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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01 21:52:50

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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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역도산
力道山 | りきどうざん | Rikidōzan
파일:500px-Rikidozan_01.jpg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본명 귀화 전
김신락
(金信洛)
귀화 후
모모타 미츠히로
[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光浩, ruby=みつひろ)]
출생 1924년[1] 11월 14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2]
(현 함경남도 신포시 신풍리)
사망 1963년 12월 15일 (향년 39세[3])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8초메 10-16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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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6cm, 116kg, AB형
가족 관계 장녀 김영숙(1942년생)
차녀 모모타 치에코(1944년생)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義浩, ruby=よしひろ)])(1946 - 2000)
차남 모모타 미츠오([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光雄, ruby=みつ お)])(1948년생)
3녀 모모타 히로미(1964년생)
손녀 모모타 레미([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玲美, ruby=れ み)])[4]
손자 모모타 치카라([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力, ruby=ちから)])(1981년생)[5]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생애3. 일화4. 가족5. 여담6. 대중 매체7. 둘러보기
7.1. 스모 커리어7.2. 프로레슬링 커리어

1. 개요


한국계 일본인 프로레슬러.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의 기초를 닦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시조이자 최초의 스타이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으며, 오늘날 일본의 프로레슬링 계보도를 타고 올라가면 대부분은 역도산에 닿게 된다.[6] 당시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구가했지만, 1963년 도쿄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시비가 붙은 야쿠자를 두들겨 패다 눈 먼 칼에 찔려 수술을 받았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만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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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화

3.1. 숨겨진 정체성: 재일 한국-조선인

역도산은 일본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으며,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몇몇 자식들도 아버지가 조선 출신이라는 걸 말한 적이 없어 그냥 나가사키 출신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한반도에 오면 자신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걸 딱히 숨기진 않았던 모양이다.

김일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을 지도할 때나 사석에서나 한국어를 한 번도 쓰지 않는 독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한다. 유일한 예외로 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잡담하던 중 역도산이 "기쿄를 넣고 비벼먹고 싶네."라고 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몰라서 "기쿄? 뭡니까?"라고 머뭇거리며 질문하자 역도산이 "긴타로, 기쿄가 뭔지 모르나? 도라지[7]란 뜻이야."라며 도라지를 한국어로 말했다고 한다. 그 도라지라는 말이 김일이 역도산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어였다고 한다.[8] 다만 역도산이 방한했을 당시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라고 한 것을 보면 진짜 한국어를 잊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역도산도 입맛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집 안에는 한국 노래 레코드를 쌓아둔 방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평소에도 불고기마늘을 듬뿍 얹어서 김치와 같이 먹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같은 조선인 친구[9]가 운영하는 불고깃집에 새벽 또는 밤늦게 찾아가서 불고기에 마늘과 김치, 그리고 소주까지 양껏 먹고 마신 후 돌아갈 때엔 입냄새를 지우려고 을 입안 가득 씹으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실제로 이 일화는 설경구가 출연한 역도산의 일대기 영화에서도 잘 재현되었다. 하정우 못지않게 불고기와 껌을 매우 맛있게 먹는 설경구의 혼신의 먹방 연기가 킬링 포인트.[10]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남몰래 고국인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낸 이야기들은 대다수가 역도산의 셋째 부인인 다나카 게이코의 자서전을 통해 밝혀졌다. ‘남편 역도산의 통곡’ 미망인 다나카 게이코 40년 만의 고백.

어쨌든 위와 같은 일화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철저하게 '난 조선인이 아니다'란 식으로 자기 뼛속까지 부정했다기보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으나 이미 일본 대중들에겐 자신이 일본인으로 알려진 데다가 일본에서 프로레슬러 활동을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될 건 없으니 감춘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이런 배경 덕분인지 1968~1971년 연재된 만화 타이거 마스크에서도 역도산 일대기를 다루면서 일본인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다보니 21세기에도 역도산이 조선 출신이란 걸 모르는 일본인도 꽤 있는 모양. 물론 일본 위키에도 한반도 출신이란 게 버젓이 적혀 있기에 검색해보면 모를 수가 없지만, 이미 시대적으로 과거 인물이다 보니 프로레슬링 역사에 관심 있는 인물이 아니라면 역도산 자체를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2020년대에도 역도산 관련 유튜브 영상 조회수가 100만 이상이 나오는 영상도 있는거 보면, 일본에서는 아직도 국민적 영웅의 한 명[11]이다. 다만 젊은 층은 옛날 인물 중에 그런 사람도 있었지라고 아는 정도.

3.2. 무자비한 구타 전설

역도산은 성격이 급하고 거칠어서 자신의 체육관 제자들을 훈련시킬 땐 구타가 일상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인간 말종 수준이라서 한국인들 중에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꽤 많다.

제자들에게 체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거의 학대에 가까운 대접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이언트 바바의 경우 "사부님, 사부님은 왜 정수리에 챱을 쓰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12] 갑자기 역도산이 바바를 마구 두들겨패고는 "바보 자식아. 그럼 상대가 죽잖냐!"[13] 하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나마 바바는 역도산이 특별관리한 케이스라서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부드러운 취급을 받았는데도 저 정도였다.

특히 역도산에게 가장 많이 맞은 게 1위가 김일, 2위가 이노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너무 구타가 심해서 그냥 학대 수준으로 밖에 안 보였다고 한다. 김일의 경우 역도산이 박치기를 하려면 머리가 단단해야 된다면서[14] 갑자기 신고 있던 게다를 벗어다가 김일의 머리를 마구 내리친 적도 있었다.

그나마 김일은 그렇게 맞고도 죽기 전까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계속 표했지만, 이노키는 심한 푸대접에 프로레슬링 포기까지 생각했을 정도였고 이후에도 역도산한테 악감정이 꽤 남은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자이언트 바바 같은 거인은 알아서 스타가 될 수 있지만 김일이나 이노키 같은 케이스는 오로지 근성으로만 스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다른 제자보다 더 혹독하게 대한 것이다'라는 역도산의 위로로 겨우 앙금을 풀 수 있었다고. 김일이 말년에 투병생활을 하던 시절 찾아온 한 일본인 프로레슬러 친구는 '넌 스승에게 엄청나게 미움받았거나 엄청나게 사랑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역도산의 이런 난폭한 성격은 영화 "역도산"에서도 묘사되는데, 높으신 분들이 가족을 데려와서 역도산과 그 제자들의 연습을 구경하는데 제자들이 시원찮아서 아이들이 시큰둥해하자 직접 링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기술을 건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좋아했으나 역도산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자 겁에 질려서 울어버린다. 역도산을 그나마 옹호하는 측에선 이런 난폭함이 자신이 조선계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울분과 억압 때문에 더 심해진 것 아닐까란 추측도 한다. 또 역도산은 말기에 경기력을 위해서 흥분제 등의 약물을 남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성격이 더 난폭해졌다고 보기도 한다. 허나 그 과정이 어찌됐든 결론적으로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고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건 사실로 보인다.

한편, 일본에선 대부분의 프로레슬러들이 역도산의 밑에서 연습을 했었던 탓에, 이것이 대물림되어 일본 프로레슬링 전반에 걸쳐서 구타 문화가 심각한 편이라는 주장도 있다.[15] 물론 이런 스포츠계 폭력 문화는 역도산이나 프로레슬링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남들도 다 그래란 식으로 잘했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또 이런 성격은 체육관 밖에서도 비슷했는지, "역도산이 사람을 팼다"는 식의 기사는 당시 스포츠 신문 단골로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역도산 본인의 해명으로는 자신이 유명하다 보니까 워낙 시비를 걸어오는 인간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런 성격 때문에 시비 거는 야쿠자를 두들겨패다 사망했다.

3.3.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

경기 중계 영상. 문제의 장면은 10분 32초부터 나온다.

유도가 출신 프로레슬러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16]와 프로레슬링 경기를 하다가 둘 다 명성에 흠이 간 사건.

사건 자체만 요약하자면, 당시 유도계에서 최강자 취급을 받던 기무라 마사히코가 생활고 등으로 프로레슬링 무대에 뛰어들어 한동안 역도산과 한 팀으로 활동했으나[17], 유도계에선 최강자 취급을 받던 자기가 프로레슬링계에선 역도산 뒷바라지나 하는 신세다 보니 자괴감이 들었는지 이후 독립하여 자기 프로 레슬링 단체를 창설하고 역도산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다 역도산과 매치가 성사되고, 당연히 실전보단 대중의 관심을 받아 이익을 챙기는 엔터테인먼트 목적이 강한 프로레슬링계였던만큼 각본에 따라 처음 시합은 무승부, 이후로는 둘이 합의 하에 1승 1패를 주고 받는 식으로 워크가 정해진다. 헌데 문제는 실제 시합 도중 기무라에게 로우 블로를 당했다고 주장한 역도산이 격분하여 워크를 깨고 그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고, 기무라는 이리저리 맞다가 허무하게 쓰러지고 만다. 이것을 쇼와의 간류지마(昭和の巌流島) 사건이라고 한다.[18] 이 사건으로 패자 기무라의 위상은 추락하고, 잔인한 승자가 된 역도산도 영웅 이미지가 많이 깎이게 된다. 다만 승리한 역도산에겐 손해만 있지는 않았다. 일단 가장 가시적인 성과로 그의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기무라를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완전히 매장하는데 성공했으며 또 역도산 자신의 강함을 대중에 다시 한 번 어필했으며 비록 안티들에게 욕은 먹긴 했어도 인기 자체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반면 기무라는 상술한 대로 업계에서 사실상 몰락하고 만다. 애당초 역도산이 손해만 봤다면 기무라와 친했던 최영의가 그렇게 격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역도산이 기무라를 매장하기 위해 꾸민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역도산 입장에서는 그래야 할 당위성도 있었고.[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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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역도산의 가족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이는 복잡한 인생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 편력이 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5. 여담

6. 대중 매체

7. 둘러보기

7.1. 스모 커리어

리키도우잔 미츠히로 ([ruby(力道山, ruby=りきどうざん)] [ruby(光浩, ruby=みつひろ)])
연도 / 바쇼 하츠([ruby(初, ruby=はつ)],1월) 나츠([ruby(夏, ruby=なつ)],5월) 아키([ruby(秋, ruby=あき)],10월)
1940년 (16세)
(쇼와 15)
X 마에즈 X
1941년 (17세)
(쇼와 16)
(西) 죠노구치 20
5-3-0
(西) 죠니단 45
6-2-0
X
1942년 (18세)
(쇼와 17)
(東) 산단메 51
우승
8-0-0
(東) 마쿠시타 34
5-3-0
X
1943년 (19세)
(쇼와 18)
(西) 下 21
5-3-0
(西) 下 12
5-3-0
X
1944년 (20세)
(쇼와 19)
(東) 下 13
3-5-0
(東) 下 13
우승
5-0-0
(西) 쥬료 10
7-3-0
1945년 (21세)
(쇼와 20)
X (東) 十 4
3-4-0
(東) 十 7
8-2-0
1946년 (22세)
(쇼와 21)
X 료고쿠 국기관 보수
전체 휴장
(西) 마에가시라 17
9-4-0
1947년 (23세)
(쇼와 22)
X (東) 前 8
기수
9-1-0
(東) 前 3
6-5-0
1948년 (24세)
(쇼와 23)
X (東) 前 2
수, ★
8-3-0
(東) 코무스비
6-5-0
1949년 (25세)
(쇼와 24)
(西) 小結
8-5-0
(西) 세키와케
3-12-0
(西) 마에가시라 2

8-7-0
1950년 (26세)
(쇼와 25)
(西) 코무스비
10-5-0
(西) 세키와케
최고위
8-7-0
(西) 세키와케
은퇴
0-0-15
* 계급 옆 숫자는 순위, 전적은 승-패-휴장 순
파란색 : 승급, 빨간색 : 강등, 회색배경 : 전체휴장 검은배경 : 은퇴
첫승급&최고성적 : 진한글씨
* 3상 - 감 : 감투상, 수 : 수훈상, 기 : 기능상
: 킨보시[30]
口 - 죠노구치, 二 - 죠니단, 三 - 산단메, 下 - 마쿠시타
十 - 쥬료, 前 - 마에가시라
小結 - 코무스비 関脇 - 세키와케, 大関 - 오오제키, 横綱 - 요코즈나

7.2. 프로레슬링 커리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WE_HOF_logo.png
2017년 WWE 명예의 전당 레거시 어워드 헌액자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NWA 명예의 전당.jpg
2011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역도산은 출생연도와 나이를 속인 의혹이 있어서 생년월일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고향 친구인 진명근은 1923년생이었는데, 역도산의 나이를 자신보다 한살 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1922년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2] 일본 주민등록상 출생지는 나가사키현 오무라시.[3] 상기했듯 몇 살 더 위일 수도 있다.[4] 장남인 모모타 요시히로의 장녀.[5] 차남인 모모타 미츠오의 장남.[6] 후술하듯 김일 등 한국 프로레슬링 계보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7] 일본에서는 도라지를 먹지 않는다. 즉, 일본에서 안 먹는 음식이기에 (가까운 곳에서 고향 친구가 한식당을 경영하고 있어도) 구할 수도 없었고 김일도 기쿄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에도 일본인 중에도 기쿄가 뭔지 모르는 일본인들도 많다. 도라지의 맛을 그리워했는지 남몰래 고향 친구의 식당에 가서 식사할 때도 도라지 타령을 열창했는데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친구의 아내는 일본인이었는데도 도라지 타령의 가사를 똑똑히 기억했다고 회고했다.[8] 도라지의 한자어인 길경(桔梗)은 도라지를 한약재로 분류할 때 쓰는 단어이며 실생활에서도 간혹 쓰인다. 기쿄는 이 길경의 음독에 해당한다.[9] 실명은 진명근이라고 알려졌으며 가게 이름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에서는 콘고엔으로, 노컷뉴스에서는 고탄다로 소개했다. 확실한 건 진명근의 아내는 일본인이었는데 역도산을 통해 들은 아리랑과 도라지의 가사를 노년이 되어서도 기억했다고 한다. 설경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역도산에서 역도산의 친구인 불고깃집 주인 배역을 배우 박철민이 연기했는데, 발음 때문인지 아니면 아예 가명을 쓴 건지 김명길이라면서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름으로 언급된다.[10] 여담으로, '마늘 냄새'는 한국인(및 재일조선인)을 차별할 때 쓰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마늘은 실제로 굉장히 냄새가 강하다. 역도산은 일본 내에서 야키니쿠가 일상화 되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므로 마늘 냄새 역시 한국계로 의심받을만한 요소였을 수 있다.[11] 역도산 살아 생전의 당시 인기는 현재의 오타니 쇼헤이가 누리는 국민적 인기라고 보면 된다. 일본은 아직도 프로레슬링이 꽤나 인기 있는 나라이고 역도산의 인지도 자체는 역사적 인물 수준으로 높다고 보면 된다.[12] 자이언트 바바는 현역 시절 정수리에 챱을 먹이는 노텐(脳天)챱이라는 기술을 쓰기도 했다.[13] 역도산은 찹으로 코코넛을 깬 적이 있을 정도로 찹의 파워가 엄청났다.[14] 김일은 역도산으로부터 "너는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수련해야지?"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수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역도산은 나중에 이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15] 몇가지 예를 들자면, 마에다 아키라는 심지어 TV생방송 중에 선수들을 두들겨 패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도 자기 체육관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폭력을 가하는 게 촬영되어서 인터넷에 돈 적이 있는데, 군기 잡기나 체벌 레벨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 레벨. 게다가 트레이닝 지도 중에 그냥 아무나 보이는 대로 마구 때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북미 프로레슬링도 만만찮은 구타와 폭력이 만연했으므로 그저 스포츠계의 악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흔히 ’구식 마인드‘로 퉁치지만 미즈의 사례를 보면 저런 말로 퉁치고 지나갈 수준의 문제는 아니었다.[16] 이 사람도 유도계에서 전설적인 인물. 또한, MMA쪽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데, 종합격투기에서 대표적인 서브미션 기술로 불리는 기무라 락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브라질에서 큰 인기를 끌던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서 MMA 역사에선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뽑힌다.[17] 일설에 의하면 역도산은 미국 프로레슬러들과 1:1 매치로 인기를 끌었지만, 당대 북미권 트렌드가 1:1 매치보단 2:2 매치로 가는 추세였고 이에 역도산도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인력풀이 좁던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자신과 파트너를 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다 마침 관심을 가지던 기무라를 끌어들였다고 한다.[18] 센고쿠 시대의 대검호 미야모토 무사시사사키 코지로가 간류지마에서 벌인 결투를 연상시킨다고 붙여진 이름.[19] 상술한 대로 기무라는 역도산의 라이벌, 혹은 아예 대체재가 될 수도 있었다. 당장 역도산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약점이 있었으니 기무라가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뜨게 된다면 현재 역도산의 자리를 기무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생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령 당대에는 그런 움직임은 없었더라도 역도산 자신이 그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20] 당시 입국한 역도산은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라고 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일본어로 하였다. 그래도 판문점에 방문하면서 북녘을 향해 한국어로 '형님'이라고 크게 외쳤다는 후문이 전해진다.[21] 주된 근거는 역도산이 선수에서 은퇴하면 북한으로 돌아가 여러 가지 사회활동들(스포츠든 정치든)을 하고 싶어했다는 증언들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그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 증언이 사실이고 실제로도 북한으로 갔다면, 그가 살아있었을 적 행보로 볼 때 북한 정치인으로 변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는 것.[22] 특히 일본인 아내와 아들.[23] 그리고 원래 어지간한 프로레슬링 단체는 타국인이나 타 단체 선수에게 매우 폐쇄적이다. 사실 당연한 게 함부로 벨트를 유출하면 그만큼 그 단체의 격이 낮아지기 때문. 원래 NWA에서 챔피언십을 벌여 루 테즈를 꺾었으나 벨트를 유출할 수는 없어서 NWA 챔피언 벨트를 주는 대신 NWA 인터내셔널 헤이웨이트 챔피언으로 퉁친 것이다. 그러니 위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24] 연기력이야 이미 입증되었지만, 역도산 역을 위해 체중을 21kg 가까이 늘리고 레슬링 경기 장면을 직접 소화했으며, 개인 교습을 통해 일본어 공부를 한 끝에 엄청난 양의 일본어 대사(이 영화의 주 언어는 일본어다)도 최대한 소화하며 열연을 펼쳤다.[25] 송해성 감독은 역도산, 무적자같이 스케일이 크고 돈 많이 드는 영화는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역도산의 경우 작품성은 꽤 인정받았지만, 재미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26] 역도산이 사망한 날과 코야마 리키야가 태어난 날이 겨우 3일밖에 차이가 안 났다고 한다.[27] KOF 시리즈의 그 김갑환 맞다.[28] 역도산: 일본어, 문현진: 영어[29] 역도산과 기무라 마사히코가 프로레슬링 대결을 벌이다 각본과 달리 시멘트 매치로 가버린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의 오마쥬.[30] 마에가시라 이하가 요코즈나에게 승리.


전설의 프로레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