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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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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상3. 후손 / 신라말4. 후손 / 고려초5. 족보 위조 현상6. 《김은열 묘지명》7. 《신라경순왕전비》8. 《고려성원록》9. 《김씨 분관록》10. 《증보문헌비고11. 《조선씨족통보》12. 조선 후기 문헌에 등장하는 자녀들

1. 개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거의 모든 신라계 김씨의 중시조이고, 후손 중 특히 아들에 대한 기록이 일부 전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다른 기록과 충돌을 보이는 등 사실로 보기 어려운 정보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진위를 알아보고자 하며 만약 허록이라면 왜 그런 기록들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경순왕의 가계에 대하여 별도로 자세히 설명한다.

2. 조상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순왕은 제46대 문성왕의 예손(裔孫, 먼 후손)이다. 그러나 문성왕의 몇 대손인지는 기록되지 않았고, 심지어 ‘직계’ 후손이라는 보장도 없다.

비록 학계에서 거의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경순왕은 실제로는 태종 무열왕의 9세손일 가능성이 크다. 《최정 묘지명》에서 경순왕의 사촌동생인 김유렴의 현손자 김한충을 태종 무열왕의 13세손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다.
군은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신라국을 중흥한 군주인 태종 춘추대왕의 13세손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야 추밀원사 판공부사로 은퇴하고 시호가 원평공인 '한충'의 둘째 딸이다. 아들로 율이 있다.
君娶金氏, 新羅國中興之主太宗春秋大王十三世孫, 守司空尙書左僕射樞密院使判工部事致仕贈謚元平公漢忠之第二女. 子有矞.
전대여 찬, 『최정 묘지명』
김한충은 신라의 대보 김알지의 후손으로, '고조 유렴'은 경순왕을 따라 태조에게 귀부하여 공신이 되었다.
金漢忠, 新羅大輔閼智之後, 高祖庾廉, 從敬順王, 歸太祖爲功臣.
『고려사』 권95 열전 권제8, 김한충 조
(경순)왕이 (태조를) 혈성까지 배웅하고 '사촌 동생 유렴'을 인질로 삼아 어가를 따라가게 하였다.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隨駕焉.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5년 2월 조

한편 경순왕은 고려 개국공신 중에서 열조 원성왕(제38대)의 후예이면서 태종 무열왕(제29대)의 9세손인 김인윤과도 멀지 않은 친척으로 추정된다.[1] 참고로 김인윤의 가계는 그의 후손 <김지우 묘지명>에 따르면 열조 원성왕 — 김예 — 김인윤이지만, 김예가 원성왕의 아들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3. 후손 / 신라말

경순왕935년 12월 고려에 귀순하기 이전의 자녀들에 대한 기록으로는 1145년 편찬된 《삼국사기》와 1281년 편찬한 《삼국유사》에 경순왕은 황후 죽방부인과의 사이에 두 왕자를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태자 왕자라고만 하며 막내아들의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하였다.

1481년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속칭 마의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1561년 고암 양자징이 찬한 《하서 김인후 가장》에 왕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데, 신라 경순왕왕자 덕지(德摯)가 시조라 하였다.

1682년 우암 송시열이 찬한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에도 시조가 신라 경순왕 김부의 별자(別子)[3] 덕지(德摯)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태자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기 시작했다.
* 왕후: 죽방부인(竹房夫人)

4. 후손 / 고려초

경순왕고려에 항복 후 태조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 및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5]

5. 족보 위조 현상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까지도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신분제 변화와 더불어 족보 위조 현상으로까지 나타났다. 조선이 멸망하면서 더 이상의 특권은 없었지만 가문 그 자체를 일종의 명예로 여기는 문화는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체제가 사라져 전보다 쉽게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이후 족보를 우후죽순 발간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는 각종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다.

조선 초기에 성씨는 상민에게까지 보편화되었으나[8] 천민 계급은 조선이 멸망하기까지 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라도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아무리 조선의 행정력이 현재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아얘 없던 분파를 새로 만들어 넣어 버리는 식의 족보 위조는 불가능 했을 것으로 보이며, 보통 족보 편입은 주로 방계 가계도에 슬며시 이어넣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경순왕의 직계 조상은 신라의 김씨 왕 38인 중 내물 마립간, 지증왕, 원성왕, 신무왕, 문성왕 5인이 전부이다. 따라서 그 외 왕들의 후손들과 방계까지 하면 신라계 김씨들의 조상도 지금보다 다양해야 맞다. 그러므로 주류 족보는 주로 경주 김씨들 중, 경순왕의 후손이 아닌 이들이 경순왕의 후손을 자처하여 특혜를 보고자 하는 목적에서 조작된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본다.

일례로 경주 김씨 영분공파는 경순왕의 3남 영분공(永芬公)의 후손을 자처하는데, 이들의 족보에는 오류가 있음이 확인된다. 1785년 목간본 《경주김씨족보》에는 ‘경순왕 - 영분공 - 임흥공(林興公) - 파간 억종(嶷宗) - 파간(波干) 계옹(季邕) - 아개공(阿盖公) - 예겸(禮謙)’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특히 경순왕의 7세손인 김예겸은 삼한벽상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삼한벽상공신이란 경순왕의 고려 항복 이후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전쟁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이므로# 김예겸은 물리적으로 절대 경순왕의 7세손일 수 없다. 게다가 김예겸의 조부와 증조부가 파간, 즉 파진찬이라는 신라 관등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분공부터 김예겸까지의 계보를 신뢰한다면 영분공은 8세기 후반의 사람이 되어 절대 경순왕의 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전혀 다른 성씨의 파 전체가 갑자기 편입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경주 김씨 영분공파는 신라 왕의 후손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순왕의 후손은 아닌 셈이다.

고려 시대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그의 형 김부일은 《고려사》 <열전>에 경주 사람으로서 신라 왕실과 같은 성이라고 나와 있을 뿐 정확히 누구의 후손인지 나와 있지 않다. 경주 김씨뿐 아니라 강릉 김씨같이 다른 신라 왕의 후손 가문일 수도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문선》에서는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라고 나온다.

6. 《김은열 묘지명》

조선 후기 들어 1784년 『김은열 묘지석』이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김은열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김은열 묘지명》을 근기(謹記)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여덟 명의 아들을 더 두었는데 이름은 순서대로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었다. 특히 2자 '굉'과 4자 '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이자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 10리 밖 오룡산(五龍山) 남쪽 30리 주변을 하사해 주었다고 했다.
이듬해 1785년 김은열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경주 김씨 김사목(金思穆)[9]이 족보를 수보하면서 위를 바탕으로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했는데,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시호를 지어내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일부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이러한 아들들의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당대의 다른 고려 묘지명과 달리 찬한 사람도 나와 있지 않고, 배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으며,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 또한 8형제의 모친 관계도 2자 굉(또는 황)과 4자 은열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어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여덞 명의 아들들 이름 또한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말여초인 924년(경명왕 8) 찬술된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10]소판(蘇判) 김일(金鎰)이 등장하긴 하지만[11] 동명이인으로 추정된다.

7. 《신라경순왕전비》

1784년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1814년 후손 강릉 김씨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前妃) 박씨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라 하며, 딸은 경종에게 출가했다고 한다. 또 후비(後妃) 왕씨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고, 두 딸은 이금서(李金書)[B], 황경(黃瓊)[C]에게 출가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배척하고,또 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자 종(鍾)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이와 같이 이름을 배척하거나, 추가하고 개명까지 하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들은 《김은열 묘지명》을 재차 왜곡하여 자신들의 족보류에 경순왕의 첫째 왕자 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 이름을 굉(鍠)[또는 황(湟)]이라 한다. 또 3자를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이라 하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해당 《김은열 묘지명》에선 2자 굉(鍠)[또는 황(湟)]과 4자 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 10리 밖 오룡산(五龍山) 남쪽 30리 주변을 하사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8. 《고려성원록》

1798년(정조 22) 간행된 고려 왕실 족보인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에는 경순왕낙랑공주 사이에 1녀가 있어 삼한공신이자 익재 이제현의 먼 선조인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한 경종의 왕비 헌숙왕후(獻肅王后)가 경순왕의 딸이라고 적고 있는데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9. 《김씨 분관록》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을 건립하면서 각 김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을 편찬하면서 김덕지(金德摯)를 경순왕의 왕자라고 하였고, 그의 증조부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김정집(金鼎集)이 근기(謹記)한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의 여덞 명의 아들들은 모두 배척하였다.

10.증보문헌비고

1908년 칙명(勅命)으로 간행된 문헌이다. 제계고(帝系考) 편에서는 씨족별로 인물과 계통, 행적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경순왕전비》를 원용하되 제6자 건(鍵), 제8자 추(錘)는 배척하였다.

11. 《조선씨족통보》

1924년 윤창현이 민족의식 고취 및 함양 일환으로 발행한 문헌으로, 이르기를 왕비 박씨는 3남 1녀를 낳았고, 계비 왕씨 낙랑공주는 5남 2녀를 낳았다고 한다.

전비 소생으로 태자는 통곡하며 금강산에 들어갔으며 마의(麻衣)를 입고 초식(草食)을 하니 이후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칭했다고 한다. 별자(別子) 학성부원군 덕지(德摯)는 울산 김씨로 분적하였다. 막내아들의 승명은 범공(梵空)인데 처자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살다 죽었다.# 제3자는 영분(永芬)이라 하였다.

후비 소생으로 《김은열 묘지명》을 원용하여 제4자(혹은 제2자)를 은열(殷說),# 제5자를 석(錫)[22]으로,# 제6자(혹은 제7자)를 선(鐥)[23]이라 하였다.#

묘지명에 나오는 제6자 건(鍵)과 제8자 추(錘)는 배척하였다.

12. 조선 후기 문헌에 등장하는 자녀들

이하에 기재된 내용은 역사적 사실 여부가 분명치 않다. 신라가 멸망하고 무려 800년이 지난 1784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내용이고 다른 사서와의 교차검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후비 낙랑공주 왕씨의 두 딸이 경종과 이금서에게 출가한 내용이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과 이제현 묘지명[24], 경주이씨 대동보 등에서 교차 검증된다. 특히 이제현 묘지명(1375)[25]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1476)보다도 100년 가까이 앞섰고 사료적 가치도 높은 금석문이므로 그 내용의 신뢰성이 높다. 한편 후비 낙랑공주 소생의 두 딸이 각각 경종과 이금서에게 출가했으므로《신라경순왕전비》와 달리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장녀는 황경에게 출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1784년 《김은열 묘지명》 - 김노규 근기
* 아들[26]: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 1785년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 김사목 근기
* 아들[27]: 일(鎰), 황(湟), 명종(鳴鐘),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 1814년《신라경순왕전비》 - 김계락 근기
* 전비 박씨(3남 1녀)
* 왕자: 태자, 차자, 영분공
* 공주: 헌숙왕후 김씨
* 후비 왕씨(5남 2녀)
* 아들: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
* 딸: 이금서(李金書)[B]에게 출가
* 딸: 황경(黃瓊)[C]에게 출가
* 1887년 《김씨 분관록》 - 김창희 근기,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8자를 모두 배척함
* 왕자: 덕지(德摯)
* 1908년증보문헌비고》 - 칙명 간행
* 별자: 덕지(德摯), 학성부원군 - 울산 김씨
* 계자[30] 승명: 범공(梵空)[31]
* 2자: 은열(殷悅)[32], 공부시랑 - 경주 김씨 일파
* 3자: 영분(永芬) - 경주 김씨 일파
* 5자: 석(錫), 의성군 - 의성 김씨
* 6자: 선(鐥), 언양군 - 언양 김씨
* 1924년 《조선씨족통보》 - 윤창현 간행
* 태자: 마의태자
* 별자: 덕지(德摯), 학성부원군 - 울산 김씨
* 계자[33] 승명: 범공(梵空)[34]
* 3자: 영분(永芬) - 경주 김씨 일파
* 4자(혹은 2자): 은열(殷說) - 경주 김씨 일파
* 5자: 석(錫) - 의성 김씨
* 6자(혹은 7자): 선(鐥) - 언양 김씨

[1] 참고로 문성왕의 장인인 공신 김양이 태종 무열왕 9세손이다. 같은 9세손 항렬이지만, 실제 사서에서 등장시기는 약 80년 차이가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적손과 서자의 나이가 비슷했다고 본다면, 경순왕은 서출을 3번 정도 거친 방계 출신으로 추정될 수 있다.[2] 김민공이 김효종의 조부라는 정보는 정사에는 보이지 않고 족보에만 나타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880년부터 무려 6년 반 동안 시중 직을 역임하였다. 삼국사기 등장 기사[3] 별자(別子) 종법:『예기』 대전(大傳)에 따르면 제후의 적장자는 부조(父祖)를 계승하여 제후가 되고, 중자(衆子)들은 경대부(卿大夫)의 작위를 받아 별도로 일가를 세우니 이것을 별자(別子)라 한다.[4] 울산 김씨 족보 및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에 시조가 신라 경순왕 김부의 왕자 덕지(德摯)이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1784년 발견되었다는《김은열 묘지명》에 제2자 김굉(金鍠)(또는 김황(金湟))이 처음 등장하는데,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의 둘째 아들 이름이 김굉(또는 김황)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08년 칙명으로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경순왕의 별자 김덕지는 울산 김씨로 분적하였으며, 막내아들의 승명은 범공으로 해인사에 기거하다 죽었다고 하였다.[5] 반대로 태조는 경순왕의 사촌 누이를 아내로 맞았는데, 바로 신성왕후이다. 따라서 태조에게 경순왕은 사위이자 아내의 사촌이다. 참고로 고려 제8대 현종 이후의 왕들은 모두 신성왕후의 후손들이다.[6] 혼인 이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혼인 후에는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7]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는데, 역사학계에선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까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8] 일단 법적으로 양반과 상민은 모두 양인 계급에 속했다.[9] 1785년(정조 9) 대사헌이었고, 1819년(순조 19) 좌의정을 지냈다.[10] 건립된 것은 신라 멸망 후인 944년(혜종 1)이다. 해석문은 링크 참조.#[11] 링크 하단 판독문 (뒷면) 01-07 金鎰蘇判(김일, 소판) 참조.#[B] 경주 이씨. 신라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의 장남으로 고려 삼한공신(三韓功臣)이다. 《신라경순왕전비》 및 경주김씨대동보에는 경순왕의 차녀(후비 왕씨의 장녀)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 및 경주이씨대동보에는 경순왕의 3녀(후비 왕씨의 차녀)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경은 신라 말 시중이었고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으므로 연대상 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C] 장수 황씨의 시조. 신라 시중(侍中). 《신라경순왕전비》 및 경주 김씨 대동보에는 경순왕의 3녀(후비 왕씨의 차녀)가 황경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 및 경주이씨대동보에는 경주 이씨 이금서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경은 신라 말 시중이었고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으므로 연대상 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14]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는데, 역사학계에선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까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15] 경주 이씨. 고려 삼한공신(三韓功臣) 중원태수(中原太守). 신라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의 아들이다. 경주 이씨 대동보에는 그 배위가 낙랑공주의 장녀라 적고 있다.[16] 제4자의 오기인 듯하다.[17] 이름의 한자 說(열)을 悅(열)로 오기하였다.[18] 경순왕의 막내아들인 범공(梵空)의 아들이다.[19] 별자(別子) 종법:『예기』 대전(大傳)에 따르면 제후의 적장자는 부조(父祖)를 계승하여 제후가 되고, 중자(衆子)들은 경대부(卿大夫)의 작위를 받아 별도로 일가를 세우니 이것을 별자(別子)라 한다.[20] 신라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역사에 그 이름이 실전되었는데 신라가 망하자 머리를 깎고 범공(梵空)이라는 승명으로 해인사(海印寺)에서 살다 죽었다. 입산 전 운발(雲發)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나주로 분적하였다.[21] 1887년 나주 김씨 《정해보》를 간행하면서 경주 김씨 김홍집이 후기를 서술하였는데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가 《김은열 묘지명》의 나오는 경순왕의 제2자 김황(金湟)이라 하였다. 이후 제작된 나주 김씨 및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가 김황(金湟. 또는 김굉)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경순왕 의 제2자 김황과 제4자 김은열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후 맞아들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태조의 외손이라 기록하고 있다.[22] 고려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다고 적고 있다.[23] 언양군에 봉해졌다고 적고 있다.[24] 여기서는 이제현의 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낙랑공주 왕씨의 딸이 이금서에게 출가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25] 이제현은 고려시대의 대학자로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묘지명은 1375년(우왕 1) 제자이자 대학자인 이색이 찬(撰)하였고, 1394년(태조 3) 각(刻)하였다. 그 내용이 《목은문고》, 《동문선》 등에만 전했으나 2007년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600kg 규모의 거대한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된 바 있다.[26]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를 맞이하여 낳았다는 자녀들이다.[27]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를 맞이하여 낳았다는 자녀들이다.[B] [C] [30] 막내아들[31] 입산 전 운발(雲發)이라는 아들을두었는데 나주로 분적하였다.[32] 경순왕의 제4자가 아니라 제2자라고 함. 이름의 한자 說(열)을 悅(열)이라 함[33] 막내 아들[34] 입산 전 운발(雲發)이라는 아들을두었는데 나주로 분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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