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러 시드 비셔스에 대한 내용은 사이코 시드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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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albums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1977. 10.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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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시드 비셔스 Sid Vicious | |
본명 | 존 사이먼 리치[1] John Simon Ritchie |
출생 | 1957년 5월 10일 |
영국 잉글랜드 런던 루이셤 | |
사망 | 1979년 2월 2일 (향년 21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5cm |
직업 | 베이시스트, 작사가, 작곡가 |
소속 | 수지 앤 더 밴시스 (1976) 섹스 피스톨즈 (1977-1978) |
활동 | 1976년 ~ 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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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살아가기엔 너무 타락해버렸고[2] 죽기엔 너무 어리다. |
I'll die before I'm 25, and when I do I'll have lived the way I wanted to. 나는 25세 이전에,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산 후에 죽을 것이다.[4] ― 시드 비셔스 |
1970년대 영국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
펑크 문화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짧고 굵은 삶으로 인해 인생 자체가 '펑크'라며 수많은 팬들에게 전설급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5]
펑크 문화의 아이콘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정작 본업인 음악가로서의 재능은 낙제점을 넘어 아예 없다시피 할 정도로 처참했다.[6] 섹스 피스톨즈 가입 전까지 시드 비셔스는 드러머였는데 그의 드럼 세트에는 심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게 오히려 더 '펑크'스러웠다.
'시드 비셔스'라는 예명은 존 라이든이 키우던 햄스터 '시드니'[7]가 그의 아버지를 깨물자, 쟈니 로튼의 아버지가 "이 햄스터 완전 사납구만.(Vicious!)"이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8]
밴드를 자주 옮겨다닌 편으로, '수지 앤 더 밴시스'[9] → '플라워즈 오브 로맨스'[10]를 거쳐 섹스 피스톨즈로 영입되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시드는 버킹엄 궁전의 보안 요원인 아버지 '존 리치'와 히피 어머니 '앤 비벌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시드와 어머니를 남겨둔 채 떠났다. 그 후 앤 리치는 재혼하여 시드는 '존 베벌리'로 개명을 한다. 한동안은 모자 둘이서 스페인의 이비자 섬에서 살았고, 대부분 히피같은 사람들과 우루루 모여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헤로인을 접하고 곧 마약에 중독된 앤은 시드에게 마약을 가르쳐주었고, 시드도 17살부터 마약을 복용하였다고 한다. 정말로 부모를 잘못 만난 셈. 평소 내성적인 시드는 마약만 하면 말그대로 개가 되어 맹렬하게 날뛰고 자해까지도 서슴없이 할 정도였다.
학교에서 쟈니 로튼과 가까워진 시드는 섹스 피스톨즈의 광팬이 되었는데, 시드와 쟈니는 진학한 학교 칼리지[11]의 동창이다.
데이비드 보위 티셔츠를 입고 그의 콘서트에 가는 16살의 시드 비셔스 |
우리가 기억하는 펑크 패션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데에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12]
2.2. 섹스 피스톨즈 활동
1977년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이자 대표곡들을 대부분 작곡한 글렌 매틀록이 탈퇴한다.[13] 이에 매니저 말콤 맥라렌은 후보를 물색하다, 팬심 충만하던 시드를 만났다.[14] 시드는 끔찍한 첫인상을 남겨주었고, 이 똘끼에 반한 맥라렌은 시드를 베이시스트로 데려오게 된다. 베이스를 치지 못하는데도 데려온 것은 단지 펑크 정신 때문이라고.
시드는 원래 드러머라 모터헤드의 베이시스트 레미 킬미스터[15]를 찾아가 베이스를 배웠지만 실패로 끝났다. 시드에 대한 래미의 평은 "음악가로서는 가망이 없는 녀석."[16][17] 그래서 스튜디오 레코딩에서는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가 베이스 파트를 연주했고, 공연할 때는 시드의 앰프 볼륨을 0에 맞추고 무대 뒤에서 다른 사람이 베이스를 연주하였다. 근데 뮤직 비디오를 보면 시드의 손이 틀린 위치가 아닌 제대로 된 위치를 튕겼다. 아무래도 낸시를 만나기 전에 라몬즈의 데뷔 앨범을 틀어놓고 하루종일 베이스를 연습한 적의 영향인 듯.
후에 발간한 쟈니 로튼의 자서전을 보면, '처음에 시드는 베이스를 배워볼려는 의지가 있었고 그와 더불어 밴드의 분위기도 최고였지만 여자 친구를 잘못 만나면서 밴드가 꼬이기 시작했다'고 평한다.
2.3. 낸시와의 만남
시드의 짧은 인생을 논할 때 낸시를 빼먹을 순 없다.
1958년 2월 27일에 태어난 낸시 스펑겐(Nancy Laura Spungen)[18]은 출생 때부터 기이한 아이였다.[19] 어릴 때부터 화를 잘 내고 공격적이어서 11살 때는 박물관에 데려다주지 않는다고 엄마를 망치로 공격했다.[20] 13살일 때 처음으로 마약을 시도했고, 2년 후에는 완전한 중독자가 되어 17살 때는 집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다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낸시가 태어날 때 목에 탯줄이 감겨 산소 부족을 겪은 것이 악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고 한다. 태어난 당시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의사가 정상이라고 판단했고, 지능에도 문제가 없어 학업 성적도 괜찮았지만, 아기 때부터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21] 낸시는 불과 3개월 만에 히스테리컬하게 운다는 이유로 바르비투르산 처방을 받았다. 이러한 약은 현재는 부작용이 우려되어 성인에게도 좀처럼 처방하지 않는데, 고작 3개월 된 아기한테 처방했다는 것이다. 링크[22]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4살 때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고[23] 15살 때는 조현병 진단까지 받았다. 이것이 사실이면, 낸시는 당시 과잉 진료로 인한 희생자라고 봐야 한다.[24]
낸시는 집에서 쫓겨난 후 엄청난 마약값을 감당하기 위하여 매춘부로 일하며 "구역질나는 낸시"로 불렸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별의별 짓을 다 했다. 미국인인 낸시는 섹스 피스톨즈의 1976년 영국 전국 투어 "아나키 인 더 유케이 투어"에 게스트로 초청된 조니 썬더스의 밴드 조니 썬더스 앤 하트브레이커스의 그루피로 영국으로 건너온다. 그런 뒤 섹스 피스톨즈를 쫓아다니는 그루피(Groupie)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여자는 시드를 꼬시는 데에 성공한다.
참고로 런던 펑크들은 당시에 생각보다 마약을 잘 몰랐다고 한다. 시드 비셔스는 워낙 어릴 때부터 마약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런던의 펑크들은 의외로 마약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조니 썬더스가 영국에 도착한 뒤 런던의 펑크 밴드들 사이에서 마약의 사용이 급증했다고 한다.[25]
쟈니 로튼은 낸시를 정말로 싫어하고 경멸하여, 시드에게 낸시와 헤어지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낸시는 시드와 꼭 붙어있었고, 시드도 밴드 생활을 등한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시드의 자물쇠 목걸이가 낸시의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당시 밴드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기타 보컬을 맡은 여걸 크리시 하인드(Chrissie Hynde)가 준 것이다. 물론 별다른 의미가 있는 선물은 아니라고 한다. 일본의 만화가 야자와 아이의 히트작 나나(NA NA)에서도 낸시가 시드의 목에 어떤 의미를 담아 채웠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이 때문에 낸시의 선물이라는 얘기가 아예 기정사실처럼 굳어졌으나,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시드와 낸시가 마냥 알콩달콩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실로 얀데레적인 연인 관계로, 거의 귀를 물어뜯을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고, 시드는 18층에서 창문 밖으로 낸시를 매달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애증으로 얽힌 관계는 아니고 그냥 둘이 같이 약빨아서 이런 거다. 실제로 약을 하지 않았을 때 시드는 낸시에게 잘 대해주었고, 낸시도 시드를 잘 챙겨주었다.
그러던 1978년 미국 순회공연 도중부터 낸시는 "네가 밴드의 리더가 돼야 돼!"라면서 시드를 부추겼고 이예 시드는 공연할 때면 베이스 연주는 안하고 가만히 있다 갑자기 관객에게 쌩뚱맞는 멘트나 욕을 날려 관객을 도발시킨 후, 관객이 이에 화가 나서 무대에 난입하면 베이스 기타로 관객을 구타하는 등 도가 넘은 막장 행동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당시 매니저 말콤 맥라렌 또한 밴드가 곡을 쓰거나 재충전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무리한 투어 일정을 잡은데다 투어 급여를 받으면 '너네 돈 받으면 어차피 약에 쓸 거 아니야'하면서 급여의 일부로 마약을 사서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꿀꺽하는 등 밴드 자체로도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티브 존스는 "마치 아무 동네나 가서 묘기 부리는 곡마단이 된 느낌"이었다고 언급했으며 쟈니 로튼은 "뭔가 속은 것 같지 않냐?"고 했다.
결국 쟈니 로튼은 시드에게 "네가 낸시 그 썅년에 빠지니까 밴드를 씨발 눈밖에 든 거 아니야!?"라면서 덤볐고 이후 섹스 피스톨즈의 멤버들은 서로 크게 싸웠다. 그리고 다음 날, 공연이 끝나고 쟈니는 미야코 호텔[26]의 로비에서 매니저 말콤 맥라렌과 엄청난 싸움을 벌인 뒤 영국으로 날아갔다. 이는 섹스 피스톨즈의 실질적인 해체였다.
2.4. 솔로 활동
이후 시드 비셔스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에디 코크런의 Somethin' Else, C'mon Everybody, 이기 팝의 I Wanna Be Your Dog, No fun 등을 원곡을 제멋대로 부른 리메이크 싱글을 내고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노래 실력은 굉장히 쓰레기로 알려져 있으나 그건 시드가 꼴리는 대로 막 불렀기 때문이다.[27] Somthing else는 꽤 나쁘지 않은 노래 실력을 보여준다. I Wanna Be Your Dog은 의외로 원곡에 매우 충실하다. 실제로 시드는 이기 팝의 광팬이다.낸시는 시드의 새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섰고, 맨하튼의 유명 락 클럽 '맥스의 캔자스 시티'가 시드의 공연 스케줄을 잡아주었다. 사람들은 그 유명한 시드 비셔스를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지만, 정작 공연은 엉망이였다. 시드가 '관객들? 엿이나 먹어라!'하며 우스꽝스럽게 불렀기 때문. 이 당시 시드 비셔스는 "비셔스 화이트 키즈"라는 이름의 밴드를 이끌었는데 재미있는건 이 당시 베이시스트가 섹스 피스톨즈의 초대 베이시스트 글렌 매틀록이었다.[28]
이후 둘은 뉴욕의 첼시 호텔에 머무르며 함께 약을 빨았고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어느 날은 둘이 약에 취해 자신들의 방 침대 매트리스에 불을 질러 100호실로 방을 옮기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시드 비셔스는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칼을 수집했고[29] 낸시는 1978년 10월 11일, 타임즈 스퀘어에 있는 칼 가게에서 손잡이에 재규어가 새겨져 있는 5인치 길이의 사냥용 접이식 칼을 사서 시드에게 선물로 주었다.
2.5. 사망
다음날인 1978년 10월 12일 아침, 낸시는 100호실 화장실에서 검은색 브라와 팬티만을 입은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향년 20세. 낸시의 하복부에는 어제 자신이 시드에게 선물한 칼이 찔려있었다. 시드 비셔스는 낸시의 시체를 발견하자마자 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 울면서 호텔 로비의 카운터로 달려와 "빨리 앰뷸런스 불러!!!"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경찰이 도착했을때 시드 비셔스는 울면서 호텔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시드는 "내가 죽였어요. 왜냐하면 난 더러운 개라서요.(I did it because I'm a dirty dog.)"라고 진술했지만, 유죄나 무죄를 입증할 아무런 알리바이도 없었고 다른 용의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흘을 보내는 동안 시드는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12월 9일, 맥시즈 켄사스 시티 클럽에서 패티 스미스의 친오빠 토드 스미스의 여자친구에게 집적대다 이를 제지하려던 토드의 얼굴을 깨진 병으로 그어 경찰에 체포됐다. 결국 1979년 2월 1일, 시드는 5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리고 다음날인 1979년 2월 2일, 시드 비셔스는 그의 어머니가 석방을 축하한다면서 가져다준 대량의 헤로인을 스스로 투여하여[30]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이 점으로 인해 사실상 자살로 여겨진다. 더더욱이 낸시가 죽었을 때 울먹이며 자신이 죽이지 않았음에도 자포자기로 자신이 죽였다고 한 것을 보면.
유골함이 히스로 공항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난 바람에 뼛가루가 에어컨 바람으로 공항 사방팔방에 흩어진 것은 시드의 죽음을 더더욱 막장스럽게 장식했다.[31] 후에 쟈니 로튼은 자서전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 "불쌍한 녀석.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다니."라고 평했다.
참고로 낸시의 죽음에 관해서는 마약 판매상의 짓이다, 낸시와 싸운 누군가가 복수를 한 것이다 등 여러가지 설이 많다. 당시 시드 비셔스가 살던 방에는 마약상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시드 비셔스는 완전히 약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아서 정황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쟈니는 비록 시드와 안 좋게 헤어졌었으나, 시드는 낸시를 죽일만한 인물이 못 된다며 그가 유죄일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3. 영화 <시드와 낸시>
<colbgcolor=#900020><colcolor=#fff> 시드와 낸시 (1986) Sid and Nancy | |
장르 | 드라마 |
감독 | 알렉스 콕스 |
각본 | 알렉스 콕스 아베 울 |
제작 | 에릭 펠너 |
기획 | 마가렛 매디슨 |
출연 | 게리 올드만 클로에 웹 외 |
촬영 | 로저 디킨스 |
편집 | 데이빗 마틴 |
음악 | 조 스트러머 프레이 포 레인 더 포그스 |
의상 | 캐서린 쿡 |
분장 | 피터 프램프턴 |
제작사 | 이니셜 픽처스 U.K. 프로덕션즈 엔터티 제니스 엔터테인먼트 |
배급사 | 팰리스 픽처스 |
개봉일 | 1986년 5월 1986년 9월 12일 1986년 11월 7일 |
상영 시간 | 114분 |
제작비 | |
월드 박스오피스 | $2,850,707 |
북미 박스오피스 | $2,826,523 (출처) |
대한민국 총 관객수 | 미집계 |
스트리밍 | |
상영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Restricted |
3.1. 개요
알렉스 콕스의 1986년 영화.
3.2. 상세
첫 주연을 맡은 게리 올드먼은 외모와 더불어 연기 면에서 시드와 상당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특히 My Way를 부르는 장면은 실제 시드의 동영상과 거의 비슷하다. 심지어 눈 까뒤집는 것까지도 비슷하다.My Way 게리 올드먼 ver.
그런데 클로이 웨브가 맡은 낸시의 경우는 낸시 역 캐스팅 당시 코트니 러브가 "내가 낸시다!"라며 당차게 오디션을 봤으나 떨어지고[32] 낸시의 친구 그래천이라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배우들과 실제 커플을 비교해보자.
(좌) 클로이 웨브 & 게리 올드만, (우) 낸시 스펀진 & 시드 비시어스
쟈니 로튼은 영화를 제작할 때 자신을 포함한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에게는 연락도 한번 안하고 섹스 피스톨즈와 앙숙인 더 클래시 멤버들이나 시드 비셔스 어머니의 증언만을 참고해 사실을 지나치게 미화시켰다고 싫어하였으며, 시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시드의 어머니는 영화 촬영에 협조해 시드의 그 유명한 자물쇠 목걸이를 올드먼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OST는 더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가 담당하였다.
이 영화에 쓰인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라는 문구가 유명해졌다. 이 문구는 G-DRAGON의 등짝에도 새겨져있다.
4. 여담
- 시드와 낸시는 종종 존 레논-오노 요코, 커트 코베인-코트니 러브와 함께 록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3대 커플로 여겨진다. 비극적인 죽음조차 마찬가지로. 특히 이 세 커플 중 가장 단명했다.
- 퀸의 프레디 머큐리에게 시비를 걸은 일화가 유명하다. 1977년에 영국 런던 웨섹스 스튜디오에서 우연히 프레디 머큐리와 마주친 시드 비셔스는 대뜸 "어이, 네가 관객들 앞에서 발레나 춘다는 그 프레디라는 놈이냐?[33]"라며 비아냥거렸는데[34], 프레디 머큐리는 "오, 사나운 친구구만.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야.[35]"라고 말하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또라이 같은 시드의 성격상 한 성깔하는 프레디가 공격적으로 응수했다면 폭력적인 상황으로 악화될 수도 있었는데, 프레디가 그냥 부드럽게 넘어가준 것. 이 건 외의 섹스 피스톨즈와 퀸이 엮인 일화인 그 유명한 빌 그런디 쇼 사태 때문에 두 밴드의 사이가 나쁘다는 인식이 퍼져 있으나, 이 둘 외의 다른 멤버들은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서로의 음악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이들도 시드 비셔스를 싫어한 건 마찬가지다.
-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펑크 그룹인 딸랑이 걸즈의 보컬인 니나가 동경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장르가 펑크여서 그런듯.) 그 해당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네기시 소이치가 얼떨결에 시드를 패러디했다.[36]
- 펑크의 아이콘이라고 하여 마약에 쩔은 미치광이의 모습만을 상상하기 쉽지만, 의외로 바보스럽고,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면이 있었다.
- 존 레논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짐 모리슨과 시드 비셔스의 죽음은 완전 병X같은데 왜이리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고 자신은 삶과 건강을 택하겠다"고 하였으며[37], 커서 션 레논이 이들을 찬양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 WWF와 WCW를 오가며 활동한 206cm, 144kg의 빅맨 프로레슬러 시드 레이먼드 유디의 링네임 중 하나였다. 사실 시드 비셔스는 초창기에 잠시 쓴 링네임으로, 사이코 시드나 시드 저스티스 등으로 활동했지만 가장 유명한 가명은 바로 이 시드 비셔스. 전성기 때에는 레슬매니아에서 헐크 호건과 경기를 가진 적도 있다. 초크슬램의 원조로도 알려져 있다.
[1] 본토 발음은 "릿치"에 가깝다. 리치 블랙모어와 동일.[2] 옛말이라 거의 쓰지 않지만 fast에는 "타락한, 문란한, 망가져버린"이라는 뜻이 있다.[3] 원래는 1972년 시드가 데뷔하기도 한참 전에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말콤 맥라렌과 함께 열은 패션샵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문구가 시드의 삶과 너무나도 매칭이 잘 되어 시드의 사후에 개봉한 영화 <시드와 낸시>에서 이 문구를 인용했으며, 시드를 상징하는 어록 중 하나가 되었다.[4] 이 역시 시드 비셔스를 상징하는 어록이며, 시드는 해당 발언을 실제로 실천하였다.[5] 이 인물의 영향은 일본에서도 워낙 커서, 일본 서브 컬쳐에 등장하는 펑크 록커는 대부분 시드 비셔스의 스타일과 성격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6] 이 때문에 밴드의 얼굴 마담이라는 말이 많다. 스스로도 잘생긴 걸 알아서, 인터뷰 중 "I just cash in on the fact that I'm good looking, and I've got a nice figure and girls like me.(난 잘생긴 얼굴로 돈 벌어먹는 거야. 여자들은 날 좋아하지.)"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7] 쟈니가 좋아하던 핑크 플로이드의 시드 바렛에서 이름을 따왔다.[8] 그런데 쟈니는 그 햄스터를 '세상에서 가장 복슬복슬하고 부드럽고 나약한 존재'라고 묘사했다.[9] 제대로 데뷔하기 전의 수지 앤 더 밴쉬즈로, 1976년 9월에 열린 "100클럽 펑크 페스티벌"(런던펑크 붐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는)에 출연했다. 놀라운 건 이게 이 밴드의 첫 공연이었다. 아마도 섹스 피스톨즈와의 개인적 친분에 의해 라인업에 올려진 듯. 이때는 그냥 그런 펑크록 밴드였으나 후에 재정비를 거쳐 어두운 분위기의 펑크록 밴드가 된다. 이 밴드는 포스트 펑크/고쓰 컬쳐의 파이오니어 밴드가 된다.[10] 상당히 괴상한 음악을 연주한 밴드로, 변변한 공연은 한번도 못했다고 한다. 딱 한 번만 공개 연주를 벌이고 해산한 초단명 밴드. 훗날 레인코츠(Raincoats)의 멤버가 되는 비브 알버틴이 이 밴드에 있었다고 한다.[11] 영국은 의무 교육 과정 이후 고2, 3 과정을 식스폼이라 부르는데 이 시절부터 대학 진학반과 취업 준비반으로 나뉜다. 그리고 취업 준비반을 위한 Further education college라는 개념으로 내국인 직업 교육 기관 개념이 있다. 시드와 쟈니가 다닌 곳도 이런 직업 교육 칼리지.[12]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섹스 피스톨즈의 관계는 섹스 피스톨즈 문서 참조.[13] 탈퇴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여러 설들이 있다. 섹스 피스톨즈 측에서는 밴드가 글렌을 짤랐다고 주장하지만, 글렌은 모든 쓰레기 짓들에 진절머리가 나서("sick of all the bullshit") 스스로 그만 뒀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다른 멤버들에 비해 반항적인 성향이 적은 글렌과 다른 멤버들 간에 융합이 잘 안되었고, 쟈니 로튼과의 밴드 내 주도권 다툼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자세한 것은 섹스 피스톨즈 문서 참조.[14] 원래는 쟈 우블이 거론되었다. 쟈 우블이나 시드 비셔스나 둘 다 쟈니 로튼의 친구였으나, 시드 비셔스가 더 멋있다는 이유로 영입되었다. 쟈 우블은 훗날 쟈니 로튼이 본명인 존 라이든으로 돌아온 뒤 결성한 포스트 펑크밴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에 베이시스트로 영입되고, 이때 훌륭한 베이시스트로 활동한다. 아마 시드 비셔스가 아닌 쟈 우블이 밴드에 합류했다면 섹스 피스톨즈의 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록 역사가들은 주장한다.[15] 그냥 베이시스트라고 하면 감이 잡히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스래시 메탈의 대부격인 레전드급 뮤지션이다.[16] 훗날 시드가 섹스 피스톨즈에 가입하고 나서 그를 찾아가 "레미, 그거 알아요? 제가 섹스 피스톨즈에 들어갔어요!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라구요!"라고 말했다. 레미는 당황하며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베이스 칠줄 모르잖아."라고 말했는데 시드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뭐 어때요, 이렇게 섹스 피스톨즈에 들어갔는데요!"라고 당당하게 말해 그를 당혹케 하였다.[17] 유튜브 God Save the Queen 뮤직비디오 댓글란에는 '시드가 아직 살아있다면 지금까지도 베이스 배우고 있을 거임.'이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18] Spungen의 실제 발음은 스펀진이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 곳은 전혀 찾을 수 없다.[19] 참고로 유대계 미국인 중산층 가정의 딸이다. 그것도 독실한 유대교 집안이다.[20] 특이한 점은 낸시는 여동생에게는 공격적이었으나 남동생에게는 다정했다고 한다.[21] 탯줄이 목에 감긴 채 태어나는 아이는 흔한 편이지만,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심하게 감기면 살더라도 뇌성마비 같은 장애가 남을 수 있다. 이런 위험한 상황이면 당연히 아기가 정서적으로 예민해지기 쉽다.[22] 참고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자살로 내몰았다는 바로 그 약이다 이미 1920년대에도 부작용이 의심되던 약이라 그 약을 처방해 준 사이토 모키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23] 저 당시에는 정신과 수준이 낮아 현재와 같은 수준의 의료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과 치료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24] 영문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1980년대 잡지 인터뷰에 따르면, 낸시의 어머니는 아기가 우는 게 정상인 건 알았지만 자기 딸은 울지는 않고 고함만 질러댔다고 했다.("I know it's normal for babies to cry, but Nancy did nothing but scream.") 링크 한국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발언이다. 참고로 동시대 한국의 경우, 낸시처럼 목에 탯줄이 감겨 태어난 아기는 부처의 공덕으로 태어난 아기라 하여 집안이 불교에 귀의하는 풍습이 있었다. 링크 어쨌든 만약 한국이였다면 진정제를 처방하는 대신 종교적으로 해결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인데, 오히려 이게 아기에겐 안전했을지도 모른다.[25] 뉴욕 돌즈 시절부터 유명한 졍키(마약중독자)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쟈니 로튼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26] 현재는 호텔 가부키로 이름이 바뀌었다.[27]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My Way는 원곡과 180도 다른 분위기인데, 원곡이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는' 분위기이라면 시드의 버전은 '세상 좆까라, 이게 내 인생이다'라는 분위기. 뮤직비디오도 역시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연출이다.[28] 사실 둘의 사이가 직접적으로 나쁠 일이 없을 만한 것이, 글렌은 섹스 피스톨즈의 나머지 멤버들과 갈등이 있어서 나간 것이고 그 자리를 시드가, 그것도 타의(권유)로 채운 것이다. 시드가 직접적으로 글렌의 자리를 노린 것은 아니었기에 둘 사이가 그닥 어색할 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29] 당시 뉴욕은 거의 수라도 같았는데 치안도 불안하고 거리 곳곳에 불량배들이 드글대는 도시였다. 이 당시 풍경을 잘 그린 영화가 바로 택시 드라이버와 서머 오브 샘.[30]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라는 설로는 어머니가 구해다 준 헤로인이 시드 비셔스가 평소에 쓰던 것보다 순도가 높은 물건이라 평소 쓰던 양을 썼다 과다복용을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31] 후에 로튼은 재결성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진공청소기가 필요했겠네!"라며 모독했다.[32] 허나 코트니 러브는 문서를 들어가보면 알다시피 낸시를 능가하는 기행으로 유명했다.[33] So you're this Freddie Platinum bloke that's supposed to be bringing ballet to the masses.[34]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프레디가 데뷔 초창기에 라이브 무대에서 입은 발레 의상 같은 우스꽝스런 코스튬들을 비꼰 것이다.[35] Ah, Mr. Ferocious, we're trying our best, dear.[36] 사실 관객들에게 휘말린 것과 독감에 걸린 것 때문에 정말 어쩌다가 그렇게 된 상황이었다.[37] 아이러니하게도 존은 이 말을 남긴지 얼마 안 되어 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40세의 나이로 요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