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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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傅暢(? ~ 330)
서진 및 후조의 인물. 자는 세도(世道). 양주(凉州) 북지군(北地郡) 이양현(泥陽縣) 출신. 조위의 양향후 부하의 손자. 서진의 사도 부지의 아들. 어사중승 부선(傅宣)의 동생.
2. 생애
부창이 5살일 때, 한번은 아버지 친구가 장난삼아 그의 옷을 벗기고 금반지를 빼앗아 시종에게 주었는데, 부창이 이를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칭찬하며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부창은 약관의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쳐 동궁(東宮)의 시강(詩講)으로 조정에 임관하였다가 비서감으로 승진하였다.영가 5년(311년) 6월, 한나라에 의해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회제 사마치가 사로잡혀 끌려가자, 아버지 부지는 하음(河陰)으로 도망쳐 대장군 구희와 함께 행대(行臺)를 세우고 승제하였다. 구희와 부지는 회제 사마치의 차남인 예장왕 사마단(司馬端)을 옹립하였고, 이때 부창도 하음현령에 제수받았다.
당시 밀현(密縣)에도 사공 순번(荀藩)이 세운 또다른 행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오왕 사마안의 아들인 진왕(秦王) 사마업을 받들었다. 부창은 창원(倉垣)에 칩거하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생각을 없는 구희보다 진왕 사마업의 무리를 따르고 싶어하여 염정에게 서신을 보내 '진왕을 받들고 낙양을 방문하여 선제의 산릉에 배알하고, 그런 뒤 직접 장안을 탈환해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이민족과 한족을 규합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자' 건의하였다. 염정 또한 그의 말에 동의하여 무리를 이끌고 관중으로 향했고, 부창은 아버지 부지와 함께 삼저(三渚)에 주둔하며 때를 기다렸다.
영가 6년(312년) 4월, 한나라의 중산왕 유요가 삼저를 공격해왔을 때, 부지가 갑자기 병으로 급사하여 성이 금세 함락당했고, 부창을 비롯한 그 아들, 조카들은 모두 적군에게 붙잡혀 한나라의 수도인 평양(平陽)으로 끌려갔다. 평양에 이르러 소무제 유총에게 투항한 부창은 대장군 석륵의 우사마(右司馬)로 배속되었다가 참군으로 옮겨졌다.
광초 2년(319년) 11월, 석륵이 조왕(趙王)에 오르자, 부창은 경학좨주(經學祭酒)에 임명되어 석륵의 지시에 따라 《상당국기(上黨國記)》, 《기거주(起居注)》, 《조서(趙書)》를 편찬하여 후조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부창은 조정의 의례에 정통하였기에, 석륵은 그를 신임하여 중용하고 조정의 기밀에 관한 일을 관리하게 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9월 ~ 12월 중에 부창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진제공서찬(晉諸公敘贊)》 22권과 《공경고사(公卿故事)》 9권을 편찬하였고, 훗날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 때 그 서적들을 참고하였다. 아들 부영(傅詠)은 후조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장강을 건너 동진으로 귀순하고, 교주(交州)자사, 태자우위솔을 역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