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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 마립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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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 이전3. 재위
3.1. 내정3.2. 외정
3.2.1. 백제 ㆍ고구려와의 관계3.2.2. 왜국과의 관계
4. 죽음과 왕릉

[clearfix]

1. 개요

신라 눌지 마립간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즉위 이전

기록에 의하면 제17대 내물 마립간의 장남이고 제18대 실성 마립간의 종질(從姪)이다.[1] 내물 마립간이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대로 백제, , 가야의 3국 연합군의 침공과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 파견, 신라의 속국화에 충격을 받아 몸져누운 끝에 승하했다. 정상적으로라면 장남 눌지가 왕위에 올랐어야겠지만 눌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서 실성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이 역시 광개토대왕이 파견해 놓은 고구려 관료의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성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오랫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내물 마립간 직계가 아닌 실성이 왕위에 오른 것은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신라에 정치적 간섭을 시작한 광개토대왕이 지 말을 잘 듣는 자를 앉히도록 불어넣은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이 눌지를 앉힌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또한 김씨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난 석씨 왕실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 없는데 실성은 모계를 통해 석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석씨 집단이 실성을 지지해 줬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지만 이 역시 눌지계 집단과 실성계 집단의 정치적 입장이 달랐을 한 근거로 추정할 수 있다. 석씨 계통인 실성 마립간이 몰락하고 눌지 마립간 즉위 이후 역사에서 석씨 가문의 이름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2] 현대에도 석탈해계 석씨를 자처하는 후손은 대한민국에 소수만이 남아있다. 더 일찍 왕위를 잃은 박씨가 이후에도 신라의 주요 귀족 가문으로 유지됨은 물론 신라 이후에도 주요 성씨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과거 실성 마립간은 왕위에 올랐지만 잠재적 정적인 눌지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먼저 눌지의 동생들부터 하나하나 신라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눌지의 동생들을 볼모로 외국으로 보내는데 눌지의 첫째 동생 복호고구려에 인질로 둘째 동생 미사흔로 볼모로 보냈다. 종국에는 눌지 본인마저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질 뻔했다. 사실 인질은 죽으면 곤란한 중요 인물을 보내는 게 정상인데 실성 마립간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에 방해가 되는 눌지 3형제는 외국에서 남의 손에 죽어버리는 게 이득이었던 것.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조금씩 다른데 겹치는 부분은 실성 마립간은 자기가 알던 고구려인을 사주해서 눌지를 암살하려 했으나 고구려인이 눌지를 보고 군자의 기상이 있음을 알고서 감동하여 눌지를 죽이지 않고 되려 고구려 군대가 실성 마립간을 암살해 버렸다는 것.

아마도 실성이 고구려를 뒷배로 삼아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지켜본 눌지는 고구려를 자신의 편으로 돌려야 왕위 등극이 순탄할 것임을 알고 고구려와 모종의 외교 협상이나 고구려 유력자들을 끌어들여서 실성 마립간을 시해하고 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실성이 일단은 고구려의 후원으로 친고구려파로서 즉위했으나 그 역시 근본은 신라인이었기에 차츰 반고구려적 행동을 보였고[3] 이에 고구려 측이 이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실성을 버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대표적으로 415년 혈성 벌판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했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해석도 있다. 친고구려파였던 실성조차 반발할 정도면 이는 거꾸로 말하면 고구려 장수왕의 간섭이 그만큼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고 눌지의 시대에도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는데 그의 왕비 차로부인이 실성 마립간의 딸이라는 것이다. 차로부인과의 사이에서 자비 마립간지증왕의 어머니 조생부인(鳥生夫人)을 뒀다.

참고로 이후 눌지 마립간의 영향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눌지 마립간의 아들, 손자의 왕비들이 전부 복호와 미사흔의 자손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비 마립간의 경우 기록이 애매하지만 복호와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소지 마립간의 경우 복호와 미사흔의 손녀로 왕비를 맞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즉 눌지, 복호, 미사흔 삼형제는 눌지의 손자 대까지 혼인으로 엮이면서 내물계의 왕위 계승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후 눌지의 직계가 끊긴 이후에도 복호의 증손자인 지증왕이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토대를 마련해 놓았다고 볼 수 있겠다.

3. 재위

3.1. 내정

노인을 공경하는 예를 세웠다고 하는데, 조선세종 때처럼 양로연 같은 것을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 용수를 확보하고 백성들에게 가 끄는 수레를 대대적으로 보급했는데 이는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물자 수송의 용이함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눌지 마립간 재위 초반에 꾸준히 내정을 다져서 전성기 고구려와의 일전을 준비하게 된다.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와서 눌지 마립간의 딸을 치료해 주자 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미추 이사금 때의 아도라는 인물이 그랬다고 기록되어 있다.[4] 아직 이차돈순교까지 100여 년이나 남았으니 신라에서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한 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왕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그래서 숭유억불조선 시대에서는 고구려의 소수림왕, 백제의 침류왕과 함께 불교를 들여와 삼한을 어지럽힌 불교 3형제로 꼽혀서 평가가 좋지 않다. 《동사강목》에서도 비판적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불교 3형제를 비판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다만 신라는 눌지 마립간 대신 불교를 결정적으로 공인한 법흥왕이 대신 3형제로 꼽혀서 비판받기도 했다.

3.2. 외정

3.2.1. 백제 ㆍ고구려와의 관계

비록 고구려군의 도움을 받아 실성 마립간을 누르고 왕이 됐지만 눌지 마립간은 재위 초반부터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 없이 신라를 마음 놓고 다스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구려에 붙잡혀 있는 동생 복호를 먼저 신라로 귀환시켜야 했다. 지원자를 받은 끝에 충신 박제상을 보내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었던 복호를 빼내 왔다.[6] 이후 박제상을 다시 왜에 보내서 인질로 가있던 미사흔도 탈출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박제상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절개를 보여준다.

외교에서는 비록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 장수왕의 도움으로 왕에 올랐지만 장수왕 역시 눌지 마립간이 예뻐서 도와준 것도 아니었고[7] 400년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신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주체적인 입장에서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418년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복호를 탈출시킨 것을 볼 때 고구려에게 뒤를 잡히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며 424년 사신을 보내 비록 복호를 빼내왔어도 고구려와 척지고 싶지는 않다는 의사를 표현해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일단 유지하였다.

그런데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계속 추진하자 압박을 견디지 못한 백제 비유왕이 그간의 원한을 잊고 30년 전까지 적이었던 신라에 동맹을 하자고 433년 7월에 먼저 제안했고,[8] 눌지 마립간은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나제동맹이 성립했다. 434년 백제에서 신라로 좋은 말과 흰 매를 선물로 보내고 답례로 신라는 야광주와 황금을 보내는 등 친교를 쌓는다. 당시 장수왕은 남방보다는 서쪽 중원의 급박한 정세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나제 동맹의 체결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9] 다만 신라가 나제 동맹을 맺었어도 당장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적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 예로 충주 고구려비에 의하면 449년 고구려와 신라가 형과 동생의 관계로 하늘에 제사(守天)하는 일이 있었다. 눌지 마립간은 아직 고구려의 아랫나라인 척을 계속하면서 힘을 모으고 있던 것이다.
34년(450) 가을 7월에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10]의 들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하슬라성(何瑟羅城)[11]의 성주(城主) 삼직(三直)이 군사를 내어 갑자기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를 닦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군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죽였으니 무슨 의미인가?"
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곧 물러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12]
450년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에 가까운 사건이 발생하는데 신라의 하슬라 성주 삼직(三直)이 실직의 들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장수를 살해한 것이다. 고구려군이 서쪽으로 쳐들어오자 눌지 마립간은 사신을 파견해 사과하여 외교적으로 이를 무마시킨다. 이 사건은 우발적 사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후에 일어날 상황을 보면 수 십년간 계속된 정치 간섭으로 신라 내부에 이미 반고구려 성향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으며 눌지 마립간 역시 이를 계기로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로 마음먹는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464년에 일어난 일로 써 있지만 464년은 이미 신라와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시기라 학자들은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450~454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신라 땅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13] 고구려군 중 1명이 교대하고 고구려로 돌아가면서 신라 사람을 말몰이로 삼았는데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신라인 말몰이는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서 빠져나와 이를 신라에 보고했고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가 군대를 보내 신라를 지켜주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사람들을 풀어 백성들에게 알렸다.
고구려 왕이 정예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군사 한 사람이 잠시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신라인을 전마(典馬)로 삼았다【典馬는 '우마카히'(于麻柯比)라고 읽는다.】[14] 그가 돌아보며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 의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다른 책에서는, "너희 나라가 마침내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전마는 이를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고 물러나서 뒤에 있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달아나 들은 바를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줄 알고, 사신을 보내 급히 나라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人殺家內所養鷄之雄者!)"
일본서기》 웅략 8년 2월 #
신라 사람들은 암호 같은 이 지시의 뜻을 알아듣고[15]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고구려 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갔고, 고구려 장수왕은 격노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신라는 임나(가야) 왕에게 원군을 청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일본서기》 기록과 별개로 454년 7월 장수왕이 신라의 북쪽 변방을 공격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데 《일본서기》 기록과 같은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별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고구려가 신라를 완전히 병합할 거라는 건 고구려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일개 병사 1명의 발언일 뿐이다. 장수왕의 진짜 의도는 알 수 없지만[16] 일단 신라인들은 이미 고구려의 정치 간섭을 비롯해 고구려 병사들의 행패[17] 등으로 인해 반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18] 눌지 마립간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구려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렇게 즉위 20여 년간 꾸준히 내정을 다져 국력을 쌓은 끝에 455년 10월 백제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비유왕이 시해당해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눌지는 백제에 군사들을 파병해 고구려군을 물리쳐 고구려와 적대할 것을 명확히 했고[19] 이후 100여 년간 고구려가 내려오면 서로 돕고 돕는 방식으로 버티게 된다. 눌지 마립간은 458년 승하하지만 아들 자비 마립간과 손자 소지 마립간은 눌지 마립간의 뜻을 이어받아 백제와 힘을 합치고 성을 엄청나게 쌓아서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는 수십 년간 전쟁이 계속 벌어졌다. 불과 수십 년 전에 고구려, 신라의 연합군과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벌였음을 상기해 본다면 외교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맹도 없다는 말이 실감 날 것이다.[20]

이 시기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 군사들을 몰살하고 그간 다름아닌 고구려 군대를 벤치마킹해 무장, 군제, 편제를 일신한 업그레이드된 신라군을 순식간에 총동원하여 확장한 영토는 대단하였다. 고구려가 말만 신라 영토로 유지했지 사실상 고구려땅이나 마찬가지였던 죽령 일대, 즉 경북 서북부를 되찾은 건 물론이고, 광개토대왕이 백제 아신왕에게서 빼앗은 후로 고구려가 자국 영토로 유지 중이던 충북 일대까지 영역을 넓혔다. 괴산, 영동 및 훗날 삼년산성을 건립하게 되는 보은까지 장악[21]했고, 심지어는 청주 문의면과 대전 동구 일부까지 수중에 넣었다. 신라가 이 일대들까지 손아귀에 넣은 탓에 백제가 약 80년 후 신라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지만, 이 시기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에게 자칫하면 충청도 일대를 더욱 깊이 침탈당해 허리가 완전히 부러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기에 고구려보다는 신라가 그곳을 장악하는 게 백제의 국익 및 국방에는 더욱 이득이었다. 이후 불과 20년 여년 후에 고구려가 작심하고 남쪽으로 전력투구해서 치고 내려와 청주, 괴산, 대전 동구 일대를 신라에게서 빼앗게 되지만 신라가 이 당시 영동과 보은을 고수하면서 동쪽으로부터 고구려에게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으며 고구려군을 견제했기에, 백제는 아신왕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22]

3.2.2. 왜국과의 관계

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미사흔을 계략을 써서 탈출시키고 대신 충신 박제상이 죽임을 당하자 양국의 관계가 끝내 파탄 난 것으로 보인다. 왜는 431년에 서라벌 인근 명활산성을 침공했고, 440년에는 신라의 남쪽, 동쪽 국경에 쳐들어왔으며 444년에는 서라벌까지 쳐들어와 10일간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했는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눌지 마립간은 군사를 이끌고 왜군의 뒤를 무리하게 쫓았다가 대패한다. 절반의 군사를 잃고 산으로 도망갔으나 왜군들에게 포위당하는데, 다행히도 짙은 안개가 끼어 포위망을 탈출하고 왜군들은 물러간다.[23] 위의 기록들만 봐도 양측의 험악했던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남북으로 불안한 외부 상황 속에서도 장자 왕위 계승을 확실히 못 박아둬서 쓸데없는 분쟁을 사전에 막았다. 석씨 왕실 때부터 해서 얼마나 많은 막장 혼란이 있어왔는지 생각해 보면 이것만 해도 상당한 업적. 덕분에 아들 자비와 손자 소지는 별 혼란 없이 장남으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4. 죽음과 왕릉

458년 8월에 사망하였다.

왕릉은 문헌상 비정되는 곳은 없으나, 현대 고고학 연구로 대릉원의 황남대총 남분이 바로 눌지의 왕릉이라는 설이 주목받는다. 고고학적 비정에 관한 내용은 신라왕릉 문서 참조.


[1] 실성 마립간의 아버지 대서지의 형 말구의 아들 내물 마립간의 아들이 눌지. 즉 눌지는 실성 마립간의 5촌 조카가 된다.[2] 향후 신라 수백 년간 역사 기록에서 석씨가 아예 없어지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 봐야 하급 귀족으로 간간이 등장하는 정도라 신라 주류 사회에서는 확실히 몰락한다.[3] 일단 기록상에서 실성은 자체 군사력을 증강하고, 왜의 침입에서 직접 친정하고 예방전쟁 차원에서 대마도 정벌을 기획할 정도로 상당히 호전적인 성향이었다.[4] 다만 일연은 묵호자 이야기도 함께 실으며 "일단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을 리는 없고 묵호자와 아도가 외모나 행적이 비슷한 걸로 봐서 아도는 묵호자의 다른 이름인 거 같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5] 이 시기 이미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에서 넘어온 불교를 받아들인 지 오래였지만 신라는 중국에서 멀고 교류가 적어 영향력도 적었으며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토속 신앙이 너무 강하다 보니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차돈의 순교라는 충격 요법을 통해 공인에 성공한 것. 실제로 호우총에서 발굴된 호우명 그릇에는 연꽃 문양도 새겨져 있는데 이는 눌지 마립간 시절에 최소한 신라에도 불교라는 개념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6]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 고구려의 장수왕을 말로 설득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몰래 탈출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7] 415년 대대적인 신라군 사열이 장수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복호의 인질로서의 가치는 친형제인 눌지 마립간이 왕이어야 크다.[8] 다만 당시 백제는 아직 고구려와 죽어라 싸워대던 중이었고 신라도 주 분쟁상대는 가야권 국가들이어서 서로 크게 척을 진 상태는 아니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 백제와 신라가 충돌한 것으로 기록된 건 대체로 마한, 진한의 소국과의 분쟁도 백제, 신라로 소급된 것으로 본다. 백제가 주도한 연합군의 금성(경주) 침공도 비록 아신왕이 가야와 왜를 사주해서 같이 신라를 일단 치자고 했으나 연합군 비율의 대부분은 가야, 왜군이 차지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404년에 있었던 고구려 공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9] 화북의 패권을 두고 북위북연이 경쟁했는데 장수왕은 북연을 군사적으로 도왔고 남조 유송이나 북쪽 초원에는 유연과의 외교전도 있어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10]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11]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12] 〈고구려본기〉에는 해당 기사가 장수왕 28년(440년)에 실려 있어서 사건이 10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이는 38년(450년)의 오류로 보고 있다.[13] 호우총의 호우명 그릇을 통해 경주 한복판에서 고구려 그릇이 나옴으로서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충주 고구려비에도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로 지칭되는 신라 경내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대 지휘관의 존재가 언급된다.[14] 고구려 병사가 휴가를 갈 때 신라인을 말을 끄는 사람으로 썼다는 소리다.[15] 고구려인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는 조우관을 수탉의 닭 벼슬에 비유해 이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머리에 새 깃털을 꽂는 관모는 삼국 공통이기는 했다. 다만 그걸로 확실한 구분이 된 걸 보면 당시 신라에는 아직 조우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풍습이 없었을 수도 있다.[16] 말이 좋아서 '일개 병사 1명의 발언'일 뿐이지 당장 현대에 이런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보자.[17] 고구려 군인의 휴가 때 신라인을 말잡이로 써먹었다.[18] 타국 군대가 자국 경내에 주둔하고 있는 현상은 필요 여부를 떠나서 주둔지 주민들에게 상당히 복잡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 주일미군을 대하는 시선과 비슷하다.[19] 사실 사서에는 비유왕이 승하했다고만 기록되었다. 그러나 비유왕 사후 즉위한 개로왕의 초반 행적이 기록돼 있지 않은 점과 남조로부터 하사받은 관직에 유력 귀족들이던 진씨·해씨 세력들이 하나도 없다는 점,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도림의 비유왕의 시신이 들판에 방치되었다는 언급으로 사실상 비유왕 말엽에 큰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시해당한 것으로 유력시된다. 일설에는 앞의 흑룡이 나타났다는 기록과 결부지어 고구려에서 자객을 보내 시해했을 것이라고도 한다.[20] 다만 백제와 왜 만큼은 늘 동맹이였다.[21] 의미심장하게도 이 일대는 마한 목지국 잔여 세력이 진한의 암묵적인 지원 아래 백제에게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던 바로 그곳들이었다. 자세한 부분은 목지국 문서 참조.[22] 당시 백제의 수도는 공주였고 고구려는 오늘날 청주, 세종, 대전 전체를 장악한 상태였던지라 허리가 문제가 아니라 심장이 으깨질 위기였다. 고구려 최전성기에는 공주 웅진성으로부터 불과 10~20km 동쪽인 세종시 나성동에서 고구려군 사령부가 운영되고 있었을 정도. 눌지 마립간의 이 시기 대고구려 군사 원정이 실패했다면 웅진백제는 절대로 고구려에게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23] 이때 정말 잘못되었으면 전사하는 참변을 겪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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