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엔촐레른 가문 수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 #fff 20%, #fff 80%, #fff);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빌헬름 2세 | 빌헬름 폰 프로이센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프로이센 국왕 · 독일 제국
}}}}}}}}} ||<colbgcolor=#fff><colcolor=#000> 프로이센의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Louis Ferdinand, Prinz von Preußen | |
이름 | 루이 페르디난트 빅토어 에두아르트 아달베르트 미하엘 후베르투스 폰 프로이센 (Louis Ferdinand Victor Eduard Adalbert Michael Hubertus von Preußen) |
출생 | 1907년 11월 9일 |
독일 제국 포츠담 대리석 궁전 | |
사망 | 1994년 9월 26일 (향년 86세) |
독일 브레멘 | |
배우자 | 러시아의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 (1938년 결혼 / 1967년 사망) |
자녀 | 프리드리히 빌헬름, 미하엘, 마리 체칠리에, 키라, 루이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지기스문트, 크세니아 |
아버지 | 독일의 빌헬름 황태자 |
어머니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 |
형제 | 빌헬름, 후베르투스, 프리드리히, 알렉산드리네, 체칠리에 |
[clearfix]
1. 개요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둘째 손자이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의 차남으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이다. 초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의 직계 현손자이며,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1]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2] 현손이기도 하다.덴마크의 국왕 프레데리크 9세와[3] 하노버 가문의 당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그리스 왕비 프리데리케 루이제의 사촌이다.[4]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국서 필립 마운트배튼의 팔촌이며,[5] 현 영국의 찰스 3세의 9촌이다.
2. 생애
2.1. 어린시절
어머니 체칠리에 황태자비 품에 안겨 있는 루이 페르디난트. 옆에 아이는 형 빌헬름 왕자다.
1907년 독일 제국 포츠담에서 빌헬름 폰 프로이센 독일 황태자와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4남 2녀 중 둘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빌헬름 왕자와는 연년생 형제이다. 아버지 빌헬름 황태자, 형 빌헬름 왕자에 이어서 독일 황제위 계승 3순위 왕자였다.
할머니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 어머니 체칠리에 황태자비,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 바닥에 앉아있는 아이가 루이 페르디난트다.
루이 페르디난드 왕자는 10세 생일에 가풍에 따라 제1근위 보병 연대의 중위 로 임명되었고, 할아버지로부터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다. 1916년부터 루이 페르디난트의 가정교사는 카를 카푸스였다.
1918년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독일 11월 혁명으로 제정이 폐지되었다. 할아버지 빌헬름 2세는 퇴위했고, 독일의 모든 왕족과 귀족들은 모두 작위가 박탈되었다.
2.2. 결혼 이전
제정 폐지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한 할아버지나 어머니랑 별거해서 다른 곳에서 산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 형과 함께 독일에 계속 머물렀고, 체칠리에 호프로 돌아갔다. 베를린 근처 학교에서 통학 학생으로 다녔으며, 이후 베를린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21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어머니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아름다운 외모와 큰 키를 물려받아서[6] 형제들중에서도 가장 미남에 장신[7]이였다.
네덜란드 도른 하우스에서 형 빌헬름, 할아버지 빌헬름 2세와 함께 찍은 사진.
루이 페르디난트는 군 경력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집안의 가풍과는 거리가 멀었다. 할아버지 빌헬름 2세의 허락을 받고 독일을 떠나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포드 공장에서 동료들이랑 점심 식사하는 루이 페르디난트.
포드 모터 컴퍼니의 창업주 헨리 포드와 루이 페르디난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주니어[8]와 루이 페르디난트.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함께 찍은 사진. 맨 왼쪽 인물이 루이 페르디난트, 옆에 있는 사람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맨 오른쪽 인물이 막내 남동생인 프리드리히 왕자.[9]
독일 마지막 황제의 손자(Prince)여서 그런지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다.[10]
1933년 형 빌헬름이 귀천상혼을 하면서 계승권이 박탈[11]되었고, 루이 페르디난트가 다음 후계자가 되면서 독일로 귀환했다.
2.3. 결혼
루이 페르디난트는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동등결혼을 할만한 여자를 찾았고[12], 1938년 로마노프 황가의 수장이었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13]과 빅토리아 멜리타의 1남 2녀 중 차녀인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과 혼인하였다.[14]
결혼하고 1년 뒤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프로이센 왕자가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되었다. 빌헬름 2세에게는 장증손, 빌헬름 황태자에게는 장손이였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빌헬름의 2세의 손주들 중에서 아들 수로나 자녀 수로나 제일 많이 두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집권기에는 나치당, 아돌프 히틀러와는 거리를 뒀다. 나치즘에 호의적이거나 적극 가담한 아버지와 숙부들, 고모부, 형제들, 사촌동생들과 다른 독일의 왕공족과 대비되는 부분이다.루프트바페 근무복을 입은 루이 페르디난트.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루이 페르디난트는 공군 장교로 임관했다.
1940년에 형 빌헬름이 프랑스 침공 당시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하면서 형을 떠나보냈다. 형의 사망 직후 히틀러는 모든 독일의 왕공족들의 군 예편을 명령했으며, 루이 페르디난트도 공군 중위로 전역했다.
1941년 할아버지 빌헬름 2세가 세상을 떠났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게슈타포의 조사를 받기도 했는데, 고문을 받거나 한 건 아니고 수사관들은 그를 정중히 대했다.
2.5. 장년기
전후에는 잠시 바이에른에 머물다 1947년 브레멘으로 이주하였다. 한편 할아버지 빌헬름 2세가 머물렀던 네덜란드의 도른하우스는 전후 네덜란드 정부에서 적산으로서 몰수했고,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하우스에서 쫒겨나게 된다.1951년 아버지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가 사망하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가족 사진.
루이 페르디난트는 작곡가이기도 했으며 작품에 대한 인정을 받았다.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를 위한 글로켄슈필과 프리데리쿠스 렉스 추모 행진곡인 "나의 포츠담에게"를 작곡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 인물이 오토다.
9촌[15][16]인 찰스 3세와 함께 찍은 사진.
루이 페르디난트는 미남인데다가 인망 또한 높아서 독일 대통령 출마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아버지 빌헬름 황태자가 스스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다가 할아버지 빌헬름 2세에게 저지 당한 것과는 반대의 상황.
1967년 아내인 키라 여대공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다.
제정이 폐지되고 이제는 이름 뿐인 가문이지만 호엔촐레른 가문은 여전히 명망 높은 유럽의 황제 가문이고, 상당한 자산을 보유했으며, 명목상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 국왕' 작위를 보유했으며, 현재도 귀천상혼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루이 페르디난트의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차남 미하엘은 귀천상혼을 하면서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이에 다음 후계자는 삼남 루이 페르디난트였다.
삼남 루이 페르디난트.
루이 페르디난트는 1975년 슈탄데스헤어 가문 출신의 도나타 폰 카스텔륀덴하우젠 공녀와 결혼했다.
본래 슈탄데스헤어 가문과 결혼하는 것을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콧대 높은 왕실들이 귀천상혼으로 취급했었지만, 루이 페르디난트 세대부터는 호엔촐레른 가문을 비롯한 독일 통치 가문들의 왕자가 슈탄데스헤어 가문 출신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동등결혼으로 완전히 인정되었다.
1976년 손자이자 현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태어났다.
하지만 삼남이자 다음 후계자인 루이 페르디난트는 1977년 7월 11일 군대 훈련 중 사고로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루이 페르디난트의 딸 코르넬리에 체칠리에는 유복녀였다.
2.6. 말년
삼남 루이 페르디난트가 요절한 이후 손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할아버지와 같이 지냈다.루이 페르디난트와 헬무트 콜 독일 총리.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인 1990년 10월이 분단됐던 동서독이 통일되면서 그 역시 말년에나마 조국의 재통일을 보게 된다.
2.7. 사망
1994년 9월 26일 독일 브레멘에서 향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는 손자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계승했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3. 여담
- 형제자매 중에서 가장 장수했고, 빌헬름 2세의 손주들 중에서도 두 번째로 장수했으며[17], 루이 페르디난트 사후까지 산 사촌동생들은 3명[18]밖에 없었다.
- 자녀들 중에서 차녀인 키라가 본인과 제일 닮았다. 나이든 사진만 보면 영락없는 루이 페르디난트의 여자 버전이다.
4.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프로이센의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 (Louis Ferdinand Prinz von Preußen) | <colbgcolor=#fff3e4,#331c00> 독일 황태자 빌헬름 (Wilhelm, Kronprinz des Deutschen Reiches und von Preußen) | <colbgcolor=#ffffe4,#323300> 빌헬름 2세 (Kaiser Wilhelm II.) | |
프리드리히 3세 (Kaiser Friedrich III.) |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19] (Victoria, Princess Royal)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 (Prinzessin Auguste Viktoria von Schleswig-Holstein-Sonderburg-Augustenburg)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 8세 (Herzog Friedrich VIII. von Schleswig-Holstein) | |||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아델하이트 공녀 (Prinzessin Adelheid zu Hohenlohe-Langenburg)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 (Gemahlin Herzogin Cecilie zu Mecklenburg-Schwerin) | |||
메클렌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Großherzog Friedrich Franz III. von Mecklenburg-Schwerin) | |||
메클린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Friedrich Franz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Reuss of Köstritz) | |||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Анастасия Михайловна | |||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Великий князь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 |||
바덴의 체칠리에 공녀 (Cäcilie Prinzessin von Baden)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 (Friedrich Wilhelm Prinz von Preußen) | 1939년 2월 9일 | 2015년 9월 29일 | 슬하 1남 |
슬하 2남 1녀 | ||||
시빌 크레츠머 | ||||
2남 | 미하엘 왕자 (Michael Prinz von Preußen) | 1940년 3월 22일 | 2014년 4월 3일 | 슬하 2녀 |
브리지테 폰 달비츠 | ||||
1녀 | 마리 체칠리에 공주 (Marie-Cécile Prinzessin von Preußen) | 1942년 5월 28일 | 슬하 1남 2녀 | |
2녀 | 키라 공주 (Kira Prinzessin von Preußen) | 1943년 6월 27일 | 2004년 1월 10일 | 슬하 1녀 |
3남 |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 (Louis Ferdinand Prinz von Preußen) | 1944년 8월 25일 | 1977년 7월 11일 | 도나타 폰 카스텔뤼덴하우젠 여백작 슬하 1남 1녀[21] |
4남 | 크리스티안 지기스문트 왕자 (Christian-Sigismund Prinz von Preußen) | 1946년 3월 16일 | 니나 폰 레벤틀로 여백작 슬하 1남 2녀 | |
3녀 | 크세니아 공주 (Xenia Prinzessin von Preußen) | 1949년 12월 9일 | 1992년 1월 18일 | 페르 에드바르트 리탄더 슬하 2남 |
[1] 니콜라이 1세의 사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외증손자다.[2]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의 친증손자.[3] 이모 알렉산드리네 아우구스테의 장남.[4] 고모 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 왕녀의 자녀들.[5] 빅토리아 여왕 기준으로 8촌이고, 필립과는 니콜라이 1세 기준으로도 8촌이 된다. 필립의 외할머니 빅토리아 공녀와 루이 페르디난트의 친할아버지 빌헬름 2세가 엘리자베스 2세 전 여왕의 할아버지 조지 5세의 고종사촌이고, 필립의 친할머니 올가 왕비가 루이 페르디난트의 외할머니 아나스타샤 대공비의 친사촌이기 때문이다.[6] 특히 눈매는 어머니를 빼다 닮았다.[7] 6.2피트, 약 189cm[8]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차남이자 현 허스트의 회장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3세의 아버지.[9] 재밌게도 아버지 빌헬름 황태자는 1년 후인 1933년에 루스벨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10] 사실 폐지된 군주국이든 유색 인종이든 상관없이 일단 왕자(Pricne)면 서구 열강들에게서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았다. 때문에 이승만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자신을 왕자라고 칭했다. 특히 유럽의 구왕족들은 다수의 왕가가 혈연관계로 연결된 유럽의 특성상 영지를 잃더라도 관례적으로 현 왕족과 동등하게 대우받는다. 당장 루이 페르디난트 본인만 해도 덴마크 왕비 알렉산드리네의 조카인데다 영국 왕실과도 먼 친척이었다.[11] 빌헬름은 귀천상혼이 아니었더라도 아들 없이 두 딸만 두었고, 무엇보다 아버지인 빌헬름 황태자와 할아버지인 빌헬름 2세보다도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애초에 그에게는 계승권이 주어질 수 없었다.[12] 즉, 귀천상혼이 아닌 통치 가문 출신의 왕공족 여성.[13] 알렉산드르 2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사촌동생.[14] 키라가 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둘의 결혼식은 포츠담에서 정교회 결혼성사를 받은 후, 도른 하우스에서 다시 한 번 루터교식 혼인예배를 치렀다.[15] 친증조할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남동생 에드워드 7세의 외현손자다.[16] 친증조할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여동생 앨리스 공주의 외외증손자 필립 마운트배튼의 아들.[17] 가장 장수한 손주는 고모 빅토리아 루이제의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 폰 하노버 왕자다.[18] 빅토리아 루이제의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 폰 하노버, 사남 벨프 하인리히 폰 하노버, 오스카의 삼남 빌헬름 카를 폰 프로이센.[19]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20]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세자인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의 4남이다.[21]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