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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3:01:08

교회 일치 운동

교회일치 운동에서 넘어옴
1. 개요2. 교류와 대화
2.1. 개신교 교단2.2. 가톨릭정교회2.3.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2.4. 가톨릭과 오리엔트 정교회2.5. 개신교와 정교회2.6. 가톨릭과 개신교2.7. 가톨릭과 SSPX
3. 성경적 근거4. 성경 공동번역5. 비판
5.1. 반(反) 에큐메니컬 진영의 비판
5.1.1. 가톨릭 측의 비판5.1.2. 개신교 측의 비판5.1.3. 정교회 측의 비판
5.2. 에큐메니컬 진영 내의 비판

1. 개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13절 (공동번역 성서)
교회 일치 운동(敎會一致運動)은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간에 일치를 추구하는 운동이다. 영어로는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인위적으로 모든 기독교를 하나의 교단으로 합치자는 것이 아니다.

에큐메니즘의 핵심이자 발상의 근간은 '우리는 같은 하느님(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서로 분열해서 반목하고 싸우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도 안 좋지 않는가?'이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교회일치의 성경적 근거로 고린토1서(코린토1서, 고린도전서) 1장 10-14절과 에페소서(에베소서) 4장 1-16절, 요한복음서 17장 11절을 든다.

2. 교류와 대화

2.1. 개신교 교단

18세기 스페너, 프랑케 등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존 웨슬리영국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속 스콜라주의적 약점을 극복하면서 세계 선교에 눈길을 돌리게 하였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한 세기 동안의 선교활동은 대항해시대 이후의 몇 백년에 버금가는 눈부신 선교 역사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19세기 선교활동은 교파적 색채를 띤 개신교-그리스도교 확장의 역사를 가져왔다. 이에 선교현장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교파들의 연합과 사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선교 단체들간의 연합과 협동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 선교 및 교회 연합의 방향을 전했던 것이다.

1846년 8월에 개인 자격의 차원에서 복음주의 연맹을 발전시키는 국제적, 초교파적 모임이 영국 런던에서 있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52개 교파로부터 800명의 지도자들이 몰려왔다. 복음주의 연맹은 19세기 대각성 운동에서 기원한 유일한 에큐메니칼 조직체가 되었다.이 연맹은 오늘날 6억명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기독교 교단 연합운동 단체인 세계복음주의연맹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세계복음주의연맹이라는 칭호를 만든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1851년에 런던에서, 1853년에는 뉴욕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알렉산더 더프가 사회를 맡았던 영국복음주의연맹 연차모임에서 1854년 최초의 국세선교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교파 차원의 화합 운동으로서의 교회일치운동은 1890년대 초에 나타났다. 이것은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공식 대표들을 통해서 상호 다른 점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그린델발트 대회와 Review of the Churches라는 정기간행물에 의해서였다. 특히 Review of the Churches의 편집인 헨리 런은 이 지면을 통해 이질적인 각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재통합 문제를 위해 함께 대면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며, 만남의 장을 주선했다. 그러한 가운데 1892년에서 1895년 사이에 스위스 계곡 그린델발트에서 영국 국내 그리스도교 일치 논의 대회가 6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이후 처음 열린 대회로 성공회, 침례회, 회중교회, 장로회, 감리회, 퀘이커 신자들이 참석했고,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교회 신자들까지도 참석하였다. 이에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모든 개신교 교파로 확산되어갔다. 이후 1920년대에 스위스 뮈렌에서 런이 개최한 2번째 대회는 유럽 대륙의 교회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의 대표들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새로운 교회일치운동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같은 도시인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창립 개최된 세계기독학생연맹이다. 이 학생 운동은 이보다 앞서 조직된 YMCA와 YWCA에 의해 발전된 운동이다. 이 학생 운동의 지도자가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모트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여 이후 교회일치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1886년 무디 부흥운동을 계기로 외국 선교를 위한 학생 지원 운동(SVM)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888년 YMCA의 총무가 되어 교회일치운동 경력을 쌓게 되었다. 모트는 이후에도 2년간 세계 곳곳에 있는 대학들을 방문하면서 각종 학생 연합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학생 운동을 통한 일치의 경험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의 약 10년간 전 유럽미국, 아시아아프리카에 있는 각 교파 지도자들은 관망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대 교회일치운동에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외에도 세계주일연합 운동 등이 여러 교파들의 교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평신도 청년들이 중심이 된 각종 일치운동이 세계교회일치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는 1910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제08차 세계선교대회(WMC)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한 회원들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복음적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긴 선교단체와 특히 자의적 그리스도교 운동 단체들(YMCA, YWCA, SCM, WSCF, SVM 등) 출신이었다. 이때 의장이 된 지도자가 앞서 언급했던 미국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이 외에도 조셉 올드함, 윌리엄 템플 등이 이 회의를 통해 당시 교회일치운동의 흐름을 이끌어나갔다.참고

이후 1921년 10월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WMC의 꿈을 보다 발전적이며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IMC는 개신교인들 사이의 범세계적 친교를 육성시키며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한 연합 계획과 행동을 촉진했고, 1928년에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1938년에는 탐바람에서, 1947년에는 온타리오의 휘트비에서 모였다. 이후 국가별 혹은 초교파적인 기구들의 공식 대표가 선교협의와 포괄적인 계획을 위해 모이는 기구가 되었으며,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출범하게 되었다. WCC 헌장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들의 사귐"이라고 못박고 여기에 동조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회원 가입권을 허락하였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간의 교환예배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회 이어져 오고 있는데,[1][2]한국 교회 일치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CBS, CTS, CGN, CMTV 등 방송사 명칭이 'C'로 시작하는 개신교 계열 방송국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출연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독실한 신앙인인 가수 자두와 배우 최강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자두의 교단은 감리회이고, 최강희의 교단은 침례회이다. 그들은 간증 프로그램에 몇 차례 나와 자신이 경험한 삶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과정을 얘기했다.

CCC, IVF(교회일치운동에 가장 긍정적이다.), SFC 등의 개신교 동아리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교단이 다르고 종파(가톨릭, 정교회 등)가 달라도,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회원으로 받아주고 있다.

현재 전세계 교회들이 참여중인 교회일치운동은 크게 세개의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중도~진보 교회들이 모이는 WCC, 중도~보수, 일부 온건 진보 교단들이 모이는 세계복음주의연맹(약간 보수적이지만 다른 견해에도 열린 단체), 선명한 보수 교회들이 모이는 국제개혁주의교회협의회(ICRC), 국제기독교연합회(ICCC)로 나누어져 있다. ICRC는 기독교 타종파를 아예 배제하기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세계복음주의연맹ICRC와는 반대로 가톨릭, 정교회 등 기독교 타종파에 열려있지만 교회일치보다 선교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 역시 존재한다.

2.2. 가톨릭정교회

가톨릭정교회는 1274년 리옹 공의회에서 재일치를 시도했다. 미하일 8세 동로마 황제에 의해 요안니스 벡코스를 대주교로 서임했는데 단 하루 만에 사망했다. 황제 요안니스 5세가 개인적으로 재일치를 원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동로마 교회는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일치와 교류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는 양자 간 동등한 위치에서 세계공의회를 소집하기를 거절해왔다. 그러다가 1438-38년에 페라라와 피렌체에서 만났다.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서방의 신학자들과 신학 대화를 했고 실제로 동의가 이루어졌고 일치 선언도 이루어졌으나, 후에 동방 측의 여론 등으로 인해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일치 시도가 있은 후 여러 차례 접촉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두 교회는 오랜 세월 평행선을 그리며 지내왔다. 그로부터 약 524년이 흐른 뒤 두 교회 간 대화의 물꼬가 열렸다.

정교회는 가톨릭이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공식적인 참관단을 보냈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에 대한 교령"을 통해 동방 교회의 사제직과 성사들을 인정하고,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교령"을 통해 정교회를 "자매 교회"로 지칭하고 "참된 그리스도적 보화들을 공동 유산에서 이어받은" 교회로 지칭했다.

파일:external/classicalchristianity.com/Pat-Athenagoras-Pope-bless.jpg



교황 바오로 6세가 1964년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동서 대분열 이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아티나고라스(Α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를 만났고, 그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1965년 12월 공의회 마지막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축하행사를 열어 1054년 동서방의 분열을 가져온 서로에 대한 파문을 취소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 Demetrios)를 만났다.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의 대표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0년 일치의 회복을 목표로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구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합국제위원회가 그리스 섬 파트모스와 로도스에서 개최된 것이다. 이 위원회는 1982년과 1988년 사이에 교회, 전례와 성사, 사도전승 문제를 포함한 3가지 중요한 합의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이러한 긍정적인 대응은 1988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 기념식에 바티칸 사절단이 참가하는 것을 포함하는 가톨릭과 정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회합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2000년대에 들어와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교류가 급속히 발전했다. 2003년 11월 29일부터 12월 2일까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을 비롯한 4명의 평의회 소속 공식 사절단이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이스탄불을 방문해 축하했다.

2006년 9월 18일부터 25일까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의 대주교 및 사제들과 신학자 30명으로 구성된 정교회 측 인사들과 가톨릭의 인사 27명이 만나 1980년부터 시작된 일치 회복을 위한 신학적 대화를 이어갔다, 이 회의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있은 양자 간 일치위원회의 후속조치로서 그 해 독일의 프라이징에서 그 내용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양측은 서로의 미사/성찬예배에 참례했다. 다만 이것은 성사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호 간의 전례 참관이었다.

양측의 활발한 교류는 2006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의 초청으로 이스탄불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공식 방문하는 결실을 맺는 큰 밑바탕이 되었다.

2007년 10월 8~14일은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열린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국제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는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 27명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에서 온 정교회의 대주교들 및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의 교의학적, 성서적 측면에서의 전례에 대한 논의를 통해 화해와 교류를 모색했다. 이 회의 역시 이미 1990년에 모스크바의 양자 간 일치위원회에서 제기되고, 2006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마지막 회기가 열린 10월 13일 토요일에 라벤나 대성당에서 열린 가톨릭 미사에 정교회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14일 산 비탈레 성당에서 열린 정교회의 성찬예배에는 가톨릭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2006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방문했던 것과 같이 2008년 6월 7일부터 29일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교황의 초청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여 양자 간 더욱 친밀한 교제를 약속했다.

2.3.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

정교회는 콥트 정교회를 비롯한 비칼케돈파 동방 교회(오리엔트 정교회)들을 역사적 경험, 교리와 영성 등에서 서방 교회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

비 칼케돈파 교회들과의 교류는 1964년 덴마크의 아루스와 1967년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열린 비공식적 회합들에서 양측의 주요 신학자들이 만남으로써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제네바에서 그리고 1971년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보다 진전된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표들은 "우리는 우리가 서로 하나의 정통 신앙 안에 있는 교회임을 깨달았다. ... 그리스도론적 교리의 핵심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했으며, 브리스톨 회합에서는 "우리 가운데 일부는 두 본성, 의지, 힘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 중 일부는 동일한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일치한 신인적 본성, 신인적 의지와 신인적 힘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측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동 없이, 변화 없이, 나눔 없이, 분리 없이 결합되었음을 고백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칼케돈 신앙 중심으로의 진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회합이 있은 후 두 교회를 대표하는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모임이 있었다. 1985년에는 제네바에서, 1989년에는 이집트의 암바 비쇼이 수도원에서, 1990년에는 제네바에서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양자의 교리적 불일치 부분을 일정 정도 해소했고 상대에게 행했던 과거의 저주들과 비난들을 철회하도록 권고되었다.

1989년의 모임에서는 여전히 상대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는 가운데, "동방 교회들의 두 가족이 서로 오랫동안 교제를 갈망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고 분열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사도적 신앙에 기초한 성사 교류를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양측의 교류가 그 어떤 교회들보다 더 긴밀해졌다. 여기서 두 교회는 네스토리오스와 에우티케스의 신학을 배격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분리된다든지 혹은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명시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협정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동이나 변화, 구분, 분리 없이 결합하고 있다고 기술하여 해묵은 그리스도론 논쟁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최종적으로 1993년 상호 파문을 철회하기 위한 제안서가 결의되면서 두 교회의 갈등도 최종적으로 정리될 날이 머지 않게 되었다. 물론 현재까지 두 교회가 완전한 상통을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단성론'과 '황제파'라는 낙인을 찍어온 과거와의 단절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진일보라고 여길 만 하였다.

2.4. 가톨릭과 오리엔트 정교회

1973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6세와 이집트 콥트 교회 총대주교 셰누다 3세가 만나 그리스도 신앙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들의 전승에 입각해서, 그리고 처음 세 개의 보편공의회에 준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육화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며 하느님의 말씀이요 성부의 영광의 광채시며 성부 본질의 모상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참된 육신과 이성과 영혼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죄 없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나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이시며 하느님, 구세주, 우리 모두의 왕으로서 신성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으로 치자면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분 안에서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실제로 완전한 방법으로 섞임 없이, 혼합 없이, 혼동 없이, 바뀜 없이, 갈림 없이, 나뉨 없이 결합한다. 그분의 신성은 인성으로부터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영원하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육신을 갖추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 그분 안에서 신성의 모든 전유물과 인성의 모든 전유물이 하나의 참되고 완전하고 불가분한 결합 안에서 온전히 보존된다.

우리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인간의 구세주이시고, 육화한 말씀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그분은 자신의 인성을 신성 안에서 섞임 없이, 혼동 없이 하나로 만든다. 그분의 신성은 자신의 인성과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단죄한다.
-1973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셰누다Shenouda 3세가 공동 서명한 "공동 교서"(dichiarazione comune).[3]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했다. 교황은 카이로의 이집트 성모 대성당에서 이집트 콥트 정교회의 세누다 3세를 비롯한 타 교파 지도자들과 일치 모임을 갖고 새 천년기를 맞아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협력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2017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4월 28~29일 이틀간 진행한 이집트 사목방문 중에 콥트 정교회 타와드로스 2세 총대주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성 베드로 성당 순교자의 벽에서 함께 기도했다. 타와드로스 2세 교황이 피로 얼룩진 벽을 보여주자, 교황은 핏자국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유리벽으로 다가가 축복한 후, 직접 촛불을 켜고 기도했다. 이 장면은 고통 받는 교회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이해됐다. 교황은 콥트교회 신자들이 혼자가 아니며, 로마 주교라는 충실한 친구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프란치스코는 타와드로스 2세와 만나 교회일치 측면에서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결과를 이뤄냈다. 두 교회의 수장은 가톨릭 교회와 콥트교회는 서로 간 세례의 합법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가톨릭 교회나 콥트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경우, 양측의 신자가 가톨릭 교회나 콥트 정교회의 소속이 되고자 하는 경우,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 없이 이전에 받은 세례의 효력이 유지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2.5. 개신교와 정교회

개신교정교회 간에 신학적인 만남의 역사는 1573년부터 1581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 루터 신학부 교수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이에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Ιερεμίας Β΄ Τρανός) 간에 있었던 서신 교환에서부터 시작된다. 한편 칼뱅파와 정교회 간의 만남과 대화는 1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키릴로스 루카리스(Κύριλλος Λούκαρις, 1572–1638)가 만든 신앙고백서가 정교회 내에 일으킨 커다란 소용돌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키릴로스는 실제로 제네바에 가서 칼뱅의 주장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그 결과 그가 쓴 조직신학과 신앙고백문이 다분히 칼뱅주의적이었는데, 정교회는 그의 신학사상과 신앙고백문을 '숨어들어 온 칼뱅주의적 이단'이라고 단죄하였다.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쓴 신앙고백문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Eastern Confession of the Christian Faith) 원본은 제네바 도서관에 보관 중이며, 그 신앙고백문으로 야기된 여러가지 신학 논쟁과 스캔들에 관한 기록들도 같이 있다. 키릴로스는 이 신앙고백문을 쓴 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초에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일치를 위한 최초의 대화는 성과 없이 일단락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연합이 창설되는 국제적 상황 변화에 발맞추어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현대 교회일치운동의 맥락 속에서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만남도 다시 시작되었다.

20세기에 양자간의 최초 만남은 1920년대 초에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 열린 정교회와 개신교 간 신학 토론을 위한 만남이었다. 이후 1950년대에는 독일에서, 1968~1975년에는 북미에서, 1970년대에는 헝가리 데브레센에서, 그리고 1981년 이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이와 같은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하여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그리스도론과 성찬론, 신앙고백과 고백문의 역할, 성령을 통한 성화와 구원의 활동, 전례, 하느님의 계시와 역사, 역사적 상대주의와 그리스도교 교리에 있어서 권위, 교회의 사회적 책임, 창조와 자연보호, 혼인과 타종교인의 개종 등과 관련된 사목적 이슈들도 다루어졌다.

이러한 대화 가운데서 각 교파는 자기의 전통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동시에 양자 간에 공통점이 많음을 서로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양측은 1979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신학적 만남에서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자간에 일치점이 더욱 많아졌으며, 공식적인 만남의 비전이 아주 밝아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자치권을 가진 모든 정교회에 개신교계와의 만남을 위한 대표자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그 대답이 모두 긍정적이었다. 개신교의 개혁교회 연맹측에서도 15명의 신학자 대표단을 임명하였다. 1988년, 1990년, 1994년에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양자 간의 주된 대화와 주제를 설정한 것은 1986년 예비적 만남에서 이루어졌고, 양자의 승인하에 마련되었다. 대화는 양측의 공동 기반인 니케아 신경부터 시작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구원론이나 교회론을 언급하는 대신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개신교뿐 아니라 정교회도 교회일치운동에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처음 두 회기는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 데 할애하였고, 3번째, 4번째 회기는 강생론을 토론하는데 집중되었다. 참석 위원들은 그 성명서를 여러가지 잡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였다. 처음 두 회기 동안 다루어진 삼위일체론에 대한 문서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교회일치적 신학 대화의 중요한 열매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일치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양자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신앙하고 고백하는 바의 일치됨을 공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재확인하여 형제애를 공고히 함과 아울러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풀이된다.

다만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이견을 이유로 조지아 정교회는 1997년, 불가리아 정교회는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탈퇴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복음주의연맹 같은 개신교 단체들과 모두 친밀한 관계다.

2.6. 가톨릭과 개신교

1541년 4월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당시 마르틴 루터의 칭의론을 옹호한 콘타리니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내부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자들 사이에서 일치와 공의회를 통한 교회 개혁을 놓고 가진 마지막 대화였다. 당시 가톨릭은 콘타리니 추기경과 요한 에크 등이,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는 마르틴 부처와 그를 보조한 장 칼뱅, 마르틴 루터를 대신하여 필리프 멜란히톤 등이 대표로 참여했다. 구원론은 이중칭의론[4]으로 합의가 되었으나, 성찬에서의 실체 변화 여부로 결렬되었다.[5] 얼마 지나지 않아 콘타리니 추기경은 사망했고, 이로 인해 가톨릭에서 이탈리아까지 종교재판소가 설치되는 등 반동적 조치가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활동하던 버미글리 등 '복음주의자 혹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이 가톨릭을 떠나 종교개혁에 몸담았고, 저지대와 프랑스에서 또 다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인 얀센주의를 따르던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단으로 제거되는 결말로 끝났다. 버미글리 등 이들은 마르틴 부처와 함께 영국까지 건너가 성공회 개혁의 기초를 놓는다. 회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지켜보던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불링거, 참여자로서 환멸을 느낀 칼뱅은 그대로 개혁 조치를 이어갔다.

가톨릭은 기존의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 이후 부정적 입장에서 벗어나[6] 1928년에 , 개신교에서 시작된 교회일치운동에 관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Mortalium Animos>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완전한 사회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하고 권위 있게 가르치며 은총의 샘인 성사를 거행하는 직무자들이 있는 가시적 교회(가톨릭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이 교회와 관련 없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계시 진리의 내용과 상관없는 교의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이 의도하는 교회는 그들 각자의 의견과 판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구성되는 연합(Federation)일 뿐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 일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공동으로 내세운 교의들은 가톨릭 교의와 동등한 입장에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사도로부터 합법적으로 계승된 이들의 유권적 해석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잘못된 교의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일치는 기대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 운동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Sempiternus Rex Christus)에서 교회가 일치해야 하는 2가지 당위성을 제시한다. 곧 요한 복음서 17장 21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성부에게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일치는 그리스도의 뜻이었다는 것과 이 세상에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그리스도교 ‘공동의 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그 당시 2차례 세계 대전을 통한 고통의 체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갖게 되었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적 사관으로 사람들이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상태로는 반그리스도적 세력을 대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회칙은 일치의 당위성을 간절하게 표현하는데, 곧 가톨릭 교회가 교회 일치를 위해서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베드로좌(Ad Petri Cathedram)」에서 교의와 제도와 신심의 차원에서 일치를 위한 3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회칙에 따르면, "교의적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성전과 성서의 전통에서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믿을 교리로서 정의되기 때문에, 일치를 위한 참된 교의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찾아진다. 제도적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합법적인 직무 계승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가톨릭 교회 안에 보존되어 왔음을 밝힌다. 신심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성사를 통해서 초월적인 양식을 취한다. 특히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일치의 성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형제들이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신앙의 일치를 이루게 되는데, 성체성사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계승된 사제직을 수여받은 사람만이 거행할 수 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을 승인함으로써 이전의 교황들보다 보다 개신교에 개방적이며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일치교령에 따르면, 과거의 분열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상호간의 신뢰와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일치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불목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일치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단일 유일한 교회로되, 많은 그리스도 교단들이 각각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계승자로 사람들에게 제시하며, 스스로 주님의 제자라고 선언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고 걷는 길이 서로 다르므로, 마치 그리스도 친히 분열되신 것 같이 보인다. …… 이 분열은 모든 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 수행에 지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인들에 대해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0항). 이와 같은 표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서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천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를 '열교(Haeresis)' 혹은 '이단'이라고 하고 그 신봉자들은 열교인이라고 한다. ... 성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티토 3:10). 여기서 이단자란 열교를 뜻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 상해 천주교 요리(상) (서울 : 가톨릭출판사, 1992), pp 258-259.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이와 같이 이단 열교도라고 표현하던 가톨릭 교회가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표현을 바꾼 것은 놀라운 변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바오로 6세는 또한 회칙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에서 이전 교황들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이 일치에 큰 장애임을 인식한 교황은 가톨릭 교회가 교황권을 결코 철회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황이 없다면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의 실질적이고 권위 있는 최고의 사목직이 없다면 그리스도교회의 일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참된 일치 대신에 다른 일치의 원칙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올바로 지적하였듯이, “교회에는 사제만큼이나 많은 이교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 110항 중에서

가톨릭 교회는 교황 수위권이 정교회, 또 개신교와 대화하는 데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임을 인식하지만, 계시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리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뜻을 포기하면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일인가를 자문하고 있다. 이 점에서 교황은 개신교인들이 수위권의 당위성과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황 수위권의 본질적인 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신교인들의 요구를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기 위한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천주교한국의 개신교는 1968년부터 ‘교회일치 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1970년 명동성당에서는 1,000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하나[一體]가 되어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은 현대 한국교회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천주교개신교의 일치운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함께 번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전통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서를 공동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1971년 부활절에 신약 성서를, 1977년 부활절에 구약성서를 각각 번역해 냄으로써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서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의미 있는 공동번역 성서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 두루 사용되지 못하고 있고, 현재는 대한성공회와 한국 정교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일부 교회에서 강단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한국의 개신교의 일치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학술운동을 통하여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 과정에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은 다름[異體]을 뛰어넘어 하나[一體]가 되어 권력이라는 이름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결기를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노동·인권운동과 환경운동 등 사회운동 부문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좌파성향의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과 개신교의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 실천 협의회, 예수살기 등 진보적 사회 참여를 지향하는 양 교회 간의 협력은 아주 돈독하다. 여담으로는 강경우파 성향의 가톨릭 사제와 신자 모임인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 모임과 역시 우파 성향 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간의 사이도 아주 끈끈한 편이라는 사실.

국내 학술운동 부문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이 다소 진행 중. 1971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현대 성서학의 동향” 심포지엄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는가 하면, 천주교 쪽의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와 개신교 쪽의 한국신학연구소의 공동노력으로 『하나인 믿음』을 발간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접근” 심포지엄이 개신교 신학 잡지인 「신학사상」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99년 10월 31일에 가톨릭 교회와 루터회, 감리회 세 교파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의화(義化)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였고 이 가르침에 대한 교리적 동의를 선언하였다. 비록 본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을 논한 것은 아니었고 아주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내놓은 공동 선언문이었으나, 적어도 가톨릭과 개신교 교단들의 합의를 통해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되었다.

매년 1월에 ‘그리스도교 일치기도 주간’을 정해 가톨릭·정교회·개신교가 번갈아가면서 합동 기도회를 열고(한국의 경우 에큐메니컬 기도회는 주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린다[7]), 2000년부터 매년 그리스도교 일치 포럼을 개최하고, 교단 대표들과 함께 성지순례와 피정, 체육대회를 통한 교류를 갖고 있다.

2014년, 한국천주교주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창립했다. 한국 가톨릭과 NCCK 회원교단인 한국정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회가 함께하는 기구이다. 일치기도주간 시행, 공동기도문 개발, 교재개발, 직제 연구, 공동 성서번역, 신학생 교류, ‘일치학교’ 운영, 일치피정 등의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교회음악 교류도 활발한데, 대표적으로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성당성공회 서울교구 내동성당,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내리교회가 성가대 연합 성가음악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인천 지역을 대표하고 상징성과 역사성 있는 세 교파의 중심적 교회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하였다는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교황청 지침 - 공동 기도회, 예배에 관한 지침들도 있다.

현재 가톨릭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복음주의연맹(WCC보다는 가톨릭에 더 신중한 입장) 같은 개신교 단체들과 모두 친밀한 관계다.

2.7. 가톨릭과 SSPX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주재 교황대사였으며 프랑스 튈의 대교구장이었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발족된 성 비오 10세회(이하 SSPX)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 1970년에 회를 설립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승인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때문이었다. 새로운 미사 경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전례 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예전 트리엔트 미사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가톨릭 교인들은 라틴어뿐만 아니라 모국어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벽에 붙은 제대를 바라보며 진행되던 미사는 이제 사제와 평신도들이 식탁과 같은 제대를 마주보고 둘러 서서 드리는 미사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또한 미사 통상문과 고유문의 많은 요소가 삭제되거나 새로이 추가되었고 전례력도 대대적으로 변경됐다. 또한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성령쇄신운동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급진적 변화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로 하여금 전통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1970년 대주교의 친구이기도 한 스위스 프리부르 교구주교 샤리에르 주교와 접촉하여 스위스의 에콘에 신학교 설립 승인을 요청했고, 이와 더불어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을 신청하여 인준받았다. 보통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 단체는 몇 단계의 심사와 활동 기간을 거친 뒤에 정식 단체로 인준을 받게 되었으므로 처음 몇 년간은 교회의 감독 하에서 보수 성향 신앙 단체로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추진에 열심인 프랑스 성직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를 지지하는 사제·신학생들의 활동에 부정적이었고 그들을 트리엔트 미사와 옛 해석에 집착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이 모든 상황은 1974년 스위스 에콘의 성 비오 10세 신학교를 교황청에서 파견한 2명의 벨기에인 추기경이 시찰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들의 신학이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가져다 준 해악의 산물이라는 논지의 선언을 했다. 1974년 11월 21일 선언으로 불리워지는 이 선언으로 인해 교황청은 큰 충격을 받았고, 샤리에르 주교의 후임 프리부르 교구장 피에르 마미 주교는 SSPX의 인준을 철회하겠다는 의향을 교황청에 전했으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3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결국 SSPX의 인준은 1975년에 철회되었고, 르페브르는 신학생들과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제·평신도들과 항의하는 차원에서 로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교황청 사법기관은 르페브르의 항소를 기각했고 공의회에 따른 결정 사항을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난했는데, 교황이 특정 가톨릭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 2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든 상황은 SSPX로 하여금 당장 교황청을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단호하게 하던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했다. 이들은 트리엔트 미사와 공의회 이전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6년 12명을 사제로 서품했다. 이로 인해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아 합법적으로 성무를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대주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문제는 그의 나이가 많아서 그가 죽으면 SSPX는 주교 없이 활동하는 빈약한 단체로 전락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교 서임을 위한 좋은 구실이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사도 헌장을 발표하여 기존의 교회 법전을 수정하였다. 또한 정교회와 여러 개신교 교파와 함께 다양한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다양한 그리스도교 교파 지도자 뿐 아니라 힌두교, 시크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아프리카와 북미의 정령 신앙, 신토, 조로아스터교, 바하이교 지도자까지 함께 모여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금식 기도회가 있었다. SSPX는 교황의 이같은 조치에 종교다원주의라면서 크게 격앙되었고, 이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 르페브르 대주교가 1988년에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전격 임명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도좌로부터의 자동 파문 조치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성 비오 10세회 활동은 로마 교황청의 골칫거리였다. 로마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이에 따른 결정 사항을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것이 사회의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다고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교회 내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그 변화에 부정적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요컨대 SSPX 존재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던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공연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공박했으며 교황의 교회 일치 운동과 신학의 진보적 변화를 수용 거부했다. 또한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이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가톨릭 교회의 기존 전통을 크게 훼손되었다면서 전례 의미가 혁파되고 사제의 기능이 축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가 가진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성 비오 10세회와의 화해를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에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였다. 추기경 시절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성 비오 10세회와의 협상을 맡기도 했던 그는 자의 교서를 내려 모든 가톨릭 사제의 트리엔트 미사 집전을 자유롭게 전면 허용한다는 조치[8]를 취해 화해의 길을 터놓았다.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서품된 4명의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을 철회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실제로 이 조치 후 많은 접촉이 잇따랐다. 그러나 현재 대화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현재 SSPX는 인준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교황청의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규정은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 의장이었던 귀도 포조 대주교가 언급한 바 있듯이 '가톨릭 교회의 일부이지만 교회법상 불법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3. 성경적 근거

교회일치를 위한 정신에 부합하는 차원에서 공동번역 성서를 따랐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기는 스테파나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있으나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코린토1서, 고린도전서) 1장 10-14절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9]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알맞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성서에도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셨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인간의 간교한 유혹이나 속임수로써 사람들을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에페소서(에베소서) 4장 1-15절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중략)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요한의 복음서 17장 11, 21절[10]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코의 복음서(마가복음) 9장 38-41절

4. 성경 공동번역

성경 번역마저 종파별, 교파별로 파편화된 것에 대해 비판 의식을 느끼고 교회 일치 운동 부흥에 따라 성경 공동번역 사업이 전 세계 각지에서 펼쳐졌다.

영미권의 경우 RSV(개정표준역 성경) 성경이 가톨릭, 정교회에 의해 수용되면서 영미권 최초의 공동번역 성경이 되었고, NRSV 성경, REB 성경은 편찬과정부터 아예 공동번역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에 개신교와 천주교가 합작한 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그러나 각 종파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공동번역을 거부하는 흐름은 여전하여, 그 쓰임새에 있어서 공동번역이 반쪽짜리가 되는 등의 한계 역시 존재한다.

5. 비판

5.1. 반(反) 에큐메니컬 진영의 비판

전통 가톨릭 성향의 성 비오 10세회 그리고 반개신교 성향의 가톨릭 신자들과 반에큐메니컬 계열의 보수적인 성향의 개신교 측 모두 교회일치운동을 "종교혼합주의"(혹은 종교다원주의)라 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양측 모두 교회일치운동에 대해 '신앙의 순수성', 즉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양 진영 모두 상대방 교파를 같은 그리스도교가 아닌 아예 다른 이방 종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계열 보수 개신교에서는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교회[11]의 통합보다는 연합의 형태가 성경적이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고[12], 좀더 보수적인 계열은 분리가 성경적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더 나아가 교회일치운동에 적극적인 NCCK 소속 개신교 교단들과의 교류 금지령까지 내릴 정도이다. 성경 공동번역에 대해서도 성경을 타협된 잡탕으로 변개할 여지가 있다며 부정적으로 본다.

5.1.1. 가톨릭 측의 비판

반 에큐메니컬 운동 성향의 전통주의 가톨릭 단체들의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반대 논거는 다음과 같다.

5.1.2. 개신교 측의 비판

교회 일치 운동에 반대하는 보수 성향의 개신교 교단에서는 가톨릭을 같은 그리스도교가 아닌 아예 다른 종교로 인식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한 적그리스도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일치 운동에 적극적인 NCCK 계열의 개신교 교단들까지 배교자, 적그리스도 2중대이며 "성경적으로 완전히 개혁된 교회가 아니면 그리스도교 형제로 볼 수 없다"라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특히 보수 교단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가톨릭 뿐 아니라 가톨릭과 교류하고 일치 운동을 하는 NCCK 소속의 모든 개신교 교단들과도 교류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군소 보수 교단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한기총은 아래에 나열된 개혁 신앙 교리를 고백하는 교단들끼리만 일치 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WCC 가입을 두고 대한민국 최대 개신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 1959년의 일이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보수교단(합동, 합신, 고신, 고려 등) 측은 WCC 활동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는데, 2013년 부산에서 열린 10차 총회를 앞두고 한국의 개신교계 상황은 그야말로 내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현재는 군소협의체로 전락해버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WCC가 열리는 박람회장 근처에서 반대 시위를 개최하는 등 국내 개신교계는 양분이 된 상황 속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또한 교회 일치 운동은 교파 간의 상호존중으로 선교 경쟁을 지양[20]하기에 극우 성향의 가톨릭 단체인 성 비오 10세회와 또 역시 극우 성향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에큐메니컬 진영이 빌미를 제공한 점도 없진 않다.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 1991년 WCC 호주 총회에서의 초혼 퍼포먼스 사건 등으로 인해 평범한 개신교인들에게까지 상당한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은 결국에는 개신교를 교황청(가톨릭 교회)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지 않냐며 경계심을 가지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일부 강성 극우 성향 개신교인들은 다른 계통의 종교(불교, 이슬람교 등)와도 화해 분위기를 갖는 것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이는 세계 단일종교 통합을 하려는 악마 숭배 세력의 음모라는 설을 펴기도 한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와 연관 짓는 건 덤. 이런 모습은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원조인 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전통 가톨릭교도들은 물론, 현대 가톨릭교도들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부 반(反)가톨릭 성향의 보수 개신교에서는 개신교를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분파가 아니라, '중세 가톨릭의 재야에 있던 정통 그리스도교'라고 보기도 한다.[21] 물론 이것은 장로교회침례교회의 일부에서나 찾을 수 있으며[22], 영국 내 가톨릭 조직의 일부가 국교회로 분리된 역사가 있는 성공회[23]와 가톨릭 수도사제였던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회에서는 이런 시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24] 그러나 애초 종교개혁 자체가 초대 교회, 엄밀한 의미로는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들이 활동한 시기의 교회의 복원을 목표로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던 만큼, ('주류 가톨릭이 아닌 재야 영역을 거친 정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통에 대한 회복 운동이라는 것은 개신교 교단들 자체의 정체성이다.

5.1.3. 정교회 측의 비판

정교회 신학자인 지지울라스 대주교가 “정교회 탈레반”이라고 언급한, 정교회 내 근본주의자들은 교회일치운동을 정교회를 공격하는 사악하고 악취나는 것으로 보고, 개신교는 물론이고 가톨릭마저도 전혀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들과의 어떠한 대화도 격렬히 반대한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로마 교황을 작은 적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잡은 신으로 자처하는 불법의 사람(데살로니카 후서 2:3-4)으로까지 해석하며, 교회일치운동에 찬성하는 같은 정교인들이 만든 성물조차 쓰지 못할 것이라며 폐기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예전에는 정교회였지만 지금은 교황의 수위권을 받아들이고 가톨릭과 재일치한 일부 동방 교회, 즉 동방 가톨릭 교회의 존재에 대해서 가톨릭에 의한 정교회 분열 공작의 결과로 보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둘러싸고 러시아 정교회와의 갈등 문제가 심각하다.

5.2. 에큐메니컬 진영 내의 비판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 진영 내 일부 보수파[25]에서는 교회 일치라는 궁극적인 사명 달성의 의의는 인정하지만, 묻지마식의 교회 일치 운동은 오히려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에큐메니컬에 적극적인 성공회나 루터교회 내에서도 교회일치운동(특히 가톨릭과의 교류ㆍ대화) 그 자체에 회의감을 드러내거나 반대하는 성향의 일부(특히 자신이 속한 교파의 정체성을 강경하게 대변하는 부류)[26] 신자들이 소수 있기도 하다.

에큐메니컬 진영 일부[27]에서는 교황수위권·교황무류성·가톨릭 교회론(가톨릭이 유일하게 참된 교회라는 명제)에 관한 가톨릭의 아집[28]이 교회 일치의 진정한 장애물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들은 가톨릭의 사제 결혼 금지 규정[29]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에큐메니컬 교단 신자들 중 일부는 가톨릭의 태도(특히 교회론)에 실망해서 다른 의미에서 일정부분 반가톨릭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가톨릭의 '갈라진 형제'라는 모토를 일종의 화전양면술이라 보고, 가톨릭 교회가 '가톨릭만이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는 명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가톨릭과 상대하기를 꺼리는 그런 입장을 말한다. 사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면서 여기서 진정한 교회를 로마 총대주교인 교황의 보편교회에만 한정짓는 것은 비그리스도인과 비가톨릭 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을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이쪽에서는 가톨릭만 제외하고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끼리만 교회 일치 운동에 힘쓰자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이 있기도 하다. 가톨릭의 이러한 보수성과 폐쇄성을 잘 알고 있는 일부는 가톨릭과 에큐메니컬 개신교가 물리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라며 가톨릭과 통합 가능성을 염려하는 시선을 달래기도 한다.[30]

에큐메니컬 진영 내 개신교 교단들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운 경우가 상당수이고,[31] 자연스럽게 여성 목사 안수나 성소수자 포용 등의 문제에도 매우 전향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슈들은 자유주의 교단 내부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으며, 개신교 보수파/중도파·정교회·가톨릭 모두에게서 상당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성 목사/사제 허용은 사도전승을 매우 중시하는 가톨릭·정교회 측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나,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 내부에서 굉장히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주교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도전승을 주장하는 성공회[32]와 일부 루터교회도 마찬가지다.[33]

에큐메니컬 진영 내에서 제일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은 성소수자 포용 문제이다.[34]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성생활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의 영성체 참여를 금하고 있으나[35],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에서는 개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섬돌향린교회, 대한성공회 길찾는 교회 등. 심지어 더 나아가서 성소수자 목회자 안수[36]를 하고 있는 교단도 있는데,[37]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을 때 각각의 교단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발과 논란이 일어났으며, 몆몆 구성원들은 기존의 교단을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기도 했다.[38]

또한 가톨릭·정교회 측의 교회일치운동에 긍정적인 부류로부터도 교회 일치를 더욱 힘들게 하는 행태라는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장 리버럴한 개신교 교파 내부에서도 엄청난 비판과 논란이 있었으니,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톨릭성공회를 포함한 개신교 신자에게 가톨릭 교회에서의 영성체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 일치 운동에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교류'라는 건덕지라도 보일만한 것은 가톨릭 사제가 성공회로, 성공회 사제가 가톨릭으로 옮길 때 타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이나 성공회로 옮기는 경우와 달리 사제서품을 다시 받는 것에 대한 사실상의 특례(가톨릭 신자들은 이것을 '특례'라 안 하고, 교황의 사목적 '배려'라 표현함)가 적용되는 것 정도 뿐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비판도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다가 2006년에 은퇴한 가톨릭 평신도 신약성경학자인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는[39] 공동 영성체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오늘날 교회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며 최소한 일치를 이루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낭만적이고 감동적이며 과감하기까지 하지만, 사실상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과 한 침대에 들고 싶소.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데 성관계가 가장 친밀한 사항이듯이, 성찬식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데 가장 친밀한 행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로 일치하는 성찬식을 시작할 수는 없다. 서로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 양쪽의 제도와 권위를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각자 이룩한 공동체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즉 함께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은 일치운동 끝 단계에 이르러 할 일이지, 처음부터 할 일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일이다.

분열을 극복하는 일은 하느님 표상에서 직접 유래하는 과제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정 근본적으로 일치를 바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실제로 일치가 이루어질 때 나는 함께하는 만찬에 가장 먼저 참석할 것이다. 성찬식은 양쪽이 모두 바라는 구원의 탁월한 표현이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 전헌호 옮김 (서울: 성바오로, 2013), 304-305쪽
베르거는 여기서 재미있는 비유를 하고 있는데, 성교가 남녀간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최종 단계이듯이, 영성체는 일치의 시작이 아니라 최종 단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1] 그동안의 예배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2] 2020년에는 코로나 문제로 인해 강단 교류만 이루어졌다[3] 번역 출처: 안젤로 아마토,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522-523쪽[4] '칭의 과정|의화'에서의 믿음, 성화 과정에서의 사랑(즉, 선행이라는 표지)이 구원의 핵심이라는 이론[5] 박경수, 《교회의 신학자 칼뱅》,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9[6] 영원히 저주받을 이단이라며 선언하고 다시 여러 번에 걸쳐 거론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공의회 시기 바오로 4세의 경우 프로테스탄트에게 관용을 베풀지 말 것이며, 칼뱅파는 더더욱 용서치 말라고 주문했다. 이 여파로 17세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개신교 신조에서 반가톨릭적 색채가 확연히 드러난다.[7] 물론 한국 정교회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나 정동감리교회 등에서 개최되기도 한다.[8] 이 조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취소되었다.[9] 물로써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준 세례는 집전자가 타 교파여도 원칙적으로 그 유효성이 초교파적으로 인정되는 중요한 이유다.[10]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와 정교회가 자신한테 되돌아오는 식으로 재일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기도 한다.[11]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개교회를 포함한 신자들의 공동체 내지는 교회 조직(교단)이라는 뜻이다.[12] 다만 연합이라는 개념은 소수가 추구하는 추세이긴 하다.[13] 한편 에큐메니컬 개신교 진영은 가톨릭의 이러한 태도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며, 일부는 가톨릭과의 교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14] 교회법상 합법이든 불법이든 에큐메니즘 운동에 부정적인 것은 전통 가톨릭 단체들의 특징이다.[15] 천주교 제도권 보수파.[16] CPBC 가톨릭 뉴스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 관련 기사가 나오면 댓글 상황이 전쟁터가 따로 없을 정도로 살벌하다. 물론 일치기도회를 반대하는 신자들과 찬성하는 신자들 간의 언쟁이다.[17] 개혁주의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회성 대속을 중시하는데, 가톨릭의 미사와 정교회의 성찬예배는 이러한 개신교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일종의 희생제사이므로) 싫어한다.참고글 또한 이쪽에서는 화체설을 비성경적인 우상숭배 내지는 신비주의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보편교회가 미사/성찬예배를 통해 희생제사를 재현한다고 해서 대속이 한 번 뿐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18] 개혁주의 개신교 교단 중 기념설을 따르는 교파는 성만찬은 주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기념하는 예식일 뿐, 그 자체에는 어떠한 능력이나 효력도 없다고 본다.[19] 아예 십자가조차 달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예장합동 교단의 경우 교회법으로 십자가 사용도 금지했을 정도.[20] 현지 교회와 선교 교회 간 경쟁과 교파 간 개종을 지양[21] 발도파, 후스파 등. 심지어 보고밀파카타리파 등도 원래는 종교개혁 이후의 재세례파와 같은 집단들인데 가톨릭이 마녀 재판 과정에서 영지주의로 몰아세웠다는 주장도 있다.[22] 나머지는 가톨릭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가톨릭에서 뛰어나와 개혁교회를 차렸다고 본다.[23] 캔터베리 대주교 직책 자체도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 소속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브리타니아(지금의 잉글랜드)의 캔터베리에 주교를 파송한 것이 캔터베리 대교구(그리고 영국 가톨릭)의 시작이기 때문.[24] 따라서 극단적 반가톨릭주의(가톨릭을 아예 비그리스도교로 취급하는 수준)는 해당 교파 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25] 자신이 속한 교단의 노선에 개의치 않고 교회 일치 운동 자체에 반대(WCC 반대 등)하는 극보수파는 여기서 논외한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예장 통합과 기감에서 이런 이들이 일부나마 존재한다.[26] 이것은 고교회, 저교회, 광교회 여부 및 리버럴, 보수주의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27]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 다수, 정교회 일부, 가톨릭 내 급진개혁파(한스 큉 등)[28] 개신교에서는 이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한다.[29] 독신에 대해 적대적인(결혼을 목사 안수의 기본 조건으로 걸어놓는 경우가 많음) 보수 개신교와 달리, 이쪽은 사제 본인의 양심에 따른 자발적 독신은 부정하지 않는다. 복음서, 바울로 서신서의 말씀대로 누군가에겐 독신의 은사가 있을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이 딴지를 거는 것은 가톨릭만의 사제 독신 강제 규정이다.[30] 물리적 통합은커녕 성사교류가 부분적으로 되는 것만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큰 성과다. 그나마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덧붙이자면, 가톨릭 교회가 사회교리를 두고 결국에는 진보파 가톨릭 교회와 보수파 가톨릭 교회로 영구 대분열하여 진보파 가톨릭이 성공회나 루터교회와의 상통을 시도하거나 한스 큉 같은 급진파가 교황이 되어서 교회 대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보다 적극적인 교회 일치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진보파 가톨릭 교회가 교황무류성이나 무염시태 같이 개신교에서 크게 문제시하는 특정 교리를 철회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가톨릭 교회에 큰 격변이 없는 이상 현 상황이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31]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강하게 내세우는 모토 중 하나가 신학의 자유이다. 미국성공회, 대한성공회도 정말 핵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 외에는 신자들의 다양한 신앙 자세에 대해 관용하는 경향이 있다.[32] 미국 성공회와 영국 성공회는 여성 주교가 존재한다. 특히 미국성공회의 의장주교를 여성 관구장 주교가 역임한 바 있으니, 이제 현대 성공회에서는 여성이어서 오르지못할 직분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33] 심지어 스웨덴 같은 곳의 주교제 루터교회는 여성 사제는 물론, 여성 대주교까지 있다.[34] 성직자의 결혼 인정 여부, 여성 성직자의 인정 여부 등은 이에 비하면 난이도가 낮은 문제들이다.[35] 가톨릭의 경우 성소수자의 입교 자체는 막진 않는다(가톨릭 교리서 참조할 것). 다만 성생활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는 영성체를 비롯한 성사를 받지 못하는 실질적인 조당이 걸릴 뿐이다. 정교회의 경우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입교를 막진 않고, 동성애 행위를 자제하고 고백성사를 통하여 지속적인 회개를 해야만 영성체가 가능하다고 본다.[36] 심지어 현재 성 생활을 하고 있는 성 소수자들에게도[37] 미국 성공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미국 북장로회 등등[38] 실제로 성소수자 목회자 안수 결정 이후 미국성공회는 세계성공회로 부터 3년 간 관구로서의 권한을 제한당했으며, 미국 성공회에 반대하는 북미성공회가 독립하여 교단을 만들었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도 교단이 분열되었다.[39] 엄밀히 말하면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친다고 에큐메니컬 운동 내부로 단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베르거를 반대 진영이라 단정하기도 어려워서 여기에 적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