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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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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발 배경
2.1. 시초2.2. 초창기2.3. 설계 변경
3. 양산4. 종류
4.1. 1형4.2. 2형4.3. 4형4.4. 10형
5. 특징
5.1. 장점5.2. 단점
6. 유사품7. 운용 및 실적8. 잔존 함선9. 기타10. 대중매체에서

1. 개요

[ruby(回天, ruby=かいてん)] / Kaiten
파일:external/blog-imgs-35.fc2.com/200910080105324f7.jpg
지상에 설치된 가이텐 기지에서 발함하는 가이텐

일본 제국 해군이 제조한 '유인유도 어뢰'로, 사람이 안에 타고 조종하여 표적에 들이받는 자폭 병기다.

MXY-7 오카 같은 경우에는 기지를 출발한 뒤 작전이 돌연 취소되거나 불시착(또는 이를 가장한 전열이탈)하는 방법, 혹은 불발 등으로 특공대원이 생환할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지만[1], 이건 한번 발사하면 그대로 끝이다. 설령 탄두가 불발되더라도 수압 때문에 출입구를 열 수 없으므로 100% 죽는다.

관련 기사: 세상 바꾸고 싶었던 법학도 청년, 그 끝은 '인간어뢰'

가이텐이란 회천의 일본어 음독으로 바로 새기면 '하늘을 되돌린다'는 뜻으로 제왕의 마음을 되돌림의 비유로 쓰이면서 형세나 국면을 크게 바꾼다는 뜻으로 확장되었으니 당시의 불리했던 전황을 되돌릴 획기적인 병기라는 뜻이다. 현실은 전황은커녕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2. 개발 배경

파일:external/www.airgroup4.com/kaiten-kamikaze.jpg
가이텐의 모체가 된 93식 어뢰

일본 제국 해군은 93식 어뢰가 너무 많이 쌓인 것에 비해 어뢰를 발사할 플랫폼인 수상함과 잠수함이 부족한 것을 보고 어뢰를 개량하여 독자적으로 사용할 만한 무기로 바꾸고자 하였다.

2.1. 시초

일본 해군태평양 전쟁에 돌입할 무렵부터 지속적으로 인간어뢰를 추진한 기록이 있다.

일단 소형 잠수정 갑표적의 승조원이었던 구로키 히로시(黒木博司) 일본 제국 해군 대위, 니시나 세키오(仁科関夫) 해군 중위는 일본과 미국간 공업력의 차이가 크므로 자원소모가 많은 함대간 결전을 하지 말고 유인 수상병기로 적 함대를 괴멸하는 것만이 승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해군은 생환을 고려하지 않은 출격은 용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2] 이런 주장을 배척했고 구로키 무리는 해군 내부에서 고립되었다.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 후 일본 해군 내부에서도 유인어뢰를 만들자는 여러 안이 나왔다. 치쿠마 츄우조(竹間忠三) 대위가 "전세를 돌리기 위해선 필중필살의 육탄공격이 필요하다." 하며 유인어뢰 제작을 추진하자고 군령부 이우라 쇼지로(井浦翔二郞) 해군중좌에게 건의했고, 이우라 중좌가 실현성을 타진했다. 하지만 해군본부는 소극적이었고 군령부 수뇌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1943년 12월에 伊 165 잠수뢰장(潜水雷長) 이리사와(入澤) 대위와 항해장 고노에(近江) 중위가 전황을 타개하려면 필요하다면서 독자적으로 유인어뢰를 연구한 성과를 군령부와 연합함대에 제출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로키 대위와 니시나 중위가 1943년과 1944년에 걸쳐 군령부를 두 번 방문하여 군령부와 군무국 제1과장 야마모토(山本) 대좌를 만나 상담했다. 이에 1944년 2월 26일 '승조원의 탈출장치가 없는 병기는 절대 채용불가.'라는 조건을 달고 시험제작을 허락받았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마치 정신나간 소수가 계획을 주도했고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는 인상을 받지만 이것은 수뇌부한테는 잘못이 없다고 강변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게다가 저런 괴짜는 당시 추축국 군인들 중에서는 어디서나 있었는데, 특히 일본군이 그런 증상이 심했다. 따라서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때부터 수뇌부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지휘관의 지휘책임이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 지휘관이 문제를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여된 것이다.

겉보기에는 하급자가 주장하고 상급자가 어쩔수 없이 승인했다는 착각을 보여주는 원인은 현대에도 상당히 남아있는 일본 문화에서 기인한다. 네마와시(根回し)[3]라 하는 악습으로, 회의 전 관계자로부터 미리 양해를 구해놓고 회의를 시작하는 문화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의 회의란, 정식으로 안건을 올려 승인을 받기 전에 미리 의사를 타진하여 확인하고, 되겠다 싶으면 그제서야 정식 절차를 밟는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식 절차를 밟은 시점에서 상급자고 하급자고 이미 '정해진 결론'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정식 절차란 회의의 형식과 간부의 체면을 위해 하는 요식행위였다. 미리 확인한 각본에 따라 정해진 하급자가 계획을 제안하면 상급자가 못 이기는 척 수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14년에 NHK에서 방송된 일본해군반성회 스페셜에서 구로키와 니시나의 일화는 '신화'일 뿐, 실상은 군령부와 해군성에서 그 전에 이미 자폭 병기 제작에 나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겉으로는 장병들을 위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전부 가식이었던 것이다.

2.2. 초창기

최초 개발품은 인간 자폭 병기가 아니었다. 적당한 위치에 도달하여 조준을 고정한 후 승조원이 탈출하는 방안도 있었다. 그러나 해군 수뇌부가 500kg나 780kg의 중량을 가지는 기존 어뢰용 탄두로는 위력이 모자라므로 더 큰 탄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1,550kg에 육박하는 대형의 탄두를 달았는데, 그 때문에 어뢰가 불안정해져서 적함에 들이받을 때까지 계속 조종해야 했다. 기술자를 좀 더 동원하고 개발에 필요한 시간 여유를 좀 더 줘서 탑승원이 탈출할 방법을 마련해줄 수도 있었지만, 바다에는 파도가 일기에 중간에 사람이 빠져나가면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러지도 못했다.

물론 탈출장치를 만들어봤자 대양 한가운데 + 적함 근처라는 인간이 생존하기 최악의 환경에서 탈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적함 근처에서 탈출해봤자 탈출만 하고 이탈을 하지 못해서 폭발에 휘말리면 당연히 죽는 거고, 또 적함의 근처라면 당연히 적 함대 쪽에 자리하고 있을 텐데 이런 곳에선 탈출해봤자 다른 적군의 대함사격 혹은 적함의 충각 공격이나 스크류 등에 휘말리면 사망할 수밖에 없다. 설령 적 함대가 후퇴를 택하더라도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이상 근처에 섬이 없다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어쩌다 인심이 좋은 적군에게 구조받아 생존할 가능성 정도는 있고 스스로 탈출이 가능하다는 선택지를 주는 것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살릴 방도를 없애는 것보다는 압도적으로 더 좋다. 애초부터 탈출한 후의 상황은 탈출이 성공한 뒤에서나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고 탈출할 수 있는 것과 탈출 못하는 것의 차이는 군인의 사기 유지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처음부터 1,550kg로 매우 크고 나중에는 1,800kg에 육박할 정도로 쓸데없이 큰 탄두를 달았음이 가이텐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기존의 산소어뢰에 사용하는 500kg 탄두나 780kg 탄두도 가이텐에 장착하면 조종하기에는 벅차고 일본군 물자부족 문제도 있었으므로, 차라리 400kg급이나 그 이하로 줄이면 조종성도 나아져서 승조원이 탈출할 방법을 넣어주거나 명중률을 높이거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300kg대로 줄인다고 해도 이론상 중순양함 격침까지는 충분히 가능했다.[4] 가이텐 한 발로는 대본영이 원하던 미 해군 CV-6 엔터프라이즈, 새러토가, 에식스급 항공모함같은 정규항공모함 격침은 무리겠지만, 어차피 역사대로 만들어진 가이텐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생각하면 차라리 이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패전 직전까지 개발중인 가이텐 10형은 92식 전기추진식 어뢰를 급하게 개조해서 탄두중량이 300kg이며 작고 전투실이 비좁았지만 조종성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1944년 7월 25일 오오이리시마(大入島) 발사장에서 시험제작기를 시험하였다. 탈출장치는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장비하지 않았고, 병기로서의 특성에도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주된 결함사유는 어뢰를 개조한 물건이라 후진이 불가능하단 점과, 방향타 뒤에 스크루가 달린 구조상 선회 반경이 너무 크고 잠항 심도가 최대 80m 밖에 안 되어 가이텐을 운용하는 대형 잠수함의 잠수심도까지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반용으로 쓰일 대형 잠수함이 대부분 격침된 상황이라 이 문제는 끝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탈출장치는 끝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상태로 1944년 8월 1일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결재하여 정식병기로 채용되었다. 명칭은 구로키 대위가 제안한 대로 가이텐(回天)이라 명명되었다.

2.3. 설계 변경

일단 가이텐은 길이 14.7m, 직경 1m짜리 동체에 무게가 1,550kg인 탄두를 장착했다. 크기에 비해 탄두가 크고, 중심에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위에는 작은 잠망경도 달아서 외관상으로는 마치 소형 잠수정 같은 모습이다.
파일:external/www.webmodelers.com/201209haya033.jpg
잠수함 갑판 위에 탑재된 가이텐

가이텐의 크기가 매우 크므로 모선이 될 잠수함의 어뢰발사관에 넣지 않고 갑판 위에 설치했다. 탑승자는 잠수함 내에 특별히 설치한 연결통로를 따라 탑승했으며, 가이텐에 탑승하기 위해 잠수함이 굳이 부상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잠수함의 선체를 개조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가이텐 전용 잠수함을 따로 준비하였다. 보통 잠수함 한 척당 가이텐 4 ~ 6척을 달고 작전에 투입되었다. 다만 일부 작전사례에서 잠수함을 부상시킨 후 가이텐에 옮겨 탄 사례가 없지는 않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iten_Type_1_launch_test_from_starboard_of_Japanese_cruiser_Kitakami.jpg
경순양함 키타카미에 탑재된 가이텐

잠수함 말고도 수상함을 가이텐 모함으로 개조시키기도 했는데, 쿠마급 경순양함 3번함 키타카미가 가이텐 모함으로 개조되었었다. 이런 경우에는 잠망경 후방에 있는 상부 해치를 통해서 가이텐 조종수가 가이텐 내부에 탑승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ig_of_IJN_DD_Take_1944-1945.gif
마츠급 구축함에 장착된 가이텐과 운용설비

심지어 전쟁 후반에 가서 만들어진 양산형 구축함인 마츠급 구축함에도 가이텐을 장착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의 막장전설의 끝인 1945년 8월의 일러스트다.

그 외에도 가이텐 모함이 될 군함이 크게 줄어듬과 동시에 일본 본토 및 주요 거점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육상에 설치된 가이텐 기지에서 가이텐을 직접 발진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가이텐 10형이 이런 공격방식을 주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3. 양산

1944년 9월 5일에는 야마구치 현에 오오츠시마(大津島) 기지를 신설하여 본격적인 전력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이텐 1형을 8월 말까지 100기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9월 중순에는 하루 2기, 그 후에는 하루 3기만 생산하는 정도에 그쳤다. 미군이 수송항로를 봉쇄하여 물자와 자재가 모자랐고, 피해함선도 수리해야 하는데 숙련공도 없고 식량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가이텐의 모체가 된 93식 3형 어뢰가 산소를 사용하려면 발사 전에 시간을 들여 정비해야 했다. 한 번 발사하려면 지상에서 3일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특공대원들이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여, 정비대원들은 상부로부터 가이텐을 3일에 2개씩 정비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9월 6일 훈련 도중 가이텐의 창안자 구로키 대위가 정비불량 사고로 사망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구로키를 뒤따르자." 하며 특공대원들이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전형적인 일본식 영웅담 만들기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4. 종류

1형부터 10형까지 총 8개의 내부 함종이 존재하며 구체적으로는 1형, 1형 개1, 1형 개2, 2형, 4형, 5형, 6형, 10형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1형 개1과 1형 개2는 긴급생산용으로 간략화된 형식이고 5형과 6형은 기존 형식에다가 사소한 개량을 가한 것이며 2형과 4형은 개량하다가 포기했고 10형은 개발완료시기가 너무 늦어서 결국 대량으로 양산하여 실전에 투입한 것은 1형뿐이다. 가이텐의 총 생산량은 약 420척이다.
구분 1형 2형 4형 10형
배수량 8.3t 18.38t 18.17t 3t
전장 14.75m 16.5m 16.5m 9m
직경 1m 1.35m 1.35m 0.7m
내부작약
(TNT)
1,550kg 1,500kg 1,800kg 300kg
신관 충격신관 겸 수동식 수동식
동력기관 93식 어뢰엔진 6호 기계
(U8 엔진)
92식 어뢰용
전기모터
출력 410kw (550마력) 1,110kw (1,490마력) 900kw (1,200마력) 6kw (8마력)
추진제 순산소
등유
경유
과산화수소
히드라진 수화물
(hydrazine hydrate)
해수
순산소
등유
120A 54V
28기 X 4조
배터리
속력 56km/h (30노트) 75km/h (40노트) 75km/h (40노트) 13km/h (7노트)
항속거리 22km/h (12노트)시
78,000m
37km/h (20노트)시
43,000m
56km/h (30노트)시
23,000m
37km/h (20노트)시
83,000m
56km/h (30노트)시
50,000m
75km/h (40노트)시
25,000m
37km/h (20노트)시
62,000m
56km/h (30노트)시
38,000m
75km/h (40노트)시
27,000m
13km/h (7노트)시
3,500m
잠수한계 80m 100m 100m 20m
승무원 1명
생산량 330척 1척 50척 6척

기본적으로 가이텐의 모든 형식에서 누수 및 유독가스 발생문제는 항상 존재했다. 따라서 세부 항목에서 해당 문제가 언급되지 않더라도 누수 및 유독가스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세부 항목에서 언급될 수준이면 1회용 자폭 병기로 사용하기에도 답이 없을 수준으로 증상이 심각했다는 이야기다.

4.1. 1형

93식 산소어뢰 1형을 기본으로 해서 탄두중량을 490kg에서 1,550kg로 크게 증가시키고 승무원이 탑승할 조종실을 만들고 어뢰 조종을 기존의 자이로스코프와 승무원이 동시에 조종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변경점이다. 처음에는 93식 1형 어뢰를 대상으로 했으나 나중에는 93식 3형 어뢰도 대상으로 했고 대량양산되고 실전에 배치된 유일한 형태로 가이텐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방에는 어뢰 탄두와 신관이 존재하고 그 뒤에 어뢰 엔진용 압축산소탱크와 조향용 공기탱크 및 전방 트림용 탱크가 존재하고 그 뒤에는 조종설비와 조종석 및 잠망경이 있고 후방에 어뢰용 엔진과 스크류 프로펠러 및 방향타가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어뢰를 확대한 후 산소탱크와 엔진 사이에 조종석이 들어간 격실을 추가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가이텐 승무원은 조종석으로 들어가는 데 2가지 통로를 사용할 수 있다. 첫번째는 가이텐을 운반하는 잠수함의 실내와 직접 연결되는 하부 해치이고 두번째는 잠망경 후방에 위치한 상부 해치다. 상부 해치는 수상함에 탑재된 가이텐에서 자주 사용했으며 잠수함이 해상 위로 올라온 상태에서도 사요했다.

조종석에는 수직으로 70cm 정도 가동이 가능한 수동작동식 소형 잠망경이 설치되었으며 20,000rpm으로 회전하는 자이로스코프에 동력을 제공하는 배터리는 조종석 아래에 외치한다. 승무원이 호흡할 공기는 과산화나트륨을 채운 통을 조종석에 설치하는 간이형 공기정화기를 설치하는 식으로 정화한다. 그 외에 조종설비에는 기본적인 어뢰 조향장치 외에도 충격신관이 발화하지 않을 때를 대비한 수동발화식 신관 작동장치가 존재한다.

세부 형식으로는 1형 개1과 1형 개2와 6형이 존재한다. 1형 개1과 1형 개2는 1형을 간략화하여 양산성능을 늘린 형식이고 6형은 조종석 전방에 위치한 공기탱크 부위를 개선한 형태다.

원래 1형은 130척만 생산한 후 후속하는 형식을 생산할 예정이었으나 2형을 비롯한 후속 형식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개발완료 시기가 너무 느려서 결국 1형은 기본형이 330척이 생산되고 각종 세부 형식까지 합하면 약 420척이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대량 양산 및 실전투입이 이루어진 형식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누수와 유독가스 발생 문제가 있었으나 후속형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서 가장 신뢰성이 높은 가이텐이 되었다는 아이러니도 존재한다.

4.2. 2형

견독잠수함작전 (遣独潜水艦作戦)을 통해 I-8나치 독일에서 가져온 과산화수소 사용 엔진을 탑재한 가이텐이다.

엔진은 6호 기계 (六号機械) 라고 명명된 4.3L 용량의 배기량을 사용하는 U8 엔진으로 구리시안화칼륨으로 촉매가 이루어지는 과산화수소와 하이드라진 수화물간의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생성물로 경유를 연소시키는 방식으로 동작한다. 해당 반응에서 발생하는 물과 추가적으로 공급하는 물은 일종의 희석제로도 이용된다. 과산화수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출력이 더 증가하므로 75km/h (40노트)의 속도 달성 및 항속거리 증가도 기대되었다.

엔진이 완전히 변경됨에 따라서 1형과 달리 내부 구조도 크게 변화하고 외형도 약간 변화했다. 가이텐의 선수부에 탄두가 존재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 뒤에 경유가 들어있는 연료 및 조향장치용 공기탱크가 존재한 후에 2,600L 용량의 과산화수소 탱크가 있고 그 뒤에 조종장치와 조종석이 있으며 후방에는 히드라진 수화물 탱크와 물탱크, 배터리가 존재하고 그 뒤에는 엔진룸과 스크류 프로펠러와 방향타가 존재한다.

1형에서 이미 가이텐 조종수에게 한계가 올 정도로 조종이 복잡했고 과산화수소를 사용하는 신형 엔진이 들어갔기 때문에 조종수의 부담을 줄어주고 엔진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도록 조종설비를 전면적으로 교체하였으며 과산화수소 작동식 엔진에 필요한 부수적인 설비도 들어가서 전체적으로 복잡한 설비가 되었다. 엔진룸도 열이 많이 발생하므로 해수가 평상시에도 냉각수 용도로 유입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설비만 내부에 넣어두는 식의 개조가 필요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2형은 가이텐 조종수가 조작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항진코스를 잘 유지할 수 있으며 잠수한계수심도 80m에서 100m로 늘어났다.

하지만 양산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엔진쪽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일도 잦았다. 당장 과산화수소 탱크를 만드는데만 평균 2주의 시간이 들어갔고 필요한 기술력도 높았다. 제작방식만 봐도 복잡한데 5개 조각으로 구성된 탱크를 정밀하게 용접해서 합친 후에 탱크 내부를 주석으로 코팅한 후 아스팔트를 바른 후에 두꺼운 주석판으로 마무리작업까지 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1회용 자폭 병기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높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다.

엔진의 경우에도 초기 시험시 수압으로 인해 엔진이 변형 및 고착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엔진 부위를 강화했으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론과 달리 실제로 장착된 엔진은 목표한 출력치를 달성하지 못했고 제작공정까지 복잡해지고 시간이 걸리므로 결국 프로토타입 1척만 만들어지고 2형 자체를 포기한다.

사실 과산화수소를 사용하는 엔진은 Me 163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치 독일의 기술력과 양산력으로도 위험천만해서 사람이 탑승하는 유인용 무기에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했다. 과산화수소가 누출되는 순간 조종수 사망은 기본이고 가이텐 자체가 혼자서 유폭할 가능성도 매우 높았으며 정비원이 사망하고 도크를 비롯한 주변이 오염 및 초토화될 위험성도 높았다.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것이 일본 제국 입장에서는 다행일 수준이었다.

4.3. 4형

1945년 초반에 2형의 개발속도가 느리며 과산화수소 공급도 불안정하다는 것을 일본 제국 해군의 상층부가 지적함에 따라서 2형의 연료를 통상적인 순산소와 등유로 변경한 모델이다.

기본적으로는 2형의 동체와 엔진을 유용하였으나 과산화수소용 탱크와 관련 시설이 제거되고 1형처럼 산소탱크와 등유용 연료탱크가 설치되었으나 2형의 엔진처럼 4형의 엔진도 해수로 냉각하는 방식을 유지했으므로 배치가 조종석을 중심으로 해서 앞뒤로 분산해서 설치하는 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조종석은 과산화수소 관련설비가 제거된 것을 제외하고는 2형과 동일하며 조종석 후방의 소형 산소탱크 3개를 제거하고 훈련용 목적의 보조 좌석을 설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4형의 외부에는 카이류처럼 전방에 비행기처럼 작은 날개가 있으며 해당 날개를 통해서 비행기처럼 상승과 하강이 가능해졌다. 6형은 4형의 날개를 개선품으로 교체한 형태다.

이론상으로는 2형과 거의 비슷한 능력을 보이면서도 조종성능도 높아져야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1945년 초에 실시한 무인 항행 시험 및 유인 항행 시험에서 모두 처참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스펙과는 달리 최대 속도는 37km/h (20노트)를 넘어서지 못했고 항속거리도 38,000m를 넘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엔진의 비효율로 인해 연소되지 못하고 그냥 바다에 버려지는 산소의 양이 높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배기가스를 측정하는 센서에서 산소가 검출되는 양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엔진실이 냉각의 목적으로 인해 외부의 해수가 직접 유입되는 형태이므로 수압등으로 인해 엔진 부위가 압력을 받아서 측정이 불가능한 누출현상이 발생하거나 추진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는 등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터지고 개선도 지지부진하자 4형은 50척이나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되었다.

애초에 가이텐 개발진들도 2형을 개조한 형태인 4형을 연구하느니 그냥 1형을 개선하고 양산성을 늘리는 방향으로 연구를 지속할 것을 요청한 상태였다. 그리고 전황이 악화일로이며 그동안 생산한 1형의 숫자를 생각해본다면 4형을 계속 개발할 사유도 없었다.

4.4. 10형

결호작전의 발령과 함께 일본 본토를 직접 방어해야 할 수요가 발생하고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 모터로 작동하는 92식 어뢰가 많이 쌓여있으며 고용량 배터리도 개발되었다는 것을 보고받자 긴급개발 형태로 나온 것이 10형이다.

긴급 개발의 결과로 인해 말 그대로 92식 어뢰를 두동강 낸 후에 중간에 승무원이 탑승하는 조종실을 끼어넣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탄두가 300kg으로 급감하고 조종석 자체도 매우 협소해졌으며 상부 해치로만 탑승이 가능해졌다.

긴급상황에 맞추어서 간략화도 이루어진 상태라 탄두에 충격신관이 빠졌으며 잠망경도 고정식으로 회전만 가능한 형태로 교체되었다. 조향용 공기탱크도 가이텐 외부에 외장형으로 설치될 정도로 92식 어뢰를 긴급개조한 형태에 가까웠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기존의 형식에 비해서 10형이 여러가지 면에서 장점이 존재했다.

그러나 긴급개조의 문제가 커서 축전지실과 조종수실에 누수가 발생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탑승한 조종사도 비좁은 조종실에 들어가므로 전투효율이 크게 감소되었다. 덤으로 조종사에게 허용된 산소용량도 적은 편이라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1945년 7월 16일에 일본 제국 해군의 군령부는 500척이 넘는 수량의 10식을 생산하여 기존 및 신규로 설치되는 가이텐 기지에 배치한 후 일본 본토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10식은 개발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로토타입 6척 정도만 완성된 후 일본이 항복하면서 개발 및 생산이 정지된다.

5. 특징

5.1. 장점

기본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수면 아래서 접근하므로 멀리서 탐지할 수 있는 카미카제보다는 더 위협적이었다.[5] 게다가 조종성을 개판으로 만든 1,550kg 중량의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탄두는 명중할 경우 정말로 치명적인 수준이다, 명중을 한다면 말이다.

5.2. 단점

조작이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 훈련을 받았으나 출격 전에 전쟁이 끝나 살아남은 특공대원은 "눈이 6개에 손이 6개여도 조종하기에 모자랄 지경이었다."라고 평하였다. 그 때문에 위에서 이야기한 가이텐의 최초 개발자 구로키 대위를 포함하여 훈련 중 사망자가 7명이나 나왔다.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태생부터 조타기능이 없는 무유도 직진 어뢰였는데, 이것을 사람이 조종할 수 있도록 억지로 개조한 물건이다보니 상하용/좌우용 타륜을 동시에 조종할 수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자동차에 왼쪽 바퀴용 핸들과 오른쪽 바퀴용 핸들이 각각 따로 달려있고, 엑셀레이터 페달을 밟았다 때도 페달이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당겨야 하는 꼴. 잠망경 역시 조정해서 자기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런데 승조원의 조종편의성을 고려했다면 아마 일본은 잠수함째로 들이박는 전술을 택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잠망경도 수직으로 가동 가능한 높이가 매우 낮고 항법장치도 조악해서 가이텐의 승조원은 잠망경으로 보이는 작고 흐릿한 시야에 의존해서 혼자서 항법을 계산하면서 목표에 접근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그래서 멀리서 출격한 경우에는 목표를 찾지도 못한 채 망망대해에서 혼자 침몰하게 된다.

이 외에도 조종과 관련한 문제점으로는, 항주하며 연료를 소모할수록 가이텐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되어 심도유지가 불가능해지고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항주하면서 서서히 밸브를 열어 소모하는 연료만큼 해수를 채워야했는데 이 밸런스가 안 맞으면 그대로 부상하거나 착저. 위의 골때리는 조작난이도에 해수밸브 조작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손이 여섯 개여도 부족했을 지경.

애초에 산소어뢰를 개조한 형태로 가이텐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후진이 불가능하고 방향타가 스크류 프로펠러 앞에 있에서 선회반경이 매우 크다는 등의 문제점도 있었는데 제대로 개선하지도 않았다.

엔진의 신뢰성도 낮은 편이라 냉주(冷走)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냉주란 수압등으로 인해 가이텐의 엔진이 찌그러지거나 고장나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산소탱크에서 나오는 고압의 기체로 추진축이 움직여서 일시적으로 가이텐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엔진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가이텐이 멈추면서 그대로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되는 사태로 기존의 산소어뢰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순산소 때문에 산소탱크가 종종 폭발해서 가이텐이 혼자서 폭발하기도 했다.

장시간 운행할 경우 유독가스가 발생했다. 컴퓨터 등으로 유도하는 기술이 거의 없던 시대에 어뢰를 유도하려고 전자장비 대신 사람을 넣었는데, 내부에서 사람이 의식을 잃게 하는 가스가 나왔다. 그리고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전지어뢰 개조형은 축전지에서, 산소어뢰 개조형은 엔진에서 가스가 발생했다고 한다. 원래 어뢰란 것이 승조원을 탑승시킬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데다가, 전쟁 말기로 갈수록 조악해지는 제조기술까지 합쳐진 결과였다.

여기에 더해서 가이텐에 문제가 발생하면 승조원이 수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일찍 문제를 알아차리고 귀환하려고 해도 1회용 자폭 병기의 특성을 너무 잘 살려서 제대로 된 귀환이 어려웠고 귀환하더라도 가이텐 모함과 재접속이 곤란했다. 심지어 통신조차 제대로 연결되지 못해서 가이텐 모함은 가이텐을 발진시킨 후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으므로 전과도 멀리서 보이는 폭발과 연기를 목격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했는데 실제로 목표에 가이텐이 명중했는지 그냥 아무 곳에나 충돌해서 자폭했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래서 실제 운용시에는 가이텐 모함이 목표에 최대한 접근한 다음에 가이텐을 출진시켜야 했다. 즉, 사냥하려고 접근하다 역으로 들켜 사냥당할 위험이 높아진다는 의미. 실제로도 멀리 있어도 모함인 잠수함이 포착되기 쉬운 판국에 스스로 가까이 다가가기까지 해주니 발진도 못시켜보고 모함과 함께 사이좋게 수장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이래저래 답이 없다.

일본 제국이 가이텐이나 만들면서 시간과 노력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는 사이에 미합중국 해군은 잠수함에 TDC (Torpedo Data Computer)라는 원시적인 어뢰 유도 컴퓨터를 1943년 부터 잠수함에 달았다. 해당 장치는 잠수함의 센서와 어뢰의 자이로스코프와 동시에 연동되면서 목표 함선의 진행 방향과 속도, 발사하는 잠수함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바탕으로 자이로의 세팅을 조절해서 어뢰의 진행 방향을 발사 이후에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장비였다. 그래서 TDC와 연동되는 어뢰는 마치 유도탄처럼 발사 이후 방향을 바꿀 수 있었으므로 미군 잠수함은 무조건 목표 지점을 직접 조준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Fire and Forget 처럼 발사하면 어뢰가 알아서 목표물로 유도되는 상황인데다가 어뢰마저도 어뢰 스캔들을 극복하고 개선되고 심지어 19" (48.3cm) Mark 24 Fido처럼 대잠수함용 초기형 유도어뢰까지 만들어지자 일본 해군의 수상함대 수송함대는 모두 씨가 말라버린다.

6. 유사품

독일 해군이나 이탈리아 해군, 영국 해군도 이와 비슷한 인간어뢰를 운용했지만 자살용은 아니었다. 어뢰 외부에 손잡이가 있어서 잠수복을 입고 어뢰 외부에서 조종하는 방식을 채용했으므로 어뢰에 이상이 발생하면 그냥 어뢰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멀리 헤엄치면 끝이었기에 사용자의 안전을 크게 도모했으며 애초에 이런 방식의 어뢰로는 장거리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서 아군 군항이 가깝고 인간어뢰 모함이 목표에 접근이 용이한 지중해 근방 지역에서 주로 투입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어뢰에 탑재되는 탄두는 어뢰 자체를 돌격시켜서 터뜨리는 용도가 아니었고, 목표물 근처에서 수동으로 탄두를 분리한 후, 폭탄처럼 설치가 가능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어뢰라기보다는 사용자와 탄두를 운반하는 소형 수중 추진기로 사용했으므로 작전을 끝낸 후에 다시 어뢰를 조종해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현대에서도 한국군, 북한군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수중추진기를 해상침투에 이용하고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 해군소속 부대인 Decima Flottiglia MAS는 1941년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한 영국 해군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발리안트와 HMS 퀸 엘리자베스의 함체 하부에 폭탄을 설치한 후 탈출하려다가 영국 해군에게 발각당해 잡혔다. 이들이 잡힌 사유는 잠수복에 이상이 생겨서 오랫동안 차가운 물 속을 다니는게 힘들어 잠시 떠올랐다가 발각당했던 것. 따라서 폭탄을 설치한 2명은 그들이 폭탄을 설치한 바로 그 배에서 심문을 받았다. 침투부대 중 나머지 4명은 이집트에서 그리스 선원으로 위장하고 도망가려 했으나 사건이 벌어진 후에 붙잡혔다.

그때 이탈리아 해군 장교 루이지 듀랑 드 라 펜느의 한 마디가 "15분 후 이 배는 폭발한다!"였고, 곧바로 배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이 작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은 유인어뢰 3기를 소모하고 운용요원 6명이 포로로 잡히는 경미한 피해만 입었지만, 영국군은 전함 2척과 대형 유조선 1척이 항구 내에 착저해서 고정포대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수심이 얕은 항구라 착저로 끝난 것이지 실제로는 전함 2척 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사태로 인해 영국군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상실할 뻔했고, "이탈리아군의 용기는 타고 있는 배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라는 말을 남긴다.[6]

그리고 그 작전에 참여한 이탈리아 해군은 잘 살아남았다. 폭발한다고 말한 그 포로들도 경미한 부상만 입은 채 살아남아서 나중에 이탈리아로 귀국했으며 훈장까지 받았다. 또한 이 부대는 1943년까지 유인어뢰를 동원한 침투, 파괴공작으로 통상파괴작전을 시행, 상당한 전과를 기록했다. 나중에 이런 공격법이 발전해서 '수중침투-파괴 전략'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도 비슷한 물건인 채리엇을 개발하겠다고 열을 올렸다. 위에서 언급한 이탈리아 부대도 연합군 소속이 되자 추축군 해군 상대로 유인어뢰를 사용했다.

그러나 가이텐은 그딴 거 없었다. 전자가 많이 위험하지만 살아서 돌아올 수는 있고, 돌아오는데 성공만 하면 영웅이 될 수 있다!였다면, 후자는 닥치고 죽어라! 그럼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신이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정신 못 차리고 가이텐에다가 어뢰 2발 더 달아놓은 것에 불과한 카이류도 개발했다는 것이다. 답이 없다. 더 큰 문제는 가이텐도 매우 심각한 수준인데 일본 제국 해군이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갑표적 개량형에 어뢰 2발을 외장형으로 설치하고 함수에 자폭탄두를 장착한 카이류를 개발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병맛나는 대전차총검술 내지는 자돌폭뢰의 대함버전도 만들었다는 거다. 후쿠류 참고.

7. 운용 및 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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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에 성공한 가이텐

1944년 9월 중순부터 가이텐은 서서히 그 숫자를 증가시켜 나갔지만 제일 큰 문제는 승조원을 뽑아 자살공격대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로서 앞서 설명한 승조원들의 사기진작이 헛소리였음이 입증되었다. 최소한 임무취소, 불시착 등으로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는 카미카제와 비교하면, 해치 닫고 모선과 분리하자마자 100% 사망 확정인 가이텐에 타기를 승조원들이 두려워함도 이해가 된다.

1944년 10월 초부터 기이텐 탑재의 공사가 마무리된 제15잠수대의 가이텐이 최종훈련을 마치자, 제6함대사령부는 겐(玄) 작전을 입안해 이 기이텐 공격대를 키쿠스이대(菊水隊)라 명명했다.

1944년 11월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시 환초에서 미군 급유함인 USS 미시시네와를 격침시키며 요란하게 데뷔했다. 이후 미군이 항구의 경비를 강화하자 가이텐은 해상에서의 공격으로 전법을 바꾸고 키쿠스이대 이후 콘고대(金剛隊)ㆍ치하야대(千早隊)ㆍ진부대(神武隊)ㆍ타다라대(多々良隊)ㆍ텐부대(天武隊)ㆍ신부대(振武隊)ㆍ토도로키대(轟隊)ㆍ다몬대(多聞隊)라는 가이텐 부대를 창설하고, 해당 인원들이 패전 일주일 전까지 148척의 카이텐에 타고 출격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격침 3척(호위구축함ㆍ급유함ㆍ상륙정 각 1척), 대파(大破) 1척(수송함 1척), 소파(小破) 4척(구축함ㆍ수송함 각 2척)에 그쳤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조한 비용도 제대로 못 뽑고 끝났다. 당장 일본에서의 추산도 해당 전과를 기록하면서 가이텐 106기의 대원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으며, 종전 당시까지 가이텐의 대원들은 총 1,375명이었는데 정비 도중 사망한 자까지 합하면 총 사망자는 145명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가이텐을 목표까지 근접시키는데 사용한 가이텐 모함의 손실도 높아서 8척의 가이텐 모함형 잠수함이 침몰했고 잠수함 승조원도 811명이 희생되었다. 그에 비해 미국에서 확인된 미군 사망자는 187명이라고 한다. 개조까지 해서 자폭무기를 운용한 것치고는 비참한 교환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서 설명했던 주옥같은 단점 외에도 가이텐을 싣고 출격할 잠수함도 부족했고, 그나마 출격한 잠수함도 가이텐을 출격시키기도 전에 들켜서 격침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가이텐이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위키페디아의 가이텐 항목에서는 가이텐의 역사를 서술하며 「일본 해군 입장에서 보자면 다몬대는 1척의 잠수함을 잃는 일도 없이 가이텐의 초진이었던 키쿠스이대를 뛰어넘는 전과를 이뤄, 가이텐 작전의 유종의 미를 장식할 수 있었으며, 미군도 전쟁 종결 전의 일본 해군의 커다란 성공이라고 평가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심지어 미국이 가이텐의 전과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언급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가이텐을 둘러싼 국뽕짓이 어찌나 심한지 이런 낭설의 출처를 파헤치는 서적까지 출간되었다.

애초에 이미 당대부터 가이텐의 전과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부정확하다고 언급하는 상황이었다. 가이텐을 발진시킨 후에는 가이텐 모함과 연락이 불가능하고 가이텐 모함도 황급하게 위험지역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가이텐 모함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잠망경이나 육안으로 불기둥이나 폭연을 관측하거나 폭발음을 듣는 것으로 전과를 파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가이텐이 목표에 명중해서 폭발했는지 그냥 자폭했는지 엉뚱한 곳과 충돌해서 터졌는지 분간이 안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발견부터 불명확한데 여기에 더해서 발진으로부터 30분 이내의 폭발음은 돌입 시각과 일치하므로 목표에 돌진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라던지 발진으로부터 1시간 근방의 폭발음은 연료 소모로 인한 자폭일 가능성이 높다 식의 추정까지 합해지니 최종적인 결과 보고는 말 그대로 상상의 영역에 들어가는 상황이다. 게다가 가이텐 모함의 함장이나 수뇌부의 성향에 따라서 추정의 근거가 엿가락처럼 늘어나므로 8월 12일의 가이텐 출격에서는 발진 후 44분 뒤에 폭발과 흑연을 발견한 후 1만 5천톤급 수상기 모함 격침으로 전과를 기록하는 등 말 그대로 전과 보고가 개판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가이텐의 전과가 미국이 공표한 것보다 더 늘어날 가능성은 없다.

8. 잔존 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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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전 유취관에 전시된 가이텐 1형 개1

야스쿠니 신사 경내의 유취관에 가이텐 1형 개1과 가이텐 4형의 조종실과 후방 부속실이 포함된 중앙부 동체가 전시되어 있다.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히라생마치 (平生町)에 있는 역사민속자료관 (歴史民俗資料館)에 가이텐 2형의 조종실과 후방 부속실이 포함된 중앙부 동체가 있다.

히로시마현 우지츠 항을 통해 갈 수 있는 에타지마에 위치한 옛 일본해군병학교겸 현재 해상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에 있는 견학 투어를 통해 일본 해상자위대 역사관에서 가이텐과 같이 자폭부대인 카미카제 부대원의 유서, 사진 및 신상이 있다.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 있는 야마토 박물관에서도 가이텐 10형의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해당 전시실 소개에는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전달한다고 되어있지만, 가이텐에 대해서는 담백하게 해설이 붙어있을 뿐이고 로비에서 외국인을 위한 해설을 해주는 헤드셋을 장착하고 가이텐 앞에서면 '인간어뢰'라고 무미건조하게 설명한다.

오이타현 히지마치(日出町)에는 이름부터 카이텐 신사(回天神社)인 신사가 있는데, 이곳은 상술한 야스쿠니 신사처럼 전쟁과 특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작전에 끌려간 동원된 청년을 위령하고자 그 후손이나 생존자가 모이는 장소로써의 성격에 가깝다. 전쟁중에는 카이텐 기지 내부에 있었으나 패전 후 생존장병들의 탄원으로 신당을 기지 바깥으로 빼내어 근처 신사에 합당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따라서 신사 근처에는 구 카이텐 기지의 유적이 있다. 건립목적을 보면 카이텐이라는 병기의 탄생을 가리켜 "잔혹함을 후세에 알린다"고 적혀 있으니, 혹시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신사에 흥미는 있는데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오이타현 관광정보사이트 히지마치 관광정보사이트

일본 외에도 미국과 영국에서 가이텐을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미국은 뉴저지 해군박물관, 미해군 해저박물관, USS Bowfin 잠수함 박물관 겸 공원에서 전시하고 있고 영국은 해군 화력과 폭발력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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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텐 휴대폰 고리

2009년 가을 일본의 '쉽스'라는 회사에서 가이텐과 오카의 휴대폰 고리를 해상자위대 기지에서 판매하는 초유의 사고를 터트려 각계의 비판이 일자 결국 2010년 1월에 전량 회수하였다. 기사링크 하지만 제품이 품절되자 일본 경매사이트에서는 최고 1만 2천 엔에 경매에 나오기도 하는 등 이상과열 현상도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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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모델 케이스 프라모델 완성예시

이와는 별개로 파인몰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이텐을 모델화 시켜왔다.

아카데미에서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을 구현했고 I-58에는 가이텐이 달렸다.링크 이는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킬 당시 가이텐 승조원들이 저런 큰 목표는 가이텐이 나가야 한다고 격분했다는 증언에 맞춘 고증이다. 그러나, I-58의 함장 하시모토 모치즈라 중좌는 가이텐 승조원들의 출격 요청을 거부하고 산소어뢰로 USS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다.

10. 대중매체에서



[1] 실제로 탄두 불발과 기적적인 충격 각도로 충돌 이후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2] 전쟁 초기만 해도 일본 해군은 합리적이었다. 근데 갑표적은 왜 만들었대 카미카제 같은 자살공격을 지시한 건 필리핀 해 해전 이후부터였다.[3] 본래는 나무를 옮겨심기 전의 준비작업을 뜻하는 단어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에서도 흔한 행위였다. 물론 양국 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서 점차 사라져 가곤 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곳도 많다.[4] 현대의 중어뢰 탄두가 대개 300kg대 중량인데, 이것만으로도 1만 톤을 넘는 군함을 일격에 격침할 수 있다. 물론 현대에는 폭약 성능이 더 향상되었음도 감안해야 한다.[5] 카미카제의 압도적인 인지도에 가려서 좀 떨어지지만 전과도 올린 바 있다. 효율이 영 별로여서 그렇지…[6]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 수상함대는 연합군과의 교전을 피해서 꼭꼭 숨어 다녔다. 사실 추축국들 중 해군을 해군답게 쓴 나라가 일본군 밖에 없단 아이러니도 있다. 이탈리아의 전함은 좁은 지중해에서 쓰기 알맞게 항속거리가 짧은 대신 속력을 높게 내도록 설계한 것도 한 몫했다.[7] 사실 일본군 중에서 잠수함 쪽은 함이 격침되면 잠수함 특성상 다같이 죽기에 승조원들에게서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병영부조리도 거의 없었고, 함 승조원들이 서로 가족처럼 대하며 생활했다.[8] 순도 100%의 산소는 오히려 독이지만, 좁은 잠수함 내부가 이산화 탄소로 가득 차서 산소가 부족한 상황인 만큼, 연료통 내에 들어있는 산소를 뿌리는 정도로는 산소중독에 이를 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이미 잠수함 내부엔 70% 정도의 질소가 있다.[9] 가이텐도 일단 인간이 탑승하는 기동장비인지라 속도조절기능이 있어서 이걸 이용해 2기를 일거에 발사, 마치 잠수함이 움직이면서 스크류 2개가 움직이는 듯이 속였다. 현대의 어뢰기만체계와 비슷한 원리다.[10] 폭뢰 공격에 잠수장치가 고장나서 잠수가 불가능하였다.[11] 사실 해당 회차의 가이텐 설정은 단순한 지나가는 뒷설정이 아니라 작중 배경인 '세이렌섬'이 그와 같은 이름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구 일본군의 패망 후 이 섬에 상륙한 미군들이 마치 그리스 로마신화 속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은 기이한 음성이 주기적으로 섬의 해안가에서 들려오는 것에서 착안해 이런 이름을 붙였는데, 이 세이렌 울음소리의 정체는 다름아닌 해식동굴 깊숙한 곳에 반파된 채 방치된 가이텐의 금속부가 파도에 쓸려 진동하면서 내는 파동음이었다. 해식동굴이 워낙 은밀한 곳에 있었던지라 반파된 가이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일평생 해식동굴의 비밀을 감추기 바빴던 섬의 최장수 주민 노파(87세)를 제외하면 없었던 탓에 가이텐의 존재는 몰랐지만 일단 세이렌섬 토박이라 노랫소리가 시간대별로 달라진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던 진범이 이를 범행 트릭에 요긴하게 써먹었으나, 김전일이 삽시간에 세이렌 노랫소리의 수상함을 파악해버린 데다가 김전일이 사람들 앞에서 비밀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를 돕기 위해(종전과 동시에 일본군과 맺은 비밀유지 조약을 세이렌섬 주민이 본인 1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며 깨버렸다) 노파가 해식동굴 숙 가이텐의 존재는 물론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세이렌 노랫소리가 사실 조류의 흐름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과 그 상세한 법칙까지 폭로하는 바람에 결정적 트릭이 까발려져 폭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