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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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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12.12 군사반란 · 5.18 민주화운동 · 3당 합당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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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학도병으로 6.25 전쟁 참전2.2. 6.29 선언2.3. 경청자
3. 부정적 평가
3.1. 독재정권의 후예, 내란사범3.2.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
3.2.1. 사죄

1. 개요

파일:이제는안정입니다.jpg
노태우 개인에 대한 평가를 서술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2.1. 학도병으로 6.25 전쟁 참전

경북중학교 5학년[1]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러 나이를 올려서 학도병으로 헌병 학교에 자진 입대했다. 훗날 국회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김수한이 당시 중대장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6.25 참전 경력이 있는 대통령은 이승만[2], 박정희[3], 전두환[4], 김영삼[5], 김대중.[6]

2.2. 6.29 선언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872030-00_01043301.jpg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발표한 선언

6월 항쟁을 통해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보여줬다. 이에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평화적인 정부이양,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김대중의 사면 복권, 국민 대통합, 국민 개개인의 인권 신장, 프레스 카드 제도 폐지 및 언론 자율성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자신의 선언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도 특별 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6.29 선언이 발표되자 6월 항쟁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6.29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 되었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시작되었고, 13대 대선 당선자 노태우 대통령부터는 민주공화제에 입각한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이 선출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즉, 6.29 선언 이후로 대한민국은 비로소 헌법에 명기한 자유민주적 가치를 실천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물론 이를 온전히 집권자이던 노태우의 구상이라 보긴 어렵고, 6월 항쟁을 위시한 자유화 요구에 집권 세력이 더 이상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무리하게 권력을 유지하는 대신 안정적인 퇴진을 선택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제 요구를 비롯한 여러 완화 조치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급진적인 변화의 혼란 없이 안정적인 민주화를 일구어낸 점은 아직까지도 학계에서나 민간에서나 높이 평가받는 편이다.

2.3. 경청자

모시던 상관(박정희)이나 친구(전두환)가 죽이려고 한 야당 총재 김대중을 국정 동반자로 인정해 꾸준히 여야영수회담을 하면서 조언을 구했으며[7], 3당 합당 후에는 문민정부 수립 의지를 내비치는 김영삼 총재 측의 요구를 경청하며 통 크게 수용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당대의 처신이나 '주변' 인망[8]은 친구(전두환)가 더 나았어도 노태우는 그 부족한 부분을 상대방 의견을 경청하면서 보완해 나갔다. 게다가 노태우가 귀를 기울인 정적들 역시 정책적 역량이나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대국적인 안목을 견지하고자 노력한 인물들이었기에, 재임 기간 동안 각종 사건을 겪으면서도 민주주의로 가는 큰 흐름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과거 군사 정권 시절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대중, 김영삼 모두, 군인 출신 대통령들 중 노태우에 대해서는, "셋 중 제일 나았다"는 요지의 호의적 평가를 내렸다. 또한 노태우 본인으로서는 1987년 대선 당시 공약한 민주화로 가는 중간 단계에 부합하는 행보를 실행한 것이기도 하다.

국민과의 대화를 시작하기도 했다.

3. 부정적 평가

3.1. 독재정권의 후예, 내란사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 출신이고, 12.12 군사반란의 반란 수괴로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개입한 바 있다. 국민들의 들끓는 민주화 열망이 분출한 6월 항쟁을 생각하면 직선제로는 대통령이 되기 어려운 인물이었지만,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인한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여소야대 정국에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물태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거기에 백영옥 여사 및 정병주육군특수전사령관 의문사 사건에서 조남풍 전 기무사령관과 더불어 군사정권 이후에도 이뤄진 하나회의 군사정권 치부 가리기를 통한 은폐공작에서의 유력한 배후 인물로 점쳐지기에 이러한 비판은 잔존할 수밖에 없다.

3.2.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

1995년 10월 5일,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노태우는 상식 이하의 망언으로 하면서 국민들에게 비난과 논란을 일으켰다.

中國(중국) 문화혁명희생 비하면 光州(광주)사태 아무것도 아니다 노태우씨 동창모임서 발언(동아일보)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한겨레 신문)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 충격발언 요지(한겨레 신문)
노태우 대통령 발언 요지(동아일보)

파일:external/cache.clien.net/20150928144834_Ooh62T1Z_EB85B8ED839CEC9AB0_EBA79DEC96B8.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52286-00_01035226.jpg

이날 노태우는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예전 중국에서 문혁 때 수천만 명이 희생 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고, 해당 망언이 동아일보사 시사주간지 <NEWS+(현 주간동아)> 10월 18일자에 보도되면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MBC, KBS) 이로 인하여 노태우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그 당시에 비자금 사건도 터지면서 전두환과 더불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궤변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9]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10] 결국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11]

3.2.1. 사죄

그는 죽기 3년 전부터 아들 노재헌을 통해 사죄했다. 더불어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노태우 대통령 취임 당일인 1988년 2월 25일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광주에 내려가 국립 5.18 묘지에 있는 이한열 열사 묘소에 극비리에 참배한 사실도 있다.

단 한 번도 사죄 안 한 전두환에 비하면 그나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니 전두환보다는 훨씬 낫다는 평가가 많지만, 이전의 행보나 그간 출간했던 회고록을 보면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5.18 학살에 대해 왜곡으로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하여튼 자신의 당시 처신이 경솔했다고 생각하긴 했는지 이후로도 잘못했다는 뜻을 계속 내비쳤다.

무엇보다 노태우는 유죄 판결 직후에 자신에게 부과된 추징금 2,628억 원 중 90%가량을 납부했고, 2013년까지 나머지 금액도 분할 상환하여 마침내 전액을 완납했다. 이른바 '전재산 29만 원'이라는 말이 회자될 만큼 추징금조차 제대로 납부하지 않는 전두환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후 2019년 8월 26일, 소뇌위축증으로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없는 중환자인[12] 노태우 대신 장남인 노재헌 씨가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하면서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사죄드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깊이 새기겠다는 문구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노태우의 뜻이라고 밝혔다.[13] #

그 이후 12월 초에 노재헌 씨가 다시 유족들을 만나 참회했다.

또 그 이후 2020년 5월 18일 아들 노재헌 씨가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했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이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노태우가 유일하다.

5.18 가해 당사자로서 유일하게 반성 의지를 지속적으로 내비쳤고, 사법부의 판결에 따른 죗값(추징금 납부)도 성실하게 치렀다는 점에서 전두환이나 다른 가담자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14] 인터뷰에서 노재헌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이제 됐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밝혔다. #

노태우는 결국 투병 끝에 2021년 10월 26일 사망했는데, 노태우의 마지막 사죄 행보에 대해서는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받드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엇갈린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그것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광주영령과 5.18 유가족, 광주시민을 위로할 수 없겠지만 그의 마지막은 여전히 역사적 심판을 부정하며 사죄와 추징금 환수를 거부한 전두환 씨의 행보와 다르다." 라고 평가[15]했으며,# 박남선 5.18 당시 상황실장[16]도 빈소를 찾고 인터뷰에서 노태우는 전두환과 달리 사죄 표명을 해왔음을 인정했다.# 반면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끝내 사죄 없이 떠났다고 비판했다.#[17]

[1] 당시 6년제 중학교(중고등학교 통합 과정)였다. 즉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실제로 6년제 중학교의 3년 이상 수료 후 중퇴자에게는 중졸 학력, 6년제 중학교의 졸업자에게는 고졸 학력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 시절의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현재는 고령이 되었지만.[2] 당시 대통령으로 국군 통수권자였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by 중앙일보)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기를 달라"고 미군측에 호소하는 이승만 박사의 모습, "각하께서 수도에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계셔야 한다"며, 임시 국무장소를 더 북쪽으로 옮길 것을 진언한 이영진 충청남도지사처럼 식견과 충심을 갖춘 인물이, 전시(戰時)에 목소리를 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3] 김종필의 사전 경고 덕분에 전쟁 징후를 나름 포착하고 있었으며, 전쟁발발 후 9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해 일선에서 싸웠다. 북파부대장 신분으로 생환한 채명신 장군과 우연히 마주치자, 자신이 입고있는 새 야전 상의를 채 장군의 헌 옷과 바꿔입으며 인연을 맺기도 했다.[4] 대구공고 재학 중 나이를 올려 학도병 신분으로 헌병학교 입대.[5] 학도의용군 정훈병 출신. 역시 참전용사였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비슷한 사례이다.[6] 전쟁 중 북한군에게 잡혀 죽을 뻔한 후 -> 목포로 돌아와 "배를 보유한 선주(船主)로서", 목포 현지에서 창설된 향토방위군에 참여했다. 전쟁 중에 기록이 미비하기도 했고 + 일종의 의용군(義勇軍, 국가나 사회의 위급을 구하기 위하여 민간인으로 조직된 군대) 성격이라, 해군 본부에는 자료가 없으나, 목포 경비부의 연혁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7] 2016년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수를 점하자, 당시 친여성향을 보인 한국경제신문에서는 이 노태우 정부 시절을 상기시키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여야협치에서 찾을 것을 넌지시 권고하기도 했다.[8] 사람들이 우러러 믿고 따르는 덕성[9] 노태우,자신의 광주사태 발언 공식 사과 [10] 盧泰愚(노태우)씨「光州(광주)」발언 커지는 파문…정치권“술렁” "경솔한 언동[11] 盧泰愚(노태우)씨「광주발언」공식사과 기자회견"5.18피해자가족에 상처줘 미안" 국민회의등 與野(여야) 수용태세 盧泰愚(노태우)[12] 의사표현은 가능하다고 한다.관련기사[13] 노재헌이 광주에 참배하지 말까요라 묻자 미동도 없었으나 참배하러 갈까요라 묻자 눈을 연신 깜빡였다고 한다.[14] 노태우와 사망자들을 제외한, 전두환 및 그 외 나머지 아직 정정한 12.12 군사반란 주모자들은 2019년 12월 12일에 쿠데타를 기념해 모임을 가졌다.[15] 이로 인해 끝에 씨를 안 붙인 노태우, 혹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비록 5.18 당시 신군부 명령체계 안에서 한 행동은 옳지 못하다 평가되나, 당장 존재감부터 적을 뿐 민주열사 고문에 앞장선 육군 내 내무전력 운용을 담당한 국군보안사령부 인력들이나 대공분실 관련자, 강제연행 혐의를 받는 이들과 그 주체 중 하나인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위치의 조홍과는 달리 그만한 사죄라도 했기에 피해자들의 후손이 많은 지역에선 전두환과 달리 제명되었을지언정 공과를 인정받아 전 대통령 칭호로도 불릴 수 있게 된 것.[16] 이전에는 유족대표라 쓰여있었으나 5.18 단체들도 박남선 본인도 유족 대표로 온 것이 아니라고 했으므로 변경.[17] 물론 비난은 피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반대측의 핵심 근거를 제대로 들어 본다면 '그럴 거였으면 회고록을 쓰기 전, 한창 정정할 시절에야 그냥 제대로 마음 놓고 사과하지 그랬냐'이다. 노태우가 사과를 했을 때는 이미 중병이 들어 거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사죄의 대부분이 아들 노재헌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 물론 그나마도 안 한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사죄하는 것이 훨씬 납득할 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2007년 공식 등장 이후로는 소뇌위축증을 포함한 각종 지병으로 인해서 죽을때까지 고통을 받음으로써 전두환과는 다른 의미로 자신의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반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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