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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다 왕국 Karajaan Sunda[1] ᮊᮛᮏᮃᮔ᮪ ᮞᮥᮔ᮪ᮓ[2] Kerajaan Sunda[3] Praja Sundha[4] | ||
669년?–1579년 | ||
수도 | 파쿠안파자자란(Pakuan Pajajaran)[5] 카왈리(Kawali)[6] 사웅갈라(Sawunggalah)[7]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언어 | 순다어(공용어, 중기~후기 문어) 자바어(문어, 교양어) 산스크리트어(문어, 교양어) 말레이어(교역어) | |
종교 | 힌두교(시바파), 대승불교, 순다 위위탄 | |
민족 | 순다인 | |
성립 이전 | 타루마 왕국 | |
멸망 이후 | 드막 술탄국 반튼 술탄국 치르본 술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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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다 왕국은 7세기 자바 서부에 수립되어 16세기까지 오랫동안 존속한 순다인 국가였다. 순다 중기부터 민중어 순다어가 산스크리트어, 자바어 등과 함께 문어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순다 문화의 많은 요소가 순다 왕국 시대에서 비롯한다.갈루 왕국 역시 타루마 왕국의 분리 이후 7세기 자바 서부에 순다 왕국과 함께 성립되었는데,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은 여러 번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였으므로 이 문서에서 갈루 왕국에 대해서도 함께 서술한다.
2. 역사
2.1. 초기와 중기
자바 서부의 역사는 타루마 왕국의 후신이 되는 순다 왕국(Karajaan Sunda, Kerajaan Sunda, 669?–1579) 시대에 이르러 비교적 명확한 윤곽을 갖추게 된다. 17세기의 자바 연대기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에 따르면, 순다 왕국은 원래 타루마 왕국의 봉신이었던 영주 타루스바와(Tarusbawa, 재위 669?–723)가 장인인 타루마의 왕이 죽은 후 타루마의 왕위를 물려받아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루마 왕국의 다른 봉신이었던 갈루 지방의 우르티칸다윤(Wretikandayun)은 이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하여, 자바 서부는 치타룸강(Citarum, Sungai Citarum)을 경계로 최서부의 순다 왕국과 중서부의 갈루 왕국(Kerajaan Galuh, 669?–1482)으로 나뉘게 된다.
이처럼 7세기 후반에 타루마 왕국이 붕괴하고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이 성립하였던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연대기 간 불일치가 있어 학자들마다 약간의 이견이 있고, 연대기 기록 자체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특히 타루스바와의 장인인 타루마의 왕 링가와르만의 재위 기간은 650년까지로 보는 문헌이 있고, 669년까지로 보는 문헌이 있다.
타루스바와 왕의 왕세자가 장수한 왕보다 일찍 죽자, 왕세자의 딸이 갈루의 왕자 라크얀 잠리(Rakeyan Jamri, 아버지 브라타세나와Bratasenawa는 709–716년까지 재위한 갈루의 제3대 왕, 어머니는 자바 중북부의 고대 왕국인 칼링가 왕국의 공주였음)와 결혼했다. 그러나 잠리의 아버지 브라타세나와는 716년 푸르바소라(Purbasora, 갈루 국왕 재위 716–723)가 일으킨 반란군에 패하여 왕비의 할머니 시마 여왕(Shima)이 통치하는 칼링가 왕국으로 피난을 갔다. 이에 잠리는 복수를 다짐하는데, 723년 타루스바와 사후 순다의 제2대 왕이 된 잠리는 순다군을 움직여 푸르바소라를 야습으로 사살하게 된다. 이로써 잠리는 갈루의 왕좌까지 얻고, 산자야(Sanjaya)라는 이름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산자야는 갈루의 궁정에서 환영받지 못하였으므로 이내 갈루의 왕좌를 푸르바소라의 아들에게 양보했다. 산자야 왕은 732년까지 순다 왕국을 통치한 후, 탐프란 왕자(Tamperan, 재위 732–739)에게 순다 왕위를 물려주고[8] 칼링가 왕국으로 갔다가, 결국 새로운 땅에 마타람 왕국을 세운다.[9]
이후 순다와 갈루의 역사는 계속해서 교차되며, 산자야와 탐프란 이후 많은 왕들이 순다와 갈루의 왕위를 동시에 갖게 되는데(819–895년간 및 1297–1303년 재위한 라가수치Prabu Ragasuci 이래 1475년까지, 1475–1482년의 짧은 분리 후 다시 1482–1521년간), 순다의 왕이 갈루의 왕을 겸하는 경우 순다–갈루 왕국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수마트라에서 스리위자야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여 자바로 원정함에 따라 순다 왕국은 스리위자야에 복속된다. 순다 초기 산자야 및 탐프란 시대까지는 순다 왕국이 스리위자야에 대해 독립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나, 약 8세기 중반경부터는 순다가 스리위자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순다가 스리위자야에서 독립하는 정확한 시점이 언제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이르게는 크본코피 제2비문(Prasasti Kebon Kopi II)의 해석에 따라 932년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12–13세기까지도 대외적으로는 순다가 스리위자야의 봉신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순다 왕국이 10–13세기 동안 역내 자치를 누렸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순다 왕국은 이 기간 동안 큰 내우외환 없이 번성하며, 독자적인 순다 문화를 창달하였다. 인도에서 온 산스크리트어, 자바 중·동부의 공용어이자 자바 전체의 교양어인 자바어, 해양 교역어 말레이어 외에도 민중어인 순다어가 약 10세기경부터 문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10], 14세기 전후에는 자바어를 기록하던 카위 문자에서 독자적인 순다 문자가 발전하기에 이른다.
15세기 이전에 순다–갈루 지역에는 동시대 자바 지역처럼 많은 문헌 사료가 남아 전해지지는 않았으므로 고대와 중세의 상세한 사회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갈루 지역의 창쿠앙 사원(Candi Cangkuang, 8세기, 시바파 힌두교 사원) 등 유물, 유적과 비문이 남아 있어 간접적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스리위자야와 직접 교류했던 서부 순다 지역에는 불탑 등 약간의 불교 유적도 남아 있다. 순다 중기에는 순다와 자바 지역 외에 순다에 관해 중국 등 외부에서 기록한 문헌도 남아 있어 당대에 대한 정보를 제한적으로나마 얻을 수 있다.
고대의 기록 중 크본코피 제2비문(Prasasti Kebon Kopi II, 932)은 특기할 만하다. 이는 고대 말레이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라크랸 주루 팡암밧'(Rakryan Juru Pangambat)이라는 왕이 순다의 왕권을 회복하였다는 내용이다. 바로 이 비문에서, 오늘날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 '순다'(Sunda)가 지역명을 뜻하는 고유명사로서 처음 쓰였다. 이후 11세기와 12세기의 기록에서는 '순다'가 흔히 쓰인다. 또한 이 비문에 순다 지역에서 산스크리트어나 순다어가 아닌 말레이어로 정치적 내용이 적힌 것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까지 순다에 남아 있던 스리위자야, 적어도 말레이어권 지역의 강한 영향을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이 비문을 이때 순다가 스리위자야에서 어느 정도 독립성을 확보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비문 외 순다 왕국 및 갈루 왕국의 초기사에 대한 사료는 앞서 언급한 17세기의 자바 연대기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 외에 16세기 후반의 순다 연대기 《차리타 파라향안》(Carita Parahyangan, 순다어)이 대표적이며, 이 밖에 4~5권가량 단편적인 역사 기록이 있는 15~17세기 서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왕의 이름과 재위 기간에 관해서는, 건국 후 산자야 시대를 포함한 8세기 전반까지와 비교적 관련 기록이 풍부해지는 14세기 사이의 약 600년간의 기간 동안은, 《차리타 파라향안》에도 기록된 소수의 유명 군주에 관한 바를 제외하면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에만 대부분 온전히 의존해야 한다. 다만 순다 시대의 비문 기록에서 당대 군주의 행적에 관해 쓰인 경우가 종종 있으며, 이를 통해 후대 문헌인 《차리타 파라향안》과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를 교차 검증해볼 수 있다.
여러 기록으로 교차 검증되는 순다 중기의 왕 가운데 11세기의 자야부파티(Prabu Detya Maharaja Sri Jayabupati, 재위 1030–1042, 순다와 갈루 모두 통치, 전대 순다 국왕과 스리위자야 공주였던 왕비의 아들로 므당 왕국의 다르마왕사 왕의 사위)가 특히 유명한데, 자야부파티 왕은 스리위자야의 약화를 틈타 마하라자(maharaja)를 칭하며 종주국이었던 스리위자야에 대해 순다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자야부파티 왕에 대해서는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 외에 상향타팍 비문(Prasasti Sanghyang Tapak, 1030년 고대 자바어로 기록)에 당대의 기록이 남아 있다.
2.2. 후기
자바 동부의 신흥세력 마자파힛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던 14세기, 순다 왕국은 마자파힛과 충돌하게 된다. 마자파힛 황제 하얌 우룩은 순다의 치트라레스미 공주(Citraresmi)를 황비로 맞아들이고자 하는 의향을 순다 왕국으로 전달했고, 떠오르는 강력한 제국과 친교를 맺을 희망에 부푼 순다 왕 링가 부아나(Lingga Buana)는 1357년, 딸과 함께 많은 왕족과 관료를 거느리고 마자파힛의 수도 마자파힛 근처 부밧(Bubat) 지역으로 이동하여 공주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재상 가자 마다는 이 기회에 순다를 완전히 복종시키고자 하여, 치트라레스미 공주를 황비 대신 첩으로 삼을 것이라고 링가 부아나 왕에게 통보했다. 순다 왕은 화가 나서 결혼식 전체를 취소하고 순다 왕국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마자파힛군은 순다 왕의 행렬을 포위하고 공주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런 갈등이 부밧의 전투로 커졌고, 이 전투에서 링가 부아나 이하 행렬에 참가한 순다 왕족과 관료가 거의 모두 사살되고 공주는 자결했다.[11] 이 사건으로 순다와 마자파힛의 관계는 지극히 악화되나, 이후 순다에서 니스칼라 와스투 칸차나(Niskala Wastu Kancana, 재위 1371–1475?[12])가 어려운 시기에 선정을 펼쳐 순다 왕국이 마자파힛의 위협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말기인 16세기에 순다 왕국은 사방에서 지방 신흥 세력들의 표적이 되어 마침 말라카를 점령하고 군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세력과 무역–군사 협정을 맺고 살아남으려 노력하였으나(1522년; 순다–포르투갈 조약, Perjanjian Sunda–Portugal, Luso–Sundanese treaty),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포르투갈은 협정의 일부로 순다의 무역항 순다클라파(오늘날의 자카르타 북부)에 요새를 지어주기로 하였으나 지켜지지 못했고, 오히려 순다클라파 항구는 얼마 못 가 드막 술탄국 술탄 트릉가나의 원정으로 반튼 지역과 함께 점령당해 버렸다. 16세기 중반에는 명목상의 정치적 권위만 근근이 유지하다가 반튼 술탄국에 공격받고 수도 파자자란까지 점령당했으며, 자바 최서부 해안 근처의 산속에서 어떻게든 몇 년을 더 버티긴 하였으나 반튼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1579년에 멸망하였다.
초기와 중기의 사료가 상대적으로 부실한 반면, 15세기와 16세기의 순다어 사료 《부장가 마닉》(Bujangga Manik), 《상향 식사칸다 응 카르시안》(Sanghyang Siksakanda Ng Karesian), 《차리타 파라향안》(Carita Parahyangan) 등과 다양한 순다어 구전 전승, 순다 지역에 관한 자바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기록 등을 종합하면 순다 후기의 사회상과 문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구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이슬람 전파 이전 순다 지역에는 명목상 시바파 힌두교가 융성했지만, 순다식 힌두교는 순다의 토착 신앙 체계인 순다 위위탄(Sunda Wiwitan)과 다층적으로 혼합된 양상을 보였다. 순다 지역에서는 시바, 비슈누, 인드라, 쿠베라, 바루나 등의 힌두 신이 기본적으로 숭배되기는 하였으나, '냐이 포하치 상향 아스리'(Nyai Pohaci Sanghyang Asri)라는 힌두교 전파 이전부터 숭배되어 왔던 쌀과 풍요의 여신이 주요 숭배 대상이었다. 여신의 사제는 전통 연례 축제에서 벼 종자를 축복하며 풍작을 기원하였는데, 이는 약간 변형된 형태인 '세렌 타운'(Sérén taun) 축제로 이슬람 전파 이후 현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순다 지역에도 마타람–므당 시대와 마자파힛 시대의 자바 지역처럼 변형된 카스트 제도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며, 《부장가 마닉》이나 토메 피르스의 《동방지》 등을 보면 당시 순다 왕실 예법의 섬세함과 수도의 웅장함 등이 묘사되어 있으나, 건물이 부식에 약한 목재로 건축된 관계로 현대에는 순다 지역에서 순다 왕국 시대 건축물의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힌두 문화권이었으므로 사티 풍습도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는데, 남편이 죽을 때 도저히 따라 죽지 못한 부인은 출가하여 여성 수도자회에 입회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3. 수도
순다 왕국은 원래 현재의 보고르 지역인 파쿠안파자자란(Pakuan Pajajaran) 혹은 줄여 파자자란(Pajajaran)을 수도로 하였으나, 갈루 왕국과 완전히 통합된 14세기부터는 정치, 사회적 필요에 따라 갈루의 중심지 카왈리(Kawali)나, 제3지역인 사웅갈라(Sawunggalah, 오늘날의 쿠닝안Kuningan 지역) 등을 수도로 하기도 했다. 특히 프라부 링가 데와타(Prabu Lingga Dewata, 재위 1311–1333) 시대부터 1482년까지 수도가 계속 카왈리였으므로[13] 이때를 '카왈리 왕국'(Kerajaan Kawali) 시대로 부르기도 하며, 다시 파자자란으로 천도한 1482–1567년간은 '파자자란 왕국'(Kerajaan Pajajaran)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 왕 수랴칸차나(Prabu Suryakancana, 재위 1567–1579) 시대에는 수도 파자자란이 반튼 술탄국에 점령당해 풀로사리산(Gunung Pulosari)의 사면에 위치한 마을을 거점으로 하였다.4. 왕사
순다 및 갈루의 초기·중기 왕사는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에 모두 잘 정리되어 있으나, 산자야나 자야부파티 등 유명한 몇몇 왕을 제외하면 초기 및 중기 역사에 대한 교차 검증이 부실한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이하에서는 니스칼라 와스투 칸차나 왕을 기점으로 해서 어느 정도 왕의 행적과 재위 기간이 믿을 만해지는 후기의 왕사를 위주로 최소한 2개 이상의 문헌(《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 외에 《차리타 파라향안》 등 다른 연대기나 당대 비문)에서 교차 검증되는 왕들의 이름과 재위 기간만을 기록한다.- 초기
- 갈루 왕국
- 브라타세나와(709–716)
- 푸르바소라(716–723)
- 순다–갈루 공동
- 산자야(723–732):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 《차리타 파라향안》, 그리고 무엇보다 당대의 창갈 비문(Prasasti Canggal)에서 언급되어 실존 자체는 분명하다. 순다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중부로 이동해 마타람 왕국을 세웠다는 행적은 다소 놀랍지만, 기이함이 과도하거나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 중기
- 순다–갈루 공동
- 자야부파티(1030–1042): 스리위자야의 약화를 틈타 '마하라자'를 칭하며 순다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이때의 도읍은 순다 지역의 파쿠안파자자란이었다.
- 다르마식사(Prabu Guru Dharmasiksa, 1175–1297): 여러 문헌에서 교차 검증은 되지만 재위 기간이 너무 길어 믿기 어렵다. 두 명 이상의 왕이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 후기
- 순다–갈루 공동
- 라가물랴 루후르프라바와(Prabu Ragamulya Luhurprabhawa, 1340–1350): 14세기와 15세기 중반까지 순다와 갈루가 통합된 시대에 왕국 전체의 중심지는 갈루의 카왈리였다.
- 링가 부아나(Prabu Maharaja Lingga Buana, 1350–1357): 《키둥 순다》에도 적힌 부밧의 전투와 비극적인 죽음으로 잘 알려진 왕. 이때 무렵인 14세기 중반부터는 이하의 니스칼라 와스투 칸차나의 재위 기간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각 왕들이 모두 복수의 연대기에 등장하고, 그 실존 자체는 믿을 만하다고 평가된다.
- 부니소라(Prabu Bunisora, Mangkubumi Suradipati, 1357–1371): 링가 부아나 왕의 적법한 계승권자인 세자는 이하의 니스칼라 와스투 칸차나였지만, 링가 부아나 왕 사후 세자가 너무 어렸던 관계로 대재상 수라디파티(부니소라)가 잠시 왕국을 통치하였다.
- 니스칼라 와스투 칸차나(Niskala Wastu Kancana, Prabu Raja Wastu, 1371–1475): 실존이 교차 검증은 되지만 역시 재위 기간이 너무 길다. 한 인물이 전체 재위 기간을 유지했음을 믿기는 다소 어렵다. 이 시기에 왕국은 내치의 안정을 누리며 마자파힛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마자파힛의 위협을 버텨냈다. 이 시기에 기록된 아스타나그데 비문(Prasasti Astana Gede, 6개 비문의 통칭, 14세기 후반)이 오래된 순다어 사료로 유명하다. 연대기에 따르면, 왕은 왕국을 순다와 갈루 둘로 나누어 두 왕자에게 계승시켰다.
- 순다 왕국
- 수숙 퉁갈(Prabu Susuk Tunggal, 1475–1482)
- 갈루 왕국
- 데와 니스칼라(Prabu Dewa Niskala, 1475–1482)
- 순다–갈루 공동
- 자야데와타(Ratu Jayadewata, Sri Baduga Maharaja, 1482–1521): 순다와 갈루가 다시 통합되었으며, 이때의 도읍은 순다 지역의 파쿠안파자자란이었다. 자야데와타의 치세는 순다가 안정되고 번영한 시대로 순다의 황금기로 평가되고 있다.
- 상 히양(Ratu Sang Hiang, Prabu Surawisesa Jayaperkosa, 1521–1535): 신진 이슬람 세력들의 위협으로 왕국이 기울기 시작했다. 3대에 이르는 순다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이때 기록된 바투툴리스 비문(Prasasti Batutulis, 1533)이 오래된 순다어 사료로 유명하다.
- 데와타(Ratu Dewata, Sang Ratu Jaya Dewata, 1535–1543)
- 삭티(Ratu Sakti, 1543–1551)
- 순다 왕국
- 닐라켄드라(Nilakendra, Tohaan di Majaya, 1551–1567): 영토를 거의 상실하였으며, 반튼 술탄국의 침입으로 수도 파자자란조차 빼앗기고 풀로사리(Pulosari)산으로 도피해야 했다.
- 수랴칸차나(Prabu Suryakancana, 1567–1579): 반튼의 압박으로 순다가 완전히 멸망했다.
[1] 순다어(라틴 문자)[2] 순다어(순다 문자)[3] 인도네시아어[4] 자바어[5] 오늘날의 서부자바주 보고르시 및 인근[6] 오늘날의 서부자바주 치아미스군[7] 오늘날의 서부자바주 쿠닝안군[8] 탐프란 왕자는 같은 해 갈루의 왕을 암살하고 갈루의 왕좌도 얻는다.[9] 산자야 왕은 후대의 서적에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창갈 비문(Prasasti Canggal, 732년 팔라와 문자로 적힌 산스크리트어로 기록) 등 여러 기록으로 실존하였음이 입증된 인물이다.[10] 12세기 갈루 지방에서 기록된 루마탁 비문(Prasasti Rumatak, 1111년 고대 순다어로 기록) 등 고대 순다어로 기록된 자료가 약간 남아 있으나, 15세기 이전의 자료는 매우 희귀하다.[11] 이 부밧 전투 전후 사정은 유명한 자바 고전 운문 작품 《키둥 순다》(Kidung Sunda)의 주제이다.[12] 고전 연대기에서는 실제로 104년을 재위했다고 하는데, 생물학적으로 검증된 적은 없다.[13] 1475–1482년의 짧은 순다–갈루 분리 시대에 순다의 수도는 파쿠안파자자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