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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0:32:58

법정(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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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法頂 | Beopjeong
파일:법정스님.png
속명 박재철(朴在喆)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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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2년 11월 5일[1]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우수영
사망 2010년 3월 11일 (향년 77세, 법랍 55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상사
본관 밀양 박씨[2]
학력 목포공립상업중학교 (졸업 / 31회)
목포상과대학 → 전남대학교 상과대학[3] (상학 / 중퇴)
해인사 법보전문강원 (대교과 / 졸업)
직업 승려, 수필가, 번역가[4]
종교 불교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별명 가야산 억새풀

1. 개요2. 생애
2.1. 탄생 및 출가2.2. 속세와의 단절2.3. 길상사 시주2.4. 사망
3. 논란4. 여담
4.1. 타 종교와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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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대한민국불교 승려. 무소유 정신으로 유명했던 고승이었다.

2. 생애

2.1. 탄생 및 출가

파일:법정스님 학창시절.jpg
목포상과대학교 재학 당시의 법정
1932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우수영에서 태어나 목포공립상업중학교[5]를 졸업하고, 목포상과대학교[6]에 입학했는데, 하필 1950년한국 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게 되었고,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해 이듬해 승려 효봉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받고 1959년 27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萊軒)에 살면서 운허와 함께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7]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법정은 종교적이고 피안적인 글만 썼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불교계 인사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섰고 불교 승려로는 그 시절에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만약에 법정이 없었다면 그 당시에는 주로 기독교계(가톨릭, 개신교 포함)가 주도했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불교는 불의에 침묵했다고 부끄러워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불교 승려들은 극우 개신교 목사들처럼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독재에 편승하여 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서지도 않았다. 자세한 것은 10.27 법난을 참조.

생애 대부분을 암자나 산골에서 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속세와 담을 쌓지는 않았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개신교인이자 사회운동가 함석헌[8] 1970년에 만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김수환이나 강원용 등 타 종교인들과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씨알의소리' 편집회의는 주로 장준하나 김동길의 자택, 그리고 봉은사 다래헌으로 옮겨 다니면서 열렸는데, 어디를 가나 정보기관에서 따라다녔고, 봉은사에서는 그날의 모임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다고 담당 형사가 전화로 상부에 보고하는 장면을 마침 목격한 법정이 홧김에 그 자리에서 그 형사에게서 전화기를 빼앗아 형사가 보는 앞에서 돌에 내던져 깨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법정의 몇 안 되는 감정표현이었다.

2.2. 속세와의 단절

그러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마다 생기는 증오심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본분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그곳에서 홀로 지내기 시작했고, 산문집 <무소유>(1976년)를 저술해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조류와는 다른 삶의 길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이 시기 덕현에게 계를 주게된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는데, 오늘날의 템플 스테이의 원조가 됐다. 법정이 머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통과 현대, 불교와 대중의 소통이 있었다. 그는 관계의 단절자가 아닌 가교자였다.

무소유 외에도 여러 저서로 일약 유명해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자, 불일암 생활 17년째가 되던 1992년에 다시금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으로 이사를 가버리곤 법회 때나 가끔 산을 내려왔고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오두막 생활을 소개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5)와 <오두막 편지>(1999)를 저술했다.

2.3. 길상사 시주

1994년에는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9]를 만들어 이끌었으며, 1996년엔 기생 출신으로 백석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으로부터 서울 도심의 요릿집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가 되었다. 김영한은 10년 전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법정에게 자신의 전재산인 대원각 부지 7천여 평을 시주해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법정 본인은 10년 동안 받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 1996년에야 시주를 받아들인 것. 이후 법정은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었고, 김영한은 3년 뒤인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뼈를 길상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유언대로 그녀의 유해는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으며 길상사에는 그녀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10]

1998년 길상사를 개원했고, 이 자리에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김수환 스테파노가 참석해 직접 축사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법정은 평소에도 이해인가톨릭계 인물들과 인연이 깊어 이를 계기로 김수환이 직접 축사를 온 것이었다. 법정 역시 1998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성탄전야미사에서 제대에 올라 강론을 하였다. 이때 법정이 "이 제단 위에 저를 올려주신 천주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강론의 첫 문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11]

길상사를 개원한 후 법정은 다시 강원도 오두막으로 돌아가 1년에 봄·가을 정기법회 때만 길상사로 내려와 법문을 설파하였고 2003년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길상사에서 법회를 가졌다.

2.4. 사망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사리는 찾지 말고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사망 전날에 남긴 법어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0년 2월 24일

법정(속명 박재철) 法頂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法頂(박재철)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
법정의 유언장

강원도 오두막에서 자연 속 삶을 살다 가끔 내려와 법회를 가지던 무소유의 생활을 실천한 법정은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길상사에서 내려와 법회를 가지거나 교리교육을 하는 등 사목활동을 왕성하게 했으나,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2009년 길상사 봄 정기집회를 마지막으로 봉행한 뒤 연말에는 제주도에서 요양을 했다. 2009년 2월 김수환이 사망했을 때도, 건강 문제 때문에 직접 조문하지 못하고 대신 추도의 글을 보냈다. 그러던 2010년 들어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서울로 상경해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이미 병세가 심각하여 사망 6일 전인 3월 5일, 법정은 앙상해진 몸으로 산소마스크를 댄 채로 호흡을 하였다. 필담을 통해 얘기를 나누고 주위 사람이 말을 건네면 고개만 끄덕였다. 병원으로부터 사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상좌들은 법정을 불일암으로 모시기로 했으나, 법정은 “불일암은 수행하는 곳이다. 이 몸으로 가진 않겠다. 내가 다시 수행할 수 있는 몸이라면 그곳으로 가겠다.”면서 반대했다.

결국 3월 11일 오후 1시, 상좌들은 법정을 길상사로 옮기기 시작했다. 길상사에 도착하자 링거를 꽂고 침대에 누운 법정은 구급차에서 내려 길상사 주지실로 향했고, 법정이 지나가자 대기하던 수많은 신도와 승려들은 합장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주지실로 들어간 법정은 40분 후 사망했다. 향년 77세, 법랍 55세다.

3월 12일 오전 11시, 주지실에서 운구가 나왔고 신도와 승려 등 8,000여 명의 추모객이 길상사를 채웠다. 이중에는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등 다양한 종교인도 있었다.
파일:법정스님 입적.jpg
송광사에 도착한 법정의 운구 행렬

이에 고인의 뜻을 따라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3월 13일에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12]에서 다비를 진행하며, 조화나 부의금을 받지 않았다.(관련 기사) 다비식 이후 나오는 사리는 유지에 따라 수습하지 않았으며[13], 유골도 49재까지 송광사와 길상사에 안치했다 조계산 불일암과 강원도 수류산방[14] 인근에서 비공개로 산골하였다. 길상사에는 생전 승려가 사용한 유품과 영정을 모아뒀다. 생전에 법정이 나무 소비를 이유로 지인들에게 일반 화장장에서 다비해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만약 그 말이 진짜라면, 법정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사망 이후 원적(圓寂)과 함께 자신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출판물을 더이상 출판하지 말고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자신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법정의 유지가 공개되었다. 현재 법정의 모든 저술은 맑고향기롭게 사이트에서 전자책 형태로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3.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법정(승려)/논란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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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여담

4.1. 타 종교와의 교류

파일:길상사 개원법회.jpg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한 김수환(가운데)과 법정(왼쪽)
"김 추기경님이 가지를 넓게 펴고 세상을 품는 느티나무였다면, 법정 스님은 늘 푸르름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소나무라 할 수 있지요."
이해인 수녀 #

법정은 생전 불교계뿐 아니라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인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그 덕분에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존경을 받았다. 특히 천주교와의 관계는 남달랐는데, 군사독재 시절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기도 했고 또 자주 교류한 김수환이 사망했을 때 이해인과 함께 애도를 표하였으며, 사망하였을 때는 이해인이 애도를 표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법정이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 미사 때 김수환의 초청을 받고 명동성당을 방문해 설법을 한 적이 있는데[19], 이 인연으로 법정은 길상사 개원법회 때 김수환을 초청했다.[20]


[1] 음력 10월 8일.[2] 밀양 박씨 수민공파이다.출처 물론 사실을 기반으로 했겠지만 출처가 소설이고, 순천 박씨라는 기사#도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밀양 박씨의 분파 중에서 ‘수민공파’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는데, ‘박수민’이라는 사람을 파조로 하는 분파가 아니라면, 아마도 이는 숙민공파(肅愍公派)의 잘못일 것이다.[3] 1952년에 목포상과대학에서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으로 확대 개편[4] 숫타니파타를 비롯한 여러 불경을 번역했다.[5] 당시에는 중고등학교 학제 분리 전이라 중학교로 통합 6년제였다. 그래서 이 시절 6년제 중학교 졸업자는 지금의 고졸 학력으로 인정받았고, 중학교 3년 이상 수료자에게는 지금의 중졸 학력을 인정해주었다.[6]전남대학교 경영대학. 1952년에 전남대학교로 확대 개편.[7] 운허가 불경 번역에 나서게 된 계기는 팔만대장경 항목 및 후술.[8] 법정의 회고에 따르면 1964년 해인사 퇴설당선원에서 정진하던 시절 종로에 있던 사상계 본사에 장준하를 만나러 갔다 마침 그날 동국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후 함석헌은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기 전에 자신의 책 <뜻으로 본 韓國歷史>를 다시 손질하러 법정이 있던 해인사의 금선암(金仙庵)에 들어왔고, 해인사 큰방인 궁현당(窮玄堂)에서 승려나 사부대중을 상대로 한국의 종교가 나아갈 길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했다고 한다.[9]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한다.[10] ''천억대의 대원각을 어떻게 다 시주로 내어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까짓 천억의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한 일화는 특히 유명하다.[11] 법정 비구의 이 말은 가톨릭의 예수에 대한 존중이자,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세계의 창조주 범천(브라흐마)의 권청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나아가 전법하였다는 불경 속 예화를 적절하게 인용한 위트이다. 석가모니가 범천의 청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설하러 나선 것처럼 법정 비구 자신도 가톨릭의 창조주 야훼의 뜻(권청)으로 이 자리에 나와 설법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가톨릭의 신앙 대상인 창조주 야훼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불제자로써의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음으로써 양쪽 모두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라 할 수 있다.[12] 법정이 처음 출가하여 불법을 공부한 본사이다.[13] 대부분 그렇게 알고 또 실제로도 승려의 유지에 따라 사리는 수습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그래도 비공개적으로 사리를 수습했는지, 길상사에서 법정 진영 즉 초상화를 모시고자 할 때 작가의 제안으로 법정의 사리를 안료와 섞어 초상화를 그려 모셨다. 작가는 법정의 사리에 담긴 고된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을 재료삼아 법정의 초상화를 승려의 환생처럼 그리길 원했다고 한다.[14] 불일암은 송광사와 같은 산의 지척거리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둘 모두 법정이 수행을 하던 작은 암자 혹은 오두막이다.[15] 시기는 1982년 1월 1일. 아마 법정이 원한 것은 아니고 당시 성철이 종정이 된 이유로 이루어진 것 같다. 여기서 법정이 질문하고 성철이 대답하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통일 문제, 경제 문제, 문제의 성철의 3천배, 지도자가 가져야 할 자세라든지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거론되었다.[16] 일부러 불교를 폄하하려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절에 와서는 고려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자기는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다고 하는 아줌마에게 법정이 장경판전 안에 모셔진 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이라고 가르쳐 주니까 그제서야 알았다고 답하면서 나온 말이 저거였다.[17] 이 밀린 병원비를 내 준 사람은 이건희 회장 부인인 홍라희 당시 삼성리움미술관 관장.[18] 첫째 제자. 이밖에 법정의 다른 제자들도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등 ‘덕 자’ 돌림으로 했다.[19] 이때 법정이 '저 같은 미약한 사람을 이 제단에 세워주신 천주님 은혜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여 좌중의 박수를 받았다. 이때가 1984년으로 아직 우리 사회에 종교 화합의 분위기가 미약할 때였기에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20] 김수환도 성균관대학교에서 주는 심산상을 수상했을 때 관례에 따라 기꺼이 심산 김창숙의 묘소를 찾아 묘 앞에서 절을 올리고, 제사 후에 음복으로 나오는 술을 받아 마시는 등 포용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길상사 개원법회에서는 “아름다운 사찰이 도심 한 가운데 들어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길상사가 맑음과 평안의 향기가 솟아나는 샘터로 모든 이에게 영혼의 쉼터와 같은 도량이 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축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