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레프 톨스토이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초기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 제국 툴라주 크라피브나군에 위치한 톨스토이 가문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에서 태어났다. 그가 2세 때 어머니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Графиня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Толстая)[1]이 막내 여동생 마리야를 낳고 사망하여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촌수는 멀지만 볼콘스카야를 '숙모'라고 불렀는데, 이 친척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Татья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Ергольская)는 어머니와 다름없어 톨스토이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2] '사랑하는 일의 행복'과 '꾸밈없는 조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가르쳤다고. 사실 타티야나는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와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으나, 자신보다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대인배 마음으로 청혼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아는 톨스토이의 생모 마리야와 관계가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마리야가 사망하자 니콜라이 일리치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가정사는 1837년경 아버지의 유품인 편지를 정리하다 톨스토이가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막내 여동생 마리야는 '숙모'라 불린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의 조카 발레리안 톨스토이 백작(Граф Валериан Петрович Толстой)[3]과 결혼한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는 톨스토이가 9세 때 급사하여 큰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가 14세 때 큰고모도 사망하여 작은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톨스토이 가문 형제자매들은 부모없이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고 모두 우애가 좋았다고 한다. 특히 맏형인 니콜라이를 좋아했는데 맏형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외교관이 되려고 카잔 대학교 동양어학과[4]에 입학했다가 진급시험에 낙제하자 다시 농민을 위해 일하려고 법학부로 전과하였다. 하지만 학업에 열의가 없고 자기 관심분야의 책만 보던 터라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했고 결국 자퇴한다. 자신이 공부에 열중하지 않은 일은 생각하지 않고 '대학은 학문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고...3년 만인 1847년에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농촌에 틀어박힌다. 이후 4년간의 농촌 생활은 <지주의 아침>(1856)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때 잠시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든가 의료를 제공하고 온정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농민들의 불신과 차가운 반응으로 실망하고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된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이상이 무너지고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에서 거짓을 느꼈다고. 그 뒤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 검정고시로 학사 학위는 따지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가 2살 때 죽어 일종의 컴플렉스를 가진 톨스토이는 성장하면서 여자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박으로 거액의 빚을 지는 등, 계속 무분별하게 살아가던 톨스토이는 그러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군대 복무를 지원하여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에서 군무에 종사하게 된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농노 제도 없이 사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5] 그들의 언어와 문화 풍속, 그리고 캅카스의 대자연에 깊은 감명을 받는데, 여기서 쓴 글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인 체첸인을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그러다가 1851년 본격적으로 입대하여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 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 임관한다. 복무 중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된 반자전적인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Детство)》(1852), 《소년 시대(Отрочество)》(1854), 《청년 시대(Юность)》(1857)[6] 3부작이 그것이다. 이때쯤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 신청을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전역이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한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한다. 이때부터 문필 생활을 시작하여, 1855년에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관한 짧은 글들을 잡지에 실었다. 이것이 《세바스토폴 이야기(Севастопольские рассказы)》이다. 이런 군 경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의 잔혹한 체험 때문에 톨스토이는 평화주의로 기울게 된다.
톨스토이는 1855년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했다. 세바스토폴 전투의 용사로서, 또 신진 작가로서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외국 여행도 즐겼지만, 그는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느꼈고 지주로서 거기에 정착하여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34세 때 결혼한 이후 50년 평생 동안 몇 차례 여행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여행지에서 교육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설명했다.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 일반 사회, 특히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번민했으며, 특권을 가진 귀족 지주는 불우한 일반 대중에게 그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농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학교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교과서까지 스스로 만들어 교육에 진력했으며, 농민 해방 운동에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3. 창작 전기
톨스토이는 34세에 겨우 아내를 맞이했는데, 아내로 고른 여자가 18세였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Софья Андреевна Берс, 1844–1919)였다. 어쨌든 나이차에 관계없이 톨스토이는 소피야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소피야의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은 톨스토이를 매료시켰고, 소피야를 모델 삼아 작품에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기도 했다.[7]톨스토이는 1869년 필생의 역작 <전쟁과 평화>를 완성시켰다.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 원정을 소재로 한 이 역사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실제로 특출난 사람이나 영웅(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역사관을 내세우며 '위대한 사람'을 중요시하는 역사관을 강력히 부정해 뭇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번이나 격전지를 답사하고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련 시절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원동원이 간편했기에[8] 보조출연자로 연인원 총 75만을 동원해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기록이다.[9]
톨스토이는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집필한 두 번째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1878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불륜을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이 소설은 1870년대의 귀족계급과 러시아의 사회,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 특히 간통에 대한 상류계급의 위선적인 태도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종교적 신념의 역할 등을 강하게 고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2007년 노턴출판사에서 조사한 영어권 작가 125명이 선정한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뽑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보다는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4. 회심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자녀 세 명과 소중한 친척 두 명('숙모' 타티아나와 고모 알렉산드라)을 잃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을 <고백>(1879)이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다. '예술은 인생의 거울이다. 인생이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미 거울의 유희는 흥미를 끌지 못한다'고 하여 마침내 예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철학이나 과학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톨스토이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준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살아간다는 민중의 소박한 신앙이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10]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톨스토이는 그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사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진리를 알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고 또 인간의 유일한 이성적 활동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주의'라는 사상 형태로 발전했다.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톨스토이는 거름통을 들면서, "나도 농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던지라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다.
부인 소피야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의 폭탄선언을 듣자 톨스토이와 대판 다투고 만다. 물론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야에게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농민들도 톨스토이를 비웃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야에게 양도했지만 소피야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했다.[11]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흑역사 취급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의 손자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는 걸 보고 '왜 좀더 유익한 책을 읽지 않고 그런 쓸모없는 책을 읽느냐'고 했을 정도였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5. 말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이 작품을 읽고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고의 작가"로 극찬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찬미자는 나보코프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있다.이때부터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민담 형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바보 이반>, 조이스가 세계문학이 아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극찬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2]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등의 단편 소설들을 썼으며 국내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으로 다른 톨스토이의 걸작 장편들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다만 후기 톨스토이 작품들은 과학과 교회를[13] 악마의 발명이라고 조롱하는 등의 서술로 인해 전기 작품들에 비해서 홀대되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성욕이 아주 강했는데,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면모를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다. 때문에 노년에는 성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1890)> 와 <악마(1889)>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섹스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행위로 비판했고, 인간이 성욕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상 낙원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악마>는 둘 다 자신의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주인공의 파멸로 끝난다. 둘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섹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과거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고해성사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Духоборы)의 구명을 위한 자금을 모으려고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1899)>이다.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부활>의 인세로 지원했고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계 캐나다인 문서 참고), 같은 시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라는 수필을 써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여 정교회에 찍히고 말았다. 두호보르파는 캐나다와 조지아 남부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캐나다로 이주한 두호보르파 관련 글.
이후, 작중에 등장하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 때문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 대문호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톨스토이의 비판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수위가 높았다. 단편 <지옥의 패망과 부흥>에서 교회를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였고, <부활>에서는 성체성사를 마술이라고 조롱하였다. 때문에 정교회에서 파문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이런 면에서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도스토옙스키와 대비된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전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부활' 그대로의 작품만 본다면 절대 졸작이라 평할 수 없다.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은 당시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고선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하지 무라트(Хаджи-Мурат)'는 자신의 군복무 시절에 만난 아바르계 무슬림 전사, 훈작하 하지무라드(Хунзахъа ХӀажимурад, 1818년 ~ 1852년 5월 5일)의 이야기로, 톨스토이 최상의 작품에 속하며,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면서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야와의 갈등은 점점 격해져만 갔다. 종교적인 평론을 쓰거나 복음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동안은 아직 참고 있던 부인이나 자식들도, 그가 귀족 지주의 생활 양식을 버리고 농민과 같은 생활을 시작하자 등을 돌리고 말았다. 가족 중 딸 알렉산드라만이 유일하게 그를 이해해 주었다. 소피야는 특히 톨스토이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와 사이가 나빴다. 그 갈등의 근원은, 톨스토이는 모든 저작권과 판매료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고 소피야는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이후 나이 80이 넘어가는 늘그막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1910년 10월 29일 아침 막내딸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여행
1980년대 위인전에선 비참하게 겨울 날씨 역에서 동사했다고 나온 바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역장 숙직실로 옮겨져 눕혀진 상태에서 다음의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Но крестьяне… Как умирают крестьяне?»
'하지만 농민들...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자신의 작품 속에서는 농민들을 찬양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귀족의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가, 드디어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이렇게 죽게 되었으니, 이를 한탄했다는 것. '내가 지금이라도 농민이 되겠다고 나왔는데 이리 죽게 생겼으니, 죽는 순간이라도 농민이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죽어야 농민으로 죽은 거라고 할 수 있는 거냐?'라는 뜻. 죽어서라도 농민이고 싶었던 톨스토이의 한맺힌 심정이 담겨 있다. #1#2#3'하지만 농민들...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여담으로 농민이고 싶었기 때문인 영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톨스토이의 무덤은 그의 위상답지 않게 묘비도 없이 매우 단촐하다.#
그는 아내 소피야와 끝내 화해하지 않았고,[15] 죽기 직전 유언에 아내는 절대로 장례식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당부해 소피야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피야는 죽어서도 남편과 합장되지 못한 채 톨스토이 묘지에서 3km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 묘지에 묻혀야 했다.
82세에 폐렴으로 사망한 것과는 별개로 엄청나게 건강했고, 70세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근력을 지녔다고 한다. 막내딸인 알렉산드라를 56세의 나이에 얻었으며, 막내아들인 이반을 얻은 것도 나이 60살 때 일이다. 다만 이반은 7살 때 병사했다.
[1] 혼전성은 볼콘스카야(Волконская)이며 본래는 여공작(княжна)이었다.[2] 훗날 전쟁과 평화에서 '소냐' 캐릭터로도 등장한다.[3] 후술하겠지만 톨스토이 가문은 레프 톨스토이 직계만 있는 게 아니다.[4] 현조부가 오스만 제국 대사를 지냈다. 동양어학과는 튀르키예어를 배우는 과정이다.[5] 톨스토이는 농노제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해 러시아 귀족들이 대제라 칭송한 예카테리나 2세를 암군으로 취급했다.[6] 후일 1872년에도 캅카스 참전 경험을 다룬 단편 《캅카스의 포로(Кавказский пленник)》를 썼다.[7]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안나 카레니나>의 키티 등.[8] 물론 단순히 인력동원이 간편해서라기보다는 소련 영화판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인것도 있다. 통제가 있었다지만 국가에서 영화관을 거하게 지원해주어서 당시 세계 영화관의 반 이상이 소련에 있었고 표값도 싸서 연간 영화관객수가 40억 명을 넘나들던 시절이었으니...[9] 물론 75만을 한 번에 동원한 건 아니고 여러 장면에 걸쳐 따로 동원했다. 사실 소련 시절, 이런 경우가 꽤 있었다. 러시아 신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에선 거대한 드래곤과 싸울 때 10만이 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고요한 돈 강》(1957)이라든지 여러 영화에서도 엄청나게 동원했다. 한편 당시 중국은 제작규모가 열악하고 문화대혁명 와중으로 영화 인력까지 숙청하던 터라 이런 대규모 인력 동원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한 장면에 엑스트라 최다 동원 영화는 1982년작 《간디》에서 장례식을 보러온 인도 30만 엑스트라들. 비슷한 예로, 북한의 《불가사리》에도 몇 만 명 동원되었다.[10] 사형제와 전쟁을 공공연히 긍정하고 다른 종파를 증오하는 정교회의 모습을 톨스토이는 받아들이지 못했다.[11] 정확히는 모든 작품은 아니고 단편 딱 두 개만 '이 정도가 그나마 턱걸이다'라는 뉘앙스로 남겼다.[12] 이 작품은 애먼(?) 대천사 미카엘을 끌어들였다. '천사=미카엘'이라는 인지도 때문이었지만...[13]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14] 사실상 가출이라고 봐야 한다.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을 고독과 정적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쪽지를 남기고 사전에 알리지 않은 채 방랑길에 올랐기 때문이다.[15] 톨스토이가 사망한 해에 소피야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