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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디 라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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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헤디 라마르
HEDY LAMARR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247 Hollywood Blvd. }}}}}}}}}


<colbgcolor=#2b1427><colcolor=#fff> 헤디 라마르[1]
Hedy Lamarr
파일:201144776c50a24bb461e9df758a09da.jpg
본명 헤트비히 에파 마리아 키슬러
Hedwig Eva Maria Kiesler
출생 1914년 11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2000년 1월 19일 (향년 85세)
미국 플로리다 주 캐슬베리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틀:국기|]][[틀:국기|]](1914–1919)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1919–1953)

[[미국|]][[틀:국기|]][[틀:국기|]](1953–2000)
직업 배우, 발명가
신체 170cm
데뷔 1933년 영화 <엑스터시>
배우자 프리드리히 만들(1933년~1937년)
진 마키(1939년~1941년)
존 로더(1943년~1947년)
테디 스타우퍼(1951년~1952년)
W. 하워드 리(1953년~1960년)
루이스 J. 보이스(1963년~1965년)
자녀 아들 제임스 러마 마키(1939년생)[2]
딸 더니스 로더(1945년생)
아들 앤서니 로더(1947년생)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위상3. 생애 및 활동
3.1. 어린 시절3.2. 영화인 활동
3.2.1. 출연작
3.3. 발명가 활동
4. 사생활5. 사건사고
5.1. 도벽5.2. 입양아로 위장했던 친자 파양5.3. 자서전 대필작가 고소 사건5.4. 성범죄 무고 사건
6. 말년과 죽음7. 여담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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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배우이자 과학자. 주파수 도약 기술을 조지 앤타일과 공동으로 발명했다.[3]

2. 위상

영화팬들에게는 섹스 심볼로 인식돼 왔지만 발명가로서 기술 발전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연기자로서 전성기가 채 10년도 안 될 정도로 매우 짧고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끝없이 일으켰기 때문에 미국 일반 대중에겐 그저 구설수가 많았던 왕년의 스타 이미지만 강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등장하기 전까진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연예인이었음에도 오스트리아로부터도 평생 외면당했다.[4] 그러나 90년대부터 발명인 경력이 재조명되면서 미국에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었고 90년대 말부터 오스트리아에서도 러마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예전에 흥행한 《삼손과 데릴라》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

3. 생애 및 활동

3.1. 어린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해인 1914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망한 은행가였던 아버지 에밀 키슬러(Emil Kiesler)와 부다페스트 출신 피아니스트 어머니 게르트루트(Gertrud, 혼전성은 리히트비츠·Lichtwitz)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발레피아노를 배우는 등 전형적인 당대 부유층 영애답게 성장하였으나 틈만 나면 시계를 분해한 후 다시 조립하는 등 과학과 공학에 대한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기숙학교에 다니던 중 친구 아버지와의 불륜 등 여러 성적 기벽을 저지르기도 했다.

3.2. 영화인 활동

쇼 비즈니스가 만든 가장 화려한 스타
파일:Geld-auf-der-Stra_e-2.jpg
《Geld auf der Strasse》 (1930)
십대부터 감독 막스 라인하르트[5]의 비서 일을 하며 영화계에 대해 알아가던 중 1930년 《Geld auf der Strasse(지천에 널린 돈)》의 단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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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터시》 (1933)
17살 때 독일-체코슬로바키아 합작 영화 《엑스터시》에 발탁돼 영화 역사상 최초의 전라[6] 및 오르가즘 연기를 펼쳐 전세계 영화계에 큰 쇼크를 주었다. 단순 연기가 아니라 실제 성관계 장면이라는 루머가 당시 크게 돌았는데 훗날 메소드 연기법을 쓰던 상대 배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긴 했다고 시인했다. 감독은 성적 희열을 느끼는 얼굴 표정을 만들겠답시고 엉덩이에 핀을 찔러댔고 러마가 너무 아파서 실제로 몸부림 치는 모습을 담아내며 "아주 좋아!"라고 말하곤 했다. 러마는 자신이 이 영화를 찍으면서 착취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 영화가 한창 유통 중일 때 남편이었던 만들은 시중에 풀린 필름을 있는대로 회수했지만 전부 없애겠다는 목적 달성엔 실패했다.

이후 러마는 비엔나에서 여러 연극무대에 올랐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의 삶을 그린 연극 '시씨'가 있다. 연극들은 모두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끌었고 자신의 팬 중 하나였던 남자와 결혼하는데 그가 바로 첫 번째 남편인 만들이다. 당시 러마는 19살이었으며, 만들은 14살 연상이었다.

연기 활동을 훼방 놓던 만들로부터 도망쳐 파리로 갔다가 런던에 이른 러마는 MGM 수장 루이 B. 메이어를 만나 발탁돼 주급 500 달러 짜리 4년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메이어와 함께 있던 대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러마의 미모를 높게 사 메이어를 부추겼다고 한다. 다만 《엑스터시》의 악명이 미국에서도 워낙 높았기 때문에 과거를 숨기기 위해 이름을 바꿔야 했다. 대서양을 통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배 위에서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바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la mer", 그리고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무성영화 스타 바버러 러 마(Barbara La Marr)의 이름에서 한국에선 라마르로 잘못 알려진 성 러마(Lamarr)를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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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지어즈》 (1938)
그러나 할리우드 데뷔작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나왔는데 바로 샤를 부아예의 상대역이었던 《앨지어즈》(1938)였다. 할리우드에서 전통적으로 각광 받던 전형적인 금발 미인이 아니라는 약점을 뛰어넘고 흑발의 미모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러마는 MGM에서 처음 찍은 《Lady of the Tropics》(1939)에 로버트 테일러의 상대역으로 나와 계속 인기를 얻었다. 스펜서 트레이시의 상대역이었던 《I Take This Woman》(1940)[7]는 흥행이 부진했지만 러마는 계속 높은 주가를 자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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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Live with Me》 (1941) 《지그펠드 걸》 (1941)
당대 최고의 스타들인 스펜서 트레이시, 클라크 게이블, 클로뎃 콜베어와 <붐 타운>(1940)을 찍는가 하면 게이블과 다시 뭉쳐 킹 비더의 가벼운 스파이물 《Comrade X》(1940)에 나오기도 했다. 로맨틱 코미디 《컴 리브 위드 미》(1941)에서 가난한 작가(제임스 스튜어트 분)와 편의상 결혼했다가 사랑에 빠지는 오스트리아 출신 망명객 자니 존즈(Johnny Jones)는 사실상 자전적인 인물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 주디 갈런드, 라나 터너와 나온 뮤지컬 《지그펠드 걸》(1941)도 있었다.

러마의 연기는 활동 당시에나 현재에나 "감정전달력이 부족하다"는 총평과 함께 전반적으로 낮게 평가받는다. 《앨지어즈》를 연출했던 감독 잔 크람월[8]은 "러마는 (연기하는 걸 보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보기만 해도 연기를 할 능력이 없다는 걸 업계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연기력이 미숙했다고 말했다. 그걸 관객들의 눈에 그나마 봐 줄 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게 일이었다고 덧붙이며. 샤를 부아예 등 같이 연기해 본 동료들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라나 터너도 러마가 "(질투가 나서) 아주 짜증이 날 정도로 예뻤"지만[9] "연기는 못했다"고 단언했다.[10] 배우에게 미모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미모 때문에 연기력이 실제보다 저평가받는 경우가 있고 연기력이 모자라도 미모에 기대 생명력을 이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러마는 후자였다. 발명인으로서의 러마가 미모로 인해 빛을 못 봤다면 영화인으로서의 러마는 미모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재조명되는 부분도 오로지 "과학자 러마"에 국한돼 있지 "연기자 러마"가 재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MGM은 "늘 모호하고 차가운" 연기밖에 못 하는 러마의 이국적인 외모에 주목해 정서가 불안정하고 말수가 적고 배신을 잘 할 것 같은 신비한 여인 역할을 주로 맡겼다. 이 과정에서 남자 주인공이 고혹적인 외국 미녀 대신 가장 미국적인 여자를 선택한다는 할리우드의 고정 클리셰가 형성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러마는 자신이 "그레타 가르보주디 갈런드를 합친 정도의 연기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11] 그리고 그에 걸맞은 긴 대사들이 들어있는 어려운 연기에 도전하고 싶어했지만 이를 보증하는 연기력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제작사나 감독은 러마의 대사를 될 수 있는대로 줄이려고 했다. 소량의 대사로는 현장에서의 연기 훈련을 제대로 체험하기 힘들었고 이는 다시 비슷한 배역들만 전전하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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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 풀햄, 에스콰이어》 (1941)
그래도 킹 비더의 《H.M. 풀햄, 에스콰이어》(1941)에서 보여준 독립적인 여성 역할만큼은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잠시 엿보게 했다는 논평이 있다. 광고회사 직원이 현모양처이길 요구하는 전남친에게 맞춰줄 수 없어 헤어졌다가 20여 년만에 재회해 불륜을 저지를 뻔 하지만 다시 각자의 배우자에게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제목의 H.M. Pulham는 남자주인공의 이름인 Harry Moulton Pulham을 가리키고 Esq는 귀하란 뜻이다. 서구팬들은 묵직한 시대물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물에 나올 시간에 차라리 이같은 현대 배경의 가벼운 소극에만 완전히 집중했다면 러마의 연기자 경력 향방이 상당히 달라졌을 수도 있을 거라며 아쉬워하기도 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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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roads》 (1942)
러마는 이어 존 스타인벡의 소설 원작을 로맨틱 코미디로 만든 《Tortilla Flat》(1942), 누아르 《Crossroads》(1942)까지 흥행면에서 상당히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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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Cargo》 (1942)
육욕을 이용해 고무 농장 관리자 랭퍼드(Langford) 역의 리처드 칼슨[13]을 파멸시키는 아프리카 원주민을 연기한 《White Cargo》(1942)도 흥행에 성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일본이 말레이 반도를 점령하는 바람에 서아프리카 정글의 고무 생산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현 고무 공장 관리자가 1910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다. 배역의 첫 등장을 인상적으로 연기한 덕분에 "I'm Tondelayo.(내 이름은 턴덜래요에요.)"라는 러마의 첫 대사가 유명했다. 턴덜래요는 사실 혈통상으로는 이집트아랍 혼혈이라는 설정으로, 라고스에서 나오는 비단, 금붙이 등을 탐내는 등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고 남자들이랑 놀아나지만 금방 싫증을 내는 성격으로 랭퍼드와 결혼한 뒤 지겨워지자 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죽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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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리 바디》 (1944)
그러나 《Crossroads》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MGM윌리엄 파월과 러마를 또 한 번 엮은 로맨틱 코미디 《헤븐리 바디》(1944)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RKO로 대여돼 찍은 《위험한 실험》(1944) 역시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이 영화에서 러마는 사회 관계가 일체 끊긴 채 조지 브렌트가 연기하는 남편의 감시 속에 집에 거의 갇힌 채로 지내는 연하의 아내 역을 맡았는데 우연찮게도 같은 해에 나온 《가스등》과 마찬가지로 가스라이팅을 다뤘다는 점이 오늘날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꼽힌다. 이 영화 속에서 러마가 부른 노래는 폴러 레이먼드[14]의 목소리를 입힌 것이다.

워너 브라더스에 대여돼 찍은 <음모자들>(1944)은 제2차 세계 대전 배경의 누아르로, 폴 헨리드가 상대역이었다. 네델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폴란드 국적의 레지스탕스들이 중립국 포르투갈에 모여 배신자를 색출하고 나치를 저지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카사블랑카> 출연진들이 거의 그대로 출연한 사실이 유명하다. 작품은 혹평을 받았다. 이즈음부터 러마의 경력은 확실히 위태로워졌다. 여배우로 쳐도 당연히 젊다고 할 나이대였지만 연기력에 별다른 진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성이나 흥행력을 보장하지도 못해 외모만이 자산으로 남아있던 러마는 서른이 넘자 부르는 곳이 별로 없었다.

역시나 평이 좋지 않았던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 <Her Highness and the Bellboy>(1945)를 끝으로 MGM과의 계약이 끝나면서부터는 경력이 완전히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MGM 산하 마지막 영화는 간만에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여기엔 함께 출연한 준 앨리슨의 공이 컸기 때문에 MGM은 여전히 더는 러마와 함께 할 생각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러마는 직접 제작사를 차렸는데 이는 오늘날 용감한 시도로 여겨지나 러마는 자신의 고정 이미지를 자진해서 답습하는 데 그쳤다. 본인 스스로를 발탁해 만든 규모 있는 스릴러 <낯선 여인>(1946)이나 신파극 <Dishonored Lady>(1947)는 범작이었고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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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과 데릴라》 (1949)
그 와중에 나오게 된 세설 B. 드밀의 《삼손과 데릴라》(1949)는 경력 전체를 통틀어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이었다. 러마도 배역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배우였다는 얘기를 들었으며 러마가 가장 좋아하는 출연작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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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dy without Passport》 (1950) 《Copper Canyon》 (1950)
그러나 연기력 문제는 여전했고 이미 곤두박질치던 경력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러마는 주연이었으면서도 돈으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누아르 《A Lady without Passport》(1950)는 《카사블랑카열화판이라는 비아냥을 샀다. 구리 광산 노동자들을 다룬 서부극 《Copper Canyon》(1950)에선 작품 내 갈등의 중심으로 지목받는 도박사 역을 맡아 사격 공연으로 먹고 사는 레이 멀랜드의 마음을 빼앗는다. 작품은 흥행, 비평 전부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나이 든[15] 섹스 심벌로 나온 《마이 페이버릿 스파이》(1951) 이후론 반강제로 은퇴 상태가 돼 연기를 완전히 중단하고 유럽에 가 있기도 했다. 풍자극을 하는 희극인(밥 호프 분)이 단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정보국 요원들로부터 한 국제 첩보원의 대역으로 발탁돼 모로코 탕헤르에서 마이크로필름을 입수하는 입무를 맡는데 그가 적대하는 외국 세력과 친밀하게 지내는 여인 역이 러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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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emale Animal》 (1958)
이후 《The Story of Mankind》(1957), 《The Female Animal》(1958) 같은 범작 이하에 잠시 나온 것을 끝으로 더는 은막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마지막 작품에서 한물 간 여배우로 나올 때 러마는 44세였는데 "젊은" 연인 역의 조지 네이더[16]는 38살이었고 조숙한 "어린" 딸 역할의 제인 파월은 29살이었기 때문에 대우가 너무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온다.

3.2.1. 출연작

<rowcolor=#fff>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30 Geld auf der Straße 나이트 클럽의 어린 여자
1931 Die Blumenfrau von Lindenau 비서
Die Koffer des Herrn O.F. 헬레네
Man braucht kein Geld Käthe Brandt
1933 엑스터시 Eva Hermann
1938 앨지어즈 가비
1939 Lady of the Tropics 마농
1940 I take this woman 게오르기 그라고레
Comrade X 시어도어
붐 타운 Karen Vanmeer
1941 H.M. 풀햄, 에스콰이어 마빈
컴 리브 위드 미 조니 존스
지그펠드 걸 산드라
1942 White Cargo Tondelayo
Tortilla Flat 돌로레스
크로스로드 Lucienne Talbot
1944 음모자들 이레네
헤븐리 바디 비키 휘틀리
위험한 실험 알리다
1945 Her Highness and the Bellboy 베로니카 공주
1946 낯선 여인 제니 하거
1947 Dishonored Lady Madeleine Damien
1948 Let's Live a Little J. O. 로링 박사
1949 삼손과 데릴라 데릴라
1950 A Lady without Passport Marianne Lorress
Copper Canyon 리사
1951 마이 페이버릿 스파이 Lily Dalbray
1954 L'amante di Paride
L'eterna femmina
I cavalieri dell'illusione
1957 Slaughter on Tenth Avenue 출연분 삭제
The Story of Mankind Joan of Arc
1958 The Female Animal 바네사 윈저
2017 밤쉘 본인 사후 출연작
다큐멘터리

3.3. 발명가 활동

러마가 본격적으로 이공계에 뛰어든 계기는 다소 엉뚱하다.

첫 남편 프리드리히 만들은 러마보다 14살 연상에 무기상으로 돈을 번 거부였는데 질투심과 집착이 매우 강했지만 당대의 모든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던 그는 한편으론 러마가 과학자로 성장하는 데 본의 아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러마는 자택에서 무기상이나 과학자들의 모임이 열리면 안주인으로서 만찬을 주관해야 했는데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독일 군사과학의 신규 기술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으며 만들의 공장에서도 따로 시간을 보내면서 나치의 군사 계획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만들은 파시즘 사상에 감화되어[17]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위한 군수물자 마련에 협조하고 있었고 사교사회 이곳저곳에 러마를 데리고 다니며 히틀러무솔리니 등과 어울리게 했는데 러마는 히틀러가 조국 오스트리아에 저지르려고 하는 짓의 윤곽을 알게 되고 역겨워해 결국 1937년 25살 때 이혼하고 상술했듯이 "헤디 러마"로 개명하고 미국에서 낮에는 배우의 길, 밤에는 발명가의 길이라는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베네딕트 캐년에 위치한 러마의 자택 한 구석엔 제도판과 각종 기계 부품들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PBS American Masters - 헤디 러마 편
하워드 휴즈와 만날 땐 휴즈의 비행기들을 유선형으로 디자인하는 데 관여했다고도 얘기된다. 항력을 최대한 낮출 수 있는 날개 모양을 연구하기 위해 러마는 물고기와 새 해부도를 사서 탐구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러마는 휴즈가 자신에게 "의지했다"고 표현했다. 휴즈는 보답으로 촬영장에서도 틈틈이 연구를 할 수 있게 트레일러에 도구들을 구비해 줬다고 한다. 이즈음 러마는 물에 넣으면 콜라가 되는 고체형 콜라를 만들기도 했다.

러마가 자신의 발명 중 가장 유명한 기술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더 엉뚱하다.

러마는 1940년 9월 중순 캐나다에서 90명의 영국 어린이들을 피난시키던 영국 여객선독일 U보트어뢰를 맞아 77명이 북대서양에서 수장됐다는 소식을 접한 후 연합군을 도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러마는 그해 재닛 게이너의 파티에서 작곡가 겸 발명가 조지 앤타일[18][19]과 만나게 된다.

앤타일의 회고에 의하면 둘이 친해진 계기는 앤타일이 내분비계를 이용해 자연스러운 가슴 확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해 이에 러마가 크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앤타일은 내분비외과 전문가로 자부하며 에스콰이어에 섹스 칼럼을 연재한 적도 있었다. 러마는 차창에 빨간 립스틱으로 전화번호를 남겼고 며칠 뒤 둘은 러마의 자택에서 만나 가슴 확대 얘기를 본격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는데 대화가 길어지면서 화제는 또 다른 공동의 관심사였던 어뢰의 정확도 부족이라는 당면 과제로 흘러갔다.

앤타일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이 해 6월 14일 핀란드 헬싱키의 미공사관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남동생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남동생은 외교신서사[20] 임무를 수행 중 타고 있던 헬싱키행 핀란드 여객기[21]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공항에서 떠난지 10분만에 발트해 핀란드만 해상에서 두 대의 소련 폭격기에 의해 격추당하면서 사망했다. 그날은 이미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1939년 10월 18일부터 에스토니아를 점거하고 있던 소련의 에스토니아 봉쇄 실시가 시작된 날이었다. 남동생이 옮기던 중인 외교행낭에는 소련의 향후 발트해 관련 계획에 대해 에스토니아 군사 참모 본부에서 파악한 정보가 담겨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2]

당시 어뢰는 한 번 발사된 뒤엔 궤도를 수정할 수 없어서 러마는 비행기가 높이 상공에서 날며 전파 펄스로 어뢰의 이동방향을 원격조종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그러나 러마는 전남편 만들을 통해 나치에서도 원격 조종 어뢰를 제작해 보려고 했지만 치명적인 보안 문제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선 조종 유도 장치의 무선 주파수를 알아내기만 하면 통신을 차단해 버리거나 노이즈를 발생 시켜 전파 신호를 방해해 어뢰의 경로 이탈을 유도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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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러마와 앤타일이 특허를 내기 위해 제출했던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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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미국 군사전문지 《성조》에 실린 러마의 발명 관련 보도.
이 인터뷰에서 러마는 집 거실 바닥에서 은제 휴대용 성냥갑을 써서 어뢰의 경로를 모의 실험해봤다고 말했다.
러마는 악보를 표시한 구멍 뚫린 판이 돌아가면서 저절로 연주되는 자동 피아노에서 영감을 얻었다. 둘은 함께 피아노공명 원리에서 착안하여 항공모함 비행기와 어뢰가 몇 초 단위로 동시에 주파수를 바꾸면서 통신을 주고받으며 이동하는 개념을 창안하였고 이후 개발에도 성공했다. 주파수 도약(일명 FHSS)이라는 명칭으로 1942년 미국에 특허를 신청하기에 이르렀고 8월 11일에 특허가 나왔다. 특허 취득 번호는 2292387이다. 따라서 연합국의 적국인 오스트리아 국민이라는 이유로 특허를 몰수당했다는 루머는 사실이 아니다. 특허권은 2020년 2월 1일부로 정상적으로 만료되었다.

당시 정식 명칭은 Secure Spread Spectrum Radio Technology이었다. 해군은 이를 제한적으로만 활용했는데 당시엔 트랜지스터가 등장하기 전이라 소형화를 할 수가 없어 기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그렇게 이 기술은 묻혀갔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주파수 도약이 재발굴 되었고 미군의 전략 방위 위성 체계인 밀스타(Milstar)의 핵심 기술로 활용되었다. 다만, 러마와 앤타일이 주파수 도약 기술의 유이한 발명자들은 아니었는데, 니콜라 테슬라#,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전간기 폴란드 기술자 레오나드 스타니스와브 다닐레비치, 2차세계대전기 미 육군 등에서 러마와 앤타일보다 더 먼저 혹은 비슷한 시기에 주파수 도약 기술을 중복해서 발명했다. 이는 러마와 앤타일이 기술에 대한 로열티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결정적인 문제가 됐다.

이후 무선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주파수 변조를 통한 송수신자간의 암호화 개념(주파수 도약)은 블루투스, CDMA, 와이파이에 통합되어 사용되고는 했다. 다만 인터넷 등지에는 헤디 러마(헤디 라마르)를 '와이파이의 어머니'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파수 도약(FHSS)은 802.11 스펙의 일부일 뿐 와이파이 스펙의 일부가 아니며 지금은 와이파이에 전혀 쓰이지 않는다. 와이파이는 802.11 스펙 중에 실제로 널리 사용할 만한 것들만 모아 놓은 집합체이다. 애초에 수많은 기술이 모여 탄생한 게 와이파이고 그만큼 특허를 보유한 이들도 많으며##, 미국 뿐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와 호주도 와이파이 최초 개발 국가임을 내세우고 있다.## 세간에서 '와이파이의 부모'라고 인정 받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바로 빅 헤이즈(Vic Hayes)다. 빅 헤이즈는 와이파이 표준에 대한 공로로 인해 종종 '와이파이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또한 블루투스도 헤디 라마르의 발명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블루투스를 발명한 건 네덜란드의 엔지니어 야압 하르트센(Jaap Haartsen)이다.# 그리고 CDMA의 경우, 1960년대 미국 국방 통신에서나 FHSS를 기반으로 동작하는 CDMA를 사용했던 것이고 현대 통신 사업에 쓰이고 있는 CDMA는 DSSS를 기반으로 동작하는 DS-CDMA이다.

1990년 러마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왜 자신의 공로가 잊혀졌고 왜 자신은 해당 기술에서 파생된 금전적 이익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했는데[23] 이게 화제가 되면서 러마의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후 러마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었다. 1997년 러마와 앤타일은 주파수 도약의 사회 공헌도를 인정 받아 전자 프런티어 재단으로부터 선구자상[24]을 수여받았는데 러마는 자신의 수상 소식을 듣고 "때가 왔군요"라는 짧은 소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마는 Invention Convention의 불비 그나스 평생공로상[25]을 최초로 수상한 여성이기도 하다. 평생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던 출신국 오스트리아에서도 변화가 생겨 1998년 오스트리아 발명가 협회[26]에서 빅토르 카플란 메달도 얻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사후인 2014년 발명가 명예의 전당[27]에 헌액되었다.

현재 여러 단체에서 러마의 이름을 딴 상을 각자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시는 디지털 시티 행사의 일환으로 헤디 러마 상을 수여한다. 영국의 수학 및 수학응용학회[28]도 2020년 헤디 러마 상을 만들어 2021년부터 수여 중이며 DEG[29]에도 헤디 러마 상이 있다.

여배우들에게 성 고정적인 이미지만를 강요하던 1940년대 할리우드는 러마가 관능적인 스타 역할 외엔 전혀 주목받지 못하게 만들어 러마가 발명가로서 이룬 업적과 성과도 묻히게 한 지점이 있다. 러마도 생전 이런 사회적 처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4. 사생활

6번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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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만들 에른스트 뤼디거 슈타르헴베르크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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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앤서니 로더는 어머니를 닮은 덕인지 캘리포니아의 휴대전화 회사에 근무한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을 하기도 했다.

5. 사건사고

특히 영화계 활동이 의지와 무관하게 종료됨과 동시에 다채로운 사건사고들을 일으켰다.

영화인 러마를 대표하던 이미지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고소왕"이었다.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을 무리한 고소 남발로 보냈다. 러마를 아끼던 주변인들은 제발 하지 말라고 늘 만류했으나 러마는 듣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할리우드를 떠나기로 한 뒤 플로리다에 완전히 정착하기 전엔 한동안 뉴욕에 살았는데 오로지 자신이 걸어 뒀던 여러 재판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사망하기 직전인 1999년 5월에도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앨지어즈>가 TV 광고 안에 2초 나온다며 캘리포니아 와인회사인 E&J 갤로 포도주 양조장[33]를 상대로 광고 송출 중단 소송을 걸어 1750만 달러를 요구했다. 광고 주인공들이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릴 때 <앨지어즈> 속 러마의 얼굴이 잠시 스쳐지나가는데 러마 측은 이를 두고 사람들이 자기가 이 와인 회사 홍보에 나섰다고 생각할 거라고 주장했다. 2000년 러마가 사망한 지 열흘 뒤에 러마 측은 패소했다. 판사는 "판단력을 갖춘 미국 시민들 대다수는 그렇게 받아들일 리 없다"며 러마 측이 와인회사의 소송비용 40만 달러를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일부만 나열한다.

5.1. 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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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 경력이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였던 1965년에 로스앤젤레스 윌셔 대로의 메이 컴퍼니 백화점[34]에서 옷, 화장품, 금박 슬리퍼 한 켤레, 화장붓 2개, 목걸이 2줄 등 86달러 어치[35]의 물건을 쇼핑 가방에 몰래 넣어 훔치다 걸리는 바람에 구설수에 올랐다.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보석금 550달러를 내고 풀려났다. 당시 현장에 있던 직원 셋은 목격담을 일관되게 진술했다. 상당한 진통이 따른 재판 끝에 러마는 배심원단으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이 사건 직후 오랜만에 겨우 성사될 뻔한 영화 계약이 무산되는 수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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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은 1년 후 이 사건을 소재로 <헤디(Hedy)>라는 이름의 영화를 만들어 러마임이 분명한 유명 여배우가 좀도둑질을 하면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마리오 몬테스라는 유명[36] 드랙퀸을 러마 역으로 기용해 맨해튼 이스트 47번가의 "더 팩토리(The Factory)"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는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I Feel Pretty"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존 케일루 리드가 영화음악을 담당했다. 요즘도 MoMA 등 미술관에서 종종 상영되고 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러마가 늘 그랬듯이 화제를 불러모으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종의 어그로였을 거라는 해석이 대세였지만 이 사건이 잊혀질 즈음인 1991년 러마는 플로리다의 약국에서 완하제와 안약 등 21.48 달러 어치를 훔치다 또 걸려서 절도 미수로 다시 대중에 회자되며 실은 도벽이었다는 걸 입증하고 말았다. 법정에 출두하는 걸 꺼린 러마가 빠르게 유죄를 인정한 뒤 고소는 기각되었지만 과거의 사건과 더불어서 또 다시 이미지가 무너지는 고초를 겪었다.

두 번 다 직원들이 러마인 걸 전혀 모르고 신고해 경찰에 가서야 신원이 파악됐다.

5.2. 입양아로 위장했던 친자 파양

입양아 제임스 러마 로더(마키)를 11살 때 파양시켜 버리고 평생 없는 자식 취급을 했다. 2000년 러마가 사망했을 때 남긴 전체 유산이 약 330만 달러였는데 제임스는 러마의 유언장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하고 상속 분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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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마 오른쪽이 제임스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입양한 아들로 알려졌던 제임스가 사실은 존 로더와 러마의 생물학적 아들로, 결혼 전 불륜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임이 밝혀졌다.# 제임스 임신은 러마가 <앨지어즈>로 미국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몇 달간 석연치 않은 공백기를 가져야만 했던 이유였다.

제임스는 일부 승소하여 겨우 5만 달러의 재산만을 상속했는데 이는 러마가 일부 핏줄이 아닌 사람들에게 남긴 돈보다도 적다. 러마가 불륜상대였던 존 로더와 결혼한 뒤에 태어난 제임스의 동생들은 각각 100만 달러, 200만 달러씩 받았다.

러마의 딸 더니스 로더는 러마가 어째서인지 제임스를 늘 골칫거리로 여겼다며 친자식을 버린 어머니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임스는 러마 밑에서 크는 동안 딱히 사고를 친 적이 없으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동이었다. 러마가 왜 제임스를 파양했는지 그 속내를 아는 사람은 전무하다.

5.3. 자서전 대필작가 고소 사건

"Ecstasy and Me"(1966)
1966년 고질병인 낭비벽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이르렀던 러마는 인세에 대한 욕심,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키려는 시도에서 "Ecstasy and Me"란 자서전을 냈다. 현재도 구매 가능하다.

책엔 촬영장에서 신인배우들이나 조감독들과 가학/피학 성애 관계를 맺어온 일상에 대한 묘사 등 낯뜨거운 얘기들이 수위 높게 담겨 있었다. 애인 중의 하나가 러마 자신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자위를 하고 있던 걸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던 에피소드도 털어놓았다. 스스로를 색정광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가슴 크기에 끝없이 집착하고[37] 자신은 너무 아름다워서 문제라는 자기 도취 발언들을 반복해 빈축을 샀다. 주디 갈런드, 클라크 게이블, 잉그리드 버그먼 등 동료 배우들에 대한 신랄한 뒷담화도 빼놓을 수 없었다.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러마는 출판을 막으려고 모든 게 두 대필작가들, 즉 사이 라이스와 리오 길드의 잘못이라며 수차례 고소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자신은 자서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정식 자서전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러마는 책 내용이 "다 가짜"라고 했으나 서술의 많은 부분이 오늘날 실제로 확인된 사실들과 일치한다.

다만 이 자서전을 위해 50여 시간 동안 인터뷰를 녹음 진행할 때 러마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술과 약물, 특히 필로폰에 찌들어 있었는데[38] 원래 허풍을 잘 치는 성향에 이런 향정신성 물질들이 더 악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자극적 성적 체험담들만큼은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주변인들 얘기에 비춰보면 러마는 인터뷰 당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 모양이다.

책은 발명가로서의 러마를 전혀 조명하지 않는데 이는 대필작가들이 러마의 발명 관련 발언을 의도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샀다.

어쨌거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러마는 애초 계약에 따라 인세로 80,000달러, 2022년 가치로 약 750,000달러, 한화로 9억 5천만원 이상의 수익을 거둬 당장의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다.

러마의 친구인 영화평론가 라버트 오즈본은 이 자서전이 러마의 연기자로서의 경력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고 본다. 오즈본은 "책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해선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돈만 생각해" "경솔하고 어리석은 판단 하에" "자신의 인생 일부를 넘겨버린 행위가 초래했던" 파국이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5.4. 성범죄 무고 사건

러마는 1971년 로스앤젤레스 학군의 수리공을 성폭행 미수 혐의로 고소했는데 수리공은 러마가 지어낸 얘기라며 반박했다. 증거들은 수리공의 억울함을 뒷받침해 주었고 러마는 수리공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비로 15,000 달러를 지불할 것을 선고받았다.

6. 말년과 죽음

뉴욕에서 마이애미를 거쳐 플로리다 올랜도 근방으로 이사한 러마는 나이 든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자녀들조차 마주하길 거부하고 전화기만 붙들고 살았다. 1970년대엔 간간히 소규모 영화와 텔레비전 출연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전부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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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979년
러마는 결국 성형에 중독되었다. 담당 의사들에게 새로운 성형 기술을 개발하라고 재촉하기도 했는데 성형외과의 리서 캐실레스[39] 등에 따르면 이 당시 러마가 여러 수술을 거치며 의사들에게 다양한 발상을 제안해 성형 기술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 다만 러마가 의사들을 보조해 성형술에서 이룩한 혁신들은 미국 성형외과의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내려올 뿐 정식으로 인정 받지는 못했다.

1974년엔 워너 브라더스에 천만 달러 배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걸었는데 멜 브룩스의 <브레이징 새들스(Blazing Saddles)>(1974)가 자신의 이름을 희화화한 배역 헤들리 러마(Hedley Lamarr)를 창작하면서 사생활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874년 전국 횡단 철로 건설을 소재로 한 이 작품 속에서 헤들리 러마는 사익을 위해서라면 나치와도 손을 잡는 작품 내 최고 남자 악역이었다. 이 분쟁은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80년대엔 시력이 급격히 저하돼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러마는 야광 개 목줄, 아코디언의 원리를 이용해 피부를 탱탱하게 만드는 기술, 휴지를 버릴 수 있는 곽티슈 등 발명에 지속적으로 몰두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가족들과 교류해 손자들과 놀아주기도 했지만 발명 관련 시상식들에 참석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거부했다. 이즈음 심슨 가족을 즐겨봤다고 하며 주식에 흥미를 갖기도 했다. 사망하기 직전 85세 생일을 기념하는 작은 순회 전시회 "Hommage à Hedy Lamarr(헤디 러마에 대한 경의)"가 열리기도 했다.

2000년 1월 19일 플로리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돼 오스트리아 "빈의 숲"[40]에 뿌려졌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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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발음은 러마.[2] 진 마키와 결혼했을 때 입양아로 위장한 사생아다. 후에 친부인 존 로더가 재입양해 성을 마키에서 로더로 바꾸었다.[3] 다만 주파수 도약 기술은 당시 니콜라 테슬라#,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전간기 폴란드 기술자 레오나드 스타니스와브 다닐레비치, 2차세계대전기 미 육군 등에서 중복하여 발명되었기 때문에 헤디 라마르와 조지 앤타일이 유일한 발명자들은 아니다.[4] 러마에 대한 미국의 대우가 나빴던 이유는 러마 본인이 사고를 많이 쳤기 때문이지, 《엑스터시》를 찍었던 과거에 대해선 예상보다 관대하게 반응했지만 오스트리아는 러마가 사고를 본격적으로 치기 전부터 러마를 국가의 수치로 여겼다. 발명인 러마에 대한 푸대접 반성이 미국에서부터 시작되고 오스트리아에선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반응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5] Max Reinhardt.[6] 호수에서 알몸으로 수영하고 숲속을 뛰어다닌다.[7] 게리 쿠퍼, 캐롤 롬바드가 주연한 동명의 1931년작과는 관련이 없다.[8] John Cromwell.[9] 자신이 본 고전시대 여배우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도 말했다.[10] 터너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지그펠드 걸》에서 터너와 갈런드는 러마의 수십 배는 되는 대사량을 소화해냈다.[11] 이외에도 러마는 갈런드에 대한 열등의식을 여러 번 노출했다. 한 번은 자신이 좋은 역을 얻지 못한 건 스튜디오의 높으신 분들과 잠자리를 갖길 거부해서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무려 제임스 스튜어트, 클라크 게이블, 스펜서 트레이시의 상대역까지 해 봤으면서도. "(할리우드에선) 최고로 끔찍한 창녀들만이 유명해진다. 난 사랑해서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돈 때문에 한다." 그런데 러마가 활동한 시기에 MGM에서 이런 일을 당한 탑스타 급은 갈런드 뿐이었다.[12] 다만 활동 당시 여배우들이 도전해 볼 만한 소극은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적극적이고 당당한 태도로 대사를 길게 빠르게 소화하는 부류가 많았는데 상술한 길게 대사를 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었다. 실제로 러마는 스크루볼 코미디랑 그다지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는 평도 많다.[13] Richard Carlson. 1912 - 1977. 《검은 늪지대의 생명체》(1954) 등.[14] Paula Raymond. 케리 그랜트의 《위기》(1950) 등에 출연했다.[15] 이때 러마는 아직 37살이었다.[16] George Nader.[17] 황당하게도 만들은 러마처럼 유대계였다.[18] George Antheil. Antheil의 theil은 tile과 동일하게 발음된다. 일부 다큐멘터리에서는 다른 방식들로 발음하는데 오류다.[19] 앤타일의 가장 유명한 곡은 <발레 메카닉(Ballet Mecanique)>(1924)이라는 페르낭 레제[41]의 단편 실험영화에 쓰인 음악이다. 파리에선 이로 인해 스트라빈스키봄의 제전 버금 가는 폭동이 있었다고 얘기될 정도의 실험 음악이었다. 자동연주 전자피아노, , , 사이렌, 비행기 프로펠러 등이 총동원됐다.[20] diplomatic courier.[21] Aero Flight 1631.[22] 그러나 이 사건은 하필 같은 날 파리가 나치에 함락되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23] 이 기술이 가져온 부가가치는 최소 30조원으로 추산된다. 공동 개발자인 조지 앤타일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다만, 상술되어있듯 러마와 앤타일 외에도 주파수 도약 기술을 발명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24] Pioneer Award.[25] BULBIE Gnass Spirit of Achievement Award.[26] Austrian Inventors' Union.[27] 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28] Institute of Mathematics and its Applications.[29] The Digital Entertainment Group.[30] Ernst Rüdiger Starhemberg. 1899 - 1956.[31] 자서전에 서술된 내용이며 아들 앤서니 로더는 자신도 이렇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에서 '허풍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러마는 이 일화를 수차례 전혀 다른 버전으로 말했다.[32] 리처드 로즈의 "Hedy’s Folly".[33] E&J Gallo Winery.[34] May Company. 1992년에 문을 닫았다.[35] 2022년 현재 가치로는 800달러에 달한다.[36] Mario Montez. 2012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퀴어 영화계에 남긴 업적을 인정받아 평생공로상을 받았을 정도다.[37] 러마는 평생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가슴 확대를 원했다.[38] 술과 기타 약물은 러마 개인의 문제였지만 필로폰만큼은 담당 정신과 의사 잘못이 전적으로 크다. 주치의 맥스 제이컵슨(Max Jacobson)은 닥터 필굿(Dr. Feelgood)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비타민 주사"라고 부르던 특효약에 필로폰을 섞어 환자들의 기분을 고조시키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의사들도 마약류의 위험성에 대해선 잘 인지하고 있었다. 이 자서전에 분개한 러마의 지인들이 많은 이유다.[39] Lisa Cassileth.[40] Wienerwald. 러마가 사망한 겨울의 풍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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