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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23:26:30

백제의 이름을 잇다/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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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절히 작가의 웹소설, 백제의 이름을 잇다의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문서.

2. 백제

원역사와 다르게 변화된 역사의 큰 수혜를 받은 국가.

주인공 부여풍의 활약으로 660년 멸망의 기로에서 벗어나 역으로 신라를 멸망시키고 고당전쟁에서 고구려를 지원하면서 통일의 발판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고구려를 병합하며 삼국통일을 달성한다.

부여풍이 들고 온 감자와 그 외 회귀 전 알고 있는 각종 역사와 지식으로 삼국통일전쟁에서의 피해를 회복하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며 당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이룬다. 이후 북방의 해와 거란이 위치한 초원의 일부, 연운 16주와 요서와 요동을 확실히 손에 넣지만, 직할령으로 다스리기에는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에 부여풍은 담로를 설치하고 공신들을 봉해 반자치를 하면서 서서히 영역으로 포함시키기로 한다.[1][2]

부여풍의 사망 이후 백제는 백두산 대폭발→대대로와 국왕의 연립정권→대몽 항쟁→대막리지의 부활 및 세습화→신대륙 발견 및 경략→신생 통일 중국 격파→막리지부와 새로이 대두한 공화파 간 내전 등의 파란만장한 시기를 거쳐 끝내 연운 및 요서 지방의 담로, 신대륙 자치주를 아우르는 백제 연방 공화국으로 탄생한다.[3] 이때까지도 부여씨의 왕실은 이어져 오고 있었으나 144대 어라하 부여명승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왕실은 폐지되고 부여씨는 무형문화재 1호로 남는다. 현재 부여씨의 170대 당주인 부여주경은 부여풍 기념관장으로서 역사 강의를 맡고 있다고.

2.1. 부여풍

전문적인 역사지식과 현대인의 상식으로 무장한 치트꾼. 일본에 잡혀있던 볼모에서 시작해 무너질 뻔한 백제를 구하고 신라를 멸한 후 고당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고구려를 구한 입지전적인 인물. 나뉘어진 삼국을 통일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을 무너뜨리는 등 군사적으로 거대한 위업을 세우고 내정, 외교 방면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뤄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여러 전설적인 일화[4]들을 남기게 된다.

원래는 사학과 대학원생 이선준이지만 교수 자식의 심부름을 하러 감자를 사 가던 중 갑자긴 생긴 싱크홀에 빠진 뒤 일본에서 양봉을 하다 벌에 쏘여 의식을 잃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의 몸으로 떨어졌다. 학과가 사학과에다 대학원 출신이기 때문에 한국사와 동북아시아 역사에 뛰어나고 그 덕을 많이 보고 있다. 덧붙여 간절히 작가의 주인공답게 정치력이 뛰어나고 모략에 밝다. 주위 세력을 이간질하거나 자기 밑에 붙는 간신배들의 속셈을 알면서도 잘 이용해먹는 등. 다만 술수를 잘 쓰는 것뿐이지 인성까지 음험한 것은 아니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정의감이나 신념도 갖추었다. [5]

대신 벌에 쏘인 탓에 트라우마가 생겨 항상 불진을 들고 있다. 더불어, 싱크홀에 빠지기 전 구입했던 감자가 담겨진 비닐봉지와 손목에 차던 손목시계와 함께 과거로 갔다.[6]

백제로 돌아와 전쟁에 참여한 지 10여 년 만에 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다.[7] 당과의 평화적 외교를 바랐으나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내부 상황을 노린 당의 지속되는 견제[8] 때문에 토번과 연계하여 최종보스 당을 상대하기로 굳게 다짐한다. 천조체제의 파괴[9]를 위해 토번과 연계하여 중화를 완전히 부술 대계인 삼로 공격을 계획하고 다시 한번 대전을 시작하며, 산동 반도, 요서, 연운 16주 등 차근차근 당을 공략하여 마침내 당의 수도, 장안에 입성한다.

대당전쟁이 끝나자 공신들과의 마찰을 피하고, 중앙집권이 어찌 가능할 만주+삼한 본토에 새로이 얻은 연운과 요서 등의 점령지를 감당하기 위해서 4명의 외왕과 3명의 후로 구성된 7개의 담로를 연운 16주에 설치한다.[10]

게다가 구 신라, 고구려, 요서 및 연운 16주 지방의 단순한 군사적 점령이 아닌 영구적인 문화 동화와 후환 일소를 위해 노력한다. 한글을 삼한 세력의 공식문자로 삼고 신라와 고구려의 장수들도 중용하며, 거란과 해의 유목민들에게도 그들의 언어에 맞춰 전파해서 삼한과 동질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삼한의 고승 100명[11]을 모아 연 법회인 인왕백고좌회를 통해 불교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진정한 화합을 꾀하고 노비세습제와 공노비 또한 폐지한다. 경제적으로도 국가를 연결시키기 위해 완도에 청해진, 비사성에 비사진을 설치하여 산동, 요동, 한반도, 탐라, 일본에 이르는 대규모의 무역을 활성화한다.

한창 전국을 유람하던 도중, 전생할 당시 함께 온 손목시계, 검은 비닐봉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자신도 곧 죽을 것을 직감한다.[12] 백제의 수뇌부에 자신의 수명이 머지 않았음을 알리고 태자 부여환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위례성에 돌아가던 도중 지반이 내려앉자[13] 이를 해결하는 동안 수레에서 기다리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백제의 중신들은 사실상 새로이 제국을 세운 그의 업적을 기려 태조란 묘호를 바쳤다. 태조 풍장왕 백제 태조 평전에서는 이때 정립한 국경과 문자, 정체성이 현대 백제 연방 공화국의 원형이 되었다고 말한다. 워낙 전설적인 일화를 많이 남기고 위대한 업적을 상당히 이루었다보니 한글 창제, 어별성교, 화약 개발, 시비법 보급 등과 관련한 당대의 정확한 기록도 후대 역사가들의 의심과 교차검증에 시달린다.[14][15]

2.2. 귀실복신

야망이 있고 능력도 출중한 백제의 2인자. 위기의 부여풍을 구하고 한때 대업을 노리려는 모습도 보였으나, 부여풍의 혜안에 탄복해 영원한 충신으로 남아 백제군의 전투에 전방위로 활약한다. 부여풍이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본인도 자기 위치에 만족하며 충성하기에 원역사와 달리 숙청당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백제의 장군으로 활약했으며 백제의 군대에서 백제 본토의 대나당 전쟁, 북방의 고당전쟁과 통일 이후 제당 전쟁 모두 부여풍을 제외하면, 사실상의 최고지휘권자였다. 요서 영주성을 함락한 이후 다른 장수들은 휴식을 위해 본국으로 복귀한 반면 홀로 노령에도 부여풍을 보좌해 요서의 개척을 돕겠다며 남는다. 임유관을 공략할 때도 아들 귀실집사와의 대화에서 단순한 공신가문의 위치가 아닌 그 이상을 노리는 듯한 발언을 한다. 이로 말미암아 독자들은 국경 요충지의 번왕격 위치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고 이는 후술한 내용과 같이 사실로 밝혀졌다.

토번과의 전후협상에서 대표로 앉아 부여풍을 대신해 협상한다.[16] 토번과의 무력 다툼이 없이 협상을 마무리하자 부여풍이 만일을 대비해 준비한 토번을 상대할 전술에 대해 듣고 당장은 아니겠지만 먼 훗날이라도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복귀하는 길에 연운 16주에 들러 부여풍이 담로의 왕후 자리를 신설한다 발표하자 자청해서 담로로 남기로 한다. 당시 노인의 나이인데도[17] 부유하고 평온한 삼한의 중신이 아닌 고단한 도전길을 자청한 것. 원역사의 내분이 아닌 개척의 의지에 부여풍은 그를 연운 16주 담로 4왕 중 하나인 상잠외왕으로 봉했다.[18] 그 후 대조영과 같이 확장을 노리는 담로의 왕후로서 백제의 지원을 받아가며 활약한 것으로 묘사된다.

부여풍은 함께한 20-30년 평생을 그를 신뢰하면서도 그의 야심을 알아서 내심 경계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복신이야말로 누구보다 부여풍과 말이 잘 통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장군이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그의 전기인 상잠세가를 통해 당대 한글의 쓰임을 연구할 수 있었다.

2.3. 계백

탁월한 전투 감각, 정확한 판단력을 갖춘 만능형 장수로 복신 못지않은 총지휘관의 재목이라고 평가받았다.[19] 불패의 결사대를 이끌고 여러 전쟁 승리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고결한 성품 때문에 더러운 술수에 약한 것[20]이 단점이다. 다만 오히려 이런 감성적인 부분을 캐치해 때로는 복신보다도 앞선 직관적인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한다.[21]

신라와의 전쟁에서 선두에서 활약했으며 서로군에 참전해 안시성을 구원하고 강수가 당군의 보급상태를 간파하자 야습을 가해 격파한다. 천문령 전투에서도 부여풍이 알려준 방법으로 강을 건너서 측면을 기습해 타격을 입힌다.

대당전쟁이 끝나고 부여풍이 담로를 임명할 때 가족을 생각해서 군권과 식읍을 포기하고 삼한에 남기로 결정한다. 백제멸망전 당시 가족을 죽이기 직전까지 갔기에 죄책감이 남아있다고.

2.4. 흑치상지

골격이 장대하고 무위도 상당한 백제의 기병 전문 돌격 대장. 망국의 위기에 용감히 거병한 부여풍에게 충성하고 있다. 적과의 대규모 회전 중에 소수의 기병으로 상대의 틈을 찌르는 전술로 여러 전세의 판도를 바꾸었다. 신라와 벌어진 최후의 회전에서도 고작 수십기의 기병으로 신라의 보병 전선 측면을 대각선으로 관통시켜 신라의 진영을 무너뜨렸다. 당나라 침공군과 벌인 양군 5-60만에 달하는 초대형 회전에서도 고구려의 술탈과 같이 설인귀와 당의 잔존 기병을 몰아붙였다.[22] 사실상 계백, 대조영과 같이 삼한군의 주요 돌격장수 중 한명.

당나라 원정이 승리로 끝나고 요하 지방과 연운16주를 점령하자 부여풍은 그를 연운 16주에서 3주를 떼어서 담로 4왕 중 하나인 풍달외왕으로 봉했다. 본인은 부여풍의 장수로 계속 곁에 있기를 원했으나 부여풍은 흑치상지의 재능과 강대한 가문을 고려해서, 특히 담로와 삼한 본토의 연결지인 요서 인근에 왕으로 봉해 연결의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재차 권한 끝에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2.5. 의자왕

신라 공격과 권력 강화에 몰두한 백제 국왕. 예상치 못한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웅진으로 도피하나 성주에게 붙잡혀 항복하러 가던 중 매복해 있던 부여풍에게 다시 사로잡힌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부여풍에게 화를 내며 본래의 권력을 되찾으려 했으나 이미 신망을 잃은 그를 따르는 장병들은 없었기에 완전히 무시당한다. 결국 체념하고 강제 은거 코스를 밟다가 사망한다.

부여풍은 이를 두고 권력을 빼앗기고 뒷방 늙은이가 되었어도 나라가 살아남았다고 희망을 가지고 장수할 사람은 아니었다고 평했다.

2.6. 예식진

백제의 북방령이자 웅진성주. 친왕파 출신으로 나당연합군에 사비가 함락되면서 반왕파들에게 숙청될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원역사대로 의자왕을 데리고 항복하려 했지만 탄현에서 철수한 부여풍과 계백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힌다.

이후 처형되지만 직전에 자신의 동기[23]를 이해하는 부여풍에게 감사하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2.7. 상영

아부와 처세술만으로 부여풍의 곁에 붙어있는 간신. 눈치가 뛰어나 부여풍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행동하며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음에도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분명 간신이지만 괜히 간신이 아닌지라 정치적 능력만은 뛰어나고 대세를 잘 읽어 충분히 도움이 된다. 부여풍의 감상으로는 분위기 읽어내는 파악 능력과 행동으로 흐름을 바꾸는 선동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한다. 이 능력으로 의자왕과 부여효의 정치적 입지를 확인사살하고 전장에도 부여풍을 따라다니면서 그를 보좌했다.

다만 간신답게 자기 이득을 챙기는 게 약간 과한 면이 있어서, 가끔씩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전쟁이고 인의고 다 내팽개치고 목숨이나 건지려는 식의 얘기도 많이 해서 부여풍도 여전히 그를 썩 좋게 보지 않는다. 웅진에서 결사항전을 지시했을 때는 겁을 먹어서 그냥 자기들끼리 남방으로 도망가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가 부여풍이 검을 만지작거리자 바로 태세전환을 시도하고, 부여풍은 아예 상영이 군심을 어지럽히는 말을 하면 죽이라는 밀명까지 내렸다. 3차 고당전쟁에서도 부여성 구원에 반대하면서 대놓고 백성들이 살든 죽든 알 바 아니라고 말한 데다, 그 부여성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주를 위해 따르는 백성들의 가축을 다 징발하자는 계책을 건의했다가[24] 아예 불진으로 싸대기를 맞았을 정도.

기미가 토번 본토에서 정치공작 중인지라 대신해서 가르친링 군영에 파견되어 돌궐 문제의 협상을 진행한다. 가르친링이 여차하면 백제와 연전을 벌이는 것도 각오한 지라 위기를 맞으나, 어떤 상황이어도 자기 목숨은 보전할 수 있다는 계산[25]을 하고 표정을 유지해서 동돌궐의 독립을 보장받는 목적을 달성한다.

2.8. 도침

선동에 능하고 인기도 좋으나 전투는 못하는 백제 근왕군 승병장. 승병을 이끌고 부여풍에 합류했지만 복신과 갈등을 빚고 여러 전투에 패배하여 사비 탈환 후 부여풍에게 많은 재물과 토지를 받고 귀향한다.

2.9. 금시

성충의 아들이자 유능한 백제의 수군 도독. 성충의 유지를 받들어 기벌포와 인근 강 하구에 촘촘히 말뚝을 박아 유인궤의 해로를 통한 우회공격을 대파하여 백제의 후방을 굳건히 지킨다. 고당 전쟁에선 수군 및 보급을 담당하며 이후 본격적인 당나라 공격에도 수군 장수로 참전해 등주 해전에서 압도적인 교환비로 승리한다.[26]

2.10. 사타상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수비하는 장수였으나, 압도적인 나당연합의 공세에 타개책이 없는 상황에 처한다. 죽을 각오로 나당연합군을 막을 생각이었지만 아버지 사타천복이 이미 의자왕도 떠났다면서 항복을 종용, 결국 사비성의 중신들과 백성들에 의해 강제로 항복당한다.[27] 멍청하게 도망치지도 못하고 순순히 항복하면 당나라가 잘해줄 것 같냐면서 한탄하다 강제이주대상자 포로로 잡힌다. 아니나 다를까 사비성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분노와 슬픔을 견디지 못해 죽을 각오로 당군 진영을 빠져나와 웅진의 부여풍에게 합류한다.

이후 진현성 전투부터 답발춘초, 여자진 등의 다른 장수들과 전선을 달리며 활약했으며 한손에 꼽히는 공신이 되었다. 고당 전쟁 이후로는 삼한수군의 장수로 부임해서 등주 해전에서 부여선광을 보좌하며 산동 일대 관아를 파괴한다.

그리고 제번 연합의 약속대로 당나라의 첫 사자를 죽여야 하는데, 하필 백제 진영에 온 당나라 협상의 사자는 사타천복, 그의 부친이었다. 국운이 걸린 전쟁에서 강력한 동맹과의 약속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28] 약속을 지키자니 공신의 부친을 죽여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 부여풍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 사타천복은 끝내 자신의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29] 자결한다. 이때 부여풍의 부름으로 사타상여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재회하지만, 과거 사비성의 일이 무색하게 아무런 감정이 안 들었다고.[30] 이후 군권을 내려놓고 은퇴하려 했으나 인격과 능력이 보장된 그를 쉽게 놔주기 아까웠던 부여풍은 그를 친위대장으로 보직을 이동시킨다.

대당 전쟁 이후 부여풍에게 군권을 반납하고 백제로 돌아간다. 과거에 아버지 사타천복을 따라서 백제를 포기하고 떠난 가족들을 애도하며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한다.

원 역사에서는 백제 부흥군에 참전했다 실패 후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2.11. 기미

외교를 담당한 중신. 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해 무려 토번, 어쩌면 그 너머까지 다녀왔다.[31] 해족의 족장 가도자를 설득하는 데 또한 파견되어 뛰어난 기지로 당의 사신 두상을 패배시켰다.

이후 가르친링이 돌궐을 토번 세력에 넣으려는 야욕을 보이자 부여풍이 토번 찬보, 타 귀족과의 외교 공작을 위해 주요 사신으로 파견한다. 장안 협상에서 토번 칙사 발게첸이 기미의 말을 떠올리며[32] 가르친링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

참고로 노령의 나이에도 워낙 건강체질을 타고나서 온갖 타지를 돌면서도 잔병치레 하나 없었다고 한다.[33] 그러나 아무리 정정하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이미 나이가 적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노화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었기에, 제당 전쟁 후 부여풍 재위 중에 사망한다.

2.12. 부여선광

부여풍의 친동생이자 최측근. 일본에서 형과 함께 볼모였으며 형이 벌에 쏘인 후 생긴 트라우마로 고생하자 불진을 선물한다. 부여풍이 귀국한 이후에도 한동안 일본에서 외교 업무를 보았으나 부여풍이 3차 고당전쟁에서 동로군을 이끌고 출정하자 재일백제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데리고 호응한다. 연씨 정권 몰락 후엔 고구려의 대대로로서 부여풍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한다.

삼국통일 후에도 미혼이라 주변에서는 "왕제님이 연수영과 혼인하나 보다." 하고, 부여풍도 슬쩍 말을 흘려보기도 하지만, 사실 연씨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생각도 없고 부여선광도 전혀 생각이 없다. 부여풍도 농담조로 건넨 말.

대단한 군재는 없지만 왕의 동생으로 충성심 등의 인품은 증명되어 삼한 통일 이후로도 수군 총관 등의 요직에 앉는다. 물론 실질적인 업무는 부여풍이 붙여준 장수들에게 맡기지만 경험이 있으니만큼 산둥 공격과 연운 점령까지 지휘를 맡는다. 본인은 자기 능력에 비해 과한 관을 쓴다면서 부담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다.

부여풍의 사망 이후 그는 이에 관한 기록을 남긴다. 여기에서 부여풍이 흑룡의 허물이 사라질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어디에 묻힐지를 예견한 일을 두고 당대인들이 지기삼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 저서에선 부여풍을 하늘에서 온 귀인으로 여기는 선광 본인과 당시 사람들의 인식 또한 엿볼 수 있다고.

2.13. 그 외 인물

3. 신라

원역사와 다르게 최악의 피해를 입은 국가 1.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원역사와 다르게 부여풍의 활약으로 실패하고 결국 역으로 멸망한다. 연이은 전쟁으로 싸울 수 있는 모든 여력을 소모하여 신라 영토를 점령할 당시 구심점이 될 진골 김씨 왕족이 없고 6두품들이 높은 대우를 받아 백제에 순응하면서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진골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삼국 중 가장 엄격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를 운영했기에, [35] 6두품들과 일부 관료층은 영입되어 백제의 군부나 신라령 장관직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진골들의 영토는 백제군에게 넘어가 공신들, 6두품들, 혹은 고구려 등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을 위한 토지로 활용되었다.

3.1. 김춘추

뛰어난 외교관, 언변가이자 신라 최초의 진골 국왕. 나당 연합군을 결성해내어 신속하게 사비를 점령했지만 이후 웅진, 진현성에서 부여풍의 우주방어[36]를 끝내 뚫지 못하고 퇴각하며, 고사부리 전투에 대패해 후퇴하던 도중에 병사한다.

3.2. 김유신

심리 및 임기응변에 능한 변칙 전술가. 당나라 소정방 앞에서도 당당한 면모를 보이는 신라 최고의 장군이었으나 혜성같이 등장한 부여풍에게 탄현 전투 이래로 모든 계책이 간파당하여 상당한 고생을 한다. 사비성 점령 이후 고사부리 전투에 패하고 김춘추가 사망하는 등 고국이 힘든 상황 속에서 고구려 영내에 갇힌 소정방을 위시한 당군 보급용 군량 운송을 몸소 맡는다.[37] 그러나 황해 해안선을 타고 올라온 부여풍에게 따라 잡혀 신라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임무를 실패하며, 그 충격에 김유신은 중풍에 걸린다.[38] 마침내 신라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부여풍을 죽이고자 구진천이 제작한 함정을 가지고 다가가나, 이미 담당 일진 부여풍이 이를 간파해 버려 암살은 실패하고 그 자리에서 힘이 다하여 사망한다.

비록 본작에서는 부여풍에게 정말 처절할 정도로 당했지만, 부여풍 본인도 미래에서 와서 그의 계책을 전부 다 알고 있다는 절대적 어드밴티지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라고 인정했을 정도. 사실상 부여풍에게 있어서는 신라 최대의 적이자 유인궤에 맞먹는 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3.3. 김법민

냉철하며 리더십이 강한 신라 최후의 왕. 취리산 맹세 2년 후 부여풍의 통수[39]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군 상대로 압승할 정도로 분전했으나 백제와의 최종결전에서 지고 사로잡힌다. 이후 일본에 보내진 후 신체훼손을 당해 걷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나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명예롭게 자결한다.[40]

3.4. 원효

김춘추의 사위이자 신라의 유명한 승려. 웅진성을 점령하지 못한 신라가 물러나면서 인질 교환 형식으로 백제에 와서[41] 부여풍을 만난다. 보덕 대사는 원효가 자기보다 낫다며 칭찬했지만 부여풍은 원효를 인정하면서도 나당 연합군이 백제 전토에서 벌인 학살과 약탈을 방관한 그를 비난하고, 원효도 비록 현장에는 없었다 한들 이를 외면한 것은 맞다면서 자책했다. 이 일이 쇼크였는지 서라벌이 점령당한 이후 산채로 타죽는 것(소신공양)을 조건으로 서라벌 사람들을 구한다. 사실상 본작의 등장인물들을 통틀어 가장 선하고 대인배인 성인군자이다.[42]

비록 사망하였지만 그 업적을 인정받아 제당전쟁 이후 부여풍이 연 인왕백고좌회에 나머지 99명의 고승의 만장일치로 유골로서 자리하였다.

3.5. 열기

힘이 세고 충직한 신라 병사. 김유신의 평양 행군 당시 소식을 전하기 위한 별동대로서 소정방 군을 만나는데 성공하나 부여풍의 추격군에 신라군이 함몰되어 김유신만 겨우 구출한다. 신라멸망전 당시 삼년산성에서 김흠순과 항전하나 장마를 틈타 야습한 백제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고 만다.

3.6. 설오유

전술적 직관이 뛰어난 6두품 출신 신라 장군. 국원 인근 백제와의 결전에서 백제군의 열이 가느다란 것을 포착해 별동대 편성을 건의하나 한발 앞선 흑치상지의 습격으로 패배를 면치 못한다. 후퇴하여 농성하며 끝까지 항거할 계획이었으나 부여풍의 극진한 대접에 귀순하여 이후 재건된 장창당의 수장을 맡아 여러 전쟁의 선봉에서 활약한다. 요서를 공격해 임유관의 성벽을 공략하는데도 그와 장창당이 전선에서 돌격했을 정도이며 중원 내에서도 돌궐 기병이나 토번 정병들의 싸움에서도 장창당은 핵심 전력으로 대우받았다.

부여풍은 그를 연운 16주의 담로 3후 중 하나인 계림후로 봉했다. 또한 특혜로 이곳에서나마 신라의 왕들의 제사를 하는 것으 허가받는다.

3.7. 구진천

천보노의 제작자로 신라 멸망 당시 부여풍을 암살하려던 김유신의 함정을 도와주었다가 실패 후 자살하려 하지만 백제군에게 잡히고 만다. 본래 백제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으나 서라벌에 대한 백제군의 약탈이 가시화되자 일부 백성들을 구하는 대가로 백제군에 합류한다.

이후 노당의 부당주로서 3차 고당전쟁에서 서로군으로 참여해 공을 세운다. 이 포함 당과의 여러 전투에서 노획한 발석거를 관리하여 연운 16주의 관문인 임유관 공격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43]

3.8. 강수

한문학 등 언어 분야의 조예가 상당한 신라의 지식인. 항복 후 백제의 신하로서 부여풍에게 한글을 전수받아 삼한의 통일된 언어체계를 정하는데 나서고, 3차 고당전쟁에선 당의 이합시를 해독해 서로군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다.

토이치격문을 지어 대당 토벌 전쟁의 시작을 알렸으므로 토번 포함 전아시아에 명 문장가로 이름이 알려질 듯 하다.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에게 한글을 전파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3.9. 박경한

기골이 장대하며 정세 파악도 뛰어난 한산주 출신 장수. 고구려에 항복하려는 도독 박도유를 백제에 항복하도록 설득하고 3차 고당전쟁 이후 부여풍의 평양성 진입에 큰 역할을 한다.

3.10. 그 외 인물

이만큼이나 죽었으니 나라가 망할 만하다..

4. 고구려

연이은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3차 고당전쟁 당시엔 멸망의 끝자락까지 몰렸던 나라. 사실상 부여풍이 홀로 전쟁을 캐리하여 간신히 멸망을 피했다. 그러나 국력의 소모가 극심하여 백제의 지원을 받다가 보장왕이 670년 고씨 왕가의 안전을 조건으로 부여풍에게 태왕위를 선양하여 백제에 병합된다.

그나마 서로 지독할 정도로 치고받으면서 중앙 귀족들이 거의 몰살당하시피 한[44] 백제와 신라와는 달리 고구려는 아직 여력이 남은 지방귀족들이 알아서 백제에 붙은 것에 가깝고[45] 영웅 겸 권신이자 역적인 연씨 일가도 갈가리 찢기긴 했지만 여기저기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46]

4.1. 연개소문

전략, 전술은 물론 그 자신의 무력도 뛰어난 카리스마형 지도자. 고당 전쟁에서 당의 주력군 일익을 직접 야전에서 상대하는데 시간을 끌며 유리한 지형으로 유도해 겨우내 추위가 극에 달한 순간 격파하는 뛰어난 군재를 보여주었고, 평양성의 전쟁에서도 직접 창칼을 휘두르며 활약한다. 부여풍의 도움으로 2차 고당 전쟁을 원 역사보다 더욱 대승한 후로 고구려 최고의 권위를 굳혔으나, 이는 상처뿐인 승리였음을 곧 깨닫는다. 고구려 전국의 피폐한 상황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47] 결국 무너진 내정 회복 및 후계자 문제를 처리하지 못해 3차 고당 전쟁의 씨앗을 남기고 자연사한다.

4.2. 연남생

연개소문의 장남. 2차 고당전쟁에서 계필하력의 정예 기병대를 상대하며 모루역[48]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러나 아버지 사후 계승문제가 불거져서 동생들에게 배신을 당해서 아들을 잃고 눈이 뒤집혀 국내성 일대의 세력을 데리고 당에 귀순해 고구려를 침공한다.

하지만 부여풍의 참전으로 민심을 잃고 당의 지원군까지 격파당하며, 어별성교의 일화까지 재현되자 공포에 떨면서 점점 수심이 깊어지다가 끝내 국내성이 부여풍에게 점령되어 생포된다. 이때 자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자신을 그냥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실로 처량하기 그지없을 정도.[49] 이후에는 일가의 안전을 조건으로 고구려를 병합하려는 부여풍의 책략에 동참, 전 태막리지로서의 정치력과 말빨을 발휘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 결과 일가를 지키는 데 성공하고 부하들과 함께 서라벌 인근으로 이주하게 된다.

대당전쟁 이후 아들 부여환을 데리고 찾아왔을 때 다시 등장.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씻고 서예와 그림 등에 열중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속세에 대한 미련을 끊은 덕인지 전보다는 안색이 나아졌다는 듯. 부여풍이 원한다면 산둥반도에 힘을 써서 영토를 내주어 나라를 얻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미 욕심과 미련을 버린 그는 거절하고 서라벌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였다.

4.3. 연남건

연개소문의 차남이자 고구려 최후의 태대막리지. 연남생을 몰아내 권력을 잡고 3차 고당전쟁에서 백제와 연합해 당군을 무찌르나 부여풍의 평양 진군을 막지 못하고 자결한다.

4.4. 연남산

연개소문의 삼남. 은근 다혈질적인 면이 있다. 연남건에 동조하여 연남생을 몰아내고 3차 고당전쟁이 끝난 후 부여풍의 귀국을 서두르려 애쓰나 그의 태적봉환을 막는데 실패한다. 결국 평양 함락과 함께 부여풍에게 항복한다. 그 후 구 백제령으로 내려간다.

4.5. 연정토

연개소문의 동생이자 고구려의 한성 일대 12성주의 대표. 초반에는 무능해보였지만 고당전쟁에서 행동을 보면 그저 인격이 안되먹은 인간일 뿐 능력은 뛰어나다. 여차하면 적장과 일기토에 나설 깡과 실력도 있고[50] 적전 도주를 해놓고 뻗대는 깡 대세를 읽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 남들이 대세 흐름 보는 판독기로 의지할 정도다. 태적봉환에 있어 연정토가 백제 편을 들자, 남들도 이제 역전의 가능성이 없다 여겨서 저항을 포기했을 정도.

또한 뻔뻔스러운 면모가 있어 설인귀의 추격을 받자 작중 120화 엄체수에서 부여풍에게 나룻배 3척을 찾아주고 곧바로 제일 먼저 강 반대편 너머로 후퇴 뒤, 부여풍이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문충공(文忠公) 류성룡의 밧줄 부교 일화를 사람의 머리털로 재현[51]하여 부여풍 일행들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연정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당당하게 동로군 회의에 참석해서 뻗댄다. 그 철면피의 상영도 연정토의 뻔뻔함에는 놀랄 정도.

3년 후의 차기 대대로 자리를 노리고 있으며 영지를 국내성으로 옮긴 대가로 백제의 지지도 얻을 수 있으나, 문제는 그 자리가 헬게이트가 예약된 자리란 것. 2년 뒤에 고구려가 망한 건 함정

연정토가 대대로 관직을 목표로 하다가 이 것이 무산된 원성으로인한 후환을 방지하고자, 부여풍은 그를 연운 16주의 담로 3후 중 하나인 수천후로 봉했다.

4.6. 보장왕

고구려의 마지막 태왕. 그러나 연씨 일가에 모든 실권을 빼앗긴 허수아비에 가깝다. 아직 친위 세력을 약간은 가지고 있지만 큰 의미가 없는 수준. 때문에 연씨 일가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기에 설령 백제에게 태왕위가 넘어가더라도 연씨 일가에게 넘기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는 생각에 연씨 일가의 몰락을 방조한다.

연씨 몰락의 방조 후 부여풍의 로비와 고당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씨 가문의 안전을 조건으로 보장을 받은 다음 부여풍에게 고구려의 왕위를 선양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난다.

그의 아들인 복남, 안승은 원역사의 행보(특히 안승)도 있고 해서 백제군에서 볼모로 복무하였다. 대당전쟁이 끝나자 부여풍은 복남을 연운 16주의 4왕 중 하나인 고려외왕으로, 안승은 3후 중 하나인 보덕후로 봉했다. 왕족으로서 고구려의 귀족들을 하나로 모을 위험세력이기도 했지만, 보장왕이 순순히 선양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라고.

대당전쟁의 승전 이후 장안 침공과 당의 사실상 회복 불가능한 대패, 그리고 두 아들들이 모두 연운에 담로를 받은 것에 감격해 부여풍을 마중 나온다.

4.7. 고정문

부여 41성의 대표격 호족으로 3차 고당전쟁에서 설인귀 군의 공격을 받아 분투했으나 열세에 몰려 항복한다. 그러나 설인귀가 항복한 부여를 불태우고 약탈하자 분노해 재차 궐기, 부여풍에게 구원군을 요청한다. 설인귀가 당의 본군으로 쫓겨간 후에는 부여풍과 합류해 결전에 나선다.

국동대혈에서 벌어진 태적봉환 때는 부여풍의 노림수를 깨달았지만 대세가 기운 것과 자신이 본 부여풍의 능력과 인격을 믿고 그를 지지한다. 여러모로 다음 대대로 자리도 노려볼 만 했으나 왕실에 대한 충성과 미련이 남았기에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은퇴한다. 부여풍은 고씨 왕가의 일원이란 출신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라를 위해 일해주길 바랬기에 아쉬워했다.

4.8. 검모잠

고구려의 충신이자 기개가 넘치는 장수. 부여풍의 동로군 진격에 합류하여 말갈 부락을 돌며 모병하고 직접 나서 싸우는 등 적극적으로 돕는다. 부여풍의 삼한 통일로 원 역사에서는 안승에게 토사구팽 당했던 비극적인 결말을 피한 셈.

4.9. 대조영

고구려 출신의 젊은 기병 장수. 원 역사에서 나라를 건국할 정도의 위업을 이뤘던 만큼 작중에서도 엄청난 무위와 전투력을 드러낸다.

부여풍의 동로군에 합류하여 아버지 대중상걸사비우와 함께 송화강 전투에 참전한다. 그곳에서 지치고 포위된 상태에서도 상당한 맹위를 떨치던 계필하력을 일기토 끝에 죽이는데 성공한다. 이때 부여풍이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대중상과 걸사비우, 대조영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며 심지어 대조영에게는 직접 겉옷까지 입혀 준다.

천문령 결전에도 참전, 계백과 함께 당나라의 일익을 완전히 궤멸시키면서 승세를 굳힌다. 이후로도 일본 원정의 장군이 되는 등 크게 중용되어 승전하고 귀국해서 대당 공격의 선봉에서 말갈기병대를 지휘하는 등 군부의 주역 중 한명이 된다.

측천무후의 결정으로 친당파 돌궐부족들이 남하하자 부여풍의 명으로 아사나니숙보를 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다. 마찬가지로 지원하러 온 가르친링과 함께 싸워 계필부 등의 돌궐 부족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돌궐까지 장악하려 하며 위협하자 분노한다. 그러나 부친 대중상이 자제시켜 직접 부딪치지는 않고 귀국한다. 이후 부여풍의 명으로 토번군을 대비한 진형을 만들어 맹훈련을 한다.

대당전쟁 후 부여풍은 그를 연운 16주의 담로 4왕 중 하나인 발해외왕으로 봉했다. 복신처럼 그의 야망과 실력을 고려해, 일부러 확장 가능한 방향으로 국경을 정해주었다고 한다.

4.10. 왕구루(王求婁)

책주의 처려근지이자 고구려 동북 지역의 대표. 3차 고당전쟁에서 처음엔 동로군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부여풍의 어별성교 일화를 듣고 많은 병사를 데리고 합류한다. 고구려 내 부여풍의 지지 세력 중 하나로 제가회의에서 또한 그의 손을 들어준다. 이후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으로부터 반백년이 넘어 이루어지는 반격인 연운 16주 공격, 즉 중원 진공에 참전하며 감개무량해 한다.

원 역사에서는 왕모중의 아버지다.

4.11. 보덕

고구려 출신이지만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으로 이미 백제에 귀순한 고승. 부여풍과 만나 여러가지 협조를 한다. 원효와 만나 그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말하지만, 원효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는 부여풍의 명으로 인왕백고좌회를 주관하게 된다.

4.12. 신성

지모가 뛰어난 책사이자 승려. 연남건의 막하에서 2차 고당전쟁 당시 소정방의 대동강 도하, 3차 고당전쟁 직후 부여풍 주도의 제가회의 개최의 위험성을 간파하였지만 끝내 평양성 성문을 열고 부여풍에게 항복한다.

4.13. 술탈

백제의 흑치상지에 비견되는 고구려 제일의 용장. 연개소문의 총애를 받으며 2, 3차 고당전쟁에서 상당히 활약했으나 부여풍의 평양성 함락 직전 흑치상지와의 일기전으로 사망한다.

4.14. 고사계

군재가 있고 맡은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장수. 3차 고당전쟁에서 압록강 나루의 수비를 맡으며 동로군의 부여풍을 만나고, 그에게 감화되어 태대막리지부의 명을 거부하면서 부여풍이 개최한 제가회의에 참석하는 여러 성주에게 길을 열어준다.

백제의 삼국통일 후 유인궤와 백제군이 요동-요서 공방전을 벌일 때 고사계는 요서 일대에 몰래 감자를 심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이는 부여풍이 요서를 점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으로부터 반백년이 넘어 이루어지는 반격인 연운 16주 공격, 즉 중원 진공에 참전하며 같은 구 고구려 출신 장수 왕구루와 마찬가지로 감개무량해 한다.

원 역사에서는 고선지의 아버지다.

4.15. 그 외 인물

5. 탐라국

5.1. 도동음률

용맹한 탐라국왕 겸 백제 좌평. 본래 탐라를 자치하던 국왕이었으나 백제의 총동원령에 응하여 동로군 부여풍의 최측근을 담당해 책성 전투, 송화강 전투 등에서 전사가 걱정될 정도로 용맹하게 싸운다. 섬 특유의 몸집이 작은 말을 타며 무기로는 쇠몽둥이를 쓴다.

전후 많은 하사품을 받고 귀향하였다가, 부여풍이 제당 전쟁이 끝난 후 전국 순행 중 도무군에 들르자 부여풍을 다시 보러 찾아간다. 태자 부여환과도 인사를 나누고, 부여풍이 완도에 설치하는 청해진에서의 국제 무역에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무척이나 기뻐하며 돌아간다.

6. 당나라

최종보스격이자 원역사와 다르게 최악의 피해를 입은 국가 2.

사실상 신라보다 더 심하게 이 작품에서 당의 취급은 안 좋다. 660년 백제 멸망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고, 2차, 3차 고당전쟁에서 수십 만의 인력과 물자를 실제 역사보다 더 심하게 소모했다. 원 역사에서 수 양제 시기로 까지 국력을 회복하는데 당 현종 집권기까지 걸린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진즉에 나라 하나 무너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

3차 고당전쟁 실패 이후 유인궤를 요서로 보내 지속적으로 약탈을 하여 요동 방위선의 복구를 막고자 했으나 부여풍의 반격으로 등주의 당 수군 함대가 전멸하고 산동 반도 전역이 요동 약탈전의 보복에 당해서 초토화된다. 거기에다 부여풍의 요서 진격과 토번 가르친링의 대규모 침공으로 삼면전선을 강요받는다. 당 태종이 세워놓은 부병제는 이 때를 기준으로 사실상 붕괴된다.

배행검이 끌어모은 20만 대군의 패배로 인해 삼한과 토번을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정병들은 사실상 소멸했으며[53] 문제는 이러고도 삼면전선 중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제2차 고당전쟁부터 1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군사들이 갈려나간 점을 고려하면, 원 역사 당과 비교해도 이미 망해야 정상인 수준이다. 정병들만 50-100만 가까이 말아먹은 것. 태원과 연운 16주 등을 방어할 마지막 정병을 빼면 무한해보이던 동원력은 이미 한계고, 이제 백제와 토번 양쪽을 전부 막을 힘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일부 요충지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싸울 수도 없다. 다만 측천무후의 능력으로 힘겹게라도 어찌 버티는 중이었으나 하서와 연운, 동서 양쪽의 요충지가 넘어가버린데다 내부에서 반정권 반란까지 일어나며 망조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54] 결국 부여풍이 군사를 태원으로 보내어 퇴로를 차단하자 내부 반란으로 정권이 붕괴하고 백제-토번 연합군에게 장안이 함락당한다. 주작대로를 기준으로 토번군이 지배하는 서쪽은 초토화되지만, 동쪽의 백제 점령지와 꼭두각시 황제가 거처할 황궁은 그나마 무사히 남는다.[55]

중심지인 관농 지역이 초토화되고, 하서와 요서 등 국경 방위에 중요한 요충지 대부분을 빼앗겼으며, 강남 지역은 통째로 서경업에게 넘어간 상황이다. 심지어 제번 연합에 속한 백제와 토번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공물을 요구하면서 더 압박할 생각. 또한 부여풍은 고의적으로 연운과 요서 인근 요충지에 설치된 담로에 봉해진 백제의 공신들에게 해당 지역의 동화 이후라면 백제의 협력을 얻어 확장하라고 허가를 내려주면서 군사적 위협을 지속적으로 가하게 만들었다.

약화된 상태에서도 200여 년을 더 지속했으나, 결국 건국 초기처럼 북중국의 힘을 모아 세를 확장하지 못했고,[56] 끝내 새로이 발흥한 송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송나라 역시 몽골에 멸망하는 순간까지 토번과 백제의 담로를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6.1. 소정방

돌격에 특화된 완성형 지휘관. 신중함과 담력, 실력을 모두 갖추었으나, 자기 경력을 채우려고 얌체짓도 자주 해와서 당군 내의 인심은 좋지 않다.[57] 백제 사비성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2차 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의 대군에게도 밀리지 않는 상당한 위력을 보인다. 그러나 믿었던 김유신의 구원군을 아작낸 부여풍이 연개소문에게 합류하여 패배할 상황에 직면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전의를 잃지 않고 전군을 미끼삼아 모든 기병을 데리고 평양성을 향한 최후의 돌격을 지시하며 연합군에게 무시못할 피해를 입히고 마지막으로 선두에서 연개소문을 향해 장렬히 돌격한다. 하지만 이후 합류한 고구려군과 평양 내의 고구려인들에게 포위당하여 사망한다.

연개소문은 그의 수급을 부여풍에게 그의 도움에 대한 답례로 건네주었고 이는 다시 부여풍에 의해 사비성에 주둔하던 당군에게 인도되었다.[58]

6.2. 이세적

빈틈없이 전략과 전술을 펼치는 정통파 장군으로 당 제국 최고의 원로. 3차 고당전쟁의 승리를 목전에 두고있었으나 상상을 뛰어넘는 부여풍의 활약으로 많은 정병들을 잃고 겨우 후퇴하던 도중에 병사한다. 원래 3차 고당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해에 노환으로 사망한 것을 고려한다면 가뜩이나 고령인데다 충격적인 패배로 인한 충격이 겹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풍을 죽이려고 계필하력과 돌궐기병을 보내고, 실패하자 그를 유인하기 위해 설인귀에게 이미 항복한 부여성을 약탈하라 명하는 등[59][60] 부여풍과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의 관계였다. 그러나 부여풍이 그의 손자 서경업이 원 역사에선 무후 시대에 10만이 넘는 장정들을 끌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되새겨서, 그의 반란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그가 자립하도록 수없이 지원해줬으니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관계. 할아버지는 부여풍 때문에 망했고 손자는 부여풍 덕에 흥했다

6.3. 서경업[61]

이세적의 손자이자 야심만만한 인물. 원 역사에서 10만이 넘는 인력을 끌어모아 난을 일으켰으나 측천무후의 진압군에게 패한 비운의 반란군 수장이다. 요서를 얻고난 소강 상태에서 연운 16주를 최소한의 소모로 돌파하기 위해 고뇌하던 부여풍이 떠올렸다.

비록 측천무후의 집권 후 자사직을 그만두고 양주 지역에서 살고 있었지만, 다른 공신가처럼 비참하게 죽거나 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래 반란의 시작은 684년이었이기에 674년인 작중 시점에는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그 구상은 물론 간부들인 낙빈왕, 당지기 등과 반란 모의는 이미 하고 있었다. 때문에 부여풍이 과거 3차 고당전쟁에서 이세적을 따라왔다가 포로가 된 이세적의 문객들을 통해 자신에게 동조할 것을 제안하자, 격하게 반발하면서도 답장에는 원하는 조건을 세세히 적어놓았다.[62] 이를 알아본 부여풍이 다시 연락을 취해 모종의 책략을 제안하자 마침내 거병한다.

미리 준비한 대로 낙빈왕과 당지기 등의 동료들과 단숨에 5000의 병력을 끌고 거병하며 토여풍격문[63]이란 제목으로 무조와 조정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드러낸다. 반란을 말리러 온 양주 자사를 구금하고 관아를 털어 수만으로 증강한 병사를 동원해 장강을 타고 산동반도로 향하던 급조 수군의 함대를 탈취해 백제 수군에게 도전한다. 물론 약속대로 백제 수군은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다가 진 척 하고 물러났기에 하루아침에 반 의병 반 역적에서 구국의 영웅이 된다. 이후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받아들여 10만이 넘는 대군을 편성하고, 산동의 여력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다시 후방지역인 양주로 돌아가 세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64]

그러나 측천무후가 연운 16주를 포기한다는 초강수를 두고, 설인귀와 3만 정병이 남하하면서 겁에 질려 백제에 조언을 구한다. 부여풍의 계책을 받아들여 토번, 백제의 침입 와중에 의병과 관군이 싸우면 안 된다는 격문을 사방에 돌리며 여론의 지지를 얻는다. 그러면서 실패를 대비해 수군 함대를 모아 백제를 막는다는 핑계로 도망갈 준비를 한다. 일단 세력과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척 하다가 설인귀와 측천무후 탓에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 끝까지 자신의 명예는 지킬 수 있다고 계산한 것.[65]

그러나 그 자신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던 민심의 동요로 인한 전세 역전이 설인귀가 초주까지 남진한 시점에서 기적적으로 정말로 벌어지면서 남중국의 천명이 보이게 된다. 그에게 매료된 초주 자사가 방심한 설인귀를 인질로 잡아 남하를 막고 당지기가 이를 확인하는 데 성공한 것. 이미 장안 조정은 토번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기에 이를 구하기 위해 당의 동도, 낙양으로 진군한다.[66]

그런데 부여풍이 대운하를 이용해 낙양 인근에 대군을 이끌고 빠르게 집결하여 압박을 가하자 그의 의용군 세력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부하들의 진심어린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생 이경헌과 단둘이 백제 군영을 찾아가 군량과 재물 일부를 제공하는 대가로 후방의 안전을 보장받는 담판을 짓는다.[67] 이후 낙양을 벗어나 설인귀를 데리고 장안 수비군에 합류하여 측천무후에게 냅다 좋다고 사면령을 받으나 직위가 설인귀보다 아래인 부대총관으로 임명받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 그러나 부여풍이 동관으로 진출하며 서경업이 백제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장안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고, 동관에서 대치만 하다가 남쪽으로 퇴로를 열어주어서 또다시 살아남는다. 당의 일부 중신들이 잔존병력을 데리고 토번군의 공격을 피해 동관방향으로 달아났기에 그들까지 거두었을지도. 인생은 서경업처럼

제당 전쟁이 끝나고 당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스스로 양주 금릉에서 제위에 올라 양(梁)나라를 세운다. 그의 왕국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북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에 멸망당해 흡수당한다.

6.4. 이치

당고종. 삼한 정벌에만 집착한 끝에 결국 당의 몰락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암군.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라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에 더욱 사활을 거는데, 가르친링에 의해 안서 4진이 함락되고 연이은 삼한에서의 전쟁으로 수십만 정병이 갈려나간 와중에도 끝까지 고구려 정벌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집착한다. 3차 고당전쟁 직전에 유인궤가 내놓은 계책이 질질 끄는 계책이라는 이유로 기각시키고 내쫓을 정도. 더군다나 작중에서는 고구려를 칠 필요가 딱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버지 이름을 뛰어넘으려는 이유만으로 감행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더 심각한 암군이다.

이세적에게 맡긴 최후의 당군 정예병력 40만명이 고구려에서 대패하고, 절반 이하만 복귀하게 된다. 그러고도 유인궤를 시켜 영주 인근에서 계속 고구려를 약탈하다가 삼한을 통일하고 당을 무너뜨릴 것을 천명한 부여풍의 분전으로 삼한, 돌궐, 토번 등 주변 세력이 전부 손잡고 동시에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고구려 정벌도 실패하고 정병을 모두 꼴아박은 판국이라 원 역사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고 빠르게 내정과 제도가 무너져 회복하지 못한다. 본인도 그들을 전부 물리친다 해도 돌이키지 못할 수준의 피해가 확실시되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화병으로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무후에게 권력을 빼앗겼단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건 덤. 제번 연합과 당나라의 공방전이 시작된 시점에는 그냥 앉아만 있는 병풍으로 전락했고, 아예 비중조차 없다 측천무후가 충성스런 사람들만 남겨 시중을 맡겼고 무후가 폭도들에게 죽어버리고 제번 연합에게 장안이 함락되는 시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결국 백제-토번 수뇌부의 결정에 따라서 목숨은 지키는 대신 모든 권력을 잃고 철저하게 정보 통제를 당한다. 당시 시력을 잃어서 자신의 침실에 적장들이 들어와 당군이 승전한 것처럼 연기를 하자 그대로 속아넘어간다. 제위는 장남 이홍에게 넘어가고, 장안이 함락당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제번 연합군이 입궁하는 순간에도 백제 침공을 부르짖는다. 가르친링은 이걸 보면서 그냥 죽이는 것 보다 더 웃긴다며 웃고, 이를 주도한 당사자인 부여풍은 직접 보면서도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트루먼 쇼의 모티브가 될 이치 쇼[68]

6.5. 측천무후

당 고종의 황후이자 실질적 권력자. 첫 등장부터 이미 남편을 보좌하는 모양새로 원 역사와 같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요서에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유인궤를 보내어, 한동안 백제를 견제함에 있어 성과를 거둔다. 부여풍은 원 역사 측천무후 시기 당이 확장 행보는 멈추는 것을 알지만, 그 동안 안정화되어 전대의 소모를 보충할 시간을 얻게 될까봐 어중간한 시기에 공세를 걸었다. 이 때문에 결정권이 고종과 무후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그러다 토이치격문 이후에는 권력의 이동이 거의 완료되어 당 고종은 앉아만 있고 무후가 당 고종의 이름을 내걸고 자기 마음대로 국정을 휘젓는다.

요서와 하서를 백제와 토번에 뺏기자 이들과 휴전을 하고 자신의 정권을 안정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연합에 흠집을 낼 요량으로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을 사자로 보내 죽게 했기에 부여풍은 그 이상으로 갚아주기로 하고 그녀의 정적 공신파벌 서경업과 접촉한다. 부여풍의 사주를 받은 서경업이 '토여풍격'을 전국에 돌리고 백제의 수군을 산동 반도에서 몰아내며 양주에서 거병하자 토번, 백제의 침입보다도 더 자신의 정권에 위협으로 느끼고 설인귀와 3만 정병을 연운 16주에서 빼내 진압군으로 보낸다. 그러나 믿었던 설인귀는 서경업이 전개한 여론전의 여파로 어이없게 붙잡히고 만다.

토번군이 당나라 군을 연전연패시키며 장안 인근까지 몰려오자 장안에서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이겠다 각오하고 서경업의 의병들까지 사면해 받아들이나, 설인귀의 부관으로 직위를 낮추면서 엿을 먹인다. 그러나 백제군이 북상해 태원과 장안 사이의 연락을 끊는 타격을 주면서 최후가 왔음을 예감한다. 제번연합과의 대전 중반까지는 당고종을 원망했지만, 최후가 가까워지자 자신을 사실상 만인지상의 자리 가까이까지 올려준 고종에게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마음이라도 편하라고 사실을 숨긴다.[69] 탈출할 길도 막혔단 사실을 알고 이성을 잃은 장안의 폭도들 앞에 혼자 나아가 자기 남편인 고종을 배려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70][71]

보통 전근대 동양국가, 그것도 전란 중인 국가에서 여군주의 권력은 강해지기 힘들지만 강단 있는 성격과 망설임 없는 결단력으로 오히려 우유부단한 남편 당고종의 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연이은 패전으로 국경이 밀려나는지라 위기감을 느꼈으며, 국가 존망의 위기를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살을 주고 뼈를 치는 각오로 준비한 계책들이 부여풍에게 연달아 실패한 것도 모자라 몇 배는 큰 타격으로 돌아와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72][73] 살도 주고 뼈도 주는 계책? [74][75]

6.6. 계필하력

돌궐 계필부의 수장이자 설인귀와 함께 당나라 원정군의 기병 지휘관. 2차, 3차 고당 전쟁 모두에 참여하였다. 2차 고당 전쟁에서는 연남생의 군사를 깨뜨렸으나 철륵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급히 회군하였다. 3차 고당전쟁에선 별동대로서 활동하다 본인 휘하의 돌궐 기병들과 함께 이세적의 명을 받고 부여풍과 싸우기 위해 송화강으로 향하였다. 겨울을 기다리다 강이 얼자마자 도강을 시작했지만, 이미 이를 예견한 부여풍이 화약을 이용하여 얼음을 깨버려 수많은 후속 병력이 수장당하는 것을 바라보며 부여풍을 죽이려 달려들었다. 포위된 상황에서도 상당한 무력으로 저항하다 대조영과의 일기토 끝에 전사하였다. 그의 전사는 3차 고당전쟁의 판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76]

그의 사망 이후 돌궐 역시 심각한 국력 저하로 분열을 겪게 되고, 그가 이끌던 계필부는 계필가천이 수장으로서 다른 친당파 부족과 함께 당의 도움을 받아 남하를 시도하지만 토번-돌궐-백제 연합군에게 궤멸되고 만다.

6.7. 설인귀

계필하력과 함께 당나라 원정군의 기병 지휘관. 3차 고당전쟁에서 이세적의 명령으로 부여 일대를 평정하고 41성의 항복을 받았지만 전력을 집중하고 부여풍을 끌어낼 계획을 짠 이세적의 명령으로 이미 항복한 부여를 약탈한다. 부여풍이 주력부대를 부여 구원에 보내자 기회를 노려 기습하지만 실패해 헛걸음만 했고 부여풍이 현지에서 대군을 징발하게 돕고 만다.[77] 기세를 탄 부여풍에게 함락 직전인 국내성을 빠르게 도우러 갔으나 이미 점령당한 줄 모른채 속아넘어가 절반에 가까운 군사를 잃고 후퇴한다. 이후 이세적과 합류해 계속 전쟁을 이어가지만 말갈-고구려 정예 기병들을 막는데 바빠 중요한 순간에 활약하지 못한다.[78]

이후 당 북방군에 속했으나 백제 수군의 등주 공격으로 산동 반도가 위험하여 요서를 구원하러 갈 처지가 안되어 잃고 말았고, 이근행, 고간 등과 연운 16주를 지키게 된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서경업을 토벌하기 위해 연운 16주를 방치하고 남하한다.

민심의 동요를 무시하며 쾌속진격했으나 초주에서 방심해서 호위병을 떨어뜨리고는 물자를 점검하던 중에 서경업에게 동조한 자사의 기습으로 생포당해 서경업 토벌에 실패한다.[79] 한동안 자포자기해 서경업에게 끌려다녔으나, 총 13만에 달하는 대군(의병 10만+설인귀군 3만)이 낙양을 향하면서 어쩌면 이 대군으로 당을 구할 수도 있겠다고 깨닫고 군사전문가가 없는 서경업 세력이 망설이자 진군을 멈추지 않도록 조언한다.

측천무후가 서경업 군을 사면하고 직위를 내리나, 설인귀를 총사령관으로 삼는 바람에 군이 다시 나뉘게 된다. 백제와 내통한 서경업이 군대를 떼어놓자 3만명을 이끌고 장안방위군에 합류하나[80] 역시 패망을 피할 수 없었고 장안이 태원과 연결이 끊기면서 일어난 반란으로 연락이 끊긴다. 이에 남은 당군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후위를 맡아 토번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가한다. 그러나 결국 토번군에게 군대는 전멸하고 자신 역시 전사한다.

가르친링은 그의 수급을 토번군의 깃발에 꽂아놓았다. 그의 묘지명은 후대에 이루어진 백제 태조 부여풍 본기에 기록된 엄체수 도강 일화의 교차 검증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설인귀 개인의 전공 과장이 주 내용이다

6.8. 유인궤

지략이 풍부하고 보급에도 소질 있는 지장. 위제구나의 계책을 내어 기벌포 상륙작전을 벌였으나 부여풍에게 간파당해 대패하고 강제 은퇴를 당하고 만다. 그 후 백제 유민들과 교류하다가 고종에게 불려 전황을 타개할 계책을 내란 요구를 받으나 정작 무모한 정복보다 요동 일대를 점유해 길게 가는 장기전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쫓겨난다.

결국 그의 예상대로 정복전에 실패해 정예군이 반의 반 수준만 살아남아 돌아오자, 측천무후의 추천으로 요서 지역에 부임한다. 거란 기병을 투입해 요동 일대를 약탈하기를 반복해 백제의 복수전을 유도한다.[81]

그러나 후방 산동의 수군과 관아들이 등주 해전 패배로 인해 불타버리고, 북방군이 이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해버린다. 때문에 본래 예상했던 것보다 지원군이 대규모로 축소된 상태에서 열세의 소수 병력으로 요서로 진공하는 백제의 정예군을 상대한다. 결국 부여풍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계략에 걸려 결국 전사하고 만다.[82]

부여풍은 삼한 전선의 전문가나 마찬가지였던 그를 확실히 쓰러뜨린 걸 큰 성과로 여겼다. 강적보단 난적에 가까웠다고.[83][84]

6.9. 배행검

당의 중신. 백제의 등주 공격에 당장 요서가 위태롭더라도 산동을 구원해놓지 않으면 역공격이 불가능해진다고 측천무후를 설득해 북방군을 남하시킨다. 연이어 벌어진 토번의 대규모 침공으로 사령관으로 임명받아 관중과 서역 국경의 정병, 그리고 급히 징발한 군사들까지 포함한 20만 대군을 끌고 가르친링을 상대하러 나선다. 폭망 플래그

산지를 낀 지형의 힘으로 토번 대군의 공격을 받아내며 대치하면서 장기전으로 토번의 전쟁능력을 소모하다가 화친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하고 가르친링이 던진 승부수에 낚여 대패한다. 추격을 막기 위해 소수의 병력으로 시간을 벌다가 포위된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대신 포로로 잡힌다.[85]

그러나 하서에서 돌궐 기병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전력이 증강하는 토번군을 보고 자결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장안의 운명이 경각에 놓임을 깨닫는다. 장안 함락 이후로도 조용히 토번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치둑송첸, 문성공주의 밀명을 받고 가르친링이 변경을 순시하러 간 틈을 타 라사에서 가르찬파를 비롯한 가르 가문의 사람들을 군사적으로 몰아낸다.

6.10. 그 외 인물

당의 주요인물, 그 외 인물들의 사망 여부만 간단히 확인해도 당나라의 정병들이 얼마나 많이 갈려나갔는지 알 수 있다

7. 일본

7.1. 나카노오에 황자

야심은 컸고 능력도 있었으나 과한 욕심으로 피를 본 일본 국왕. 부여풍을 무명 시절부터 키워줬고 귀국 이후에도 끊임없이 투자했지만 멸망 직전인 신라로 보낸 대군이 참패한 후 전전긍긍한다.[88] 그래서 백제에서 보내준 김법민의 무릎뼈를 뽑아버리는 굴욕을 주며 화풀이를 한다. 결국 원 역사대로 사망했고, 이때 백제에게 받았던 신라 7군은 부여풍의 계획대로 다시 백제의 품으로 돌아간다. 죽기 전 아들 오토모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동생 오아마를 제거하려 하나 실패하였지만, 원 역사와 달리 부여풍이 정예병을 보내어 오아마를 제압해버려 오토모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소원 성취

7.2. 에치노 타쿠츠

지략이 풍부한 일본의 장수. 부여풍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신라멸망전의 개시를 맡았고 후일 동로군으로 참전한다. 어디까지나 외국 사람이지만 부여풍에게 경의를 느꼈기에 엄체수를 건너지 않고 남아 결사항전하려는 각오까지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백제 땅에 주둔하다가, 나카노오에가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아들을 지키고자 그를 불러들이고 지원군으로서 백제군과 함께 일만오천으로 귀국해 오아마를 쳐부순다.[89]

연합 수군의 전투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이며 부여풍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이민족 인재의 예시로 들면서 아예 귀화를 추천할 생각이라고.

원 역사에는 백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7.3. 오아마[90]

명석하고 결단력이 있는 나카노오에 황자의 동생. 나카노오에가 아들 오토모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신을 없애려는 흉계를 꾸민 것을 알고 그가 죽기 직전 지방으로 피신한다. 그가 죽자 미리 포섭한 호족들과 함께 거병하고 수도로 통하는 관문을 공격한다. 오토모는 우유부단했지만, 일을 예견한 부여풍의 안배로 히라부가 관문을 사수하고, 진압하러 온 백제 대조영의 일만 기병과 에치노 타쿠츠의 오천 정병이 일본에 손쉽게 상륙한다.[91] 결국 전투에 패하여 원 역사와 반대로 반란에 실패한다.
빈틈없는 행보를 보였고 사실상 성공할 뻔 했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극강의 먼치킨인지라..

7.4. 그 외 인물

8. 토번

원 역사대로 가르친링이 실권을 잡고 당나라 공격을 시작한다. 본작에는 삼한의 나라들이 멀쩡히 살아남은 덕에 연계를 취해 토이치격문을 받아 각지에 돌리며 발을 맞춰 대규모로 하서 공격을 시작한다. 이 당시 토번의 강병은 당이나 삼한, 돌궐 등과 비교해도 강력한데다 시대의 명장 가르친링의 전략으로 당의 목덜미를 위협한다.

삼한 상대로 전력을 대부분 소모한 당나라에는 어떤 세력보다도 위협적인 적이 되었으나, 대당전쟁이 승리로 굳어지자 상대적으로 공이 없고 약체인 돌궐을 압박해 초원을 장악해가기 시작하면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부여풍은 이를 막기 위해 치둑송첸을 비롯해 가르친링에게 저항하는 정치세력에게 접촉하여 그를 견제하도록 유도한다. 대당전쟁 이후 부여풍의 기대대로 가르친링은 치둑송첸에게 숙청되고 만다.

8.1. 가르친링

원 역사에서 토번의 실세로서 당나라 군을 거의 갈아버리고 안서사진을 점령한 전설의 명장. 등장조차 안 한 시점에 독자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등장 이후에도 그 인기는 식지 않는 중이다. 사실 이분이 진 최종보스

돌궐과 손잡고 당과 싸우기 위해 백제에도 사절을 보내지만 둘 다 체계적 계획은 없어 흐지부지 된다. 그 후 뛰어난 군재로 안서사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당시 토번보다 백제가 위험도가 더 높다고 본 당나라가 반격하지 않고 방어를 유지하며 경제봉쇄를 펼쳐버린다. 이로 인해 점령한 안서사진을 유지하는 것이 돈만 잡아먹어 곤란하던 찰나 때마침 백제가 물자지원과 교역을 제안하자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93] 직접 사신으로 갔다온 기미의 평가에 따르면 단순한 승전과 영토 확장을 넘어 토번의 아시아 패권국으로서 발돋움을 바라고 있다고.[94]

이후 부여풍과 협력하여 그가 등주 해전에서 당 수군을 궤멸하고 산동 반도 약탈을 개시하자 1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하서 공격에 나선다.그리고 상대는 신병까지 다급히 끌어모은 반쪽짜리 정예 대군. 급하게 소집된 20만의 당나라 군을 수적 열세에도 몰아붙이지만 그들의 방어선을 뚫지는 못하고 있다가 화친 제안을 받는데, 백제와의 약속대로 당나라 사신의 목[95]을 쳐서 백제에 보낸다. 이후 지루한 공방을 하던 중 자신의 설계대로 배행검을 유도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번 군단의 총력을 동원,[96] 맹렬히 공격해 당군을 함몰시킨다. 이어서 하서에서 군을 정비하고 농우를 치면 장안도 전장에 포함된다.

그리고 친당 돌궐부족들의 남하를 막기 위한 파병군에 직접 기병군을 이끌고 온다. 암말을 이용한 책략[97]을 사용해 친당파 돌궐을 완전히 깨부수나 전리품 분배에서 독단적으로 나서며 강압적으로 나가 원한을 산다. 이때 토번으로 데리고 간 친당파 돌궐 부족에 더해서 하서를 통해 연결된 돌궐의 유목민 기병들을 대거 휘하로 영입해 군사력을 증강하며 장안 공격을 노린다.[98] 그러나 돌궐이 토번에 넘어가면 화북, 요서 일대 백제의 영역권도 불안해지기에 부여풍의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백제와의 협상 끝에 동돌궐에는 아사나 씨족을 복귀시켜서 완충지대로 삼기로 하나, 그 협상 중에 투쟁심을 드러내 토번 본국에서 그에 대한 적대를 심화하게 된다. 가르친링은 이제 당은 시한부에 불과하며, 돌궐은 이번 피해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며, 백제군도 못 이길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그러나 주변 장수들의 피로도와 반감은 명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백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부여풍의 계산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고 토번이 패권을 잡는 순간부터 토번 찬보에게 있어 가르 가문은 쓰임새를 다하게 된 것이고, 그에 따라 가르친링의 권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라고.

결국 장안 방위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장안에 당당히 입성한다. 주작대로를 기준으로 나눈 장안의 동부를 최소한으로 약탈한 백제와 달리 장안의 서쪽 지구를 맡아서 그야말로 초토화하고, 당 고종을 농락하는 부여풍의 처분에 만족하며 돌아간다. 부여풍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경고 겸 조언을 남기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한다.

토번으로 복귀해서도 한동안 권력을 잡고 전시 체제를 유지했으나, 변경을 순시하러 간 사이 찬보 치둑송첸이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군을 모아 라사를 장악해 버린다. 비록 소수의 군사들만 곁에 있다 해도 본인의 실력으론 찬보의 군대를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평생동안 고국 토번을 위해 싸워온 자신이 역으로 고국과 맞서 싸울 수 없었기에 전투를 벌이기를 망설인다. 이를 간파한 치둑송첸이 대치 상태만 유지하되 가르친링의 병사들이 전쟁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합류하도록 선전하자,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일가와 함께 자결하고 만다.

부여풍은 그의 군사적 능력과 야망을 경계해 그가 죽길 바랐지만, 토번의 전성기를 일군 그가 정말로 비참하게 죽자 크게 씁쓸해 하였다.

8.2. 그 외 인물

9. 돌궐

본 역사대로 당나라 군사력의 일익을 차지한 이민족. 계필부를 필두로 한 수만 명의 기병들을 동원해서 백제를 비롯한 타국을 고전시켰으나 송화강 전투에서 계필하력이 죽고 수만 명의 기병들이 모조리 죽으면서 당나라의 초원 통제력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반당 독립을 주장한 아사나 씨족과 친당파의 필두인 계필부가 대립하며 반당 동맹에 속했던 아사나 씨족이 5만의 기병을 동원해 당나라와 통하는 요충지 태원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전한다. 당장 기동력 좋은 정병들이 급한 측천무후에 의해 친당 씨족 수십 만이 장성 이남으로 남하하게 된다. 이 대이주를 막기 위해 아사나 씨족과 백제, 토번의 유목민 기병들과 당나라의 얼마 안 남은 기병들과 장수들까지 개입한다.

그 결과 친당파는 붕괴해 다수가 토번에게 흡수당하거나 도망치고, 아사나 씨족도 가르친링의 토번 세력에 의해 초원 세력도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서로 대적하게 되었다.

9.1. 아사나니숙보[99]

돌궐의 유력한 족장. 계필하력 사후 돌궐의 반당독립을 주장하며 토번의 가르친링과 같이 백제에 사신을 보낸다. 토번이 점령한 안서사진-토번, 돌궐의 초원길-백제 육로로 이어진 무역[100]으로 계속 공조를 다진다. 부여풍의 요서 공격, 가르친링의 하서 공격을 신호탄 삼아 궐기하고 싶어했지만 여전히 친당파 부족들이 많아 고민한다. 그러나 돌궐의 개입 이전에 당이 쫓겨난다면 자신들은 백제와 토번에 굴복해야 할 것[101]이고 역으로 당이 이겨버린다면 돌궐의 독립은 물건너가는지라 자신의 세력 오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 북방의 요충지 태원을 공격한다. 다만 급조한 군단이기에 태원에 배치된 정병 군사들을 묶어놓는 것에만 집중한다.

계필부 포함 친당 돌궐 부족들의 대이주를 따라잡지만 두 배의 병력차에 이를 갈다가 백제, 토번의 가세로 승산이 생기자 계필부 행렬의 도하 도중에 전투를 개시한다. 다행히 가르친링의 계책으로 대승을 거두어 돌궐 통일을 기대해 보지만 가르친링이 토번 또한 당처럼 돌궐을 지배할 야심을 드러내면서 기싸움에 눌리는 굴욕을 당한다.

결국 새로이 초원을 노리는 토번에 밀려 동으로 도망치면서 백제에게 사자를 보내서 도움을 요청한다. 백제의 지원으로 간신히 몰락의 기세를 멈추고, 백제와 토번의 협상으로 동돌궐이나마 건사하게 된다.

10. 거란

역시 이 세계관에서 피해를 받은 국가 3.

3차 고당전쟁 당시 당나라의 보조 기병 전력으로 참전했지만, 낮은 충성심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세력 보존을 위해 후퇴한다. 원래대로라면 군법위반으로 처벌을 받았겠지만, 3차 고당전쟁으로 당대의 탱크나 다름없는 돌궐의 기병 전력이 소멸한 당이 어쩔 수 없이 계속 기용한다. 유인궤와 요동에서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벌이다 백제의 보복을 받고 분열, 흡수된다.

10.1. 이굴가

거란의 추장. 만 단위의 거란 경기병을 부리는 거란족으로 이씨 성을 받은 당나라의 유목민 출신 군인이다. 그러나 계필하력에 비해 충성심이 없어 자신과 거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어 요동의 결전에서 대패배에 일조한다.[102]

그러나 큰 실패로 돌궐과 초원의 통제가 어려워진 당군은 이굴가와 거란 기병을 요서의 유인궤와 협력시켜 계속 동원했고 요동 약탈에 앞장서며 자신들이 이길 자신이 있는 군사들만을 격파해 백제의 증오심을 키운다. 등주 해전 직후 부여풍이 대군을 이끌고 요서를 공격하자 온 전력을 끌어모아 2만여 명의 유목민 병사들을 데리고 영주성에 합류한다.[103] 십수 년 후 당나라를 경악시킨 거란 군단의 힘을 보여주면서 분투하나 수적 우세와 분노로 무장한 삼한군의 맹공으로 수세에 몰리고, 부여풍의 유인책에 속아 넘어가 전사한다.[104] 그와 함께 거란 최정예 6000명도 전멸하고 남은 전사들도 영주성 함락과 함께 분열되어 거란의 전성기는 오지 않게 되었다.

11. 해(奚)

11.1. 가도자(可度者)

해족의 추장. 3차 고당전쟁 당시 당의 보조 기병전력으로 수행했으며, 전쟁 이후 당의 요동 약탈 요청을 마이동풍마냥 무시한다. 부여풍이 거란에 행한 복수전을 생각하면 이는 신의 한 수였다 백제의 기미와 당의 두상이 서로 설전을 펼칠 때 가만히 듣다가 백제쪽에 승산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백제쪽에 군사를 보내겠다고 응해주나, 백제군이 영주성을 함락하기 직전 병력을 이끌고 합류해서 이득만 챙기는 행태를 보인다.

가도자의 이런 행태를 본 부여풍은 장래 해를 흡수한 거란이 중원과 한반도 모두를 고생시켰듯이, 해가 거란을 흡수하고 똑같은 일을 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거란을 크게 약체화시키되 명줄을 붙여 해에게 흡수되지 않도록 조절하기로 한다. 작은 이득을 보려다 큰 기회를 놓쳤다


[1] 당장 담로에서 자리를 지키고, 통치하기 위해서 삼한의 세력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도록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문화적으로도 한족과 분열시켜야만 할 것이다. 본인도 어디까지나 반자치에 왕처럼 살게 해주는 것이지 완전히 독립시킬 생각은 없다. 최악의 경우라도 요서 주변의 담로만 지킨다면 삼한 본진의 안전은 보장된다.[2] 참고로 이때 현대인 부여풍에 의해 한글이 만들어지며, 백제 전역과 유목 민족, 담로에도 보급된다. 이는 담로가 단순히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백제와 중국의 문화가 뒤섞인 특유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토록 하였고, 결국 먼 훗날 다시 백제로 통합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3] 작품 제목 그대로, 백제의 이름을 끝내 현재까지 이은 것이다.[4] 일월지자(日月之子), 어별성교(魚鱉成橋), 지기삼사(知幾三事), 원효의 소신공양(燒身供養) 등.[5] 그리고 그중 가장 잘한 것은 잘 모르는 일은 아예 손을 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취소선이 그어져 있긴 했지만 실제 지도자로서 이러는 것은 쉽지 않다.[6] 놀랍게도 감자뿐 아니라 손목시계, 비닐봉지 모두 작중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손목시계는 물시계와 해시계를 만드는데 유용하게 쓰이고, 검은 비닐봉지는 동그랗게 오려서 흑룡의 허물조각이라고 사기를 친다.[7] 이 과정에서 일본의 협력을 받으면서 나카노오에가 주선한 일본의 공주와 백제-신라 전쟁이 잠깐 소강상태에 접어든 사이 결혼해서 유부남이 되었고, 3차 고당전쟁 전에 임신한 아내 오노가 전쟁 중에 아들을 출산해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 이름은 돌아올 환(還) 자를 쓴 부여환. 이는 태적봉환으로 부여씨가 태왕가로 입적된 것, 위례성이 백제의 수도로 몇백여 년만에 돌아온 것을 기념해 부여풍이 직접 작명한 것이다.[8] 작 중에서 당은 굳이 고구려나 백제를 견제할 이유가 없었다. 토번이나 돌궐의 경우 융성한 세력을 갖게 되면 당에게 위협이 되지만, 고구려나 백제는 굳이 중원으로 들어올 이유가 없기 때문.[9] 그의 최종적인 바람은 하나의 패권국에 주변 문명이 종속되는 상태가 나타나지 않는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백제가 패권국이 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10] 7인의 담로는 각각 고려외왕 고복남, 상잠외왕 귀실복신, 풍달외왕 흑치상지, 발해외왕 대조영의 4왕, 보덕후 고안승, 수천후 연정토, 계림후 설오유의 3후로 구성되었다.[11] 실제로는 99명이다. 나머지 1명은 경주에서 소신공양으로 백성을 대신해 희생한 원효가 되었고, 원효를 100명의 고승에 포함시키는 것에 법회에 모인 99명의 고승들이 모두 동의하였다.[12] 다만 같이 들고 온 감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이미 감자는 상당히 재배되었기에, 현대에서 넘어온 그대로의 감자가 아니라 백제 본연의 태양, 흙과 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13] 이 지역은 현대에서 이선준이 빠진 바로 그 싱크홀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전작과 같이 수미상관의 구조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14] 사실 주인공이 원래는 사학과 대학원생이었던지라 역사 기록을 남기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대부분은 부여풍 개인의 미래지식으로 인한 업적에 관련해서만 교차검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인다.[15]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고구려나 백제 관련 기록들은 대부분 의 여파로 망실되어 비교적 부실하게 남아있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바뀐 역사와 부여풍의 적극적인 역사 보호정책(?)으로 인해 삼국시대 관련 사료가 비교적 풍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원 역사와는 달리 고구려와는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흡수통일을 이뤄 관련 인프라를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신라도 패망하긴 했으나 편찬한 실록과 중요 서적, 문화재들을 부여풍이 재빨리 사수했기 때문.[16] 이는 토번의 대표가 가르친링이었기에 백제의 대표로서 왕인 부여풍이 나오는 것은 격에 맞기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부여풍은 협상장 옆의 귀빈석에 앉아서 귀실복신에게 지침을 내려주었다.[17] 정확한 나이 언급은 없지만 복신은 노인이 된 60대에 접어든 것으로 묘사된다.[18] 물론 매우 고단한 직위일 가능성이 높다. 삼한 본토와도 이어진 요서 주변이면 모를까, 연운 16주는 바로 얼마 전까지 백제와 치고받아 군사적 여력은 고갈되었어도, 민심을 돌리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19] 다만 군무 이외의 정치전이나 심리전에는 약하고 나이가 젊어 이후로도 나설 기회가 있기에 총사령관은 주로 복신이 하게 되었다.[20] 신라 화랑의 자살 돌격에 대한 계백, 복신, 부여풍의 대응이 모두 다른 점이 포인트다. 물론 부여풍의 닳고 닳은 현대인의 악랄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21] 백제가 왜와의 동시공격으로 신라군을 분산시켜 신라의 충청도 일대 한강 유역의 점령에 성공했을 때, 백제의 군신들은 신라의 다음 행보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쳤다. 복신은 신라가 현재 전황이 불리하니 소백산맥 내부로 후퇴해 재정비하고 기회를 노릴 것이라 생각했으나, 계백은 오랜 역사의 신라가 십중팔구 말라죽어버리는 비참한 최후를 피하기 위해 국원으로 전진할 것이라 예상했고 이는 적중했다.[22] 이 때문에 여력이 남은 대조영이 적의 우익을 맡은 두의적을 격파할 수 있었고, 이세적도 거란 기병에게 목숨을 건 작전을 부탁했다가 실패해 단숨에 말아먹었다.[23] 의자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지방 귀족들을 향한 강경책에서 그 수족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지방귀족들을 괴롭힌 자신은 중앙이 거의 무너져버린 이후엔 백제의 핵심 주력으로 떠오르게 되는 지방 세력가들의 복수를 피하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 그렇다고 의자왕이 충신을 위해 자기 목숨을 다시 내걸어줄 사람도 아니었다.[24] 말이 징발이지 사실상 백성들을 버리자는 얘기였다. 상영은 나중에 2배로 돌려주면 된다고 덧붙였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25] 가르친링과의 협상이 실패할 것을 대비해 부여풍은 이때 10만이 넘는 대군을 대기시키고 있었고, 대조영 부자와 함께 대토번 전술을 구상하여 훈련을 한 상태였다. 만일 토번과의 전쟁이 벌어져 백제군이 패하더라도 수뇌부는 이미 장악한 대운하를 이용해 신속히 퇴각할 수 있었다.[26] 이는 물론 백제가 동로마에게서 받아온 그 물건 덕이 컸다. 자세한 내용은 위 문서의 해당 항목을 참조.[27] 그러나 사타상여는 일이 꼬여 남방의 부여풍 세력이나 웅진으로 도망친 의자왕 등이 있어 훨씬 더 길어질 전쟁일 것이고, 황해를 건너오는 모험을 한 당군과 소정방이 후방의 사비성민들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고 약탈하는 게 이득이라 판단하고 가만둘 리가 없다는 계산 하에 저항하려 한 것이다.[28] 게다가 토번은 자기 진영에 온 당나라 사자를 대화 한 마디 없이 죽여서 머리를 보내서 성의/각오를 보였다. 특히 그 사자가 백제의 전 황태자였던 만큼 더욱이.[29] 그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아들과는 달리 선택지를 완전히 포기한 자신은 스스로 꼭두각시가 된 것이라고 자평했다.[30] 다만 어디까지나 직접 마주했을 때 별 감정이 없었던 거지, 부여풍의 호출을 받고 올 때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고 한다.[31] 관련 에피소드가 그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볍게 과거설명조로 넘어갔지만 작중 확실하게 토번까지 갔다고 언급되는 중신이고 교섭의 중요도로 보아 능력이 증명된 기미가 갔을 확률이 높다.[32] '우리가 가르친링 경계하라는 거 우리 득 보려고 하는 거 맞는데, 잘 생각해보면 너희한테도 이득일걸?'이라고 말했다.[33] 작중 라사에 갔을 때도 수행원들이 다 고산병으로 골골대는 와중에 혼자 멀쩡하게 걷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인다.[34] 사타천복 외 항복한 백제 고위층들은 사비 대학살을 목도한 이후 자신들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겼다는 자책감에 많은 이들이 실의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35] 실제로는 고구려나 백제에도 골품제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고, 오히려 신라의 제도가 가장 유연했다고 추측된다는 주장이 있다.[36] 이때 진현성에서 부여풍은 아르키메데스의 일화를 참고한 방법으로 신라 대군을 격퇴해내 일월지자의 신화를 이룬다. 다만 지리적, 과학적으로 검토했을 때 이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평이 독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다.[37] 다만 고사부리 전투에 김유신이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다.[38] 그 와중에 백제, 고구려군을 속이고 궤멸하려는 계략을 여럿 세웠지만 부여풍에게 모두 파훼당한다.[39] 취리산 맹세에 대표로 참가한 것은 백제, 신라, 당 3국뿐이었다. 때문에 부여풍은 내정을 신경 쓴 뒤 신라를 다시 침공할 명분을 얻기 위해 백제 본군을 움직이는 대신 에치노 다쿠쓰의 일본군으로 하여금 대야성 인근을 치게 하였다. 참다 못해 신라가 거열성을 치며 반격하자, 싸우지 말자는 맹세를 깨뜨린 신라를 토벌하자는 명분으로 부여풍은 대군을 일으킨다.[40] 무릎뼈가 뽑히자, 칼을 두 자루 빌려 하나는 지팡이로 써 몸을 일으키고 다른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뒤의 기둥까지 꽂아버렸다. 결국 죽어서도 무릎꿇지 않음으로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긁은 셈.[41] 참고로 백제에서 간 인질은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효였다.[42] 사비 초토화에 대한 보복으로 서라벌을 초토화하려고 할 때 홀로 등장해 소신공양의 시간동안 백성들이 피난갈 시간을 달라고 부여풍에게 청한다. 부여풍은 나름대로 원효를 살리기 위해 조치했지만 갑작스런 돌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서라벌 주민들은 이 갑작스런 일로 인해 분산이주 당하는 것으로 양호한 처분을 받는다. 물론 금은보화와 값진 것은 모두 뺏기긴 한다. [43] 발석거라 해서 순수하게 돌만 던진 게 아니다. 이미 백제는 화약 개발에 성공했기에 불을 붙인 화약통도 쏘아보내어 성벽을 폭파시켜 공성전에서의 효율을 극대화한다.[44] 백제는 사비 인근 호족들이 나당 연합군에게 전부 쓸려서 사실상의 왕족 직할령이 되었고, 사비성의 귀족들과 의자왕 비롯 기타 왕족들도 전쟁중에 항복하면서 권위도 명분도 잃었다. 신라의 서라벌 진골들은 회유 불가능하단 판단하에 몰살당하고 그들의 토지는 공신들을 위한 식읍, 혹은 유배지가 되었다.[45] 특히 부여풍이 친정한 동로군에 의해 구원받은 북방지역 호족들은 이미 왕족에게 충성심이 없었다. 그나마 왕당파던 안시성 일대의 성주들도 서로군 등 백제의 필요와 은혜를 무시하지 못해 적극적이지 않았다.[46] 국내성으로 영지를 옮긴 연정토, 연합수군 장수직을 유지한 연수영, 서라벌 근처에 영지를 받은 연남생, 백제에 항복하고 관직을 받은 연남산 등.[47] 당장 몇십 년을 내정에만 신경 써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묘사된다. 거기다 당은 몇 십만을 잃어도 몇 년안에 병력을 충원해 공격할 수 있는 여력이 있으니... 전국의 행정을 본인만 안 채로 다스렸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 실태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48] 모루와 망치 전법의 그 모루다. 망치는 아버지 연개소문이 맡았는데, 6갈래의 당군 중 3개 군단을 박살내고 부여풍과 함께 소정방의 대군까지 완전히 깨뜨리는 위업을 달성한다. 계필하력과 소사업이 이끌던 나머지 2개 군단은 철륵의 난을 진압하러 퇴각하였다.[49] 그야 그럴 것이 가족에게 억울하게 배반당해 아들까지 잃고, 살기 위해 모든 자존심과 명예까지 버리고 당나라에 투항해 모국인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 심지어 자신이 배신한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재현되는 것까지 직관한데다, 그를 토대로 고구려가 끝끝내 다시 살아나는 모습까지 보니 멘탈이 붕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부여풍도 이런 연남생의 처지를 공감하며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50] 지기는 했지만 상대가 상대라 저평가할 일은 아니다.[51] 이를 두고, 부여풍에게 구출된 고구려 백성들의 경우, 부여풍의 시점으로부터 700년 전의 '부여의 시조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주몽)'의 설화 어별성교(魚鱉成橋)를 연상했다.[52] 물론 당시 당 태종의 공격을 버텨낸 안시성 성주 본인은 아니며, 그가 늙어 죽자 후임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53] 부여풍 왈 원역사 안사의 난 수준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반란은 당나라 몰락의 본격적 신호탄이 된 대전쟁으로 역사적인 사망자를 냈고 수도인 장안과 낙양이 연달아 털려버린 대사건이다.[54] 서경업 세력은 어디까지나 반정권이지, 반당이 아니다. 물론 내심은 반당독립을 주장하지만 대의명분으론 구국을 외치는 중이다. 그러나 상황을 철저히 챙겨준 부여풍에 의해 이들 의병들도 결국 당군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고 말았다.[55] 이는 임유관을 돌파한 이후부터 백제군에게 전투도 거의 없고 대운하를 이용하는 등 편안하게 기동한 덕분이다. 이 때문에 동쪽의 점령지에서 부호들이나 관리들의 저택에서 보물과 서적 등을 강탈했을 뿐, 장안성 백성들을 위해 식량과 땔감까지 남겼다. 반면, 장안에 도착하기까지 계속해서 전투들을 치르며 도착한 토번군에게 서쪽의 점령지는 처절히 약탈을 당하고 만다.[56] 사실 결말부 시점에서의 북중국은 사실상 괴멸 상태가 되었기에 세를 확장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관중은 토번에게 파괴당했고, 하북은 백제에게 빼앗겼으며, 산동 역시 백제 수군에게 약탈당하고 담로들의 확장으로 무너져가는 신세였다.[57] 화려한 전공으로 인정받기 쉬운 닥돌만 앞장서서 하고 전후처리는 동료들한테 다 떠넘기는 등.[58] 부여풍은 사비를 되찾기 위해 당군과 정면으로 싸우는 대신 손자병법의 구절을 따라 당의 사신을 환대하며 정중히 소정방의 시신을 넘겨주었다. 이는 당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는데 성공해 유인궤가 사비성을 내주고 한산주 방면으로 후퇴하는 판단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59] 사실 이는 민심이 지나치게 그의 계산대로만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점이 컸다. 항복한 지역을 약탈하면 다른 백성들이 저항하려고 부여풍에게 합류할 가능성도 큰데, 구해주지 않았다고 부여풍을 외면할 것이라는 묘하게 편파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60] 다만 위협적인 수인 것은 맞다. 안 그래도 군사 수와 질이 당군보다 딸리는 부여풍은 민심이라도 모아야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어쨌거나 외국인인 부여풍이 고구려 땅까지 와서 격문까지 돌리며 민심을 모으려 해놓고 부여성 사람들을 외면하면 다른 지역 백성들도 부여풍을 못 믿을 사람으로 여길 공산이 컸다. 부여풍도 작중에서도 외통수라 평한다.[61] 한동안 본인과 휘하 세력, 부여풍은 이경업이라 부르며 측천무후와 장안 조정에서는 그의 반란 초기에는 서경업으로 칭하다가 그가 10만의 의용군을 이끌고 장안 수비군에 합류하자 다시 이씨 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당이 몰락한 후 본인이 남조에서 새 왕조를 개창하며 다시 성을 서씨로 바꿨기에 작중 최종 명칭을 따라 서경업으로 표기한다.[62] 측천무후에게 휘둘리는 현 조정에 대한 불만, 약속을 지켜줄 지에 대한 불신과 매국노란 오명을 뒤집어 쓸 것에 대한 우려 등[63] 부여풍의 성씨는 본래 부여씨이지만, 원 역사에서도 백제 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국성인 부여씨를 줄여서 여씨로 칭하기도 했으니 고증이 틀린 건 아니다.[64] 물론 이는 백제, 당 정규병과의 전투를 피하려 한 것이 뻔하다. 백제 수군은 오래된 함선들만 자침시켜 그 세력을 온존했고 이근행, 고간, 설인귀의 정예병 5만이 연운 16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65] 여담으로 부여풍의 평가와 속마음을 서술하는 해설에서는 서경업은 나름 대의와 애국심이 있던 궐기 이전과는 달리 권력이 보이게 되자 이제는 자기 안위와 출세만 생각한다고 묘사된다. 그런 그와는 달리 동료인 낙빈왕과 당지기는 여전히 대의를 믿고 중요한 순간에 목숨을 내걸고 움직인다. 정작 서경업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런 부하들이 처형당하면 민심이 들고 일어나서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한다.[66] 이 시점에 토번에게 사정없이 얻어맞아 너덜너덜해진 장안 조정을 능가하는 민심 장악과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명분을 버리는 순간 성난 동지들에게 맞아죽을까봐 대의를 끝까지 밀고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본인도 이제와서 토번과 백제의 정병들과 싸우는 자살행위를 벌여야 하는 당의 권신 자리보다는 남중국 왕조 개창이 더 욕심나지만, 대의명분을 밀고간 덕에 능력으로서는 안될 불가능한 성공을 거둔 탓에 도박수를 던지는 심정으로 낙양으로 향한다.[67] 부하들은 총대장이 직접 협상에 나선다는 것에 경악하며 호위할 800기를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서경업은 부여풍이 자신을 죽일 생각이라면 호위병이 있다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동생만 데려간다. 물론 이는 부하들에게 부여풍과의 모종의 밀월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경헌은 둘 간의 전령으로 활동하며 이미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 부여풍은 이를 보고 서경업이 원 역사에서 위구르와 담판을 지었던 곽자의를 따라하는 거냐며 조소한다. 중화주의 관점에선 "오랑캐" 위구르를 저지한 곽자의나 백제를 저지한 서경업이 같은 취급을 받을지도?[68] 실제 역사에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라는 비슷한 사례가 있다.[69] 이미 사랑은 식은지 오래였지만 부채의식을 느꼈던 듯하다.[70] 죽기 직전 원망하는 폭도들에게 반론할까 하다 그만두지만, 사실 측천무후의 죄가 마냥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서경업의 반란은 근본적으로 무후의 공신 탄압이 원인이었고, 삼한을 계속 자극한 유인궤는 무후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71] 다만 측천무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상당히 있었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으려는 이상 기득권인 공신들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인궤의 영주 침략도 당고종이 끝도 없이 삼한 정벌을 시도하는 상황에서는 삼한을 건드려 힘이라도 뺄 수밖에 없어서 한 일이었다. 실제로 유인궤 본인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유인궤에게 대외정책 결정권이 없어서 별 수 없었다고 작중에서 인증하며, 당고종에게 전쟁 그만하고 요동으로 후퇴하라고 말했다가 까이기도 한다.[72] 요서에 부임시킨 유인궤의 약탈전과 백제의 공격 유도는 역으로 요서를 점령당하고 수군과 산동이 모조리 불타면서 실패, 제번 연합에 모략으로 보낸 사자 작전은 그들의 철통 대응으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73] 몇 안 남은 충신에 명장이던 배행검은 토번에게 대패해 장안이 위험해졌고, 뒷날의 후환을 각오하고 돌궐제국 부활을 막고 기병을 보충하려고 친당돌궐의 이주를 계획하나 연합세력의 합공으로 이조차도 실패해 돌궐 전체를 빼앗겼고, 연운에서 패하더라도 반대파 서경업을 먼저 토벌하라 명했으나 연운에선 패하고 서경업은 살아남아 세력을 확장한다.[74] 사실 개중 상당수는 그럭저럭 현명한 계책에 가까웠다. 일례로, 유인궤를 적극 기용한 것은 상당한 상책이었다. 측천무후 본인은 유인궤가 실패한 걸 보고 '입만 산 노인네 괜히 썼다'고 후회했지만 사실 부여풍도 유인궤의 계책에는 두고두고 애를 먹다가 군량 수만 석을 날려먹는 대가를 써서야 겨우 잡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일반적이라면 충분히 성과를 거둘 계책들이었지만, 이 경우 측천무후를 상대하던 부여풍의 현대인 치트키와 가르친링의 막강한 전투력 간의 연계가 넘사벽이었을 뿐이다.[75] 덧붙여 부여풍이 미묘한 시기를 잘 잡아 쳐들어온 것도 있는데, 아예 측천무후가 권력을 완전히 다진 이후라면 차라리 당나라가 안정되어 건드리기 힘들 것을 예측하고 딱 권력이 이동하는 과도기를 캐치해서 전쟁을 시작한다. 무후 본인도 죽기 전쯤엔 이 사실을 깨달았다.[76] 계필하력과 수만 명에 달하는 기병 전력이 전멸하면서 당나라는 천문령 전투 이후 경기병 위주의 거란족을 제외한 기병 전력이 거의 소멸했다. 사실 설인귀와 휘하 정예 기병은 백제군에게 큰 타격을 입긴 했어도 어느정도 살아 돌아갔기 때문에 기병 전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계필하력 사후 이족 기병들까지 수만 단위로 끌어왔음에도 공백을 메우지 못해 이후 이세적의 당나라군 기병 전력은 고구려를 넘지 못해서 결정적 승부수에도 경기병을 써야 했다.[77] 설인귀에게서 도망치는 이때 부여풍은 배 한 척 없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엄체수를 4만의 군사, 백성들과 건너며 주몽의 전설적인 '어별성교' 고사를 재현한다. 물론 정말로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일로 고구려인의 민심을 얻어 전황변화에 성공한다.[78] 양 군의 전투가 정점까지 격해진 순간, 삼한군은 마지막 예비대인 고구려 철기병대를 출격시켜 적 진형을 파훼했고 이세적은 이에 맞서 기병대를 부여풍 본영에 돌격시켜 전선을 흔들려 했다. 그러나 설인귀는 이때 흑치상지나 술탈과 싸우느라 여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거란 기병을 출격시켰고, 그 수장인 이굴가가 부여풍 친위군이 철저하게 함정을 파놨음을 깨달아 달려들기를 거부해버려 이세적은 목적을 못 이루고 만다.[79] 적진에서도 기병대로 활약했던 용장이라 정작 국내에서 경계를 푸는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 평생 상상도 못 해본 굴욕에 정말로 당이 망할 운명인 것이냐고 한탄한다.[80] 물론 설인귀는 서경업이 백제와 내통한 사실을 모르고 정말 백제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동관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기에 떠나는 서경업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81] 이는 백제군이 대군을 동원한다 해도 그 한계가 있고, 요서 일대의 방어에 특화된 지형에다 후방 지역인 등주 일대의 지원 및 북방군의 가세만 있다면 승전을 할 것이라 자신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82]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분투하고 있었으나 부여풍이 던진 미끼인 군량미를 포기하지 못해 별동대를 꾸려 추격했다가 이굴가의 거란군과 함께 계곡에 고립되어 불타 죽는다. 죽기 직전 부여풍이 미끼로 소모한 적잖은 군량 때문에 보급 문제로 영주성을 넘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뒤를 이은 당나라의 인재들이 백제를 토벌하리라 장담하지만 부여풍은 치트키 감자로 군량을 보충해 영주성을 함락한다. 부여풍은 이 감자를 보면서 '감자는 손질 안하고 먹으면 식중독 걸리니까 당분간은 독초로 여겨지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몇 화 전 나온 유인궤의 업무 목록 중에 독초를 먹고 죽은 자의 장례식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83] 실제로 유인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것이, 대체로 큰 피해를 입은 것들은 대부분 아군이 말을 안 들어서 생긴 일이기 때문. 기벌포 상륙작전에서는 비록 꾀에 걸리긴 했으나 상관인 유인원이 좀 더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는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아 대패했고, 부여풍과의 결전에서도 비록 편집적으로 몇 번이나 확인을 거쳤으나 "그 교활한 부여풍이 너무 뻔한 악수를 둔 것이 수상하다" 라며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동료인 이굴가가 그를 재촉하다시피 해서 결국 같이 갔다가 사망한 것이다. 만약 유인궤가 홀로 완벽히 전권을 잡아 휘둘렀더라면 더 강한 난적이 됐을 가능성도 있었다.[84] 물론 그렇다 한들 어디까지나 비교적 작은 무대에서 부여풍을 끈질기게 괴롭히기만 했을 뿐, 소정방이나 이세적 같이 절체절명의 대위기로 몰아넣지는 못했기에 "강적보다는 난적"이라는 부여풍의 평가는 꽤 정확했던 셈이다.[85] 당나라의 정병과 장수진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지라 살아서 토번에서 뭐라도 해봐야겠노라 결심하고 항복한다. 이 결정엔 당 태종때 손챈감포에게 시집 온 문성공주가 아직 살아있다는 점의 영향도 컸다.[86] 실제로 정명진의 아들은 정무정(程務挺)과 정무충(程務忠) 밖에 없다. 작품에서만의 가상 설정인듯.[87] 다만 위키백과에선 이경유(李敬猷)라고 되어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이경유를 이경헌으로 잘못 해석한 걸 그대로 가져온 듯하다.[88] 신라를 견제하기만 해도 백제에게 신라 7군을 받아낼 수 있었는데 전투를 벌여 직접 점령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약속을 깨서 영토를 못 받아도 할 말이 없지만 부여풍이 3차 고당 전쟁 개입시 지원을 받기 위해 그냥 주었다.[89] 타쿠츠는 부여풍 덕분에 신라뿐만 아니라 당나라와의 전쟁에도 참전하며 엄청난 실전경험을 가졌고 국제 정세를 알았다. 그가 지휘하는 오천 정병 역시 한반도와 만주에서 수차례 대전투를 치러 일본에서도 가히 최강의 정예부대기에 질적으로 약한 오아마의 반란군을 깨뜨릴 수 있었다.[90] 그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의 행적은 작중 나타나지 않으나, 부여풍의 철두철미한 성격과 일반적으로 실패한 반란의 주역이 어떤 처분을 받는지 고려했을 때 전사, 내지는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91] 오아마도 백제가 개입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규슈 등지의 호족을 동원해 남해를 경계하지만, 부여풍은 만일을 대비해 기존 항로가 아닌 원 역사에서 몇 백년 뒤에야 등장하는 여진 해적이 이용한 동해 항로...로 구원군을 보내 감시망을 피한다.[92] 일본에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정체가 백제 부여풍이라는 설이 있다.[93] 무려 순수익 없이 현상유지만이라도 얼마든지 거래하겠다며 초원 무역로의 안전을 보장한다.[94] 원 역사에서도 거의 성공할 뻔한 사람이었기에 부여풍은 자신의 사상을 위해 대당전쟁 후 그를 견제할 생각까지도 품는다.[95] 그러나 이 사신의 정체는 부여풍의 형이자 백제의 전 태자, 부여효였다.[96] 처음부터 토번군의 공세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배행검이 당군의 정예도 부족을 알고 수적 우위를 살려서 절묘하게 후퇴해가며 시간을 끄는 걸 목표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패턴화된 움직임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가 지형과 시간대가 맞는 기회가 오자 단숨에 공격해 당나라군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든 것.[97]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안사의 난에서 이광필의 진압군이 쓴 계책이다[98] 그의 목적은 토번과 국경이 가까운 관농일대를 철저히 파괴하고 하서를 편입하고 장안을 약탈하는 것으로, 조공이란 형식으로 토번이 전 중국의 물자를 마음껏 쓸어담을 수 있을만큼 당나라를 굴복-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장안 지방을 철저히 파괴하고 군사자원을 모조리 씨를 말릴 기세로 나온다. 돌궐 기병들에게 대우를 하며 휘하에 모으는 것도, 북방까지 손에 넣어서 당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압도해 재기의 가능성까지 봉쇄하기 위함이다.[99] 사실은 아사나니숙이다.[100] 원 역사에서는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의 영향으로 제지 기술이 유럽까지 전파되는 만큼 부여풍은 종이를 주 무역품으로 삼는다. 실크로드가 아닌 페이퍼로드[101] 물론 부여풍은 중화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기에 돌궐의 독립을 용인할 생각이다.[102] 천문령 전투 당시 이세적의 백제군 본진으로 돌격 명령을 수행했지만, 사전에 이를 예상한 부여풍이 미리 함정을 깔고 기다리자 패배를 직감하여 이세적의 호위를 이유로 전장을 이탈한다. 거란족의 이탈로 천문령에서 당의 전력이 완전히 붕괴하여 큰 피해를 입는다.[103] 요나라의 건국을 아는 부여풍을 비롯해 그동안의 약탈로 분노한 백제군은 거란만은 반드시 응징해준다면서 화의 가능성 따위는 집어치운 상황이었다. 이굴가도 그제야 유인궤가 그간 요동 약탈에 거란을 동원한 것이 거란을 백제와 원수로 만들어, 거란과 당이 백제의 맹공 앞에서 순망치한의 입장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최대한의 힘을 모아 영주성을 도우러 온 것이다.[104] 유인궤야 시간을 오래 끌어 부여풍을 막아만 낸다면 피해가 적잖더라도 당 본토를 지킬 수 있지만, 이굴가는 전투가 지속될수록 부족의 영역인 요서가 황폐화되고 병력의 손실이 생기기에 초조해 한다. 이를 예상한 부여풍의 미끼를 물어 함정으로 들어가 화공에 타 죽는다. 연의의 사마의처럼 소나기만 내렸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