담헌 :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전혀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이생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 人間願別金誠立
저생에서 두목지를 따르고 싶네 / 地下長從杜牧之
이 시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난공 : 아름다운 부인이 못난 남편과 부부가 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ㅡ 《을병연행록》 일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 63권 #
담헌 홍대용이 1765년에서 1766년까지 청나라를 방문한 기록인 《을병연행록》에서 1765년 청나라의 선비 난공 반정균과 한 대화를 언급했다. 기록에 의하면 홍대용은 허난설헌이 시인으로서 재능은 있지만 부인의 본분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인품이 바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후 1795년 이덕무가 《청장관전서》 제63권에서 홍대용이 말한 내용을 인용했다. 담헌 :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전혀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이생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 人間願別金誠立
저생에서 두목지를 따르고 싶네 / 地下長從杜牧之
이 시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난공 : 아름다운 부인이 못난 남편과 부부가 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ㅡ 《을병연행록》 일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 63권 #
현대에는 꼰대 홍대용이 난설헌이 여인네라고 무시한 것으로 인식 되어있으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제 역사상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그렇게 무능하고 나쁜 남자가 아니었다. 허균이 자신의 저서에서 매형을 모욕하는 내용만 알려져서 그렇게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이 김성립의 과거 시험 공부 당시를 회상한 기록 <동국시화휘성>이나 임상원의 <교거쇄편>을 보면 오히려 그가 기생집에 드나들었다는 소문은 누군가 꾸며낸 일이라던가 허난설헌 본인이 남편이 공부하러 가면 재주가 없다고 오히려 헐뜯는 부분들이다. 이런 부분을 가지고 현대 연구자들이 김성립이 기생집을 드나든다고 왜곡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3.3. 정만조의 인품 언급 (20세기 초)
만약 사랑의 시를 짓는다면 반드시 ... 모욕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딸을 기르는 사람들은 엄히 시를 짓지 못하게 해야 한다. 천한 무리들은 듣고 보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창기 가운데나 혹시 시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ㅡ 무정 정만조[출처1]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에 협력한 유림 인물 무정 정만조(鄭萬朝, 1858년 ~ 1936년)는 허난설헌이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를 보고 허난설헌의 인품을 비판했다. ㅡ 무정 정만조[출처1]
3.4. 남편 김성립 관련 논란 (21세기)
21세기 시점 알려진 김성립에 대한 기록은 처남 허균의 사감이 대폭 들어가 있어서 "부부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다." 정도로 걸러 듣는게 좋다. 허난설헌이 못된 시댁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당대 기록에 소스가 있는게 아니라 현대 들어서야 등장하고 계속 이야기가 과장된다. 정작 조선시대 문헌에는 부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정도의 기록만 나오고 심지어 오히려 허난설헌이 남편이 재주가 없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구박을 한 가해자로 나오는 평까지 있다.사실 대부분의 매체에서 그렇듯이 허난설헌 남편인 김성립을 두고 허난설헌을 알아주지 않았고 무능했다고 비판하는데 선조수정실록 14권, 선조 13년 2월 1일 신미 1번째 기사를 보면 처남들과 함께이기는 하지만 실록에 당당히 문사로서 이름을 남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당상관 이하 관리들이 참가하는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일등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글재주가 타고난 허균이 급제가 빨라서 그렇지 28세에 과거급제면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다. 그저 허균 말마따나 과거에 몇 번 떨어졌다고 무능하다고 감히 평가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병과합격이면 임금이 직접 시험관이 되는 전시 최종합격자 33인에 들어간 인물이니 오히려 상당한 엘리트 지식인에 속한다. 과신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재능을 의심하지 않았던 난설헌이나 허균 입장에선 눈에 차지도 않았을진 몰라도 딱히 무시받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 흔히 알려진 것처럼 허난설헌의 불행한 결혼 생활은 남편인 김성립이 그녀의 재능을 시기해서라기 보단 허난설헌이 김성립의 재능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내보낼 정도로 강성이었던 것처럼 김성립도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시국 시위를 대놓고 주동한 인물이기도 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릉과 정릉을 지키려고 하다가 순국할 정도로(1592년 5월 20일) 강단이 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훗날 이조참판으로 추증)
4. 표절 의혹 관련 논란
허난설헌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의 최고 여류시인 중 한명으로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 위명이 대단하였다. 난설헌시집이 출간되자 중국대륙은 열광에 빠졌고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열조시집>, "당나라 대표시인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고금야사> 등의 극찬이 쏟아지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허난설헌의 시를 표절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1612년 김시양은 허난설헌의 시 여덟 구절이 명나라 시인 오세충의 시 《고취(鼓吹)》에 있으므로 표절이 맞다고 주장했고, 1614년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허난설헌의 시 210여수는 2~3편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위작이며, 백옥루상량문 같은 작품들도 모두 위작이다"라고 밝혔다.
1652년에는 명나라의 기녀 출신 시인인 유여시(1616~1664) 역시 표절 논란을 제기하였다. 유여시는 서문에서 "대명의 문사들이 오랑캐 여인의 솜씨에 놀라 표절 여부조차 가리지도 않고 열광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비판한다"고 일갈하며 조목조목 허난설헌의 시들이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표절한 것임을 증명했다. 이에 조선에서도 난리가 나게 된다. 홍만종은 시화총림에서 "허난설헌은 중국인의 글을 산 채로 집어삼켰다"라고 표현했다.
표절에 대한 비판은 이어져 이후 김만중의 <서포만필>, 홍만종의 <시화총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서도 문제제기가 있었으며, 그외 신흠, 김시양, 한치윤 등의 인물도 문제를 제기 하는 등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허난설헌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규원가(閨怨歌)[4] 역시 조선 시대부터 허난설헌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50행 100구로 이뤄진 이 장편 가사는 동시대인인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유사하면서도 노골적인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드러내는데 홍대용은 허균의 첩인 소쌍이 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여전히 허난설헌을 옹호하던 이들은 과거 서거정이 동인시화에서 말했던 "옛 시를 많이 읽으면 마치 자기의 시처럼 생각되는 게 있으니 무작정 표절이라 욕할 순 없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그건 너무 가혹한 평가라 주장하였다.
어찌되었건 이후로도 허난설헌의 인기는 대단하여 조선 숙종 25년인 1695년에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직접 "최대한 조선 고금의 시문들을 얻어오되, 다른건 몰라도 동문선과 난설헌집, 그리고 최치원, 김생, 안평대군의 필적은 무조건 가져오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했고, 일본에서도 난설헌집 동래부(東萊府) 중간본이 처음 유출된 후 제발 난설헌시집을 좀더 보내달라고 사정하다 결국 분다이야(文台屋次郎)에서 아예 직접 판목을 만들어 난설헌시집을 찍어내게 된다.
4.1. 중국에서의 표절 의혹
4.1.1. 유여시의 표절 제기 (1652년)
"허매씨의 시는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그가 지은 유선곡(遊仙曲) 가운데, ‘벽성에서 작은 모군 맞이하여 가누나.[碧城邀取小茅君]’라고 한 구절과 ‘이는 바로 인간 세상 일만 년이 흐른 거네.[便是人間一萬年]’라고 한 구절은 조당(曹唐)의 사(詞)에 나오는 구절이다. 양류지사(楊柳枝詞)의 ‘마중할 줄은 모르고 보낼 줄만 아는구나.[不解迎人解送人]’라고 한 구절은 배열(裴說)의 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궁사(宮詞)의 ‘깔개 자리 주렴 처마 한꺼번에 환해지리.[地衣簾額一時新]’라고 한 구절은 전적으로 왕건(王建)의 사에 나오는 구절을 쓴 것이다. ‘당시에는 일찍이 남 오는 걸 비웃더니, 오늘 아침 제 스스로 올 줄 어찌 알았으랴.[當時曾笑他人到 豈識今朝自入來]’라고 한 구절은 왕애(王涯)의 말을 곧장 베낀 것이며, ‘붉은 비단 보자기로 건계차를 쌓은 뒤에, 시녀가 봉함하고 비단 꽃을 다는구나. 비스듬히 도장 찍고 칙자 글자 쓰고서는, 내관이 제후 집에 나누어서 보내누나.[絳羅袱裏建溪茶 侍女封緘結綵花 斜押紫泥書勅字 內官分賜五侯家]’라고 한 구절은 왕중초(王仲初)의 ‘황금합 속에는 붉은 구름 담겨 있네.[黃金合裏盛紅雲]’라는 구절과 왕기공(王岐公)의 ‘내고의 새 함 열어 황제 드실 차 올리네.[內庫新函進御茶]’라고 한 두 시를 뒤섞어서 지은 것이다. ‘한가로이 머리 돌려 주렴에 기대 서서, 군왕을 마주하여 농서를 얘기하네.[閒回翠首依簾立 閒對君王說隴西]’는 또 왕중초의 ‘자주자주 군왕 대해 농산을 그리누나.[數對君王憶隴山]’라고 한 말을 훔쳐 쓴 것이다. 또 차손내한북리운(次孫內翰北里韻) 시의 ‘얼굴 화장 마치고도 자주 거울 쳐다보다, 남은 꿈이 맘에 걸려 천천히 누 내려오네.[新粧滿面頻看鏡 殘夢關心懶下樓]’라고 한 구절은 원나라 사람 장광필(張光弼)의 무제경구(無題警句)이다.
오자어(吳子魚)의 《조선시선(朝鮮詩選)》에 유선곡(遊仙曲)은 300수라고 하였는데, 내가 그 자신이 직접 쓴 81수를 얻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본떠서 지은 것이며, 본조(本朝) 사람인 마호란(馬浩瀾)의 유선사(遊仙詞)로서 《서호지여(西湖志餘)》에 나오는 것들도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외에 새상곡(塞上曲), 양류지사(楊柳枝詞), 죽지사(竹枝詞) 같은 제목의 시들도 모두 그렇다. 이 어찌 계림(鷄林)으로 흘러 들어간 중국의 시편(詩篇)을 허매씨가 옥갑(玉匣) 속에 깊숙이 보관해 두고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는 원작자를 숨기고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문사(文士)들이 기이한 것을 찾아다니다가 한갓 외방 오랑캐의 여자 손에서 나온 것만 보고서는 놀라고 찬탄하면서 다시는 원작자가 누구인지를 따져 보지 않았다. 동성(桐城)의 방 부인(方夫人)이 시사(詩史)를 채집(採輯)하면서 서원(徐媛)의 시에 대해 ‘이름나기만을 좋아하고 학문이 없다.[好名無學]’는 네 글자로 평하여 오중(吳中)의 사녀(士女)들을 두루 꾸짖었다. 허매씨의 시에 대해서도 ‘질펀하여 요약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漫無簡括 不知其何說]’고 하였다.
부자(夫子)의 명을 받아서 규중 여인들의 시편을 교정(校正)하다가 우연히 짧은 소견이 있기에 문득 짤막하게 기록한다. 지금 찬록(撰錄)한 것 역시 《조선시선》에 의거하여 열 가운데 두셋만을 남겨 두었다. 그 가운데 자구(字句)를 따다 쓰거나 느낌을 표절한 것을 찾아보면 참으로 일일이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니 보는 자는 자세히 따져 봐야 할 것이다."
ㅡ 《열조시집》 허매씨 소전. <해동역사> 제70권에서 인용되었다. #
1652년 간행된 중국의 대표 시집 《난설헌집》에서 중국 강남의 기녀 출신 시인이자 화가인 유여시(1616~1664)[5]가 허난설헌의 시집의 표절에 관해서 의혹을 제기했다. 궁사(宮詞)의 ‘깔개 자리 주렴 처마 한꺼번에 환해지리.[地衣簾額一時新]’라고 한 구절은 전적으로 왕건(王建)의 사에 나오는 구절을 쓴 것이다. ‘당시에는 일찍이 남 오는 걸 비웃더니, 오늘 아침 제 스스로 올 줄 어찌 알았으랴.[當時曾笑他人到 豈識今朝自入來]’라고 한 구절은 왕애(王涯)의 말을 곧장 베낀 것이며, ‘붉은 비단 보자기로 건계차를 쌓은 뒤에, 시녀가 봉함하고 비단 꽃을 다는구나. 비스듬히 도장 찍고 칙자 글자 쓰고서는, 내관이 제후 집에 나누어서 보내누나.[絳羅袱裏建溪茶 侍女封緘結綵花 斜押紫泥書勅字 內官分賜五侯家]’라고 한 구절은 왕중초(王仲初)의 ‘황금합 속에는 붉은 구름 담겨 있네.[黃金合裏盛紅雲]’라는 구절과 왕기공(王岐公)의 ‘내고의 새 함 열어 황제 드실 차 올리네.[內庫新函進御茶]’라고 한 두 시를 뒤섞어서 지은 것이다. ‘한가로이 머리 돌려 주렴에 기대 서서, 군왕을 마주하여 농서를 얘기하네.[閒回翠首依簾立 閒對君王說隴西]’는 또 왕중초의 ‘자주자주 군왕 대해 농산을 그리누나.[數對君王憶隴山]’라고 한 말을 훔쳐 쓴 것이다. 또 차손내한북리운(次孫內翰北里韻) 시의 ‘얼굴 화장 마치고도 자주 거울 쳐다보다, 남은 꿈이 맘에 걸려 천천히 누 내려오네.[新粧滿面頻看鏡 殘夢關心懶下樓]’라고 한 구절은 원나라 사람 장광필(張光弼)의 무제경구(無題警句)이다.
오자어(吳子魚)의 《조선시선(朝鮮詩選)》에 유선곡(遊仙曲)은 300수라고 하였는데, 내가 그 자신이 직접 쓴 81수를 얻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본떠서 지은 것이며, 본조(本朝) 사람인 마호란(馬浩瀾)의 유선사(遊仙詞)로서 《서호지여(西湖志餘)》에 나오는 것들도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외에 새상곡(塞上曲), 양류지사(楊柳枝詞), 죽지사(竹枝詞) 같은 제목의 시들도 모두 그렇다. 이 어찌 계림(鷄林)으로 흘러 들어간 중국의 시편(詩篇)을 허매씨가 옥갑(玉匣) 속에 깊숙이 보관해 두고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는 원작자를 숨기고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문사(文士)들이 기이한 것을 찾아다니다가 한갓 외방 오랑캐의 여자 손에서 나온 것만 보고서는 놀라고 찬탄하면서 다시는 원작자가 누구인지를 따져 보지 않았다. 동성(桐城)의 방 부인(方夫人)이 시사(詩史)를 채집(採輯)하면서 서원(徐媛)의 시에 대해 ‘이름나기만을 좋아하고 학문이 없다.[好名無學]’는 네 글자로 평하여 오중(吳中)의 사녀(士女)들을 두루 꾸짖었다. 허매씨의 시에 대해서도 ‘질펀하여 요약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漫無簡括 不知其何說]’고 하였다.
부자(夫子)의 명을 받아서 규중 여인들의 시편을 교정(校正)하다가 우연히 짧은 소견이 있기에 문득 짤막하게 기록한다. 지금 찬록(撰錄)한 것 역시 《조선시선》에 의거하여 열 가운데 두셋만을 남겨 두었다. 그 가운데 자구(字句)를 따다 쓰거나 느낌을 표절한 것을 찾아보면 참으로 일일이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니 보는 자는 자세히 따져 봐야 할 것이다."
ㅡ 《열조시집》 허매씨 소전. <해동역사> 제70권에서 인용되었다. #
허난설헌의 문집은 중국으로 건너가 유명세를 떨쳤는데 이를 본 유여시는 남편 전겸익이 쓴 《난설헌집》에서 허난설헌의 시 대부분이 당나라 시의 표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사실 의혹 수준이 아니라 몇 가지는 사실로 밝혀진 것인데 예를 들어 《빈녀음(貧女音)》이라는 작품은 당나라 시인 진도옥(秦韜玉)의 한시 《빈녀(貧女)》를 표절했으며 문장 일부는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드러나 있다.
4.2. 조선에서의 표절 의혹
4.2.1. 김시양의 표절 제기 (1612년)
저작(著作)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는 허균(許筠)의 누나인데, 문장을 잘 지었다. 일찍 죽으니 허균이 그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제목을 《난설헌집(蘭雪軒集)》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에게 발문(跋文)을 받기까지 하여 그 전함을 빛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는 남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많다.’고 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종성으로 귀양오게 되어 《명시고취(明詩鼓吹)》를 구해 보니, 허씨의 시집 속에 있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눈에 떨치니 봄구름 따사롭고 / 瑤琴振雪春雲暖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 달이 차가워라 / 環珮鳴風夜月寒
라고 한 율시(律詩) 여덟 구절이 《고취(鼓吹)》에 실려 있는데, 바로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忠)의 작품이다.
나는 이에 비로소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작품을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ㅡ 《부계기문》 #
허균과 동시대 인물인 김시양은 1612년 간행한 부계기문에서 허난설헌의 시 여덟 구절이 명나라 시인 오세충의 시 《고취(鼓吹)》에 있으므로 표절이 맞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는 남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많다.’고 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종성으로 귀양오게 되어 《명시고취(明詩鼓吹)》를 구해 보니, 허씨의 시집 속에 있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눈에 떨치니 봄구름 따사롭고 / 瑤琴振雪春雲暖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 달이 차가워라 / 環珮鳴風夜月寒
라고 한 율시(律詩) 여덟 구절이 《고취(鼓吹)》에 실려 있는데, 바로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忠)의 작품이다.
나는 이에 비로소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작품을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ㅡ 《부계기문》 #
4.2.2. 이수광의 표절 제기 (1614년)
蘭雪軒集中金鳳花染指歌. 全取明人拂鏡火星流夜月. 畫眉紅雨過春山之句而點化爲之. 遊仙詞中二篇. 卽唐曹唐詩. 送宮人入道一律. 則乃明人唐震詩也. 其他樂府宮詞等作. 多竊取古詩. 故洪參議慶臣, 許正郞䙗. 乃其一家人. 常言. 蘭雪軒詩二三篇外. 皆是僞作. 而其白玉樓上樑文. 亦許筠與李再榮所撰云.
난설헌(蘭雪軒)의 시집 속에, 봉숭아꽃으로 손가락을 물들이는 노래는 명나라 사람의, "(그 손가락을) 거울에 떨치니 불별이 밤달에 흐르는 것 같고, 눈썹을 그리니 붉은 비가 봄 산을 지나는 것 같다[拂鏡火星流夜月 畫眉紅雨過春山]"라고 한 글귀를 전부 따다가 點化(前人이 만든 詩文을 고쳐 새로운 체재를 내놓음)한 것이다. 부선사(遊仙詞) 가운데의 두 편은 바로 당나라 조당(曹唐)의 시이고, 관인이 중이 되어 가는 것을 보내는 한 편의 율시(律詩)는 명나라 사람 당진(唐震)의 시다. 그 밖의 악부(樂府)ㆍ궁사(宮詞) 등의 작품은 옛 시를 훔쳐 쓴 것이 많다.
그런 까닭에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과 정랑(正郞) 허적(許嫡)은 한집안 사람들로, 항상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는 2, 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작이다. 그리고 그의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도 또한 허균이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찬술(撰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ㅡ 《지봉유설》 문장부 7
이수광이 1614년 지봉유설에서 허난설헌의 표절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수광은 허난설헌과 동갑으로 동시대부터 논란이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알려진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작품별 논란 참조. 난설헌(蘭雪軒)의 시집 속에, 봉숭아꽃으로 손가락을 물들이는 노래는 명나라 사람의, "(그 손가락을) 거울에 떨치니 불별이 밤달에 흐르는 것 같고, 눈썹을 그리니 붉은 비가 봄 산을 지나는 것 같다[拂鏡火星流夜月 畫眉紅雨過春山]"라고 한 글귀를 전부 따다가 點化(前人이 만든 詩文을 고쳐 새로운 체재를 내놓음)한 것이다. 부선사(遊仙詞) 가운데의 두 편은 바로 당나라 조당(曹唐)의 시이고, 관인이 중이 되어 가는 것을 보내는 한 편의 율시(律詩)는 명나라 사람 당진(唐震)의 시다. 그 밖의 악부(樂府)ㆍ궁사(宮詞) 등의 작품은 옛 시를 훔쳐 쓴 것이 많다.
그런 까닭에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과 정랑(正郞) 허적(許嫡)은 한집안 사람들로, 항상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는 2, 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작이다. 그리고 그의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도 또한 허균이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찬술(撰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ㅡ 《지봉유설》 문장부 7
4.2.3. 신흠의 표절 제기 (1600년대 초)
허초당의 딸은 정자 김성립의 아내인데, 자호를 경번당이라 하였다. 시집이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편마다 매우 뛰어났다. 전해오는 <백옥루 상량문>은 아름답고 청건하여 흡사 사걸의 작품과 같았다. 다만 시집 가운데 <유선사> 같은 작품은 태반이 옛 사람의 전편이다. 일찍이 그의 근체시 두 구절을 보니,
고은 얼굴 거울에 비춰보다가
애틋한 꿈 깨면 다락에서 내려오네
는 바로 옛사람의 시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남동생 균이 세간에서 보지 못하는 시편을 표절해서 몰래 집어 넣어 그의 이름을 드날리게 한 것이다."하니 그 말이 사실에 가깝다.
ㅡ 신흠의 저서 [출처2]
김성립의 이종사촌인 신흠은 이종사촌 형수 허난설헌을 위와 같이 비난하면서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고은 얼굴 거울에 비춰보다가
애틋한 꿈 깨면 다락에서 내려오네
는 바로 옛사람의 시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남동생 균이 세간에서 보지 못하는 시편을 표절해서 몰래 집어 넣어 그의 이름을 드날리게 한 것이다."하니 그 말이 사실에 가깝다.
ㅡ 신흠의 저서 [출처2]
4.2.4. 홍만종의 표절 제기 (1652년)
내가 난설헌이 그 오라버니 허봉이 갑산에 귀양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 가운데 오언율시의 제5, 6구를 보니 "하수평추안, 관운욕석양"이라는 것은 곧 중국 사람의 구절로서 한 글자도 틀린 것이 없으니 산 채로 잡아 삼킨 것이라 하겠다.
ㅡ 《시화총림》 [출처3]
1652년 <시화총림>을 쓴 홍만종이 허난설헌의 시 중 허봉의 귀양을 전송하는 시가 중국 시인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ㅡ 《시화총림》 [출처3]
4.2.5. 김만중의 표절 제기 (1687년)
난설헌 허씨의 시는 손곡(李達)과 그 오빠 하곡으로부터 나왔는데, 그의 공부는 옥봉(玉峯)같은 분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총명하고 민첩함은 그들을 넘어선다. 우리 나라의 규수 중에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 다만 아까운 점은 그 아우 균이 원나라와 명나라 사람의 좋은 글귀와 아름다운 시 가운데 보기 드문 것을 뽑아서 난설헌의 문집 가운데다 침입하여 명성과 위세를 크게 한 점이다. 이것으로 우리 나라 사람을 속이는 것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중국에 들여보내었으니 마치 도적이 남의 소나 말을 도적질하여 그 마을에다가 전매하는 것 같아서, 어리석기가 그지 없다. 또 불행하게도 전겸익을 만나서, 간사한 것을 적발당하고 밑바닥이 온통 드러나게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부끄럽게 만드니 아까운 일이다. 천고에 이름을 날린 사람이 본래 많지 않다. 허씨와 같은 재주는 저절로 일대의 혜녀(慧女)가 되기에 충분한데도 이런 짓을 하여 스스로를 더럽혔다. 사람으로 하여금 매편마다 의심나게 하고 매귀마다 흠집을 찾게 만드니 탄식할 일이다.
ㅡ 《서포만필》
허난설헌과 허균 사후 태어난 김만중이 1687년 <서포만필>에서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ㅡ 《서포만필》
4.2.6. 이덕무의 표절 제기 (1795년)
운강 조원(趙瑗)의... 소실 이씨(李氏)는 종실(宗室 조선조(朝鮮朝)의 왕실(王室))의 후예로 호는 옥봉(玉峯)이다. 그녀의 시 32편(篇)중에 11편이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수록되었다...
한 시구는 《난설헌집(蘭雪軒集 선조 때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문집)》에 실려 있는데, 이것이 11편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밖에,
첩의 몸 직녀가 아니거니 / 妾身非織女
낭군인들 어찌 견우이겠소 / 郎豈是牽牛
한 것은 《시학대성(詩學大成)》에 실려 있다. 부녀자란 생각이 매우 얕고 문견이 넓지 못하기 때문에 이따금 고인(古人)들의 시집을 장중(帳中)의 비보로 삼다가, 끝내는 높은 안목이 있는 이에게 그 치기(稚氣)가 드러나고 만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전우산(錢虞山 우산은 청(淸) 나라 전겸익(錢謙益)의 호)ㆍ유여시(柳如是 재색(才色)이 뛰어났던 청의 명기(名妓)로 전겸익의 아내가 되었다.)에 의해 너절하게 고시(古詩)를 표절한 흔적이 거의 여지없이 폭로되고 말았으니, 남의 작품을 표절하는 자들의 밝은 경계라 하겠다.
ㅡ 《청장관전서》 제33권 청비록 2 #
1795년 이덕무는 허난설헌의 시집에서 운강 조원의 소실 이씨의 시구가 난설헌시집에 언급되어 있으므로 소실 이씨의 시를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한 시구는 《난설헌집(蘭雪軒集 선조 때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문집)》에 실려 있는데, 이것이 11편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밖에,
첩의 몸 직녀가 아니거니 / 妾身非織女
낭군인들 어찌 견우이겠소 / 郎豈是牽牛
한 것은 《시학대성(詩學大成)》에 실려 있다. 부녀자란 생각이 매우 얕고 문견이 넓지 못하기 때문에 이따금 고인(古人)들의 시집을 장중(帳中)의 비보로 삼다가, 끝내는 높은 안목이 있는 이에게 그 치기(稚氣)가 드러나고 만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전우산(錢虞山 우산은 청(淸) 나라 전겸익(錢謙益)의 호)ㆍ유여시(柳如是 재색(才色)이 뛰어났던 청의 명기(名妓)로 전겸익의 아내가 되었다.)에 의해 너절하게 고시(古詩)를 표절한 흔적이 거의 여지없이 폭로되고 말았으니, 남의 작품을 표절하는 자들의 밝은 경계라 하겠다.
ㅡ 《청장관전서》 제33권 청비록 2 #
또 이덕무는 허난설헌 시집의 표절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선조조(宣祖朝) 이하에 나온 문장은 볼 만한 것이 많다. 시와 문을 겸한 이는 김농암(金農巖 농암은 김창협(金昌協)의 호)이고, 시로는 박읍취헌(朴挹翠軒 읍취헌은 박은(朴誾)의 호)을 제일로 친다는 것이 확고한 논평이나, 연옹(淵翁,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을 이름)에 이르러 대가(大家)를 이루었으니, 이는 어느 체제이든 다 갖추어져 있는 때문이다. 섬세하고 화려하여 명가(名家)를 이룬 이는 최유하(崔柳下 유하는 최혜길(崔惠吉)의 호)이고 당(唐)을 모방하는 데 고질화된 이는 이손곡(李蓀谷 손곡은 이달(李達)의 호)이며[8],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옛사람의 말만 전용한 것이 많으니 유감스럽다.
청장관전서 영처잡고 쇄아[9]
청장관전서 영처잡고 쇄아[9]
4.2.7. 이규경의 표절 제기 (1800년대 초)
1800년대 초 헌종 때 이덕무의 후손 이규경이 지은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아예 다음과 같은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김성립의 후손인 정언(正言) 김수신(金秀臣)의 집이 광주(廣州)에 있는데, 어느 사람이,
"간행된 《난설헌집》이외에도 혹 책상자 속에 간직된 비본(祕本)이 있느냐?"
고 묻자,
"난설헌이 손수 기록해 놓은 수십 엽(葉)이 있는데, 그 시는 간행본과 아주 다르다."
대답하고 이어,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간행본은 본시 난설헌의 본작(本作) 전부가 아니라 허균의 위본(僞本)이다."
하였다. 그 후손의 말이 이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실전(實傳)일 것이다.
애당초 허난설헌의 시가 불타서 없어진걸 허균이 되살렸다는 허균의 주장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가문에서는 당시까지 허난설헌이 지은 글이 남아 있었고 허균이 간행한 난설헌집의 시와는 아예 다른 시며 난설헌집은 허균의 위작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김성립의 문중에 이 고문서가 남아 있어 세상에 공개된다면 한국 국문학사에 큰 파장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간행된 《난설헌집》이외에도 혹 책상자 속에 간직된 비본(祕本)이 있느냐?"
고 묻자,
"난설헌이 손수 기록해 놓은 수십 엽(葉)이 있는데, 그 시는 간행본과 아주 다르다."
대답하고 이어,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간행본은 본시 난설헌의 본작(本作) 전부가 아니라 허균의 위본(僞本)이다."
하였다. 그 후손의 말이 이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실전(實傳)일 것이다.
4.2.8. 한치윤의 표절 제기 (1823년)
○ 허매씨는 장원급제한 허균의 누이동생이다. 7세 때 능히 시를 지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여신동(女神童)이라고 불렀다. 진사 김성립(金誠立) -살펴보건대, 김성립(金成立)의 잘못이다.- 에게 시집갔는데, 임진왜란 때 김성립이 왜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허매씨는 수절(守節)하면서 개가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호하기를 난설주인(蘭雪主人)이라 하였다. 유선곡 100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유선곡 4수 및 궁사(宮詞) 2수가 있다. 《양조평양록》
○ 진와자(陳臥子)가 이르기를, “허씨(許氏)는 이씨(李氏)의 시를 배우고서 합작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외번(外藩)의 여자로서도 이와 같았으니, 본조(本朝)의 문교(文)가 멀리까지 미친 것을 알 수가 있다. 시화(詩話)를 보면 명나라 규수(閨秀)들의 시는 대부분이 위작(僞作)이 많다. 그런데 점점 서로 부회(附會)하여 거짓이 오래되매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하였다. 내가 허경번의 시에 대해 편장(篇章)과 구법(句法)을 보건대, 완연히 가정칠자(嘉靖七子)의 체재인바, 응당 풍교(風敎)가 거기까지 미쳐 가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부합되기가 이와 같으니, 가짜라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명시종》
○ 조선의 여랑(女郞) 허경번이 8세 때 광한전옥루상량문(廣寒殿玉樓上樑文)을 지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글을 볼 수가 없다. 이에 붓을 놀려 보충해 둔다. 《서당잡조(西堂雜組)》
ㅡ 《해동역사》 제70권 #
<해동역사>를 쓴 한치윤은 허난설헌의 재능을 칭찬하면서 "여신동," "여랑"이라 부르면서도 중국의 시인의 시를 표절했을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 진와자(陳臥子)가 이르기를, “허씨(許氏)는 이씨(李氏)의 시를 배우고서 합작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외번(外藩)의 여자로서도 이와 같았으니, 본조(本朝)의 문교(文)가 멀리까지 미친 것을 알 수가 있다. 시화(詩話)를 보면 명나라 규수(閨秀)들의 시는 대부분이 위작(僞作)이 많다. 그런데 점점 서로 부회(附會)하여 거짓이 오래되매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하였다. 내가 허경번의 시에 대해 편장(篇章)과 구법(句法)을 보건대, 완연히 가정칠자(嘉靖七子)의 체재인바, 응당 풍교(風敎)가 거기까지 미쳐 가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부합되기가 이와 같으니, 가짜라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명시종》
○ 조선의 여랑(女郞) 허경번이 8세 때 광한전옥루상량문(廣寒殿玉樓上樑文)을 지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글을 볼 수가 없다. 이에 붓을 놀려 보충해 둔다. 《서당잡조(西堂雜組)》
ㅡ 《해동역사》 제70권 #
4.3. 대한민국에서의 표절 의혹
4.3.1. 홍인숙 교수의 견해 (2003년)
"난설헌은 조당의 시에서 일부 동일한 글자들을 점화 해오지만 실제로 그것을 자신의 시 속으로 가져왔을 때에는 전혀 다른 맥락과 의경을 창출해내고 있다. 물론 난설헌 유선사 의 제 수와 제 수는 조당 소유선시의 제 수 제 수와 비교했을 때 개의 한자어로 이루어지는 언 절구에서 각각 개 개의 글자가 똑같고 시상 역시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글자를 점화해온 전체 수의 시 가운데 그 두 편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수에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개에서 개 정도의 동일한 글자를 사용하면서도 난설헌의 시 속에 들어와서는 각 시마다 독자적인 시적 맥락을 형성하거나 새로운 의경을 개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난설헌의 유선사 전체 수 가운데 이 두 수가 가지는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나머지 수의 시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자세는 상당히 위험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선사 외의 다른 난설헌 시에서 역시 악부체나 의고풍의 한시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관습에 비추어 조심스러운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견이 냉재야화 에서 두보 소동파 한유 등의 싯귀를 비교하면서 쓴 이는 모두 고인의 싯구를 사용하였으나 그 구절의 뜻을 가져다 쓴 것은 아니며 옛 것으로 새 것을 만들어냈으니 환골탈태한 것이라는 구절은 동양 문화권에서 표절이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쓸 수 없다는 의미있는 시사를 던져준다. 또한 명대의 복고적인 낭만주의 경향이 우리 문화사에 끼친 영향과 문화적 보편주의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는 지적 역시 난설헌 시의 표절 문제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준다."
ㅡ 홍인숙 "난설헌이라는 소문에 접근하기"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7 pp.134,135 (2003). #
2003년 선문대학교 교양학부 홍인숙 교수의 <난설헌이라는 소문에 접근하기>에서 허난설헌의 시 <유선사(遊仙詞)> 87수와 당나라의 시인 조당의 시<소유선시(小遊仙詩)> 98수를 비교하면서 허난설헌의 시는 당나라의 시인 조당의 시와 같은 구절이 있는 등 비슷한 점이 있지만 시의 의경와 전체 시상이 다르므로 허난설헌의 시가 독창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개념으로 치환해서 말하자면, 이미 퍼블릭 도메인이 된 당나라 조당의 "소유선시"에서 구절을 따와 오마주하면서도, 조당과 다른 허난설헌 본인의 맥락을 시로 풀어내 독창성을 부여했다고 보면 된다.따라서 난설헌의 유선사 전체 수 가운데 이 두 수가 가지는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나머지 수의 시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자세는 상당히 위험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선사 외의 다른 난설헌 시에서 역시 악부체나 의고풍의 한시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관습에 비추어 조심스러운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견이 냉재야화 에서 두보 소동파 한유 등의 싯귀를 비교하면서 쓴 이는 모두 고인의 싯구를 사용하였으나 그 구절의 뜻을 가져다 쓴 것은 아니며 옛 것으로 새 것을 만들어냈으니 환골탈태한 것이라는 구절은 동양 문화권에서 표절이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쓸 수 없다는 의미있는 시사를 던져준다. 또한 명대의 복고적인 낭만주의 경향이 우리 문화사에 끼친 영향과 문화적 보편주의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는 지적 역시 난설헌 시의 표절 문제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준다."
ㅡ 홍인숙 "난설헌이라는 소문에 접근하기"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7 pp.134,135 (2003). #
4.3.2. 허미자 교수의 견해 (2007년)
"난설헌의 표절시비에 관한 글이 많이 발표되었는데, 비판도 있고, 변명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적극적인 옹호를 내세운 글이 있어서,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위해서, 학문하고 수양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륜이나 포부를 펼치기 위해서, 또는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글을 썼다. 이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비문이나 서, 발을 지어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상업적인 출판이 없었기에, 글을 잘 썼다고 해서 그 글이나 책이 팔릴 것도 아니었다. 특히 여성은 글을 써봐야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으며, 이름날수록 오히려 비난만 받았다. 아녀자의 이름이 집밖으로 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난설헌이 남의 글을 표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과거시험에 응시할 기회도 없었고, 출판을 꿈꿀 수도 없었다. 시댁 후원 별당에서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 친정 남매들에게 하고 싶은 말, 사회에 대하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혼자서 글로 썼을 뿐이다. 이러한 말은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이지, 남의 목소리는 필요없었다.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으면 "불태워버리라"고 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시 교육은 암기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시집을 읽고 외웠으며, 이러한 구절들은 평생 시인의 머리 속에 있었다. 난설헌이 시를 지으면서 그런 구절에서 몇 자를 자신도 모르게 썼을 가능성은 있다...
당나라 때부터 수많은 시인들이 같은 제목으로 시를 썼기에, 이런 시들은 많은 글자가 겹칠 수 밖에 없다.
유언에 따라 유작을 모두 불태워 버린 다음, 허균이 본가에 남아 있던 시와 자신이 외우던 시를 편집하여 간행하는 과정에서 몇 자가 섞여 들었을 수도 있다. 허균의 기억력이 비범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몇 자가 섞여 들어갈 가능성은 충분이 있는 것이다. 여성의 창작이 제한되었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 <난설헌집>에 섞여 들어간 중국 시인의 몇 글자를 이유로 난설헌에게 표절 책임을 묻는 것은 난설헌의 문학과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 난설헌의 시는 허균의 시보다 격이 더 높아서 대신 허균이 지어줄 수는 없다. 만약 허균이 그러한 재주가 있었다면, 누님의 이름을 높이는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을 것이다.
허균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으면서 난설헌에 대한 시비도 시작되었다. 허균이 살아있을 때에 비평한 사람들은 직접 난설헌의 시를 보았기에 객관적으로 칭찬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허균이 자기의 기억에 의해서 시집을 출간하고 죽어버리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의적이든 무의식이었던 간에, 표절 시비에 관한 책임 가운데 대부분은 난설헌 자신보다 허균이 져야 할 것이다. 난설헌 생존시에 시를 본 사람들은 표절 시비가 없었고, 몇 십년 뒤에 2,3차 자료를 본 사람들 에 의해서 시비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허균도 발각될 것이 뻔한 것을 고의적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점화는 표절이라기보다, 시의 경지를 높이기 위한 적극적 행위이다. 난설헌은 답습이 아니라 쇠를 두드려 금을 만드는 점철성금의 연금술사였다."
ㅡ 허미자 "허난설헌"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pp. 218 ~ 220, 223, 224 (2007).
2007년 성신여자대학교 허미자 교수는 저서 <허난설헌>에서 다른 글을 인용하면서 허난설헌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당시 여성들은 사회 활동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으며, 어떠한 경로로든 한시를 배울 때는 당나라 이후 창작된 방대한 양의 시들을 무작정 암기하는 게 능사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10] 이미 소각된 허난설헌의 유작들을 허균이 복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일어나 표절 논란이 일어난 것을 온전히 허난설헌의 책임으로 몰고 가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시각이다.'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위해서, 학문하고 수양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륜이나 포부를 펼치기 위해서, 또는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글을 썼다. 이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비문이나 서, 발을 지어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상업적인 출판이 없었기에, 글을 잘 썼다고 해서 그 글이나 책이 팔릴 것도 아니었다. 특히 여성은 글을 써봐야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으며, 이름날수록 오히려 비난만 받았다. 아녀자의 이름이 집밖으로 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난설헌이 남의 글을 표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과거시험에 응시할 기회도 없었고, 출판을 꿈꿀 수도 없었다. 시댁 후원 별당에서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 친정 남매들에게 하고 싶은 말, 사회에 대하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혼자서 글로 썼을 뿐이다. 이러한 말은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이지, 남의 목소리는 필요없었다.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으면 "불태워버리라"고 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시 교육은 암기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시집을 읽고 외웠으며, 이러한 구절들은 평생 시인의 머리 속에 있었다. 난설헌이 시를 지으면서 그런 구절에서 몇 자를 자신도 모르게 썼을 가능성은 있다...
당나라 때부터 수많은 시인들이 같은 제목으로 시를 썼기에, 이런 시들은 많은 글자가 겹칠 수 밖에 없다.
유언에 따라 유작을 모두 불태워 버린 다음, 허균이 본가에 남아 있던 시와 자신이 외우던 시를 편집하여 간행하는 과정에서 몇 자가 섞여 들었을 수도 있다. 허균의 기억력이 비범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몇 자가 섞여 들어갈 가능성은 충분이 있는 것이다. 여성의 창작이 제한되었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 <난설헌집>에 섞여 들어간 중국 시인의 몇 글자를 이유로 난설헌에게 표절 책임을 묻는 것은 난설헌의 문학과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 난설헌의 시는 허균의 시보다 격이 더 높아서 대신 허균이 지어줄 수는 없다. 만약 허균이 그러한 재주가 있었다면, 누님의 이름을 높이는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을 것이다.
허균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으면서 난설헌에 대한 시비도 시작되었다. 허균이 살아있을 때에 비평한 사람들은 직접 난설헌의 시를 보았기에 객관적으로 칭찬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허균이 자기의 기억에 의해서 시집을 출간하고 죽어버리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의적이든 무의식이었던 간에, 표절 시비에 관한 책임 가운데 대부분은 난설헌 자신보다 허균이 져야 할 것이다. 난설헌 생존시에 시를 본 사람들은 표절 시비가 없었고, 몇 십년 뒤에 2,3차 자료를 본 사람들 에 의해서 시비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허균도 발각될 것이 뻔한 것을 고의적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점화는 표절이라기보다, 시의 경지를 높이기 위한 적극적 행위이다. 난설헌은 답습이 아니라 쇠를 두드려 금을 만드는 점철성금의 연금술사였다."
ㅡ 허미자 "허난설헌"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pp. 218 ~ 220, 223, 224 (2007).
4.3.3. 박현규 교수의 견해 (2000년, 2016년)
2000년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현규 교수의 논문 <허난설헌 한시의 표절 문제>에서 박현규 교수는 허난설헌 작품이 '표절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 근거를 '다른 시에서 절반 이상을 베꼈을 경우'로 설정하고 허난설헌의 대표작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조사 대상 작품 중 상당수가 중국시에서 베껴왔거나 그런 흔적이 농후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상한 기억력으로 누나의 문장을 되살려서 문집을 간행했다'라는 남동생 허균이 표절의 원흉으로 지목되는데 그 시대 조선 규방 여자들에게 유행했던 시들을 허균이 수집해서 자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이름으로 간행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허난설헌의 작품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학술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소수의 작품에만 한정이 되며 그 동안 그녀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던 대표작과 이에 따른 그녀의 명성은 허구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11]그러나 2016년 박현규 교수가 논문 <1597년 許筠 선록본 허난설헌 <<蘭雪詩翰>> 고찰>에서 1597년 허균이 자신의 성명과 인장을 포함한 허난설헌의 다른 시집 <난설시한>의 표절 여부를 다루면서 허난설헌의 표절 논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표절이라는 판단 기준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해당자가 의도적으로 타인의 작품을 취할 생각을 가졌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 자료만으로 표절 여부나 귀책 책임자를 가려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허난설헌의 모든 작품은 허난설헌이 스스로 남긴 것이 아니고, 허난설헌이 자신의 작품을 다비하라는 유언 이후에 허균이 머릿속에 기억해내었거나 타처에 남아 있는 작품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또 허균이 어떠한 의도성이 없이 문제가 있는 작품을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오인해서 선록했을 경우도 고려해야한다. 설령 상기 일부 작품이 표절이라고 판단하더라도, 허난설헌이나 허균에게 귀책사유가 있다고 단정하기가 힘들다...
옛 사람들이 창작을 임하는 태도는 오늘날과 무척 다르다.[12] 시를 지을 때 옛 사람의 구절을 습용하더라도 몇 글자를 바꾸어 자신의 감정을 담아 의경을 달리해서 환골탈태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바뀌게 된다...
...작품이 반드시 표절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가 없다. 독자에 따라 새롭게 창출해내기 위해 부분 차용했다고 달리 생각해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적자면 현존하는 허난설헌의 일부 작품이 표절 경계선의 안팎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허난설헌의 모든 작품이 문제가 있다고 단정할 필요가 없다. 허난설헌의 상당수 작품이 주옥같이 빼어난 수준을 구사한 창작품이다. 앞으로 표절 논란이 되는 작품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면밀히 분석하고, 또한 옥석을 가려서 허난설헌 작품의 진가를 정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ㅡ 박현규 "1597년 許筠 선록본 허난설헌 <<蘭雪詩翰>> 고찰"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43 pp.242-243 (2016). #
옛 사람들이 창작을 임하는 태도는 오늘날과 무척 다르다.[12] 시를 지을 때 옛 사람의 구절을 습용하더라도 몇 글자를 바꾸어 자신의 감정을 담아 의경을 달리해서 환골탈태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바뀌게 된다...
...작품이 반드시 표절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가 없다. 독자에 따라 새롭게 창출해내기 위해 부분 차용했다고 달리 생각해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적자면 현존하는 허난설헌의 일부 작품이 표절 경계선의 안팎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허난설헌의 모든 작품이 문제가 있다고 단정할 필요가 없다. 허난설헌의 상당수 작품이 주옥같이 빼어난 수준을 구사한 창작품이다. 앞으로 표절 논란이 되는 작품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면밀히 분석하고, 또한 옥석을 가려서 허난설헌 작품의 진가를 정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ㅡ 박현규 "1597년 許筠 선록본 허난설헌 <<蘭雪詩翰>> 고찰"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43 pp.242-243 (2016). #
다만 박현규 교수의 이런 태도 변화는 다분히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왜냐면 박교수는 2000년 논문에서는 구체적으로 통계를 내고 실제로 표절된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명백하게 밝혔었기 때문이다. 박교수의 2000년 논문 '허난설헌 한시의 표절 문제'에 따르면 허난설헌 작품이 '표절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 근거를 '다른 시에서 절반 이상을 베꼈을 경우'로 설정하고 허난설헌 한시들을 청나라 강희제의 명으로 전체 당나라 시 작품을 모은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중국 시들과 비교하여 허난설헌의 대표작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결과, 조사대상 작품 중 상당수가 중국시에서 베껴왔거나 그런 흔적이 농후한 것으로 증명했다.
당시 박 교수는 허난설헌 시의 구체적인 표절 사항까지 예시를 들어서 설명하기 까지 했다. 박 교수는 대표적인 표절작품의 실례로 10개를 들었는데 예컨대 축성원(築城怨)이란 작품은 당나라의 유명시인 백거이와 쌍벽을 이뤘던 원진(元桭)이라는 시인의 고축성곡(古築城曲)을 한 글자만 빼놓고 그대로 베꼈으며 가객사(賈客詞)는 양릉(楊凌)의 가객수(賈客愁)를 몇 글자만 고쳤으며 또 빈녀음(貧女吟)은 장벽(張碧)이라는 시인의 빈녀(貧女)를 표절했고 양류지사(楊柳枝詞)는 당나라 때 이익(李益)이 쓴 도중기이이(途中寄李二)와 일치한다고 예시를 들었다. 박 교수는 논문에서 "한 마디로 현존하는 허난설헌 작품 중에는 표절 흔적이 매우 역력하다는 결과를 얻었으며 이로써 지난날 허난설헌 작품의 표절시비에 대한 논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통 난설헌처럼 자기 스스로 시문집을 내지 않은 유명 시인의 표절이 드러날 경우 시 세계가 완성되지 않은 초기작이라서 그렇다 내진 제3자가 낸 시집이라 습작들까지 같이 포함되었다[13]고 쉴드를 치지만 현존 난설헌집은 표절이 워낙 많고 도용의혹까지 있어서 그런 변명은 사실 안 통한다. 그런데 한국 국문학계에서 허난설헌에 대해서는 '중국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 표절은 아니다'라고 변호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박교수의 태도 변화는 결국 한국 국문학계에서 허난설헌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본인이 태도를 한발 물린것으로 봐야 더 합당하다. 허난설헌이 시집이 나온지 400년이 지나도록 계속 표절 의혹에 휩싸이고 있어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옹호 여론이 나오는건 한국 문학사상 허난설헌 만큼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부른 시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명시인들조차 허난설헌이 가지는 국제적인 명성에 비하면 달빛 앞의 반딧불 정도의 위상을 가진다. 그런데 만약에 허난설헌의 시 세계가 단지 중국 명시인들의 감성을 그대로 배낀것에 불과하다면 국문학계에 있어서는 큰 충격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조선시대부터 지금끼지 '허난설헌의 시 세계는 고인의 시구를 빌려 그녀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옹호론이 지속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던 것인데 기존의 유명세 덕으로 대부분 대중들의 시각도 당대의 최초의 한류를 이끈 여류 시인이라는 인식에 머물고 있어서 그녀의 시 거의 대다수가 표절이라는 사실은 무려 시집이 나온 직후부터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면서 지적되고 있는데도 거의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허난설헌 표절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아서 허난설헌의 명성 때문에 다른 한국 여성시인들의 시가 묻힌다는 점도 있다. 예컨데 이숙원(李淑媛, 일반적으로는 이옥봉으로 알려져 있다)의 경우엔 중국 명나라에까지 시명이 알려진 시인으로서 그녀의 시는 맑고 씩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중국과 조선에서 펴낸 시선집에는 허난설헌의 시와 나란히 실려 있다. 그녀의 작품은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등에 남아 있으며 시집이 있었다고 하나 한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峯集)》 1권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몽혼(夢魂)》, 《영월도중(寧越途中)》, 《만흥증랑(謾興贈郞)》, 《추사(秋思)》, 《자적(自適)》, 《증운강(贈雲江)》, 《규정(閨情)》 등의 작품이 유명하고 허난설헌과 달리 표절논란은 없다. 하지만 현대에는 허난설헌에 가려져서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5. 작품별 논란
5.1.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
蘭雪軒集中金鳳花染指歌. 全取明人拂鏡火星流夜月. 畫眉紅雨過春山之句而點化爲之. 遊仙詞中二篇. 卽唐曹唐詩. 送宮人入道一律. 則乃明人唐震詩也. 其他樂府宮詞等作. 多竊取古詩. 故洪參議慶臣, 許正郞䙗. 乃其一家人. 常言. 蘭雪軒詩二三篇外. 皆是僞作. 而其白玉樓上樑文. 亦許筠與李再榮所撰云.
난설헌(蘭雪軒)의 시집 속에, 봉숭아꽃으로 손가락을 물들이는 노래는 명나라 사람의, "(그 손가락을) 거울에 떨치니 불별이 밤달에 흐르는 것 같고, 눈썹을 그리니 붉은 비가 봄 산을 지나는 것 같다[拂鏡火星流夜月 畫眉紅雨過春山]"라고 한 글귀를 전부 따다가 點化(前人이 만든 詩文을 고쳐 새로운 체재를 내놓음)한 것이다. 부선사(遊仙詞) 가운데의 두 편은 바로 당나라 조당(曹唐)의 시이고, 관인이 중이 되어 가는 것을 보내는 한 편의 율시(律詩)는 명나라 사람 당진(唐震)의 시다. 그 밖의 악부(樂府)ㆍ궁사(宮詞) 등의 작품은 옛 시를 훔쳐 쓴 것이 많다.
그런 까닭에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과 정랑(正郞) 허적(許嫡)은 한집안 사람들로, 항상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는 2, 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작이다. 그리고 그의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도 또한 허균이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찬술(撰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ㅡ 《지봉유설》 문장부 7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허난설헌의 백옥루상량문이 허균과 이재영이 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허균 본인이 저서에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14]난설헌(蘭雪軒)의 시집 속에, 봉숭아꽃으로 손가락을 물들이는 노래는 명나라 사람의, "(그 손가락을) 거울에 떨치니 불별이 밤달에 흐르는 것 같고, 눈썹을 그리니 붉은 비가 봄 산을 지나는 것 같다[拂鏡火星流夜月 畫眉紅雨過春山]"라고 한 글귀를 전부 따다가 點化(前人이 만든 詩文을 고쳐 새로운 체재를 내놓음)한 것이다. 부선사(遊仙詞) 가운데의 두 편은 바로 당나라 조당(曹唐)의 시이고, 관인이 중이 되어 가는 것을 보내는 한 편의 율시(律詩)는 명나라 사람 당진(唐震)의 시다. 그 밖의 악부(樂府)ㆍ궁사(宮詞) 등의 작품은 옛 시를 훔쳐 쓴 것이 많다.
그런 까닭에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과 정랑(正郞) 허적(許嫡)은 한집안 사람들로, 항상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는 2, 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작이다. 그리고 그의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도 또한 허균이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찬술(撰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ㅡ 《지봉유설》 문장부 7
양천 허씨 대종회에서는 허미자, 『허난설헌연구(許蘭雪軒 硏究)』(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1984)와 장정룡, 『허난설헌과 강릉』(강릉시, 1998)를 참조해서 1570년 허난설헌이 8살의 나이에 지은 것이 맞다고 서술했으며 허균과 이재영이 썼다는 것을 증명할 근거가 없으므로 이수광의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성신여자대학교 허미자 교수는 위 논란에 대해서 "허균과 이재영이 썼다는 근거가 전혀 없으며, 그 정도 훌륭한 작품이라면 자신의 이름으로 전하지, 왜 남의 이름에 가탁해 칭찬을 돌리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출처4]
5.2. 규원가(閨怨歌)
허난설헌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규원가(閨怨歌)[16] 역시 조선 시대부터 허난설헌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50행 100구로 이뤄진 이 장편 가사는 동시대인인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유사하면서도 노골적인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드러내는데 홍대용은 허균의 첩인 소쌍이 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1]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55쪽[2] 여기서 말하는 이봉의 서녀는 허난설헌과 비견된다는 옥봉 이숙원을 뜻한다. 밑 각주에서 더 자세히 설명한다.[출처1] 허경진, 허균평전 66쪽[4] 원부사(怨夫詞)나 원부가(怨夫歌)로도 불린다. 규원가는 규방에서 원망하는 노래라는 이야기고 원부사나 원부가는 노골적으로 남편을 원망하는 노래라는 제목이다.[5] 유여시도 상당히 재미있는 인물로 중국에서는 알려져 있는데 본래 기녀 출신으로 당대의 여러 명사들과 교류했고 나중에 훨씬 연상인 전겸익의 아내가 되지만 전겸익이 청나라에 굽실거리자 이를 꾸짖는 등 남편보다 기가 센 인물이었다.[출처2]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211쪽, 212쪽[출처3]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212쪽, 213쪽[8] 이덕무는 허난설헌의 스승 이달을 당(唐)대의 문장을 모방하는 경향이 매우 짙다고 지적한 셈인데 흥미롭게도 제자인 허난설헌 역시 현대의 연구에서 당시를 상당히 많이 차용했음이 드러난 것을 보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허균 역시 이달에게 배웠으므로 허균이 난설헌시의 조작자여도 통하는 부분이다.[9] 이덕무 같은 학자가 이런식으로 허난설헌의 시를 평가한 것도 있는데 이건 선조시대 한다하던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허난설헌이 조선후기 학자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는 이야기다. 유명하지 않으면 비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10] 음악으로 따지자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이후 수백 년 간 대중적인 멜로디와 화음진행은 나올 대로 다 나왔기 때문에 12음 기법 혹은 미분음 음악 등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생소한 영역을 제외하면 겹치는 부분이 나올 수밖에 없다."라는 시각과 같다. 그러나 재즈의 순정률 기반 화음 진행 및 제이콥 콜리어의 사례를 보았을 때 미분음마저 이미 일정 부분 개척이 되어 있다.[11] 신기하게도, 허난설헌이 살았던 시대에서 약 1세기 뒤 서양 클래식 음악계에서 향년 26세로 요절한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의 작품들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 아니라 명망 높은 작곡가의 유명세를 타기 위한 위작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아래 2016년 논문에서 수백 년 전 사람들의 창작 방식은 현재와 아주 다르다는 걸 밝히고 있는데, 그 문장에 달린 나무위키의 주석에서처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도 당대에 자기표절과 도용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12] 그렇지만 이 표절 논란은 옛 사람들인 조선시대의 사람들로부터 꾸준히 내려오는 논란이다. 옛 사람들의 기준으로 봐도 표절로 보였다는 것이다.[13] 예를들어 누가봐도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보고 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있다. 윤동주 시집은 윤동주 사후에 노트에 남은 습작시까지 모두 긁어서 내놓은 시집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다.[14]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라고 말했는데 이 허균의 말로 이수광의 주장이 옳은지 증명할 수가 없다. #[출처4]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209쪽[16] 원부사(怨夫詞)나 원부가(怨夫歌)로도 불린다. 규원가는 규방에서 원망하는 노래라는 이야기고 원부사나 원부가는 노골적으로 남편을 원망하는 노래라는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