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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5:50:27

레이 만자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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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덴스모어
로비 크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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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ors
1967.01.04.
Strange Days
1967.09.25.
Waiting for the Sun
1968.07.03.
The Soft Parade
1969.07.18.
Morrison Hotel
197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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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Woman
1971.04.19.
Other Voices
1971.10.18.
Full Circle
197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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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TD.png 선정 100대 록 음악 최고의 키보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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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ic thisday라는 사이트가 선정한 "100대 록 음악 최고의 키보디스트"이다. 기술, 창의성, 영향력, 실험정신등을 기준으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키스 에머슨 릭 웨이크먼 존 로드 레이 만자렉 리처드 라이트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토니 뱅크스 빌리 프레스턴 로드 아르젠트 스티브 윈우드 알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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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매튜 피셔 부커 T. 존스 이안 언더우드 그레그 올먼[1] 토니 하이마스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얀 해머 니키 홉킨스 그렉 롤리 브라이언 이노 조던 루데스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리처드 탠디 데니스 드영[2] 옌스 요한슨 케리 리브그렌[3] 배리 골드버그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티 라비츠 돈 에어리[4] 가스 허드슨 데이비드 샌셔스 이안 맥라건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조지 듀크 앨런 자보드 스티브 니에브 맥스 미들턴 빌리 파웰[5]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케빈 무어 데렉 쉐리니언 지미 그린스푼 존 카린 리 마이클스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켄 헨슬리 벤몬트 텐치 스티비 원더 조나단 케인[6] 척 리벨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제프 다운스[7] 레온 러셀 패트릭 모라즈 위르겐 프리츠 하워드 존스
<rowcolor=#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마이크 핀더 맷 벨라미 알렌 라벤스틴 앨런 프라이스 마이클 맥도날드
<rowcolor=#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존 폴 존스 밥 마요 토니 케이 빌 페인 로이 비탄
[ 각주 ]

[1]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키보디스트.[2]스틱스의 보컬 겸 키보디스트.[3] 캔자스의 기타 겸 키보디스트.[4]딥 퍼플의 키보디스트.[5] 레너드 스키너드의 키보디스트.[6] 저니, 베이비스, 배드 잉글리쉬의 키보디스트.[7] 버글스, 예스, 아시아의 키보디스트.
6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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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만자렉
Ray Manzarek
파일:레이 만자렉.jpg
<colbgcolor=#000><colcolor=#FFE260> 본명 레이몬드 대니얼 맨저렉 주니어
Raymond Daniel Manzarek Jr.
출생 1939년 2월 12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사망 2013년 5월 20일 (향년 74세)
독일 바이에른 로젠하임
직업 음악가, 프로듀서, 영화감독
소속 도어즈 (1965 – 1973)
가족 아내 도로시 아이코 후지카와
자녀 1명
학력 드폴 대학교 (경제학 / 학사)
UCLA (영상영화학[1] / M.F.A)
장르 사이키델릭 록, 재즈 퓨전
활동 기간 1959년 – 2013년
사용 악기 키보드, 베이스 피아노, 보컬
레이블 엘렉트라
1. 개요2. 생애
2.1. 도어즈 이전2.2. 도어즈2.3. 도어즈 해체 이후
3. 음악적 유산4. 디스코그래피
4.1. 스튜디오 앨범
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짐 모리슨 레이 만자렉.jpg
▲ 나란히 앉아있는 짐 모리슨과 레이 만자렉의 모습.
미국의 음악가. 유명한 사이키델릭 록 밴드인 도어즈의 창립 멤버로 유명하다.

2. 생애

2.1. 도어즈 이전

1939년[2] 시카고에서 노동자 계급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역의 음악 학교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고 드폴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UCLA 법과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2주 후 학교를 중퇴하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웨스트우드 지점에서 수습 관리직으로 일했다. 석 달 동안 이 일을 하고 UCLA로 복학했는데, 이번에는 영화예술학부의 대학원생으로서였다. 이런 불안정한 학창 생활은 1961년 12월 레이가 육군에 입대하면서 끝났다.

그의 보직은 오키나와와 태국[3]에서 3군 밴드에 몸담고 피아노 연주를 하는 쉬운 일이었지만, 그만두고 싶었던 레이는 부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동성애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1년 일찍 제대하여 짐이 이 학교에 온 바로 그 시기에 UCLA 영화 학교로 복귀했다.

다시 돌아온 UCLA에서 레이는 특출하게 우수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전적이었고, 모두가 그의 일본계 미국인 여자친구 도로시 후지카와의 관능성을 찬양하는 작품이었다. 그중 하나인 상록수라는 작품에는 알랭 레네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에게 느린 동작으로 달려가는 반복되는 컷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한 장면이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와 도로시가 샤워실에서 발거벗은 채 만난다. 교수들은 그 장면을 편집하기를 원했고, 그는 동의했다. 그러나 몇몇 학생들이 그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비판하자, 합의를 번복하고 왜 이 영화가 상영되지 않았는지를 해명한 전단지를 12월의 학생 시사회에서 배포했다(결국 그 영화와 레이가 만든 다른 모든 작품은 상영되어 찬사를 받게 된다). 6월에 그가 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학장인 콜린 영은 레이가 그해 장편 영화로 넘어갈 준비가 된 몇 안 되는 학생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뉴스위크에서도 레이의 초기 성과를 인정했다.

2.2. 도어즈

레이는 대학교에서 짐 모리슨을 만나, 영화 취향을 공유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어느날 레이 만자렉은 짐 모리슨의 엄청난 작사 실력을 보고 즉석에서 밴드를 결성하자고 했으며, 이 밴드가 도어즈가 되었다.

도어즈는 무수한 히트곡을 썼고 1968년에는 앨범 Waiting for the Sun이 빌보드 200 차트 1위를 밟으며 미국 출신 록밴드로는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밴드가 되었다. 그러나 짐 모리슨은 마약 중독으로 인해 폐인이 되어갔고, 1971년 파리의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4] 짐 모리슨이 죽은 이후, 레이는 밴드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Other Voices, Full Circle 등 두장의 앨범을 발매했으나, 평가는 형편 없었고 대중들에게도 외면받으며 망했다.

2.3. 도어즈 해체 이후

이후 그는 이기 팝 등 후배와 합동 공연도 가지는 등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했고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 펑크 록 밴드들에 관심이 많았는지 동향의 펑크 록 밴드 X의 데뷔 앨범 "Los Angeles"를 프로듀싱했고 이후 4집까지 프로듀싱했다. 2002년에는 젊었을때 밴드를 같이 했던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와 함께 만자렉-크리거라는 듀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5월 20일,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독일 로젠하임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음악적 유산

보통 사람들은 도어즈에서 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으로 불리는 짐 모리슨을 주로 기억하지만, 레이 만자렉은 역대 손꼽히는 키보드 연주를 보여줬고 1960년대 말엽 사이키델릭 록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5] 이 분야에서 릭 라이트, 릭 웨이크먼, 키스 에머슨등과 같은 레전드급 프로그레시브 아티스트들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그의 키보드 연주는 신디사이저 연주의 교본이라고 불린다. Touch Me, Light My Fire 등 도어즈의 인상적인 키보드 인트로는 모두 이 사람이 연주했다. 영화 스쿨 오브 락에서도 잭 블랙이 록 음악 신디 연주법을 배우라면서 도어즈의 키보드 악보를 빌려줄 정도다.

레이는 키보디스트였지만 동시에 밴드의 베이시스트 포지션이기도 했다. 보통의 베이시스트들이 대체로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를 잡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특이한 케이스이다. 이 때문에 도어즈 특유의 뽕끼도는 사운드가 더욱 극대화되는 점도 있다.

해체 후로도 LA 음악씬에서 영향을 발휘했는데, 후배 펑크록 밴드인 X 전담 프로듀서로 활약하면서 펑크 록에도 어느정도 족적을 남겼다.

4. 디스코그래피

4.1. 스튜디오 앨범

5. 여담


[1] 입학 당시에는 법학도였으나 적성이 안맞아 전과했다.[2] 짐 모리슨보다 4살 많다.[3] 그가 마리화나에 심취했던 곳이다.[4]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추정되지만 여전히 실제 사인은 불명.[5] 사실 도어즈 멤버들의 연주 실력은 전부 수준급이다.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는 이 둘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평가가 매우 높고,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도 다임백 대럴, 알렉스 라이프슨보다 높은 76위에 랭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