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0:37:10

헉 내가 조괄이다

헉 내가 조괄이다
파일:헉조괄.jpg
장르 대체역사, 착각, 빙의
작가 간절히
출판사 KW북스
연재처
[ 펼치기 · 접기 ]
문피아
카카오페이지
조아라
리디
원스토리
네이버 시리즈
연재 기간 2023. 06. 12. ~ 2024. 01. 30.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등장인물
4.1. 조나라
4.1.1. 조괄 라인4.1.2. 왕족4.1.3. 군부4.1.4. 조정4.1.5. 친진파4.1.6. 기타
4.2. 위나라
4.2.1. 왕족4.2.2. 군부4.2.3. 기타
4.3. 한나라4.4. 연나라4.5. 제나라4.6. 초나라4.7. 진나라
4.7.1. 조정4.7.2. 군부4.7.3. 기타
4.8. 주나라4.9. 촉나라
5. 개변된 역사6. 기타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작가는 <백제의 이름을 잇다>, <아! 내가 마속이다>를 집필한 간절히.

2. 줄거리

대학원생 김선명!

싱크홀에 빠져 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 조괄에게 빙의하게 된다

때는 조나라 군사 40만이 생매장 당해 죽는 장평대전 직전!

조괄이 된 김선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 문피아 작품 소개
마이너한 고대 동북아 전쟁사를 다루는 대학원생 김선명.
박사 학위 논문 심사만 남았는데......

우연히 싱크홀에 빠져 전국시대 조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내일이 되면 그 나라의 명운을 걸린 장평으로 떠나는 날.

"아, 안 돼! 이대로면 조나라의 40만 병사가 생매장 당한다!"

최악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괄의 전국시대 생존물.

<헉 내가 조괄이다>
- 카카오페이지 작품 소개

3. 연재 현황

문피아에서 2023년 6월 12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2023년 8월 10일 자로 유료화되었다.

2023년 11월 7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본이 발매되었다.

2024년 1월 15일에 170화 내외로 완결 예정이라고 카카오페이지 공지가 올라왔다.

2024년 1월 30일 173화로 완결되었다.

4. 등장인물

4.1. 조나라

주인공의 빙의로 가장 큰 수혜를 본 나라. 원래대로라면 조괄의 뻘짓으로 장평에서 45만명이 몰살당하며 망조에 접어들 예정이었으나 빙의한 조괄 덕에 장평대전에서 승리하고 상당 17성을 차지했다. 국력을 멀쩡하게 유지한 덕에[1] 진나라도 무시 못하고 원역사에서 빈집털이를 노렸던 연나라는 아예 엄두를 못 낼 정도로 강국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2]

다만 조괄이 이어받은 염파의 전략이 조나라의 국력에 워낙 부담이 되었고, 관중을 차지한 진나라와의 기본적인 국력차가 큰 것이 문제. 게다가 누완을 위시한 친진매국노들이 조나라 조정에 암약하고 있다. 그래도 염파-이목으로 대표되는 군부의 라인업은 튼실하고, 태행산맥을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해 진나라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진양의 소금광산과 누번의 소금호수를 지켜냈기에 진나라와 교역이 끊기더라도 문제가 없고, 위와 한에 간간이 소금을 공급하는 편이다.[3]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중원에서 최초로 기병을 주력 병과로 도입하는 등 중원에서 진나라 다음가는 군사력을 보유했다.[4][5] 순자도 관동 합종군에서 초나라와 함께 이강 체제라고 언급한다.

군사적 인재만이 아니라 다른 면으로도 인재들이 출중하다. 순자도 초나라에 살고 있었지만 조나라 출생이며, 평원군과 그 식객인 모수. 조나라가 망했어도 항전한 조가 등. 문제는 매국노 라인업도 튼실해서 조나라를 반쯤 자멸시킨 곽개와 한창, 누완 탓에 조괄은 정작 위나라 매국노들은 쉬운 놈들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2차 대진 합종군 전쟁에서는 9만의 대군과 정병을 보낸 사실상 최고 주력군이다.[6] 초, 위군이 진군에게 정예도에서 밀리는데 조군은 지휘관이 이목이기도 하지만 정예한 기병과 평균은 넘는 보병의 힘으로 비등한 수의 진군보다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최종적으론 제, 초와 함께 몰락한 진나라를 제치고 중원의 강국으로 남았다. 다만 이후의 조왕이 개막장이던 조도양왕이라는 사실이 문제. 멀쩡한 조가는 조괄이 촉왕으로 끌어들여 버렸으니... 그래도 이목, 사마상 등의 명신들이 원역사보다 훨씬 큰 입지를 차지하고 조나라에 남았기 때문에 창후 등도 함부로 활개치진 못할 것이다.

4.1.1. 조괄 라인[7]

4.1.2. 왕족

4.1.3. 군부

조나라의 군인들. 반진 기조가 강해 진나라에 맞서고 있다. 염파, 이목이라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장 두 명을 제외하고도 악승, 경사 등 대군을 능숙히 다루는 인재들이 포진해 있다. 그밖에 이담, 사마상, 방난 등 아직 신출내기거나 재야의 인재풀까지 따지자면 쟁쟁한 진나라 명장들에게도 꿀리지 않아 조괄은 싸울 사람은 충분히 있다고 평가할 정도.

장평대전 이후 효성왕의 전적인 신뢰를 얻은 상장군 염파와[40] 대연 전선을 담당하는 악승이 군부의 서열이 가장 높은 듯 하며[41] 북군 대장 이목도 대 땅에서 흉노를 크게 격파한 이후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4.1.4. 조정

4.1.5. 친진파

연횡책을 지지하는 매국노 일파. 정치 외교적으로 친교 세력은 필요하지만 조나라의 친진파들은 진나라의 후원을 받고 충신들을 모함하고 자국군 수만명의 패사를 유도하는 등 명백히 선을 한참 넘겼다. 본래라면 장평대전 이후로는 분노한 여론에 의해 한동안 조용하다가 조나라 말기엔 결국 한창, 곽개 등이 득세하며 염파와 이목을 축출, 조나라의 망국을 유도한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장평대전이 개변되어 이후로도 수장인 누완 등이 자리를 유지했으나, 조괄이 적극적으로 진나라의 책략을 훼방놓으면서 친진파에도 점차 큰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여불위를 후원해 조나라 혈통을 진나라 왕위에 앉히려 드는 등 책략을 펴고 있으나, 그 결과를 아는 독자나 조괄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요소가 없다. 정작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이들이지만 진나라의 뇌물을 받았다는 약점 탓에 거절해야 할 일에도 휘둘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곽개 이전의 수장격인 누완은 진나라가 인접한 한,위,주 등을 명백히 멸하려 드는 정황이 보이고 자국군 수만명이 죽을 뻔 했음에도 진나라에 맞서지 마는 것이 평화라며 주장하는 매국노 그 자체다운 열변을 토한다.

조괄이 대진 합종군으로 부친 조사처럼 조나라 최고 요인으로 발돋움하자 친진파도 함부로 못 건드리게 되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조연전쟁을 부추기거나, 진의 2차 침공에서 합종군 거병을 막는 등 작품의 최고 욕먹는 세력이다. 하지만 함곡관이 개박살나고 진나라가 작살나는게 결정된 지금 현 상황에 이들이 숙청되는건 정해진 미래였지만 곽개가 생존본능을 발휘해 빠르게 진을 손절하고 연국론 지지론자로 변모 어떻게든 살아남는 생존력을 보여줬다.

4.1.6. 기타

4.2. 위나라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물론 한나라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이 쪽도 그리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57] 본래는 삼진을 구성하던 세 나라 중에 입지도 좋고 국력도 강했지만(위문후 시기에는 전국칠웅 최강국이었다.) 연이은 전쟁의 패배와 내부의 부패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58][59]

10만 대군을 운용한다고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인 동원력은 그 7~8할에도 약간 못 미친다. 한가구당 1명 징병 정책을 대놓고 무시하고 부자, 형제지간을 같이 징병해서 억지로 10만 대군이라고 뻥튀기한 것.[60] 결국 신릉군이 군권을 강탈해 폭주를 시작하면서 대진 전쟁의 서막을 열게 되고 당연히 위나라 조정의 뜻이 아니었던지라 위나라 조정은 대진 합종군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신릉군에게 보급을 보내지 않았다. 이후 신릉군을 견제하기 위해 합종군 차장인 조괄에게 접촉했다가 조괄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신릉군이 이끄는 군대에 보급을 다시 보내면서 합종군에 제대로 참전한다.

무졸이라는 오기가 제도화한 정예 중장보병이 특히 유명하다.[61] 신릉군 위무기는 이전에 집단으로 운용했던 무졸을 여러 부대에 분산배치해 각 부대의 공격력과 작전 수행능력을 높이는 개혁을 시행했다.[62] 그러나 사실 무졸은 위나라를 수렁에 가라앉히는 족쇄나 마찬가지다. 오기 시대에는 무졸군단이 말 그대로 일당백이었으나 전국시대가 절정에 오른 지금은 일반병들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져서 무졸들도 전과같은 활약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막대한 혜택을 받아가니 위나라가 체급에 비해 전력을 못 내게 된 것. 조괄은 객경으로 위나라 정계에 투신해 무졸을 혁파할 작전을 짠다.

위나라에도 다른 육국처럼 친진파가 득세해 위나라의 변법이나 반진행위를 막아왔다. 다만 네임드 매국노 곽개에 비할 사람은 없어서 행동이 단순해 조괄을 막겠다고 진이 힘들게 지원한 군자금도 낭비하고 있다.

진나라의 2차 관동 침공에서 한나라가 위나라가 빠지지 못하게 할 작정으로 길을 열어버리면서 30만 진군이 국토 대부분을 점거하고 수도를 위협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에 주력군을 모으는 한편 신릉군을 다시 불러들여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 조괄과 자순의 고생 덕인지 국토 대부분을 상실한 상황에서도 7만의 병력이 남아있었고 박랑사에서 합종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끝내 나라를 지킨다.하지만 국내 총력전으로 황폐화 다행히도 함양을 함락시켜서 진나라의 군량 상당 부분 차지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제나라가 대량에 많은 물자를 제공했으니 어찌어찌 다음 수확철을 기다릴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2차 대진합종군의 결과 진을 격파하고 중원의 강국으로 부상한 조나라, 싸우지도 않고 뒤늦은 투자만으로 국력을 온존한 제나라에 비해 가장 큰 피를 흘리고 얻은 게 없는 나라가 되었다. 만일 신릉군을 위나라의 장군으로 중용하고 믿어줬다면 2차 대진 합종군에서 얻은 안읍과 함곡관 일대는 위나라의 영토로 돌아왔을 것이다.

4.2.1. 왕족

4.2.2. 군부

4.2.3. 기타

4.3. 한나라

전국시대 내내 극히 일부시기를 제외하면 약소국 신세를 면치 못했으며, 작중시기에도 그렇다. 애초에 장평대전이 일어난 이유도 한나라가 본토와 상당 17성을 연결하는 야왕성을 뺏기고 진군이 상당으로 진격하자 상당태수가 상당 17성을 조나라에게 바친 것이니 말 다했다.

이 때문에 항상 진나라의 압박을 받으며 눈치를 보고 있다. 진나라에 바칠 무거운 조공을 바칠 여력이 부족해 미녀들을 노예로 팔아 비용을 충당하고, 장기적으로 볼 때는 큰 악수인 피진계[73]를 잠깐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쓸 정도.

주나라를 멸하기 위해 가해진 공격에서도 양평과 부서 지역을 빼앗기며 크게 패전하고 있다. 그러나 조괄이 악착같이 버티면서 전황이 고착되자 위나라, 초나라가 개입한다. 한나라는 진에게 당한 게 많기에 고민했지만, 빼앗긴 야왕성과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결국 위군이 내준 야왕성을 점령하고, 초나라에 길을 내주면서 대진 합종군에 합류해 군사를 소집하면서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한다. 삼진 중에 가장 상황이 안 좋아서, 국력을 기울여 모은 병력이 3만에 불과했다.

대진합종군이 끝난 후에는 진나라의 관동영토를 무상으로 받아서 진나라와 다시 국경을 맞댔다. 말년에는 진나라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원역사와는 달리[74] 반진 기조를 확실히 다잡아서 진나라가 오륙만 정도의 군대로 협박해도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조괄의 인기와 연국론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은 국가기도 하다.

진군의 재침공이 30만명이라는 말도 안되는 규모라서 막을 엄두를 못내고 서쪽 지역 대부분을 빼앗긴다. 그러나 이는 위나라가 총력을 다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저항을 포기하고 군사력을 보존한 것이기도 하다. 대진 합종군에서 영토를 두 배 가까이 늘리기는 했지만 제대로 복구하기도 전에 진군이 쳐들어왔기에 동원력은 5만 정도라고.

박랑사에서 왕전과 진군이 대패해 합종군이 관동을 회복하자 합종군에 병력의 대부분인 4만 병력을 보내고, 함곡관이 파괴되자 한나라는 힘을 다 쥐어짜서 합종군을 지원하는데 쓰기 시작한다.

4.4.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위나라와 접경하고 있는 중원 동북쪽의 전국칠웅 국가. 연나라 왕가에는 주나라 왕실의 피가 섞였다.[77] 조괄의 말로는 주요 칠국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체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칠국 중에서나 약체에 변방국가인 것이지, 인접한 제나라, 조나라와는 십수만 대군을 동원해 싸울 수 있는 강국 반열에 든다. 25년 전 제연전쟁으로 합종군의 선봉에서 명장 악의가 제나라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현재 조나라도 국경에 악승과 경사 등의 유능한 장수들과 대군을 배치해 장평대전이 벌어진 도중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장평대전으로 약해진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가 염파와 악승에게 털리고, 나중에 보복을 시도했다가 방난에게 격파당하며 역으로 얻어터지는 참교육을 맛봤겠지만, 여기서는 조나라가 멀쩡하면서 연나라는 조용히 있었다. 덕분에 국력은 유지한 셈이며 조나라와의 사이도 원수 지간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대진 합종군에도 2만명의 병력을 조나라가 열어준 길을 통해 보내면서 참전한다.

그러나 하북을 일통하면 관중(진)에 견주는 국력이 나오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나라 측에서 친진파들의 입김으로 연나라를 칠 욕심을 부리는 상황.[78] 결국 조괄을 딴 나라로 보내고 염파, 악승, 방난의 지휘로 대군을 동원한 조나라에게 대패하지만 수도 계성을 지키면서 시간을 벌고 있다. 결국 조나라에게 영지 일부와 상국 임명을 넘겨주고 협상한다. 2차 합종군에선 조나라의 요구로 3만을 동원한다.

4.5. 제나라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진나라와 둘이서 동제와 서제를 칭할 것을 고려하는 등 칠웅 중 강국으로 꼽혔고, 명장 광장이 삼국의 합종군을 지휘해 함곡관도 깰 정도의 기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소모가 너무 커서 관중에는 제대로 진입도 못하고, 이 것이 이전의 업보와 더해져 제나라를 경계한 이웃의 맹공으로 멸망 직전까지 갔다.

25년전에 제연전쟁으로 국가가 멸망할 위기를 넘긴 후 조나라가 45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얼추 국력을 회복했으나, 전쟁의 트라우마로 국가 전체가 소극적, 고립주의적으로 변해 전단과 군태후만이 어찌저찌 타 6국에 대한 지원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노쇠하여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이다. 고립주의로 타국과의 교류가 줄어들고 몽오와 같은 인재가 유출되며 군대가 약체화 되는 것도 약점.[80]

주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초나라를 도와 낙양에 군수물자를 보급했다. 초나라는 깨졌지만, 이후 조괄과 신릉군이 나타나 진나라를 크게 격파하자, 병력은 보내지 않았지만 막대한 군량을 낙양에 지원하면서 사실상 참전했다. 종전 후 군 태후가 사망하면서 나라가 고립주의에 접어들었다. 조괄은 진나라도 '제나라'처럼 만들어버릴 작정이다.

2차 대진 합종군 당시는 함곡관 파괴시까지 참전하지 않았지만, 진이 갈라지면서, 삼진이나 초나라보다 더한 이득을 보고 결국 전국시대의 승자가 되었다.[81][82]

4.6. 초나라

춘추시대부터 진(晉)나라와 이극 체제를 이룰 만큼 강국이었고, 전국 시대에도 진(秦)나라와 천하통일을 다툴 나라로 평가받았지만, 초회왕의 뻘짓과 백기의 공격으로 형주 중부에 해당하는 수도 영과 부수도 언을 빼앗기고 구 오나라, 월나라 땅으로 수도를 옮긴 상태. 이 때문에 계속 진나라에 대한 복수를 열망하지만,[88] 백기 때문에 번번히 깨지는 상황.[89]
또한 20년 전에 이전한 현 수도인 진성 지역은 물가 폭등으로 생필품도 없어[90] 난리인데도 진나라만이 아니라 노나라, 제나라 등으로 다방면적인 공세를 계획하고 있어서 합종책 내부의 트롤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그래도 타국에서 진에 한 방 먹이면 반드시 호응하는 국가기도 하고, 본래 역사에서 멸망했음에도 들고 일어나 진을 무너뜨린 나라기도 하기에 대진 합종에 있어서 초나라를 빼먹고는 이야기가 안된다. 조괄과 신릉군이 일으킨 대진 합종군에서도 가장 먼 거리에 총군의 5할에 가까운 10만 병력을 보내는 등 신릉군과 조괄 다음가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합종군의 주력으로 활약한다.

그렇게 합종군에서 활약했지만 그 이후 노나라를 공격하거나, 제대로 된 구상 없이 수도를 거양으로 옮겼다가 진군의 공세 사정권에 들어오는 등 국력을 낭비하며 트롤짓을 하고 있다. 진의 대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합종군을 결성하기 위해 전군을 소집했지만 거양 수도 이전의 예산 낭비 탓에 간신히 7만. 그것도 정예도가 이전보다 확연히 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함곡관 돌파 후 자오곡 대치가 길어지자 자기들만 남군을 돌려받고 발을 뺄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협상은 관중에 파견된 초나라군이 진군의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엎어졌다.

창평군이 초나라가 회복하려던 남군을 창평군을 내세워 가로챘고, 후일 초의 10만 대군도 수전에서 압도해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나게 만든다. 초나라가 몇번이나 조괄을 고생시키고 도움이 안되었던 탓에 일부러 초나라 유리할 일을 해주지 않았다고.[91]

4.7. 진나라

전국시대의 명실상부한 최강국. 전국칠웅 중 삼분의 일 영토와 이분의 일 수준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그나마 비견할 만한 것은 초나라뿐이지만 질적으로는 진나라가 훨씬 더 우위에 있다. 위염의 섭정을 거쳐서 전성기를 맞았으며 지독히 엄격한 법가 통치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 철통의 방벽인 함곡관 안의 본토에 더해 작중 시점에는 함곡관 동쪽에도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함곡관 안의 본토만 해도 생산력으로 중원 제일을 달리는데, 초나라에게 빼앗은 형주의 영과 언, 위나라에게 강탈한 안읍 등 서하 영토로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한다.

경제력, 군사력, 인재풀 모두가 육국 최상위권에 달하지만 소양왕의 집권기에 활약하다 죽은 외척 양후 위염과 그에 열등감을 느낀 소양왕의 갈등과 민작 제도와 잔혹한 법가 통치를 싫어하는 육국의 백성들 문제 등 약점은 존재한다. 군대들이 전부 검은색 천이나 옷으로 무장해서 상대하는 육국에게 위압감을 준다고 한다. 조괄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벌어지는 실태를 알기에 진나라를 막는 것에 양심의 가책이 없다. 대진 합종군에게 크게 패한 이후 관동 영토를 포기하고 관중에 도강언 공사를 진행하는 등 본토의 개척사업에 총력을 쏟아 10년 후 수 배의 전력으로 재공세를 시도할 예정이다.

이 와중에도 관동육국에 정치전을 걸고 있다. 그러나 수천의 금을 뿌리던 대진 합종군 전쟁 이전과는 달리 오백 금을 뿌리는 것도 아슬아슬하며, 파촉 사람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고 있어 내부의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다. 중간에 소양왕과 효문왕이 연달아 죽는 사건도 있었지만 이 불만을 억누르고 도강언을 완성. 다시 재충전한 국력으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서 조나라의 상당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관동 진출을 시도한다. 무려 30만 대군으로 5년 이상의 군사작전을 각오하고 있다.

천하를 통일해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명분으로 학살에 거리낌이 없다.[100] 몽오, 채택 등은 진의 변법과 명분이 옳다고 생각해 귀순했다. 순자는 진나라의 천하통일 명분을 꺾을 사상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조괄과 함께 연국론을 창설해 반박에 나선다.

진나라의 힘 자체도 육국 최고이지만 무엇보다 무적의 방어 라인 함곡관 탓에 진나라는 일방적으로 적국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있다. 유리할 때는 함곡관 밖의 조,한,위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다 합종군에 의해 전황이 불리해지면 함곡관 안으로 후퇴하는 것. 조괄은 여러 번 진나라에 타격을 주고 방해했지만 함곡관을 부수고 관중 본토를 타격하지 않는 한 제자리 걸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약을 개발해 함곡관을 파괴할 계획을 짠다.

2차 대진 합종군에서 왕전이 하외에서 대패하면서 관동 확장은 실패, 조괄이 함곡관을 날려버리면서 진나라는 수십년 간의 우위를 상실하고 본토를 침략받게 되었다.

한편 조괄은 진나라의 핵심 국력 중 일각인 파촉[101]을 진 본토 공략전에서 자신의 영지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정확히는 수비에 유리하지만 제대로 된 정부가 들어서지 못해 진, 초에게 수탈당하다 진에 합병된 파촉을 독립시키고, 파촉과 남군을 분리해 진나라를 삼등분 시켜서 하나는 자신이 차지하고 다른 하나도 중립국으로 만들어 연국론의 근거지로 삼을 생각.

결국 패배해 관중을 제외한 남군, 파촉이 전부 영토에서 떨어져나가게 되면서 국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이후 촉나라가 7번 출병해서 연국론 질서를 지켰다고 하는 걸 보면 끝내 관중에서 다시 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4.7.1. 조정

4.7.2. 군부

4.7.3. 기타

4.8. 주나라

4.9. 촉나라

진나라에서 해방된 파촉 땅. 당시에는 연나라 이상가는 중원 변방으로 취급받았으나 실제론 진나라 국력의 한 축을 맡았던 땅이다. 도강언이 완공되 흉년이 들지 않게 된 땅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금광산도 상당수 존재한다. 조괄은 파촉의 잠재력이 중원의 지역들에서도 충분히 상위권에 들어간다고 알고 있었기에 2차 대진 합종군 이후 파촉을 분리해 조가를 왕으로 옹립해서 촉국을 세운다.

파촉은 수비에 유리하고 화약의 힘까지 더하면 철통수비가 가능했으며, 파촉 사람들도 중원의 힘 과반을 차지하는 강국이 나타나면 파촉이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지난 식민 생활로 깨달았기에 연국론과 묵가를 지지하게 된다.

5. 개변된 역사

6. 기타


[1] 다만 장평대전의 예산 손해 탓에 수년 간이나 골골댔다.[2] 물론 원 역사에서도 단독으로 연나라의 수도를 포위한 적이 있었다.[3] 다만 국토의 한계가 있어 바다를 낀 부유국인 제나라 수준의 자원 공급은 안된다.[4] 장평 전투 이후로는 식견이 있는 사람들 상당수가 전국칠웅 중에 조나라만이 그나마 진나라와 비슷한 조건으로 싸울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위나라와 한나라는 이미 연이은 패배로 기본 동원력이 크게 밀리는 데다 접경지가 전부 평야라 수비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상황이고, 초나라도 마찬가지로 원래 수도였던 영을 진나라에 빼앗긴 후부터는 전투 시의 입지가 불리해져 중원에서의 싸움은 시작부터 손해를 보고 들어가는 판이다. 멀리 떨어진 연나라와, 제연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고 전단 이후로는 대군을 지휘할 인재가 나오지 않는 제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조나라만이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병으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맞설 수 있는 것. 다만 경제력은 조나라가 진나라보다 못하기 때문에 제나라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5] 조경래 작가의 전국 등처럼 이 시대 대체역사물에서 조나라가 주요하게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6] 그 외에도 상당 땅에 적지않은 군사를 보내서 점령하는 등 합종군 외에도 군사활동을 벌였다.[7] 조괄이 천거, 혹은 조괄에게 의탁해 계속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다.[8] 아버지와 구분을 위해 소마복으로도 불린다. 2차 합종군부터는 부친을 넘어선 대마복이 된다.[9] 하북의군을 이끌기 위해 관직을 내려놓았다.[10] 장평에 도착한지 겨우 사흘만에 출전하라고 독촉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여기 온지 일주일도 안돼서 파악이 덜 됐다는 핑계로 독촉을 막았지만 이후로도 매일같이 전령을 보내서 출전하라고 압박했다.[11] 원래 조, 위, 한 삼국은 진(晉)나라가 셋으로 쪼개지며 성립한 나라들이라 흔히 삼진이라 부른다.[12] 과거 위나라 재상이었으나 범수가 미미했던 시절 진나라 간첩임을 의심해 심한 매질을 하며 원한을 샀다. 이 과거사를 트집 잡아 조나라가 위제를 죽여서 위나라의 원망을 사게 만드려는 계책이다.[13] 장당의 진군은 낙양의 패전과 위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조금만 기다리면 전력이 급락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치면 쉬운데 만약 신릉군이 진군에게 져버리면 다시 진군이 기력을 회복하고 우위에 서기 때문에 무리해서 치고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14] 만일 실제로 파촉왕이 된다면 간절히 작품에서 드물게도 비 왕족 출신으로 왕이 된 셈이다.[15] 전단이 화우지계를 써서 멸망 일보직전까지 몰렸던 제나라를 구한 증표이다. 제나라 조정은 즉묵용린을 소지한 자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했다.[16] 진나라 군부는 왕전과 몽오가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차였는데, 하필 조괄이 활약할 때마다 몽오가 묘하게 엮이면서 패전처리용으로 오명을 뒤집어쓰기 싫어서 몸을 사린 덕분에 왕전이 나서게 되었다.[17] 훗날 삼국시대에 국의가 공손찬을 물리친 방법을 썼다.[18] 조괄도 빙의 전에 효성왕이 넘어간 것에는 얼굴과 말빨 탓도 있다고 자평할 정도.[19] 다만 기본적으로 머리도 좋고 경험도 상당히 쌓여서 대진 합종군 시기 정도가 되면 전황 정도는 정확히 읽는다.[20] 최종 결전에서 화약을 터뜨려 함곡관을 무너뜨리려 할 때, 보안은 물론이고 전쟁사에서 화약이 첫선을 보이는 자리인지라 조괄도 두루뭉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신릉군이나 이목은 조괄이 연금술에 심취하더니 살짝 돌았나 의심하면서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21] 사실 곡수 전투, 민지 전투는 합종과 연횡 가운데 승자가 전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싸움인지라 어느 한쪽이 막는 거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곡수 전투는 수전, 민지 전투는 애당초 조괄이 주 지휘관이 아니라 경사가 맡았다. 다만 2차 합종군에서는 황하, 포전택에서 진나라 기병을 대파하면서 후대에는 조괄은 공방 어느쪽이든 평균 이상은 한다는 평을 받는다.[22] 1대 마복군 조사가 연여 전투 이후 병사한 기록이 있으니까 장평대전부터 나오는 마복군은 조괄이 확실한데 그 때부터 20~30년간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지라 다방면에 있던 조씨 가문의 사람 두세 명이 마복군 조괄 한명으로 합쳐진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을 정도.[23] 진의 천하통일을 막고자 하지만, 이들의 합종책 역시 서로 이익을 따지지 않고 한 나라처럼 힘을 합치자는 것이라 천하통일을 향한 행보로 해석할 수 있다.[24] 진나라 별묵이 소양왕 눈치를 보느라 맞다 아니다면 끝나는 간단한 응답도 못했고, 이를 본 각국 묵가와 학자들은 정말로 지록위마가 현실성이 없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묵가의 반진 기조에 기세를 더해준 셈.[25]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과 동명인이라 사기에서는 이동이라고 피휘되어 나온다.[26] 이 때 이담은 소년 나잇대라서 10대 중반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기에 하급 관리인 아버지도 너무 갑작스럽다면서 당황한다. 조괄은 이에 죄책감을 느꼈다.[27] 왕흘의 지휘하에 침착하게 후퇴하는 진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시 돌격해 급습. 긴장이 풀려 휴식하던 진군을 완전히 대파했다.[28] 조나라 군부에서 차세대 유망주로 인정받은 이담, 사마상과 달리 주문은 조괄의 식객에 가까웠기 때문에 비교적 처신이 자유로왔다.[29] 이담, 사마상과는 달리 주문처럼 어리고 경험도 적을 뿐더러 군부의 참모가 아니라 조괄의 식객이자 책사다.[30] 물론 효성왕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의병 역시 사실상 조나라 군대였다[31] 여기에 조괄이 세운 전공도 있겠다 제대로 숟가락좀 얹어볼 심산이라고[32] 무작정 태자를 폐하고 다른 왕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면 장차 내란이 터지겠지만, 땅을 떼어주고 폐한다면 나라가 쪼개질지언정 왕위를 놓고 내란이 터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촉땅은 원래 조나라 땅도 아니고 진에게 뺏은 땅이다. 촉나라와 조나라는 거리가 멀기에 전쟁이 터질 걱정도 없다.[33] 원래 역사에서도 아들인 도양왕 수준의 암군까지는 아니었다. 염파 대신 기용한 조괄이 장평대전에서 대패했고, 이로 인한 염파의 축출, 인상여의 사망, 나라가 멸망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 평원군마저도 역할이 축소되며 반진파가 몰락해 친진파인 곽개에 대항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 장평대전으로 나라가 휘청이긴 했지만 불과 몇년 뒤에는 진나라를 이기기도 했고 연나라를 상대로는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다만 장평대전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했고 저렇게 연나라와 다투다보니 진나라에게 대량으로 땅을 뜯기는, 특히 첫 수도인 진양이 점령당하는 참사가 벌어지는 등 한계도 분명한 군주였다.[34] 효성왕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힌 평원군을 살리기 위해서 위제를 진에 넘겨줄 생각이었고, 위제는 위나라로 도망쳤다가 위나라에서도 버림받자 자살했다. 결과적으로 조나라와 위나라는 의가 상했고, 평원군은 만천하에 빙다리핫바지 인증을 해버린 셈.[35] 조괄의 계책을 받아들여 의군을 칭하며 관직을 버린 조괄과 조나라 사구정변에 연루되어 커리어가 끝장난 방난, 흉노족 기마병 등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발뺌할 수 있는 인선이었다[36] 정확히 말하면 왕을 직접 까긴 뭣하니 대신 평원군을 까는거다. 사실상 평원군만이 아닌 조나라 윗선 전체를 까는 것.[37] 조조의 아들 조충이 코끼리의 무게를 잰 방법을 사용했다.[38] 편의상 3300분의 1이 1근[39] 말하는 것이 효성왕은 작위라도 줬으니 가끔은 고맙지만, 도양왕 밑에 머리 숙이기는 정말 배아프다고 한다.[40] 원래 역사에서는 장평대전의 패배로 조나라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린 뒤 효성왕이 다시 기용했지만, 여기서는 공세를 주장한 조괄이 정작 염파의 전략을 담습해 이기면서 인정받았다.[41] 염파와 악승은 나이도 노인이 되었을 만큼 먹었고, 둘의 주장 아래 군부의 반진 기조와 기병 확장 정책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다.[42] 작중 조괄이 손자병법에 의거하여 계산한 바를 따르자면 현대 가치로 10조 8천억원 가량의 비용을 소모했고, 하루에 1천 80억원이 날라가는 상황이었다. 45만명이 징병된 것에 따른 기회비용을 합치면 그 몇배의 비용이 날아간 상황. 다만 시대별로 화폐와 금의 가치 물가와 인플레이션 등 고려할 요소가 많기 때문에 이런 어마어마한 거액이라는 느낌이지 정확한 액수라고 여기면 안된다. 참고로 2020년 대한민국 기준 550조를 국가예산으로 지출했다. 부처별 예산은 국방부와 교통부가 50조 노동부 30조 과기부 16조 농산부 15조 정도니 대략 감이 올 것이다.[43] 고사성어 문경지교 시즌2를 찍었는데, 당사자인 염파는 이게 인상여가 알려준 계책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조괄을 붙잡자 인상여가 남긴 글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 글에는 '조괄처럼 염파의 전략전술을 실현할 수 있는 젊은이가 있으면 오히려 기뻐해야하지 않겠냐. 네가 화를 내봤자 진나라만 좋아할 것이다.'라 써있었고 염파는 이를 수긍하며 조괄을 용서한다.[44] 원래 역사에서도 염파는 열세한 전력으로 연나라를 대파해 수도 계성을 포위한 실적이 있다. 다만 그 상태로 1년 이상 결판을 못 내서 결국 강화를 맺고 끝난다. 그러나 이 일로 조-연 관계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45] 신릉군과 조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대전제는 진나라와 육국은 체급차가 너무 나기 때문에 시간을 끌면 진나라는 더욱 강해질 뿐이라 헛점을 보였을 때 한타 싸움에서 이기고 여세를 몰아 함곡관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종군은 육국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어느 순간 누군가 발을 빼거나 간보기에 들어가면 동력을 잃기 때문이다.[46] 효성왕이 조괄, 이목 등이 해외원정에서 독단적으로 구는데도 방치하는 이유는 한단에 염파가 있는 이상 만에 하나라도 반란군에게 기습당할 확률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47] 악승도 방난과 비슷한 연배의 노장이라서 함곡관의 악명과 역사를 체감하며 살았기 때문.[48] 전국시대 막바지에 모종의 수단으로 함곡관 서쪽의 진나라 본토 최 지역을 공격했다. 다만 여력이 부족했는지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지는 못했다고.[49] 제나라의 명장인 광장은 뛰어난 군사적 수완으로 함곡관을 점령했지만, 정작 거기서 힘이 다 빠져서 진나라 본토에 진입하지를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다섯 국가에게는 경계대상이 되어서 합종군에게 제대로 깨지기까지 했다. 때문에 방난은 함곡관을 여유롭게 함락할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손을 대는 게 악수라고 여기고 우회책을 연구한 것.[50] 조괄이 무시만 해준 것도 천운이었다. 무시하지 않고 화를 내며 장을 쳐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51] 여불위와 접촉한 조괄을 압박하러 온 친진파 네 명과 다르게,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라고 하며 다소 거리가 있는 스탠스를 취했다. 그후 누완, 한창, 조표, 곽개 등이 의논하는 자리에 없는걸 보면 그저 친진파가 왕의 총남에게 끈을 댄거지 친진 매국노는 아닌듯 하다.[52] 조나라 북방 대 지역에서 수만 명의 인부, 장벽 건축과 관리용 물자 관리권을 가졌고, 한단과 멀기에 자체적으로 흉노와 전쟁을 할 수도 있을 정도.[53] 원래 역사에서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을 지휘관 삼으려는 효성왕을 뜯어말리다가 도저히 말릴 수 없자 대신에 조괄이 지더라도 일족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당시에 패장은 일족까지도 처벌받았기 때문이다.[54] 본래 조괄이 소마복, 조사가 대마복이라고 불렸지만 2차 합종군 함곡관 돌파 때부터 조괄의 공이 너무 커져서 조사와 조괄 모두 대마복이 된다. 극신은 구별을 위해 조사를 노마복이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55] 조괄이 장평, 낙양에서는 진군을 수월히 막았는데, 야전을 벌이지는 않으면서 수비전만 배우고, 공격전은 못 배웠다는 소문이 돌았다.[56] 또 조괄이 자신의 업적 일부는 조사에게 배운 거라고 둘러대기도 했다.[57] 진나라가 자랑하는 소금 호수가 있는 안읍이 본래 위나라의 수도권이다. 위 입장에서는 티배깅도 이런 티배깅이 따로 없다.함곡관도 본래 위나라 땅이었다.[58] 실제로 위혜왕 시절부터 위나라는 진나라의 샌드백 신세였다. 게다가 장평대전 30여년 전에 벌어진 이궐 전투에서 위나라와 한나라는 대패를 당한 상태였다. 참고로 이 때 나섰던 장수 역시도 백기다(...)[59] 그럼에도 조나라와 인구가 비슷한 저력이 있다고 한다. 황하를 낀 알짜 땅 대부분을 가진 덕이라고.[60] 이에 신릉군은 이렇게 같이 징병된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낸 뒤 남은 8만의 군을 이끌고 합종군을 이루게 된다.[61] 위나라 전성기에는 무졸 3만명이 진군 수십만을 깨고 다녔다. 그러나 백기 등장 이후 수십년간 한번도 못 이겨 나라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62] 무졸이 일종의 부사관 비슷한 역할을 수행케 한 것이다.[63] 원역사에서도 조나라의 평원군과 처남매부관계라서 사이가 좋았고 또한 합종군을 이끌어본 적도 있었다.[64] 장평대전 이후 위왕의 명령으로 한단 전선에 조나라를 도와 참전하지 않고 국경에서 대기만 하던 위나라 대장군 진비를 암살하고 군권을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했다. 덕분에 조나라는 살았지만 위무기는 위나라의 기반 전부를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된다.[65] 정확히는 이런 제스처를 본 진나라에서 알아서 한나라에 대한 압박을 포기했기 때문에 신릉군 역시 3천금을 마련하려고는 했으나 실질적인 지출은 없었다.[66] 후영이 조괄에게 신릉군에게 빚이 많다고 겁박을 걸었는데, 몇주간의 도주생활로 지친 조괄이 대놓고 "후영 선생과 주해 장사가 참 능력 좋다고 자자하지요." 라고 아는 척을 했다. 문제는 후영과 주해는 신릉군이 총애할 뿐 당시엔 명성이나 실적은 하나도 없었다. 참고로 이 둘은 미래에 위무기가 진비를 죽일 때 계획범과 실행범을 맡은 사람들이다.[67] 그나마 가장 정병을 보유한 조나라의 염파도 진심은 아니라지만 장평대전 당시 왕흘에게 국지전에서 밀렸다.[68] 위무기의 본래 수명은 기원전 244년. 여기서는 두번째 합종군이 기원전 247년에 시작해 1년 정도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후일 언급된 한위 전쟁 얼마 전에 죽었다고 서술하니 정말 최소로 쳐도 5년은 더 살았고 최대 10년 이상도 생각할 수 있다. 작가가 에필로그를 날림으로 써서 추정하기 어렵지만, 한나라와 위나라에서 중추원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을 걱정할 정도면 겨우 3, 4년 만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다.[69] 본래도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절망과 형제의 시기질투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 그에 따른 주색잡기에 빠진 탓에 사실상의 자살로 요절했다. 본작에서 평원군, 인상여, 전단,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 군 태후 등 병사, 자연사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역사상의 수명을 못 넘겼는데 위무기는 위 인물들과 다르게 수명연장에 성공한 것.[70] 원역사에서도 둘은 사이가 좋지못한 편이었는데 하루는 둘이 바둑을 두는데 갑자기 조나라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려왔다. 이에 안희왕은 놀라서 당황했지만 신릉군은 태연하게 조나라 왕이 사냥나온 것 뿐이니 안심하시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에 안희왕이 어떻게 이를 알았냐고 하자 신릉군은 자기 밑에 조나라 왕의 일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고 이에 안희왕은 신릉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안희왕은 신릉군의 군권을 빼앗아버리고 이에 실의에 빠진 신릉군은 주색잡기에 빠져지내다 4년 뒤 사망한다.[71] 친진파의 후원을 받은 무졸들이 상구에서 5천명이 넘게 몰리자, 사마상과 기병을 보내서 그들을 크게 대파했다. 무졸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림과 동시에 안리왕에게 경고한 것이다. 조괄과 자순이 사라진 이상 안리왕이 아무것도 안하면 변법은 실패하겠지만, 자기보신에 집착하는 안리왕의 성격상 위나라 정예군이 이미 허울에 불과하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아무것도 안할 수가 없다고 한다. 결국 처음부터 도왔으면 편하게 할 수 있었는데 전부 떠넘기려다가 된통 뒤집어쓴 셈.[72] 실제로 합종군은 계획없이 조괄과 신릉군의 폭주로 다분히 충동적으로 모인 다국적 연합군이라서 보급이나 수군 준비가 상당히 미흡했다. 조괄만 해도 신안성을 지원하는 진나라 수군을 막지는 못했지만, 제법 피해를 냈다고 생각해 무승부라고 판단했지만 자기 입지가 불안한 신릉군이 모종의 생각인지 조괄을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기에 조괄도 어이없어하는 와중이었다. 신릉군이 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는 불명확하다.[73] 진나라가 운하와 같은 토목시설을 건설하게 하여 국력을 소모하게 하는 계책. 하지만 처음 10년 정도는 이게 먹혔으나 그 후 진나라가 그 토목시설의 덕으로 국력이 더욱 신장되어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74] 한비자는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 진시황을 만나면서 한나라는 이미 진나라 속국이나 마찬가지라 진이 공격해도 욕만 먹을 것이다. 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75] 삼진에 대해 강경책이 지속될 경우 삼진합종을 기점으로 연횡책 자체가 물거품이 될 우려가 제기되었다.[76] 묵가를 예시로 드는데 비공의 원칙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수백명의 묵가가 수성 기술을 익히고 실제 참전도 무서워하지를 않으니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한다.[77] 엄밀히 말하자면 주나라 왕실에서 갈라져나온 왕가로 주문왕의 아들들 중 주무왕 가계가 주나라 왕실, 그 동생인 소공석, ㄱ리고 그 소공석의 아들들 중 연후 지의 가계가 연나라 왕실이다. 이 외에도 위나라, 한나라가 진(晉)나라 공실의 후손인데 진(晉)나라 공실의 시조는 주성왕의 동생이었으므로 두 나라도 사실 주나라를 조상으로 하긴 했다. 다만 연나라는 아얘 주나라의 희성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조나라와 한나라는 희성이되 조씨와 한씨라는 별개의 성씨로 분가한게 다르다. 참고로 조나라는 영성 조씨로 주적인 진나라와 같은 집안이다. 그래봐야 상나라 말기, 주나라 초기에 갈라진 남남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주나라와 연나라가 갈라진 시기와 비슷해서 차라리 위나라와 한나라가 더 같은 집안에 가깝다.[78] 조괄은 원역사에서도 조, 연이 수도가 포위당해도 독하게 버틴 것을 알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다면서 전쟁에 반대한다.[79] 종합적으로는 조사, 염파 등에 비견되는 1티어 위인이나, 책사적 면모를 빼고 군사적 면만 보면 애매해서 어려워한다.[80] 시대에 뒤쳐져서 기병에게 도태되는 전차를 아직도 주력으로 굴리며, 사령관정도 되는 장군도 타국의 군대 주력병과를 전혀 모른다.[81] 여담으로 조괄은 전단과 만남에서 제나라가 방관주의로 굴다가 망하면 정말 수천년을 조롱받게 된다고 비꼬았는데, 여기서는 멸망하지 않았고 욕은 먹겠지만 군량이나마 댔기에 그러지 않게 되었다.[82] 제나라는 본국의 군사력은 하위권이지만 경제력은 수십만 대군의 물자를 휘청이지 않고 댈 정도의 강국이라서 촉과 같이 연국론의 주요 국가가 되었다. 제연전쟁 이후 타국 침공도 안해서 명분도 있고.[83] 전단은 전쟁에 군대는 이삼만이면 충분한데 십수만 병력을 요구하는 마복군이나 다른 장군들의 전략이 형편없다고 깠는데, 이에 조사는 수십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전쟁은 인구 백만 이상의 칠국들끼리 국운을 걸고 싸우기에 십만단위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전단 본인만 해도 수십만 병력끼리의 총력전을 치른 입장이니 뻔히 알면서 괜한 소리를 한 셈.[84] 제연전쟁 후부터 전단과 태후를 제외하면 대국적 안목을 가지는 걸 포기했다. 그나마 전단이 있기에 지금은 반진 전선에 물자라도 보태지만 원역사에서 두 사람이 죽은 후 제나라는 그대로 어떤 반항도 안하고 망했다.[85] 백기가 초와 위의 소금 광산을 강탈한데다가 한수와 장강을 장악하면서 경제적, 지리적으로 진나라는 다른 육국보다 훨씬 효율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해졌다.[86] 전단은 악의는 없을 뿐더러 제를 비하하는 조괄의 의견도 인정해주고, 후일 제나라를 통해 지원을 늘려주는 등 주고받는 게 확실했다.[87] 단순히 조괄을 무시한다기보단 군태후가 살아있을 때 일을 벌여야 제나라가 도와줄 수 있다는 의사표시로 보인다.[88] 작중에서는 이것 외에도 제연 전쟁으로 제나라가 골골 앓는 신세가 되고서는 진나라의 맞수라고 할만한 상대가 초나라만 남게 되자 진나라에서 작정하고 초나라를 괴롭혔다고 서술한다.[89] 이 영과 언. 즉 형주 중부를 빼앗긴 게 유난히 뼈 아팠는데, 영은 장강의 지류을 통해 수로 교통이 매우 편한데, 한수를 통해 북쪽으로 움직이기 쉬웠기에 초나라가 언제든 중원에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성 지역을 중심으로 육로로 움직이며 병사를 모아야 해서 효율이 반토막이 났다. 심지어 진나라는 영을 손에 넣으면서 자국 내의 운송 속도를 배로 올려 국력을 상승시켰다.[90] 본래 초나라는 장강 인근인 남군 지역에 수도를 두고 그곳에 자생하는 갈대로 여러 생필품을 만들어 썼다. 그런데 수도를 옮긴 진성 땅에는 갈대가 나지 않다보니 갑작스런 인구 증가에 생필품이 동나버린 것. 때문에 제나라의 군 태후는 짐승가죽이나, 나무로 생필품을 만드는 장인들을 파견해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은근슬쩍 경고한다.[91] 또한 초나라가 전성기적 국력을 회복한다면 진나라 포지션을 가져갈지도 모르니 막아야 했다.[92] 또한 고열왕은 진소양왕 밑에서 볼모 생활을 한 인물이다.[93]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주나라에 모인 합종군은 손발이 안 맞아 진군에게 깨진다.[94] 경양이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지휘하니 최고 권위자이기는 하지만 1년이나 낙양을 지켜 중원에 명성을 떨치는 인물인데다 본인도 낙양에 들어올 때부터 조괄과의 친분을 드러내면서 들어왔기에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95] 물론 순수 선의라기보다는 조괄이 부족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의 지휘권이 확고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던 점도 있다.[96] 대신 조괄 산하에 배치한 초나라 장수들에게는 하나하나 편지를 써서 갈궜다고 한다(...).[97] 조괄은 수도권 문제를 해결 못해 수도를 이전하느라 국력을 소진하는 걸 꼬집은 것이다.[98] 거양이 위험하니 주민들을 피난시키기로 한 곳이 수춘인데 이곳은 미래 강남 땅의 주요 요충지가 되는 곳이다. 조괄이 춘신군와의 대면에서 계속 봄을 강조했기에 이를 떠올린다.[99] 또한 항연은 이 행위가 합종군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알고 있기에 양심의 가책이 컸다.[100] 실제로 백기와 진군의 학살은 당시에도 비난의 대상이었다.[101] 이 시점 진나라의 주력 생산지는 관중, 한중, 파촉이다.[102] 소양왕은 40년 넘게 왕위에 있었지만 30년이 넘는 시간을 위염을 실각시켰다가 생긴 여파를 감당 못해서 다시 복귀시키면서 눌려 살았다.[103] 효성왕이 평원군을 돌려받기 위해 위제를 살해하여 조나라와 위나라의 사이를 벌리기 위한 술책이었는데, 평원군이 탈출하면서 효성왕이 위제를 죽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104] 소양왕이 무의식적으로 구정의 무게를 (진나라의 단위가 아닌) 주나라에서 정한 3300근으로 언급했다.[105] 친진파들도 채택의 이런 지시에 자신들이 채택의 부하인줄 아냐며 매우 불쾌해한다.[106] 실제로 소금 산지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질 중추원, 본래도 초나라 수도권이라 일국 사이즈인 남군, 역시 풍족하고 방어에 유리한 파촉이 군사적으로 연계하면 관중만 남은 진나라로선 어지간히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엔 못 먹는다.[107] 근본적으로는 염파의 전략이자 전국시대의 흔한 전법이지만 진의 국력과 중원 정세상 백기의 승률이 훨씬 높아서 위협적이다.[108] 신안성이 계속 버티기만 해도 적군 5만을 붙잡아 둘 수 있는데다가, 잘만 하면 민지성에서 곡수를 타고 병력을 신안성까지 보내서 합종군 주력부대의 후방을 차단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위무기랑 정면에서 싸울 필요도 없이 몽오가 이기는 셈이다.[109] 제, 연, 한, 위는 수도가 포위당해도 한차례 이상 멸망하지 않고 버텼으며, 이 역사에선 사라졌으나 원 역사의 조나라도 한단포위전을 끝내 이겨냈다.[110] 무엇보다 합종군의 약법삼장 구호에 진군이 사기를 잃는 걸 보고 진나라인들조차 상앙변법을 원치 않는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111] 제나라의 기대주까지 되었는데도 진에 온 몽오와는 달리, 몽무는 어린 시기에 진에 와서 출사했기에 고향을 버리고 진에 왔다는 생각이 없었다.[112] 후일 조고가 벌인 지록위마의 고사가 진에서는 진짜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대 사람들에게는 환관 따위가 황제마저 엿먹이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욕을 먹었지만 일부는 묘하게 생생한 담론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113] 대회가 열리는 노나라에 붙어 있던 양후 위염의 영지 도군을 이용해 양후 위염을 평가하도록 유도한다.[114] 그나마 진나라가 능이 능력이 있다고 봐준 데다가 가족들 때문에라도 관직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 한다.[115] 군부가 규를 변호한 이유는 보고서만 봐도 낙양그라드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조괄이 작정한 이상 누가가도 시간과 병력을 작정하고 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전장이라 규가 파직당하면 대신 지휘를 맡게 될까봐 그런 것.[116] 만일 이 때 장당이 수비로 버텼다면 백기가 무리해서 원조에 나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117] 본인이 조군 기병들의 기동을 끝내 막지 못해서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미 1차 대진 합종군에서 7만이나 되는 군대를 잃은 자신은 이제 귀국해봤자 전범이 된다고 판단하고 죽은 것.[118] 사실 진나라 조정의 문제도 있는 것이 끝까지 왕전에게 장양왕 건을 비밀로 하는 바람에 왕전은 합종군을 완전히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신릉군을 쓰러뜨리는 것에 집착했다. 어디까지나 진나라의 목표는 무사퇴각이었기에 퇴각 작전에 가장 문제가 되는 조나라의 기병들 상대에 집중하거나, 자신들보다 열세인 게 확실한 초군의 피해를 늘리는 데 집중했으면 작중처럼 함정에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119] 또한 염파도 불리하다고 생각한 연여 전투에서 호양과 함께 패하면서 조사가 두각을 보이게 만든 계기를 주기도 했다.[120] 조조의 아들 조충이 배를 이용해 코끼리의 무게를 잰 일화를 이용한 것으로, 한나라 근 기준으로 3386근이 나왔다.[121] 구정의 무게를 3,300근으로 하는 도량형이다.[122] 한편, 조괄이 낙양 입성 과정에서 동탁이 한 일(병력을 일부러 들락날락시켜 과장시키기, 칼을 찬 채로 어전에 들어와 천자에게 반강제로 싸움 독려를 하도록 강요한 일 등)을 일부 따라해서, 독자들이 낙양 파트를 보면서 동탁이나 조조와 관련된 드립을 쏟아냈다(...).[123] 무졸에 대한 평가로 노예는 양민이 되고, 양민은 부호가 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졸에 대한 혜택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