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坊刻本조선 중후기 이래로 민간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출판된 목판본 서적을 말한다. 민간에서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관판본과, 영리를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사각본과, 목판이라는 점에서 활자본과 구분된다. [1]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여 18~19세기에 크게 확산되었으며, 일제강점기까지도 출판되었다. 방각본은 관찬본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인쇄의 품질이나 종이의 질이 떨어졌고, 값도 훨씬 저렴했다. 흔히들 방각본이라고 하면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한글 소설류를 떠올리지만 그뿐만 아니라 역서, 옥편과 같은 실용서나 논어와 같은 유교의 경서 역시 출판되었다. 서울, 안성, 전주 등 상업이 발달하였고 종이를 구하기 쉬운 도회를 중심으로 간행되었다.
2. 역사
2.1. 방각본 출현의 배경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이전부터 서적의 인쇄와 보급이 오랫동안 이루어졌다. 신라와 고려를 뒤이은 조선에서도 서적의 보급은 중대한 문제였다. 조선 전기에는 왕명으로 간행된 책을 반사(頒賜)하거나,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한 책을 민간에 공급하는 등 관의 주도로 서적 보급이 이루어졌다. 교서관은 그러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라고 할 수 있다. 교서관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수의 관찬서가 간행되었고, 심지어는 개인의 시문집을 간행하는 등 민간의 서적 수요에도 기민하게 대응하였다. 한편으로 교서관이 민간의 출판을 대행했다는 것은 그 정도로 출판 수요가 충족될 정도로 민간의 서적 요구가 크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중앙이 통제하는 서적 보급 체계는 적어도 성종 시기까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그런데 중종 대에 와서는 이러한 상황이 슬슬 바뀌기 시작한다. 중앙 관청의 개입 없이 지방 관아에서 자체적으로 서적을 간행·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종실록에 실린 기사를 보자.
"신이 보니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인(刊印)해서 그 지방의 연소한 선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이 모두 시비(是非)와 호오(好惡)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소민(小民)들도 모두 악한 짓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아무개는 부모에게 불효하다.’ ‘아무개는 그 형에게 불공하다.’ 하면서 배척하여 동류에 끼워주기를 싫어합니다. 신이 고로(古老)에게 물으니 ‘예전에는 조정에서 「방금 선도(善道)를 흥기시킨다.」고 말한 경우에도 그 효과를 본 일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조정에서 한 일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감사(監司)가 또 한 고을에서 추앙받는 노숙(老宿)을 뽑아 도약정(都約正)·부약정(副約正)을 삼고 그 고을을 교화(敎化)하게 하고 있는데, 풍속을 선도하고 백성을 바로잡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법이 없습니다. 신이 시골에서 아이들이 읽는 《향약(鄕約)》을 보니 곧 김안국(金安國)이 교정(校正)한 언해본(諺解本)이었습니다. 이것을 널리 인출하여 팔도(八道)에 반포하는 것이 가합니다."
중종실록 33권, 중종 13년 6월 19일 정해 2번째기사 (#)
감사(監司)가 또 한 고을에서 추앙받는 노숙(老宿)을 뽑아 도약정(都約正)·부약정(副約正)을 삼고 그 고을을 교화(敎化)하게 하고 있는데, 풍속을 선도하고 백성을 바로잡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법이 없습니다. 신이 시골에서 아이들이 읽는 《향약(鄕約)》을 보니 곧 김안국(金安國)이 교정(校正)한 언해본(諺解本)이었습니다. 이것을 널리 인출하여 팔도(八道)에 반포하는 것이 가합니다."
중종실록 33권, 중종 13년 6월 19일 정해 2번째기사 (#)
이제는 중앙에서 서적을 지방에 보급해주는 것을 넘어, 타 지역에서 간행된 서적이 다시 다른 지방에서 간행되고, 또 이를 보고 국가에서 인출을 결정할 정도가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명종 대에 이르러서는 재지사족이 주도하여 자신들이 필요한 서적을 지방관아나 향교, 서원에서 간행하고, 그것을 사적인 교유망을 통해 보급하는 사례도 잦아진다. 반관반민의 서적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이 체제교학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재지사족이 성장하면서 서적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16세기는 이렇듯 지방에서 서적이 간행되고, 중국 서적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서적 유통이 이전과는 딴판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서적 판매를 중개하는 업자도 등장했다. 민간 상업출판이 등장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2.2. 방각본의 출현
그렇다면 과연 언제 어디서 우리가 '방각본'이라고 하는 상업출판이 시작된 것일까? 방각본 출현의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왕설래가 있지만, 16세기 후반에 방각본 출판이 서울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서지학계의 정설이다.그 구체적인 근거로, 1576년에 간인되었다는 간기가 부록되어 있는 『고사촬요』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려 있다.
바로 다음해인 선조 10년에는 민간 인쇄 조보가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3개월간 유통되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 금지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첫번째 출판 광고가 선조 9년, 민간 조보의 유통이 바로 다음해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살펴볼 때, 민간의 서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방각본 출판의 역량은 선조 초기에는 이미 갖추어졌고, 또 방각본 출판 역시 이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간행된 서적들은 주로 사대부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서민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은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도 있는 법인데, 민간 경제가 잘 발달하지 않고 서민의 서적 수요가 크지 않았던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2.3. 방각본의 시대
앞서 이야기한 사례들은 분명히 '방각본'이라고 부를만한 민간 상업출판이지만, 아직 그 출판이 본격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후 방각본으로 출판된 서적이 한동안 매우 드물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허다한 판목과 활자들이 약탈되고 파손되면서 한동안 서적 보급 자체가 위축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2] 또 구체적인 발간 정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출판업자와 서사(書肆), 독자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러한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첫 사례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전이채·박치유가 태인에서 간행한 방각본들이 있다.[3] 이 책들은 대체로 문인사회에서 인기가 있던 다종다양한 서책들로, 수요자들의 요청으로 방각된 것이었다.2.4. 방각본의 쇠퇴
3. 발행소에 따른 판본 구분
3.1. 서울 (경판본)
경판본 한글고전소설의 간기[4]를 살펴보면 대체로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로, 중국의 연호를 쓰는 경우는 한두 권에 지나지 않는다. 정주정전의 경우는 대한제국의 연호를 사용한다. 둘째, 대부분의 경판본 한글고전소설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歲庚子孟冬京畿開板, 丁未仲春由谷新刊’와 같은 방식으로 간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 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간기를 다는 방식이다. 셋째,‘戊午紅樹洞, 庚申紅樹洞’과 같이 간행 방법을 명시하지 않은 채, 연도와 출판사가 있던 지명만을 간기에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넷째, '안셩동문이신판, 紫岩新刊, 由洞新刊'과 같이 발행 연월일을 명기하지 않은 간기도 사용되고 있다. 간행연도를 표시하지 않아도 정해진 출판사에서 간행한 연도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간행연도를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경판본 한글고전소설의 큰 특징은 ‘서울(경성)’을 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소설을 출판하였고, 경판본은 글꼴 등에서 아주 큰 특징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이란 표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판본중에서도 경기도에서 출판한 안성판본은 ‘경기, 안성’등을 표기하고 있다. 반면에 전주에서 발행된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은 간행지인 ‘完山, 完'(완산)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판 방각본의 경우에도 역시 ‘己巳暮春武橋新板’과 같이 사용하는 간기가 가장 일반적이다. 그러나 천자문 계열의 책들은 여전히 중국 명대와 청대의 연호를 쓰거나 대한제국의 연호를 쓰고 있다.‘上之五年乙丑’(순종 5년)과 같이 우리나라 임금의 재위연수를 기록하고 ‘京城’(경성)이란 출판지를 명기하는 경우도 있다.
3.1.1. 경판본 글씨
경판본 소설의 글씨는 궁체 기반의 흘림체로, 획의 굵기, 글자의 크기, 자간 등이 일정한 편이다. 경판본의 독자는 중인 및 서리층과 사대부가의 여성이어서 궁체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균제미는 상층 문화에 경도된 한양의 중인층의 지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대체로 ㅇ은 둥근 모양이고, ㅌ은 ㄷ 위에 가로 획을 덧댄 형태이며, ㅔ는 두 세로 획이 길이가 다르다.3.2. 전주 (완판본)
완판본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여기서는 주로 조선 초부터 발간된 사찰본, 조선 중엽에 발간된 전라감영본, 조선후기에 발간된 태인본, 한글 고전소설 방각본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완판본에서 거의 대개의 책은 전주를 상징하는 한자어 ‘完’이 들어간다.‘完山’이라 고도 쓰지만 ‘完’자 만으로도 전주를 나타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주를 통칭하는 말로는 ‘完山(완산)’을, 전주의 서쪽은 ‘完西(완서)’로, 전주의 남쪽은 ‘完南(완남)’으로 썼던 것이다. 주로 서점들이 남문이 위치한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표기를 했던 것이다
전주에서는 일찍부터 ‘논어, 대학, 중용,맹자, 서경, 주역, 시경’과 같은 유교경전인‘四書三經(사서삼경)’을 아주 많이 찍어내었다. 책이 매우 커서 한지를 생산하는 고장이 아니면 발간하기 힘든 책이었다. 완판본 ‘사서삼경’은 대개 ‘歲庚午仲春開刊全州河慶龍藏版’으로 되어 있는데 孟子集註大全(맹자집주대전)만 특이하게 ‘풍패’를 쓰고 있다. 이 책을 만든 출판업자는 전주를 조선건국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는 자부심으로 이 어휘를 쓴 것으로 보인다
전주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충경로 거리의 한 가운데쯤에 보물 583호로 지정된 전주 객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큼지막하게 ‘豊沛之舘(풍패지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豊沛(풍패)’란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 것으로,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기에 전주를 ‘豊沛之鄕(풍패지향)’이라 하였고, 전주객사를 ‘豊沛之舘’이라 하였다. 이 ‘풍패’란 단어는 중국 漢(한)나라를 건국한 황제인 漢高祖(한고조)의 고향 豊沛(풍패)를 본따서 제왕의 고향을 豊沛之鄕이라 한 데서 유래하고 있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의 고향임을 나타내는 뜻으로 전주를 ‘豊沛’라고 한 것이다
3.2.1. 완판본 글씨
완판본 소설의 글씨는 1850년대까지는 초서체가, 1889~1902년에는 행서체가, 1902년 이후에는 해서체가 쓰였다. 같은 춘향전이라도 인쇄 시기가 이른 별춘향전의 글씨는 흘림체에 가깝고, 보다 늦은 열녀춘향수절가의 글씨는 정자체에 가깝다. 완판본의 독자가 초기의 서리층에서 점차 농민층으로 이동하면서, 궁체를 판독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가로 획은 굵기의 변화가 없으며 얇고, 세로 획은 굵기의 변화가 있으며 두꺼운 편이다.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자간도 불규칙하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발랄하고 생동하는 전주의 민중층의 지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완판본 글씨의 전형인 해서체는 ㅇ은 삼각형에 가깝고, ㅌ은 세 가로 획이 세로 획과 모두 붙어 있으며, ㅔ는 두 세로 획이 길이가 같다.‘人’자를 쓴 세 가지의 서체.
초서체
행서체
해서체
3.2.2. 연호 사용사례(완판본)
연호(年號)는 ‘해의 차례를 나타내기 위하여 붙이는 이름’으로 옛 책에서는 주로 임금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에는 연호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완판본의 경우, 사찰에서 발간한 책들은 대체로 중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예를 들면 '萬曆, 乾隆, 永樂, 嘉靖, 順天, 成化, 正統,弘治, 康熙, 隆慶’ 등의 연호가 거의 다 쓰이고 있다이처럼 중국의 연호를 쓰고 있는 것은 당시 조선의 연호가 없기 때문이고, 특히 불경들이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연호를 거의 대부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북에서 발간된 사찰본 가운데, 고산의 安心寺(안심사) 는 1405년부터 19세기까지 15종의 책을, 고산 화암사에서는 1443년부터 10여 종의 책을, 태인 용장사에서는 1635년 14종의 책을 한 해에 출판하였다. 그밖에 김제의 흥복사와 귀신사, 완주의 장파사(백운암)등 여러 절에서 책을 발간하였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간행한 전라감영본은 주로 1600년대에서 1800년대까지 약 70여 종이 발간되었는데, 대체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명대의 연호를 주로 사용하고, 청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연호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책은 朱子書節要, 十七帖, 帝範, 五禮儀, 諭諸道道臣綸音, 尤菴先生言行錄 등이고 나머지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1662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것을 꺼렸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참전해 준 은혜를 잊지 말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당한 굴욕적인 수모를 되새기자는 반청복명의 감정은 명나라의 숭정이나 영력 연호를 사용하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청나라 시대에 조선에서 발간된 책에서도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을 선호하여,‘崇禎紀元後’또는‘崇禎紀元後三癸亥’와 같이 표기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태인방각본에서도 주로 발견된다. 태인본이 1700년대 후반에 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호를 선호하고 있는 것은 발행자들이 불교 또는 불교 서적 편찬에 관련된 사람들이서 불교서적이 보여주는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완판본에서 명나라 연호 사용은 유학자들에게서 주로 볼 수 있고, 단순히 상업적으로 시대를 표기하는 책에서는 그러한 사상이 희박해지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완판본 한글고전소설 가운데 가장 먼저 출판한 별월봉긔의 간기를 보면 도광이라는 연호를 쓰고 있다. 간기를 보면 ‘道光 3년’(1823)의 연호가 나오고, 通鑑(통감)책에도 ‘道光 11년’(1831)의 연호가 나온다. 완판본 됴웅젼에는 ‘光緖 19년’(1893) 에 완주 봉성에서 처음 찍었다는 기록이다. 이들 연호는 모두 청나라의 연호이다. 비슷한 시대에 나온 완판본 草千字文에도 동치, 함풍과 같은 청나라의 연호가 쓰이고 있다.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의 경우, 이러한 중국의 임금이나 한국의 임금의 연호를 전혀 쓰지 않고 단순히 시대를 나타내는 간지를 쓴 책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는 일반적인 판매용 책이었기 때문에 작자의 중국관이나 의식이 크게 필요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2.3. 사찰본
조선시대에 간행된 節要의 현전본에 대한 서지적 연구를 수행한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첫째, 조선시대 전국 사찰에서 개판된 節要의 판본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먼저 사집과와의 간행현황을 비교하여 파악하였다. 그 결과 節要 28종, 都序 29종, 禪要 29종, 書狀 26종이 간행된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28종을 기준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1500년대 초반 경상도 지역의 신흥사에서 사집과 불서가 모두 간행된 것을 시작으로 점차 한 사찰에서 사집과 불서 중 2종 이상이 개판되었던 사실을 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1603년-1604년 경상도 능인암에서 대규모 개판불사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 일환으로 사집과 불서도 전부 일시에 간행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당시 불교계에서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일반불서의 간행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사실과도 어느 정도 일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절요를 비롯한 사집과 불서는 강원교육의 강화라는 일정한 의도 아래 지속적으로 개판되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둘째, 조선시대 전국 사찰에서 간행된 절요는 현재까지 모두 27종이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를 간행 시기별로 분석해 보면, 조선 전기에 13회, 조선 후기에 14회의 간행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전반기까지의 100년 동안 각각 10회씩 20회의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총 27회의 간행 중 전체 74%나 차지한다. 특히 선조 재위기간 동안 총 10회의 간행이이루어져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간행을 확인할 수 있었다. 17세기부터는 이전 시기와 달리 한 사찰에서 불서 간행 사업의 일환으로 四集科 불서를 讀書의 순서대로 일시에 간행하였던 현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1603년부터 1604년 사이 간행 불사가 있었던 경상도의 쌍계사(능인암)와 1608년의 전라도 송광사, 1623년 경기도 청계사, 1628년 경기도 용복사, 1635년 전라도 용장사, 1647년 경상도 보현사, 1681년 경상도 운흥사, 1686년 전라도 징광사 등의 사찰에서 沙彌科, 四集科의 敎材에 대한 일시적인 불서 간행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16, 17세기에 집중된 불서 간행 양상은 승려들의 강학에 큰 영향을 주어 이후 17세기 후반 불교 중흥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지역별․시기별 분석과 판식의 형태적 분석을 종합하여 절요의 계통분석을 실시한 결과, 크게 8행본계, 9행본계, 10행본계, 11행본계의 네 가지 유형의 계통으로 파악되었다. 이 중 8행본와 11행본의 경우는 1종에 불과하여 계통 과정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 외 9행본과 10행본이 주류 계통을 형성하였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9행본 계통의 판본은 신흥사본 등 모두 17종으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집중적으로 개판되었으며, 10행본 계통은 21자본의 경우 절요의 판본 중 조선조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1486년 규봉암본부터 16세기에 간행된 판본 7종이 하나의 계통을 형성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당시 강원 교육을 강화했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집중적으로 사집과 불서가 간행되면서 주요 판본이 계속해서 저본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주류 계통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 조선시대에 간행된 절요 판본 27종을 대상으로 판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서 판본 간의 주요 계통을 파악해 보았다. 다만 이 연구에서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판본만을 한정하여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또한 현전하는 고승의 주석서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향후 고려본 절요와 비교 연구, 조선시대 고승들의 절요에 대한 주석서를 비롯하여 사미과와 사집과에 해당되는 불서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3.2.4. 전라감영본
3.2.5. 태인본
전북 정읍의 태인본은 1799년부터 1844년까지 발간되었다.그 중에서 일부의 책판이 전주의 서점으로 임대되어 전주에서 방각본으로 다시 간행한 책은 孔子家語(공자가어),增刪濂洛風雅(증산염락풍아),詳說古文眞寶大全(상설고문진보대전),新刊救荒撮要(신간구황촬요),大明律詩(대명율시)등이고,대구에서는 孝經大義(효경대의)가 재간행되었다. 1910년 무렵에 서울에 광고를 낸,태인에 있던 普明書館(보명서관)은 전주와 서울과 책을 유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2.6. 한글 고전소설
3.3. 안성 (안성판본)
과거부터 기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성은 입지적인 요인으로 인해 하삼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로 인해 전국의 물산이 집산했던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런 까닭에 안성지역에는 장시를 배경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했고, 한지, 유기, 연죽,유혜 등을 중심으로 한 전통수공업도 성행했다. 이런 경제적,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이후 기전의 대읍을 이루며 중부 내륙의 요지로 자리 잡았다.그러나 서지전적의 간행과 관현한 문화지형으로 보면 조선시대에 정부에서 시헌력 인쇄를 해오던 역사 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안성은 인쇄출판의 변경이자 고도나 다름없는 곳이다. 안성지역은 경판방각본을 찍어낸 서울이나 완판의 전주, 달판의 대구와 달리, 서책의 간인 전통이나 경험이 많지 않은 탓에 방각본이 생산될 환경과 기반이 매우 취약한 곳이다. 다른 자리에서 논한 소략한 실물 자료들처럼 안성지역에서 산출한 혹간의 산물을 고려하면 완전한 불모지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들은 사찰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생산된 것일 뿐더러 모두 조선 중기 이전의 전통에 속한다.
과거 조정에서 경서,농서,정법서,병서 등 행정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대개 감영이나 관아에서 복각으로 인출한 사례가 많지만 안성지역은 관찬본을 판각해 인쇄한 경우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풍이 성해, 서원, 정사, 강당 심지어 서당에서까지 서원본을 찍어냈고, 문중이나 개인이 다투어 사각한 서책들이 널리 간인되었던 대구나 전주 지역과 달리, 개인문집의 사가판 간행도 안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사정을 고려하면 조선 중기 이후 사실상 인쇄출판과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들어서 춘향전을 위시한 십수 종의 고전소설들을 방각본으로 찍어냄으로써 비롯된 출판문화가 안성지역에서 화려하게 만개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막에서 장미꽃이 피어난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19세기 후반 어간에 이르러 고전소설들을 방각하기 시작했는지,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지금까지 전혀 규명된 바가 없다. 상리에 밝은 중상주의적 기풍과 수공업이 훙융한 안성지역의 문화전통이 작용한 점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 방각본의 출현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게 분명하다. 안성판방각본의 개판기원으로써 역서의 인출 전통을 추적한 것은 그런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안성에서 역서를 찍었다면 찍어낸 책이 역서이니 만큼 간인지나 개판 주체를 표시한 판권지나 간기를 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실물 자료를 통해서 안성판 역서의 간행 내역을 확인할 방도가 없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성판방각본의 기원이 역서 인쇄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전거라 할 수 있다. 안성지역에서 유래한 여타의 사료나 전통과는 그 성격이 판이한 기좌리판 역서의 출판이 방각본 안성판본의 개판 기원에서 가장 유력하고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배경으로 작용했음이 명약관화한 까닭이다.
3.3.1. 안성지역 방각소와 방각본 인출 현황
안성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방각본으로 박아낸 서책의 종류는 전통사회의 일상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필수 실용서인 책력이다. 역서가 안성지방판으로 안성 기좌리에서 방각된 시기를 서운관지(1818) 등의 기록을 상고할 때 개략적으로 18세기 중후반 무렵이었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아울러 안성지방판으로 인출한 역서 또한 방각본의 개념에 부합하다는 점도 앞선 연구에서 논증한 바다.안성판 역서의 방각이 고전소설을 중심으로 한 안성판방각본의 본격적인 등장을 위한 예비적 과정이었다고 할 때, 문제로 되는 것은 소대성전 등 무간기본들을 간인한 가칭 안성방각소는 물론이고 제마무전 등 '안셩동문이신판'을 개판한 동문이방각소의 실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실물 근거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안성판방각본, 특히 고소설 판본들의 본격적 개판에서 동문이방각소가 중추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안성지역에서 판각 및 인출한 소설류 판본들의 기운을 헤아리는 일 또한 이 방각소가 처음 등장한 시점과 환경을 추적하는 데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4. 서목
4.1. 유학서
방각본 유학서의 대표주자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다. 1810년 전주의 출판업자 하경룡(河慶龍)이 간행하였으며, 교육용 교재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책의 판형 자체가 큰 것을 선호했다. 책의 판형이 클수록 종이 수요 또한 늘 수밖에 없었는데, 전주가 한지 생산지였기 때문에 종이의 수요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칠서방(七書房)에서 사서삼경과 그 언해서 간행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19세기 후반 전주지역에서 칠서방(七書房)을 운영한 출판업자 하경룡(河慶龍)이 간행한 상업용 책을 하경룡장판(河慶龍藏板)이라 일컫는다.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20권 8책), 『논어언해(論語諺解)』(4권 4책),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 『대학언해(大學諺解)』,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중용언해』, 『시전대전(詩傳大全)』(20권 10책), 『시경언해』(20권 7책), 『서전대전(書傳大全)』(10권 10책), 『서전언해』(5권 5책),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24권 14책), 『주역언해(周易諺解)』(9권 5책) 등이 그 예이다.
4.2. 실용서
방각본으로 만들어진 실용서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관찰사의 행정 실무에 필요한 법의학서 '증수무원록언해'에 수록된 신체 모형 인쇄본, 교육용도서 '행곡본천자문’, ‘간독정요(簡牘精要)’·‘천기대요(天機大要)’ 등이 그 예다.현재까지 확인된 최고(最古)의 방간 기록으로는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하였던 ‘고사촬요(攷事撮要)’이며, 이것은 일종의 백과전서이므로 서리(胥吏:말단 행정관리)는 물론 재야의 선비나 일반 서민들에게 수요가 많은 책이어서 방간본을 발행할 만한 책이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초기의 각판은 1648년(인조 26)에 새긴 ‘사요취선 史要聚選’을 들 수 있다. 이전에는 1654년(효종 5)에 간행된 완산판의 ≪동몽선습 童蒙先習≫을 최초의 방간본으로 보았으나, 이는 고갑자기년(古甲子紀年)과 간지기년(干支紀年)의 혼동에서 빚어진 연대 착오로서 실은 1774년(영조 50)에 해당하므로 훨씬 후대의 것이다.
*간독정요 : 한문체 편지 쓰는 요령과 예문을 기록한 책. 다종다양한 편지격식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유별난 통신수단이 없었던 조선시대의 식자층의 요구에 합당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천기대요 :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거하여 관혼상제를 비롯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길흉을 가리는 방법을 기술한 책이다.
4.3. 소설
방각본 중 특히나 인기 있었던 항목이 ‘소설’이다. 이덕무의 영처잡고(嬰處雜稿)에 시골 훈장들이 소설을 짓고 판에 새겨 책방에 팔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방각본 소설은 18세기에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문 방각본 소설은 1725년 을사본 <구운몽>(나주 午門), 1803년 <구운몽>(전주)이 가장 이르며, 한글 방각본 소설은 1780년 <임경업전>(서울 京畿), 1847년 <전운치전>(서울 由谷), 1848년 <삼설기>(서울 由洞)가 가장 이르다. 1725년 을사본 <구운몽>을 제외하고 모두 서울에서 나온 경판본(京板本), 전주에서 나온 완판본(完板本), 안성에서 나온 안성판본(安城板本)이다.방각본 인쇄 기술의 보급과 18세기 농업기술 및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한 '유흥 문화'의 요구가 결합 되면서 '소설 읽기 붐'이 일어났다. 소설 열풍은 궁궐, 저잣거리 등 장소와 양반에서 중인, 천민 등의 계급을 가리지 않는 '국민 오락'이었다. 이를 걱정해 정조가 '소설 금지령'을 내리고 '문체반정'(중국 고문(古文)의 정통 문체로 돌아가자는 정책)을 일으킬 정도였다.
'근래에 부녀자들이 다투어 능사로 삼는 일은 오직 소설을 숭상하는 것뿐인데, 날이 갈수록 더 많아져서 천여 종에 이르렀다. (중략)부녀자들은 생각없이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혹은 빚을 내서라도 다투어 빌려가서 그것으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 음식 만들고 바느질해야 하는 책임도 잊어버린 채 이렇게 하기 일쑤다.' (체제공 '여사서' 중에서)
5. 방각본 연구사
우리의 방각본 연구는 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동안의 방각본 연구는 방각본 전반에 대한 연구,방각본 소설에 집중한 연구, 둘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구의 핵심은 방각본 소설 연구였다. 이처럼 방각본 소설 연구에 주목하다보니, 방각본으로 간행된 개별 작품에 대해서만 연구가 집중되어 있고, 정작 '방각본'이란 거시적인 안목에서 방각본 출판의 문화사적 의미, 방각본의 출현 시기, 방각본의 확산에 대한 논의는 미흡한 상황이다.조선의 방각본이 언제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현재 15세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등의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서지학 분야에서는 16세기에 간행된 고사촬요에 "만력 4년 수표교 아래 북변 이제리의 수문 입구에 있는 하한수 집에서 목판을 새겼으니 살 사람은 찾아오라"라는 간기를 근거로, 16세기에 이미 방각본이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 이외에, 이 시기를 전후해서 간행되었던 방각본 자료가 확인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방각본의 성립 시기에 대한 논의는 진척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현재 통용되는 방각본의 등장 시기는 18세기, 19세기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 그 근거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서 출판을 담당했고 필요한 수량의 서적만을 제작하여 유포시켰기 때문에 방각본의 등장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관행은 18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사회적으로 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더 이상 관의 주도만으로는 더 이상 출판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방각본이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 서지학 분야에서 바라보는 방각본의 출현, 사회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각본의 등장, 이 두 관점을 해결해야 할 과제가 현재 남아 있다.
한편, 방각본 소설 연구 또한 여러 산적한 과제가 존재한다. 조선시대 서민들의 소설에 대한 관심을 상품화한 방각본 소설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상당한 양이 축적되었다.
개별 작품의 이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방각본 소설을 다루거나, 경판본, 완판본, 안성판본 각각의 판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 방각본의 간행 양상과 판본의 특성, 최근에는 대중소설의 시각에서 바라본 방각본 소설의 문제, 방각본 소설의 전국적인 유통의 문제, 방각본 소설의 원천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방각본 소설 연구는 '방각본'과 견주어 볼 때,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새로 발굴되는 방각본 소설의 출현으로 그동안의 연구를 재고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예를 들자면 최근에 확인된 숙향전, 설인귀전, 홍길동전, 완판본의 별월봉기, 세민황제전, 정수경전, 임진록 등이 그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연구했던 방각본은 대부분 1850년을 전후로 생산된 것이다. 이 자료는 이전에 존재했던 판목을 없애고, 새롭게 선행 판본을 재편하여 간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아니라, 후대에 재편된 방각본을 연구한 것이다.이전 시기에 존재했던 방각본 소설은 어떤 모습을 갖고 있었는지, 현재 우리가 보는 방각본 소설과는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를 원점에서 재구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방각본 연구는 상업출판물 전체의 시각에서 이들 방각본 소설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방각본 소설에 대한 연구는 경판본, 완판본, 안성판본으로 각각 나누어 진행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경판과 완판의 관계, 경판과 안성판의 관계, 세 지역의 판본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연구가 미흡했다.
그 결과 방각본 소설의 특징으로 지적되었던 것, 구활자본의 특징으로 지적되었던 것들이 사실은 세책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따라서 지금처럼 지역에 근거하여 각각의 방각본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상업출판물의 시각에서 방각본의 특성, 생성 및 간행 시기, 편년 설정, 저본의 문제, 방각본과 다른 상업출판물과의 관계 등을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동안 우리는 '방각본'을 방각본 소설'의 시각에서만 다루었다. 앞으로 방각본 전체에 눈을 돌려, 방각본의 생상과 판매의 시각에서, 방각본의 문제,방각본 소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더 나아가 경판,안성판,완판으로 구분하여 방각본 소설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상업출판물 전체의 시각에서 '방각본', '방각본 소설'을 연구해야만 한다.
6. 참고 문헌
- 한국의 방각본 연구를 위한 보완 테제(These) 황진위 저, 이윤석 · 가첩 · 최묘시 역, 『중국의 방각본 중국 상업출판, 천년의 역사를 고찰하다』, 민속원, 2020
- 완판본에 나타난 刊記의_특징
- 류준경. (2005). 서민들의 상업출판, 방각본. 한국사 시민강좌, 37, 155-172.
- [네이버 지식백과] 하경룡장판 [河慶龍藏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성판방각본초기 방각 상황 재고 ‘동문이방각소’ 판 한글 고소설 판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