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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달성군) | ||||
선거구 개편 구자춘[1][2] | → | 제15대 김석원[3] | → | 제15-18대 박근혜[4] |
<colbgcolor=#ed1a3b,#8c8c7f><colcolor=#ffffff> 제2·4대 쌍용그룹 회장 김석원 金錫元 | |
출생 | 1945년 4월 22일 |
경상북도 대구부 (現 대구광역시) | |
사망 | 2023년 8월 26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 |
본관 | 김해 김씨 삼현파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前 기업인, 前 정치인 |
학력 | 서울고등학교 (졸업)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교 (경영학 / 학사) 브랜다이스 대학교 (경제학 / 학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수학 / 석사) |
병역 | 대한민국 해병대 (병 223기) |
종교 | 불교 |
배우자 | 이래현(전처, 이혼) 박문순(1955년생, 1984년 재혼) |
자녀 | 슬하 4남 3녀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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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기업인, 정치인. 종교는 불교.아버지로부터 쌍용그룹을 물려받아서 초중반기에는 사세를 불려가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1986년 인수한 쌍용자동차의 부채액을 갚지 못해 망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해 대구 달성에서 당선됐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쌍용그룹이 망해가던 1998년 회사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사퇴했다.
2. 생애
2.1. 회장직 취임 이전
1945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성곡 김성곤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고등학교, 미국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교 경영학, 브랜다이스 대학교 경제학 학사[5], 서강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6]미국 유학 중에 귀국하여 해병대에 병 223기로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베트남에서 수색대원으로 10개월간 복무했다.
쌍용그룹을 물려받기 전 휴가를 나와 대관령 스키장에 놀러갔다가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고 아예 본인이 직접 1974년 12월 용평 스키장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 김성곤 회장은 아들이 스키에 미쳐서 스키장 사업을 하겠다 한다며 부정적으로 보았다. 1974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수요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7]
2.2. 회장 초기 시절
1975년 부친 김성곤이 타계하자 쌍용그룹을 물려받아 경영하였다. 당시 김석원의 나이는 만 29세, 동생 김석준과 김석동은 각각 22세와 15세였기에 김석원이 가장 유력한 회장 후계자였다. 김씨이고 부친의 이른 죽음으로 젊은 나이에 기업을 물려받았다는 점[8]에서 한화그룹의 김승연, 삼미그룹의 김현철과 묶여서 한때 재계 3김으로 불렸다.[9]젊은 나이에 그룹을 이끌게 되었지만, 초기 11년간 그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그룹을 이끌었다. 기존 사업을 확장시켰으며, 석유 산업에 진출하여 성공하면서 사업 다각화에 성공했다. 또 그의 아버지가 우려했던 용평스키장도 이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급증하면서 성공하게 되었다. 김성곤 회장 말기 재계 5위(1972년 기준)였던 쌍용은 김석원 회장이 물려받고 나서 초기에 재계 순위가 다소 떨어지기도 했지만, 80년대 이후 회복하여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재계 6~7위권을 꾸준히 유지했다.[10]
2.3. 몰락의 화근: 쌍용자동차
그는 자동차 애호가로 유명했다. 그는 이미 13세 때부터 불법적으로 운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레이싱 스쿨을 수료했고, 스스로 "레이서들과 겨룰 자신이 있다"고 공언하곤 했다. 또 자동차를 직접 분해·조립할 수 있을 만큼 자동차에 미쳐 있었다.[11]1986년, 대기업인 현대차, 대우차 등과의 경쟁에서 자금 동원력에서 한계를 느낀 동아자동차의 하동환 회장이 회사를 매물로 내놓자 김석원 회장은 곧바로 동아자동차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동차 사업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삼성도[12] 인수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를 운영할 꿈에 부풀었던 김석원 회장은 시세보다 2배 가까이 높은 가격으로 배팅했고 1986년 11월 동아자동차를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부회장을 겸하였다.
김석원 회장은 국내 유일의 포르쉐 959 오너로 유명했는데,[13] 동아자동차를 인수한 직후 그가 가장 먼저한 일이 연구개발 명목으로 회사 법인 차량으로 포르쉐 959를 수입한 것이었다. 국내에 단 한 대 뿐인 차로 유명한데, 1986년 12월 인천항에 도착하여 동아차 연구소 직원들이 차를 인수받자마자 인천으로 달려온 그는 차를 타고 곧바로 서울 자택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후 언론에 그는 코란도와 무쏘를 타고 출퇴근하는 회장으로 이미지 메이킹되었지만 실제로 그가 몰았던 차는 포르쉐 959와 메르세데스 벤츠 S600이었다. 이후 체어맨 리무진까지 더해 도합 3대의 차를 굴리게 되었지만 체어맨을 인수한지 2달만에 회사를 팔아야 했다.
김석원 회장은 동아자동차를 인수한 이듬해인 1987년 6월 영국의 스포츠카 회사인 팬더 웨스트윈즈(Panther Westwinds)를 인수했다. 팬더는 이미 70년대말 부도가 났고, 이를 자동차광인 진도모피그룹 회장 김영철이 인수했다가 1987년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이 다시 인수한 것이었다.
1988년 동아자동차를 쌍용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하고, 코란도 훼미리를 출시했다. 원래 코란도는 동아자동차에서 개발하여 출시를 하려했지만, 당시 5공 정부가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를 내세우며 불허하면서 출시가 보류되었었다. 이때문에 동아 하동환 회장은 회사를 매각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쌍용이 동아차를 인수한 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해제되었고, 이후 코란도를 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동아자동차는 원래 상용차인 버스와 지프, SUV를 만들던 회사였지만 김석원 회장의 관심은 스포츠카와 럭셔리 고급 세단에 있었다. 팬더 웨스트윈즈에서 개발하였으나 지나친 생산비 때문에 생산을 보류하고 있던 스포츠카 '팬더 칼리스타'를 마침내 1992년 1월 출시했다.
이외에도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자마자 갑자기 후지중공업, 이스즈, 닛산디젤 등 일본차 제조업체와의 기술 제휴를 끊어버렸고[14], 동시에 잘 진행되던 3세대 스바루 레오네 라이센스 생산 계획을 엎어버리면서 준중형차 시장을 선점할 기회[15]를 스스로 걷어차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16]
고급 승용차 출시가 염원이었던 김석원 회장은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1989년부터 르노, 볼보, 뷰익, 폭스바겐[17], 피아트 등 닥치는대로 플래그십 고급 세단의 한국 라이센스 생산 및 기술제휴를 제의했으나 모두 줄줄이 거절당했다. 결국 김석원 회장은 1991년 전략을 바뀌어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사의 트럭 등 상용차 부문 기술 제휴를 제의했고, 벤츠와 기술제휴에 성공했다. 김석원 회장은 경영권을 침해한 것만 아니라면 벤츠가 원하는 요구를 모두 수용하라는 파격적인 지시를 내렸고, 이로인해 불평등 계약이라는 (오)평을 듣기도 했다. 세간에서는 김석원 회사가 많은 트럭 회사를 두고 굳이 벤츠와 자발적으로 불평등 계약을 맺은 이유는 결국 이를 발판 삼아 승용차 부문까지 벤츠와 협력을 확대하려는 포석이 아니겠냐는 시각이 많았고, 실제로 벤츠에게 여러번 거절당한 후 1993년 벤츠와 승용차 부분에서도 기술제휴를 맺는데 성공하여, 벤츠와 합작으로 럭셔리 세단 쌍용 체어맨의 개발에 착수했다.
2.4. 정치 외도와 비리
쌍용그룹 창업자이자 4선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 김성곤이 10.2 항명 파동으로 중앙정보부로부터 수모를 당해 불명예스럽게 정계 은퇴를 한 뒤 자식들에게 "절대 정계에 발 들이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음에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없었는지 1995년 쌍용그룹 회장직을 남동생 김석준에 넘기고[18]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선거구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9][20]그러나 1996년 대한민국 검찰청이 전두환의 은닉재산을 추적하는 도중에 쌍용양회의 지하창고에서 사과박스 25개에 담긴 비자금 61억이 발견되면서 엄청난 의혹의 중심에 서게된다.관련기사 그러나 정권의 외압에 의해서 이 사건은 의혹만 남기고 수사가 중단되어 버렸다.[21] 그리고 이 와중에 1997년 외환 위기로 쌍용그룹이 위기를 겪자 2년만인 1998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김석원의 사퇴로 치러진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엄삼탁을 누르고 당선된 사람이 박근혜다.
자동차에 미친데다가 이걸로도 모자라 이것도 제대로 수습 못하고 정치판에까지 뛰어들었고, 그러는 사이 쌍용차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쌍용차를 제외한 제지, 시멘트, 건설, 정유 등 기존 계열사들은 흑자였기에 그가 자동차에 미쳐 쌍용차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인수했더라도 고급차, 고가차에만 몰두하지 않았다면 쌍용그룹은 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1997년 쌍용차의 부채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커졌고 결국 IMF가 터진지 일주일만에 대우그룹에 쌍용차를 매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쌍용차가 남기고 간 1조 8천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부채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결국 재계 6위였던 쌍용그룹은 1998년부터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주주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김석원을 회장직에서 해임하면서 2000년에 해체됐다. 쌍용그룹 항목 참조.
국회의원직에서 사퇴한 후 국회의원 재선은 물론이고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정계를 떠나야 했다. 즉, 기업과 정치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잃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셈.
2.5. 몰락 이후
해체 이후 조용히 야인 생활을 했다. 부인 박문순은 성곡미술관을 운영하고 있고 장남 김지용은 고속도로 사업인 태아산업을 운영하고 있으나 김석원 본인은 나이도 있고 몸도 안 좋다 보니 몇몇 공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두문불출하고 재계도 정계도 모두 은퇴한 상황이었다.그러다가 2005년 당시 계열사 소유의 부동산과 고속도로 휴게소 등을 헐값에 사들이고 개인주식을 쌍용양회로 하여금 비싸게 매입하게 하는 수법으로 그룹 재산 310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되었고, 2007년에는 자택에 현금으로 50억을 보관하고 있다가 검찰에 압수당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관련기사 여기에 계열사에 부당지원하고 회사 자금 7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2011년에는 둘째 아들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관련 기사) 김석원의 차남 김지강은 버몬트 대학교 유학 중 IMF로 그룹 전체가 휘청이자 한국에 돌아와 그룹 재건을 도왔으나 그룹 해체는 막을 수 없었고 이후 2002년 온라인 홈쇼핑과 엔터테인먼트 위주인 동아시아회사를 차리고 코스닥 기업인 진두네트워크 인수도 시도했으나 이렇다할 성과를 내놓지 못한 채 주식투자로 겨우겨우 연명하다 목숨을 끊었다.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자살한 새한그룹의 차남 이재찬과 비슷하다.[22] 김지강은 장손에다 한때 쌍용그룹 후계자로서 경영난 와중에도 부모의 주선으로 일찍 결혼했던 형 김지용과 달리 미혼이었고, 여자친구만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파란만장한 수난을 다 겪고 말년에는 고령으로 인해 휠체어에 의지하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가 2023년 8월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관련 기사)
3. 가계
자세한 내용은 범쌍용가 문서 참고하십시오.출처
- 아버지: 김성곤(1913년 ~ 1975년) / 어머니: 김미희(1920년 ~ 1981년)
- 누나: 김인숙(1941년생) / 夫 매형 조해형 (나라기획 회장)
- 외조카 조현진
- 외조카 조현찬
- 외조카 조은영
- 누나: 김의정 / 夫 매형 이승원
- 외조카 이용훈
- 외조카 이진휴
- 외조카 이성훈
- 외조카 이원희
- 김석원(1945년 ~ 2023년, 전 쌍용그룹 회장) / 전처 이래현 / 후처 박문순(1955년생) 성곡미술관 관장[23]
- 장남: 김지용 (1973년생, 22•23대 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
전처 정유희(1973년생 ~ ) 정몽필의 딸[24] - 손자: 김진석(2000년생)
- 손자: 김진하(2003년생)
- 차남: 김지강 (1977년 ~ 2011년) 사망
- 3남: 김지명
- 4남: 김지태
- 장녀: 김설리
- 차녀: 김문영
- 3녀: 김지수
- 여동생: 김의령
- 남동생: 김석준(1953년생, 쌍용건설 회장) / 이혼
- 김지성
- 김지운 셰프, 이튼 칼리지 진학
- 김지연
- 남동생: 김석동(1960년생, 전 굿모닝증권 사장) / 妻 한준희
- 김지호
- 김지원
- 김지영
4. 기타
- 1991년 제17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에서는 한국보이스카우트 연맹 총재 자격으로 잼버리의 주빈 역할을 맡았다. 당시에 잼버리 대회에 꽤나 열의를 가지고 임해서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쌍용이 아닌 스카우트연맹으로 출근을 했고 잼버리 대회 당시에도 단상에 직접 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올라가서 개회사를 하는 등 잼버리 대회 개최에 성공적인 역할을 해냈다.
- 김석원 회장의 둘째 조카인 김지운 셰프[25]와 그의 형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이튼 칼리지에 입학한 사람들이고, 그 중 특히 김지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은 후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차리고 셰프가 된 진기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26]
- 정재계에서 김석원을 접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매력이 많은 사람, 괜찮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성격 자체가 붙임성이 있고 활발해서 기업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이런저런 외부활동을 굉장히 많이 했고 여러 단체에서 러브콜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 정세균 전 국회의장과 친분이 있었는데 정세균 의장이 정계입문 이전까지 쌍용그룹에서 고위 임원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세균이 정치 입문을 결심했을 당시 김석원이 사장까지 하고 나가지 왜 굳이 한창 일할 때에 나가느냐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 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대구 달성 | [[신한국당|]] | 31,958 (62.71%) | 당선 (1위) | 초선[27]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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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대구광역시 제15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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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 공석 | 서훈 | 백승홍 | 강재섭 | |
[[남구(대구 선거구)| 남 ]] | 북 갑 | 북 을 | 수성 갑 | 수성 을 | |
이정무 | 박승국 | 안택수 | 박철언 | 박구일 | |
달서 갑 | 달서 을 | 달성 | |||
박종근 | 이해봉 | 박근혜 | |||
* 북 갑 이의익 사퇴 (1998.5.2.) * 달성 김석원 사퇴 (1998.2.17.) * 동 갑 김복동 작고 (2000.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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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북 고령군·달성군 선거구의 제14대 국회의원 이다.[2] 임기 중 작고. 잔여임기 1년 미만으로 재선거 미실시.[3] 의원직 사퇴[4] 보궐선거로 당선[5] 브랜다이스 대학교 석사라고 밝혀왔으나, 1994년 브랜다이스 대학교가 그에게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여하면서 그의 학력이 석사가 아니라 학사인 것이 뽀록 나버렸다.[6] 서강대 명예박사이다.[7] 용평리조트 이전에 있던 스키장들은 말그대로 스키만 탈 수 있는 "스키장"만 있었기에 김성곤 회장이 이런 인식을 가진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8] 셋 다 기업을 물려받을 당시 만 29세였다.[9] 다만 IMF 이후 쌍용그룹은 해체되고 삼미그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화그룹만 남게 되었다.[10] 지금의 한화, GS와 규모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1] 김석원 회장 재임기에 쌍용자동차의 디자인 과정에 참여했던 켄 그린리는 무쏘를 소개하는 왓카?(What Car?)지의 지면을 빌어 김석원 회장이 자동차에 미쳐 있었다(a car nut)고 언급하기도 했다.#[12] 이건희 전 회장 역시 자동차 애호가로 유명했다.[13] 이후 포르쉐 959 오너는 국내에 총 3명이 되었다.[14]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반일감정을 들먹이며 일본 기업과 기술제휴 관계를 맺기 싫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고급차에 눈이 멀어있던 상태였기 때문. 당시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중산층을 타겟으로 하는 자동차 생산에 주력했었다. 특히 1994년 일본 유니참 합작법인을 출범시킨 것을 보면 더더욱 고급차 개발 때문인 것이 중론.[15] 당시에는 준중형차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중형차에 낮은 배기량의 엔진을 장착하다시피하여 심장병 소리 듣는 비인기 차급이었으나, 1990년부터 고성능을 앞세운 현대 엘란트라, 대우 에스페로, 기아 세피아가 차례대로 출격해서 셋 다 잘팔렸으니 쌍용차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레오네 후속이 임프레자이니만큼 더더욱...[16] 다만, 레오네 기반의 차량이 나왔다고 해도 잘 팔렸을지 의문인 데다 경쟁차들과 달리 기술 종속 우려가 더 심해졌을 수도 있고, 쌍용 트랜스타처럼 나름 팔려도 가격대나 로열티 관련 문제로 수익을 낼 수 있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있다.[17] 이 쪽은 공교롭게도 훗날 삼성자동차가 당사의 콤비버스를 도입받으려다 실패했다는 말이 있다.[18] 아버지 김성곤 때에는 재벌회장과 국회의원을 대놓고 겸할 수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 김석원 대에는 겸직이 불가능해 둘 중 하나를 명목상으로나마 내려놓아야 했다.[19] 선친 김성곤의 지역구이기도 하다.[20] 당시 신한국당이 대구에서 서구 을(강재섭)과 함께 당선된 곳이다.[21] 이때 정권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사를 강행하다가 좌천되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 검찰을 뛰쳐나간 인물이 바로 김용철 변호사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후 삼성그룹 법무팀에 스카웃되갔다가 이건희의 숨겨둔 비자금을 폭로하였다.[22] 본인과 가족들이 몸담고 있던 그룹이 해체당하고 이후 생활고를 겪었던 점도 비슷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채찬이 속한 새한그룹은 해체됐어도 그 모체인 범삼성가는 건재한 반면 쌍용그룹은 그룹이 해체된 것은 물론 그룹 재건은커녕 현상유지도 매우 어렵다. 본인 사후의 일이지만 숙부 김석준은 그룹 해체 후에도 채권단을 거쳐 두바이 투자청이 인수 했어도 쌍용건설의 전문경영인으로 근무 했으나 세아상역이 주축인 글로벌세아그룹이 두바이 투자청으로부터 쌍용건설을 인수 후 쌍용건설 대표이사에서 물러나서 현재 쌍용가 사람들 중에서 과거 그룹의 주력 사업체에 관련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3] 장남, 차남은 전처 이래현이 낳은 자식들이고 3남, 4남, 막내딸은 박문순이 낳은 자식이다.[24] 공식적인 이혼 소식은 들리지 않았으나 김지용이 아나운서 김성경과 사귀고 있다는 소식으로 보아 이혼했더나 별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5] 쌍용건설의 회장인 김석준의 둘째 아들이다.[26] 배우인 김지석과는 그의 형에게 과외를 받은 것을 계기로 친해졌으며, 문제적 남자에 출연하면서 이 사실을 밝힌 바 있었다.[27] 1998.2.9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