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회 의원에 대한 내용은 고병국(1973)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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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경희대학교 총장 고병국 高秉國 | |
<colbgcolor=#a40e17><colcolor=#fff> 출생 | 1909년 1월 2일 |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 |
사망 | 1976년 5월 7일 (향년 67세) |
학력 | 선천공립보통학교 (졸업)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시즈오카고등학교 (문과 /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 법학사) 경북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
경력 | 연희전문학교 교수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경희대학교 대학원장·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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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학자. 연희전문학교 교수,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경희대학교 대학원장·총장을 역임했다.2. 생애
1909년 1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에서 한학자인 부친 고승헌 선생과 모친 백문선 여사 소생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5세부터 12세까지 가정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를 통독했다. 1921년 선천군 소재 선천공립보통학교에 취학하여 2년 반 동안에 4학년 과정을 마치고 중학입학검정시험을 통과해 1923년 4월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신의주고보 4학년 수료 후 구제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하여[1] 1927년 4월 시즈오카고등학교(靜岡高等學校, 現 시즈오카대학) 문과갑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최고의 성적으로 마쳤다. 이어 1930년 4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英法전공)에 입학해 졸업반 때인 1932년 10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고, 이듬해인 1933년 11월에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양과합격을 달성했다.
고병국은 1934년 3월 도쿄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관리가 되는 대신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호즈미 시게토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민법학연구실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935년 6월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 김동주[2] 여사와 혼인했으며 1936년 4월 대학원을 마치고 도쿄에서 후쿠다(福田證夫) 변호사의 파트너가 되어 변호사로 2년간 개업한 뒤 1937년 조선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고병국에게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동문으로,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정광현이 1938년 9월 사상사건으로 인해 면직되자 그 후임으로 연희전문 교수가 되어 1941년 4월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경성법전이 개편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국대안 파동 당시 구제전문학교인 경성법전과 섞이기를 거부한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 출신들의 반발이 격렬했으나, 고병국이 자신이 있던 경성법전을 모체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출범시켰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1946년 10월부터 1947년 12월까지 재임한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즈음 헌법제정 전문위원이 되어 제헌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민법총칙을 기초하고 민법전을 제정하는 데 공헌했다. 이후 6.25 전쟁 중이었던 1952년 8월 다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제4대)으로 부임하여 서울법대의 초기 기틀을 잡았으며 유기천, 이한기, 박관숙 등 도쿄제대 후배들을 주축으로 교수진을 갖추었다.
해방 후 서울대에서 벌어지던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동대파(東大派, 고병국派)와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성대파(城大派, 유진오派) 사이에서 벌어지던 파벌 다툼의 중핵이었다고 한다. 서울법대100년사(2004)에 따르면 해방 이후 법학계는 경성법학전문학교장 고병국을 정점으로 유기천(형법)-이한기(국제법)의 동경제대 출신 파벌과 보성전문학교 법과과장 유진오를 좌장으로 황산덕(형법)-박재섭(국제법) 등의 경성제대 출신 파벌로 갈렸다고 한다. 그런데 기존에 동대파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경성법전과 그 후신인 서울법대에서는 당시 학장에 재취임한 고병국 교수가 후배 유기천을 한국인 최초의 법학박사로 만들기 위해 황산덕이 제출한 박사논문의 심사를 이유없이 미루었고(출처). 이 갈등은 결국 1965년 유기천 서울대 총장이 황산덕 교수를 파면하는 데 이르게 된다(참조). 1963~1965년 국제법학계에서 이한기의 선공으로 시작된 박재섭과의 치열한 논쟁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1954년 5월에는 학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1957년 서울법대 학장직을 마친 뒤 1958년 2월 단국대학장으로 부임했다. 1958년 10월에는 김함득 여사와 재혼하였다.1960년 9월 경희대학교 대학원장, 1961년 9월 경희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1964년까지 재임했다. 경희대 총장 시절인 1963년 5월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에 병마에 시달리다가 1976년 5월 7일 타계했다. 미망인 김함득 여사는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고, 장남 고재경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미네소타대학에 유학하여 그 병원에서 근무, 장녀 고화영은 이화여대에서 약학을 전공했으며, 차녀 고주자는 숙명여대 가정과를 졸업했다.
[1] 1919년 반포된 대학령에 따르면 2년제 대학예과는 구제중학교 5년 졸업생을, 3년제 예과는 중학교 4년 수료생부터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934년 3년제로 개편되기 전까지 조선의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입학시험 응시 자격이 5년제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졸업(예정자)이었으나, 내지의 3년제 구제고등학교들은 1919년 4월 개정 고등학교령 공포 후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4년 수료자부터 입시를 치를 자격을 주었다. 당시 4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경우는 사수(四修)라 하여 영재 대우를 받았고, 중학교/고보를 졸업할 수 있었다. 경성제대 예과 역시 1934년 3년제로 개편되면서 중학/고보 4년 수료자에게 입시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2] 서울공대 학장을 지낸 정동일 박사의 매씨로, 이화여대 가정학과 교수였으나 6.25 전쟁 중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