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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온 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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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
민주 캄푸치아 인민대표회의 상설회의 의장
누온 체아
នួន ជា | Nuon Chea
[1]
파일:Nuon_Chea_on_31_October_2013.jpg
출생 1926년 7월 7일[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바탐방 성
(現 캄보디아 바탐방 성)
사망 2019년 8월 4일 (향년 93세)
캄보디아 프놈펜
직업 정치인(前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
종교 불교
가족 부친 라오 리브
모친 도스 페안
배우자 리 킴셍
딸 리 분토은, 라오 체아린다, 누온 초르니타
아들 누온 세이
학력 탐마삿 대학교

1. 개요2. 일생3.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Nuon_Chea.webp
민주 캄푸치아 시기의 모습

민주 캄푸치아의 정치인이자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 캄보디아인민대표회의 상설회의 의장으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서열 2위였던 인물이었다. 민주 캄푸치아 시기에는 브라더 No.2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2. 일생

1926년 7월 7일에 바탐방 성에서 라오 킴 론(Lao Kim Lor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옥수수를 재배하는 부유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광둥성에서 온 화교 혼혈이었고 재단사였던 어머니는 크메르인이었다. 어린 라오 가족은 상좌부 불교를 믿으며 중국식으로 명절을 보냈고 7세에 학교에 간 그는 태국어, 프랑스어, 크메르어를 배웠다. 1942년에 중등 교육을 마친 후 방콕으로 간 그는 1944년에 탐마삿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태국 외무부, 재무부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 적이 있다.[3]

1950년에 방콕의 시암 공산당에 가입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한 후 같은 해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전적했으며 1951년에 캄푸치아 인민혁명당의 창당에도 참여했고, 1951년경부터 1954년까지 당의 명령으로 정치교육을 목적으로 북베트남의 마퀴스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54년에 제네바 합의가 맺어진 후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경 인근을 전전하며 교사와 무역 관련 기업[4]에서 일하면서도 하노이를 자주 방문하며 레주언, 응우옌반린과 친분을 맺었다.

1960년 9월 30일에는 후에 캄푸치아 공산당이 되는 '캄푸치아 노동당'[5]의 부비서가 되었으며 1962년에는 실종된 투 사머스(Tou Samouth, 1915~1962) 캄푸치아 노동당 총비서의 후임으로 폴 포트[6]를 앉히는 데 도움을 줬다. 1970년에 북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10일 만에 북베트남이 점령한 캄보디아의 5개 성을 돌려받는 데 기여했으며[7] 1973년 3월 25일부터 1975년까지는 캄푸치아 민족해방을 위한 인민군 최고사령부의 부수장이자 군정치부장으로 일했다.

1975년 4월 17일에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성립된 후 그는 동년 10월 9일에 당 상무위원회에서 '당무, 사회복지, 선전 및 교육'을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1976년 4월 13일에 캄보디아인민대표회의 상설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캄푸치아 공산당 총비서이자 민주 캄푸치아의 수상이던 폴 포트가 건강 악화로 일시적으로 수상직을 사임하던 1976년 9월 27일부터 10월 25일까지 1개월 동안 주석 대리로 일한 적도 있다.

민주 캄푸치아 치하에서 그는 민주 캄푸치아의 서열 2위로 폴 포트 버금가는 위상의 인물로서 킬링필드의 악행에 대해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데 '보안 문제', 특히 뚜올쓸라엥 강제수용소에서의 범죄에 책임이 크다고 한다. 생전의 폴 포트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네이트 테이어(Nate Thayer, 1960~2023)는 누온 체아가 크메르 루주 시기에 자행된 살인에 대해 '폴 포트보다 더 위중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으며 깡 겍 이우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이 수감자들의 '자백'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면 본인의 상관이었던 누온 체아가 겍 이우에게 조언하며 지시를 내렸다고 하고, 폴 포트가 명령을 내리면 누온 체아가 이 명령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사실상 캄보디아의 아돌프 아이히만, 즉 킬링필드의 실무 책임자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1979년 1월 7일에 프놈펜이 베트남군에 함락되기 직전에 뚜올쓸라엥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전원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불행 중 다행히 이는 이행되지 않았다.[8] 이렇게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몰락하자 태국 국경 인근으로 도망쳐 게릴라 활동을 주도하다가 폴 포트가 사망한 후인 1998년 12월 29일에 태국 국경 근처에서 크메르 루즈 저항군 중 거의 마지막으로 항복했는데 체포된 후 "실제로 우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 고통을 겪은 동물들에게도 매우 유감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때 전직 크메르 루주였던 훈 센 캄보디아 수상은 그를 기소하려고 했으나 '국가적 화해'라는 명분으로 포기했고, 이에 국제 사회는 크게 반발했다.

이후 그는 태국 국경 인근에 있는 파일린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으며 불교에 심취하며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했다고 하고 인근 사원의 수석 승려와 친분을 가지며 불교 경전과 교리에 대한 토론을 가지기도 했고 심지어 체아 본인이 그 스님에게 가르침을 준 적도 있었다.[9] 그러다가 2007년 9월 19일에 자택에서 체포되어 프놈펜에 있는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로 옮겨져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로 기소되었고 2013년 10월 21일에 검찰에 의해 종신형이 구형된 후 2014년 8월 7일에 키우 삼판 전 민주 캄푸치아 주석과 함께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6년 11월 23일에 제2심에서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2018년 11월 16일에는 키우 삼판과 함께 캄보디아의 베트남인과 점족, 기타 소수 종교 집단에 대한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또 선고받았다. 그는 제1심의 심리 중이나 최종 변론에서 민주 캄푸치아 시대에 일어난 범죄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했으나 자신에게는 실권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고혈압과 당노병, 전립선암을 앓다가 2019년 7월 2일에 패혈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고 입원 중이던 8월 4일에 향년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딸 중 한 명인 라오 체아린다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의 유언은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고 건강을 돌보고 열심히 공부하고 연대하라"였다고 한다. #

3. 기타

2007년(체포 이전)에는 "만약 이 반역자들이 살아 있었다면 민족으로서의 크메르인들은 끝났을 것이다. 우리가 이 백성을 긍휼히 여겼더라면 이 나라는 망했을 것이다."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까지 남겼고, 재판 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고 우리는 단지 나쁜 사람들, 좋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식민주의와 우리 땅을 훔치고 캄보디아를 지구상에서 말살하려는 도둑들의 침략과 억압으로부터 내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내 가족을 버려야만 했다." 등의 발언을 하며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벌어진 학살의 많은 책임을 베트남인 요원의 책임으로 돌렸으며 "베트남 요원들이 캄보디아 땅에 은밀히 남아 캄보디아를 점령, 병합, 집어삼키고 캄보디아 인종과 민족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발언했다.[11][12] 거기에다 2011년에는 "나는 다음 세대들이 역사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이 크메르 루주가 나쁜 사람들이라거나 범죄자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변론했다. # 다만 2013년 5월에는 법원과 킬링필드의 피해자들에게 마지못해 "알고 있었건 몰랐건 간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저지른 범죄에 대해 반성한다"는 사죄의 뜻을 전하기는 했는데 보여주기식이었는지 말년에 변심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1] 실제 발음은 "누온 찌어"에 가깝다.[2] 1923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게 되면 향년 96세.[3] 이 때문인지 누온 체아는 다른 민주 캄푸치아 수뇌부들과는 달리 파리 유학을 가지 않았다.[4] 중국과 캄보디아 간 수출입을 담당하는 회사였다.[5] 상술한 캄푸치아 인민혁명당이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6] 당시에는 '폴 포트'라는 가명 대신 본명인 '살롯 사'로 불렸다.[7] 당시 북베트남이 점령한 지역이 캄보디아 전체 영토의 1/4였다고 한다.[8] 덧붙여 체아는 뚜올쓸라엥 소장인 깡 겍 이우가 뚜올쓸라엥에 보관된 기록들을 완전히 파기하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고 하는데 사실 겍 이우가 기록들을 파기하지 못한 이유는 수용소의 기록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뚜올쓸라엥에 있던 '자백' 문서만 해도 무려 20만 쪽에 달했다고 한다.[9] 그의 부하였던 뚜올쓸라엥 수용소의 소장 깡 겍 이우도 아내가 살해된 후 참회한다며 목사가 되었다.[10] 민주 캄푸치아의 국민들은 전부가 하루에 맹물만도 못한 멀건 쌀죽 2잔만 먹을 수 있었던 데다 식량이 너무나 부족했던 나머지 문자 그대로 인육까지 먹어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민주 캄푸치아의 수뇌부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쌀과 식량을 '아끼기는' 커녕 오히려 남몰래 서양산 음식까지 들여와 배불리 먹은 나머지 집권 이전보다 살이 더 쪘을 정도였다.[11] 사실은 크메르 루주가 도리어 캄보디아에 살던 베트남계 캄보디아인 10만 명 중 9만 명을 살해한 것은 물론 집권한 지 1개월도 안 되었을 때부터 베트남을 침공해 수많은 베트남인들을 학살했고 심지어 폴 포트는 1978년 8월에 베트남을 침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에서 "베트남인 5천만 명을 궤멸하기 위해 우리는 군인 2백만 명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남겼다.(참고로 1978년 기준으로 베트남 인구가 약 5,200만 명 정도였다.)[12] 크메르 루주는 단순히 베트남인을 쳐다보기만 한 사람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지만 정작 누온 체아는 정치교육을 이유로 북베트남에 3년간 머무른 데다가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과 친분을 가진 적이 있었음에도 멀쩡하게(?) 민주 캄푸치아의 서열 2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