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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8:21:46

설강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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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薛強
생몰연도 불명

전진의 인물. 자는 위명(威明). 사주(司州) 하동군(河東郡) 분음현(汾陰縣) 출신. 서진의 상서우복야•기주(冀州) 자사 안읍공 설흥(薛興)의 손자. 양주(梁州) 자사 안읍공 설도(薛濤)의 아들.

2. 생애

어릴 적부터 원대한 포부와 군국(軍國)의 주략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는데, 일찍이 북해(北海) 사람 왕맹과 뜻이 맞아 서로 친분 쌓게 되었다.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북벌하여 관중(關中)에 입성하자, 왕맹의 명성을 듣고는 갈색 두건을 쓰고 왕맹을 만나 물었다.
"강동에는 경과 같은 이가 없소. 진나라에 정말로 기이한 선비가 많다면, 경과 같은 자들은 몇 명이나 더 있는 것이오? 그런 자가 있다면 내가 남쪽으로 돌아갈 때 함께 데리고 가고 싶소."
왕맹이 답했다.
"공께서 난세를 수습할 자를 구하고자 한다면 저의 벗인 설위명(薛威明)이 이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환온이 말했다.
"그 자에 관해서는 이미 들은지 오래 되었소."
그리고는 명령을 내려 설강을 초빙하였다. 이를 들은 설강은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환온을 알현하였고, 환온은 설강과 왕맹 모두 나란히 군자좨주로 삼았다. 환온이 야망을 가지고 있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설강은 이내 왕맹이 환온을 따라가는 것을 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온은 보급 문제를 겪다가 전진군에게 격파당해 강동으로 패주하였다.

영흥 원년(357년) 6월, 부견이 폭군 부생을 몰아내고 천왕에 즉위하자, 그의 조언자 역할을 하던 왕맹은 국정을 위임받았다. 왕맹은 양평공 부융에게 자신의 서신과 마차를 주고, 그를 보내 설강을 데려오게 하였다. 하지만 설강이 출사를 거부하니, 왕맹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승평 2년(358년) 2월, 천왕 부견이 병주의 군벌 장평 토벌하기 위해 진군하면서 하동군을 경유하였다. 천왕 부견이 친히 수백 기를 거느리고 설강이 지키던 보루 앞까지 다가와 설강과의 접견을 구하자, 설강은 자신의 주부(主簿)를 내보내 부견을 책망하며 강개하게 선언하였다.
"이 성에는 항복할 신하는 없고, 단지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킬 장수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전진의 장수들이 모두 보루를 공격하기를 청하자, 부견이 말했다.
"모름지기 내가 진나라를 평정해야만 그가 두 손을 뒤로 묶고 귀순하리라. 지금은 일단 그를 내버려둠으로써 임금을 져버리지 않는 충신들을 격려하겠다."
그로부터 25년 뒤, 부견이 동진 평정을 단행하다가 비수대전에서 패망하고 말았다. 설강은 종실의 정예병을 통솔하여 진천(陳川)에서 서연모용영을 격파하고 하동과 삼보 일대에서 위세를 크게 떨쳤다. 이를 들은 후진요장은 설강이 두려워 사신을 보내 예를 다하여 그를 초빙하고, 우광록대부, 진동장군, 칠병상서(七兵尚書)로 삼은 뒤에 작위도 내려 빙익군공(馮翊郡公)에 봉하였다.

황초 3년(396년) 말기, 서연의 하동태수 유공(柳恭) 등이 황하를 가로막는 바람에 진왕 요서가 이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였다. 이에 설강이 군대를 이끌고 용문(龍門)에서 황하를 건너고, 포판(蒲阪)으로 들어가 유공 등의 무리를 모두 항복시켰다. 이후 설강은 좌호상서(佐戶尚書)로 전임되었고, 98세가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사후 보국대장군•사도공(司徒公)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선(宣)'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