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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 6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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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요 정무 기구3. 수·당·송·금·원·명 시대4. 9시(구시)5. 발해6. 고려7.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3성6부.jpg
당나라의 3성 6부제

3성 6부제()란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당나라의 중앙통치조직으로 고대의 관료제라고 볼 수 있다.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省)과 그 성 아래의 이, 호,[1] 예, 병, 형, 공의 6부로 이루어진 체제'이다. 명목상 당 제도를 기반으로 이후의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들에서 변형·수용한 형태를 통틀어 '당송제(唐宋制)'[2]라고 한다.

이를 채용하여 통치한 국가가 한국사에도 둘 있었는데, 발해고려였다.[3] 첫째로 발해는 3성 6부를 그대로 따 왔으나 그 명칭과 운영방식에 서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4] 둘째로 고려는 3성 6부제를 모방한 2성 6부제를 운영하였다.[5]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도병마사, 식목도감(式目都監)[6]이라는 특유의 귀족 회의가 있어 귀족적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당의 3성 6부제는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의 경우 성과 부의 형태가 아닌 관과 성의 형태(2관 8성제)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신기관과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태정관이 있고, 태정관 산하에 중무성[7], 식부성[8], 치부성,[9] 민부성[10], 병부성, 형부성, 대장성[11], 궁내성의 8성이 존재하였다. 이 2관 8성제가 동아시아사 내신ㆍ모의고사 시험에 당의 율령제와 함정을 팔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2. 주요 정무 기구

이외에도 비서성(훗날의 한림원어사대. 중서성은 역사적으로 비서성에서 파생되었다.), 전중성(여관(女官)이 근무하는 곳. 상서성과 똑같이 6국 체제로 구성되었다.), 내시성(내관이 근무하는 곳. 문하성 관직은 대개 내시성에서 따온 것이 많다.), 집서성(문하성에서 간쟁 기능을 분리한 것, 육조시대에만 존재) 등이 있었다가 사라졌다.

3. 수·당·송·금·원·명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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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중앙행정체제로, 그 시작은 수나라이지만 중국을 통일하고도 40년도 가지 못한 수나라의 짧은 역사로 인해 아무래도 초기의 3성 6부제는 당나라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밑의 발해와 고려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라의 실정에 맞게 형태를 고치거나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흔했다. 고려같은 경우 나중에는 중서성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초기에는 내의성이라는 이름을 써 최고 장관의 직함도 내의령이었다.

중서성의 최고 장관은 중서령, 문하성의 최고 장관은 시중, 상서성의 최고 장관은 상서령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성의 장관은 그 품계는 높았으나 시대 상황에 따라서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아니면 생존해 있는 사람은 거의 임명되지 않고 죽은 후에 추존으로나마 직함이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종1품 상서령은 당태종이 즉위 전 역임한 적이 있어서 이후 신하들이 상서령 자리를 맡기를 꺼려 비워두었고 그 아래의 종2품 상서복야가 실질적인 장관이 되었다.

중서령과 시중은 당 초기에는 정3품이었으나 대종 때 정2품으로 올랐다. 당 중기 이후 업무상으로 인해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지는 경향이었고(아래 서술), 2품 이상은 명예직화되는 추세였기에 이때에 이르면 실질적 권력은 3품관이 가지게 된다. 따라서 당 초기부터의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 관명이 실질적인 재상이 되었고,[12] 대종 이후 동중서문하평장사라 하며 약칭으로 동평장사라 하였다. 이 명칭은 송대로 이어지며, 송대의 재상이 동중서문하평장사였다.

대체로 중서성과 문하성의 업무범위 문제로 이 두 기구는 사실상 하나의 기구로 운영되었다.[13] 당나라 정사당(政事堂)은 중서·문하성의 장관이 합좌하는 회의기구로 당 중기(8세기)에 중서문하(中書門下)로 바뀌었다. 이 중서문하 산하에 5방(이방, 추기방, 병방, 호방, 형례방)이라는 자체 실무기구가 생기며 상서성은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다. 따라서 당 후기에 이르면 기존의 3성 6부제는 일종의 통치 이상향으로서 그 형식만 남게되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권력관계, 국가에 따라 역할이 다르긴 했으나 중서성과 문하성이 일종의 입법기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 상서성은 6부를 통솔하여 직접적인 행정과 관련되는 역할을 맡았다. 중서성이 제안을 하면 문하성이 그 제안을 심사하고, 문하성에서 통과된 안이 상서성 산하의 6부를 통해 시행되는 형태였다.

당제(唐制)는 명목과 실제가 다른 복잡한 운영방식 때문에 채용한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송나라에서는 추밀원(군정)과 삼사(재정)의 등장으로 중서(민정)의 업무범위가 축소되었다. 송대에 3성 6부제는 단지 이름만 존재할뿐이었는데, 신종 연간 원풍관제개혁으로 다시 부활하기도 하는 등 부침을 겪었다.

북송 초기에는 법률상 즉, 외관상으로 당제와 같아서 그 관직은 그대로 존속했으나 실제 운영에는 차이가 있었다. 3성 중 문하성, 상서성은 궐밖에 두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였고, 중서성이 행정을 총괄하였다. 그러나 군정은 추밀원이, 재정은 삼사가 맡고 중서성은 간여할 권한이 없었다.

송대에 각 성의 장관은 추증으로 사용되고 실제 임명되지 않았고, 중서성에서는 당 중기 이래 재상의 관명이 된 동중서문하평장사가 있었으며 이들은 복수로 임명되었다. 그 아래 부재상으로 참지정사를 두었고, 역시 복수였다.

송 신종 원풍 연간에 관제개혁이 이루어져 3성의 관직이 부활하였는데,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령은 여전히 임명되진 않았으나 상서좌복야와 우복야가 각각 문하시랑, 중서시랑을 겸하게 하였다. 부재상은 문하시랑, 중서시랑, 상서좌승, 상서우승으로 두었다. 상서좌복야와 우복야의 명칭은 북송 말 휘종 연간에 태재(太宰), 소재로 변화하였다. 또, 북송 인종 때부터 전시에는 동평장사가 추밀사를 겸직했는데 남송 영종 때 겸직이 고정되었다. 재상들 위에 동평장군국사라는 명예직이 추가되었는데 남송 때에는 평장군국사라는 이름으로 권신의 자리로 변모하였다.

금나라에서는 상서성만을 운영했으며 원나라에서는 금의 제도를 이어받되 상서성에서 개칭한 중서성만을 운영하며 모든 지방을 행중서성(行中書省, 중서성 출장기관)으로 개편하였다. 상서성이 없으므로 6부가 중서성의 밑에 속하였다. 남송의 제도를 이어받아 중서성에는 우좌승상을 두었는데, 그 위에 중서령을 두었고 대체로 황태자가 겸직하였다. 다만 황태자가 중서령을 겸직한건 4번이며 그마저도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었다. 원에서는 좌보다 우를 숭상하여 우승상이 더 우위였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제도를 이었는데, 호유용의 옥을 거치며 승상이 있는 중서성을 혁파하여 황제 - 상서 6부 독재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3성 6부제는 6부만이 존속하여 청나라로 이어졌다.

4. 9시(구시)

당은 6부가 발달하기 전에 6부가 하는 일을 도맡아 하던 9시라는 기관들이 있었다. 장관은 기관명+경(卿)이다. 3성 6부제의 행정 처리절차는 공문서의 절차였다면, 9시는 그 문서를 받아 실제로 집행하는 실무부서였다.
태부시 - 국가재정(호부, 공부)

사농시 - 농사와 국세(호부, 공부)

홍려시[14] - 조공품(예부)

대리시[15] - 사법, 형옥(형부)

태복시 - 왕실의 가축과 왕의 말(병부)

종정시 - 황실친족(예부)

위위시 - 궁성경비(병부)

광록시 - 자문, 궁중경비, 숙직(이부)

태상시 - 제사(예부)
9시는 일부분 부침을 겪으나 청대까지 존속한다.

5. 발해

문왕 때 편제된 중앙정치조직으로 왕 아래에 정당성(상서성),선조성(문하성),중대성(중서성)을 두었다.

구조적으로 당의 명목상 제도를 그대로 본떠 이름만 바꾼 것이다. 하지만 명목과 실질의 괴리가 큰 당 제도의 특성 때문에 사료에 기록된 제도 그대로 운영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발해만의 독자적인 운영 형태로 볼 수 있다.[16]

당의 것과 달리 충ㆍ인ㆍ의ㆍ지ㆍ예ㆍ신 등 유교식 명칭으로 구성되어 있는 걸로 보아 발해가 유교를 불교처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왕 시기인 795년 11월 공부낭중이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문왕 이후 시기에 전통적인 이호예병형공으로 변경된 것으로 확인되며 대이진 시기 문서인 함화 11년(841년) 중대성첩사본에는 춘부경이라는 직책에서 보듯이 주나라천지춘하추동 형식으로 강왕 이후 시기에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부경, 공부경이라는 기록이 대인선 시기인 925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다시 전통적인 이호예병형공으로 회귀한 것으로 확인된다.

6. 고려

성종 때 편제된 중앙정치조직이다. 그 전까지는 신라의 관제를 약간 변형한 태봉광평성 체계를 고려시대 초기에도 사용했다.

당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지만 관습적으로 운영된 중서문하를 공식화하여 중서문하성상서성 2성을 두고 그 하위로 6부를 두었다. 당과 조선, 발해와 달리 6부의 순서는 이·병·호·형·예·공이다. 당은 6부를 좌사와 우사로 나누어 좌사에 이부-호부-예부 순으로, 우사에 병부-형부-공부 순으로 배치하였다. 당과 조선에서 이·호·예·병·형·공으로 읽은 것은 좌사→우사 순서로 읽은 것이고, 고려에서 이·병·호·형·예·공으로 읽은 것은 좌·우사를 번갈아가며 읽은 것이다. 고려에서 이 순서대로 읽은 것은 재상의 등급과 관련이 있다. 수상부터 이·병·호·형·예·공의 순서로 판사직을 겸임한다. 다만 판이부사, 판병부사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의 판사직은 없거나 순서가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다.

중서문하성은 그동안 관습적으로 운영되어 온 중서성과 문하성의 합의기구인 중서문하를 명시된 기관으로 구체화 했다는 점에서 고려의 운영특색을 보여준다. 중서성과 문하성의 통합 운영 자체는 고려만의 실상이라기보다 3성 6부제 자체의 특징이다. 고려의 특징은 이런 관습적 운영을 제도에 최대한 반영하여 성문화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난다.

한편 고려의 중앙정치조직이 2성 6부제가 아니라 3성 6부제라는 설도 존재한다. 중서성과 문하성이 같이 운영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통합된 기구인 중서문하성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고 중서성과 문하성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사, 고려도경을 비롯한 고려 관련 문헌들을 보면 '중서성', '문하성'처럼 따로 분리되어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서문하성'이라고 붙여서 기록된 경우들도 꽤 있다는 것이 문제다.

고려의 중앙정치조직이 2성 6부제라는 것은 1967년 변태섭이 최초로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한국사 개설서로 유명한 변태섭의 '한국사통론'에 실리고, 고려사 연구의 또 다른 권위자인 박용운도 2성 6부제를 수용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이후 국사 교과서에도 2성 6부제가 실리면서 고려의 중앙관제가 2성 6부제라는 것은 상식처럼 통용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경북대 최정환 교수를 중심으로 3성 6부제가 맞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은 소수설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7. 관련 문서


[1] 원래 민(民)이었으나 당태종의 이름자인 세민(世民)을 피휘하기 위해 호(戶)로 바꾸었다.[2] 상서는 한나라 때 황제의 비서조직이었던 내조(內朝)에서 출발한 기구였다가 이후 국가 행정담당이 되었고, 중서도 상서와 비슷한 기구로 만들어졌으며, 문하성은 남북조시기 귀족들의 회의 기구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기구들을 정리한 것이 당나라였으나, 당나라도 귀족들이 약화되면서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졌고, 한나라와 같이 또다른 임시 행정 기구들{추밀원, 삼사}과 직책들이 실질적인 행정사무를 담당해 가면서 송나라의 제도가 만들어졌다.[3] 발해와 고려의 공통점은 나라를 새로 세웠고 그 과정에서 건국 시점의 트렌드인 당나라 율령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고대부터 단절 없이 쭉 이어진 나라인 신라는 당나라 율령제가 동아시아의 대세가 된 통일신라 시점에도 그냥 통일 이전에 쓰던 체제를 쭉 개량해서 왕 아래에 13부가 있는 방식을 썼다.[4]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 그것. 그리고 6부의 명칭도 유교적 이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특색있다.[5] 중서문하성, 상서성의 2성, 이, 병, 호, 형, 예, 공부의 6부[6] 제도와 규정 설치를 담당하는 기구이다. 6부 기준으로 예부(禮部)의 업무에 해당한다. 도감(都監)은 기구의 명칭으로 대개 일정 기간이 소요되는 담당업무가 끝나면 없어지는 임시기구를 의미하지만 고려와 조선에서는 상설기구화되는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례는 조선 후기 오군영의 하나인 훈련도감이다.[7] 천황을 시종들며 각종 궁중 사무와 호적 등의 사무를 관장.[8] 문관의 인사와 조정 의례, 학교 등을 관장. 758년에서 764년에는 잠깐 '문부성'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9] 장례, 종교, 문화, 외교 사무를 관장.[10] 민정, 특히 조세 · 재정을 관장. 호적 · 논밭을 담당.[11] 단 율령제 당시에는 호조보다 공조에 가까운 위치였다. 대장성이 지금과 같이 재무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재무부 역할을 하던 민부성을 합병하면서부터이다.[12] 재상들의 회의기구인 정사당에 참여할 수 있는 관명이 동중서문하삼품인데, 2품 이상의 관직이 명예직화되면서 정사당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2품 이상은 동삼품(同三品), 즉 3품과 같다고 붙여야 했다. 더욱이 당 초기는 상서복야에 동삼품이 따라와 정사당에 참여했지만 점차 상서복야에게는 동삼품을 주지않아 정사당에서 배제되어 중서, 문하만이 실질적 재상으로 칭해졌다. 그마저도 중서성의 기능이 와해되며 임명되지 않기도 해서 문하성이 홀로 정국을 이끌기도 했다. 더하여서 6부의 상서들이 동중서문하삼품을 겸직하면서 재상이 되었다. 송대는 동평장사가 아예 정식 관명(사실 송대 관직 자체가 공식 관제는 아니지만)으로 재상이 되었고, 중서성 아래에 6부가 존재하였다.[13] 중서성과 문하성의 체계를 보면 같은 기관이 좌, 우로 나뉜 것임을 알 수 있다. 3성제 설립 이전에도 중서령과 시중은 한 사람이 겸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14] 홍로시, 전객시라고도 했다.[15] 정위시라고도 한다.[16] 명목상 당제는 중서성과 문하성에 대한 상서성의 우위를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서·문하성이 의결기구가 되고 상서성은 집행기구로 운영되었다. 중서성, 문하성 관료가 상서성으로 전임하는 것은 강등 수준이 아닌 파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기록된 발해 관제는 명목상 당 제도가 정리된 당육전(唐六典)의 구조를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