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3:21:32

김두한/김좌진 친자 논란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두한
1. 개요2. 발생3. 출생 관련 공식기록4. 출생 의혹 및 반론
4.1. 가족의 확고한 인정4.2. 무리한 음모론4.3. 김좌진 사후 1930년에서 1990년까지 출생음모론이 없었던 이유
4.3.1. 1990년대에가 되어서야 출산음모론이 널리 퍼진 결정적 이유
4.4.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
4.4.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
4.5. 김두한 회고록으로 출생의 비밀을 추적했던 여러 논의들 4.6.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
5. 그 외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6.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
6.1. 위연홍의 유전자 검사 제의는 김을동이 김좌진 손녀 맞다는 의미6.2. 김좌진의 후손을 자처하는 김장춘
6.2.1. 확증편향에 가까운 이유
6.2.1.1. 김좌진의 5명의 부인, 그리고 아동성애 논란
6.2.2. 김장춘의 말바꾸기6.2.3. 중국공산당 옹호와 대한민국 비판

1. 개요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을 서술한 문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아들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2. 발생

처음으로 공개 지면을 통해 친자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은 도올 김용옥으로 알려져 있다. 김을동에 따르면, 이 논란은 김용옥이 1990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고 한다. 김용옥의 1990년 기고문 자체는 세월이 너무 지나 인터넷상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에 가면 정기간행물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김용옥은 신동아에 실었던 자신의 칼럼들을 편집하여 <도올세설>이란 제목으로 1990년에 출간한 바가 있으니 이 책을 통해 김용옥의 주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김을동 인터뷰에서도 김용옥의 발언을 언급하고 있다.

김용옥 본인이 작성한 글은, 그저 "개성 출신 고아가 거짓말한 것이다"라는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같은 해인 1990년 발표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시나리오 원안을 쓴 사람이 바로 김용옥이다. 이에 김용옥 자신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의 김두한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가감한 영화적 픽션이라고 밝히기는 했다.

어쨌거나 이것이 불씨가 된 것은 사실이고, 이후 제법 논의가 되면서 이제 논란은 거의 수그러들었다.

3. 출생 관련 공식기록

김좌진김두한의 부자관계에 대한 근거는 예일제의 공문서, 안동 김씨 문중의 족보등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다.[1] 즉, 동시대의 대다수 사람들보다 훨씬 혈통의 근거가 확실한 사람이 김두한인 것이다.

특히, 김두한의 경우 호적에 올라가게 된 경위도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란 것에 힘를 싣는다. 김좌진의 배우자로 알려진 3명의 여인은 오숙근, 나혜국, 김계월이 있는데, 이 중 김계월은 김두한의 어머니이며, 오숙근과 나혜국은 딸 김석철, 아들 김철한을 호적에 올릴 때 김두한을 같이 김좌진의 호적에 올림으로써 나머지 김좌진의 아들로써의 김두한을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대략 1930년 내외에 일제강점기 여러 언론에 의해서 김좌진의 아들로 보도된다. 김좌진과 함께 만주에 거주하던 김좌진 모친과 정실부인 오숙근이 귀국했고, 김좌진의 사망 이후,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나혜국이 귀국하여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힘들게 생활했다. 이에 정실부인 오숙근은 자주 왕래를 했고, 김두한은 오숙근과 나혜국과 왕래했다. 일제시절에 안동 김씨 가문이 김두한을 안동 김씨로 인정했으며, 이에 관한 기사도 남아있다.

이 외에도 일제시제 공식 문서로, 김두한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요주의 인물로 감시대상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문서에는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라고 명시되었다.

1990년 이후에 생긴 김두한 출생 음모론은 보통 김두한 회고록 2종에 근거하는데, 이 회고록은 애초에 출생의 증거로 쓰인 적이 없다. 그 책은 1960년대 이후에 김두한이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해서 한 말 등을 기록해서 출간된 책일뿐이며, 김두한은 1930년대에 이미 김좌진의 아들로 확고하게 출생을 인정받았기에 회고록은 김두한 자신의 출생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씌여진 책이 아니다.

4. 출생 의혹 및 반론

4.1. 가족의 확고한 인정

김용옥이 김두한 음모론을 주장할 당시 주장은 ''고아에 거지인 김두한이 모두를 속였다''라고 주장했다. 즉, 음모론의 주장대로면, 거지 꼬마인 김두한이 뜬금 나타나서 그럴듯한 말 솜씨로 안동 김씨 가문을 속여넘기고, 김좌진과 같이 살던 두 부인 오숙근 나혜국까지 속여넘겨서, 김좌진 아들의 지위를 획득했다는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안동 김씨의 족보와 호적에 올랐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이후 신문기자들과 조선총독부 공식문서까지도 모두 조작할 능력이 있을수가 없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면 무엇인가 자식이라는 근거가 있었다고 보는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2] 우리에겐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식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김두한의 모친과 부인들에게 제시했었을것으로 보는게 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자세한 뒷이야기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 문서 앞부분에서도 잘 나오지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라는 객관적 증거는 20세기 초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많다. 하지만, 세세한 뒷 이야기까지 모두 남겨져있지는 않다. 그것이 당연한것이 김두한은 무려 100년전에 출생한 인물이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1990년대까지 김두한의 출생논란 자체가 없었으니 그런 시시콜콜한 내용이 자료로 남겨져 있을 이유가 없다.

사실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받아들인 안동김씨 문중이나 김좌진 모친, 그리고 오숙근 나혜국 등의 김좌진의 부인등은 그 뒷이야기를 자세히 말해줄수있는 인물들이다. 만약 그들의 건재할때 이런 음모론이 나왔다면, 나혜국이 "그 당시 김두한이란 아이가 이런 저런 이유로 남편 김좌진의 아이라는게 확실해서 받아들였다"같은 뒷이야기까지 포함한 자세한 대답이 나왔을텐데, 사실 김두한의 출생의 거짓이라는 음모론은 90년대 이후에 나왔고, 오숙근 나혜국등 가족이나, 김구 홍범도 등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모두 노쇠하거나 사망한 이후에 나왔기때문에 뒷이야기를 자세히 말하면서 반박해줄 인물들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일본경찰에 쫓기는 과정에서 김계월과 3년간 동거하고 임신이후 중국 도피를 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중국에 있을때 김좌진의 모친과 본부인인 오숙근도 중국으로 출국했고, 이후 현지에서 결혼한 나혜국도 있었다. 이들은 김두한 출생(1918년) 이후에도 중국에서 김좌진과 같이 10년 이상 생활하다가 김좌진 사망(1930년) 전후에 한양에 와서 정착한다. 이후 한양에서 김두한을 김좌진 자식으로 인정하고 교류하면서 이후 족보와 호적에 올리게 된다. 김두한의 사망 이후에도 김두한 후손들과 계속 교류하는 내용이 1989년 MBC방송다큐에도 나온다.

김두한의 모친과 부인 두명은 확고하게 김두한의 출생을 믿고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김두한의 출생을 믿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추측해 볼수있는 하나는 김두한의 회고록에도 나오고, 신문기사에도 나오는 어린 김두한이 중국으로 김좌진을 찾아갔다.는 내용이다. 즉, 김두한이 중국에서 김좌진을 만났다면 현지에서 김좌진의 부인도 같이 만났거나 적어도 김두한이 찾아온 것 자체는 알 수 있으므로 합리적 설명이 된다.

김두한이 중국으로 김좌진을 찾아간것 자체가 사실아니라해도 여전히 중국에 있던 김좌진과 조선에 있던 김두한의 모친이 연락은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좌진의 한양에 있던 집안 사람들과 김좌진은 중국으로 가기전부터 편지 등 연락 자체는 어느정도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연락이 전해졌기에 김좌진의 본처와 모친이 한양을 떠나서 중국까지 김좌진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김좌진의 아이를 임신한 김계월이 남자아이를 낳았다."는 등의 소식을 전달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결과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의 혼외자의 이야기를 했을 수 있다.

만약 김좌진이 10년이 넘는 중국 생활 동안 모친과 두 부인에게 김계월이 임신한 자신의 아이에 대한 정보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현실적으로 두 부인이 중국에서 귀국 이후 뜬금없이 김두한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김두한이 중국으로 가서 김좌진 만났다는 식의 주장은 논외로 하더래도[3] 적어도 김좌진 사망전 단 한번도 '김계월에게선 본 아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면, 귀국한 가족앞에, 뜬금 나타난 거지 아이 김두한이 아무리 언변이 좋아도, "고인이 중국생활 10년동안 단 한번도 조선에 남겨놓은 사생아가 있다는 말씀은 하신적이 없다"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가능하다.

어쨌거나 2023년 현 시점에선 자세한 이유를 몰라도, 결과적으로 적어도 김좌진의 가족이 확고하게 김두한의 출생을 믿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다.

나혜국은 1986년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김좌진의 자식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다"라고 확고하게 말했고, 이후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 나혜국 집에 김두한 아들이 김경민씨가 와서 김좌진을 추모했다는걸 고려하면, 적어도 김좌진의 가족들은 김두한의 출생을 확고하게 받아들인것이다.

1989년 방송됐던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 이 모습이 잘 나온다.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 앞부분 여기서 김두한의 자녀인 배다른 남매인 김경민씨와 김을동이 나온다.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 중간부분 김두한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 집에 찾아가서, 김철한과 나혜국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

음모론자들은 나혜국의 가족이 김두한의 출생 음모론에 방해가 되자, 나혜국까지도 김좌진 부인이 아닌 가짜이며 일제의 밀정이라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나혜국은 22세에 김좌진과 결혼할때 이미 오항선등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이후 오항선은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을 정도로 확실한 독립운동가 맞다. 오항선은 김좌진의 부관인 유창덕과 혼인했고, 이후 2005년까지 생존하셨으므로, 오항선과 함께 독립운동한 나혜국의 진위까지 의심하는건 무리한 음모론이 맞다. 김좌진이 중국에서 독립운동할 당시 동지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귀국했고, 특히 초대 국방부 장관인 이범석도 있는데, 나혜국이 김좌진의 중국에서의 부인이 아닌 가짜라면 당장 들통났을것이다.

4.2. 무리한 음모론

보통의 경우 김두한의 출생관련 기록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굉장히 많기때문에 출생관련 음모론이 없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음모론이 생겼으므로, 음모론중에는 김두한의 출생의 자료가 엉터리라고 우기려는 목적의 무리한 주장이 많다. 그래서 음모론에서는 아예 김두한 출생자료 자체가 조작되었다고 무리한 주장을 하는것이다.

그렇지만, 김두한이 뭐가 대단해서 이렇게 광범위한 조작을 통해서 김두한의 출생을 조작한 것일까에 대한 합당한 대답은 없다. 음모론의 주장을 보자.
김용옥이 1990년대에 주장한 이야기다. 당시 몇몇 언론에서도 이에 관련 논의를 했던 내용이 있다.

물론 굉장히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속였는지에 대한 주장이 하나도 없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안동김씨 문중과 오숙근 등 김좌진의 부인들을 속여서 안동김씨의 족보와 호적에 올랐다는 것까지도 굉장히 힘든 일이다.

사실 그게 근본적으로 힘든 이유가 또 있는데, 김좌진과 그 가족이 연락이 아애 끊긴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김좌진의 부인인 오숙근, 나혜국들은 김두한 출생(1918년) 이후에도 김좌진과 같이 생활하다가 김좌진 사망 이후에 한양에 와서 정착한다.[4] 이후 한양에서 김두한과 교류하고 김두한을 김좌진의 자식으로 인정해서 족보와 호적에 올리게 된다. 즉, 실제로 김두한 출생이후에도 김좌진과 가족은 한동안 같이 살거나 소통했던것인데, 만약 생전에 김좌진에게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다면 김두한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더욱 힘들었을것이다.

음모론의 주장대로면, 안동 김씨와 가족의 인정을 받은 것에 더해서, 여러 신문사의 기자 그리고 일본 경찰과 조선총독부까지 모두 속여넘겼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기능력이지만, 현실에서 김두한은 언변이 좋긴 했으나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등 일자무식으로 이며 치밀한 성격이 아닌 시원시원하며 다혈질인 남성이었다고 알려진다.

김용옥은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 과정에서 <김두한 회고록>을 많이 참고했다고 알려졌다. 김두한 회고록은 김두한 관련한 각종 영화, 소설 등 2차창작에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며, 이 책의 내용이 실제 역사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는게 사실이나, 이 책은 김두한의 출생과는 무관한 책이다.[5]. 결국 <김두한 회고록>을 근거로 김두한의 출생음모론을 제기했다면 굉장히 어이없는 상황인것이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린 김좌진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해서 1. 부인 외에 기생을 첩으로 만든 한량이다. 2. 아들이 조폭이 되었다. 등의 더러운 이미지를 씌운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엉터리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다.
  1. 노력이 엄청나게 든다
    현실적으로 꼬마거지 김두한의 입을 막아야하고, 여러 종류의 신문사의 기사를 완벽하게 컨트롤하려면, 안동 김씨와 김좌진 부인들과 독립운동동지들의 입도 틀어막아야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한 언론이 아닌 여러 언론과 지식인들의 책에도 언급될 정도여서 일제가 일일이 조작하기 힘들다. 특히 안동김씨 문중이나 김구, 이범석 처럼 독립운동 동지들까지 모두 일제에 협박당했거나 속아넘어갔다는건 너무 무리한 주장이다.
2. 당시 양반이 기생에게 낳은 아들이 오점일까??
그 당시에는 기생출신 첩을 가진것이 양반가의 흠이라고 할수없다. 이미 사망한 김좌진이 사생아가 있다는 크게 오점으로 볼수없는 내용조작을 위해 들이는 노력은 과도하다.
3. 노력에 비해 소득이 적고 부작용은 크다
이런 작전 자체가 일제에게도 굉장히 부담스런 작전이 아닐 수 없다. 이게 들통나면 일제도 엄청난 이미지 하락일 수밖에 없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하던 일제가 이런 무리한 작전을 굳이 하다가 들통나면 큰 부작용이 생긴다.
4. 김좌진에게만 굳이 이런 조작을
사실 독립운동가중에서 김좌진이 청산리 대첩으로 대중적으로 유명했던건 사실이지만, 안중근, 윤봉길, 김구, 김원봉 등 일제가 미워하던 거물 독립운동가들은 많다. 그 가운데 안중근 의사의 아들처럼 전향해서 일제의 선전에 이용된 사례도 있지만 가짜아들 사례는 없다. 독립운동가가 한두명도 아닌데, 왜 유독 김좌진에게 가짜 아들 만들기를 했을까?
5. 12살 김두한이 나중에 조폭두목이 될것을 예견?
어린 김두한이 나중에 커서 조폭이 될지 그걸 어떻게 미리 알고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일까? 일제가 김두한을 조폭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다. 김두한의 무력과 주먹 조직관리능력자체는 해방이후에도 확인될 정도로 확실했 기때문에, 김두한이 자라서 그 정도의 무력과 조직관리 능력을 가질것을 예언이라도 했다는 것일까? 이용하고 싶다면 오히려 일본군에 입대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건데.
6. 주연배우가 12살 꼬마 ?
물론 김좌진의 가짜 아들이 되고 싶은 김두한을 일본당국이 발탁해서, 서로 협의하에 작전을 진행했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은 생긴다. 하지만 이 나이 거지 김두한이 열정적으로 연기해서, 안동 김씨와 김두한 가족과 신문기자들까지 속여넘기고 들통날 가능성도 없다고 일제가 믿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어리고 말이 안된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거물급 조폭이 된 후 안동 김씨 문중이나 김좌진의 처를 협박해서 족보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 자체가 김두한이 12살이며, 김두한이 조폭이 된것은 성장하고 난 이후이다. 즉, 조폭 김두한의 무력과는 무관하게 어릴때 이미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았으니 이미 이 대목에서 엉터리인 셈이다.

김을동이 오숙근 나혜술과 찍은 사진의 경우도 음모론자에 의하면 김두한의 무력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찍은 사진이라고 소설을 사실처럼 말하는 인터넷 자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김두한이 1990년대에 이후에 자기가 김좌진 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이 생길 것을 미리 예언하고 그 증거를 남겼다는 말인 셈이다. 김두한은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김좌진 아들로서 지위가 확고했기 때문에 힘으로 강제로 자기 딸을 데리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길 이유가 없었다. 김두한은 1930년대 이후로 생전에 단 한 번도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 음모론이 생긴 건 1990년대 도올 김용옥이 거의 시초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딸 김을동이 자기 사후에 김좌진 자손 아니라는 의심받을까봐 증거를 남긴 거라는 식이면 너무 억지 주장이다.

또 나혜국은 김두한 사후인 1987년에도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라고 언론에 인터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끔히 반박된다. 김두한의 협박설이 황당한 이유중의 하나가 나혜국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김좌진과 결혼한 대단한 여장부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국내 귀국 후 일제에 감시당하며 살던 분이다. 안동 김씨 문중 또한 만만치 않다.이미 김두한 사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도 나혜국의 자녀들과 김두한의 자손들이 다같이 다큐멘터리 등에도 나와서 김좌진을 추모했던 적이 있다. 이미 죽은 김두한이 무서워서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청산리 대첩 당시 김좌진의 부하였던 이범석이나 김구 등의 거물들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김두한이 김좌진 유족을 힘으로 윽박질러서 호적을 얻었다는 황당한 주장이 무색한 이유이다. 김두한이 만약 김좌진의 유족을 협박하는 상황이었으면 이범석 등 당시 독립군계열 군부나 정치거물들이 가만히 두고볼 리 없다. 김두한이 우익폭력계에서 쓸만한 행동대장인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정치적으로 키워줄만한 정치새싹도 아닌데, 굳이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세탁하는게 이범석 입장에서는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즉 김두한은 1930년 정도에 김좌진의 아들로 확실하게 인정받았고, 이후 김좌진의 호적에 오름으로써 아무리 늦춰 잡아도 해방 직후에는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받아들인 인물중에 가장 최근까지 생존한 사람은 김좌진의 정실 자식인 김철한의 친모 나혜국이다.
나혜국의 공식 인터뷰중 가장 마지막이 1986년도 정도인데, 나혜국은 신문인터뷰에 김좌진의 자녀는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식이냐 아니냐는 문제로 발언한건 아니다. 김좌진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제3의 아들이 나타났을 때 다른 아들이 없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 김두한을 김좌진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을 때니까.

4.3. 김좌진 사후 1930년에서 1990년까지 출생음모론이 없었던 이유

당시에도 거지 고아가 김좌진의 아들인게 확실한가??라는 것을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고, 특히 안동김씨 내부에서 더 민감했을 것이고, 기자들도 아무 생각없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동김씨 가문이 뜬금없이 거지아이가 와서 나 죽은 김좌진 아들이요 주장하다고 받아주는 만만한 가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김두한에 대한 기사나 나왔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 근거를가지고 썼을 것이다.. 이런 기사가 현실과 다르다면, 안동김씨 문중 혹은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들까지도 잘못된 기사내용에 대한 반론이 있었을 법도 한데, 당시에는 김두한 출생에 대해 어떤 반론도 없다. 김좌진을 제외한 모든 당사자가 멀쩡히 살아있던 그 시기에 김두한 출생에 대한 어떠한 의혹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에 어떤 식으로든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만한 근거가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각종 신문 언론등에서 김좌진의 아들임을 조명했었고, 일제시대에도 경찰이 독립운동가 자녀라는 이유로 특별감시했던 자료가 있고, 해방이후도 김구, 이범석등 독립운동 거물들이 공개적으로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이라며 비호했다. 안동김씨 문중에서도 족보와 호적에 이름이 올라있고, 김좌진의 모친과 김좌진의 생존한 두 부인이 모두 김두한과 그 딸 김을동 등과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다들 인정하고, 가족간의 관계도 서로 잘 지내는데, 제 3자가 뜬금 나서서 "김두한이는 김좌진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려면 반대주장을 하는 쪽에서 뭔가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23년 현재까지도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1990년 이전에는 하다못해 '김두한의 진짜 친아버지가 나타났다'거나 하는 등의 애매한 증거라도 제시한 경우가 없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김두한 출생 음모론의 거의 유일한 근거인 '김두한 회고록'은 1960년대와서야 만들어졌다. 사실 이 책은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로 인정받은 1930년에는 아애 존재하지도 않았던 책이므로 1930년대에 이 책을 근거로 음모론을 펼치기는 불가능했다.

4.3.1. 1990년대에가 되어서야 출산음모론이 널리 퍼진 결정적 이유

나혜국이 생존할 때까지는 김두한에 대한 어떤 출생 음모론도 생길 수 없었다. 김두한이 안동김씨 문중의 김좌진 친자로 받아들였던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당사자이므로, 외부의 어떤 음모론도 이런 직접적 증거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생존해있던 나혜국마저 1992년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김두한의 출생에 관련된 직접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반박할 이들이 사라진 자리에 음모론이 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

김좌진과 직접적으로 많은 관련이 있으면서, 김두한의 출생과 관련해서 김두한을 지지하던, 이범석 등 김좌진 독립운동 동지와 안동김씨 가문에서 관련인사들, 그리고 김좌진의 두 부인중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한 사람은 김좌진이 중국에서 결혼했던 나혜국이다. 나혜국은 1986년 신문 인터뷰[7] 이후 노쇠해서 결국 1992년 사망했는데, 1990년에 김용옥이 김두한의 출생의 의문 발언을 한다. 그러나 이미 병석에 누운 나혜국이 공식 대응을 하지 못했고, 이후 나혜국이 사망이후에는 대응할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제기된 의문을 초기 진압할 권위와 명분을 가진 인물들이 노쇠하거나 사망이후에는 이런 음모론이 계속 살아남은 것이다.

이후 2008년 이후에는 김을동이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 된 이후에, 정치적으로 반대쪽에서 공격의도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 2020년 서울의 소리는 김장춘이란 인물을 소개하면서, 김두한이 김좌진 친자가 아니라는 공격을 하면서, 다시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 이때 비판 용도로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전기'라는 책 내용을 활용했다. 김장춘과 김좌진전기는 아래 항목에서 더 자세히 소개한다.

4.4.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

김용옥이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식의 음모론이 시작에 기여했다면, 널리 퍼지게 만들고 인터넷 세상에 각종 사이트에 그런 음모론이 퍼지게 만든 주역은 첫번째는 김두한 회고록이며, 21세기에 널리 퍼진 이유는 김을동의 영향이 크다. 애초에 김용옥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것이 김두한의 회고록이었고, 그 회고록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면서 출생 음모론이 나온거라서, 결국은 90년대에 시작한 김두한 출생 음모론의 출발전이 회고록이라고 보는게 맞다.

김두한이 뒷세계에서는 거물급이었고 비록 한국노총 위원장과 국회의원직을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정계 거물급 인사로 크지는 못 했던지라 역사적으로 족적이 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도 김두한의 관련 행적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거의 없고, 일종의 가십거리 취급을 받았다.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하는 매체 상당수가 김두한의 회고록에 근거한다. 김두한의 회고록은 1963년에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1969년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 김두한 편" 이 있다. 문제는 둘 다 그 내용의 진위여부가 의심스럽고 믿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실상 픽션으로 보는 게 맞다.[8]

김두한의 라디오 생방송 녹음본이 여전히 보관되어있고, 유튜브에서 일부 올라와있다. 김두한 육성을 들어보면 "남자는 담벽이에요. 내가 담력이 강해 간때기가 강철같이 겁이 없어애지, 겁많으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담력 있고, 용맹하고 날래고 그러니까 무적이죠. 그러니까 싸움을 잘하는 사람한테는 당수고 권투고 레슬링이고 상대가 안 돼요. 중국 영화 휙휙 나는것처럼 난 한번 날면 20~30명씩 때렸거든요." 또 다른 김두한 육성을 들어보면 "구마적이란 사람이 있었고, 신마적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쎈가 하면 말이지 (생략) 자동차가 빵구나면 왼손으로 자동차를 들고 빵꾸를 떼우고 내려놔요. (생략) 자기보다 훌륭하고 쎈 사람을 때려야지 아침밥도 못 먹는 아이를 때리고 말이야. 내가 너를 때려야겠다. (생략) 휙휙 뜨면서 안면을 내지르니."
또 하나 이런 음모론의 모순점은 바로, 김두한 회고록의 각종 엉터리 내용이 많지만 그걸 근거로 다른 음모론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애초에 회고록의 주된 부분이 김두한의 조폭활동과 정치깡패활동을 다룬 것이고 이 내용은 대체적으로 엉터리와 과장이 많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회고록에 나오는 김두한의 조폭활동 정치깡패 내용이 엉터리이므로, "김두한의 조폭활동과 정치깡패 활동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재반론하는 사람은 "김두한의 회고록에 근거한 낭만주먹으로 미화되는 당시의 조폭활동에 과장은 있을 수 있어도, 김두한이 조폭인거 자체는 회고록 이전부터 신문 등 언론 포함 여러 자료로 인정되었던 사실이며, 김두한 출생은 다르다" 라고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생각해보면 김두한의 출생 역시도 신문이나 공문서, 정부자료 포함 근거로 인정된 사실인 건 마찬가지다.
홍천군에서 2001년 홍천군 출신 위인인 김좌진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서 직접 제작한 전기이다. , 이 책은 김좌진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별다른 검증 없이 담았다. 그 결과 김좌진의 부인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3명 혹은 4명이 아니라 5명이나 소개되어 있다. 위연홍쪽의 외할머니인 김영숙을 포함했고,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복희란 분이 소개된다.

이후 이 책이 대단한 근거처럼 엮어서 허술한 음모론이 만들어진다. 즉, "이 책에 김좌진 부인의 5명의 부인중에서 정실 오숙근 제외하고, 4명에 대한 묘사가 엉터리니니, 현실에서 김좌진의 부인 4명은 다 가짜이다."라는 식의 황당한 음모론을 펼친것이다. 이 책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 수준의 책이고, 학술적인 의미도 없는 책이다.

4.4.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

김두한 회고록의 핵심적인 내용은, 일제강점기 조폭활동과 해방 이후 정치관련 활동이다. 여기서 김두한은 자신을 굉장히 미화한다. 스스로를 일본에 대항하는 협객으로 미화하는데, 특히 조폭활동하면서 몰래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 시설을 폭파하는 등 활동을 했다거나, 해방 이후에 일어난 우익폭력 사건을 빨갱이를 대항하는 영웅으로 미화한다거나 등의 과대포장이 많다. 또 김두한 출생관련해서도 구석구석 미화와 오류가 있다. 김좌진이 사망했을 당시 김두한은 불과 12살 전후밖에 되지 않았으며, 김두한 회고록에 따르면 아버지를 만나본 것은 단 한 번뿐이니 애매한 구석이 상당수 존재할 수밖에 없기도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김두한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제대로 된 내용을 기억할 리가 만무하며, 친부 논란을 떠나서 김좌진을 만났다는 것이 김두한 특유의 허세, 허풍일 가능성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

이로 인해 김두한의 회고는 세부적인 면에서 사실과 다른 점들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심지어 김두한 본인조차도 이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야기한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 때 자신이 7살이라고 했고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좌진이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김두한은 1918년 생이고,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으며,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으므로 사실 관계가 엉망진창이다.

그렇다고 하여 회고록 자체가 사실 관계가 엉터리이고, 그럼에도 이 회고록을 근거로 김두한의 정치깡패활동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는것이다. 마찬가지로 회고록을 근거로 김두한의 출생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것도 코미디이다. 게다가 조직폭력배 활동에 관한 내용이 엉터리인것은, 자신을 과대포장하려는 김두한의 의도로 보여서 나쁜 의도라고 판단할수밖에 없지만, 출생관련해서는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다.

무슨 이야긴가하면, 회고록이라고 해서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정밀하게 말한것도 아니고, 라디오 생방송에 초대받은 김두한이 즉석에서 과거 자기 이야기를 자랑삼아 떠들어댄것에 불과하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게 회고록이기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죽은 이야기를 50살 내외에 하는데 이게 몇 살 때 일인지 제대로 기억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있다.[9] 사실 21세기 기준으로 50세가 많은 나이 아니지만, 당시는 노인에 가까웠다. 게다가 김두한의 사망이 1972년이다. 회고록은 1963년, 1969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정의감에 찬 김두한이 국회에 오물투척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폐인이 되어서 풀려난것이 1966년이다.

김두한의 자서전 '피로물들인 건국전야'는 절판되었다가 2003년에 '김두한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새로운 자서전에서는 유족들에 의해 1958년 이후에 김두한의 행적과 사진자료들이 부록으로 추가되었는데, 이 부록중 김두한의 약력이 소개된 253페이지에 김두한과 김좌진이 상봉한 시기는 청산리 전투가 끝난지 4년후라고 정정하여 기록되어 있다. 기존의 논란을 의식하여 수정, 보강한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기억해야 할 것은 김두한이 자기 회고록을 정확히 써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은 1990년 이후에나 나왔다. 즉, 회고록에 자기 출생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늘 하던대로 허세를 부린 것이라는 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4.5. 김두한 회고록으로 출생의 비밀을 추적했던 여러 논의들

어쨌거나 김두한의 회고록은 그의 출생을 증명해주거나, 글의 출생을 반박하기에는 증거가 될수없는 자료임에도 김두한 회고록 자서전을 근거로 뭐가 그럴듯한 주장을 하는 논의가 많았다. 그 회고록이 출생의 비밀을 보여주는 양 음모론이 퍼지는데 일조를했다. 이런 여러가지 논의를 소개한다.

가장 문제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모친에 대한 기록이다. 일단 김두한의 회고록에 기록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김좌진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일본 제국 경찰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졌다. 도피 중에 어느 집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는데, 그 집은 옛 상궁 출신인 박 씨와 그의 딸 박계숙의 집이었다. 이후 박씨 모녀는 김좌진을 보살펴 주었고, 박계숙은 김좌진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이야기는 미화, 과장되었다. 문제는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이 일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훗날 김두한의 출생 관련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단단히 일조를 했다. 무엇보다도 김좌진의 사망 이후 보도된 내용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된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한 사건은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국내언론도 중요한 뉴스로 취급하였으며,[10] 자연스럽게 국내에 남아있는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김좌진의 가족은 현재 길림성 모처에 있으며 칠십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우인 김동진 씨이다. 다만, 서울 시외 모처에 김좌진의 서자[11] 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12]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가 김두한의 거처가 서울 시외가 아닌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며, 취재를 했다. 이 결과가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이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어린 시절 사진이 실렸다.
“김좌진의 애첩이었던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에 대한 다른 소식들은 모두 잘못 전해진 것으로, 그들은 현재 개성에 있다. 김두한은 현재 개성 서본정(西本町) 254번지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머물고 있다.” (중략)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의 외할머니만 병들어 누워있었다." 『조선일보』1930년 3월 17일자)

나머지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에 몰락했다. 결국 집안이 파산하여 김계월은 15세 때(1916년)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이 무렵 김좌진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에 김계월을 서울에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이 때 김계월은 태중에 김두한을 가진 상태였다.

한편,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어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떠나면서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 딸을 낳으면 두옥이로 이름을 정하라 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치고, 김두한이 말한 자기 어머니 성씨가 실제와 다르다.

여기에 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은, 김두한이 당시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증언한 내용. 김두한은 회고록에서는 이후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신이 7살 되던 해에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증언할 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보다 나중의 육성증언인 '노변야화'에서 “8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 최문우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엔, 분명히 "12살 김두한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라고 했으니 일차적인 모순이 발생.

위의 두 의문점은 결국 어떤 기회주의자가 김좌진의 아들임을 사칭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생산해낸다. 사실 모든 의혹은 이 주장으로 모이긴 한다.

그런데 월간 말의 기사는 위의 모순점들이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래 내용은 월간 말에 인용되어 실렸던 것을 약간 편집한 것이다.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따라서 김두한이 자신이 6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잘못 기억하여 연도가 틀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이후의 사실까지도 연도가 죄다 실제와 다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김계월은 노모의 건강이 악화되고, 김좌진으로서도 김계월 일가를 보살피기에 벅찼기 때문에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가 대략 1926년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실천에 옮길 수도 없어 그저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결국 연고가 없어 알아볼 사람이 적은 개성으로 옮겨 기생 일을 다시 시작한 것. 그런데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기에 결국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기생 2명과 함께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이때 어린 김두한은 외조모 아래 개성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김계월은 이후 다시 더 북쪽의 홍원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결국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계월은 행방이 묘연하고 김두한과 외조모 둘만이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기생 첩 출신 어머니, 그리고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이국에서 독립운동 중인, 얼굴도 모르는 위대한 아버지. 이런 사실에 대해 김두한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당연히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 김두한이 기초적인 사실을 근거로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잔뜩 집어넣어 스스로를 높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김두한의 관련 증언들이 애매하고 사실관계가 다소 어긋나 있는 사실들은 모두 해명이 가능하며,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꾸며내었는지 또한 설명이 된다.

또한, 김두한의 자서전에 어머니 성씨가 엉뚱하게 기재된 것은 어머니가 일찌감치 집을 나가 버린 탓에 어린 김두한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또,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과정 중에 대필작가가 대충 기재한 내용일 가능성도 있다. 김두한 본인은 어느 정도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의 구술에 의존해서 대필되었을 것이며, 사후 검토나 퇴고 또한 이뤄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사실 이런 논의가 필요없는것이 김두한의 회고록은 김두한이 라디오 생방송에서 기억에 의존해서 떠벌린 내용은 문자화 한것이다. 김두한은 글을 읽을줄 몰랐던 사람이기에 뭐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바탕으로 주장한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더하여 몇 가지 의혹들이 더 있다.

4.6.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

사실 이런 논란이 객관적이거나 근거가 있다라기보다는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이것인데, 김을동이 정치계에 투신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된 것이다. 김을동의 아들인 송일국이 연예인이 되고, 그의 아들들 또한 인기를 끌고 2019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15] 김두한이 심지어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였다고 하기도 한다. 기사

그러나 이것 역시 과대포장인 것이, 김두한의 후손이 한 두명이 아니다. 김두한이든 누구든 자손이 많으면, 후손 간에 정치 성향이 다를 수 있다. 김좌진의 손자·손녀, 역사교과서 놓고 좌우로 갈려[16] 김을동씨가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의 정치인으로 활약했다면, 김두한의 아들이며 김을동의 이복동생인 김경민씨는 새누리당 반대쪽에서 활약하고 있다. 자손이 많다보면 각기 정치적 색깔이 다를 수 있으므로 비판할 대목이 있다면 그 개인들에게 하면 된다.

5. 그 외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

그 외에도 1942년에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작성해 경성지방법원에 보낸 문서(京鍾警高秘 제1721호)에도 김좌진을 김두한의 아버지로 쓰고 있고, 중외일보 1930년 5월 20일 기사에는 "수일전 계동(桂洞) 김병목(金炳穆)씨 집에서 고 김좌진(金佐鎭)씨 유고 두한(斗漢)소년의 장래교육을 위하야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더라" 운운하여 어린 시절부터 문중 차원에서도 김좌진아들이란 걸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 제국 경찰의 내부문서에서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해놓고 감시하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안동김씨 김좌진의 호적에 정식으로 올라갔으며, 김좌진 밑에서 같이 독립군 활동을 하던 지청천, 이범석 등이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말하면서 구명운동을 했다. 김구김좌진의 아들 김두한 군이라 지칭하면서 걱정해주었다. 김구도 거물이지만,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던 우익폭력계의 거물이고 이승만의 바로 아래급 거물이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폭력으로 김좌진 문중을 위협해서 호적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는 과거 김좌진의 측근들이 김두한보다 더 거물이었으므로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

그 외에 백범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의 글에서도 보인다.(1948년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김두한이 사망한 1970년대 이후

6.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

언론에 위연홍, 김장춘등 김좌진의 다른 유족이라는 사람들이 가끔 등장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건 그들이 실제로 김좌진의 유족이 맞고, 중국에서 100여년을 살아온 가족이라고 한다해도, 그들이 김두한 김철한 김을동이 가짜 자손인지 아닌지를 말할 근거는 없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그릇된 권위에 호소하기 (appeal to unqualified authority)에 가깝다. 김장춘이 김좌진을 진짜 자손이라는것의 증거도 없지만, 그들이 진짜 자손이라해도 한국에 있는 김두한 등이 가짜 자손인걸 알 방법이 없기때문이다. 왜냐하면 한국과 중국은 냉전시대를 거채서 거의 50년 이상 분리되었고, 김장춘의 경우 거의 100년 만에 한국과 제대로 접촉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김좌진이 한국에서 김두한이란 사생아를 낳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수가 없다. 즉, 위연홍과 김장춘은 따로 김두한 등에 대한 증거를 들고 있지 않았다. 막역하게 "김장춘이 김좌진의 진짜 자손이니, 가짜 자손 색출을 잘할거야"하는 생각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며, 다시 말하면 김장춘은 김좌진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므로, 김좌진의 다른 자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방법이 없다.

즉, 김장춘이 김좌진의 진짜 자손이건 아니건, 김을동을 가짜라고 말할 권위를 가진 전문가가 아니다. 김좌진에 대해서 평생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학술지에 김좌진의 혈통관련 논문을 제출해서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면 그 권위를 인정할만하다.
혹은 나혜국 처럼 김좌진의 부인으로 살다가, 이후 김두한이 안동김씨 족보에 올라오고, 김두한이 호적에 올라오는 과정을 실제로 지켜본 분이면 적어도 김두한의 혈통에 관해서 어느정도 주장에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근데, 위연홍이나, 김장춘은 실제로 김좌진의 자손인지 알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김두한 김철한 김을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수있는 어떤 근거도 없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의 증언에는 어떤 근거도 없음에도 마치 대단한 근거라도 있는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것이다.

한편 1989년, 김좌진의 딸이라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갑툭튀하면서, 위의 가짜설과 엮여 논란이 심화되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사실만을 간추리고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김좌진과의 관계를 주장한 사람은 김강석 이전에도 존재했다. 김좌진의 양자 김문한의 아들이라는 주장 기사에 따르면, 신뢰하기도 적고 사실이라 해도 김문한 자체는 일시적으로 장례 문제로 양자 취급한 조카이므로, 유족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김을동도 말했듯이 바로 유전자 검사뿐이다. 그런데 김강석 쪽과 김두한 쪽을 비교대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련성이 없다고 나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가짜라고 주장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따라서 제3의 유족이자 호적상으로나 기록상으로나 명백한 김좌진의 유족인 김두한의 남동생 김철한 쪽 유전자와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유전자 검사를 제의했고, 위연홍은 잠적해 버렸다는 김을동의 주장에 대해, 김철한 쪽에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즉, 사실상 김을동의 주장을 수긍한 셈.

그러나 사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나혜국이 이미 1986년 신문 인터뷰에서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라고 단정해서 말한 것을 고려할 때, 김철한이라고 생각이 달랐겠는가.

그리고 MBC에서 1990년에 방송한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는 김두한의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과 김철한을 찾아가 인사하며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만약 가짜라면 김두한 아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렇게 오래 된 가족처럼 맞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이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나혜국 - 김철한 쪽에서는 확실히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인정한다.

김두한은 김좌진 가문을 매수 혹은 협박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두한이 1970년대 말년에 병고에 시달릴때 의지할데도없이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하물려 김두한이 죽은뒤 10년도 훨씬 지난 80년대말이나 1990년대초까지도 김두한을 무서워한다는게 말이될까? 게다가 김두한 패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악했던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그 후손이다. 특히 나혜국은 일제강점기 김좌진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했고, 김좌진 사망 이후 일제치하 조선에 귀국한후 일제에 엄청나게 고초를 치렀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김좌진 가문을 협박했다는 주장도 엉터리이다.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가 해방 이후 거물인 이범석이며 나혜국과도 독립운동 동지이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김구와 함께 김두한 사형구형당시 구명운동을 한 인물이다. 김두한은 정치폭력배로 유명하지만, 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범석은 해방 이전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이었으며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즉,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으려고 협박을 할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게다가 백번양보해서 가령 김두한이 김좌진 유족들을 협박한게 맞다고 치더라도 자신들을 협박한 상대가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은 상대를 계속 두려워한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다.

여러 정황상 위연홍이 오히려 의문점이 더 많다.

6.1. 위연홍의 유전자 검사 제의는 김을동이 김좌진 손녀 맞다는 의미

위연홍 "내가 김좌진 후손임을 반드시 인정받겠다"(세계일보)는 기사에도 보이듯, 위연홍의 목표는 자신이 김좌진의 자손으로 인정받는게 목표였다. 김좌진 외손녀를 주장하는 사람이 쪽방집 전전(한겨레)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 "백야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라고 주장하는 위씨는 지난 해 보훈처에 '자신을 초청해 달라'고 민원을 제기해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는 당시 위씨가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중국 주변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초청했던 것으로 전해졌다."라고 하며, 보훈처에서 그 여성을 김좌진 후손으로 볼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기사들이 나올 당시가 2006년이고 이후 2007년 10월에 위연홍은 중국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송일국이 판사랑 결혼한 것은 2008년 3월이고, 김을동의 국회의원 당선은 2008년 4월이다. 즉, 김을동이 정치거물이어서 쫒아냈다는 주장은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어쨌거나 위연홍이 "김을동이 유전자 검사를 회피한다"는 주장을 한 사실이 있는데 이걸 가지고 위연홍이 "김을동이 김좌진의 친손녀가 아니다"라고 확대해석한 것은 음모론자들의 거짓말이다.

위연홍이 주장하는 유전자 검사는, 자신도 김좌진의 친손녀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김을동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자신과 비교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김을동이 김좌진의 친손녀가 맞다는 전제하에 성립할 수 있는 논리다. "김을동이 유전자 검사를 안 해줘서 내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억울하다."라는 식으로 언플을 했지 김을동이 김좌진의 손녀가 아니라고 지적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김좌진의 후손이 김을동만 있는 게 아닌데도 계속해서 김을동을 걸고 넘어지며 언플을 했는데, 이는 자신이 김좌진의 친손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김을동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언플이 실제로도 위연홍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쪽방집에서 전전한다는 식의 기사 때문인지 여러 루트로 후원을 받았다.

김두한의 김좌진 친자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위연홍이 김을동이 가짜인 걸 증언해 줄 증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20세기 초반에 중국에서 출생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게 위연홍이며, 그 동안 한국의 본가와도 어떤 식으로도 접촉이 없었다. 위연홍은 한국에 있는 김두한의 자손 중에서 꼭 찝어서 김을동이 가짜인 걸 알았을까? 그걸 알 방법은 사실 없다. 즉, 위연홍이 김을동의 가짜인지 진짜인지 증언해줄 어떤 명분이나 권위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실제로 위연홍은 김을동의 출생에 대해서 의혹 말한 적이 없다.
당시 위연홍 기사를 많이 써준것이 세계일보이며, 특정 기자가 거의 공개적으로 후원했다. [단독]쪽방 전전 장군의 외손녀고국의 손길은 따뜻했네 (세계일보)를 보면 홍성군, 우당기념관 등 여러 후원들이 쏟아지는상황이다. 놀랍게도 신문기사에 후원계좌번호까지 기재했을정도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이 세계일보였다. 이런 식으로 한국에 온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몇년 동안 여러 후원회를 통해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6.2. 김좌진의 후손을 자처하는 김장춘

2003년 시사잡지 말(잡지)에서 나온 기사에서 중국 길림성에 사는 김장춘은 김창규의 아들이고 김좌진의 친손자임을 자처하고있다. 이후 2007년과 2020년에 전재준에 의해 다시 문답을 했는데# 문제는 2007년 이후 김장춘의 말이 바뀌어서 자신은 김좌진의 증손자이며 김명환의 아들이다라고 정정했다. 증조부는 김좌진, 김좌진의 1남인 김창열, 김창열의 2남인 김명환의 아들이 본인 김장춘이라는 것이다.

핵심적인 주장은
  1. 본인은 김좌진, 오숙근 부부의 증손자이며, 자기 가족이 중국에 많이 살고있다.
  2. 김좌진과 오숙근의 무덤은 가짜이며, 우리 가족을 제외한 한국이나 중국의 김좌진 후손들, 즉, 김두한 김철한 위연홍 등 자손은 모두 가짜이다.
등이다.

이후 전재진은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라는 이름의 단체장이 되어서 2020년에 한국에 서울의 소리 유튜브 방송등에 출연, ''한국의 김좌진 자손은 모두 가짜이며 김장춘이 진짜 김좌진 자손'라고 주장했다#. 2021년 김을동과 김미경 고려대학교 교수 등이 대한독립운동사연구회의 학술대회에서#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의 전재준이 참석해서 김장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김을동과 김미경교수 등은 유전자 검사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후 유전자 검사를 위한 김장춘의 입국은 확인되지 않고, 위연홍 사건처럼 용두사미가 되는 듯하다. 그러나 인터넷과 각종 인터넷 검색등에 서울의 소리 방송 자료등이 남아서 마치 김좌진 장군의 자손이 나타난 대단한 증거라도 되는양 네티즌에게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는 중이다.

6.2.1. 확증편향에 가까운 이유

2020년 서울의소리 유튜브 방송의 제목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 진짜 후손이 증언한다.다. 이들은 방송제목에다가 김장춘이 김좌진의 진짜 후손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2007,2020 전재준과 김장춘의 문답을 보면 김장춘을 김좌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굳게 믿고 있다. 이후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의 전재진씨는 한국에서 대한독립운동사연구회 학술토론회참가해서 김장춘 주장을 발표하는 등 김장춘을 신뢰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김장춘이 김좌진의 증손자며, 다른 한국의 자손들이 모두 가짜라는 주장'에 대해서 이들이 꽤 많은 증거를 가진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가짜 자손이라고 믿는 비판의식을 그대로 갖고가면, 김장춘은 김좌진의 자손이라고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김장춘에게는 아예 단 하나의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 김장춘이 김좌진의 자손이라는 증거는 오직 김장춘과 그 이웃이 전해주는 사망한 김창규의 발언밖에 없다. 이미 수십년 전에 사망한 사람의 주장을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유의미한 증언이 아니다. 김장춘은 본인이 김좌진의 자손이라는 모든 이야기를 자신을 키워준 김창규가 말해준 것을 그대로 전한다는 입장이며, 이웃이나 지인의 증언 역시도 김창규에게 들었다는 것이므로, 모든 증거는 오직 김창규의 발언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김창규는 이미 수십년 전에 사망했으므로 김창규의 주장을 검증할 방법 자체가 없다.

김창규가 물려준 문서와 사진 등의 유품을 김좌진의 유물로 굳게 믿었는데, 김장춘은 한문을 읽을줄 몰라서 이 그 서류를 직접 읽지도 못했고, 그때 그 사진이 진짜 사진인지 확인한 것도 아니다. 그냥 큰 할아버지가 김좌진의 유물이라고 말하니 그냥 믿은 것뿐이다. 게다가 그 유물조차도 1989년에 도난당해버렸다고 한다.

더 기막힌것은 김장춘을 도와주는 문일범 등 지인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김장춘이 김좌진의 자손이라는것에 관한 증언을 문서로 작성해주거나,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들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김좌진을 만난 적도 없고 그들 역시 김찬규나 김장춘에게 전해들은 것이다. 즉, 증인이라고 데려온 사람들의 증언도 출처는 김창규인 것이다. [20] 김장춘의 가족이며 김좌진의 자손이라는 2남 3녀와 그 자식들은 김창규와 지내지 않았기에, 큰할아버지 김창규의 유언도 오직 김장춘만이 들었던 것이고, 김장춘의 가족과 친인척조차도 김좌진 관련해 잘 모른다고 한다.

결국 김창규가 한 발언을 김장춘이 듣고 말하는게 유일한 증거인셈이다. 사실 키워준 큰 할아버지의 유언을 개인적으로 믿는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 주장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킬때는 검증이 필요하다. 검증과정에 제시된 증거는, 오래 전 사망한 사람의 주장이 몇사람을 거쳐서 옮겨진 주장인데, 보통은 이런 증거만 가지고는 그 주장의 신뢰가 생기기 어렵다. 하지만, 이걸 굳게 믿고 한국까지 와서 학회에 참가해서 주장하는 것 자체가 확증편향에 가까워 보인다.
위 항목에 나온 주장은 사망한 큰아버지(김창규)의 유언이었다면, 지금부터 나오는 내용은 큰아버지(김창규)도 거론하지 않은 순수하게 김장춘 개인의 주장이다. 게다가 놀라운것은 도올 김용옥 이후로 여러번 등장한 혈통 음모론의 기존내용과 전혀 다른 새로운 주장이다.

2003년 말(지)의 김장춘 인터뷰에서 '김좌진과 오숙근이 2남 2녀를 낳았고 본인은 그 자손'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 이후 2007년에는 “중국에 오숙완의 묘가 있으면 한국의 묘는 가짜다.”" 우리 가족이외에의 자손은 모두 가짜"라는 주장을 하면서, “한국에 있는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의 후손들과 안동 김씨 가문을 뭐하는가”라며 비판했다.
그 주장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다.
1. 김좌진의 본처인 오숙완은 나(김장춘)의 증조할머니다. 일제시대 중국 온 이후 한번도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살다가 사망하셨다. 한국의 오숙근의 묘는 가짜이다. 오숙근이 한국으로 모셔갔다는 김좌진의 묘도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2. 김좌진은 오직 오숙근을 통해서 자녀를 둔것뿐이고, 오숙근의 자녀외에외 다른 자녀는 없다. 즉, 김두한 김철한 등도 가짜이고 위연홍 외손녀를 자처하는 자들도 모두 가짜이다.

1번 주장 자체는 오숙근이 진짜 김장춘의 할머니이고 중국에 묘가 있는게 사실이라면, 김장춘이 굳게 그렇게 믿는게 가능해보인다.그러나 김장춘이 2번 주장을 한다는건 굉장히 많은 조사이후에나 가능한일이다. 하지만 과연 김장춘은 그것에 대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찾아보면 근거랄수 있는게 없다.
그 주장을 보면
*문: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은 부인이 몇 분 된다는 점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김좌진 할아버지가 류망(流氓:정처없이 떠도는 유랑인, 바람둥이)이란 말입니까?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하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항일전투부대를 이끈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놈들한테 짓밟힌 나라를 구하려고 고향을 떠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북만주 일대에서 왜놈들을 잡던 분이신데 그런 큰 뜻을 가졌던 할아버지를 류망流氓 취급이라니요. 지금 한국에서는 오숙근 할머니 말고도 몇 사람을 더 할아버지 장군의 부인이라고 하는데 이거 제대로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주장하는 김좌진의 후손들이 진정한 후손이라면, 할아버지가 바람이나 피우던 그런 분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따지고 고쳐야지 서로가 머리를 들이대고 자기들이 후손이라는 것만 주장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아들처럼 키워주신 창규씨는 중국 땅에서 그 숱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장군의 후손이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습니다. 말을 하면 당장에 맞아 죽을 형세였거든요.
*문: 가족사에 대한 논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제가 가장 억울하고 분한 것은 오숙근 할머니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한국의 몇몇 사람들이 소문을 번졌다는 점이다. 할머니의 자식인 창규씨의 손에서 내가 자랐고, 해방 뒤에는 할머니는 큰아들과 함께 흑룡강성에서 이리저리 피신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자식을 낳지 못했다니 도대체 누가 이러는 건가? 김좌진의 고향이 있고 가문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김좌진 할아버지의 동생인 동진씨가 있고, 분명히 한국에는 그 후손이 살고 있을텐데 김좌진 장군이면 큰아버지인데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를 이렇게 욕되게 해도 가만히 있으니 그 사람들 그 가문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말이다.
2007,2020 김장춘과 전재준의 문답 내용

김장춘은 특별한 근거가 있어서 김두한(김을동), 김철한, 위연홍 등이 가짜라고 한 게 아니다. 그냥 "김좌진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므로,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러니 정실부인인 오숙근의 자손 이외에 다른 자손을 낳았다는 주장은, 우리 할아버지를 모욕하는 주장이다."라는 뜬금 주장을 했을 뿐이다.

요약하면 "(1) 오숙근 나혜국 김두한도 가짜이며, 안동 김씨와 김좌진의 동생 가문은 그들이 가짜인걸 알면서도 받아준거다. (2) 오숙근 나혜국 김두한도 가짜이며, 이범석 김구 그리고 오항선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그들이 가짜인걸 알면서도 그걸 말 안한거다."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서, 김장춘의 주장에 관한 2가지 큰 의문이 생긴다.
1.한국의 김두한 등 자손이 모두 가짜이고, 중국의 위연홍 등 자손도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김장춘이 단언할 근거가 있을까?
만약 중국에 진짜 오숙근의 묘가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한국의 오숙근 묘는 가짜라는 주장까지는 이해가 가능하다. 김두한과 김철한 등 한국의 자손들은 사실, 오숙근의 자손이 아닌 김계훨과 나혜국의 자손들이다. 위연홍 역시 오숙근의 자손이 아니다. 김장춘의 일가는 김좌진이 1930년에 사망하기 전에 태어났다는 2남 2녀의 자손이 지금까지 중국에서 산다면 거의 100년을 중국에서만 살아온 것이다. 김장춘은 1988년에 사망한 큰할아버지 김창규의 유언에 따라서 본인이 김좌진을 자손임을 알게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김창규가 김두한이 가짜라는 유언을 남긴것도 아니며, 김창규는 김두한이나 김을동 위연홍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오직 김장춘이 혼자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고, 그 근거는 "독립운동가인 김좌진은 바람둥이가 아니므로, 첩도 없고, 사생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수준의 주장을 진지하게 믿고, 가지고 한국에 와서 대학교수와 전직 국회의원 모아놓은 학술대회에서 전재준이 학술발표까지 했다.
장군의 증손자라 밝힌 김장춘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가 후손 행세”
논란의 발단은 충남 보령에 김좌진 장군과 합장된 부인의 묘가 오숙근 여사의 묘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발제 자료에서 본인을 김좌진 장군의 증손자라고 한 중국 길림성 거주 김장춘 씨는 “오숙근 할머니는 한국에 가지 못하고 두 아들과 손자와 만주에 머무르다 돌아가셨다”며 “김좌진의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가짜들이 진짜 행세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재진 사무총장은 중국에서 김장춘 씨 등을 인터뷰한 내용을 제시하며 △김좌진 장군 유해 홍성군 밀장 △오숙근 여사 1958년 사망, 김좌진 장군 유해와 보령으로 이전 합장 △김을동 나이 6세 때 촬영된 가족사진 등 오숙근 여사와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진 사망 장소‧연도 등이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대한독립운동사연구회 학술토론회

2020년 서울의소리 방송에서는 이범석 등 독립운동 동지들이 왜 가짜 오숙완이라걸 알텐데도, 말을 안하고 있다며 비판하는 주장을 했고, 김좌진의 또 다른 부인인 나혜국씨도 김두한과 손잡은 가짜라는 식의 주장을 했다.
2. 한국의 오숙근, 나혜국은 김두한보다도 더 명백하다.
본문에서도 잘 나오듯, 나혜국 여사는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인 ‘오항선’과 같이 독립운동을 한 진짜 독립운동가다. 이범석은 청산리 대첩 당시 김좌진의 부하이며, 해방정국에서 극우세력을 이끌며 사실상 김두한의 위에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의 국무총리국방부장관을 한 분이고, 안동 김씨도 만만한 가문이 아니다.

게다가 오숙근 여사는 1920년대 부터 서울 종로에서 거주했다. 오숙근의 친정은 경기도 안성의 오씨 집성촌 출신의 양반가이다#. 중국에서도 한때 김좌진과 같이 있었으니 독립운동 동지들과도 안면이 있으니 귀국한 이후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부터, 친정, 안동김씨 가문과 교류가 없을 수 없다. 특히 1947년 서울에서 김좌진의 공식 장례식이 있었다. 이때 오숙근, 나혜국, 김두한 등 모두 참석했고, 김구 선생이 추도문을 읽는등 독립운동가와 친인척이 모두 모이는 상황이다. 즉, 오숙근이나 나혜국이 가짜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히려 중국에 오숙근의 묘가 있다는 주장은 어떤 검증도 거치지 못했다.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의 전재진이 어떤 식의 검증을 거쳤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증거도 없이 김장춘의 말만 사실로 굳게 믿고 그걸 기반으로 모든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그릇된 권위에 호소하기 (appeal to unqualified authority)에 가깝다. 김장춘이 김좌진을 진짜 자손이라는 증거도 없지만, 진짜 자손이라해도 말이 안되는 것이, 김장춘이 김두한 등이 다른 자손이 가짜 자손인걸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김장춘은 한국 사정을 전혀 모르는 4대에 걸쳐서 중국에 거주한 한국계 중국인일 뿐이다. 막역하게 "김장춘이 김좌진의 진짜 자손이니, 가짜 자손 색출을 잘할거야"하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다.

김장춘은 김을동을 가짜라고 말할 권위를 가진 전문가가 아니다. 이것은 김용옥도 마찬가지인데, 김용옥은 교수이지만, 김좌진 관련 역사를 연구한 학자는 아니므로 김용옥의 주장에 권위는 없다. 물론 김용옥은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를 쓰기위해서 자료검토라도 했으니 아애 어떤 근거도 없는 김장춘보다는 낫다.

김장춘의 주장만으로는 김두한 등이 가짜라는 근거가 없으니, 서울의 소리와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의 전재준 등은 기존의 김두한 음모론을 덧붙혀서 이렇게 주장한다.
  1. 김두한의 출생 관련 증인들 모두 기생엄마를 둔 고아이며, 13살 꼬마거지 김두한에 그럴 듯하게 속아넘어간 사람들이다.
  2. 김두한 관련 모든 서류나 증거는 조선총독부나, 경찰, 언론, 한국정부가 모두 합심해서 조작한 것이다.
  3. "김두한의 출생이 거짓인 것을 김구, 이범석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안동 김씨 가문의 사람들은 분명히 알고있음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방조하고 있다."식의 입장을 견지한다.

김두한을 가짜라고 몰아붙히기 위해서, 김두한에 유리한 증거를 가짜증거라고 주장하는 식으로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반면, 김장춘은 아애 증거가 없다시피하는데도 이상하게 굳게 믿는것이다.
위에서 잘 나온대로 서울의소리와 전재준 등이 김두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그대로 김장춘에 대해서 적용한다면
  1. 김장춘의 출생과 관련하여 증언한 이웃들도 모두 김좌진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다. 김장춘 혹은 김창규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이다.
  2. 김장춘이 과거 소유했었다는 김좌진 관련 자료들은 현재 없으니 믿을 수 없다.
라고 하는게 맞다.

서울의소리와 전재규 등이 확증편향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는
  1. 김두한에 관련된 증언을 한 사람들은, 실제로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와 김좌진을 추격했던 일제 경찰, 김좌진의 친인척 등 김좌진을 실제로 접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증언도 안 믿는데, 김장춘이 김좌진의 자손이라고 증언을 한 이웃들은 김좌진과 오숙근을 단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임에도 그 증언을 믿는다.
  2. 김두한에 관련된 증거는 많이 존재함에도 믿지 않고, 김장춘의 증거는 모두 1989년에 분실했다데도 그 존재를 믿는 것이다.
  3. 김두한 관련해서, 안동 김씨 가문과 김철환 가족 등 친인척에 모두 김두한을 김좌진의 자손임을 증언한다. 하지만 김장춘을 따라 그 가족에 2일 동안 숙식을 한 기자에게, 김장춘의 가족들은 김좌진 관련 단 한마디도 인터뷰를 해주지 않고 헤어졌다.
  4. 김장춘은 김좌진의 다른 자손을 가짜라고 확신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김장춘은 김두한 등이 가짜 자손이라고 확신한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이렇게 믿도 끝도 없는 주장을 근거있다고 받아들이는것은 제대로된 판단이 아니다(잘못된 권위에 의한 호소)

이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떤 증거도 없다는것이 가장 크다. 2003년 말지에 따르면 증거를 제시못했고, 2007년의 전재진과의 조사과정에서도 오직 김장춘의 증언에만 의존하였다. 김장춘의 그 증언조차도 중간에 말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신뢰하는 이상한 믿음을 보여준다.
2003년 말지에서 인터뷰 할때는 김장춘 자신이 김좌진의 자손이라는 증거를 모두 하얼빈에 사는 이홍용이라는 학자에게 넘겨줬다고 하고, 그와 통화하였다. 당시 기자는 이홍용을 만나지 못하고 통화만 했는데, 이홍용은 김좌진의 문서가 맞는지 필적대조중이라는 대답을 했다[21]

그러나 2007년에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게 된다. 김좌진의 유품이 1989년에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김장춘은 본인이 김좌진의 자손인 걸 몰랐다가, 키워주던 김창규가 김좌진의 자손인 걸 알려주었고, 1988년에 김창규가 사망할때 유품으로 김좌진 관련 자료를 넘겨받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김좌진 관련 자료를 모두 문호갑이란 학자에게 넘겨주었다는데 문호갑은 1989년에 강용권에게 모두 넘겨주었는데, 이 자료를 돌려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김좌진 자손이라는 자료는 불과 1년만에 모두 없어진 해가 1989년이라는 것이다. 김좌진에 관한 일기장이며 자료들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그 당시에도 김좌진의 글이 맞는지 필적확인도 안된 상태였고, 현재는 그 자료도 없고, 그걸 읽어본 사람도 현재는 없으며, "나의 시아버지가 그 자료를 검토했었다" 수준의 증언밖에 없다.

김장춘의 말 바뀜을 요약하면
  1. 2003년 인터뷰에서는 현재 이홍용이란 학자가 그 김좌진 자료를 들고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후로 이홍용과 그 자료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2. 그러나 출생 관련 정신 자료로 제출된 2007년 문답에서, 김장춘은 1989년에 강용권이 김좌진 관련 모든 자료를 들고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 말대로면 2003년에 이홍용이 갖고 있는 자료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3. 어쨌든 김장춘이 김좌진의 자손임을 증명한다는 자료가 실제로 존재하긴 했는지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설령 그 자료가 존재했을 수도 있고, 자료 자체는 존재했으나 김좌진과 무관한 자료였을 수도 있고, 애초에 자료 자체가 없었을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이야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장춘의 말만 믿고 그 당시 이런 자료가 존재했다고 굳게 믿는 확증편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6.2.1.1. 김좌진의 5명의 부인, 그리고 아동성애 논란
2020년 서울의 소리 유튜브에 김좌진의 증손자라고 자처하는 김장춘에 관련 영상이 올라간 이후 이후 국내에서 각종 유튜브 혹은 기사 댓글에서 흔히 발견할 수있는 댓글을 보면 "김좌진이 로리타 취향이냐, 부인이 10살, 8살 말이 되냐"하는 주장이 흔히 나온다.
2001년 7 월 충남 홍성군이 발행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전기"에서 밝힌 장군의 부인들을 살펴보면 김계월은 생몰 기록이 없으나 조사자들에 따르면 당시 13세였고, 이복희는 1910년생으로 당시 9세, 김영숙은 1919년생으로 당시 8세였으므로 장군의 부인이라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나혜국은 당시 여동생 나혜정과 함께 일제특무(첩보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여자였기 때문에 이 또한 항일전투에 전념하시던 장군의 부인이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보배드림 이토랜드 등 인터넷 사이트

이런 주장의 원류는 바로 김좌진의 증손자를 자처하는 김장춘을 옹호하는 김좌진역사정립회의 글에서 출발한다. #
결론
1. 이복희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김좌진의 민족사상적, 도덕적, 북로군정서 군기감찰 등으로 보아 설득력이 없다. 9살에 임신하여 10살에 피살당하여 (중략) 그러므로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볼 수 없다.
2. 김영숙
8살에 임신하여 9살에 출산했다는 것은 세계 기네스북에도 없는 것 같다. 하여튼 이같은 국내기록은 없다. 있다 해도 김좌진의 신민부 군기감찰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후음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김영숙은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볼 수 없다.
3. 나혜국
(중략) ⑷조선일보 보도기사와 홍성군 발행 책을 살펴보면 나혜국은 1929년 한 해에 두 번 출산한 것으로 분석되는 바 이는 좀 더 명확한 조사를 필요로 하며, 나혜국 자신이 밀정이기에 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생략)
김좌진의 오숙근 외 4명의 부인설은 우매의 극치(김장춘 옹호하는 김좌진 역사 정립회의 주장)

이 글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전기라는 책에 나오는 김좌진 부인이 5명이라는 주장을 김좌진역사정립회에서 비판한 것인데, 이 책은 김좌진의 고향 홍성군에서 2001년에 발간한 책이다. 말이 전기이지 김두한 관련 자료를 모은건 사실이지만, 상당수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쓴 김좌진이 주인공인 역사소설이다.

문제의 책은 일례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막 사관연성소 정문 앞을 나서는데, 소복(素服) 차림의 한 여인이 김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그런데 김좌진이 새옷을 사 들고 숙소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막 목욕을 끝낸 듯한 이복희가 놀랍게도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나체(裸體)로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갓 스무살 처녀의 탄력적인 몸매와 매끄러운 피부를 보자 김좌진은 자신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장군님, 부디 저를 안아주세요.” 이복희는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사내의 본능을 자극했다

김장춘이 2007년 연변대학교에서 증언할 당시에는 “내 증조할머니 오숙근 이외에는 김좌진의 부인은 모두 가짜다.”[22]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에는 아애 근거가 없었다. 이후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거창한 이름의 단체가 만들어진 이후에 김장춘을 돕고, 그 주장을 근거를 마련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대략 2021년쯤에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전기≫라는 책에 나오는 '김좌진 부인 5명'이라는 내용을 비판하는 내용인 김좌진의 오숙근 외 4명의 부인설은 우매의 극치라는 글이 만들어졌고 이후 '서울의 소리'방송에 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에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전기≫라는 책을 비판 소재로 택한 이유가 아주 간단한데, 부인이 5명이라는 주장을 한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김장춘이 자신의 증조할머니 오숙근 이외에 김좌진 부인은 모두 가짜라는 주장을 했지만, 아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김장춘 주장을 뒷받침 하기위해서는 단순히 김두한과 그 어머니 김계월만 비판하는 것 뿐 아니라, 나혜국이나 위연홍 등도 모두 비판해야했는데, 부인 5명을 소개한 유일한 책인 김좌진 전기를 찾았고, 이 책을 반박하는것으로 김기춘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김좌진 전기를 비판한다고 해서 김좌진의 다른 부인이 가짜라는 증거는 전혀 아니므로 역사 관련해서 아마추어 수준의 증거일뿐이다.[23]]

이복희, 김영숙의 경우는 한국의 다른 김좌진 연구에선 잘 거론되지도 않는 인물이다. [24] 즉, "김좌진 부인이 5명이다"라는 주장은 대한민국의 김좌진 관련 일반적인 주장이 아닌, 오직 이 책만의 주장일 뿐이고, 대한민국 내 김좌진 연구의 주류와 아무 관련없다. 이 책의 내용을 반박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김좌진 연구를 비판하는 게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장춘을 옹호하는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에서는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소설을 자세히 분석해 "김좌진 전기에는 김좌진의 부인과 관련 묘사가 모순이 있다."라는 주장을 했고, 거기까지는 일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장을 확장에서 "이 책을 근거로 보면, 현실에서 김좌진 부인은 오숙근 이외에는 모두 가짜이다”라는 황당한 비판을 하고 있다. 김좌진 전기는 애초에 역사소설이므로 팩트가 좀 틀릴수있다. 게다가 김두한 전기는 현실의 김좌진 김두한과는 아애 무관할뿐더라,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홍성군의 책일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들어보자면, 이 책에서 소설부분이 지나서 462~465페이지 요약부분에서 편집오류가 보인다.
<장군의 모시던 부인들>이랑 항목에서 오숙근(198~1958)과 김계월이 나오고
<이복희 여사(1910~1920?)>
(생략) 20세의 이복희가 살림을 꾸려나가자니 고충이 많았지만 (이후생략)
이 나온다
<김영숙 (1919~1928) 여사>
(생략) 18세 꽃다운 처녀의 몸으로 중국인 지주에게 팔려가는 (중략) 김장군이 그녀를 구하고 뒤를 봐주다가 사랑이 싹텄다 (이후생략)

괄호속에 들어간 부분만 보면 (1910~1920?)(1919~1928) 마치 만 10세, 9세에 사망했다고 쓴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이복희와 김영숙의 실제 나이가 20세, 18세로 적혀있다. 이 나이면 당시에는 결혼 임신 출산이 가능한 나이 맞다. (1900~1920?)(1909~1928)로 적었어야할것은 편집자가 실수로 숫자를 잘못 입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분을 큰 문제라도 되는양 꼬투리를 잡고 '"김영숙 8살에 임신하여 9살에 출산했다는 것은 세계 기네스북에도 없는 것 같다."식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런 자극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네티즌에게는 인상깊은지, 2024년 현재까지도 인터넷과 유튜브에 "김좌진 장군이 로리콘이란 말이냐"라는 댓글이 많이 달린다. 물론 책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거야 있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여기서 더욱 진행해, 결국 이 책의 오류는 곧 현실에서 이복희와 김영숙은 김좌진의 부인이 아니라는 증거이다.까지 주장이 확장된다.

또 나혜국 여사에 대한 기술도 엉터리 부분이 있는데, ‘1929년 첫 애를 낳고 9개월만에 둘째 애를 낳았다'는 것처럼 잘못 기술되어 있다. 김좌진역사정립회의 글에서는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나혜국도 가짜이다."라는 황당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애초에 그 책 저자의 잘못으로 엉터리 기술을 한 것 뿐이며, 실제로는 나혜국여사의 두 아이는 9개월 차이가 아니라 실제로는 3살차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이 책의 저자와 편집자가 편집실수를 했다고 해도, 현실의 나혜국 여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또 김두한의 어머니로 알려진 김계월에 대해서 책에 편집실수를 찾아내지 못했는지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4. 김계월
⑴1917년 9월 10일 서울 종로 계동 최부잣집 기습사건은 좀 더 명확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당시 대한광복회에서 일제경찰이 깔려있는 종로 한 복판에서 군자금을 강모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⑵이미 1917년 8월에 김좌진은 대한광복회 길림지부 부사령으로 파견되어 9월 10일에는 서울에 없었다. 그러므로 김좌진과 김계월의 “한 달 동거라든가 3개월 처가살이”라는 홍성군의 역사기록은 완전 개차반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서울 종로 계동 최부잣집 기습사건’은 김좌진 전기에 묘사된 사건으로 서울의 최부잣집에 군자금 모금하러갔다가 일본 경찰에 쫒겨서 김두한의 모친인 김계월의 집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사실 한국의 김좌진 관련 연구에서 정설로 취급받는게 아니라 그냥 저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일뿐이다. 그럼에도 정립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최부잣집 기습사건은 좀 더 명확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소설에 들어간 픽션일뿐인데, 마치 대한민국 김좌진 학계의 잘못된 정설처럼 착각하는것이다. [25] 마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작가가 창작한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을 검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과 비슷하다. 픽션은 픽션일뿐인데 말이다.

어쨌든 정립회는 이 내용을 거짓이므로 김계월은 김좌진의 부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서울 종로 계동 최부잣집 기습사건’은 저 책의 저자가 수록한 것이며, 그게 한국의 김좌진 연구의 정설은 아니다. 김좌진과 김계월이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주장이 여럿이어서, 어느것이 정설인지 알 수 없다. 김좌진이 김계월과 3개월 동거설에 6개월을 동거했다는 설도있고, 그 외에 1930년대 신문기사에는 김좌진이 서울에서 부인과 머물다가 기생 김계월과 사랑하게 되어 아이를 가지게 된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걸 비판한다고 김계월이 진짜 부인이 아니란 증거는 되지 않는다.

2. “(1917년에) 종로 한복판에 군자금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주장자체가 코미디인 것이, 김좌진은 1911년에 이미 서울 종로의 김종근에 독립군 자금 모금하러갔다가 밀고되어 2년 6월 옥살이는 했던 적이 있다.

3. 김좌진이 1917년 대한광복회에서 만주길림지구 부사령을 파견된건 여러 연구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1917년 8월’이라는 건 정립협회에 주장일 뿐이고, 다른 연구에 의하면 8월에 서울에 있었고, 9월에 출발했다고 한다. 대한광복회는 김좌진을 만주 부사령으로 임명했고, 1917년 음력 8월 16일 김좌진은 서울 종로 인사동 광복회 조직원 기생 어재하(魚在河)의 집에서 송별회를 갖고(울산포스트 2007.08.17), 1917년 9월에 서울에서 경의선을 타고 하루만에 봉황성을 거쳐 만주에 도착했다.(박영석, 백야 김좌진 연구, 국사관논총 제51집 ) 당시 기차로 신의주에서 봉천(심양)까지는 6시간 걸렸다. 실제로 김두한이 자서전에 나온 출생일은 1918년 음력 5월 15일(양력으로는 6월 28일)이며, 1917년 9월경이 임신했다면 출산일이 그 정도가 맞다.

그 이외에 나혜국 여사와 그 여동생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식의 주장은 정설이 아니라 김장춘 관련 인사들이 일방적인 주장일뿐이며 실상은 독립 독립운동가로써 건국훈장 애국장(1990)을 받으신 오항선과 협력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분이다.

김좌진 정립협회는 김좌진에 대한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아마추어 수준의 주장을 하는 셈이다. 그런 아마추어 수준의 주장이, 무슨 근거라도 있는양 인터넷에 퍼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6.2.2. 김장춘의 말바꾸기

김장춘은 2003년 찾아온 한국인 기자 앞에서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했고, 2007년 중국 연변대학의 연구실에서 전재준이란 사람과 문답을 햇는데 이때 꽤 많은 부분이 달라진 답변을 하게 된다.

물론 김두한의 자서전에서도 팩트가 틀린 기술이 많고, 모순도 있다. 개인의 주장을 오류가 생길수 있고, 당연히 김장춘의 발언에서도 자체 모순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김두한의 자서전은 자기의 출생을 증명하는 목적이 아닌 자화자찬의 목적일 뿐이고, 김두한의 출생은 자서전이 아닌 다른 많은 증거들로 증명된 것이다. 반면, 김장춘을 굳게 믿는 사람들의 근거는 오직 김장춘의 주장 뿐인데, 김장춘의 "자신이 김좌진 자손이라며 인터뷰한 발언" 그 주장조차 시간에 따라 중대한 내용이 바뀐다면, 그 믿음의 근거는 없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서울의 소리'등에서 김두한의 자서전의 오류를 김두한이 가짜라는 핵심 증거로 제시하는 수준의 논리로 보면, 당연히 김장춘의 이런 말바꾸기도 김장춘이 가짜라는 중요 근거로 삼아야한다.

1. 위에서도 소개된 자료 관련 주장의 변화
2007년 인터뷰에서는 1989년 모든 자료를 강용권이 들고 사라졌다고 말했는데, 2003년 인터뷰에서는 현재 이홍용이란 학자가 그 자료를 들고있다고 말한다. 2003년까지는 기자가 김좌진 친필등의 자료를 김장춘이 아직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근데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한 조사를 위해서 문답을 한 2007년에는 갑자기 말이 바뀌면서 모든 자료가 1989년에 사라진 것으로 바뀌었다.

2. 혈통관련 주장
인터넷에선 김장춘의 형제 자매는 나오지 않고, 오직 김장춘의 인터뷰만이 자료로 돌아다닌다. 하지만, 김장춘의 주장대로면 김좌진과 오숙근의 자손들은 중국에 살아남아있으며, 기자가 그 집안 사람들을 만나서 2일 숙박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장춘을 제외한 가족 누구도 한국어를 모를 뿐더러, 김좌진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김장춘 이외에 다른 가족들이 스스로 김좌진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식의 발언도 소개 된 바가 없고, 오직 김장춘 홀로 김좌진이 조상이라는 주장하는 것이다. [26]

이 부분에서도 김장춘의 말바꾸기가 꽤 의미심장하다. 2003년 인터뷰를 보면 김좌진의 자손들은 모두 죽었고, 본인 김장춘이 유일한 혈육인양 이야기했다. 특히 큰아버지 김창렬의 자손들은 다 죽었고 사촌 김명환도 죽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2007년 문답에서는 자신이 김창열의 손자이고. 김명환의 자식이며 김명환의 자녀들과 가족이 다수 생존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2003년 말지 인터뷰) "혈육이라곤 저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큰 아버지인 김창렬 그분은 해방 뒤 정치투쟁 당시에 처형당했다고 하는데 자식이 넷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족이 흑룡강성 이춘에 살았는데 다 죽고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 김명환이라고 하는 사촌형님은 어렸을 때 함께 생활해서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2007년 문답)#
*문: (아버지) 김명환씨의 직계 자손은 어떻게 됩니까?
*답: 3남 2녀로 5남매입니다.
*문: 위로부터 이름을 다 불러주십시오. 한자로도 써 보십시오.
*답: 위로부터 김지강(金志剛, 男), 본인(金長春, 男), 김취(金翠, 女), 김려(金丽, 女), 김지봉(金志鋒, 男)입니다.
*문: 형제들이 모두 결혼을 했습니까?
*답: 다들 결혼했습니다.
*문: 명환씨는 언제 별세하였나요? 생모되시는 명환씨의 부인은 생존해 계십니까?
*답: 명환씨는 세상을 떠났고 생모는 현재 이춘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크게 말이 바뀐 부분은
1. 김창렬은 큰 아버지, 김명환은 사촌형님 -> 김창렬은 친할아버지, 김명환은 친아버지
2. 김창렬의 가족은 다죽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 김창렬 가족중 김명환의 자녀만봐도 5남매가 다 생존하고 있다.
3. 김명환이라고하는 사촌형님은 어렸을때 함께 생활해서 기억이 선하다.-> 김명환은 친아버지이며, 어릴때 김장춘본인이 김창규에 맡겨져서 같이 생활한적이 별로 없고 주장으로 바뀜.

2003년에는 김좌진의 자손이 모두 죽고, 본인 김장춘이 김좌진의 유일한 자손이라고 주장했지만, 2007년이 되니 여러 형제가 멀쩡히 살아있다고 말이 바뀌면서, 가족을 소개해준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장황하게 변명하긴한다.
*문: 창규씨는 왜 한 달도 안 된 조카의 아들을 데려갔습니까? 가능하다면 배경부터 상세히 말해주십시오.
답: 그러니까 형인 창렬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 남은 아들을 동생에게 부탁하였지요. 그런데 조카 명환을 그만 잃어버렸답니다. 그때 당시는 상당히 어두운 세상이였지요. 창규씨는 형의 부탁을 받들지 못할까 하여 흑룡강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조카를 찾았는데 바로 찾은 당시가 제가 태어난 지 석 달이 채 안 된 때였답니다. 그때까지 명환씨는 이름을 바꾸면서 가명을 써 왔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웠답니다. 그런데 창규씨 친구의 제보로 찾게 된 것입니다. 조카 명환을 만나고 보니 공청당서기로 열렬하게 일하고 있고, 저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한족이라서 한국말을 못하니까 창규씨는 저를 가문의 후대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명환의 승낙으로 저와 형인 지강을 데리고 창규씨가 집으로 데려갔답니다.
*문: 두 형제가 창규씨 집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는데 몇 살까지 같이 살았습니까?
*답: 형 지강은 일곱 살이 되면서 학교에 입학해야겠기에 다시 명환씨 집으로 보냈고 저는 계속 창규씨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문: 왜 동생인 진술인을 계속 남겨 두었나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나중에 동네 어른들한테 들은 얘긴데요 제가 형보다 야무졌다는 것입니다. 창규씨로서는 저한테서 김좌진의 핏줄다운 점을 발견했다는 얘기를 자주 했답니다.
*문: 몇 살 때까지 창규씨 댁에서 살았습니까?
*답: 제가 12살인가 13살 무렵에 명환씨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로서는 명환씨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기에 다시 창규씨 집으로 가서 창규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문: 그래서 사실상 진술인에게는 키워준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것인데요. 맞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나를 키워준 분이 더 은혜가 크기 때문에 또 처음부터 아예 아버지로 알고 부르며 자랐기 때문에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문: 좋습니다. 그런데 명환씨가 진술인을 왜 가까이 하지 않았을까요.
*답: 그것은요. 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문: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답: 할아버지의 나라가 해방된 뒤로부터 우리 가족은 끊임없는 추격을 당합니다. 할아버지인 김좌진이 암살당하셨는데 아마 그때부터 왜놈 앞잡이들이 우리 가족을 추적했을 것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일이잖아요. 실제로 김좌진의 맏아들 창렬은 47년도에 피살되었습니다. 토지개혁 심판대에서 몽둥이로 맞아 공개 살해된 것이지요. 그걸 할머니와 창규와 오춘택씨가 현장에서 목격했답니다. 그리고 창렬씨의 큰아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고, 그 해에 오숙근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문: 가정형편이 어려웠을텐데 생계수단은 어떠했습니까?
*답: 내가 이춘시 난차취에서 태어나 목단강에서 살다가 왕청현으로 이사했을 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 창규씨도 나이가 많아 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 돕고 그랬죠. 옥수수, 감자, 콩 농사지어 먹고 살 때였습니다. 그때는 농사도 개인이 아니고 공동으로 하는 집체농사였지요.

2003년 인터뷰에서는 모두 사망했다는 가족이 2007년 문답에서는 대가족으로 잘 살고 있다. 문제는 기자가 와서 1박2일 지내면서도 김좌진 관련 발언을 일절 하지 않았으며, 중국인으로 잘 살고 있다. 이 부분도 의심스러운 것이 김장춘이 김좌진 후손 맞는지 조사하던 전재준에게, 김장춘이 자신의 형제를 소개시켜준 과정인데, 김장춘이 적극적으로 자기 형제와 전재준 사이에서 통역해주며 김좌진 관련 이야기를 조사하도록 해줬야하는데 전재준은 다른 증인들을 만났을때는 각종 김좌진 관련 증언을 기록했지만, 그 김명환의 가족은 2일동안 김좌진 관련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헤어졌고, 결국 김좌진 관련 질문하나도 가족들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만남을 끝냈다고 한다. 즉, 2007년에 김명환의 가족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진짜 김명환의 가족이 맞는지, 그들이 김좌진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단 한마디의 증언도 전해진 게 없다.

그런데 2020년의 문호갑의 아들 문일범의 증언에서도 김명환과 김장춘의 관계에 대한 의문스러운 대목이 나온다. 김장춘에 관한 2003년, 2007년, 2020년 기록 모두 혈통 오류가 나오고, 특히 김장춘 혼자의 말 실수가 아니라, 제3자인 문일범의 증언에서도 혈통관련 오류가 나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1989년 김좌진 관련 유물을 잠시 보관하다가 모두 잃어버렸다는 문호갑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그는 2007년에 전재진 앞에서 증언을 했고, 2020년 이후 한국의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 전재진씨에게 자술서를 보내서 김기춘에 대해 증언한다.
*문일범: 아버님은 (중략) 향토사에 관심이 많으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는(1992년) 김좌진장군에 대해 김장춘씨와 각별히 논의하셨습니다. 장춘씨가 저희 아버지 양자로 들어와 같이 살기까지 했거든요.
2007년 김좌진역사정립회 증언자료

김장춘이 1959년생이니, 문호갑을 처음 만난 건 1988년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키워준 아버지 김창규가 사망한 게 1988년이니 김창규와 문호갑은 아슬아슬하게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나이 29세에 처음 만났고, 1989년에 바로 김좌진 자료를 넘겼는데, 4년만인 1992년에 문호갑이 사망했다. 29세 수도국에서 일하는 공무원 청년이 60세 넘는 노인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양자로 들어와 살았다는 이야기다.

김장춘은 결국 친아버지가 따로 있고, 큰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다가 1988년에 사망하자마자, 또 양아버지가 생겼다고 이해하면 되지만, 하지만, 김장춘의 주장대로면 인민군에 복무하고, 흑룡강성에서 수도국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키워준 아버지가 죽자마자 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같이 살았다는 것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어쨌든 1988년에서 1992년 사이에 김장춘이 문호갑의 집에서 양자로 살았고, 문일범과 그 부인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김장춘의 말을 선해하자면 '의부'로 모시는 수준으로 했다고 이해하면 가능은 하다.

그러나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2020년의 문일범이 쓴 자술서이다.
나는 김장춘이 김좌진장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20년 전부터 부친 문호갑한테서 듣고 부친이 수집한 김좌진장군의 역사재료를 보고 확신하였다.
(중략) 부친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항일에 참가한 노인들을 찾고 북경도서관, 북경역사연구소 재료실도 가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장군의 친손자 김명환이 있는 흑룡강성 이춘에서 이틀을 묶으며 장군과 후손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조사하였다. (중략) 그 후부터 유관인원을 찾고, 자료수집하고, 자료정리하는 일이 일상으로 되었다.
자료수집 가운데서 김좌진장군의 후손이 왕청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말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의심을 품고 김장춘을 찾아갔었다. 그때는 1988년도였다. 만나고 보니 정말 김장군의 후손이었다. 첫째 김장군을 꼭 닮았다. 둘째 김장군의 이야기를 할라치면 말이 술술 나왔다. 셋째 김장춘은 그때 벌써 김장군이 주둔하고 있던 곳과 전투하던 곳을 다 돌아보았다. 가까운 곳은 몇십번도 더 가보았다. 넷째 제일 중요한 것은 김장군의 유물이 있었다. 김장군의 둘째 아들 김창규(양아버지)에서 물려받은 유물로는 장군의 가족사진, 장군이 말타고 찍은 사진, 장군이 부인과 같이 말타고 찍은 사진, 부대원들과 찍은 사진 등 10여장이 있었다. 그리고 장군의 크고 작은 군사일기책(8권 분량), 군사작전지도, 또 다른 지도 2장, 김창규 일기장 등이다.[그림1]
1989년 김장춘은 김장군의 유물을 부친 문호갑에게 제공하였다. 부친께서는 이런 재료를 다 분석하고 북로군정서 자리와 청산리 전투지를 돌아보시고 이제 장춘이는 김좌진장군의 후손임이 입증됐다. 이제 한국에 가면 된다. 내가 자료를 다 들고 같이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1990년 연변역사연구소 직원인 강용권이 몽땅 가져갔다.
중국 길림성 왕청현에서 문일범씨가 한국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에 보내온 자술서.

2021년 전재진이 한국까지 와서 대한독립운동사연구회 학술토론회참가해서 김장춘 주장을 발표할때 들고온 자료이다.

놀랍게도 문호갑이 김좌진에 대해서 연구할 때, 여러 곳을 다니다가, 김좌진의 손자 김명환이 있는 흑룡강성 이춘에서 이틀 묵으면서 상세하게 조사한 그 이후에, 다시 흑룡강성 왕청에 김좌진 후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김장춘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이상한것은, 친아버지 김명환에게 김장춘 이야기를 듣고찾아간게 아니라 소문을 듣고찾아갔다는 대목이다. 그 이후 김좌진 자손임을 의심해서 여러가지 테스트를 한 이후에 김좌진 장군의 후손임을 믿었다고 한다.

즉, 자술서 대로면 문호갑은 1988년 이전에 김명환 가족을 만난 이후에도, 김장춘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못들었던것으로 볼수있다. 다시말하면 당시 김명환일가가 김장춘의 존재를 몰랐던것으로 볼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장춘의 증언에 따르면 김명환과 그 부인과 자손은 오랜기간 이춘에서 거주했고, 김장춘과도 계속 교류했다는것이 김장춘의 주장인데, 결국 이런 김장춘의 주장이 이 자술서와 배치된다.
게다가 저 자술서를 작성할 2020년인데, 자술서 작성 시점까지도 문일범은 김장춘이 김명환의 아들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의심된다. 아버지의 양아들이면, 형제같은 관계인데 말이다.

근데, 위에서 혈통 관련 김장춘의 말바꾸기때문에, 김장춘이 김명환의 친아들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있는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 문일범의 주장으로 혈통에 대한 의혹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2003년 인터뷰 당시에는 "큰아버지인 김창렬 그분은 해방 뒤 정치투쟁 당시에 처형당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2007년, 2020년 인터뷰에선 자기 할아버지인 김창렬이 (1947년 중국 흑룡강성에서)일본 돈을 받는 조선인 밀정 에 의해서 토지조사 인민재판에서 맞아죽으며 "중국 공산당의 책임은 아니고, 대한민국의 책임이다. 라고 묘하게 말이 바뀐다.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인민재판을 당한 것을 "정치투쟁 당시에 처형"이라고 묘사하다 갑자기 일본 밀정의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공격이며, 중국공산당이 그럴리 없다며 대한민국의 잘못이다.라며 프레임이 바꾼 것이다.

6.2.3. 중국공산당 옹호와 대한민국 비판

김장춘의 주장 중에서 가장 의아한 것은 김장춘의 가족이 20세기 내내 수난을 당했고, 특히 일제가 패망한 1945년 이후에 중국에서 계속 살해당하고 쫒겨다녔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중국공산당의 잘못은 절대 아니고, 모두 대한민국의 잘못이라며, 인터뷰 내내 대한민국을 질책하는 황당한 인터뷰를 되풀이 한다.
(김좌진 암살에 대한 김장춘의 입장) 나를 길러주신 창규씨는 내게 말하기를 할아버지는 “일본인 앞잡이나 일본놈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총을 쐈다. 중국공산당이 그럴 리 없다.
(할아버지 김창렬이 중국공산당 토지개혁심판대에서 맞아죽은 사건에 대한 김장춘의 입장) 답: 창렬이 죽게 된 것은 토지개혁심판대이기는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아니고 일본 밀정인 조선인이었다고 창규가 여러 번 말했다.
2007,2020 김장춘과 전재준의 문답 내용
2003년 기자가 김장춘의 집에 찾아가서 인터뷰할때는 이런 주장이 없었으나 2007년 연변대학교에서 문답을 할때는 갑자기 김좌진의 후손들이 왜놈 앞잡이 세력에 살해되고 쫒겼다녔으며 (그것에 중국공산당은 어떤 책임도 없으며,) 대한민국의 잘못이다이라는 주장이 여러번 되풀이된다. 일본 앞잡이들의 그 추적은 1945년부터 1988년까지도 이어졌고, 김장춘은 자신의 가족을 쫒는 자들을일본 돈을받은 조선인 밀정,'왜놈 앞잡이등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이것에 대해서 4가지 정도의 견해가 있다.
  1. 혈통에 대해서 말이 바뀐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
  2. 2003년까지 김장춘 일가가 전혀 한국에 접촉하려고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변명
  3. 김장춘의 친인척이 많이 살아남아있음에도 오직 김장춘만이 김좌진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는 것
    생각해야할 것은 2003년 한국인 기자 앞에서 개인적으로 한 답변과 2007년 연변대학 등 중국에서 공식적인 조사할 때 주장이 상당히 달라진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런 이유때문에
    4. 김장춘은 전직 중국 공무원이라,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할수 없는 입장이라, 공산당 비판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대한민국 탓을 하는 식의 친일파 관련 주장을 꺼낸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1. 혈통에 대해 말바뀐것에 대한 변명으로 생각할수 있다.
김장춘은 2003년 인터뷰에서 김명환이라고 하는 사촌형님은 어렸을 때 함께 생활해서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라고 말하다가 2007년 갑자기 김명환이 자기 친아버지라고 말이 바뀐다. 이때 이걸 해명하기 위한 논리는, 본인은 김명환의 3남 2녀중 2남인데, '''자신의 가문이 끊임없이 왜놈 앞잡이 세력에 쫒겼기에 친아버지인 김명환이 김장춘을 보호하기위해서, 큰 할아버지인 김창규에게 맡겨서 자라게 했다는 것이다. [27] 김장춘이 태어난 해가 1959년이고 이후 60~70년대에 김창규 밑에서 자랐고, 이후 80년대 이후 성인이 되고나서도 김창규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근데 아버지 김명환에 대한 서술을 보면 "공청당 서기로 열렬하게 일하고 있고, 저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한족이라서 한국말을 못하니까"라고 하는데. '공청당'은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으로 중국의 정치 세력중 최고의 엘리트 코스이다. 후진타오, 리커창등을 배출한 중국의 최고의 엘리트 세력이다. 비록 공청당이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제대로 활동을 못하게 했으니, 김명환의 위세가 1960~70년대에는 약했다고 해도, 문혁이라는 중국 역사상 거대한 숙청과 학살이 벌어지는 그 시기까지도 일본 돈을 받은 왜놈 앞잡이들이 큰 세력을 유지하면서 공청당 인사를 위협하는게 가능했을까?

애초에 중국 공산당이 만주와 흑룡강성 일대를 장악하던 1946년 이후부터 조선족 왜놈 앞잡이 세력을 제대로 유지하기란 힘들다. 만약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국 본토를 장악했던 일본군이 물러나고 만주국도 사라진 이후에 거대한 숙청을 다해서, 중국 내부에서 중국국민당뿐 아니라, 각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세력부터, 친일 세력까지 1940~50년대에 철저하게 숙청되었다.


일본 밀정들이 1947년 공산당에서 진행하는 인민재판에 영향을 줘서 김좌진의 아들을 지목해서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하는데, 1947년에 일본 돈을 받은 왜놈세력이 그 정도 힘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당장 토지개혁 과정에서 김좌진의 아들이 맞아죽었다는 주장대로면, 반동분자인 왜놈 앞잡이 조선인들이 먼저 맞아죽었어야 한다. 게다가 이후 문화혁명기인 60~70년대까지 세력을 유지해서, 공청당 인사인 김명환을 추적했으며, 이에 위협을 느꼐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2명을 친척에게 보냈다는 말도 의아한 점이 많다. [28] 이후로 1988년에 이창규가 사망시까지도 위협에 시달렸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2. 김장춘 일가가 대한민국에 전혀 접촉하지 않고, 국가보훈처에도 등록을 안한 이유에 대한 해명으로도 보인다.
김장춘은 우리 가족은 중국에서 친일세력에 쫒겨다니느라 숨어살았기때문에 한국과 접촉못했다는 주장을 여러번 되풀이 한다. 2007년 문답에서도 "왜 독립유공자인 우리를 신경쓰지 않냐"는 김장춘의 말에 대해서 전재준은 "국가보훈처에 김장춘이 김좌진 후손이라는 문서가 접수된 게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위에서 거론된 위연홍만해도 1989년에 이미 김을동이 존재를 알정도로 교류를 했고, 2004년경 한국에 건너와서 국가보훈처에 자신이 김좌진 후손으로 인정받으려는 활동을 했는데, 김장춘이나 가족은 그런 활동을 한 것이 없다. 김좌진 후손인데도 대한민국 정부에 제대로 대우못받은 걸 화내지만, 김좌진 후손으로 한국에 귀국한 것도 아니고, 한국정부와 접촉한 적도 없으니 한국정부가 김장춘과 그 가족의 존재를 알 리가 없다. 위연홍에 비하면 이상하게 한국과 접촉을 하려는 시도가 없었으며, 그래서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변명인지, "(키워준 큰 할아버지) 창규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988년 사망 시점까지)김좌진 할아버지의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중국 땅에서 친일 앞잡이들한테 쫓기는 신세였는데"라고 말하면서, 김좌진의 고향에 못간 이유가 1988년까지 친일 앞잡이 세력에 쫒겨다녔기 때문이라고 주장고, 이런 비슷한 주장을 계속 되풀이 한다.

김장춘이 친일 앞장이 세력에 쫒긴 이야기를 예로 든 것이 5가지인데 모두가 좀 의아한 주장이다.
  1. 1930년 첫 번째는 김좌진 장국이 기존에 알려진대로 박상실이라는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된 것이 아니라, 친일 조선인에게 암살된거라는 주장이며,
  2. 1947년에 토지개혁심판대에서 맞아죽은 친할아버지 이야기도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관련 인민재판에서 맞아죽은것이지만, 그것도 한국인 왜놈 앞잡이들이 한짓이며,
  3. 1959년 1960년대~70년대 김장춘이 사실상 왜놈 앞잡이 세력을 피해서 김창규에게 맡겨졌다고 주장하는것이다.
  4. 김장춘이 9살때 김창규는 여전히 왜논 앞잡이 세력을 피해서, 왕청으로 이사했고,
  5. 1988년에 죽은 김창규도 사망한 1988년까지 왜놈 앞잡이 한국인 세력에 쫒겨다녔다.
라고 주장한다.

2003년 말지 인터뷰 내용 중
(2003년 말지 인터뷰) "혈육이라곤 저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큰 아버지인 김창렬 그분은 해방 뒤 정치투쟁 당시에 처형당했다고 하는데 자식이 넷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족이 흑룡강성 이춘에 살았는데 다 죽고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 김명환이라고 하는 사촌형님은 어렸을 때 함께 생활해서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2007,2020 김장춘과 전재준의 문답 내용 중
(김좌진 암살에 대해서) 나를 길러주신 창규씨는 내게 말하기를 할아버지는 “일본인 앞잡이나 일본놈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총을 쐈다. 중국공산당이 그럴 리 없다. 또 독립군들도 서로 의사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같은 독립군이 그러지도 않았다. 일본놈들이 조선인 앞잡이를 시켜 할아버지를 저격하게 하고, 이를 중국공산당과 김좌진장군의 반대파가 했다고 매도했다.”고 하였다. 오숙근 할머니와 장남 창렬씨가 해방 후에 계속 정체모를 놈들한테 추격을 당한 것도 수 천 명의 왜놈을 때려잡은 장군에 대한 복수로 그 놈들의 짓이 분명하다. 그놈들이야말로 친일개놈들이자 민족반역자들이 아닌가 말이다.
답: 할아버지의 나라가 해방된 뒤로부터 우리 가족은 끊임없는 추격을 당합니다. 할아버지인 김좌진이 암살당하셨는데 아마 그때부터 왜놈 앞잡이들이 우리 가족을 추적했을 것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일이잖아요. 실제로 김좌진의 맏아들 창렬은 47년도에 피살되었습니다. 토지개혁 심판대에서 몽둥이로 맞아 공개 살해된 것이지요. 그걸 할머니와 창규와 오춘택씨가 현장에서 목격했답니다. 그리고 창렬씨의 큰아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고, 그 해에 오숙근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답: 창렬이 죽게 된 것은 토지개혁심판대이기는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아니고 일본 밀정인 조선인이었다고 창규가 여러 번 말했다. 일본한테 돈을 받아 먹고 그런 짓을 하는 밀정이 많았다. 김좌진 주변에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일제 밀정이 많았다.
(중략) 항일연군에 가담한 조선인 허기호의 동생 허기훈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점, 만금산으로 끌려갔다는 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 그렇다면 김창렬이 허기훈한테 체포되어 만금산으로 끌려가 토지개혁심판대에서 공개적으로 맞아 죽었다는 얘긴데, 맞는가?
문: (김장춘이 9살때 즉, 대략 1968년에 왕청으로 이사) 흑룡강성은 지역이 넓어 어디든지 이사할 곳이 많았을텐데 왜 창규씨는 왕청을 택했을까요?
답: 창규씨는 계속적인 추적을 당했기 때문에 한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피신할 준비를 갖췄답니다. 그때는 맘대로 이사도 할 수 없는 시기였으나 어느 분의 도움이 있었답니다. 순전히 우리 가족을 추격하는 무리들을 피해 이사했다는 것이 맞습니다. 형이 피살당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현실에서 창규씨로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었고 때를 기다렸다고 봅니다
답: 김좌진의 가족사를 누가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어놨는지는 잘 알고 있잖은가 말이다. 김좌진 역사와 가족사는 완전히 망가졌다. 아들들과 증손인 내게 이르기까지 그 생활은 통한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 억울한 가족사를 무엇으로 다 말하겠는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가족을 다 희생하면서 일본놈들과 싸운 할아버지 김좌진이 암살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김좌진의 장남인 창렬이 토지개혁심판대에서 맞아 죽고,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바라본 어머니 오숙근은 기절하여 병석에 누워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같은 사건이 한국에서는 싹 다 지워버렸잖은가 말이다.
창규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988년 사망) 김좌진 할아버지의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중국 땅에서 친일 앞잡이들한테 쫓기는 신세였는데, 남측 정부는 친일정권이고, 김좌진과 그의 아들이 그놈들한테 추격당하여 피살까지 당했는데, 이 일에는 관심도 조사도 하지 않는 김좌진의 조국이라면 어느 후손이 이를 인정하겠습니까? 어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가문을 이토록 몰살시킨 게, 죽기 살기로 살얼음판에서 침묵을 지켜온 우리 가족의 잘못입니까? 왜 침묵했을까요? 그쪽에서 대답해 보십시오. 그래서 남측을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입니까?

일제가 패망한 이후로 1988년까지 왜놈 앞잡이 테러를 피해다녔다는 이야기는 다른 독립운동가의 후손에게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한국 뿐 아니라 이후 중국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도, 일제의 패망이후에 이런식으로 친일파에게 도망다녔다는 이야기는 없고, 게다가 1960년대 70년대를 거쳐서 1988년까지 중국에서 왜놈 앞잡이 위협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것에 관련해서 2003년에는 1947년 자신의 친할아버지 김창렬에 대해서 큰아버지라고 표현하면서 "큰 아버지인 김창렬 그분은 해방 뒤 정치투쟁 당시에 처형" 당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들과 불편한 관계속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는게 정설이며, 김창렬도 항일운동가 허기훈에게 고발되어서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 인민재판에서 맞아죽었다는 김기춘의 주장대로면, 정치투쟁이라고 돌려 이야기했다고 보면 이해가 갈만한 발언이다. 김기춘이 2020년 제시했다는 증거에는 조선인 허기호의 동생 허기훈에 의해서 1947년 김창렬이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유일한 증거라고 하는데, 그 기록에 허기호가 '항일연군' 즉, 중국공산당 산하에 포지션이던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김기춘의 2007, 2020년 주장은 2003년에 비해서 상당히 바뀌어는데, "김창렬이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 심판대에서 몽둥이아 맞아 공개 살해"된 것이지만 실은 일본인에게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하는 조선 밀정에게 살해된 것이며, 중국공산당 탓이 아니라, 대한민국 탓이라고 뜬금 한국을 비난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중국공산당이 죽인게 아니라, 일본의 돈을 받은 밀정이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아내서 죽인 사건으로 뒤집은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독립운동가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 기록마저 말살한 대한민국을 비난하는것으로 말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흑룡강성 토지개혁 인민재판에서 맞아죽은 걸 중국 공산당 탓이 아닌, 당시 패전으로 미군의 지배를 받던 일본이나, 미군정 하 대한민국 정부 탓으로 돌리는것도 이상한 주장이다. 일본의 패망 이후 만주와 흑룡강성 일대는 소련군과 홍군이 장악하고 있었고,[29], 그런 이유로 1947년에는 토지개혁인민재판을 한 것이다. 북한에서도 많은 인민재판이있었고, 6.25 이후 인민군이 진주한 남한 일대에서도 많은 지주와 자본가가 인민재판으로 죽었다. 중국은 이후 삼반오반운동, 반우파 투쟁과 문혁에서 수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출신을 이유로 인인재판를 받은 사례가 있다.

2020년에 김장춘이 제시했다는 증거는, 조선인 허기호의 동생 허기훈에 의해서 1947년 김창렬이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유일한 증거인데, 그 기록에 허기호가 '항일연군' 즉,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동북항일연군은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허형식등 소속된 적이 있는 홍군 관련 조직이다. 즉, 김기춘이 내놓은 증거는 중국 공산당의 책임이라는 증거가 추가된 것이지, 허기훈이 일본인에게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하는 밀정이라는 증거는 전혀 아니다.

물론 중국에 남은 일본인 부자들이 돈을 써서 조선인 밀정을 매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당시 한국이나 중국에 거주했던 일본인인 대부분이 재산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게다가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사유재산을 폐지했기 때문에, 기존의 부유층의 재산이 남아 있을 수 없다. 김장춘의 문답에서도 잘 나오는데, 공산화된 중국엔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농촌에서도 집단농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답: 창규씨는 계속적인 추적을 당했기 때문에 한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피신할 준비를 갖췄답니다. 그때는 맘대로 이사도 할 수 없는 시기였으나 어느 분의 도움이 있었답니다.
답: 내가 이춘시 난차취에서 태어나 목단강에서 살다가 왕청현으로 이사했을 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 창규씨도 나이가 많아 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 돕고 그랬죠. 옥수수, 감자, 콩 농사지어 먹고 살 때였습니다. 그때는 농사도 개인이 아니고 공동으로 하는 집체농사였지요

중국 만주지방에 살아 남은 일본인 부유층 출신이면, 1947년까지 목숨과 재산이 남아있기가 더 힘들고, 만약 살아남았어도 오히려 인민재판에 끌려가서 맞아죽는 걸 걱정하는게 맞지, 밀정에게 돈을 줄 여유는 없는게 맞다. 결국 1945년부터 1988년까지도 이어졌다는 일본의 돈에 매수된 조선인 밀정의 추적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다

게다가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중국 공산당의 책임을 아애 배제하는것을 현실왜곡이다. 김기춘 가족같은 극단적 사례가 아니어도, 실제로 중국에 남은 한국인 동포 즉, 조선족들이 쉽지 않은 삶을 산것은 사실이다. 관내에선 국공내전이 1949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내전 상황에 우리편과 상대편을 갈라서 죽고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도 그렇지만, 중국 공산당도 정권을 수립하면서 생긴 내전기에 수많은 학살이 벌어졌으며, 1947년 김창렬이 맞아죽은 것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만해도 국공내전 직후 인민재판과, 삼반오반운동, 반우파 투쟁, 문화대혁명시기의 수많은 인민재판 등이 벌어졌는데, 이때 척결 대상은 당연히 중국의 전통사상, 각종 자본주의 사상, 친일분자, 소수민족의 민족주의자 등을 포함한다. 그런 이유로 한국의 독립운동가 후예들이 민족주의자로써 살아가기에는 1945~70년대까지 중국은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김기춘의 문답에서도 이 당시의 중국에서의 조선인 민족주의 관련에서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던 이야기가 잘 나온다.
*전재진: 김좌진장군의 장남과 오숙근 여사에 대해 들으신 게 있습니까?
*김복록: 사실 그때 중국에서는 함부로 말하면 큰일 날 때였지요. 어디서든 함부로 말했다가 만약에 감시대상으로 점 찍히면 큰일이었어요. 죽어요. 해방 이후로 장군의 가족은 쉴 새 없이 난리를 피해 다녔답니다. 소식 없이 피신하신 것이지요. 장군의 장남이 토지개혁 때 맞아 죽었다는 걸 남편한테서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모릅니다.
*전재진: 혹시 집안에 시아버지께서 남기신 유물이라든가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보관하고 있습니까? *김복록: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편도 자료를 다 없앴습니다. 불태웠지요.
*전재진: 왜 불태웠을까요?
*김복록: 그때 당시는 문화혁명 때라서 만약에 공산당 생각으로 집안에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으면 그 집안은 몽땅 망하거든요.
2007년 김장춘과 전재준의 문답 중

즉, 20세기중반후반의 중국의 조선족들의 삶에서 독립운동이나 민족주의 관련 내용들이 억압당했다면, 그건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 탓.인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김장춘이 가지고 있다는 그 증거 포함해도, 김창렬의 맞아죽은 그 사건은 그냥 중국 공산당의 탓을 하는게 맞아보인다.

김기춘의 주장이 이상한 것은 김좌진 암살과 연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김좌진 암살을 한것으로 유죄받고 사형된 인사로는 박상기로 고려공산당 소속이었다. 그 배후로 공산주의자인 김봉환이 거론되며 김봉환은 김좌진 관련 인사들에게 1930년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관련해서 공산당이나 일본총독부에서도 빈주 사건으로 살해된 조선인들의 분노가 원인이다라는 식의 소수의견이 있다. 그것보다 더욱 일부 의견을 보자면 공산당쪽에서도 소수의견으로 "박상기는 아나키스트일뿐 공산당도 아니고, 김봉환은 일제의 밀정이다" 라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아주 극소수가 있긴하다. 그러나 김봉환[30]은 독립운동가이면서 공산주의자인데, 이 사람이 친일파라는것은 김좌진 관련 공산주의자 암살논란을 떨치기 위해서 나온 억지 주장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김장춘의 주장은 김좌진 죽음도 일본 돈을 받은 밀정의 짓이고, 김창렬이 맞아죽은 것 역시 그것과 비슷하게 일본 돈을 받은 한국인 밀정이 배후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중국 공산당 탓을 안하기 위해서 엉둥한 탓을 하는게 아닌가 의심된다. 김장춘은 자신이 직접 본건 아니지만, 키워준 김창규에게 모든 것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어도 김창규조차도 당시는 어린 나이라서 김좌진의 죽음이나 김창렬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기 어렵다.

또, 김장춘과 김창규도 흑룡강성 내부에서 피해다닌것이지, 흑룡강성을 벗어나 이사하기 힘들었던것처럼 [31] 중국은 지금도 사실상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나라이며, 농민은 함부로 도시로 호적을 바꿀 수 없다(이른바 농민공 문제). 즉, 김좌진 후손을 노리는 자들도 복수를 위해서 쉽게 이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출세한다면 안 될 것은 없다. 대도시의 좋은 대학에 합격하거나, 대도시의 대기업에 정직원으로 합격하는 식의 출세를 한다면 가능하다. 김장춘의 경우도 인민해방군에서 제대한 후에 길림성 수도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것을 보아 흑룡강성에서 바로 인근의 길림성의 공무원으로 취업했으니, 김장춘의 경우 이주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계 3대 범죄조직이라는 삼합회조차도 중국본토에서 활동을 거의 못하고, 홍콩, 마카오, 대만 및 동남아 등으로 도망갔다. 즉, 본토 중국에서 위협적인 반체제 세력이 수십년을 유지하기 힘들다. 만약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국 본토를 장악했던 일본군이 물러나고 만주국도 사라진 이후에 거대한 숙청을 다해서, 중국 내부에서 국민당뿐 아니라, 각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세력부터, 친일 세력까지 1940~50년대에 철저하게 숙청되었다. 결국 1945년부터 1988년까지도 이어졌다는 일본의 돈에 매수된 조선인 밀정의 추적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다.
김장춘이 주장하는 자신의 가족의 수난사는, 공산당 혹은 중국정부가 책임져야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김좌진 장군의 죽음부터, 김창렬이 토지 인민재판에 맞아죽은 것은 공산당 관련 사건이기도 하고,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진 흑룡강성도 중국영토이므로 중국정부가 치안을 책임지는 지역이다. 김장춘의 친아버지 김명환은 중국의 최대 공산당파벌인 공청단 활동을 했고, 김장춘의 경우는 1980년대 중국 인민군에 입대했다가 이후에 중국 공무원으로 평생 재직한 사람이다.

반면 한국인 왜놈 앞잡이들이라는것이 당시에도 실존했다면 중국 정부입장에선 말살해야할 반동분자들인데, 이들이 1988년 사망시점까지도 공산당이나 정부 공무원가족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힘들다. 1945년부터 2003년까지도 중국 정부 관련인사의 가족이 친일 세력에 쫒기는걸 중국 정부가 막지 못했다는게 사실이면, 그 원망의 1순위는 중국 정부이거나 중국공산당이어야한다.

그것에 대한 변명인지 몰라도 "김좌진과 그 후손이 친일 세력에 살해당하고 쫒기는데, 왜 관심도 없고, 조사도 않는 조국이라서 접촉하지 않았다. 김좌진의 아들 김창규도 일본 돈 받은 밀정에 쫒기느라 1988년에 사망할때까지 김좌진 고향에 가보지도 못했다" 대한민국은 뭘하는가?라며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을 했다.

그러나 이런 김장춘 분노의 발언도 동의하기 힘들다. 사실 김좌진의 암살에 관해서는 한국정부나 학자들이 굉장히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나 대한민국 학자들이 김좌진의 알려지지 않은 자손이 어디서 맞아죽었는지까지는 한국 학자들도 잘 알기 어려운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구의 첫째 아들의 며느리는 도미했는데 그 후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학계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김기춘 일가가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라는 것은 중국 현지에서 조선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잘 모르는 이야기다. 근현대 한국독립운동사 혹은 중국 소수민족으로써 조선족을 연구하는 한국의 학자들과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990년대 이후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결국 중국에서 김기춘 일가의 일이 잘 알려졌다면, 한국 학자들도 모를수가 없다. 김기춘이 1988년 김좌진관련 자료를 받은 이후에 '왕청현 교육국 문호갑 선생님과 연변대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를 접촉했다고 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그 당시에 김기춘이 김좌진의 자손인것을 제대로 확인했으면 한국학계에서도 알려졌을텐데, 김기춘의 주장에 따르면 문호갑이 1989년에 모든 자료를 분실하고 1992년에 사망한 이후로 어떤 연구도 진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 학계가 김기춘을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김장춘의 주장대로면, 김장춘 일가는 1930년 김좌진 암살 이후부터 2003년까지도 숨어다니느라, 그들 스스로 일부러 대한민국의 보훈처에 등록 안 한 거라고 하는데, 애초에 어떤 연락도 접촉도 없으면,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알고 대응을 할까? 그걸 한국 정부 탓하는건 과하다. 그들 존재를 모르니 당연히 김기춘 관련 자료도 한국에 없는 게 당연하다. 김기춘 일가에 대한 자료를 한국 정부가 일부러 자료를 폐기한 것도 아닌데 왜 한국정부가 비난받아야할까?

게다가 1947년의 김창렬이 맞아 죽음, 1988년의 김창규의 죽음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부는 실제로 어떤 개입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김창렬이 토지관련 인민재판에 맞아죽었다는 1947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이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인데 1990년대 이전까지 냉전시기로 구소련이나 중국과 대한민국은 전혀 교류를 하지 못했으므로, 한국은 공산진영의 일에 전혀 간섭하기 어려웠다. 그 나라에 외교적으로 수교를 하고 대사관이라도 있어야 대응을 할 것 아닌가? 1990년까지 공산진영에서 조선족이나 카레이스키 등 조선출신 동포들이 그 땅에서 불이익을 당하는걸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정작 증조할아버지의 암살과 할아버지를 때려죽인데 관여한 중국 공산당에 대해선 "중국 공산당이 그럴리가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대한민국에는 책임을 묻는 김장춘의 분노에는 동조하기가 어렵다.
김장춘의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각색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되는 지점은 있다.
  1. 빈주 사건관련 실제로 김좌진 장군이 만주에서 조선인들의 인심을 많이 잃었다.
  2. 중국공산당 집권 이후,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 관련 주장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김좌진 장군의 암살에 관해서, 조선총독부의 입장과 중국공산당의 주장이 비슷한데, 바로 공산주의자에 의한 암살보다는 빈주 사건등이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 신민부에 소속된 김좌진 등 신민부 군정파가 1928년 빈주현에 사는 조선인 주민들을 5~6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신민부 일부에서 김좌진에 사형선고를 내릴정도로 독립운동 진영에서조차 반발했다. 그 때문인지 1930년 김좌진의 사망에 영향이 끼쳤다고 보는 소수 견해가 있다. 실제로 빈주사건에서 살해된 유족들이 김좌진 가족을 위협했고, 그에 위협을 느껴서 김좌진 장군의 가족들이 이후 한동안 도망다니거라고 말하면 말이 되긴 한다. 당연히 김좌진 유족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조선인들을 친일 조선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공격들이 김좌진 이후로 그 증손자대에까지 60년 이상 이어지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20세기 중반이후에도 김좌진의 후손이 곤란한 일을 겪었을 가능성은 있을가??

굳이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 정부가 소수민족의 민족주의를 심하게 탄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공산주의 전부터 중국, 러시아 자체가 여러 민족이 혼합된 거대국가라서 소수민족의 민족주의는 곧 국가의 분열이기 때문에 항상 탄압해왔다. 공산당이 내전을 거치면서 숙청으로 수천만명 이상 살해한 사례가 있고,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대규모 숙청이 있었다. 이런 숙청과정에서 단지 자본주의자뿐만 아니라 각 소수민족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숙청대상이었다. 결국 한국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민족주의적 행동을 하면 맞아죽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또 한번 요주의대상으로 찍히면 수십년동안 감시당하는 것도 공산국가에서 흔한 일이다. 이와 관련된 김지춘 지인의 증언도 있다. [32]

한국에서 김두한이 한국에서 김좌진의 후손이라며 자랑하고 다녀도되지만, 중국은 적어도 1990년 정도까진 숨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납득되는 일이다. 특히, 독립운동가 중에서 공산주의쪽에 있는 분들은 대한민국에서 좋은 대접 못 받거나, 김원봉처럼 북한으로 가도 정치적 다툼에서 져서 숙청당했다.

그럼에도 김좌진 장군이 1930년 사망했는데도 이후 60년간 친일세력의 추적이 이어졌다는 것은 그것이 친일세력이건 빈주사건 유족이건간에 이해가 되긴 힘들다. 국공내전 이후 공산정부가 수립되고, 엄청난 통제사회에서 사상검증과 인민재판이 벌어지던 시기를 다 지나서, 무려 60년이 지났는데도 왜놈 앞잡이로 중국에서 살아가면서 복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게다가 1988년까지 살아있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90살이 된다. 1988년에 김좌진의 자손을 습격하려는 한국인 왜놈 앞잡이의 위협을 느꼈다고 하면 너무 과도한 주장이긴하다.

즉, 김기춘의 주장은 앞뒤가 다를 뿐더러 비현실적이지만, 굳이 이 내용을 합리화자하면
  1. 빈주사건 이후로 김좌진 가족이 보복을 조심해서 피해다녔고, 이후 중공내전 이후 중국 공산당에 탄압당한 이후로 몸을 사렸고, 김창규는 그 트라우마로 그 이후로도 평생 조심했고, 모든 것을 친일 조선인과 대한민국 정부탓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을수 있다.[33]
  2. 김기춘도 중국 인민군과 중국 지방 정부 공직에서 평생 일한 사람으로 함부로 중국 공산당 탓을 못하고, 대한민국 탓을 한것으로 생각하면, 이해 안가는것은 아니다.[34]
  3. 김좌진 사망 이후, 도망다니면서 김좌진의 적자이며, 서얼이 아니라고 굳게 믿다보니 자신들의 할머니가 오숙근이라고 굳게 믿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 있는 진짜 오숙근의 묘를 가짜라게 믿게된 것이다.
이 정도로 심하게 합리화해야, 김기춘이 김좌진의 자손일 일말의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김장춘의 주장대로면 한국의 모든 김좌진 자손이 다 가짜여야하는데, 그 많은 자손들 다 놔두고 꼭 찝어서 김을동에게 유전자 검사를 제의한 것이다. 이것도 김을동에게 직접 말한 건 아니고 '서울의 소리'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한 주장이다.

여기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 나오는데, “한국의 김좌진, 오숙근의 묘도 가짜이다. 그러므로 김좌진의 묘는 유전자 검사를 할수없으니 그 부친인 김형규의 묘를 파묘해서 유전자 검사를하라”고 김을동에게 요구한 것이다. 즉, 김좌진 부친의 선친의 김형규의 묘를 파묘하고, 김두한의 묘를 파묘해서, 그 둘의 유전자를 비교해서 할아버지와 손자인지 확인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파묘와 유전자 검사를 한다면, 자신도 김창규의 묘를 파묘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요구자체가 힘든 이유가, 김을동이 안동 김씨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고, 김을동은 김두은 물론 김좌진의 제사주재자도 아니라서 김을동에게 파묘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다. 지금이야 법리가 바뀌었지만 김좌진이 사망할 당시 호주상속인은 원칙적으로 적장자였고, 적장자가 없으면 서장자가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김두한은 서장자로서 김좌진의 호주 지위를 상속했고, 김두한이 사망할 당시 김을동이 적장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경민이 호주상속인이 되었다. 따라서 김을동만의 동의로는 김형규와 김두한 어느 묘라도 파묘할 수 없다.[35]

설령 김을동이 제사주재자라고 가정하더라도 누군지 정체도 모르는 김장춘이란 사람의 요구라 함부로 조상의 묘를 파묘할 순 없다. 이런식으로 김좌진 후손이라며 접근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파묘할 순 없다.

한편 김좌진의 유골은 실질적으로 파묘할 실익이 없는데, 김좌진의 유골을 만주에서 국내에서 운구하는 과정에서 화장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김형규와 김장춘 사이의 유전자 검사를 위해서는 김장춘의 모발을 직접 채취하거나, 혈액을 뽑아야 하며 일련의 과정이 촬영 또는 녹화되어야 한다. 단순히 제3자를 통하여 전달하는 방식으로 할 수 없다. 따라서 김장춘이 한국에 있는 연구기관에 직접 찾아가야 함에도 김장춘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1] 김두한은 21세기 기준으로 무려 100년 전에 출생했던 인물이다. 김두한과 비슷한 시기에 출생했던 인물 중에 어릴 적부터 신문지상이나 일제 공식문서에 오르내리거나 공식 기록이 보존되어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2]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일화에도 동명성왕의 자식이라는 증표인 부러진 칼의 반쪽을 가지고 오자 자식으로 인정받는다.[3] 김두한의 회고록을 보면, 김두한이 어릴 때 모친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김좌진을 만났다고 하고 당시 중국에서 김좌진은 모친과 아내 오숙근 등과 함께 살았기에 김두한을 중국에서 만났다면 오숙근 등도 김두한이 김좌진 친자임을 아는것이 당연하다.[4] 더 정확히 말하면 오숙근은 1920년대에 한양에 왔고, 나혜국 1930년대에 한양으로 온다.[5] 김두한의 회고록 관련 내용은 아래에 자세히 다룬다[6] 1972년 사망[7]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밖에 없다"[8] 라디오 진행자였던 권오기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 "머리로는 ‘저게 거짓말이다’ 싶은데도 믿게 되고. 적어도 ‘본인은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싶으니까요. 왜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과장됐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걸 잊고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9] 아동심리학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연도 정도는 정확히 기억한다고 하며,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 유명한 김좌진인데 50살이 되도록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게 더 문제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주장은 정상적인 가정의 부자 관계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기 나이 혹은 연도를 기억하는것 자체가 안정된 가정이 없으면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통 어릴 때 학교에 진학하면 학년이 올라가기에 그나마 연도를 민감하게 알 수 있지만, 성장기에 거리에서 살면서 자란 경우 일단 스스로 얻어 먹고 사는 것 자체를 신경쓰느라 올해가 몇 년도인지 자기 나이가 몇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리에서 자라다가 음악가가 된 최성봉의 경우나, 홈리스 인터뷰를 보면, 거리에서 살때는 올해가 몇년인지 나이가 몇인지 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성인이어도 마찬가지인데 하물며 어린나이에 거리에서 살았으면 당시의 연도를 상세하게 기억하는게 오히려 이상할것이다. 최성봉 인터뷰. 게다가 김두한은 서자이기까지했으니 더욱...[10] 단지, 일제에 대한 쉴드로 '흉적 김좌진 죽다'는 식의 타이틀을 붙이곤 했다. 물론 내용은 대체적으로 중립을 가장한 친 김좌진.[11] 이 서자가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그 서자의 행적까지 추적하지는 못했다.[12] 이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일단 월간 말지에 해당 내용을 작성한 사람이 신문 이름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13] 오씨부인[14] 다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라 할지라도 기생과 관계하여 낳은 서자임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이야 그런 유교적 종법질서가 거의 퇴색했지만, 당시로써는 제법 큰 문제였을 것이다. 본처의 호적에 오르는 것은 그런 정통성 문제를 해결해 준다. 실제로 서자 출신의 왕들 역시 명목상으로는 본처 호적에 오름으로 하여 정통성 문제를 땜방했으며, 원소(삼국지) 역시 의붓어머니의 삼년상을 했으니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당연히 오숙근이 얻는 것 역시 명백히 있었는데, 김두한은 서자가 아닌 적자로써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의붓어머니인 오숙근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줘야 했을 것이며, 국가유공자의 가족이라고 해서 지원 그런거 없었을 가난한 시대였으니 돈과 힘,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줄 이유를 가진 의붓아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굳이 말할 것도 없으리라.[15] 한 기자의 쉴드 이 기자 역시 김두한에게 불리할 수 밖에 없는 반도의용정신대 문제나 해방 직후의 행적들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참고로, 위연홍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해서 김두한 가짜 아들설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기자가 소속한 세계일보이다.[16] 김좌진의 손자 김경민씨가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김씨는 “지금 시대가 나라를 빼앗겼을 때와 같다”며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는 것만으로도 통탄한 일인데, 우리나라가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이렇게 김경민씨가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되면 친일을 미화할 것이라는 야당의 주자에 동조하고 있지만, 김좌진의 손녀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은 당내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정화에 앞장서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아직 형체도 없는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라고 낙인 찍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기형아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남매가 반대편으로 갈린 셈이다. 김경민씨는 김을동 최고위원의 이복동생이다.[17] 김좌진의 두번째 아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부인.[18] 이 기사에 언급된 이문창이라는 역사가는 한국 최후의 아나키스트로 불리는 사람이다. 더 쉽게 말하면, 김두한과는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 단, 김좌진은 무정부주의 성향이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김좌진의 만주 행적을 연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19] 단, 문화대혁명 당시 민족주의자 성향의 조선족이 탄압받은 것은 사실이다.[20] 문호갑이란 학자를 김장춘이 만난 시점이 묘하게도 김창규가 사망한 1988년에, 김장춘은 문호갑을 만났다고한다. 김창규의 주장을 문호갑이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김장춘에게 전해 들은 것이다. 거기에 문호갑이 1992년 사망한 이후에 문호갑의 아들인 문일범이 증인이 되어서 김장춘을 도와주고 있다.[21] (당시 기사 내용) 김장춘씨가 관련 자료라고 꺼내놓은 것은 큰아버지 김창렬의 죽음을 기록한 당안(정부 문서)이 전부였다. 몇몇 다른 자료는 이홍용이라는 한국인 학자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김씨는 하얼빈에 있는 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이씨는 이후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러주었다. "김장춘씨의 주변 인물 중 증언할 만한 사람을 계속 만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이미 아흔이 다된 노인들도 계시죠. 또한 김씨가 가지고 있었던 문서를 김좌진 장군의 필적과 대조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워낙 관련 문서가 귀해 아직까지 확증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정황으로 미뤄볼 때 김장춘씨가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8년째 역사 추적을 벌이고 있는 이씨는 오숙근의 행적을 뒤쫒아 연변의 보청 일대에서 그가 자신의 자녀들과 어렵게 살다가 사망한 정황이나 증언 등을 상당수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때문에 김장춘씨는 유일하게 이 문제를 연구하고있는 이씨에 대한 신뢰가 컸다.[22] "김좌진은 독립운동가이며, 본처 오숙근 이외에 다른 부인은 없고, 그런 주장자체가 모욕이다. 김좌진이 바람둥이냐"[23] 역사정립회의 글 : 김좌진의 오숙근 외 4명의 부인(夫人=妻=아내)설은 우매의 극치. 김좌진 장군의 부인(夫人=妻-아내)이 5명이라는 문헌은 유일하게 충남 홍성군에서 발간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제7장 장군의 가족(461쪽~469쪽) 편에 기록돼 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한다#[24] 김영숙의 경우는 한국에 김좌진의 외손녀 위연홍으로 알려진 인물의 외조모로 알려져 있고, 중국 연변쪽 연구에서 오랬동안 거론되었지만, 보훈부에서도 마땅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서 제외되었다.[25] 이외에 김영숙 관련해서 '⑴팔로 즉 여덟명의 노인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픽션에 등장하는 인물들인데 이걸 왜 검증할까?[26] 흑룡강성 이춘伊春시에는 김장춘의 가족이 모두 살고 있는 곳이다. 김장춘은 김좌진의 손자 김명환의 슬하에 5남매 중 둘째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생모의 정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49세인 지금도(2007년) 지금도 생모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다. 형제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생모 우소근于素芹씨는 남편과 살던 집에서 옛날과 변함없이 살고 있다. 장남은 가까운 마을에, 큰딸은 인근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둘째딸은 재혼하여 상점을 꾸렸고, 막내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쉬고 있다. 그들 김장춘의 가족은 호구부에 조선족으로 적혀 있지만 한국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형제들끼리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원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안내하는 김장춘이 장본인이라서 중국말 통역을 맡길 수도 없었거니와 생모와의 관계가 불편하다 보니 형제들과도 친숙하지 못하여 장군에 대한 얘기는 꺼낼 수 없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이틀 밤을 지냈다. 그들은 나를 정겨운 가족으로 대했다. 마지막 식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이별의 시간이었다. 장춘의 가족과 나는 아리랑을 부르며 함께 춤을 췄다. 순박한 그들의 모습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다시 장춘과 함께 왕청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27] 문: 키워준 분과의 관계는요? *답: 내가 생후 석 달이 안됐을 때부터 키워준 분은 김좌진의 둘째아들 김창규입니다. *문: 생부는 누구입니까? *답: 김명환이라고 합니다. 김좌진의 맏아들인 김창렬의 둘째아들입니다. 이름이 몇 개 됩니다. ( 중간생략) *문: 좋습니다. 그런데 명환씨가 진술인을 왜 가까이 하지 않았을까요. *답: 그것은요.‘’‘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문: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답: 할아버지의 나라가 해방된 뒤로부터 우리 가족은 끊임없는 추격을 당합니다. 할아버지인 김좌진이 암살당하셨는데 아마 그때부터 왜놈 앞잡이들이 우리 가족을 추적했을 것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일이잖아요. ’‘’실제로 김좌진의 맏아들 창렬은 47년도에 피살되었습니다. 토지개혁 심판대에서 몽둥이로 맞아 공개 살해된 것이지요. 그걸 할머니와 창규와 오춘택씨가 현장에서 목격했답니다. 그리고 창렬씨의 큰아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고, 그 해에 오숙근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28] 첫째인 김지강과 둘째인 김장춘 등 2명이 갔다가 김장춘만 김창규밑에서 계속 자랐다고 한다.[29] 소련은 형식적으로 1946년 5월 3일에 만주를 중화민국에게 반환했지만 중국공산당이 실질 지배하도록 체계를 갖추었다.[30] 김일성이란 가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 혼돈되어서 북한 김일성의 김좌진 암살설도 퍼졌으나, 다른 김일성이라는 게 정설이다.[31] *문: 흑룡강성은 지역이 넓어 어디든지 이사할 곳이 많았을텐데 왜 창규씨는 왕청을 택했을까요? *답: 창규씨는 계속적인 추적을 당했기 때문에 한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피신할 준비를 갖췄답니다. 그때는 맘대로 이사도 할 수 없는 시기였으나 어느 분의 도움이 있었답니다. 순전히 우리 가족을 추격하는 무리들을 피해 이사했다는 것이 맞습니다. 형이 피살당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현실에서 창규씨로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었고 때를 기다렸다고 봅니다.[32] *김복록: 사실 그때 중국에서는 함부로 말하면 큰 일 날 때였지요. 어디서든 함부로 말했다가 만약에 감시대상으로 점 찍히면 큰일이었어요. 죽어요. (중략)*전재진: 혹시 집안에 시아버지께서 남기신 유물이라든가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보관하고 있습니까? *김복록: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편도 자료를 다 없앴습니다. 불태웠지요. *전재진: 왜 불태웠을까요? *김복록: 그때 당시는 문화혁명 때라서 만약에 공산당 생각으로 집안에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으면 그 집안은 몽땅 망하거든요. 2007년 김장춘과 전재준의 문답 중[33]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빈주사건으로 동포를 피해다녔다고 말하긴 어렵고, 또 중국공산당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이 중국 공산당 탓을 무의식중에라도 했다가는 반동으로 맞아죽는 곳에서 수십년 살면서, 모든것을 친일 조선인과 대한민국 정부탓을 하는 자기 합리화를했을 수도있다.[34] *김복록: 사실 그때 중국에서는 함부로 말하면 큰 일 날 때였지요. 어디서든 함부로 말했다가 만약에 감시대상으로 점 찍히면 큰일이었어요. 죽어요. (중략)*전재진: 혹시 집안에 시아버지께서 남기신 유물이라든가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보관하고 있습니까? *김복록: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편도 자료를 다 없앴습니다. 불태웠지요. *전재진: 왜 불태웠을까요? *김복록: 그때 당시는 문화혁명 때라서 만약에 공산당 생각으로 집안에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으면 그 집안은 몽땅 망하거든요. 2007년 김장춘과 전재준의 문답 중[35] 원래 김좌진의 부친인 김형규의 제사주재자는 원래 김좌진의 형인 김경진이 되어야 겠으나 김경진이 양자로 출계하면서 김좌진이 김형규의 제사주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