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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플랫폼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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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000년대3. 2010년대4. 2020년대5. 참조 자료

1. 개요

메타 플랫폼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2000년대

3. 2010년대

4. 2020년대

5. 참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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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신 버전 배포에 유리한 PHP 기반으로 단기간에 제작되었다. 마크 저커버그에두아르두 사베린은 각각 1,000달러씩을 출자했다.[2] 하버드 대학교 이메일로만 가입이 가능했으나, 2월 28일 컬럼비아 대학교 진출을 시작으로 곧 주변 대학교에도 진출했다. 이 당시에도 공동창업자들은 페이스북이 기존의 일반적 프로젝트와는 달랐음을 인식했음에도 중퇴를 결심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사용자 보안을 위해 수작업으로 대학 별 별도의 데이터베이스를 적용시키며 같은 학교 구성원끼리만 프로필 검색이 가능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방식 덕분에 20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는 상당한 브랜딩이 되어 그들을 충실한 코어유저로 사로잡을 수 있었으며 쿨한 이미지가 생기며 마이스페이스를 무너뜨릴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3] 저커버그와 에두아르두 사베린, 더스틴 모스코비츠 명의로 Thefacebook.com LLC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다.[4] 마크 저커버그 외에 에두아르두 사베린과 크리스 휴즈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의 공동창업자와 인턴 활동을 위해 근처로 함께한 애덤 디엔젤로는 1학년의 학부생 인턴 2명을 데리고 여름 방학동안 이곳에 주택을 임대한 뒤 전업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얼마 뒤 숀 파커도 주택 생활을 함께하게 되었다.[5] 한편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중퇴를 결정하고 페이스북에 인생을 걸려는 결정을 했던 공동창업자는 저커버그 포함 전무했기 때문에 실패를 대비하여 디엔젤로 주도로 와이어호그라는 파일 공유 및 원격 파일 접근 프로그램 프로젝트도 동시에 구상했다고 한다. 사실상 Dropbox에 앞선 클라우드 서비스의 시초 격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파이어호그는 AOL 메신저의 뒤떨어진 공유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2004년 10월에는 법인까지 설립하였으나 투자 유치에 실패하며 프로젝트를 접었다.[6] 페이스북 지분 7%로 전환이 가능한 50만 달러 규모 전환사채 방식의 조건부 투자였으며, 틸은 가입자 대비 DAU 지표가 무려 80%에 육박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냅스터의 공동 창업자 숀 파커가 투자를 유치했으며 리드 호프먼마크 핑커스도 각각 3만 7,500달러씩의 소액을 투자했다. 당시 페이스북은 사베린의 주도 하에 직접 영업해가며 웹사이트 내 배너광고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나 서버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택도 없는 금액이어서 저커버그의 부모님과 에두아르두 사베린이 추가로 넣어둔 36,000달러로 충당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7] 숀 파커가 이를 주도하여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플로리다 법인을 등록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제대로 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던 에두아르두 사베린의 지분 축소 및 퇴출이 이뤄졌다.[8] 공동창업자들은 여름방학이 끝난 이 시기부터 로스앨토스의 주택에다 새로운 사무실을 마련하고 서버를 전문 업체인 에퀴닉스로 옮기며 전업으로 페이스북에 집중한다. 반면 크리스 휴스와 애덤 디엔젤로는 학교로 돌아갔다.[9] 앞선 틸의 50만 달러 투자는 12월까지 사용자 150만명을 돌파한다는 조건 하에 진행된 전환사채 형식이었으나, 틸은 그대로 전환사채를 지분으로 전환시켰다.[10] 해당 라운드에서 엑셀이라는 벤처 캐피털이 9,800만 달러 밸류에이션으로 1,270만 달러를 투자하며 지분 13%를 취득했으며 리드 호프먼마크 핑커스도 소액을 투자하며 펀딩을 이어갔다. 자금을 조달한 이후 로스앨토스의 주택 생활에서 벗어나 팔로 알토 소재 2층 규모의 정식적인 오피스에 입주했다.[11] 한편 저커버그가 존경하는 돈 그레이엄이 CEO로 있는 워싱턴 포스트가 해당 라운드를 단독으로 진행하려고 했으나, 엑셀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두 배에 달하는 밸류에이션을 제시하며 무산되었다.[12] 첫 번째 해외 진출국이다.[13] 숀 파커 주도로 20만 달러를 지급하며 인명록 제작사인 어바웃페이스(AboutFace)로부터 구입했다.[14] 기존 사명은 더 페이스북이었다. 한편 사명 변경을 주도한 숀 파커는 코카인 소지 혐의와 근무태만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사장 자리에서 좌천되었다.[15] 사진 태그 기능은 12월에 출시되었다. 이를 통해 사진 공유 플랫폼 선두주자였던 flickr의 점유율을 대폭 빼았는다.[16] 스프린트, 버라이즌, 싱귤러와 같은 이동통신사업자들을 상대로 문자메세지를 통해 페이스북 메세지를 보낼 수 있게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17] 애플 등 대기업 이메일을 중심으로 개방을 시작했다.[18] 5억 달러 밸류에이션으로 2,750만 달러 규모의 투자금을 얻어냈다. 틸의 파운더스 펀드, 호프먼의 그레이락 등이 투자자로 참여했다.[19] MTV, 마이스페이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인수를 위해 입질을 넣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야후의 경우 10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를 제시했으며, 당시 페이스북은 가입 제한을 해제하여 서비스를 전면 개방하기 직전의 시점에서 고등학교와 기업들을 상대로 시범 도입한 폐쇄 네트워크가 실패하며 유저 수 성장세가 정체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사회와 임원들 상당수가 해당 건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저커버그의 고심 끝 거절로 인해 야후의 제안은 수포로 돌아갔다.[20] API 공개를 통해 개발자들로 하여금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서드파티 앱 생태계를 구축하도록 하므로서 일종의 소셜 운영체제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듬해에 선보인 플랫폼 출시를 위해 개발자들을 미리 포섭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21]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미국 내 위탁판매 독점권을 준 배너 광고에만 의존했던 실정이라 뉴스피드로 광고 수입원을 다각화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훗날인 2012년 앤드루 보스워즈의 팀에 의해 뉴스피드 맞춤형 광고 방식이 메타의 캐시카우가 된다. 배너 광고와는 달리 뉴스피드는 사용자에게 맞춤형 알고리즘으로 광고를 제공했어야 됐기 때문에 컴퓨터공학적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사업이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디지털 광고의 효용성 증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22] 한편으로는 메타에 악몽을 선사한 기능이기도 하다. 시간이 갈수록 맞춤형 알고리즘이 워낙 정교해지면서, 뉴스피드에 사용자의 입맛에 맞춘 컨텐츠만 지나치게 노출되며 편향에 빠지는 경우가 빈번해진 결과 미국 사회의 양극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유출된 저커버그의 공책 내용에 의하면 저커버그는 뉴스피드를 출시할 당시까지도 페이스북이 미국을 넘어 수십억명을 이어주는 범지구적 플랫폼이 되리라 생각하지는 못했으며, 뉴스피드의 알고리즘 기준을 단순히 '흥미로움'으로 정했다. 즉 맞춤형 알고리즘을 노린 가짜뉴스 양산, 정치적 공작 등의 거시적인 요소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초부터 단추가 잘못 껴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뒤늦게 대응 방안을 마련해보려 했으나, 이미 거대화된 알고리즘의 은닉층은 내부자들조차 미세통제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23] 2005년까지만 하더라도 한 순간에 전면 개방하는 방식보다는 우편번호를 기반으로 데이터베이스를 분류하려는 등의 점진적 개방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커버그의 유출된 공책에 의하면 사용자의 사생활 자체 못지않게 사생활에 대한 사용자들의 '인식' 그 자체를 대단히 염려했기 때문에 프로필 검색이 같은 네트워크끼리만 가능한 폐쇄적인 방식을 고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과거 저커버그가 저지른 기행인 페이스매시를 통해 위기를 겪은 뒤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24] 뉴스피드를 통해 유통했는데, 이로 인해 페이스북 소셜 그래프 기반 소셜 게임이 등장했다. 다만 제작사들의 바이럴 마케팅으로 인해 뉴스피드에 각종 스팸과 초대장이 남발되어 사용자 편의성이 저하되었고 앱의 다양성 없이 단순한 막장제조 게임만을 위주로 트래픽이 몰리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후 페이스북 로그인을 제공하며 수명 유지를 위한 애를 써보았으나, 어도비 플래시가 HTML5의 등장으로 인해 쇠락하고 iPhone의 등장으로 주된 플랫폼이 웹에서 모바일로 옮겨지자 페이스북 플랫폼은 쇄락의 길을 걷는다. 저커버그는 iOS와 안드로이드에게 모바일 운영체제 주도권을 내준 것을 페이스북 창업 이후 가장 후회되는 일로 뽑은 바 있다. 이들이 2010년대부터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영역에 빠르게 진출하여 플랫폼 선점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25] 마이크로소프트가 150억 달러 기업가치를 평가해 2억 4,000만 달러를 투자하며 지분 1.6%를 얻었으며 11월에 이어진 나머지 시리즈C 라운드에서 리카싱이 6,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는 지분 투자 외에 파트너십의 일환으로 외국 광고 위탁판매 계약까지 체결했다. 이들은 이미 페이스북과 미국 내 광고 위탁판매 독점 계약을 체결했으며 인수까지 호시탐탐 노리던 상황이었다. 한편 몇 년 뒤 마이크로소프트가 해당 지분을 현금화할 시점에서 2억 4,000만 달러는 무려 80억 달러 수준으로 불어났다.[26] 클릭 당 지급 방식의 맞춤형 광고 제도다.[27] 기존에는 실제 인간만 가입 가능했으나, 기업과 단체 등도 별도 페이지 개설이 가능해졌다. 대신 비컨 기능을 통해 페이스북 제휴사들은 외부 웹사이트에서 이뤄지는 사용자들의 구매활동을 뉴스피드로 자동공유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28] 구글에서 키워드 기반 광고 수익 모델을 구축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저커버그는 뉴스피드와 비컨, 플랫폼 등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대응책을 가져온 결과 유저들의 사생활 침해 비판에 거듭 시달리며 노련한 경영인을 영입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노련한 경영자인 샌드버그가 합류한 이후에는 흩어진 사옥을 통합한 뒤 마크 저커버그는 제품 출시와 장기적 비전 제시에 집중하고 그 외에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샌드버그가 총괄하는 양강 구도로 흐르게 된다. 특히 입사 1년만인 2009년 9월부로 창사 이래 처음 잉여현금흐름 흑자 전환을 이끌고 COO로 승진한다.[29] 메신저 앱의 초상이다.[30] 로그인 API 기능이다. 이로 인해 서드파티 업체의 데이터까지 손쉽게 얻어가며 향후 자사 AI엔진 구축에 큰 구심점 역할을 한다.[31] 페이스북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데, 무섭게 치고 올라오던 트위터를 5억 달러 주식교환 방식으로 인수하는 제안을 거절당하자, 자사 뉴스피드에 상태 표시 담벼락 기능을 추가하며 트위터를 모방하게 된다. 이로서 뉴스피드는 속보성 기능의 가중치가 높아지며 트위터와 같은 미디어 성향을 일부 띄게 되었다.[32] 이후 페이스북은 위협적인 회사를 발견하면 재빠르게 인수를 제안하고, 인수가 먹히지 않으면 서비스를 카피하는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 제국을 구축한다. 전자에는 왓츠앱, 인스타그램 등이 있고, 후자에는 트위터를 비롯하여 포스퀘어를 모방한 장소 기능, 스냅챗을 모방한 스토리 기능, 틱톡을 모방한 릴스 기능, 클럽하우스를 모방한 오디오 룸 기능 등이 대표적이다.[33] 2007년 패러키(Parakey)라는 2인 스타트업을 인수하며 합류한 조 휴잇이 초기 앱을 혼자 개발했다. 2008년 애플이 서드파티 개발사에 네이티브 앱 개발을 허용하고 App Store를 출시하면서 페이스북 앱도 같이 출시되었다.[34] LinkedIn의 기능을 차용해왔다. 페이스북 내부 팀은 신규 사용자가 가입 직후 빠르게 새 친구 7명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서비스를 해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35] 자체 지불 수단으로 페이스북 플랫폼 수수료 명목하에 서드파티사로 하여금 매출의 30%를 부과하며 수입원을 다각화했다.[36] 오픈레지 도입 이후 첫 번째 대선인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입하였는데, 600만 명 이상이 투표하기 기능을 활용했을 정도로 흥행하면서, 서서히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버락 오바마 캠프 측도 페이스북과 트위터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37] 프렌드피드를 4,750만 달러(현금 1,500만 달러와 주식교환 3,250만 달러)에 인수한 뒤 이들의 좋아요 기능을 모방하여 페이스북에 추가했다. 좋아요 표시는 뉴스피드 알고리즘 가중치 설정의 핵심 지표가 된다.[38] 서유럽과 동아시아 주요 7개언어(FIGSCJK)는 전문 번역가를 고용하고 기타 국가는 번역 도구를 개방해 각국 현지 사용자들의 크라우드소싱을 기반으로 수백가지 언어를 커버하여 드디어 미국을 넘은 해외 진출로 본격적인 세계화가 시작된다.[39] 다만 FIGSCJK를 제외한 언어를 쓰는 비주류 국가들의 경우 비용 절감을 위해 현지 사무실과 직원을 고용하지 않는 정책을 쓰다보니 각종 바이럴 게시물과 가짜뉴스, 스캠광고 등에 취약해져 훗날 문제를 겪는다.[40] 유리 밀너의 디지털 스카이 테크놀로지스가 100억 달러 밸류에이션으로 2억 달러를 투자했다.[41] 2008년 중국에 진출한 이후 1여년 만에 우루무치 유혈사태 당시 시위 세력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과 요구사항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차단되었다. 전세계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 퇴출당한 것은 전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겠다는 저커버그의 신념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2010년부터 중국어를 학습하고 차단을 풀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42] 2007년 제휴사들이 외부 웹사이트에서 이뤄지는 사용자들의 구매활동을 뉴스피드로 자동공유하는 시스템으로 사생활 침해 이슈로 인해 격렬한 반발을 이끌고 폐지했다.[43] 2007년부터 구글 검색 최적화를 도입했는데, 페이스북 컨텐츠의 기본 공개 범위는 친구 한정이었기 때문에 웹 크롤링이 닿지 않았다. 따라서 검색 최적화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기본 공개 범위를 친구 한정에서 전체로 변경했다.[44] 2010년 포스퀘어에 1억 2,000만 달러의 인수 패키지를 제시했으나, 과거 구글에 기업을 매각한 뒤 서비스가 분해되는 사례를 겪은 CEO는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페이스북이 포스퀘어의 GPS 기능을 모방하여 체크인 기능을 중심으로 장소 앱을 출시했다.[45] 850만 달러를 들였다.[46] 골드만삭스가 자사 고객들로 하여금 페이스북이 상장 전 투자할 수 있도록 500억 달러 밸류에이션에 5억 달러 규모 주식을 제공했다. 러시아계 투자자들이 상당수 참여했다.[47] 페이스북 버튼이 탑재된 안드로이드 계열 스마트폰이다. 앞선 소셜 플랫폼 실패와 모바일 시장의 등장으로 인해 위기를 맞자, 차마스 팔리하피티야는 저커버그의 허락을 받고 비밀리에 팀을 조직하여 자체 스마트폰과 운영체제를 만들어, 애플과 구글의 양강체제를 깨고 모바일 생태계를 장악하려고 했다. 이후 인텔, 폭스콘과 협력하여 시제품이 나왔으나, 내부 반대로 인해 안드로이드 기반 인터페이스인 페이스북홈으로 프로젝트 규모가 축소된 사이 내놓은 제품이 바로 HTC 살사다.[48] HTC 살사와 마찬가지로 페이스북 버튼이 탑재된 안드로이드 계열 스마트폰이다.[49] 모바일 시대가 열린 이후 페이스북의 채팅 기능이 왓츠앱아이메세지에 밀려 힘을 쓰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2011년 벨루가라는 작은 스타트업을 인수한 뒤 페이스북 채팅 기반의 메신저 앱 개발에 착수하여 별도 출시했다. 이후 몇 년 뒤 페이스북 본앱에서 메시징 기능을 빼내 메신저 앱 사용을 강제화시켰다.[50] 플랫폼 범용성이 넓어 효율적이었으나, 네이티브 앱 대비 성능이 크게 뒤쳐졌던 HTML5 기반의 페이스웹을 폐기하고 코드를 새로 짠 뒤, 플랫폼 별 네이티브 앱을 제작하여 모바일에 본격적으로 재진출했다. 모바일 기기는 PC와 다르게 스크린 크기가 작아서 배너광고를 넣기 힘들어 수익이 급감했으며 당시 페이스북 내는 모바일 개발자가 전무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페이스북에 큰 위기를 안겨줬다.[51] 모바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페이스북이 소셜 업계 내에서 신선한 후발주자로 시작하여 시장을 점령한 상황이었기에 인수합병 정책도 소수정예 스타트업을 장기근속 조건이 묶인 수백~수천만 달러 수준의 페이스북 주식으로 인수한 뒤 그들의 기존 사업은 폐기하는 인재 인수 중심의 어크하이어(Acqui-hiring) 방식만을 고집했다. 하지만 모바일 시장이 본격적으로 도래한 2010년대부터는 새로운 업체들에 쫒기는 불안한 선두주자가 되자, 페이스북의 단일 플랫폼만으로는 생태계 장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빠르게 인지한 결과 어크하이어 외에도 수십억 달러 이상의 거금을 들여 여러 플랫폼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운영 기조가 바뀌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수한 인스타그램, 왓츠앱 등은 당시 매출이 전무하던 시절이라 별다른 독점조사 없이 넘어갔으나, 이후 점유율을 더욱 키우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게 되어 사실상 반독점 상태지만, 정작 반독점법으로부터 꽤나 자유로운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52] 훗날 저커버그와 당시 CFO 사이의 이메일을 통해 구체적인 인수 배경이 알려졌다.# 저커버그는 인스타그램의 매출이 제로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잠재적 경쟁자 제거와 더불어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과의 서비스 통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매우 높게 샀다고 한다. 당시 페이스북은 비교적 모바일 생태계에 취약한 편이었는데, 인스타그램은 모바일을 기반으로 성장한 서비스였다. 또한 이미 인스타그램이 개척한 새로운 방식의 아이디어를 단순히 팔로업하는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구글+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오버밸류라고 평가받던 금액에 인수를 진행한 것이다.[53] 1,040억 달러 수준의 상당 당시 기업가치는 당시 기준으로 나스닥 역사상 최대 규모였으며, 이번 기업공개를 통해 조달한 160억 달러는 비자제너럴 모터스에 이은 미국 역대 3위 규모였다. 참고로 페이스북이 시드~시리즈 D와 PE 라운드를 통해 조달했던 액수는 10억 달러를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지분 22%만을 보유했으나, 차등의결권을 통해 과반 이상인 57% 의결권을 확보하며 영속적인 통제권을 얻었다.[54] 한편 이 시기 엔젤투자자였던 피터 틸은 지분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은 상장 직후부터 1년 넘게 주가 폭락 추세를 보였다.[55] 실시간 광고 경매 플랫폼이다. 이즈음부터 앤드루 보즈워스의 모바일 광고 개발팀이 현재에도 캐시카우격 비즈니스 모델로 작동하고 있는 뉴스피드 내 맞춤형 광고 방식을 만들어내며 모바일 수익화에 성공하고 만년 적자를 벗어난다. 페이스북은 모바일 시대가 열린 이후 광고 수익 창출에 어려움을 겪고 웹서비스 성장세가 느려지며 2012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10%대 매출 성장에 그치고 주가 대폭락을 겪은 바 있다.[56] 2012년 12월 스냅챗 인수에 실패한 뒤 그들의 서비스를 의식하여 출시한 경쟁앱이었다. 출시 초기 앱스토어 1위를 기록했으나, 불과 2년이 채 안된 시점인 2014년 5월 서비스를 종료하며 경쟁에서 패배했다.[57] 상술되었듯 차마스 팔리하피티야의 자체 스마트폰 및 운영체제 프로젝트 규모가 안드로이드 기반 인터페이스인 페이스북홈 수준으로 축소된 뒤 HTC 제품에 이를 탑재하여 내놓은 제품이다. 잠금화면 모드에서조차 페이스북이 작동될 정도로 페이스북 생태계를 기반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페이스북폰이라고도 불리는 이 제품은 결론적으로 좋지 못한 판매고를 기록하며 페이스북이 모바일 단말기와 운영체제 시장에서 본격 철수하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분야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된다. 대신 구글과 애플에 모바일 생태계 장악력을 완전히 내어주며, 저커버그가 가장 후회되는 순간으로 언급된다. 저커버그가 이후에 오큘러스를 인수해서 새로운 시장의 생태계를 장악하는 데 사활을 다하는 것도 자체 스마트폰 및 운영체제 프로젝트의 실패와 연계된다.[58] 6개월 전 스냅 인수에 실패한 뒤 포크 앱을 출시했으나, 말아먹고 다시 거액에 인수를 제안했다. 인스타그램 인수 때와 마찬가지로 스냅의 독립성은 물론 자질구레한 업무는 페이스북에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최대 30억 달러까지 제안했으나, 이번에도 인수에 실패하게 된다. 두 차례의 인수 실패와 모방앱인 포크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은 페이스북은 더욱 정교한 모방을 통해 훗날 스토리 기능을 출시하며, 결국 스냅을 궤도에서 이탈시키고 1020 사용자 베이스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59] 인프라가 열약한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보급 사업이다. 현지 진출을 위해 데이터 소모가 덜한 페이스북 라이트앱을 개발했고 현지 통신사 제휴로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저가형 안드로이드폰을 유통하여 자사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했다. 덕분에 이들로부터 대량의 데이터를 얻는 데 성공하여 맞춤형 광고 알고리즘 구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아퀼라(Aquila)라는 인터넷 보급용 태양전지 드론과 스페이스X 발사체를 활용한 위성 인터넷 사업에는 실패하여 개발도상국 진출 계획은 생각보다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60] 딥러닝 부활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이자 컴퓨터 비전 분야 거장인 얀 르쿤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뉴욕시에 설립했다. 르쿤이 요구한 조건에 의해 이 연구소에서는 상용 목적의 제품 부서로부터 독립성을 보장받으며 오픈소스 방식을 차용한 완전개방형 논문과 기반기술 개발에 집중하였다. 대신 연구 성과는 페이스북의 기계학습 응용팀에서 제품화시켰다. 컴퓨터 비전 기술을 활용하여 딥페이스 등 사용자 얼굴 인식 알고리즘을 통한 맞춤광고 최척화와 유해컨텐츠 자동 필터링, 이미지 내 텍스트 추출 등에 써먹었다. 이후 2021년에 MetaAI로 명칭을 변경하였다.[61] 이후 공동창업자인 시스트롬과 크리거는 DM 기능을 별도의 앱으로 만드려는 시도를 했으나, 페이스북 측의 예산 및 인력 충원 거부로 인해 광고 문제와 더불어 갈등의 시발점이 되어 둘 다 퇴사한다.[62] 본토에서는 부진했으나 유럽을 필두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에서 페이스북 메신저를 앞지르자, 저커버그는 자사의 비공개 데이터 분석 툴인 오나보를 통해 왓츠앱이라는 플랫폼에 확신을 갖고 천문학적인 금액에 인수한다. 왓츠앱 공동창업자들의 확고한 신념으로 의해 광고 등 추가 수익화 사업을 강요할 경우 4년 뒤에야 효력이 생기는 스톡옵션 패키지를 조기에 보유한 채 퇴사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삽입했다.[63] 이후 페이스북은 추가 수익화 사업 대신 종단간 암호화돼버린 메세징 데이터를 제외한 전화번호, 행동패턴, 신용카드 등의 데이터 대부분을 페이스북에 공유하여 타 플랫폼 광고에 활용하여 조항에 어긋나지 않는 교묘한 방식을 쓰며 스톡옵션을 전부 지급하지 않은 채 이들 공동창업자들의 조기 퇴사를 유도해냈다.[64] 앞서 인수한 인스타그램, 왓츠앱 딜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오버페이라는 우려를 받았으나, 저커버그는 몇 차례 시연 후 VR이 비디오 게임을 넘어 소셜 분야까지 사용자에게 경험을 제공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에 집중하여 모바일 플랫폼 패권을 얻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차세대 폼팩터로서 오큘러스의 가능성을 높게 봤다. 인수가는 초기 10억 달러 이하부터 시작했으나, 확신에 찬 저커버그의 결정 하에 이익수당 7억 달러 포함 27억 달러까지 불어났다.[65] 창업자 시스트롬은 페이스북이 뉴스피드 광고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고 생각했기에 인스타그램 피드 내 올라오는 모든 광고를 알고리즘이 아닌 본인이 직접 통제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점점 플랫폼을 통합하고 점점 수익화를 추구하면서 2018년 9월 시스트롬과 크리거 둘 다 퇴사했다. 빈자리는 저커버그의 측근인 애덤 모세리로 메워졌다. 전기에 의하면 저커버그는 인스타그램이 본인 회사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성장세에 페이스북이 밀리고 플랫폼이 인스타그램 위주로 재편될까봐 이들을 페이스북의 위성 격으로 작용하도록 플랫폼 구조를 개편했다고 한다.[66] 앞선 8월부터 일부 유명인들을 대상으로만 기능을 선제공했었다.[67] 왓츠앱 창업자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은 사용자들의 메세지 내용을 통신 사업자는 물론 정부도 엿보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68] 해당 선거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측이 페이스북의 맞춤형 알고리즘 방식을 악용하여 가짜뉴스 바이럴 공세를 펼치고 언론을 장악한 결과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고 이것을 기점으로 페이스북의 가짜뉴스 알고리즘 문제는 커다란 본격적인 수면 위로 떠오른다. 페이스북은 효율적인 운영을 명목으로 서유럽과 동아시아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 크라우드소싱 방식으로 진입하고 각국의 지사에 담당 인원을 최소화시켰다. 컨텐츠 관리자의 경우에도 아웃소싱을 맡겨 해결했고 데이터가 쌓이자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인간의 개입을 줄여나갔다. 이로 인해 페이스북이 각국의 컨텐츠에 일일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이번 대선과 같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69] 이로 인해 1020 사용자 층을 두고 경쟁 관계였던 스냅챗은 사용자들 대거 인스타그램에 빼앗기며 2017년부터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70] 앞선 2015년 1월 Torch 라이브러리를 오픈소스로 공개했다.[71] 러시아 연방군 정보총국의 공작원들이 민주당선거본부와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를 탈취하여 각종 언론사와 페이스북 뉴스피드 알고리즘 바이럴 전략을 통해 미국 대선 개입을 위한 거짓 선동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특히 각종 사이버공격으로 이메일을 탈취하고 페이스북 내 디시리크스라는 가짜페이지로 선동을 벌이다 조지 소로스의 개인정보를 노출시킨 것을 명분으로 페이지가 삭제되는 사건도 벌어졌으며 인터넷 연구소 논란도 곧이어 터졌다. 이후 인기뉴스 기능을 통한 가짜뉴스 논란, '투표하기' 기능 노출도가 선거결과에 미치는 영향,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범위 등을 두고 각종 논란이 벌어졌다. 성장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컨텐츠가 인기 있는 반응을 끌어올 경우 유리하게 적용되는 방식의 알고리즘으로 인해 가짜뉴스와 스캠사이트 등이 사용자들에게 맞춤형으로 제공되어 벌어진 대참사였다. 저커버그 전기에 따르면 이 당시에도 그가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수호하는 비개입주의적 방향에만 치우친 상황이었고 이즈음 대선을 앞두고 사내에서도 직원들의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외부로부터는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페이스북의 문화를 의심받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72] 한편 언더독이자 비정통적인 후보었던 도널드 트럼프 측 캠프는 브래드 파스케일이라는 디자이너의 지휘하에 힐러리 클린턴과는 달리 소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타게팅 광고를 저비용 고효율로 진행하며 광고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한 결과 본인의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반대로 그에게 투표할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진보주의자, 여성, 유색인종 등의 집단에게는 안티 힐러리 광고를 맞춤 유포하여 대선 당일 투표를 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그는 결국 대선에서 승리하였고, 2016년 선거는 타겟팅 광고의 바이블급으로 평가받게 된다. 페이스북과 저커버그는 이 선거와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데이터 스캔들을 계기로 대중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고 악의 축, 빌런 취급을 받게 된다.[73] 가짜뉴스 바이럴, 사생활 침해, 데이터 유출, 러시아 게이트, 청소년 중독 등의 동시다발적 악재로 인해 기업 평판이 극악으로 치닫자 생각을 정돈하고 여러 의견을 들어보고자 투어를 실시하여 동년도 11월까지 6개월 가량의 대장정을 떠났다.[74]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SCL 그룹이라는 영국의 정치 컨설팅 업체가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2013년 델라웨어 법인으로 설립한 자회사다. 알렉산드르 코건이라는 교수는 페이스북 API 기반의 성격 테스트 앱을 성공시키며 수천만 명에 달하는 사용자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타게팅 광고 서비스를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그를 통해 가입자 수백만 명의 데이터를 불법적으로 수집했다. 2015년 테드 크루즈의 캠페인에 해당 데이터가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관련 보도가 꾸준히 나왔으며, 2018년 3월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내부자였던 크리스 와일리의 폭로로 인해 스캔들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불법적으로 수집한 데이터는 트럼프 측이 600만 달러를 지급하며 그의 선거운동에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2019년 9월 집단 소송 사태의 문건을 통해 페이스북의 오픈 그래프를 악용한 규정 위반 개발자는 400명 이상, 데이터를 부정하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앱은 무려 1만 개에 달한다는 소식아 알려지며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사태는 겨우 티끝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75] 성장에만 메달린 나머지 페이스북 플랫폼을 위한 API는 서드파티 개발사를 통한 데이터 유출에 있어 허점이 상당했으며 뉴스피드 알고리즘 또한 타켓팅에만 매몰되어 악용당하기 매우 쉬운 구조로 발전했으며, 내부 조직의 방대화 늦장 대응으로 인해 사태가 이 지경까지 불어난 것이다. 페이스북은 2015년에 코건과 케임브리지 측에 데이터 삭제를 요구한 뒤 코건의 앱을 플랫폼에서 퇴출시켰으나, 데이터는 당연히 삭제되지 않았고 심지어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를 광고주로 다시 받아주며 사실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쳤다. 전기에 의하면 저커버그와 샌드버그 둘 다 해당 사태가 언론을 통해 수면 위에 올라오기 전까지 관련 보고를 전혀 받지 못하는 총체적 난국의 상황이었다고 한다.[76]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데이터 스캔들로 인해 의회로부터 청문회 요청을 받았다. 세계를 연결하여 좋은 일을 해보려고 했던 본의와는 달리 가짜뉴스, 외국의 선거개입, 혐오발언, 개인정보 악용 등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77] 다만 의원들의 고압적인 자세와 기술에 대한 무지가 드러나는 질문, 매우 드물게 정장을 갖춰 입은 저커버그의 드레스코드 등 정작 사건 외적인 요소만 부각이 되어버린 청문회로 변질됐다.[78] 불허가되는 컨텐츠 가이드라인을 규정한 것이다. 본래 저커버그는 일론 머스크처럼 극도로 표현의 자유를 중요시하며 세계를 온라인 상으로 연결하는 데 사활을 걸던 인물이었으나, 러시아 게이트와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데이터 스캔들 등으로 인해 커뮤니티 스탠다드 규정을 기점으로 자사 프라이버시 제한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바뀌고 거듭된 비판을 타개해나가기 위해 애쓴다.[79] 저커버그는 사람들이 비공개 메세지, 휘발성 게시물, 소규모 그룹 등이 온라인 소통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이며 뉴스피드와 같이 영구적 기록이 남는 공적 수단보다는 소수의 안전한 공간을 선호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페이스북(블루앱) 플랫폼 우대 문화의 종말과 더불어 자사 플랫폼 통합을 의미한다. 메신저와 왓츠앱은 광고 모델이 빈약하여 사실상 매출이 없는 대신 사생활이 담긴 메세지 활용이라는 선을 넘지 않는 하에 행동 데이터와 전화번호, 신용카드 등 수집 가능한 데이터가 넘쳐났고, 이를 이용하여 앱간 연동으로 간접적 수익화 모델을 구축한다.[80] 2007년 페이스북 플랫폼 출시 이후 서드파티사를 대상으로 수수료를 부과했던 페이스북 크레딧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상거래 기능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후 개발자들의 반발과 지불수단이 파편화된 세계 각국의 상황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블록체인 기반 화폐를 구축하고자 리브라를 발표한 것이다. 리브라는 100여곳의 파트너사로 구성된 리브라협회라는 외부기관에 관리를 위탁했으며 코드 또한 오픈소스로 공개할 예정이었다.[81] 앞선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데이터 스캔들로 인해 연방거래위원회의 레이더망에 들어와 집중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후 조사를 통해 페이스북이 기만적 프라이버시 설정, 서드파티 개발자의 데이터 접근에 대한 안정장치 유지 실패, 보안 목적으로 제공된 사용자 전화번호를 광고에 악용, 기본값으로 켜져 있는 얼굴 인식 기술에 대한 거짓말 등의 혐의에 대한 벌금을 제기했다. 50억 달러는 당시 연방거래위원회 역대 최대 규모의 벌금이었다.[82] 신경과 근육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를 분석하는 근전도 손목밴드를 통해 생각만으로 앱을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신경과학 업체다. HMD의 거추장스러운 단점을 보완해보기 위해 인수해본 케이스로 이를 통해 BCI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 영역에 진출했다.[83] 나름 리브라 관리를 리브라협회에 맡기고 오픈소스로 제공하려는 등의 시도를 했으나, 앞선 데이터 유출 사태들과 반독점법 위반 등으로 인해 이미지가 바닥을 기었던터라 미 정부와 의회의 압박으로 인해 파트너사들을 잃고 프로젝트를 대폭 축소시켰다.[84] 앱추적 선택 여부 기능이 추가되어 페이스북을 비롯한 애플기기의 서드파티 개발사들은 사용자 데이터 수집이 어려워져, 맞춤 광고 알고리즘 구축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광고주들이 떨어져나갔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페이스북이 각종 보안 문제로 인해 여론의 융단폭격을 맞는 것을 교훈삼아, 이 시점부터 애플은 자사 플랫폼의 보안성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2017년 팀 쿡은 공개적인 졸업식 축사에서 좋아요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으며 2019년 페이스북의 스파이웨어 앱인 오나보를 앱스토어에서 퇴출시키고 기업 내부용 앱스토어 기능인 엔터프라이즈 프로그램 자체를 차단시켰다. 애플은 본인들의 퍼스트파티는 유료앱을 중심으로, 서드파티는 앱스토어를 통한 수수료 징수로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광고업으로 먹고 사는 페이스북과는 이해관계가 정반대인 상황이다.[85] 입사 전부터 소셜 미디어로 인해 급진주의에 빠진 친구들로 인해 비판적인 시각을 키워왔다. 이후 2019년 페이스북에 입사했으나, 페이스북의 행태에 거부감을 느끼며 내부 통신망을 뒤져 각종 파일을 취합한 뒤 월스트리트저널을 시작으로 각종 언론사와 접촉하며 폭로를 이어갔다. 2023년에는 페이스북 내부 폭로 과정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86] 10월 28일 오큘러스 플랫폼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례행사 <커넥트 컨퍼런스>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사명 변경을 알렸다.[87] iOS 14.5, 틱톡의 급부상, 메타버스 사업부 적자 심화, 경기 둔화로 인한 광고 매출 감소 등으로 인해 고점 대비 주가가 1/4 수준으로 빠졌다.[88] GIF 검색엔진 기업이다. 2020년에 4억 달러로 인수했으나, 영국 당국의 압박으로 인해 단돈 5,300만 달러에 재매각했다.[89] 자사 첫 인공지능 가속기다.[90] IBM, 인텔, AMD, 오라클, 예일 대학교 등 50여 곳의 기업과 기관들이 참여했다. 오픈소스 방식으로 업계 선두인 OpenAI구글에 대항하겠다는 뉘앙스가 상당히 강하다.[91] 창사 이래 최초로 주당 0.5달러 수준이며, 연간 50억달러 규모다. 또한 500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도 발표하면서 주가가 20.32% 급등하여 2021년 3분기 이후 처음으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재돌파했다. 이는 같은 달 22일 NVIDIA가 16.4% 급등하며 시가총액이 일간 2,700억 달러 상승하기 전까지 역대 미국증시 일간 최대 시가총액 증가 기록이었다.[92] 탄화 규소로 이뤄진 마이크로 LED 렌즈로 70도 시야각을 제공한다. 카메라 대신 2019년 인수한 CTRL LABS의 기술인 근전도 밴드로 글래스를 제어할 수 있으며 데이터를 처리해주는 별도의 무선 컴퓨트 팩이 동봉되어 있다.[93] 페이스북 관련인들과 나눈 300여 차례 인터뷰를 기반으로 2010년대까지의 저커버그와 페이스북의 일대기를 다룬다.[94] 페이스북 창업 이후 첫 5년 가량을 다룬다.[95] 에두아드루 사베린 등 페이스북에 적대적인 인물들의 자문을 기반으로 저술되었다. 이후 소셜 네트워크로 영화화된다.[96] 마이클 짐머라는 교수가 개설한 저커버그 아카이빙 블로그.[97] 케이스 뉴튼의 페이스북 관련 일간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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