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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대학교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2. 상세
1947년 6월 14일, 강원도 최초의 4년제 종합대학인 강원도립춘천농업대학이 설립되어 이를 전신으로 1953년, 국립으로 이관, 1970년에는 국립 강원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78년, 종합대학으로 승격과 동시에 오늘날까지 사용 중인 강원대학교라고 교명을 다시 한 번 바꾸게 되었다.2006년 3월 1일, 정부의 국립대학에 대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강원도 삼척시에 위치한 삼척대학교[1]를 제2캠퍼스로 편입하여 본교인 춘천캠퍼스, 제2캠퍼스인 삼척캠퍼스(삼척 · 도계캠퍼스)로 이원화캠퍼스를 운영하게 됐다.
대학구조조정에 의한 우여곡절이 많다. 2011년, 삼척캠퍼스의 낮은 재학생 충원률과 총장직선제를 문제 삼아 교육과학기술부에 의해 당시 재적 중인 재학생 만 명 이상인 국립대학 12개 중 충북대학교와 함께 구조조정 중점추진 국립대학에 선정됐으며 이후 선거를 거쳐 총장간선제를 채택하면서 구조조정 중점추진 국립대학 대상에서 제외되었다.[2] 이후 2015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D+ 등급을 받게 되면서 재직 중이었던 총장이 책임지고 사퇴하고 교원간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고 대학 축제였던 대동제까지 중단할 정도로 강원대학교 역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2016년, 대학구조개혁 후속 이행점검 결과 그룹1(제정지원제한 완전해제) 평가를 받아서, 2017년부터 재정지원제한이 전면 해제되었다.
그 외 내용은 날짜별로 문단을 나누어 서술한다.
3. 춘천농업대학 및 춘천농과대학
춘천농업대학 당시 강의동과 도서관의 모습 |
사진은 당시 강의동과 도서관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물론 한국 전쟁 전후로 모두 파괴되었다.
1947년 6월 14일 개교한 강원도립 춘천농업대학을 전신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1946년 강원농업중학교에 재직 중이었던 함인섭 교장에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다. 당시 박건원 강원도지사, 이재학 학무국장 등 지방 유지들의 도움으로 대학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설립 인가에 힘 썼다. 당시 학사 제도는 미국 대학의 학사 제도와 비슷했으며 입학 자격을 6년 동안 중등교육을 이수한 자에 한하여 부여했다. 신입생 충원을 위하여 강원농업중학교과 강릉농업중학교에 제5학년, 제6학년 각각 한 반씩 설치했으며 두 학교의 졸업생들은 춘천농업대학의 개교와 함께 제1회 입학생으로 진학하게 되면서 미군정청문교당국에 의해 설립 인가가 되었던 것이다. 설립 당시에는 농학과만 존재했으며 강원도 최초 4년제 종합대학이었다.
1947년 7월 30일, 춘천농공고에서 개강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되었고 1949년에는 옥천동에 위치한 중앙감리교회의 건물을 임시로 차입하여 교사로 이용했다. 강원농업중학교을 기반으로 개교하려고 했으나 독립된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강원농업중학교의 건물을 빌리기로 했는데, 이마저도 건물이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3] 이후 임시방편으로 천막을 치거나 교사들을 빌려 수업하는 형국이었다.
1950년 5월 10일, 과학중등교사 양성소[4] 부설인가와 동시에 농업토목과와 원예과가 설치되었다.
1951년 5월 10일,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약 1년이 지난 시점으로 이미 부산광역시로 피난했으며 천마산에서 천막 치고 교사로 삼아 수업을 했다고 한다.
1951년 8월 1일, 강원도 원주군[5]으로 이전하였으며, 두 달 뒤인 10월 3일에는 제1회 졸업식이 개최되었다. 이틀 뒤인 10월 5일에는 동창회 결성이 이루어졌으며, 12월 31일에는 춘천농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임학과와 축산학과가 신설되었다.
효자동으로 이전한 이후 춘천농과대학의 모습 | 행정처의 모습 |
1953년 7월 25일, 옥천동에서 효자동으로 이전 했으며, 그 과정에서 20여만평 대지 확보가 이루어졌다. 전후 영향으로 모든 교사가 가건물이었다. 행정처 역시 가건물이었으며 오른쪽 사진에서 보이는 차량은 당시 춘천농과대학에 서 유일했던 차량이었다고 하며 함인섭의 조부인 함태영 부통령이 제공해 준 것이라고 한다.
춘천농과대학이 도립에서 국립으로 이관 되었음을 증명하는 문서 |
단기 4287년[6] 4월 1일 부터 국립으로 이관키로 결정된 춘천농과대학 일체를 별지와 여히 인계인수함.
단기 4287년 3월 31일. 인계자 강원도지사 최규옥 문교부 장관 대리 차관 허증수.
1954년 4월 1일, 도립에서 국립으로 이관했는데 도의 지원보다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이 대학을 운영하는데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에 국립으로 이관한 것으로 보인다.단기 4287년 3월 31일. 인계자 강원도지사 최규옥 문교부 장관 대리 차관 허증수.
1960년대 모습[7] |
1960년부터 전후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대학으로서 구색을 점차 갖추기 시작했다. 사진상 가운데에 위치한 건물은 본관(현 사범대학 교육1호관)으로 당시에는 본관 가 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학장실을 비롯한 행정실, 강의실 18개 정도를 갖춘 교내 최초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이었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농화학과 소속 재학생과 교원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오늘날에는 사범대학 교육3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1년 12월 19일, 농림부로부터 약 3,050.56정보[8][9]의 연습림을 관리환했다. 이는 국내 최대 규모로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했던 함인섭 학장의 공로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1965년 3월 1일, R.O.T.C 제101학군단 제7분단이 설치되었으며 1966년 3월 14일에는 제127학생교육단이 설치되었다.
1968년 1월 10일, 농학과와 산림과에서 최초로 대학원 설치인가를 받았으며 1969년 3월 1일에는 국어교육과, 영어교육과, 수학교육과가 신설되면서 교내 전반적으로 기초를 닦고 정비하는 시기였다.
4. 강원대학 및 강원대학교
1970년 3월 1일, 강원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체육학과, 법학과, 행정학과, 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두 달 전인 1월 13일에는 춘천대학과 통합하였다.[10] 그 외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나래관. 도서관[11] 등 부속 기관에 해당하는 건물들이 착공 및 완공되던 시기였다.강원대학으로 교명 변경 이후 본관 가 동의 모습. |
강원대학 당시 본관 가 동의 모습. 오늘날에는 사범대학 교육1호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상술했듯 가건물 천지였던 춘천농과대학에 대학으로서 구색을 갖추게 한 건물이기도 하다.
(위에서 부터 차례대로) 임학관[12], 나래관, 도서관[13]의 모습 |
나래관이 착공에 들어간 모습. 착공 당시 일부 재학생들은 건물의 형태나 위치를 보고 가용 공간이 줄어든다는 지적을 했었다고 한다.
강원대학 당시 미래광장의 모습 |
강원대학 당시 미래광장 모습으로 허허벌판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다.
1978년 3월 1일, <대통령령 제8814호(‘77.12.31)>에 의거 강원대학교로 승격되었으며, 동시에 농과대학, 사범대학, 법경대학, 이공대학, 교양과정부 인가를 받고 식품공학과, 낙농학과, 한문교육과, 지질학과 신설, 사학과를 역사교육과로 개편, 이후 1978년 12월 30일부터 1979년까지 교육대학원 신설 인가, 이공대학을 자연과학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리,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임산가공학과, 법학과, 행정학과, 경영학과 신설, 박사 과정에 농화학과, 농공학과, 원예학과, 생물학과 신설, 경영대학원 신설 등 오늘날의 학부 및 대학원 과정 대부분을 이 시기에 형성했다.
1978년 강원대학교로 교명 변경 이후 정문의 모습[14] |
1980년대에도 여전히 여러 가지 체제를 정비하면서 부속 기관을 비롯한 건물들을 대대적으로 갖추기 시작하면서 종합대학으로서 구색을 맞춰져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1980년 3월 1일, 법경대학을 법과대학과 경영대학으로 분리, 지리교육과, 환경학과 신설 및 가정학과를 가정교육과로 개편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통령령 제9783호에 의거 교양과정부 폐지, 1981년 3월 1일에는 인문사회대학 신설, 1982년 3월 1일에는 임과대학 신설 등 단과대학이 대거 신설되었으며, 그 외 학과의 신설 및 개편, 대학원 과정의 신설, 강원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의 설치 등 종합대학으로서 필요한 요소들을 대거 갖춰나갔고, 특히 1988년에는 평의원회 구성을 시작으로 총장직선세 실시, 학부 학사업무 ON-Line 전산화 등 운영에 있어서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종합해보면 대부분의 교내 시설이나 단과대학은 이 시기에 완공되었으며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시설들이 확충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당시 축협사거리의 모습 |
골목길을 따라가다보면 보이는 사거리가 오늘날의 축협사거리이다. 오른쪽 언덕에 있는 건물은 강원대학교병원으로 당시에는 지방공사 강원도춘천의료원이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동춘천초등학교이다. 오늘날의 후문 근처를 생각해봤을 때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다른 풍경임을 알 수 있다.
1981년 당시 완공된 종합운동장의 모습 |
완공된 종합운동장의 모습. 오늘날의 종합운동장과 달리 함인섭광장 방향으로 스탠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후 2000년대에 복권위원회의 지원으로 리모델링을 진행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1980년대 당시 강원대학교의 전경 |
미래광장이 있었으나 미래동상
1980년대 공과대학과 인문대학의 모습 |
두 동 정도 지어진 공과대학 뒤로 구 체육관이 있었다. 앞에 보이는 건설 중인 건물은 인문대학. 정문도 오늘날의 위치로 이전했기 때문에 정문으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 현장도 볼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정문이 옮겨진 이유는 당시 국무총리의 모종의 명령으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1980년대 당시 총학생회 선거가 이루어지는 모습 |
첫 총학생회 선거는 1984년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되는데, 해당 사진에 존재하는 미래동상
1990년대에 들어서도 단과대학 및 학과의 신설 및 개편은 계속되었다. 1991년, 인문사회대학을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으로 분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1994년에는 예술대학 신설, 1997년에는 의과대학 신설이 이루어졌으며 학과 역시 단과대학 못지 않게 신설 및 개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92년, 정밀기계공학과, 농업기계공학과, 삼림자원보호학과 신설에 이어 1994년에는 정보통신공학과, 1995년에는 무용학과, 1998년에는 일본학과 신설되었다. 반면 정부의 정책에 의해 그 많던 학과들을 학부제 또는 통폐합을 거치면서 대대적인 개편을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이어 1990년대에도 다시 한 번 운영에 있어 획기적인 개선을 이루었다. 1991년에는 행정업무 ON-Line 전산화, 1995년에는 교내 전산망(LAN)설치, 1996년에는 강원대학교 학술정보시스템(KALLISS) 가동 등 행정업무에 큰 개선을 불러온 것은 물론이고 시설 확충 역시 신경 쓰는 모습으로 1990년에는 노천극장 준공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임과대학 2호관 준공, 1994년에는 공과대학 5호관, 정보통신연구소, 백령문화관 준공, 1995년에는 사회과학관 준공, 1996년에는 축산대학 2호관, 미래관 준공, 1998년에는 공과대학 6호관 준공, 1999년에는 대학본부 준공[15]이 이루어졌다.
1993년 백령대동제 당시 우유먹기대회의 모습 |
문제의 우유먹기대회도 당시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대부터는 부속기관의 개편 및 강원대학교발전기획단, e-러닝센터 신설 등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2004년에는 산업협력단(특수법인) 신설, 2008년에는 법학전문대학원 예비인가를 받는 등 특기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그 외에도 시설 확충 및 개선도 이루어져 2000년, 강원대학교병원 개원을 비롯하여, 석재복합신소재연구소, 자연과학대학 5호관 준공, 2001년에는 예술대학 2호관 준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부에서 시행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2006년 3월 1일부로 삼척대학교와 통합하면서 다소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진리의 문의 모습 |
강원대학교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진리의 문.
2001년 대의원 총회 당시 모습 |
2001년에 개최된 대의원 총회 당시 모습으로 당시의 패션 코드와 강의실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이다.
2001년 인문대학 학생회 학과군제 반대집회 당시 모습 |
2001년에 인문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개최된 학과군제 반대집회 당시 모습.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 초반까지는 각종 국가지원사업 선정, 안정적인 취업률 달성 등 대외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개교 이래 쌓아온 내실이 튼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15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거점국립대학교 중에서 유일하게 D+ 등급을 받은 불명예와 동시에 개교 이래 최악의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대학구조개혁평가의 저평가를 만회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직 중이었던 신승호 총장[17][18]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개교 이래 유래 없는 일이 일어났으며 총장의 공석을 채우는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발생해 총학생회가 총장실을 점거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학 축제인 대동제가 취소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에 대한 반발로 헌법소원의 가능성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을 정도로 재학생을 비롯한 교원 모두 극도로 예민해지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파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당해 입결 대폭 하락으로 이어져 재학생들의 자존심이 금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총장의 공석이 1년 가까이 지속되었다가 2016년 6월 28일, 총장간선제로 선출된 김헌영 총장이 D+ 등급에 대한 후유증에 대해 대처하기 시작했고 2016년, 2017년 두 해에 걸쳐 진행된 정부재정지원제한 재평가대학에 한해 시행되는 재평가에서 모두 그룹1(완전해제)에 만족[19]하여 급한 불을 끄기 시작했고 2018년에 시행된 2018년도 부패방지 시책평가에서 2년 연속 1등급을 받고,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대학구조개편평가의 A, B등급에 상응하는 자율개선대학 등급을 받으면서 점차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5. 역대 학장 및 총장
강원대학교 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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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함인섭 | 제3대 정계완 | 제4-6대 함인섭 | 제7-8대 최종렬 | |
강원대학교 총장 | ||||
초대 이민재 | 제2-3대 이상주 | 제4대 이춘근 | 제5대 문선재 | |
제6대 하서현 | 제7대 박용수 | 제8대 최현섭 | 제9대 권영중 | |
제10대 신승호 | 제11-12대 김헌영 | 제13대 정재연 |
[1] 강원대학교의 제2캠퍼스로 편입되기 이전까지는 1939년 5월 27일에 설립된 직업학교인 삼척공립공업학교를 모체로 하는 4년제 종합대학이자 국립대학이었다.[2] 당시에는 선진화와 총장직선제의 인과관계가 무엇이냐고 반발이 심했으며, 실제 일부 교수들은 반발하기도 했다. 그 외에 정부의 국립대학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해석도 적잖게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총장간선제를 채택하고 구조조정 중점추진 국립대학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결정적으로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는 총장직선제를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 중점추진 국립대학에 선정되지 않아 역량 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게되는 계기가 되었다.[3] 춘천농업고등학교도 좌익세력의 테러에 의해 이후 불에 타는데, 당연하게도 당시 춘천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적개심만을 불러오고 말았다. 이는 춘천전투당시 춘천농업고교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포탄을 리어카로 끌고가며 국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나타난다.[4] 임시교원양성소의 종류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 교육사에서 초·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할 때 그 수급을 위해 임시로 설치해 운영했던 단기 교원양성기관이다. 일반적으로 191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후반 설치되었다 운영을 중단하기를 반복했는데, 1950년 중등교원(중학교, 고등학교 교원)양성소를 설치한 것은 일제강점가 중등교원 과반 이상을 담당하던 일본인 교사들이 대부분 일본으로 귀국하며 발생한 교원난과 해방 이후 증가하는 교육 수요 때문이었다. 선생 절반 이상이 날라간 상황에서 학생들 수는 증가하니 임시로라도 선생님을 찍어내야하는 상황이 된것이다. 그래서 미군정 시기부터 10개 사범'학교'중 3개를 중등교원양성기관으로 승격시키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교육 서비스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단기 교원 양성기관을 설치한 것.[5] 현 강원도 원주시.[6] 서기 1954년[7] 좌측부터 순서대로 본관 나동(현 사범대학 교육3호관), 본관 가동(현 사범대학 교육1호관), 구 농업실습관(현재는 철거되어 학군단 건물이 들어서있다.), 가동과 농업실습관 사이 움푹 파인 곳은 현재 학군단 운동장으로 쓰이는 곳이다.[8] 町步. 땅 넓이의 단위로 1정보당 3,000평이며 제곱미터로 환산하면 약 9,917.4㎡에 해당한다.[9] 약 30,253,623㎡. 평으로 환산하면 약 9,151,721평.[10] 정확히는 춘천대학이 춘천농과대학에 편입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11]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앙도서관은 1980년대 완공된 건물이다.[12] 평생교육관으로 사용되었다가 2022년 철거.[13]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14] 승격 이후에 촬영된 사진이라 강원대학교라고 쓰인 현판을 발견할 수 있다.[15] 이후 나래관에 있었던 대학본부를 준공에 들어갔던 오늘날의 대학본부로 이전하게 되었다.[16]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고 강철의 연금술사의 연재 기간은 일본에서 2001년 8월에 연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2000년에 완공된 진리의 문이 강철의 연금술사보다 세상에 더 빨리 나온 셈이 된다.[17] 사실상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저평가를 받게 된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이전부터 재학생이라면 다들 인지하고 있었을 정도로 교직원의 재학생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와 비합리적인 일처리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만큼 당시 행정력의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 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18] 아예 저질스러운 행정력에 대한 일화가 있을 정도. 춘천캠퍼스에서 일어난 한 사례로 2013년 여름 방학 당시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재학생이 이용하는 대부분의 시설에 에어컨 가동을 제한했는데 말이 제한이지 사실상 평시에도 설정 온도가 28도로 맞춰져 있거나 심지어 일부 단과대학의 경우 아예 전력을 차단해 에어컨 사용 자체를 막아버리는 경우도 있어 차라리 바람이라도 부는 바깥이 좀 더 시원했을 정도. 이에 방학 중에도 교내에서 면학하던 학생들은 단체로 폭발해 심한 반발을 보였으며 이후에 행정실 같은 교직원들이 사용하는 건물에는 버젓이 에어컨이 돌아가는 사실을 인지한 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이에 열받은 일부 학생들은 교직원이 있는 곳에 에어컨 실외기가 도는지 감시하고 항의할 정도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실제 강대라이크 같은 커뮤니티에서도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졌으며, 교내 시설이 곧 연습실 혹은 작업실이 되고 이를 매일 사용해야 하는 예술대학 소속 학생들이 가장 큰 반발을 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반발이 크면 물릴 법도 하지만 대학본부 측에서는 끝내 개강 직전까지 에어컨 제한 가동을 철회하지 않았다. 재학생과 소통은 커녕 강한 의사표현마저 묵살하는 고집불통의 행정력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19]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동제가 다시 부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