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 열사 |
문화어 | 렬사 |
한자 | 烈士 |
영어 | martyr[1] |
광주 북구 운정동 시립망월묘지에 위치한 '5.18 정신계승 민족민주열사 유영봉안소'.[2] |
1. 개요
어두운 죽음의 시대 내 친구는
굵은 눈물 붉은 피 흘리며
역사가 부른다
멀고 험한 길을
북소리 울리며 사라져간다
친구는 멀리갔어도 없다해도
그 눈동자 별빛속에 빛나네
내 마음속에 영혼으로 살아 살아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이 장벽을 부수리 부수리
<친구2>, 정세현듣기
굵은 눈물 붉은 피 흘리며
역사가 부른다
멀고 험한 길을
북소리 울리며 사라져간다
친구는 멀리갔어도 없다해도
그 눈동자 별빛속에 빛나네
내 마음속에 영혼으로 살아 살아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이 장벽을 부수리 부수리
<친구2>, 정세현듣기
열사: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열사'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과 국가보훈처의 설명은 '애국자'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두 정의 모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싸운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열사'로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실질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더 나은 발전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설명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하지만 '열사'의 의미를 '애국'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약간의 어폐가 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의 이상적, 이념적 가치를 지향하며 싸우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5] 이들의 말과 행동은 애국과 완전히 괴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국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열사 = 애국자'라는 도식은 꽤 괜찮은 연결이지만 늘 성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애국자 중에는 투쟁이 아닌 평화적인 형태의 애국을 한 이들도 많으므로 애국자 = 열사도 늘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가하면 열사를 '애국'보다는 '불의에 대한 저항'에 초점을 맞춰서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정의에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들이 어겨지거나 침해당할 때 이에 맞서서 목숨을 걸고 그 가치들을 되돌리거나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열사의 행위를 '저항'으로 본다면 '열사'라는 호칭이 적용될 수 있는 사람들은 보다 더 늘어날 것이다. '독립', '민주주의'와 '인권' 등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 침해당하는 상황에 저항하는 것은 '애국'은 물론이고 '신념'과 '정의' 등까지 포함할 수 있는 '정당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 각 상황에 대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서 독립운동가들의 행위를 '일제에 대한 저항', 민주열사들의 행위를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 노동운동가들의 행위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저항', 통일운동가들의 행위를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 등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열사는 '시대가 요구하는 대의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열사'는 폭압적인 정권 또는 체제에 맞선 '저항적 자살'[6]에 부여된, 저항의 상징이며 추모의 대상을 뜻한다.
-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 임미리, 오월의봄, 2017
-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 임미리, 오월의봄, 2017
한편 열사의 의미에 대해서 앞에서의 '저항'으로부터의 관점에 '죽음'을 덧붙여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켜야 될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죽은[7]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에서 '열사'를 가장 많이 언급할 때는 이 의미일 때가 많다. 참고로 본 문서의 열사의 의미도 여기에 따르고 있다.
의사(義士)와는 의미가 같지만 사회적 실질 용법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불의에 대한 저항" 중 비폭력적 방법으로 항거한 사람들을 열사, 반대로 무력 투쟁을 한 사람들을 의사라고 부른다. 때문에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나석주, 김상옥, 강우규, 이재명, 박재혁, 박차정, 김익상, 백정기, 조명하 등과 같이 무력을 이용해 의거를 일으킨 사람들은 보통 의사라 칭하지 열사라고는 부르지 않는 편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사전적 의미는 같으므로 열사라고 호칭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종종 이런 경우도 있지만[8] 사회적으로 이러한 구분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므로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2. 열사의 종류
2.1. 독립열사[9]
일제강점기 에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이어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고 사형당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속되는 독립운동 속에서 1945년 한반도는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독립했으니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열사다.2.2. 민족민주열사
광복 이후에 나오는 열사들은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독립된 국가의 민주주의, 인권, 통일 등을 위해 싸웠다. 그리하여 이들을 통칭해서 '민족민주열사'라고 칭하게 되었다.2.2.1. 민주열사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되거나 희생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권을 오랫동안 겪은 대한민국으로서는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수많은 열사들이 생겼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추구하거나 사라지지 않은 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싸움도 계속되었고 이와 연관된 열사들도 생겨났으며 정치적 민주주의 외에도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운동도 일어났는데 여기서도 물론 희생된 사람들이 있었다.2.2.2. 노동열사
노동자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1970년대 이전의 노동운동은 거의 사장된 상태였고 노동조합도 이름만 노동조합이지 사실은 어용노조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970년 전태일이 자신이 근무하던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노동과 삶을 보장하라며 분신하여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일을 토대로 노동운동은 성장기를 맞이하게 되고 7~80년대에 거쳐 여러 명의 열사들을 거쳐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절정을 이뤘다. 그리하여 노동조합도 어용노조에서부터 소위 '민주노조'로 바뀌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권익도 많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노동자와 회사와의 갈등이나 회사의 탄압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되어 지금도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는 형편이다.2.2.3. 그 외
1. 농민열사 : 농민들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을 일컫는다.2. 시민열사 : 평범한 시민들 중에 민주주의 등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3. 학생열사 : 열사들 중에서 학생의 신분이었던 사람들을 일컬으며 학생들의 인권이나 권익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도 포함된다. 학교나 학원 내의 민주화 투쟁 중 죽은 사람들도 여기에 들어간다.
4. 재야열사 : 재야인사 중에서도 민주화 운동 등에 투신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5. 빈민열사 : 빈민들을 위한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6. 장애열사 : 장애인들을 위한 인권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7. 72열사 : 1911년 황화강 사건에서 희생되어 황화강에 안장된 72명의 혁명파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이다.
3. 한국 근현대사와 열사
3.1. 항일독립운동과 열사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다.
3.2. 사회운동[10]과 열사
3.2.1. 광복~1980년대 이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나오는 전태일의 분신 장면 | 전태일의 영정을 들고 통곡하는 모친 이소선 여사 |
3.2.2. 1980년~1987년
최루탄에 피격당한 이한열 |
3.3. 민주화 이후의 열사
3.3.1. 노태우 정권과 문민정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건이자 분신정국의 원인이 된 강경대의 사망 소식 기사와 관련 만평 |
3.3.2.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3.3.3.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고현철 교수 2015년 8월 17일 오후 3시경 대학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위해 부산대학교 대학본관 4층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바쳤다. |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때 경찰의 물대포로 사망한 농민운동가 백남기의 장례식 |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규정 위반으로 인하여 사망하였기 때문에 열사로 인정되었으며 광주광역시 및 5.18 기념재단의 허가 하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인장되었다.
4. 목록
열사[11]의 시대 분류는 활동 시기와 사망 시기를 고려하여 배치하였다.4.1. 광복 이후~1980년대 이전
성명 | 김주열 | |
출생날짜 | 1944년 10월 7일 | |
사망날짜 | 1960년 3월 15일 | |
주요활동 | 김주열 항목 참조 | |
묘역 | 전북 남원시 금지면[12] 국립 3.15 민주묘지(창원시) 국립 4.19 민주묘지(서울) | |
성명 | 전태일 | |
출생날짜 | 1948년 8월 26일 | |
사망날짜 | 1970년 11월 13일 | |
주요활동 | 전태일 항목 참조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김진수 | |
출생날짜 | 1949년 7월 6일 | |
사망날짜 | 1971년 5월 17일 | |
주요활동 | 전태일의 분신 소식이 전해지면서 (주)한영섬유의 노동자들도 노동운동에 나서 전국섬유노동조합 서울의류지부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1970년 12월 28일 한영섬유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회사는 위장폐업으로 노동자들을 해고시켰고 김진수는 이에 맞서 강요로 탈퇴한 조합원들을 노동조합에 재가입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자 회사는 그를 불순분자로 몰아붙였고 구사대를 매수하여 김진수를 무차별 폭행했다. 구사대는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했으나 김진수는 거부했고 결국 드라이버로 머리를 얻어맞았으며 얼마 후에 숨을 거두었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김상진 | |
출생날짜 | 1949년 11월 25일 | |
사망날짜 | 1975년 4월 12일 | |
주요활동 | 서울대 농과대학에 다니다가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양심선언 후 할복자살. 김상진 항목 참조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장준하 | |
출생날짜 | 1918년 8월 27일 | |
사망날짜 | 1975년 8월 17일 | |
주요활동 | 장준하 항목 참조 | |
묘역 | 파주 천주교 나자렛묘지 | |
성명 | 정법영 | |
출생날짜 | 1960년 6월 20일 | |
사망날짜 | 1977년 7월 8일 | |
주요활동 | 정법영은 청주지역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퇴직금 문제로 농성 중이었고 농민들은 토지매입문제로 투쟁 중이었다. 이에 정법영은 이들을 도우려고 애썼으나 113일이 지나도록 해결은 지지부진했다. 이로 인해 갈등하던 차에 신원 미상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 이후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3] #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김경숙 | |
출생날짜 | 1959년 6월 5일 | |
사망날짜 | 1979년 8월 11일 | |
주요활동 | YH 회사의 부당폐업에 반발하여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사망. YH 사건 항목 참조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4.2. 1980년대
4.2.1. 1980년~1982년
성명 | 이세종 | |
출생날짜 | 1959년 7월 16일 | |
사망날짜 | 1980년 5월 18일 | |
주요활동 | 이세종은 1980년 당시 전라도의 대학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의 연락책임자였다. 그는 5월 17일 밤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5.17 내란으로 난입한 계엄군이 그를 쫓았다. 그는 회관 옥상까지 도망갔으나 18일 새벽 1시 두개골 골절과 간장파열로 사망한 채로 땅바닥에 발견되었다. 사인은 단순 추락사로 발표되었으나 주검을 맡았던 당시 대학교수는 추락 전의 집단폭행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참고로 이 때문에 그를 '5.18 최초 사망자'[14]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그는 1999년 5.18 관련자로 인정받아 망월동에 묻힐 수 있었다.## | |
묘역 | 국립 5.18 민주묘지 | |
성명 | 김의기 | |
출생날짜 | 1959년 4월 20일 | |
사망날짜 | 1980년 5월 30일 | |
주요활동 | 김의기 항목 참조 | |
묘역 | 파주 금촌공원 | |
성명 | 김종태 | |
출생날짜 | 1958년 6월 7일 | |
사망날짜 | 1980년 6월 9일 | |
주요활동 | 김종태 항목 참조 | |
묘역 | 국립 5.18 민주묘지 | |
성명 | 김태훈 | |
출생날짜 | 1959년 4월 13일 | |
사망날짜 | 1981년 5월 27일 | |
주요활동 | 김태훈은 광주 출생으로 그가 대학생일 때 광주에서 5.18이 터졌으며 이로 인해 학내시위까지 잦아지자 그는 평소 말이 없던 것이 더 적어졌다. 1981년 5월 27일에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때 그는 도서관에서 원서를 번역하고 있었다. 시위가 점점 팽팽해지고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있을 때 김태훈은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투신해 사망했다.[15]# | |
묘역 | 경기 광주 천주교 공동묘지 | |
성명 | 문영수 | |
출생날짜 | 미상 | |
사망날짜 | 1982년 8월 22일 | |
주요활동 | 문영수는 진아교통이라는 회사에서 일하던 노동자로 시내버스를 운전하며 운전기사들과 안내양들의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회사에 항의했다. 이에 회사는 그에게 압력을 넣어 사직하도록 했고 그는 광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2년 폭행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위해 파출소로 연행된 후 조사 과정 중의 폭행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헌데 경찰은 이를 숨기기 위해 그를 광주적십자 병원에 행려병자로 입원시켰고 나중에 그가 죽자 행려사망자로 처리해 의대에 해부용 실습교재로 넘기는 만행을 저질렀다.[16]# | |
묘역 | 춘천 | |
성명 | 박관현 | |
출생날짜 | 1953년 6월 19일 | |
사망날짜 | 1982년 10월 12일 | |
주요활동 | 박관현 항목 참조 | |
묘역 | 국립 5.18 민주묘지 | |
4.2.2. 1983년~1985년
성명 | 이윤성 | |
출생날짜 | 1962년 6월 23일 | |
사망날짜 | 1983년 5월 4일 | |
주요활동 | 이윤성은 1981년 성균관대에 입학하여 생활하던 중 1982년 11월 3일에 친구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러다 그가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그는 나흘 뒤에 신체검사도 없이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대하여 군에 있던 중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김두황 | |
출생날짜 | 1960년 6월 23일 | |
사망날짜 | 1983년 6월 18일 | |
주요활동 | 김두황은 1980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1983년 친구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학내활동과 4.19행사 등에 대해서 토론하던 중 3월 8일 연행되었다. 18일 강제로 징집되어 보충대에 입대했는데 3달 정도 지난 6월 18일 두부가 사라진 참혹한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한영현 | |
출생날짜 | 1962년 3월 1일 | |
사망날짜 | 1983년 7월 2일 | |
주요활동 | 한영현은 1981년 한양대학교에 입학하여 민속문화연구부에 가입하고 선배들과 함께 탈연합회에서 활동했다. 82년부터 야학활동을 시작한 그는 부천지역의 노동자들을 가르쳤으나 1983년 1월 야학을 같이하던 선배가 경찰에 취조받다가 그의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그도 경찰에 끌려가 폭행을 당해야 했다. 이후 늑막염에 걸린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17] 신체검사 다음날 바로 입대하여 훈련소도 가지 못하고 군수사기관에서 수사를 받아야 했다. 1주일 간의 시간 동안 그는 대학 운동권 동기들과 선배들에 대해서 말하라는 강요에 시달렸으며 프락치 활동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6월에는 휴가를 받아 서울에 왔지만 선후배들을 만나는 걸 피했고 죄책감과 두려움에 고통받다가 1983년 7월 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최온순 | |
출생날짜 | 미상 | |
사망날짜 | 1983년 8월 14일 | |
주요활동 | 최온순은 1983년 3월 29일 시위를 예비했다는 혐의로 학우 5명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1주일 간 조사를 받고 강제징집되었는데 5달 후인 8월 14일 군에서 그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와 가족들이 군부대에 가니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군에서 온 사람이 그가 자살했다고 말하자 가족은 그가 자살할 리가 없다고 판단해 극렬히 항의하였다. 그러자 군에서는 말을 바꾸어 그가 고참과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다고 전했지만 가족들은 그가 녹화사업 가운데서 죽었을 것이라며 진상규명을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 |
묘역 | 대전 국립현충원[18] | |
성명 | 황정하 | |
출생날짜 | 1960년 12월 5일 | |
사망날짜 | 1983년 11월 16일 | |
주요활동 | 황정하는 1980년 서울대에 합격하여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2학년 때는 야학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러다가 1983년 가을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학교로부터 압박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심리적 고통이 심하였다고 한다. 그 해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방한한다는 소식에 친구들과 함께 민주화 시위를 주동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1983년 11월 8일에 도서관 6층 창문을 통해 5층 베란다로 내려가려고 창틀에 올라서자 열람실에 숨어 있던 사북경찰과 수위들이 주동자들을 잡으러 달려들었다. 황정하는 난간으로 내려오다가 경찰의 제지로 15m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뇌골절상을 입어 11월 16일 운명하였다. 그의 시신은 6시간 만에 화장되어 가족에게 인도되었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한희철 | |
출생날짜 | 1961년 2월 11일 | |
사망날짜 | 1983년 12월 11일 | |
주요활동 | 한희철은 197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가톨릭학생회 활동하며 사회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82년 입대한 그는 휴가 중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시기라 어려움을 겪던 수배학생들을 도우려다가 보안사에게 들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 12월 6일 보안사로 연행되어 녹화사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입대 전의 민주화운동을 했던 것으로 인해 5일 동안 전기고문을 당하며 취조를 받았고 12월 10일에 석방되는 듯했으나 바로 그 다음 날에 총탄을 맞고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박종만 | |
출생날짜 | 1948년 2월 | |
사망날짜 | 1984년 11월 30일 | |
주요활동 | 박종만은 (주)민경교통에 입사하여 노조복지부장을 받아 열심히 활동했다. 1984년 11월 회사가 노조사무장을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해고시켜 버리자 노조 지도부와 파업을 결의하고 단식철야 농성을 벌였다. 11월 30일에 그는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기사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배차일지 뒷장에 적었다. 이 날 11시에 동료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동료가 그를 찾고자 사무실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불을 지른 그가 뛰쳐나왔다. 그는 "노동조합 탄압말라! 부당하게 해고된 기사들을, 사무장을 복직시켜라!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라!"며 외치다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곧 사망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가 이렇게 떠나면 안 되는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였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기혁 | |
출생날짜 | 1965년 2월 7일 | |
사망날짜 | 1985년 1월 | |
주요활동 | 기혁은 부친 기세문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느라 가족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이를 이겨내고 1984년 전남대학교 의대에 합격하였다. 그는 입학 후 바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부친이 아직 복역 중이라 신변을 걱정한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며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1985년 부당유급제[19]에 맞서 투쟁하다가 행방불명되어 그 해 1월 중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장이기 | |
출생날짜 | 1953년 1월 | |
사망날짜 | 1986년 3월 16일 | |
주요활동 | 장이기는 1979년 청주대학교를 졸업하고 형의 의류상을 도우며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정치사회에 관심이 많았는데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글과 민주화 방안, 개헌에 관한 글을 직접 써서 신문사나 정당에 보냈다고 하며 광주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전두환을 처단해야 한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러다 1986년 3월에 예비군 훈련을 갔을 때 거기서 받은 정신교육이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이자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에 항의하고 벽에 걸린 전두환 사진이 든 액자를 깨뜨리고 짓밟았다. 이에 예비군 훈련자들이 함성을 지르기도 했으나 그는 군에 체포되어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조사를 받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가족들은 실종된 그의 행방을 찾다가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가혹행위로 인해 이미 위독한 상태였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홍기일 | |
출생날짜 | 1960년 | |
사망날짜 | 1985년 8월 15일 | |
주요활동 | 홍기일은 1980년 5월 5.18 당시에 시민군으로도 참여한 전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후 건축노동자로 일하면서 5.18 때 느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살아 왔다. 1985년 광복절 오후 1시에 홍기일은 광주항쟁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 앞에 섰는데 '8.15을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을 뿌리다가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성냥을 그어 분신했다. 그는 불에 타는 상태로 전남도청에서부터 광주 동구청까지 뛰어갔으며 병원에 실려갔으나 일주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아버지에게 "절대 비굴해지지 마라. 경찰과 타협하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강인했다. 경찰은 그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강제로 산소호흡을 시키다 저녁에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더니 숨진 그의 시신을 가족장을 치르도록 강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송광영 | |
출생날짜 | 1958년 10월 3일 | |
사망날짜 | 1985년 10월 21일 | |
주요활동 | 송광영은 70년대 중반부터 노동운동에 참여한 노동자였다. 그는 1975년부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는데 거기서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 검정고시를 쳐서 1984년 경원대학교에 들어가쓴데 거기서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학생들과 여러 연구회를 창설해 활동했고 광주학살의 책임을 들어 전두환 정권을 규탄했다. 1985년 9월 17일 그는 "학원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민중생존권 수호하고 독재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면서 분신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 일로 병원에 입원했고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병문안을 오자 "왜 오셨습니까! 오시지 마시고 밖에서 싸워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분신 한 달 후인 10월 21일에 사망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장례식과 분향소 설치는 경찰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우종원 | |
출생날짜 | 1962년 5월 5일 | |
사망날짜 | 1985년 10월 11일 | |
주요활동 | 우종원은 1981년 서울대에 입학한 후 서울대 운동권에서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는 비판의식, 성찰과 함께 따뜻한 마음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1985년 예비군 훈련을 위해 집에 돌아왔는데 자신이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것을 알고 집을 나갔다가 실종됐다. 10월 12일에 경부선 철로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20]##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4.2.3. 1986년
성명 | 박영진 | |
출생날짜 | 1960년 | |
사망날짜 | 1986년 3월 17일 | |
주요활동 | 박영진은 꽤 어려운 삶을 살았으나 야학을 다니면서 노동운동을 알게 되었다. 이후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동일제강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신흥정밀에도 입사해 노동조합 조직을 담당했다. 당시 신흥정밀은 노동자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악덕회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진은 노조 조직을 멈추지 않았다. 1986년 신흥정밀에서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이 일어났고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에 분노한 박영진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면서 분신했다. 병원에 실려간 그는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김세진 | |
출생날짜 | 1965년 2월 20일[21] | |
사망날짜 | 1986년 5월 3일 | |
주요활동 | 김세진 항목 참조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이재호 | |
출생날짜 | 1964년 12월 29일[22] | |
사망날짜 | 1986년 5월 26일 | |
주요활동 | 이재호 항목 참조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변형진 | |
출생날짜 | 1948년 3월 16일 | |
사망날짜 | 1986년 5월 1일 | |
주요활동 | 변형진은 삼환택시에서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다니던 이 회사는 택시 43대로 115명이 일했고 하루 10~12시간씩 일을 시키면서 연장수당은 주지도 않는 악덕회사였으며 노동자들은 세차비에서부터 사고 처리비용까지 모든 것을 처리해야 했고 회사는 이를 신경도 쓰지 않은 걸 넘어 노조 탄압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에 변형진은 이런 전횡에 항의했고 곧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모는 택시가 사장의 자가용을 마주쳤는데도 길을 비켜주지 않고 그냥 나갔다며(...) 1986년 2월 22일 그를 해고시켰다. 이 어처구니 없는 해고 사유에 그는 4월 30일까지 매일 출근투쟁을 벌였다. 변형진은 사장에게 복직시켜 주지 않으면 분신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사장은 콧방귀를 끼며 오히려 죽을테면 죽어보라고 모욕했다. 이에 그는 분신했고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사측은 그의 입원까지 숨기면서 빠른 합의를 보자고 가족들을 닦달하는 추태를 끝까지 보였다. 변형진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이 길 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떳떳하게 잘 사는 세상이 와야 할텐데."라는 말을 남기고 곧 세상을 떠났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이동수 | |
출생날짜 | 1962년 | |
사망날짜 | 1986년 5월 20일 | |
주요활동 | 이동수 항목 참조 | |
묘역 | 미상 | |
성명 | 박혜정 | |
출생날짜 | 1965년 1월 19일 | |
사망날짜 | 1986년 5월 21일 | |
주요활동 | 박혜정은 1983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비교적 평범한 학교 생활을 보내다가 1984년에 2학년이 되면서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며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허나 그 해 9월에 참여한 시위에서 연행되어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부모는 그녀의 학생운동 참여를 막고 통제하려 들었다. 학생운동과 가족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박혜정은 한때 제책공장에 들어가 노동자의 삶을 살기도 했으나 이내 복학했다. 1985년이 되자 그녀는 학업에 충실하고 글쓰기에 집중하며 학생운동과는 멀어진 모습을 보였으나 1986년 들어 다시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과 이동수 열사의 분신을 각각 목도했다. 그녀는 울면서 시위에 참여했고 5월 21일 동기들과 술을 마시다가 집에 돌아간다며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로 가 거기서 투신했는데 투신 전에 남긴 유서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음이다. (중략)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이경환 | |
출생날짜 | 1967년 9월 | |
사망날짜 | 1986년 6월 5일 | |
주요활동 | 이경환은 서울 대성학원에 들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입시생이었는데 1986년 4~5월에 이은 서울대생들의 잇따른 분신과 투신을 알게 되었고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재정권이 그 근본원인이라는 것이었다. 1987년 6월 5일 이경환은 서울 청량리에 위치한 맘모스 호텔 옥상에 올라가 석유가 든 2리터짜리 플라스틱 통 하나와 전두환 정부를 비판하는 유인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반정부 구호를 외치더니 투신하여 운명했다. 그의 투신 이후 언론은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활을 비관해서 벌인 일반적인 자살이라며 그의 죽음을 왜곡했다.# #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신호수 | |
출생날짜 | 1963년 8월 8일 | |
사망날짜 | 1986년 6월 19일 | |
주요활동 | 신호수는 운동권 학생도, 반체제 지식인도 아닌 그저 평범한 가스배달원이었는데 1986년 6월 11일 공안계 형사들에게 갑자기 끌려갔다. 이유인즉슨 그가 살던 예전 집의 장판 밑에서 불온삐라가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방위로 근무할 때 삐라를 모아서 포상휴가를 타기 위해서 모아 놓았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끌려갔고 열흘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가 6월 19일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후 그의 죽음은 숱한 의혹과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김성수 | |
출생날짜 | 1968년 4월 15일 | |
사망날짜 | 1986년 6월 21일 | |
주요활동 | 김성수는 1986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후 연극활동을 주로 했는데 그가 한 연극은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이외에도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68년 6월 18일 그는 자신에게 걸려온 신원 미상의 사람이 한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가 실종되었다. 3일 후 그는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익사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그의 몸에는 세 개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달려 있었다.[23]##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강상철 | |
출생날짜 | 1964년 3월 24일 | |
사망날짜 | 1986년 6월 26일 | |
주요활동 | 강상철은 목포전문대에 다니고 있었지만 1986년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운동에 나섰으며 목포 사회운동청년연합 사무차장 직을 맡았고 평소 다니던 교회의 청년회 총무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중 그 해 6월 6일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고 각 민주단체의 각성을 주장하며 "의로운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요, 승리의 죽임이며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전 민중의 함성이며, 동참이며, 투쟁의 길이며, 승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목포역 앞에서 분신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진성일 | |
출생날짜 | 1964년 1월 26일 | |
사망날짜 | 1986년 11월 5일 | |
주요활동 | 진성일 문서 참고 | |
묘역 | 미상 | |
4.2.4. 1987년
성명 | 박종철 | |
출생날짜 | 1965년 4월 1일 | |
사망날짜 | 1987년 1월 14일 | |
주요활동 | 박종철 항목 참조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김용권 | |
출생날짜 | 1964년 6월 10일 | |
사망날짜 | 1987년 2월 20일 | |
주요활동 | 김용권은 서울대학교에 다니다가 1985년 10월 카투사로 지원하여 복무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1987년 2월 20일 자신이 있던 막사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군에서는 그가 자살했다고 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믿지 않고 '고문 및 의문의 사망에 관한 진상조사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써 고문폭력대책위원회에 제출했으며 '고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 집행위원회도 따로 김용권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의 노력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포기 압박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박선영 | |
출생날짜 | 1966년 9월 8일 | |
사망날짜 | 1987년 2월 20일 | |
주요활동 | 박선영 항목 참조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표정두 | |
출생날짜 | 1963년 4월 1일 | |
사망날짜 | 1987년 3월 8일 | |
주요활동 | 표정두는 5.18 당시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고 항쟁에 참여하여 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는 호남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3년만에 자퇴했는데도 야학 교사 등을 지내며 사회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하남공단의 회사에 입사해 일하면서도 사회운동을 지속했다. 이후 1987년 3월 6일 서울 세종로에 나타나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캐로신을 온 몸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 분신하면서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져라!"고 외쳤고 미국대사관으로 달려들었지만 도착하지 못하고 곧 쓰러졌다. 지나가던 행인이 불을 끄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교통경찰이 와서야 몸에 붙은 불이 꺼졌다. 그는 이틀 후 숨을 거두었다. 그가 분신할 때 가지고 있었던 가방 안에는 전두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의 쪽지와 미국 고위인사의 방한 소식이 담긴 신문뭉치가 있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황보영국 | |
출생날짜 | 1961년 9월 16일 | |
사망날짜 | 1987년 5월 25일 | |
주요활동 | 황보영국은 부산 출생으로 부산 성지공업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울산 현대 중공업, 부산 삼화고무, 태화고무, 우성사 등에서 전기용접 기술, 중장비 운전기술 등을 익힌 노동자로 성장했지만 그냥 노동자가 아닌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던 노동자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그 해 3월 박종철 49재에 참여해서 일주일 간 구류를 살았다. 그러다가 1987년 5월 17일 부산상고 앞에서 석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했다. 분신하면서 "독재 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고 외치며 100여 미터를 달리다가 쓰러졌다. 분신 8일 후인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정경식 | |
출생날짜 | 1959년 12월 15일 | |
사망날짜 | 1988년 3월 2일 | |
주요활동 | 정경식은 19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하여 1987년 2월에 임금동결에 항의하는 식사거부에 동참했고 공장 내의 노동조합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노조 대의원이 되어 노조지부장에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사람을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노동조합 활동가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임했다. 그러던 중 타 후보를 지지하는 조합원과의 갈등으로 인해 고소당하여 경찰서 출두를 받았고 1987년 6월 8일 실종되었다.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는 그의 죽음에 국가기관이 개입했지만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 |
묘역 |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 | |
성명 | 이이동 | |
출생날짜 | 1966년 4월 | |
사망날짜 | 1987년 6월 15일 | |
주요활동 | 이이동은 1985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학생들과 토론하는 등 활발한 시절을 보냈으며 교내외 시위와 집회에도 자주 참여했다. 그러던 차에 1987년 1월 10일 입대하여 군수사령부 제9탄약창 경비중대에 들어갔는데 5개월 후인 6월 15일에 총에 맞은 채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제기된 수많은 의문점들이 있으나 아직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이태춘 | |
출생날짜 | 1960년 2월 7일 | |
사망날짜 | 1987년 6월 24일 | |
주요활동 | 이태춘 항목 참조 | |
묘역 | 양산 가톨릭 공원묘역 | |
성명 | 이한열 | |
출생날짜 | 1966년 8월 29일 | |
사망날짜 | 1987년 7월 5일 | |
주요활동 | 이한열 항목 참조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채광석 | |
출생날짜 | 1948년 7월 11일 | |
사망날짜 | 1987년 7월 12일 | |
주요활동 | 시인. 1975년 김상진이 할복한 후 추모시위가 발생했는데 거기서 채광석은 자기가 다니던 단과대학의 시위책임을 맡았다가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사회운동에 계속 참여하다가 1980년 계엄포고령으로 체포되어 40일 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83년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1984년에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을 도와 그곳의 실행위원이 되었으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화예술분과위원장이 되어 박노해 시인을 발굴해냈다. 하지만 1987년 7월 12일 문화운동에 헌신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민주문화인장으로 거행되었다.## | |
묘역 | 팔당 공원묘지→국립 5.18 민주묘지[24] | |
성명 | 이석규 | |
출생날짜 | 1966년 11월 30일 | |
사망날짜 | 1987년 8월 22일 | |
주요활동 | 이석규 항목 참조 | |
묘역 | 남원 | |
성명 | 이석구 | |
출생날짜 | 1955년~1956년 | |
사망날짜 | 1987년 9월 19일 | |
주요활동 | 이석구는 1980년 (주)조홍택시에 입사하여 1985년 노동조합을 결성했지만 곧 회사의 방해로 노조는 와해되어 버렸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노조 결성에 주력하여 1987년 35명의 기사들과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자신은 노조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사는 구사대를 동원해 노조를 탄압하고자 했고 그는 사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사장이 이를 묵살하자 분노한 그는 9월 2일 택시 위에서 온 몸에 신나를 끼얹고 "노조탄압 중지하라!"고 외치면서 분신했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도의적 책임만 지겠다면서 오리발을 내밀었고 분노한 유가족과 노동자들은 고인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장례식을 연기하기로 했다. 마침내 10월 1일이 되어서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최우혁 | |
출생날짜 | 1966년 3월 4일 | |
사망날짜 | 1987년 9월 8일 | |
주요활동 | 최우혁은 1984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동아리 '경제법학연구회'에 가입했다. 거기서 그는 각종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86년 하반부기부터 그는 노동운동을 할 생각을 했고 군입대 전까지는 민주화 운동을 계속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1986년의 시위에서 그가 최루탄에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가족들의 권유에 의해 1987년 4월에 군에 입대했으나 5달 만인 9월 8일 분신에 의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그는 군대에서도 보안사에 의해 보직이 변경되거나 세세한 감시를 받았다고 하며 운동권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져 조교와 부대원들에 의해 가혹행위도 당했다고 한다. 한편 윤석양이 폭로한 서울대생들의 동향파악 관련 자료에서도 그의 이름이 있었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김수배 | |
출생날짜 | 1959년 6월 19일 | |
사망날짜 | 1987년 10월 16일 | |
주요활동 | 김수배는 1986년 6월 고려화학에 입사하여 일하던 중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노동운동에 나서서 1987년 8월 경에는 노동조합 사무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헌신하던 노동조합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당시 노조에서는 조합비를 징수하면서 일일이 서명을 받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사무장이 일괄하여 대리서명한 것이 고발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사문서 위조로 고발당해 10월 16일 아침에는 고발장이 그의 앞으로 도착했다. 허나 그것은 노조 사무장이 된 후 계속 되어온 회사의 사직 권유가 실질적인 압박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 날 점심시간에 김수배는 조합원들과 확대간부회의를 열었고 회의가 끝나자 담담하게 도료 생산부 쪽으로 향했다. 그는 용제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자재창고에서 분신했다. 분노한 가족들이 진상을 알리는 호소문을 배포하자 회사는 당황하여 가족들과 합의하여 장례를 치르게 했다.## | |
묘역 |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 | |
성명 | 김성애 | |
출생날짜 | 미상 | |
사망날짜 | 1987년 11월 3일 | |
주요활동 | 김성애는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중학교 3학년이던 1985년부터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1986년 그녀는 진흥요업주식회사라는 곳에 입사했는데 이곳은 도자기와 티일을 제조하는 회사로 작업환경이 매우 나빴다. 그녀는 여기서 일하다가 그 해 9월 10일 작업장 내의 해로운 화학제품으로 인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 뇌진탕 판정을 받고 반신불수가 되어버렸다. 회사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킨 후 가족들을 협박해 산재처리를 해주는 대신 진상을 밝히지 말 것을 합의했다. 이후 그녀는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보냈는데 그러던 차에 가족과 회사 간의 합의서를 보게 되어 손해보상을 청구하는 투쟁에 나섰다. 김성애는 민정당 총재던 노태우에게 진정서를 보낼 정도로 절박하게 싸웠지만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이에 11월 3일 "산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며 입원치료를 받던 성모자애병원 7층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하지만 정권은 그녀의 장례식마저 경찰과 백골단을 동원해 막아서는 만행을 저질렀다.# | |
묘역 | 부평 공원묘지 | |
성명 | 정연관 | |
출생날짜 | 1966년 12월 | |
사망날짜 | 1987년 12월 4일 | |
주요활동 | 정연관은 대구 계명대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살던 중 계명대에서 상영된 5.18 민주화운동 관련 전시회와 영상자료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변혁운동에 관심을 보이다가 1986년 군에 입대해서도 여당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보였다. 1987년 대선을 위한 군부재자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그는 소신껏 야당 후보를 찍었다가 야당 기표자가 발생했다며 가해진 가혹행위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 |
묘역 | 대전 국립묘지 | |
성명 | 박응수 | |
출생날짜 | 1959년 12월 1일 | |
사망날짜 | 1987년 12월 5일 | |
주요활동 | 1987년 대통령선거가 점점 다가오면서 노태우에 대항하여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를 해야한다는 시위, 농성,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박응수 또한 이런 여론에 공감하고 있던 노동자였다. 그는 1987년 12월 5일 충남 대전 중동 홍명상가 앞에서 민주당 청중동원용 버스에 올라가 타고 있던 사람들을 내리게 했다. 그러고는 직접 버스를 몰고 대전역 광장에까지 갔다. 거기서 경찰과 대치하던 박응수는 "후보 단일화 하라!"고 외치며 버스와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했다. 분신 이후 경찰들에 의해 대전 을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곧 숨졌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단일화는 이뤄지지 못했고 정권은 그의 영안실을 경찰들을 동원해 봉쇄하고 나중에는 민주국민장을 계획하고 실행하려던 유가족들과 시민들을 습격해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강제로 가족장을 치르게 했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박태영 | |
출생날짜 | 1967년 10월 9일 | |
사망날짜 | 1987년 12월 10일 | |
주요활동 | 박태영은 1987년 목포대학교에 입학하여 대학 수습기자로 일했다. 그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키웠고 학생운동에도 참여했다. 6월 항쟁 이후 그는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제도교육 철폐하고 민주교육 실시하라'고 외치며 42일간의 단독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던 대통령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은 12월 9일 "오 자유화여, 거국중립내각 쟁취하자!"고 외치고 분신하여 다음 날 사망했다. 그의 유서에는 "이 땅의 민족 지성인에겐 행동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억눌림도, 갈라짐도, 분노도, 저항도, 시행착오도, 피흘림도 여기서 끝냅시다. 民主人本(민주인본)"이라 적혀 있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4.2.5. 1988년~1989년
성명 | 이대건 | |
출생날짜 | 1956년 6월 16일 | |
사망날짜 | 1988년 1월 8일 | |
주요활동 | 이대건이 일하던 우성택시에서는 노동조합원들이 87년 11월부터 마산, 창원지역의 노동자들과 공동대표협의회를 구성하여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와 정부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집회,시위 등을 탄압했다. 그로 인하여 공동투쟁은 실패하고 각개 회사 별로 노사 간 협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우성택시는 노동자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에 항의하던 이대건은 1월 6일 협상이 결렬되자 이에 항의하며 분신했다. 그는 죽기 전에도 자신을 차장온 회장에게 "배가 고파서 죽도록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뭐하러 왔느냐, 보기 싫다. 당장 나가라"고 외치며 끝까지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 |
묘역 | 경남 창녕군 대지면 | |
성명 | 김장수 | |
출생날짜 | 1957년 9월 4일 | |
사망날짜 | 1988년 3월 9일 | |
주요활동 | 김장수는 고등학교 중퇴 후 택시기사가 되어 1985년 경기교통에서 일했다. 1987년이 되자 이 곳의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결성했는데 그는 노동조합의 중심으로서 노동조합위원장이 되어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노조탄압을 위해 회사는 아무 이유도 없이 노조의 총무를 해고했고 이에 노동조합은 일주일 간의 파업농성을 벌였다. 이후 단체교섭이 이루어졌지만 회사는 노동조합을 분열시키고자 그와 다른 조합원들을 부당하게 해고시켰다. 김장수는 이 조치에 항의하여 투쟁하다가 조합원들을 위한 글을 하나 남기고 분신했다.## | |
묘역 | 김포 고려공원묘지 | |
성명 | 오범근 | |
출생날짜 | 1951년 11월 15일 | |
사망날짜 | 1988년 3월 10일 | |
주요활동 | 오범근은 1975년 후지카대원전기주식회사에서 입사하여 일하던 중 왼손 손가락 4개를 잃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10여년 후인 1988년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 적극 참여하여 '임금인상 25%, 학자금,가족수당 쟁취, 어용노조 퇴진' 등의 요구를 회사에 했다. 회사는 구사대를 동원해 조합원들을 감금 및 폭행했고 분노한 그는 3월 10일 사장회의실로 들어가 항의하던 중 음독한 채로 사망했다. 경찰은 그가 신변을 비관해 자살했다고 밝혔으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그의 죽음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 때문이라고 보았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최윤범 | |
출생날짜 | 1960년 | |
사망날짜 | 1988년 4월 30일 | |
주요활동 | 최윤범은 여러 회사들을 거치며 일을 하다가 고려피혁 성남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공장은 슈발리에 구두를 생산하는 대우계열의 중소기업이었다. 하지만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이 문제였는데 이에 항의하여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하지만 지부장 선거 과정에서 회사와 어용노조에 의해 민주노조를 지향하던 노동자들이 패배했고 회사는 이들에 대해 부서이동과 부당해고를 자행했다. 노동자들은 농성에 들어갔고 회사아의 충돌이 일어났다. 농성이 시작된 지 3일이 지나자 노동부에서 회사와의 협상에 들어갔으나 회사는 물품을 빼돌려 농성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최윤범은 이에 항의해 관리자들과 몸싸움을 하다 신나를 몸에 붓고 분신하고 말았다. ## | |
묘역 | 미상 | |
성명 | 조성만 | |
출생날짜 | 1964년 12월 13일 | |
사망날짜 | 1988년 5월 15일 | |
주요활동 | 조성만 항목 참조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최덕수 | |
출생날짜 | 1968년 | |
사망날짜 | 1988년 5월 26일 | |
주요활동 | 최덕수는 1987년 단국대학교에 합격하여 '서도회', '호남향우회', '동학운동사 연구회' 등의 서클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88년 1학기에는 가정형편으로 인해 휴학을 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의 정치상황은 제5공화국에 대한 청산이 지지부진하던 때였다. 이에 분노한 최덕수는 휴학 중이던 5월 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성명서를 낭독하며, "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 발동하라!"고 외쳤다. 그리곤 다음 날 시계탑 앞에서 분신했다. 그는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9일만에 숨을 거뒀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장용훈 | |
출생날짜 | 1959년 | |
사망날짜 | 1988년 5월 30일 | |
주요활동 | 장용훈은 현대교통 택시기사로 일하며 사내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88년 2월 28일 그는 자전거와의 경미한 접촉사고를 내어 자비로 합의를 하였는데 회사는 이를 문제 삼아 그에게 불리한 경위서를 쓰라 했고 그는 거부했다. 그러자 회사는 그의 직무를 정지시키고는 그를 폭행했다. 억울하고도 분한 마음에 장용훈은 5월 24일 회사의 조치에 항의하며 "뒤를 잘 부탁한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가정은 파괴당하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이놈의 세상 비통해서 살 수 없다."고 외치곤 분신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박래전 | |
출생날짜 | 1963년 4월 17일 | |
사망날짜 | 1988년 6월 6일 | |
주요활동 | 박래전 항목 참조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문용섭 | |
출생날짜 | 1941년 10월 28일 | |
사망날짜 | 1988년 6월 9일 | |
주요활동 | 문용섭은 1986년 광무택시에 입사하여 운수노동자로 일했고 그 해 4월에는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어 민주노조 운동에 투신했다. 1988년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이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해 총파업을 시행하자 이를 지지했고 자신의 회사에도 파업을 벌이고자 노동조합에서 결의를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회사는 구사대를 동원했으며 노동조합 집행부도 소극적으로 나와 총파업 동참은 무산됐다. 이후 그는 회사의 친인척 비리에 대해 조사하고 항의하다가 회사의 사주를 받은 구사대에 의해 폭행당하다가 뇌사상태에 빠져 며칠 후 사망했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문송면 | |
출생날짜 | 1971년 2월 14일 | |
사망날짜 | 1988년 7월 2일 | |
주요활동 | 문송면 항목 참조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성완희 | |
출생날짜 | 1959년 6월 24일 | |
사망날짜 | 1988년 7월 8일 | |
주요활동 | 성완희는 1986년 태백 철암동 강원탄광에 채탄후산부로 입사해 일하고 있었다. 그는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여 그 해 8월 동료들과의 파업에서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주도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친 부당해고에도 불구하고 동료 노동자들과의 투쟁을 통해 복직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회사는 그의 복직을 도운 동료 하나를 해고시켰다. 그 동료가 단식투쟁에 나서자 성완희도 그를 복직시키고자 해직 동료의 단식 8일째가 되는 88년 6월 29일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석유 1통씩을 들고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단식농성에 동참했다. 이에 회사는 구사대를 동원하려 여러 차례 노조사무실로의 난입을 시도했다. 성완희는 이들보고 들어보면 분신하겠다며 경고했지만 구사대는 그런 그를 오히려 비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고 끝내 그는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분신 중에도 그는 부당해고 철회, 인권탄압 중지를 외쳤고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고도 말했다. 그는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곧 쓰러졌고 그러면서도 "강원산업에 제발... 민주노조 좀... 건설해 주십시오."라고 절규했다. 그의 몸은 75%가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고 그는 10일 간의 투병 끝에 운명했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양영진 | |
출생날짜 | 1967년 3월 16일 | |
사망날짜 | 1988년 10월 10일 | |
주요활동 | 양영진은 1986년 부산대학교에 입학하여 교내 문예잡지인 <부대문학>에서 글을 쓰며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내었고, '통일시 공동창작'에도 참여해 통일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88년부터 8.15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성사시키고자 부산지역에서 선전 활동을 도맡고 있었는데 그 해 8월 방위병을 입대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통일 문제에 대해 고뇌하던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고 1988년 10월 10일 그는 부산대학교 재료관 옥상에서 "이제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 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 말하곤 투신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이문철 | |
출생날짜 | 1954년 | |
사망날짜 | 1988년 11월 6일 | |
주요활동 | 1988년 5월부터 6월까지는 각 시내버스 회사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1988년 6월 말에 이문철을 포함한 대원여객의 노동자들도 연장근로 수당지금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다. 그러자 회사는 그가 몰던 원래 차량을 폐차시키고는 헌 차량을 그에게 주었다. 이에 그는 공정한 배차를 요구하며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하자 회사는 인사위원회를 불법으로 열고는 그를 해고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런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며 몇몇 동지들과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따졌으나 회사는 끝까지 무성의로 일관했다. 이문철은 끝내 격분하여 신나를 끼얹고 분신했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서도 그는 노동자를 하인이나 종으로 취급하는 주종관계가 고쳐져야 한다며 분개하다가 숨을 거뒀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김윤기 | |
출생날짜 | 1964년 12월 18일 | |
사망날짜 | 1989년 4월 3일 | |
주요활동 | 김윤기는 1983년 국민대학교에 입학해 동아리 '청문회'에서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986년의 인천 5.3 운동에 참여한 그는 실형 1년을 선고받았으나 출소 후 1988년 7월 덕진양행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그 해 11월 29일 그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어 회사와 교섭에 들어갔다. 헌데 회사가 공장을 이전하는 방식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려 했다. 이에 노조는 공장이전을 철회하라며 파업농성에 들어갔으나 회사와의 협상은 계속 결렬되기만 했다. 김윤기는 회사의 확실한 답변을 요청하며 신나를 끼얹고 항의했는데, 몸에 불이 붙으며 쓰러져 사망했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남태현 | |
출생날짜 | 1967년 8월 30일 | |
사망날짜 | 1989년 4월 8일 | |
주요활동 | 남태현은 1986년 서울교대에 입학하여 학원 내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동지들과 학교에 기성회비의 사용내용을 공개할 것과 예산과 결산에서 학생대표에 참여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에 대한 투쟁은 부분적인 수업거부에만 끝나고 마무리될 판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남태현은 1989년 4월 7일 오후 7시 경 강의동 3층에 나타났다. 그는 거기서 반미출정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부르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미제와 독재의 가슴을 찔러 총!"이라 외쳤다. 그러고는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교대인이여 깨어나라!'는 혈서를 한 장 남기고 분신하였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최완용 | |
출생날짜 | 1964년 11월 2일 | |
사망날짜 | 1989년 4월 9일 | |
주요활동 | 최완용은 1983년 인천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공장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주일만 되면 산업재활원을 방문하여 산업재해를 당한 환자들을 도왔다. 하지만 그 자신도 1989년 3월 1일 휴일임에도 출근하여 노동하다 프레스 기기에 의해 오른손 손가락 4개가 잘리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중앙병원 산업재활원에서 재활 기술을 배우길 바랬으나 회사와 병원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그는 산재 없는 세상을 희망하고 산재노동자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유서를 쓰고는 부평 철마산에서 분신하여 사망했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이철규 | |
출생날짜 | 1964년 5월 6일 | |
사망날짜 | 1989년 5월 10일 | |
주요활동 | 이철규는 1982년 조선대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고 1985년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2년 동안 수감되어 있기도 했다. 1987년 7월 8일 6.29 선언으로 인하여 가석방된 그는 1988년 2학기부터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의 편집위원이 되어 통일운동, 사상과 표현의 자유 보장 운동, 북한 바로 알기 운동 등에 나섰다. 그리고 사망 전가지 호남대학교 활동가들의 학습모임을 담당했다. 그러던 1989년 이철규는 <민주조선>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배를 받던 중에 갑자기 사라졌고 얼마 후 수원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그의 죽음에는 경찰은 물론이고 제3의 공안기관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김종수 | |
출생날짜 | 1966년 3월 21일 | |
사망날짜 | 1989년 5월 4일 | |
주요활동 | 김종수는 동대문 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다가 1988년 (주)서광근로공장에 입사한 노동자였다. 그도 노동운동에 참여한지라 다음 해 1월 노동조합 쟁의부장에 임명된다. 한편 그가 일하던 공장의 노동조합은 88년에 부평공장과 구로공장의 통합대의원대회를 열어서 부평공장에서 위원장이 선출되는데 그 위원장은 구로공장에는 노조지부 집행부를 구성하지 않았다. 이에 조합원들은 집행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해 파업을 벌였다. 1989년 5월 3일에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되는 듯 했으나 회사의 번복으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분노한 김종수는 다음 날 "민주노조 사수하자! 셋방살이 노동자의 서러움은 싫다! 동지들을 처벌하지 마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한강성심병원에 옮겨졌으나 그 날 밤 숨졌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박진석 | |
출생날짜 | 1969년 3월 26일 | |
사망날짜 | 1989년 6월 4일 | |
주요활동 | 박진석은 1984년 5월 대우조선에 입사해 일하며 노동조합 소위원으로 활동했다. 89년 5월이 되자 대우조선의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회사와의 교섭에 들어갔는데 회사는 노동조합의 요구조건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임금동결이 아니면 폐업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섰다. 그러던 1989년 5월 29일 작업반장이 박진석에게 두 장의 문서를 건넸다. 그것은 회사 구사대의 헌장과 입회원서였다. 이에 분개한 박진석은 "더 이상 노동자와 노동자 간의 싸움을 유발시키지 말라!"라며 일갈하고는 분신 및 투신하였다. 그는 부산 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숨졌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이상모 | |
출생날짜 | 1969년 10월 21일 | |
사망날짜 | 1989년 5월 29일 | |
주요활동 | 이상모는 광주직업훈련원을 수료하고 1986년 대우조선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했다.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과 더불어 대우조선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노동조합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와중에 박진석이 분신하자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크게 분개했다. 그는 마침 이 날 작업이 끝난 후 집회에 나가기로 했었는데 그 집회마저 취소된 것을 알고는 더욱 분노했다. 이후 그는 동료와 술을 한 잔 마시며 "평소에 분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5월 29일 저녁 그는 친구에게 라면을 끓여먹는다며 알콜을 빌렸고 다른 아는 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대우조선 제3기숙사 7동 옥상에 올라가 분신 후 투신하였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이종대 | |
출생날짜 | 1948년 7월 30일 | |
사망날짜 | 1989년 7월 17일 | |
주요활동 | 이종대는 기아산업에서 20년 정도 일한 잔뼈 굵은 노동자였다. 또한 그는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노조원들과 함께 어용노조에 맞서 싸우며 노조 대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89년 1월 회사가 조합원들이 뽑은 민주노조 지향의 대의원을 이력서 허위기재를 들어 해고하자 그는 임시 대의원 대회에서 동료 대의원 해고에 대한 복직운동을 벌였다. 또 3월에는 해고직원 복직, 임금인상, 노조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를 통해 기아산업 노동조합은 어용노조를 퇴진시키고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정권의 탄압과 회사의 개입으로 인해 어용노조 집행부가 다시 꾸려져 조합원들에 대한 해고를 마구 자행했다. 이종대는 부당해고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으나 회사는 그마저 휴일에 특근을 했다는(...) 기상천외한 이유를 들어 해고했다. 이에 그는 "나의 희생을 끝으로 더 이상 부당해고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며 분신했고, 2주 후 세상을 떠났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이내창 | |
출생날짜 | 1962년 | |
사망날짜 | 1989년 8월 15일 | |
주요활동 | 이내창 문서 참조. ##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이재식 | |
출생날짜 | 1952년 5월 20일 | |
사망날짜 | 1989년 12월 11일 | |
주요활동 | 이재식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머슴살이, 생선장사, 이발사, 우체국 집배원 등 다양한 직장을 거치며 15년 간 노동자로 살았다. 그는 결혼 이후 거제도로 옮겨와 대우의 하청회사였던 성흥사, 한국의장 등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89년 6월부터는 부인과 함께 호떡을 팔아보고자 하여 거제군 신협읍 읍사무소에서 노점상을 했다. 하지만 읍사무소는 대책도 없이 단속과 철거를 시행했다. 아직 그는 밑천을 많이 들여 노점상을 시작했으나 수익은 매우 미미한 상황이었다. 그 해 10월 16일이 되자 단속반은 드디어 노점 손수레를 압수하려고 했다. 이재식은 단속반에게 통사정을 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그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분신하고 말았다. 그는 57일 간의 투병 끝에 12월 11일 사망했다. 그는 노점상 중 최초의 열사였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4.3. 1990년대
4.3.1. 1990년
성명 | 김용갑 | |
출생날짜 | 1966년 1월 29일 | |
사망날짜 | 1990년 3월 28일 | |
주요활동 | 김용갑은 1989년 속초 동우전문대에 입학하여 이곳의 대학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학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려 했다. 대학신문의 편집자율권을 요구했으며 '동우학원민주실천위원회'에 가입하여 자신의 학교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들어가도록 힘썼다. 1989년 11월 그는 동우전문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학교 재단의 비리를 밝히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학교 직원, 반대파 학생 등에 의해 7차례의 납치, 폭력, 사퇴 협박을 당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90년 3월 27일 학생들과 술을 마신 후에 속초시 도로공사연수원 앞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후 학교 내의 폭력배가 자신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며 자수하였다. 하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단순 교통사고라기보다는 그 동안 학교 내의 폭력학생들을 장학금으로 사주해 운동권 학생들에게 폭력행위를 자행하게 한 학교 측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이영일 | |
출생날짜 | 1962년 | |
사망날짜 | 1990년 5월 3일 | |
주요활동 | 이영일은 자동차 정비 기능을 익힌 노동자로서 1989년 4월 (주)통일에 입사했다. 그는 여기서 노동조합 대의원을 맡았는데 마침 회사와 경찰은 노동운동을 극렬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의 어머니에게 찾아가서는 "자식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만두게 하라"고 협박까지 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는 괴로움에 빠졌고 부모자식을 이간질하면서까지 자행되는 노조 탄압에 분노했다. 1990년 5월 3일 그는 이런 탄압들에 저항하여 분신 및 투신하였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김수경 | |
출생날짜 | 1972년 | |
사망날짜 | 1990년 6월 5일 | |
주요활동 | 김수경은 1988년 대구경화여고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다. 당시 그녀의 학교는 전교조와 관련하여 그녀의 담임교사를 포함해 6명의 교사가 해직당한 상태였다. 이에 그녀는 학생회 대의원으로서 교사들의 징계반대 활동에 열심히 참가했다. 그녀는 징계 반대 시위를 기획, 주동했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빨갱이', '운동권'으로 찍히게 된다. 1990년 그녀는 경화여고 학생회 총무부장이 되는데 그 해 6월 5일 모 교사로부터 반항적이라며 따귀를 맞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욕을 당했다. 결국 그녀는 "전교조와 관련해 이런 식으로 찍힌 학생은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 죽음이 왜곡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유서를 쓰고는 그 날 밤 영남대학교 인문관 4층 옥상에서 투신해 운명했다.## | |
묘역 | 대구 현대공원 | |
성명 | 최태욱 | |
출생날짜 | 1968년 9월 16일 | |
사망날짜 | 1990년 7월 14일 | |
주요활동 | 최태욱은 1990년 2월 경북 청도읍 무등동의 주신기업에 입사하여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3개월도 안 되어 부당해고를 당하자 그는 회사의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조위원장이 되어 복직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6일 만에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달 말에 회사는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를 포함한 조합원 14명을 야간 근무에 배치했다. 이에 조합원들이 반발하여 퇴근하자 이들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해고했다. 이 부당해고에 항의하던 최태욱은 1990년 7월 8일 청도 천주교 성당에서 끝내 분신하여 90세의 노모, 아내, 3살 난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 |
묘역 | 경산 장미공원 | |
성명 | 최동 | |
출생날짜 | 1960년 8월 14일 | |
사망날짜 | 1990년 8월 7일 | |
주요활동 | 최동은 1980년 성균관대에 입학하여 '동양사상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83년 5월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다 처음으로 감옥에 갔고, 이후 1984년부터는 부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는 1986년에는 반제동맹당 사건으로 도피생활을 했었고, 1988년 인천부천노동자회(인노회)의 결성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89년 인노회가 검찰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그도 잡혀가 20여 일 동안 고초를 겪다가 불면증, 실어증, 우울증, 정신분열증세를 보였다. 이후 출소하여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재활 노력을 했지만 상황은 악화되어 결국 1990년 8월 7일 한양대 사회과학대에서 분신하여 사망했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박성호 | |
출생날짜 | 1961년 11월 25일 | |
사망날짜 | 1990년 9월 11일 | |
주요활동 | 박성호는 태백 출신으로 고향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했으며 광산노동운동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다. 1989년 그는 안산 금강공업(주)에 입사했다. 여기서 그를 중심으로 1990년 8월 10일 노동조합이 건설되었으며 그는 노조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노동조합은 회사에 임금교섭과 단체교섭을 요구했으나 회사는 교섭이 끝난 후 회사의 물품을 가지고 몰래 빠져나갔다. 이에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회사 앞에서 농성을 하자 회사는 공장을 무기한으로 휴업하겠다고 공고했다. 게다가 경찰은 농성을 하는 사람들을 포위해 쫓아내고자 했다. 이에 박성호는 신나를 몸에 뿌리고는 더 가까이 오면 죽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무시했고 경찰 책임자는 그가 들고 있던 라이터를 뺏으려 했다. 그러다 불길이 발생하여 그의 몸에 불이 옮겨붙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허나 경찰은 그를 구조하기는커녕 불을 끄려고 달려드는 노동자들을 진압하느라 바빴다. 결국 그는 화상으로 인해 9월 11일 사망했다.## | |
묘역 | 미상 | |
성명 | 원태조 | |
출생날짜 | 1953년 7월 7일 | |
사망날짜 | 1990년 9월 18일 | |
주요활동 | 원태조는 1989년 금강공업(주)에 입사하여 민주노조가 결성되었을 때 노조 후생복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노동조합은 결성된 후 회사와의 교섭을 진행했으나 회사는 교섭이 끝나자 물품을 빼고 도망가버렸다. 이윽고 노동자와 가족들의 항의 농성이 시작되었고 경찰은 이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박성호 열사는 신나를 뿌리고 분신을 경고했는데 경찰 책임자가 달려들어 라이터를 든 손을 비트는 과정에서 불이 발생했다. 불은 박성호 열사는 물론이고 그의 옆에 있던 원태조에게까지 붙어 타올랐다. 하지만 경찰과 회사는 분신한 두 명을 구하는 것보다 농성을 진압하는데 급급했다. 이로 인해 그는 9월 18일 사망했다.## | |
묘역 | 부산 대정공원 | |
성명 | 심광보 | |
출생날짜 | 1972년 12월 5일 | |
사망날짜 | 1990년 9월 8일 | |
주요활동 | 심광보는 자신의 학창시절 전교조에 참여하던 선생님으로부터의 교육을 통해 학교 내의 비교육적 현실과 참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고교 2학년 대 가정형편으로 인해 휴학을 하게 되었는데 학교 측은 그의 휴학에 대하여 "가난해서 못 다닌다는 것은 이유가 안된다."며 아예 자퇴할 것(...)을 종용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휴학하여 신문판매, 외판원을 거치며 사회 불평등과 모순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그 후 용역회사를 다니다가 1990년 9월 7일 충주 성서동의 한 건물 3층 옥상에서 "농민이여, 농민의 깃발을! 노동자여, 노동의 횃불을!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하였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최응현 | |
출생날짜 | 1969년 8월 29일 | |
사망날짜 | 1990년 11월 8일 | |
주요활동 | 최응현은 1987년 한양대학교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나섰다. 1988년 전방입소 반대투쟁에 참여하여 전방입소 반대 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그 해 6월 구속되어 11월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1989년에 다시 복학을 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다시 휴학하고 복학을 하는 등 고생을 했다. 하지만 운동에 대한 의지만은 남아 있었다. 최응현은 1990년 11월 8일 민주화운동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유서를 쓰고는 한양대 교내 건물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4.3.2. 1991년
- 이 시기의 열사들의 발생에 대한 주된 원인은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참고
성명 | 남현진 | |
출생날짜 | 1970년 2월 22일 | |
사망날짜 | 1991년 2월 3일 | |
주요활동 | 남현진은 19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사상연구회', 영어과 학회를 거치며 학생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는 제5공화국 비리척결, 노동운동 탄압중지, 통일운동 등에 나섰고, 총학생회 간부로서 모교 운동권의 투쟁 방향과 집회, 시위의 실무를 맡았다. 당시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인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운동권을 향한 공안당국의 주시는 매우 따가웠는데, 이 시기에 그는 군에 입대를 한다. 허나 3개월 만인 1991년 2월 3일 소속부대 인근의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단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그의 학생운동 전력을 안 부대 지휘관들이 그를 예의주시할 것을 명령했고 그가 사건 당일 구타를 당했으며,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었다고 한다.##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성명 | 강경대 | |
출생날짜 | 1972년 2월 4일 | |
사망날짜 | 1991년 4월 26일 | |
주요활동 | 강경대 항목 참조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박승희 | |
출생날짜 | 1971년 4월 12일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19일 | |
주요활동 | 박승희는 1990년 목포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가정대학 과대의원으로 활동했으며 학교 교지 <용봉> 편집위원으로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전교조와 관련하여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었으며 대학에서는 더욱 진지하게 학생운동에 임하곤 했다. 그녀는 또 환경에도 관심이 있어서 샴푸와 린스 대신 비누를 썼으며 하이타이와 퐁퐁도 쓰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는 1991년 강경대의 사망소식을 듣고 분개했으며 이로 인해 분신을 결심했다. 분신 전날인 4월 28일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며 안아준 후 4월 29일 전남대에서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고 외치고는 분신했다. 그녀는 병원에 실려가 21일 간의 힘겨운 투병 끝에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분신은 1991년을 뜨겁게 달군 분신정국의 첫 신호탄이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김영균 | |
출생날짜 | 1971년 11월 4일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2일 | |
주요활동 | 김영균은 고등학교에서부터 교육,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하며 삶에 대한 고민도 하곤 했다. 그는 1990년 안동대학교에 입학하여 '민속문화연구회'를 결성해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농촌운동과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해 말 절친의 형이자 '목마름'의 조언자였던 최응현 열사의 죽음을 겪어야 했다. 이 사건 후 그는 곧잘 "도망갈 곳을 만들면 안 된다."였다. 이후 그는 1991년 4월 경 민속학과 부학생회장, 솔뫼 교지편집위원회 대외사업부장을 맡다가 1991년 5월 1일 교내에서 열린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대인 결의대회' 중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새벽에는 집회를 준비하고, 아침에는 선전을 하며 북을 치다가, 집회 시작과 더불어서는 몸에 불을 지른 것이다.## | |
묘역 | 안동대 교내 | |
성명 | 천세용 | |
출생날짜 | 1971년 5월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3일 | |
주요활동 | 천세용은 집안형편이 어려운지라 낮에는 건설현장, 세차장 등에서 노동을 해 돈을 마련하곡 밤에는 공부를 하며 활동했다. 그리하여 그는 1990년 경원대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사 연구회인 '한얼'에서 활동했다. 1991년 초에 들어 강경대가 사망하고 박승희, 김영균이 분신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 역시 분개했는데, 마침 그가 다니던 경원대에서는 축제와 체전이 있는 터라 그 사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어떻게 학생들을 깨우칠 수 있게할까를 고민했고 결국 1991년 5월 3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4만 학도 결의대회'가 열릴 때 국기게양대 난간에서 분신하고는 6m 아래로 투신했다. 그가 분신한 당일에 쓴 글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열사여, 그대들은 우리의 투쟁 속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힘을 내자! 열사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약해질 수 없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박창수 | |
출생날짜 | 1958년 7월 28일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6일 | |
주요활동 | 박창수는 1981년 7월부터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배관공으로 입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운동에 동참하여 1986년부터는 어용노조를 퇴진시키고 노조위원장 직선제 쟁취,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투쟁을 주도해 나갔다. 그런 덕분에 그는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되었고,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의원의 직책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박창수는 1991년 2월 10일 제3자 개입금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고 수감 중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는데, 입원 이틀만인 5월 6일 병원 옥상에서 추락한 채로 발견되었다. 정부는 신변 비관에 의한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따지기에는 의혹이 너무나 많았으며 의문사 당일 신원 미상의 청년이 병실을 방문했다는 것도 밝혀지며 논란은 더욱 커졌다. 이에 정부는 병원에 백골단을 투입하여 영안실의 벽을 깨부어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강제로 부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
묘역 |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 | |
성명 | 김기설 | |
출생날짜 | 1965년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8일 | |
주요활동 | 김기설 항목 참조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윤용하 | |
출생날짜 | 1969년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12일 | |
주요활동 | 윤용하 열사는 어려운 집안환경 때문에 어려서부터 여러 노동 일을 해왔었고 198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중국집 배달원, 가방공장 직원 등으로 활동하며 노동자로 살았었다. 그러다가 1989년 초에 대학 출신의 현장활동가를 만나고 나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노동 문제들에 관심이 뜨인 그는 서울 민주화직정청년연합의 풍물강습반에 등록해 다니게 되었다. 그런 행적만큼 그는 5.18을 추모하며 망월동에 참배를 하고 싶어했고 1991년 5월 9일에는 국민 대회를 치르고자 광주로 가 박승희 열사의 병문안을 가기도 했었다. 그는 울분에 가득 찼고 끝내 다음 날 전남대학교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라 외치며 분신했다. 이틀 후 그는 "노동해방을 위한 분신을 생각했다."고 말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이정순 | |
출생날짜 | 1952년 3월 19일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18일 | |
주요활동 | 이정순은 순천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사정 때문에 중학교부터는 가지 못하고 버스안내양, 가발공장 직원 등으로 일했다. 그녀는 부평 작전동 한독산업에서 일하며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련은 계속 되어 결혼했으나 이혼당하여 홀로 1남 3녀를 키워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 못한 공부의 열정을 잊지 않고 틈틈이 무언가를 배우곤 했다. 그런가하면 그녀는 글과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고[25] 성당에 매주 다니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녀는 특히 예수의 희생에서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1991년 5월 18일 그녀는 강경대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 앞 철교에서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분신 후 투신해 사망했다. 그녀의 유서에는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랑스런 아들,딸들에게 이 몸을 바칩니다."로 시작하여 "분쟁은 악이다."로 끝나고 있다.##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김철수(1973) | |
출생날짜 | 1973년 3월 20일 | |
사망날짜 | 1991년 6월 1일 | |
주요활동 | 김철수는 어릴 적부터 주관이 확실하고 의사표시가 분명해서 공부도 잘하고 남도 잘 돕는 적극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1989년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교내 풍물패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심과 자주적인 삶을 지향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현실은 그의 꿈을 이루어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1991년 5월 18일 그는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가고 있을 때 보성고등학교 주최로 열린 5.18 기념식을 치르게 되었다. 여기서 김철수는 분신하여 행사장으로 달려나오며 "참교육 실현,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다가 쓰러졌다. 그는 강인한 학생이었고 병원으로 옮겨지면서도 친구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몇 주 간의 투병 끝에 "나는 여러분을 믿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곤 사망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정상순 | |
출생날짜 | 1966년 11월 1일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29일 | |
주요활동 | 정상순은 김철수와 같은 학교 출신의 노동자였다. 그는 여러 직종에 종사하며 일하고 있었는데 1991년 5월 18일에 있었던 김철수의 분신 소식을 듣게 되었다. 후배 출신인 그의 분신은 그를 충격에 빠뜨렸고, 그는 김철수가 투병을 하던 전남대 병원을 두 번이나 찾아와 울면서 병문안을 했다. 정상순은 결국 1991년 5월 22일 전남대학교 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는 내용의 유서를 쓰고 분신 후 투신하였다. 그는 분신한 지 일주일 후인 5월 29일 운명했다.## | |
묘역 | 광주 망월동 묘지 | |
성명 | 김귀정 | |
출생날짜 | 1966년 8월 11일 | |
사망날짜 | 1991년 5월 25일 | |
주요활동 | 김귀정 항목 참조 | |
묘역 | 이천민주공원 | |
성명 | 이진희 | |
출생날짜 | ||
사망날짜 | ||
주요활동 | ||
묘역 | ||
성명 | 석광수 | |
출생날짜 | ||
사망날짜 | ||
주요활동 | ||
묘역 | ||
성명 | 손석용 | |
출생날짜 | ||
사망날짜 | ||
주요활동 | ||
묘역 | ||
성명 | 김처칠 | |
출생날짜 | ||
사망날짜 | ||
주요활동 | ||
묘역 | ||
성명 | 양용찬 열사 | |
출생날짜 | ||
사망날짜 | ||
주요활동 | ||
묘역 | ||
성명 | 권미경 | |
출생날짜 | ||
사망날짜 | ||
주요활동 | ||
묘역 | ||
성명 | 탁은주 | |
출생날짜 | ||
사망날짜 | ||
주요활동 | ||
묘역 | ||
4.3.3. 1992년~1996년
사진 | 성명 | 출생날짜 | 사망날짜 | 주요활동 | 묘역 |
서영호 | |||||
박복실 | |||||
이상렬 | |||||
박현민 | |||||
김기옥 |
성명 | 박태순 | |
출생날짜 | 1966년 9월 12일 | |
사망날짜 | 1992년 8월 29일(?) | |
주요활동 |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사회과학서적들을 탐독하여 기초적인 사회인식이 되어 있었고, 1985년 3월 한신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후 재학 중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자 권익을 위한 민중운동을 지향하는 언더 써클에 가입하여 각종 시위 등에 참가하였다. 1989년 5월 20일 수원지검 점거농성으로 인해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출감 후 91년 2월 19일 군 입대 영장의 수취를 거부하고(92년에도 입영거부), 소규모 영세사업장에 다시 위장취업을 하였으나 신분 제약으로 인해 노조 설립 등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 병역기피와 비합법 조직운동으로 공안기관의 미행, 감시를 심하게 받게 되었다. 공안기관에 의해 추적당하던 중 1992년 8월 29일 부천시 수영기계에서 퇴근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동지는 92년 8월 29일 당시 시흥역내 열차사고 사망자의 지문과 동일인으로 확인되었고 동지의 시신은 신원불명의 변사자로 분류되어 가매장된 후 용미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가 02년 마석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으로 다시 안장되었다. ## | |
묘역 | 마석 모란공원 | |
윤재영 | |||||
문승필 | |||||
김선호 | |||||
정운갑 | |||||
채희돈 | |||||
김주리 | |||||
이경동 | |||||
김영자 | |||||
길옥화 | |||||
최웅 | |||||
한상용 | |||||
최정환 | |||||
양봉수 | |||||
박삼훈 | |||||
서전근 | |||||
장현구 | |||||
조수원 | |||||
김시자 | |||||
노수석 | |||||
진철원 | |||||
권희정 | |||||
황혜인 | |||||
오영권 | |||||
박동학 | |||||
김말룡 |
4.3.4. 1997년~1999년
사진 | 성명 | 출생날짜 | 사망날짜 | 주요활동 | 묘역 |
한상근 | |||||
민병일 | |||||
지용진 | |||||
류재을 | |||||
홍장길 | |||||
김준배 | |||||
이형관 | |||||
최대림 | |||||
신길수 | |||||
이길상 | |||||
이상관 | |||||
윤창녕 | |||||
박용순 | |||||
김상숙 |
4.4. 2000년대 이후
5. 기억, 추모, 그리고 계승
5.1. 기념사업과 추모사업
5.1.1. 독립열사의 경우
5.1.2. 민족민주열사의 경우
열사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며 알리기 위해 각 열사들을 위한 기념(추모)사업회가 활동 중이다. 이 기념사업회에는 열사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가족, 친구, 대학 동기, 민주 인사, 학생, 시민 등이 주로 참여하고 있으며 추모행사, 추모문집 발행, 추모사진집 발행, 열사와 관련된 자료 수집 및 전시, 열사에 대한 평전 집필 및 발행, 열사의 무덤 참배 등을 도맡고 있다.
이렇게 생긴 수많은 추모단체들이 힘을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추모연대)다. 이 단체는 추모단체들의 연합체로서 열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개하고 있고 추모행사 등을 공지하고 있다.
한편 열사들의 개개인에 대한 추모식이 아닌 열사들 모두를 추모하는 합동추모식이 매년 열리고 있다. 이름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 추모제'다. 이 추모행사는 1990년부터 시작하여 2017년 현재까지 26번 열렸다.
열사가 학생 신분이었을 경우 그가 다녔던 학교에 열사를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경우가 있다.
5.2. 대중매체에서의 열사
대중매체에서는 독립운동가나 민주열사(특히 박종철, 이한열), 노동열사(특히 전태일), 재야(특히 장준하)의 이야기가 나오는 편이다. 이들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기 때문에 분위기도 매우 장엄하고 진지하므로 이들의 이야기는 주로 다큐멘터리로 다뤄진다. 극화되는 경우에도 이들은 함부로 다뤄지지 않는다.5.3. 창작물에서의 열사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열사는 주로 민주주의, 통일, 노동 등의 가치들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나오며 주변 인물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는 편이다. 특히 이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타내는 소설이나 시 등에서 그 슬픔의 원인으로 등장하곤 하며 이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방향을 보이는 문학, 노래, 미술 등이5.3.1. 미술
<6월 항쟁도>[27], 동아대학교 미술동아리, 1988 | |
<한열이를 살려내라!>[28], 최병수, 1987 | |
<한국현대사-초혼곡>[29], 신학철, 1994 | <김의기>[30] 박불똥, 1983 |
5.3.2. 음악
- 추모곡
음악은 주로 열사에 대한 추모곡으로 주로 작곡되었다. 대표적인 추모곡들과 추모곡이 다루는 열사들은 다음과 같다.
곡명 | 추모 열사 | 듣기 |
독립군 추모가 | 독립군 | # |
남원땅에 잠들었네 | 김주열 | # |
진달래 | 4.19 희생자 | # |
전태일 추모가 | 전태일 | # |
그 날이 오면 | 전태일 | # |
임을 위한 행진곡 | 5.18 희생자 | # |
마른 잎 다시 살아나 | 이한열 | # |
벗이여 해방이 온다 | 김세진, 이재호 | # |
열사의 그 뜻대로 | 김종수 | # |
살아오라 열사여 | 박영진 | # |
그대 향한 사랑노래, 통일의 길 해방노래 | 진성일 | # |
봄날의 코스모스 | 박승희 | # |
누가 내 누이의 이름을 묻거든 | 김귀정 | # |
내일이 오면 | 김의기 | # |
타인의 고통 | 박종철 | # |
모두를 사랑하며 | 황혜인 | |
태수야 | 정태수 | # |
호루라기 사나이 | 배달호 | # |
어머니 머어언 길 올라 오시네 | 노수석 | # |
끝내 살리라 | 전체 | # |
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너를 묻는다 | 노동열사 | # |
열사의 노래 | 전체 | # |
일어나라 열사여 | 전체 | # |
열사가 전사에게 | 전체 | # |
동지를 위하여 | 전체 | # |
복수가(조국과 청춘) | 강경대 | # |
- 추모음반
- 햇새벽(전태일 열사 추모음반, 일자/제작자 미상)
- 한열아 부활하라(이한열 열사 추모음반, 1987, 연세대 총학생회)
- 누가 내 누이의 이름을 묻거든(김귀정 열사 추모음반, 1991, 민족성대 23회 총학생회)
- 노동해방 그날까지(황혜인 열사 3주기 추모음반, 1999)
- 태수야(정태수 열사 추모음반, 2002, 장애해방운동가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 헌정음반
- 안치환 6.5집 <Remember>(김남주 열사 헌정음반, 2000)
- A Tribute 문익환: 뜨거운 마음 (2011)
6. 논란과 비판[31]
6.1. 죽음의 포장?
일각에서 열사들의 죽음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했으며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열사에 대한 비판이 강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투쟁방식과 그 목적에 대한 반발심이 원인이었다. 정권은 물론이고 보수 인사 혹은 민주화 운동 세력에서도 그러한 이유로 열사들의 죽음을 비판했고 심지어 자살의 원인조차 폄훼하려는 시도들도 이어졌는데 예를 들면 자살의 원인이 저항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에서 기원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부터 정부에서는 열사의 죽음에 대해서 그들의 가정형편, 학업 등을 들어 그들의 죽음이 '지극히 개인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고 심지어 '정신질환'(...)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32]실제로 "신입생"이 민주화운동에 나서다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될 경우 '어린 학생이 뭘 안다고 열사냐' 라고 비난하는 일부 사례도 있는데 1991년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생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에 의해 살해된 3일 뒤인 4월 29일 김동길 연세대 교수가 강의 도중 비슷한 요지로 발언을 했다가 5월 2일에 학생들이 대자보로 반박하자 결국 김 교수는 6일 뒤 사표를 냈다. 재야 민주화 인사 출신이던 김동길 교수는 이 시점 들어 양비론-제3지대주의자였다가 점차 극우 성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무언가에 신념을 걸고 죽었단 이미지가 팔리기 좋단 걸 알기 때문에 과격 성향의 운동권에선 일부 아이콘이 된 사람에게 자살을 종용해서 열사를 만들려고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지하인데 그가 우익으로 진영을 옮기고 이런 분위기를 죽음의 굿판이라며 비난한 것도 이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미네르바 사건의 미네르바에게도 자살을 권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원인들이 복잡하게 얽힌 자살 혹은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이 가능하다면 의롭고 의미있는 죽음으로 예우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자살에 대한 집단과 사회의 이중적인 자세에서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33]
거기다 직선제가 확정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후인 1988년 2월 이후에 자살이나 국가폭력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열사"라고 불리게 되는 데는 운동권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정적인데 "꼬우면 13대 대선 때 잘 투표하지, 모처럼 투표권이 주어졌는데 노태우 뽑아놓고 찡찡거리냐"는 냉소적인 시각이 많다. 다만 이에 대한 변을 하자면 노태우가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에 가담했고 전두환의 2인자이고 친구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운동권들에게 전두환을 노태우랑 똑같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전두환과 하나회 출신 관료들이 자신들이 처벌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도록 선거자금을 뿌렸다는 의혹이 제기되긴 했다. 어디까지나 의혹일 뿐이지만.
7. 전망
'열사는 계속 나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열사들의 주요한 목적이 '조국의 독립'이었으므로 대한민국이 독립된 후에는 이제 다시 외2023년 건폭 사건에서 수사를 받다가 자살한 인물을 민주노총이 '열사'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와 관한 논쟁은 끝없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8. 참고 자료
8.1. 도서 자료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 | <끝내 살리라> |
<열사의 탄생 : 한국민중운동에서의 한의 역학> |
8.2. 인터넷 자료
- 추모연대 역사와 열사
- 추모연대 열사의 삶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정보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노동열사 정보
-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열사방
-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사이버참배
9. 같이 보기
[1] 원래는 순교자의 의미가 강하다.[2] 이곳에는 열사 48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3]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시.[4]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의사는 '목표의 성공, 실패와 관계 없이 목숨을 걸고 무력으로 적에 대항하여 거사를 결행한 사람'으로 정의했다.[5] 타국의 사회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거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혹은 자국에서도 '민족', '민중', '민주', '자주' 등을 강조하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에 참여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6] 참고로 사회학자 임미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열사들의 죽음을 '당위형'과 '실존형'으로 구분했다.
[7]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타살은 물론이고 자살도 포함한다.[8] 설명을 다 읽었으면 알겠지만 이 사람들을 열사라 호칭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사회적 관념상 약간 기묘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는 듯한데 어쨌든 틀린 건 아니니까.[9] 열사와 혼용되는 의사, 지사의 의미는 각 항목을 참조.[10] 여기서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등을 포함한다.[11] 광복 이후의 시대에서 수록된 '열사'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거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열사'로 언급한 사람만 수록했다.[12] 실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묘소. 나머지 2곳은 전부 가묘다.[1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장진동 목사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는데 이로 인해 공안당국의 주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의 전담형사들이 18살이었던 그에게 접근해 참기 어려운 심리적 압박을 준 것으로 보인다.[14] 원래 알려진 5.18 최초 사망자는 김경철이지만 5월 18일 최초로 사망한 이세종 열사로 공식 인정되었다.[15] 이 사건을 목격한 학생에 따르면 그가 추락하여 그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그 위로 경찰이 쏜 최루탄 연기가 뿌옇게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를 목격한 학생들은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고 한다.[16] 다행히 그의 장례식은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2012년에 거행될 수 있었다.[17] 참고로 늑막염은 군에 갈 수 없는 병이었다.[18] 군인으로 죽었기에 그는 현충원에 묻혀야 했다.[19] 한 과목이라도 낙제가 나오면 재시험의 기회 없이 무조건 낙제시키는 제도[20] 이후 의문사진상조사규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그의 의문사 전후로 안기부가 그를 사찰한 기록들이 발견되었으나 언제부터 개입을 했는지는 국정원의 비협조로 밝혀내지 못했다.[21] 김세진 열사 약력[22] 이재호 열사 약력[2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직접 물에 들고 가기에는 무거워서 그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죽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한다.[24]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아 2020년 이장하였다.[25] 그녀의 유품 중에는 글과 시로 채워진 노트가 3권이 있었다고 한다.[26] 1973년 광주 출생으로, 2013년 12월 31일에 박근혜 정부에 분신 투쟁했다가 바로 다음날 향년 41세로 사망했다.[27] 이 그림 오른쪽에 크게 그려진 사람이 이태춘 열사다. 현재 이 그림은 학교 측에서 심어놓은 담쟁이덩굴에 가려져 있다. 2019년에 학교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람들이 단체로 가서 이태춘 열사의 안면 부분을 가린 덩굴을 절단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시 가려져 있다.[28] 이 그림은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그의 동기였던 이종창이 껴안은 사진을 그대로 판화로 옮겼다.[29] 이 그림에는 동학농민군, 의병, 독립군, 민주열사, 5.18 희생자 등이 그려져 있다.[30] 김의기 열사의 초상을 그가 마지막으로 쓴 글의 글귀와 함께 판화로 제작했다.[31] 이 항목에 언급된 것들은 독립운동가보다 주로 민족민주열사들에 해당된다.[32] 실제로 1986년 발표된 한 논문에서는 분신자살의 원인이 가정불화와 정신질환이라고 단정했다.[33] 나/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죽음이면 영웅적인 희생 혹은 열사이며 아닌 경우는 단순 자살/개죽음이라고 취급하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
[7]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타살은 물론이고 자살도 포함한다.[8] 설명을 다 읽었으면 알겠지만 이 사람들을 열사라 호칭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사회적 관념상 약간 기묘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는 듯한데 어쨌든 틀린 건 아니니까.[9] 열사와 혼용되는 의사, 지사의 의미는 각 항목을 참조.[10] 여기서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등을 포함한다.[11] 광복 이후의 시대에서 수록된 '열사'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거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열사'로 언급한 사람만 수록했다.[12] 실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묘소. 나머지 2곳은 전부 가묘다.[1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장진동 목사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는데 이로 인해 공안당국의 주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의 전담형사들이 18살이었던 그에게 접근해 참기 어려운 심리적 압박을 준 것으로 보인다.[14] 원래 알려진 5.18 최초 사망자는 김경철이지만 5월 18일 최초로 사망한 이세종 열사로 공식 인정되었다.[15] 이 사건을 목격한 학생에 따르면 그가 추락하여 그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그 위로 경찰이 쏜 최루탄 연기가 뿌옇게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를 목격한 학생들은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고 한다.[16] 다행히 그의 장례식은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2012년에 거행될 수 있었다.[17] 참고로 늑막염은 군에 갈 수 없는 병이었다.[18] 군인으로 죽었기에 그는 현충원에 묻혀야 했다.[19] 한 과목이라도 낙제가 나오면 재시험의 기회 없이 무조건 낙제시키는 제도[20] 이후 의문사진상조사규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그의 의문사 전후로 안기부가 그를 사찰한 기록들이 발견되었으나 언제부터 개입을 했는지는 국정원의 비협조로 밝혀내지 못했다.[21] 김세진 열사 약력[22] 이재호 열사 약력[2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직접 물에 들고 가기에는 무거워서 그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죽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한다.[24]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아 2020년 이장하였다.[25] 그녀의 유품 중에는 글과 시로 채워진 노트가 3권이 있었다고 한다.[26] 1973년 광주 출생으로, 2013년 12월 31일에 박근혜 정부에 분신 투쟁했다가 바로 다음날 향년 41세로 사망했다.[27] 이 그림 오른쪽에 크게 그려진 사람이 이태춘 열사다. 현재 이 그림은 학교 측에서 심어놓은 담쟁이덩굴에 가려져 있다. 2019년에 학교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람들이 단체로 가서 이태춘 열사의 안면 부분을 가린 덩굴을 절단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시 가려져 있다.[28] 이 그림은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그의 동기였던 이종창이 껴안은 사진을 그대로 판화로 옮겼다.[29] 이 그림에는 동학농민군, 의병, 독립군, 민주열사, 5.18 희생자 등이 그려져 있다.[30] 김의기 열사의 초상을 그가 마지막으로 쓴 글의 글귀와 함께 판화로 제작했다.[31] 이 항목에 언급된 것들은 독립운동가보다 주로 민족민주열사들에 해당된다.[32] 실제로 1986년 발표된 한 논문에서는 분신자살의 원인이 가정불화와 정신질환이라고 단정했다.[33] 나/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죽음이면 영웅적인 희생 혹은 열사이며 아닌 경우는 단순 자살/개죽음이라고 취급하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