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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9:06:35

사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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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는 북부 탕헤르 일대, N은 지중해 연안 리프 지방, C는 카사블랑카, F는 페스(중북부), M는 마라케시, A는 아틀라스 산지, S는 동부 테필랄트(시질마사), WS는 서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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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모로코 중세사.png
전성기인 아흐마드 알 만수르의 치세 영토

파일:마린 왕조와 사드 왕조 국기(1258-1420)_(1554-1659).svg.png
국기
1. 개요2. 건국3. 모로코 통일4. vs 오스만 제국5. '세 왕들의 전투' (1578년)6. 전성기 (아흐마드 알 만수르)
6.1. 말리 정복
7. 내전과 쇠퇴
7.1. 분열과 멸망
8.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السعديون‎ (앗-사아디윤)
베르베르어 ⵉⵙⵄⴷⵉⵢⵏ
영어 Saadi / Saadian dynasty

중근세 모로코를 다스렸던 아랍계 왕조(1509 ~ 1659년)로, 수도는 중부의 마라케시였다. 1549년에 타들라 전투에서 무함마드 앗 셰이크 (재위 1544 ~ 1559년)가 와타스 왕조를 패배시키고 1554년에 결국 마지막 와타시드 술탄을 폐하며 모로코를 통합하였다. 알 말리크의 치세에는 포르투갈 세력의 해안 침투에 맞서 싸웠는데, 1578년의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왕 세바스티앙 1세를 전사시키기도 했지만 말리크 본인도 전사하였다. 동귀어진 코소보 전투?! 포르투갈은 2년 후에 사실상 스페인에 흡수되어 이베리아 연합으로 개편되는 수모를 겪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왕조의 이름인 '싸아다'는 아랍어로 기쁨 혹은 구원을 뜻하는데, 다른 설에 의하면 왕실인 자이단 부족이 샤리프 (무함마드 후손)가 아닌 무함마드의 유모 할리마 사디야의 가문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경쟁 부족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사드 왕조는 아흐마드 알 만수르 (재위 1578 ~ 1603년)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무라비트 왕조가나 제국을 멸한 것처럼 1591년에 서아프리카의 맹주 노릇을 하던 송가이 제국을 톤디비 전투에서 대파, 멸망시켰고 수도인 마라케시에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듯, 만수르 사후 두 아들이 페스와 마라케시를 거점으로 제국을 나누어 가지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1603년) 20여년이 지나 1628년에 마라케시의 아브드 알 말리크 2세가 왕국을 통일하고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수교, 카피툴레이션을 주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내전 기간동안 살레 공화국, 테투안, 시질마사, 수스 지방 등이 독립하고 팀북투가 자립하는 등 분열되었다. 수피 공동체인 달라이야에게 페스를 상실하며 쇠락하던 사드 왕조는 1659년에 마지막 술탄이 삼촌에게 폐위되며 멸망하였다. 10여년 후 시질마사의 군벌 세력이던 알라위 왕조가 모로코를 재차 통일하고 안정을 회복한다.

2. 건국

사드 왕조를 건설한 바누 자이단은 무함마드의 외손자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을 주장하는 샤리프 가문으로, 14세기부터 모로코 남부 다라 협곡의 타그마데르트에 거주하였다. 15세기 들어 그들 중 일부는 북쪽 수스 협곡의 티드시로 이주하였다. (현 타루단트 인근) 15세기 중반 집권한 와타스 왕조가 포르투갈의 팽창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남부 지방에 대한 지배력도 미약하였다. 1505년 포르투갈은 수스 지방의 항구도시 아가디르를 점령, 산타 크루즈 두 카보 데 아게르로 개칭한 후 지배하였고 제노바 상인 등 유럽인들이 왕래하였다. 얼마후 포르투갈 인들이 포로로 잡은 부족 전사들의 석방을 협상하기 위해 대표를 보내라 한 것을 계기로 수스 지방의 부족들과 수피 공동체는 사드 왕가의 무함마드 알 카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압둘 라흐만 알 카임 비 아므르 알라)을 군사 / 정치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알 카임은 와타스 조에 반란을 일으킨 샤야지마 부족의 초청으로 1513년 (유명한 수피 학자 알 자줄리의 영묘가 있는) 하하 지역의 아푸갈을 새 거점으로 정하였다.

3. 모로코 통일

파일:모로코 영묘.jpg
1523-24년 마라케쉬에 건설한 알 자줄리, 알 카임 영묘

같은해 그는 장남 아흐마드 알 아라즈를 후계자로 정하고 수스 총독으로 봉하였다. 아흐마드는 사하라 횡단 교역과 (지하드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1515년 포르투갈의 마라케쉬 공격 격퇴에 일조하였다. 1517년 창건자 알 카임이 사망하고 알 자줄리 옆에 안장되었다. 장남 아흐마드는 아틀라스 산맥 북쪽의 아푸갈을 계승하였고, 차남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왕조의 발상지인 산맥 남쪽 수스 지방을 통치하였다. 후자는 수스의 설탕 생산 및 수출을 장려하였고, 설탕은 일대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비록 1520-21년의 기근과 역병으로 주춤했지만 사드 왕조의 힘은 점점 커졌다. 1521년 아흐마드는 마라케쉬를 지배하던 힌타타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나시르 부 샨투프의 딸과 결혼, 도시에 무혈입성하였다. 1524년 아흐마드는 동생 무함마드 앗 셰이크의 지원을 받아 장인을 암살하고 카스바 (시타델)를 장악하며 마라케쉬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었다.

그 무렵 아흐마드는 부친과 알 자줄리의 유해를 마라케쉬에 안장하여, 새 수도에 상징성을 불어넣었다. 한편 마라케쉬 장악 후 사드 왕조는 페스의 와타스 조와 대립하였다. 후자의 술탄 아흐마드 알 와타시는 1527년과 1529년 두 차례에 걸쳐 마라케쉬를 공격하나 실패하자 아흐마드와 탈다 조약을 맺어 움 알 라비아 강을 경계로 모로코를 분할하였다. 이 조약은 1530년 갱신되었다. 그러나 1536년 사드 군대는 와디 알 아비드 전투에서 와타스 군을 대파하여 국경을 끌어올렸다. 이듬해에는 타필랄트 (시질마사)를 정복하며 와타스 조의 후방을 압박하였다. 한편 형의 성공을 시기하던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마라케쉬 천도 후 소외감을 느끼던 수스의 부족들을 규합하였고, 1541년 포르투갈령 아가디르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아제무르, 사피 등의 도시들을 함께 포기하였고, 외세를 격퇴한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전국적인 명망을 얻었다.[1]

무함마드 앗 셰이크가 아가디르의 전리품을 아흐마드와 나누기를 거부하며 형제 간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양측은 협상도 시도했지만 결국 1543년 무력 충돌하였고, 그 결과 아흐마드는 패배하고 타필랄트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사드 조의 단독 군주가 된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1545년 와디 데르나 부근에서 술탄 아흐마드 알 와타시를 격파, 그를 포로로 잡았다. 1547년 후자는 메크네스 할양을 대가로 석방되었고, 그 직후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페스를 포위하였다. 1549년 1월 28일 그가 페스를 점령하며 사드 왕조는 모로코의 통일 왕조가 되었다. 이듬해인 1550년 포르투갈은 아실라와 크사르 앗 사기르에서 철수하였다. 한편 사드 조는 와타스 조를 지원하던 동쪽의 오스만 제국과 명맥만 유지하던 자얀 왕조틀렘센을 두고 다투게 되었다. 무함마드 앗 셰이크의 아들 무함마드 알 하룬이 이끄는 사드 군대는 1550년 6월 틀렘센을 점령, 자얀 조를 멸하였다. 다만 곧 타필랄트에서 아흐마드가 반란을 일으켜 원정군 중 일부가 그곳으로 파견되었고, 무함마드 앗 셰이크 역시 여러 반란들에 대처하느라 증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4. vs 오스만 제국

파일:모로코 두칼라 사원.jpg
압둘라 알 갈립 1세가 건설한 마라케쉬의 두칼라 사원

그 와중에 무함마드 알 하룬은 틀렘센에서 병사하였고, 1551년 2월 오스만령 알제 총독인 하산 파샤가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오스만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사절을 보내어 최소한 명목상으로라도 복속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자신감에 넘치던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예니체리가 포함된 살라흐 레이스 휘하 오스만 군대가 파견되었고, 1554년 1월 페스 부근에서 사드 군대를 격파하였다. 살라흐 레이스는 스페인에 망명했던 와타스 왕공 아부 하산 알리[2]를 술탄으로 옹립하였다. 한편 타필랄트의 아흐마드 알 아라즈와 자이단 부자는 현지에서 자립하고 아부 하산 알리와 동맹하였다. 다만 남쪽으로 후퇴했던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아부 하산 알리가 아흐마드에게 보낸 서신을 입수하였고, 무소식에 그가 패배했다고 여긴 아흐마드는 동생에게 항복하였다.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실제로 탈다 전투에서 아부 하산 알리를 격파하고 1554년 9월 페스를 수복하였다. 아부 하산 알리가 도중 전사하며 와타스 왕가는 절멸되었고,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스페인령 오랑 총독인 알쿠데테 백작과 대오스만 동맹을 체결하였다. (1555년)[3]

안정을 회복한 후 고령의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아흐마드와 그 아들, 손자들 대부분을 처형하여 장남 압둘라의 계승을 확보하였다. 1556년에는 오스만 군이 오랑을 포위하는 틈에 재차 틀렘센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여름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재차 복속을 요구하는 오스만 사절의 요구를 매몰차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10월 23일 그는 망명자를 자처하며 근위대에 위장 취업한 튀르크계 군인 살라흐 이븐 캬흐야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후 장남 압둘라 알 갈립이 계승하자 그의 세 동생인 압둘 말리크, 아흐마드, 압둘 무민은 암살의 위협을 피해 오스만령 알제리로 망명하였다. 알제 총독 하산 파샤는 재차 틀렘센에 파병하였고, 사드 군대가 도시를 버리고 철수하자 내친 김에 모로코로 추격해 들어갔다. 이어진 페스 북쪽에서 벌어진 와디 알 라반 전투에서 압둘라는 오스만 군을 격퇴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1558년 초엽)

얼마 후 사드 조의 동맹인 오랑 총독 알쿠데테 백작이 오스만령 모스타가넴을 공격하나 대패하고[4] 전사하며 세력 균형이 유지되었다. 1561년 압둘라는 틀렘센 수복을 시도하나 실패하였고, 이후로 사드 조는 알제리를 넘보지 않는다. 한편 알쿠데테 백작의 사후 스페인과의 관계가 악화되며 압둘라는 (포르투갈과도 앙숙이었기에) 영국, 프랑스와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서 동맹을 모색하였다. 1568년과 1570년 그는 스페인의 모리스코 반란을 지원하였다. 치세 중반부 들어 모로코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한 압둘라는 마라케쉬에 벤 유수프 마드라사와 사디 영묘를 세우고 카스바 궁전과 사원을 보수하는 등 여러 건설 활동을 벌였다. 한편 제2의 수도이자 북방의 군사 거점인 페스는 태자가 통치하였다. 그러던 1572년 죽음이 멀지 않다고 여긴 압둘라는 아들 압둘라 무함마드의 계승을 위해 망명 중이던 동생들 중 압둘 무민을 암살한다.

1574년 1월 압둘라가 사망하자 압둘라 무함마드 (알 무타와킬)가 계승한다. 그는 두 동생들 중 한명은 처형하고 다른 한명은 감금하였다. 다만 위협은 외부에 있었으니, 알제리에 망명한 두 숙부들 중 오스만 장교가 된 형 압둘 말리크가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1574년 7월 오스만 군의 튀니스 점령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압둘 말리크는 코스탄티니예로 향하여 술탄 무라트 3세에게 즉위에 있어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후자는 알제 총독 라마잔 파샤에게 그의 모로코 침공을 돕게 하였다. 1576년 초엽 6천의 예니체리 부대와 압둘 말리크가 이끄는 2천 모로코 기병이 페스를 향해 진군하였다. 부근 알 루큰 전투에서 압둘라 무함마드는 휘하 안달루스 병력이 이탈하며 패하였고, 3월 11일 압둘 말리크는 페스를 장악한다. 마라케쉬로 도주한 압둘라 무함마드는 살레에서 재차 패한 후 남쪽 끝 수스로 도주하였으나 타루단트에서 마지막으로 패한 후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로 망명하였다. 술탄에 오른 압둘 말리크는 무라트 3세를 칼리프로 인정, 금요 예배와 동전에서 후자를 언급하게 하며 복속하였다.

5. '세 왕들의 전투' (1578년)

파일:모로코 전투.jpg
와디 알 마카진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

다만 압둘 말리크는 자신을 도운 오스만 병력에게 많은 금을 주어 알제리로 돌려보내었고, 튀르크 장교들의 도움으로 모로코 군대를 오스만 식으로 재편하였다. 동시에 그는 오스만 조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포르투갈로 망명했던 압둘라 무함마드는 국왕 세바스티앙 1세에게 복속 및 기독교 개종을 조건으로 설득하여 복위에 있어 군사 지원을 얻어내었다. 반세기 이상 인도양 패권을 두고 오스만 조와 다투었던 포르투갈은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에 친오스만 군주가 집권한 것이 불만이었다. 1578년 7월 그들은 2만 3천 대군과 모로코를 침공, 탕헤르나 세우타와 같은 해안 거점에 머무르는 대신 아실라를 거쳐 곧장 페스를 향해 남하하였다. 압둘 말리크 역시 동생 아흐마드와 함께 5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 양측은 크사르 엘 케비르 부근 와디 알 마카진에서 조우하였다. 이어진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는 포르투갈 진영을 포위하는데 성공한 사드 군의 대승이었고, 2만 포르투갈 군 중 1만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국왕 세바스티앙 1세와 압둘라 무함마드 역시 전사하였다.[5]

6. 전성기 (아흐마드 알 만수르)

파일:모로코 궁전.jpg
엘 바디 궁전

한편 전투 직후 술탄 압둘 말리크 역시 부상 혹은 독살로 사망하며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계승하였다. 그는 포르투갈 포로들을 몸값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순도 높은 금화를 발행하여 앗 다하비 (황금왕)라는 별명도 얻었다. 아흐마드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군대를 오스만 식으로 개편하였고, 특히 포병 양성에 주력하였다. 동시에 안달루스, 유럽인들에게 지휘권을 주고 근위대로 삼아 오스만 영향력을 견제하였다. 강화된 군대를 통해 그는 중앙 집권을 이룩할 수 있었고, 이러한 군대의 유지를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페스 성직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다만 선지자의 후손인 그의 정통성에 맞서지는 못하였다. 군대 외에도 아흐마드는 문학과 음악 등 각종 학문과 종교적 행사들을 후원하였다. 또한 마라케쉬의 카스바에 호화스러운 엘 바디 궁전을 건설하였다. 다행히 대유럽 설탕, 비단, 구리, 가죽 직물 수출이 호항기였기에 그의 사치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한편 아흐마드는 형 압둘 말리크보다 더 노골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1579년과 1581년 그는 스페인 사절을 접견하였고, 후자의 경우 사절이 보는 앞에서 오스만 제국의 상징을 밟기도 하였다. 주화와 금요 예배에서도 무라트 3세 대신 아흐마드만이 언급되었다. 이에 무라트 3세가 침공을 준비하자 아흐마드는 코스탄티니예에 많은 공물을 바쳐 이를 무산시켰고, 매년 보호세로 금화 10만닢을 납부하고 오스만 술탄에 예를 갖추는 조건으로 모로코 해안과 선박에 대한 알제리 해적들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1582년) 이듬해 양국은 스페인령 오랑에 대한 공동 작전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다만 오스만 제국을 존중하면서도 아흐마드는 유럽 세력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전쟁을 선동하고 자신이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임을 피력하는 주장을 퍼뜨려 종교적 권위에도 맞섰다. 1587년 모로코에 강경 노선을 유지하던 알제 총독 울루츠가 사망하자 아흐마드는 오스만 조에 대한 연공을 중단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이란의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에 매진하느라 마그레브에 신경쓰지 못하였다.

한편 스페인과 친선을 유지하던 그는 1580년 대스페인 동맹을 모색하려 사절을 보낸 잉글랜드와 더 깊은 친교를 맺었다. 본래 (포르투갈의 반발에도) 영국산 직물 & 무기와 모로코산 설탕 & 질산칼륨(초석, 염초)을 교환하는 무역에 기반하던 양국의 관계는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병합한 후 더욱 강화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모로코에 선박용 목재 판매를 허가하고 1585년 아흐마드의 무역 특권 (카피툴레이션) 승인과 함께 바르바리 회사를 설립하였다. 영국과의 밀착을 숨기고 스페인과의 관계도 유지하던 아흐마드는 1595년 북부에서 발생한 조카 앗 나시르의 반란을 스페인이 도운 것에 분노, 1600년 비서 압델 와히드 벤 마수드를 엘리자베스에게 파견하여 스페인 침공을 논의하게 하였다. 동봉시킨 친서에는 스페인 본토에 대한 침공이 어렵다면 신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를 침공해 분할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다만 양국의 국력이 스페인에 미치지 못하고 기독교권의 엄청난 반발을 예상한 엘리자베스는 군사 작전은 거부한다. 다만 양국의 무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6.1. 말리 정복

사드 왕조는 통일 이전인 1540년 경부터 송가이 제국령 말리 북부의 금광을 탐내었다. 1556년경 술탄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시질마사와 팀북투 사이의 타가자를 일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금 외에도 모로코의 주력 산업이던 설탕 정제는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존하였고, 당시 브라질과 카리브 연안의 유럽 플랜테이션과 경쟁하던 상태였기에 노예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였다.[6] 따라서 아흐마드는 기존의 공격 대상이던 말리 북부만이 아닌 노예 공급처인 말리 본토까지 완전한 정복을 구상하였다. 사실 동쪽북쪽으로의 팽창이 현실적으로 불가한 상황에서 사드 왕조에게 있어 남쪽으로의 팽창만이 유일하고 합리적인 선택지였고, 보편 무슬림 군주라는 명성을 세우기에 적합하였다. 1582년 팀북투에 대한 첫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1586년 불과 2백의 화승총병들로 구성된 사드 군대가 타가자를 점령하였다. 1590년 초엽 아흐마드는 송가이 군주 아스키아 이샤크 2세에게 소금 광산들에서 생산되는 만큼을 금으로 납부하게 하였으나 후자는 거부하였다.

1590년 10월 16일 스페인계 주다르 파샤가 이끄는 2만 사드 군대가 마라케쉬에서 출정, 이듬해 2월 나이저 강에 당도하였다. 3월 13일에 벌어진 톤디비 전투에서 아스키아 이샤크 2세가 이끄는 송가이 군은 화약 무기의 차이로 대패하였다. 송가이 조정은 수도 가오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사드 군은 가오와 팀북투를 장악하였다. 사드 군대는 송가이 저항군의 게릴라 전에 시달린 끝에 나이저 강 남쪽 젠네까지 장악하며 말리 정복을 완수하였다. 이로써 아흐마드는 충분한 금, 노예, 상아를 보급받았고 코끼리와 같은 희귀 동물들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말리의 금은 순도가 높은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금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매년 마라케쉬로 몰려드는 카라반 행렬은 주민들과 외국 사절들에게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말리 정복과 오스만 제국의 위기를 틈타 아흐마드는 치세 후반부에는 칼리파를 칭하였다. 이에 중부 사하라를 지배하던 카넴 보르누 제국의 마이 (왕) 이드리스 알로마가 오스만 측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대신 그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7. 내전과 쇠퇴

파일:모로코 마라케쉬.jpg파일:모로코 페스 2.jpg
지단 앗 나시르가 건설한 마라케쉬의 마드라사의 시디 벨 압베스 마드라사 압둘라 알 갈립 2세가 건설한 알 카라위인의 서익랑

1597년 스페인에서 전파된 역병과 아들들 간의 후계 다툼은 아흐마드 치세 말기에 악재가 되었다. 1603년 8월 25일 아흐마드 역시 역병에 걸려 사망하였고, 이미 1579년에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무함마드 알 마문은 동생 자이단 (지단) 앗 나시르와 압둘라 알 와시크에게 밀려났다. 앗 나시르는 페스, 알 와시크는 마라케쉬에서 집권하였다. 포기하지 않은 알 마문은 1604년 앗 나시르를 패배시키고 페스를 차지했고, 1606년에는 그의 아들 압둘라 알 갈립 2세가 알 와시크를 패배시킨 후 마라케쉬에서 집권하였다. 한편 남쪽 수스로 피신하여 통치하던 앗 나시르는 1609년 오스만 조의 지원으로 알 갈립 2세를 축출하고 마라케쉬를 얻었다. 한편 알 마문은 알 와시크에게 밀려나 스페인으로 망명, 국왕 펠리페 3세에게 라라쉬 (알 아라이쉬) 항구 할양을 대가로 군사 지원을 받아 돌아왔다. (1610년 11월) 알 마문은 페스에서 재집권했으나 라라쉬 할양으로 여론의 지지를 잃었기에 1613년 암살당하였고, 아들 알 갈립 2세가 계승하였다. 사드 왕조는 이렇게 페스의 알 갈립 2세, 마라케쉬의 앗 나시르가 각각 1623년, 1627년까지 분할 통치하였다.

앗 나시르는 1612년 마흐디를 칭한 아부 마할리에게 마라케쉬를 빼앗긴 후 사피로 향하여 국외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그 직전에 아들라스 고원의 부족장 야흐야 이븐 아불라 알 하히의 지원을 받아 1613년 마라케쉬를 수복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말리의 파샤들은 더이상 마라케쉬에서 임명되지 않고 주둔군에서 스스로 파샤를 선출해 군정을 실시, 마라케쉬에 연공을 바치는 것 외에는 사실상 독립하여 1833년까지 파샤 정부를 이어갔다. 1623년 페스의 알 갈립 2세가 사망하자 동생 압둘 말리크 알 무타심이 계승하였다. 다만 스페인과 협력한 페스 정권은 인기가 없었고, 1627년 앗 나시르와 알 무타심 모두 사망하자 전자의 아들 아부 마르완 압둘 말리크 2세가 모로코의 단독 군주로 즉위하였다. 다만 그는 1631년 3월 요절하였고, 뒤를 이은 동생 무함마드 알 왈리드 역시 1636년에 사망하였다. 또다른 동생 무함마드 앗 셰이크 앗 사기르가 즉위했을 때에 사드 조는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모로코 남부의 설탕 산업 역시 붕괴하여 타루단트 일대의 공장들은 운영 중단되었고 일대의 경제는 크게 쇠퇴하였다.

7.1. 분열과 멸망

정치적으로도 모로코는 이미 분열되었다. 페스와 마라케쉬는 술탄의 수중에 있었지만 살레와 라바트에는 1609년 안달루스 출신 해적들이 세운 부레그레그 공화국이 세워졌고, 1615년 그들은 앗 나시르 휘하의 총독이던 무함마드 알 아야쉬와 동맹하였다. 알 아야쉬는 스페인령 마자간 (알 자디다)를 공격했는데 스페인의 요청을 받은 앗 나시르가 그의 배후를 습격하자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사드 왕조의 발상지인 수스 협곡에서는 1614년부터 일리그 마을에서 아부 하산 알리 앗 시믈알리가 자립하였다. 그와 맞서던 앗 나시르의 동맹 야흐야 이븐 압둘라 알 하히가 1626년 사망하자 앗 시믈알리는 1631년 다라 협곡과 타필랄트 (시질마사)까지 점령하였다. 한편 아틀라스 중부의 달라이야 수피 공동체는 1636년 무함마드 알 핫즈의 지도 하에 현지 베르베르 인들을 정규군으로 편성해 봉기하였다. 1638년 달라이야 군은 무함마드 앗 셰이크 앗 사기르가 파견한 사드 조의 토벌군을 격파하였고 1641년 살레-라바트의 안달루스 인들과 함께 (후자의 옛 동맹이던) 북부의 알 아야쉬 역시 격파하며 군벌들 중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같은해 달라이야 군은 페스를 점령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한 정권을 수립하여 1651년에는 네덜란드와 통상 조약까지 맺었다. 1655년 1월 무함마드 앗 셰이크 앗 사기르가 사망하자 아들 아흐마드 알 압바스가 계승하였는데, 이미 사드 조의 권력은 마라케쉬 일대에 국한되어 있었다. 아직 어렸던 알 압바스는 외가 부족의 섭정 하에 놓였는데, 그러던 1659년 외숙 아불 카림 아부 바크르 앗 샤바니에게 암살당하였다. 이로써 사드 왕조는 멸망하였고, 페스의 무함마드 알 핫즈와 시질마사의 알라위 왕조가 술탄을 칭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다가 1662년 무함마드 알 할라즈가 암살당하고 알라위 왕조의 물라이 알 라시드가 1666년 페스, 1668년 마라케쉬, 1672년 리프 지역을 점령하며 모로코를 재차 통일하고 사드 왕조에 이은 2번째 샤리프 왕조를 건설한다. 알 라시드를 계승한 물라이 이스마일은 반세기 가량 통치하며 80여년만에 모로코에 안정을 되찾는다.

8. 대중 매체에서



[1] 이로써 모로코 서해안의 포르투갈령 도시는 안파 (카사블랑카), 마자간, 아실라에 국한됨[2] 아흐마드 알 와타시의 숙부[3] 이때 백작은 스페인 군을 제공하는 것까지 제시했는데, 스페인 정부는 후에 이를 승인하지 않음[4] 1만 2천 원정군 중 절반 전사, 절반 포로[5] 이후 포르투갈은 계승 분쟁 끝에 2년 후 스페인에게 흡수된다.[6] 당시 서인도 제도(카리브해 연안) 및 브라질 모두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어마어마하게 동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