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20: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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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102e><colcolor=#fff> 애틀랜타 호크스 No. 9 |
로버트 리 페팃 주니어 Robert Lee Pettit Jr. |
출생 | 1932년 12월 12일 ([age(1932-12-12)]세) |
루이지애나주 배턴 루지 |
국적 | [[미국|]][[틀:국기|]][[틀:국기|]] |
출신학교 |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
신장 | 206cm (6' 9") |
체중 | 93kg (205 lbs) |
포지션 | 파워 포워드 / 센터 |
드래프트 | 1954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밀워키 호크스 지명 |
소속팀 | 밀워키-세인트루이스 호크스 (1954~1965) |
지도자 | 세인트루이스 호크스 (1962 / 감독) |
등번호 | 9번 - 밀워키-세인트루이스 |
1. 개요2. 일생3. 여담4. 참고 자료5. 관련 문서
[clearfix]미국의 농구인. NBA 시절 센터와 파워 포워드로 뛰었다. 최초 정규 시즌 MVP를 수상한 선수이기도 하다.
1932년 루이지애나 주 배턴 루즈에서 보안관이던 아버지 로버트 리 페팃 시니어(1896~1974)와 어머니 마가렛 러브레이스 브랜든(1903~1992)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턴 루즈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2학년 때까지는 실력이 미흡해서 커너 데이 감독을 만족시키지 못해 농구부에서 탈락했지만, 아버지와 집 마당에서 농구 연습을 하며 실력을 키워 3학년 때는 주전에 올라 농구부를 20년만에 주 대회에서 우승케 했고, 남-북부 올스타에도 선발됐다. 1951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로 진학하여 해리 라벤호스트(1898~1972) 감독의 지도를 받아 1952-53 시즌에는 농구부를 NCAA 전국 토너먼트 4강까지 이끌었고, 이 공로로 올 사우스이스트 컨퍼런스 3회, 올 아메리칸 퍼스트팀 1회(1954) 등에도 선발됐다.
1954년 NBA 드래프트에서 밀워키 호크스에 1라운드 2차 지명으로 입단했고, 입단 첫 해 1만 달러로 계약을 했다. 이후 11년 간 센터와 파워 포워드로 뛰었다. 백인이라 운동능력이 뒤질 거란 예상을 뒤집고 탁월한 활약을 보여주며 첫 해부터 신인상을 타는 데 성공했다. 206cm의 큰 키에도 불구하고 스피드와 운동능력, 유연성이 상당히 좋았다.
당시 최고의 수비수인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과의 매치업에서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특히 1958년 파이널은 페팃이 해결사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파이널 6차전에서 50점을 넣어 보스턴 셀틱스를 꺾고 호크스의 우승을 이끈 것. 이것은 현재까지 호크스의 유일한 우승이다.
통산 2만점을 넘기고 생애 첫 퍼스트팀에서 밀려난 후, 1962년에는 잠깐 감독대행을 해 봤다가 1965년, 30세의 나이로 미련없이 은퇴하였다. 이후 고향 배턴 루주 등지에서 은행업에 줄곧 종사하다 1988년부터 금융 컨설팅업으로 방향을 틀어 2002년에 데이빗 토머스 등 2명과 함께 '에퀴타스 캐피털 인베스터스'를 세웠고, 2006년 경영 일선에서 은퇴했다.
1970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후, 1980년에는 NBA 35주년 기념 팀과 1996년 '위대한 선수 50인', 2021년 75주년 기념 팀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애틀랜타 호크스 측도 그간의 공적을 기리며 그의 등번호 9번을 영구 결번중이다.
4. 참고 자료
5.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