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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0:59

신학/학문 논쟁


1. 개요2. 요약3. 학문이 아니다.4. 신학은 학문이다.

1. 개요

신학이 학문성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을 다룬 문서이다.

2. 요약

신학의 연구방법론은 철학과 상당히 유사한데, 철학은 당연히 학문으로 인정받는다.

신학이 자연과학과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신학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각의 의견도 있으나,이는 극단적으로 과학주의에 치우친 견해에 가깝다. 사실 신학의 연구방법론은 자연과학의 귀납적 연구방법론과는 차이를 보이지만, 수학의 연역적 탐구방법론과는 유사하기도 하다.

'근대 과학적 방법론 = 학문' 이런 식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자연과학에서도 사변적인 접근의 성향을 강하게 띠는 분야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1], 신학의 오랜 역사와 견고한 학문적 체계를 고려하면 신학도 학문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3. 학문이 아니다.

신학의 문제는 입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것을 당위의 차원에서 다루려고 한다는 데서 시작된다. 점성술이 과거에는 학문으로서 다루어졌지만 엄연히 증명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을 제대로 보강하지 못함으로써 학문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방대한 관측 결과만이 천문학의 자료로서 인정받았듯이, 입증이나 반증을 요하는 신의 존재여부를, 반드시 그렇다고 가정해야 하는 당위의 개념으로서 설명한다는 사실은 신학의 학문적 가치를 의심케 한다.

또한 반론 문단의 플라톤의 예시는 신학의 존재가치를 정당화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면이 있다. 물론 플라톤의 철학이 서양철학의 근본을 닦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의 서양철학은 중세 ~ 현대에 걸친 수백년의 기간 동안 수많은 주장과 반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잡한 반론 및 새로운 논의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발전해왔으며, 수학 및 과학을 세계를 보는 관점으로서 깔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고도화/세분화된 현대 철학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가지는 위상은 '철학 입문자를 위한 개론 지식' 또는 분석철학 또는 비판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분야에서는 사료(史料) 정도의 취급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모든 논의의 바탕이 됐던 건 사실이나 더 이상 철학을 대표할 위치에 있지는 못하다. 무엇보다도 서양 철학의 논의들은 신학과 달리 현대 자연과학의 이론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신학은 특수형이상학에 해당하는데 특수형이상학문단만 봐도 특수형이상학은 학문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칸트가 인식론을 정립하며 인간의 인식밖의 영역을 탐구하는건 종교적 삶을 위해서 필요할지는 모르나 학문으로서의 역할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특수형이상학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철학이 학문이므로 신학 또한 학문이다.'는 식으로 가면 톨킨학, 창조설, 혈액형성격설이 학문이라는 주장도 반박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성서비평학에서는 성경을 문학작품으로서 바라본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그럼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문예학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게다가 철학 및 다른 여러 학문들과의 연관성이 짙다는 사실이 신학의 학문적 지위를 공고히 하지는 않는다. J. R. R. 톨킨의 문학작품에 대해 언어학+사회학+문화학적 접근을 하는 톨키니스트들도 톨킨이라는 틀 안에서 여러 학문을 연관시키고 이를 톨킨에 접목시킨다.

또한 비종교인 신학자나 종교인이면서 타종교의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톨킨 덕후가 아닌 타 덕후나 일반인이라도 반지의 제왕실마릴리온, 호빗 등의 문헌이나 신다린, 퀘냐, 크후즈둘 등의 언어에 흥미를 느껴서 연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덕후던 아니던 톨킨 연구자들은 톨킨의 세계관이 창작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한다. 반면 비종교인 신학자나 종교인이면서 타종교의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반쪽짜리 신학을 접할 수밖에 없다.

신학이 사회와 학계에서 높은 위상을 갖고 있는 것과 신학이 학문인지 아닌지는 별개다. 신학의 위상은 단지 종교집단이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나타낼 뿐이다. 신학은 전근대 군주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되어 왔으며, 현대에도 종교나 종파라는 이익집단의 내부 결속을 다지는 수단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이러한 도그마가 과연 학문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보면 극명해지는데, 빅뱅이론을 비롯한 우주 탄생에 대해 연구하는 물리학과 진화론을 비롯한 인간을 비롯한 여러 종의 생물종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생물학에 대해서, 신학은 그러한 이론들을 배척하다가 결국 받아들여 자기네 나름대로 끼워맞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주는 빅뱅으로 시작되었지만 빅뱅은 신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서 진화하였지만 어느 순간에 신이 영혼을 불어넣어 현재의 인간을 있게 했을 것이다."와 같은 억지 주장들은 다른 학문을 어떻게 기존 신학체계에 맞게 해석하여 신앙을 유지하고 그것에 대한 변명을 할 수 있을가 고민하는 모습에 불과하지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적인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신학과 관계있는 학문들을 접목시켜 신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도 결국 그 각각의 분과 학문에서 여러 종교 및 신앙체계를 주제로 연구를 맡고 있기 때문에 점차 영역을 빼앗기는 중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문의 체계가 고도로 분화된 오늘날과 같은 사회상에서 신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존재의 실존을 전제로 하는 일개 종교의 교리연구를 학문으로 간주해야 하냐는 것이 비판 문단의 주된 논점이다. 이에 대한 옹호 측의 주된 반론은 '신의 존재유무 같은 형이상학적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고 오히려 비율로 따지면 종교라는 문화현상에 대한 연구가 더 많다'는 것인데, 비판 문단 전반에 걸쳐 강조해왔듯 그쯤 되면 이미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종교학은 이름에 종교가 들어갔다고 해서 신 같은 영적인 존재를 찾는 분야가 아니라, 신이 있다고 믿는 인간 및 그 집단들의 행태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이다. 과학은 자연과학이라는 협의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학문 그 자체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인문학은 인문과학이라 지칭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서구권에도 Human Science라는 개념이 있다. 오히려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확고한 구분이 있는 한국과 달리, 서구권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구분이 희미한 편이다. 사실 철학은 논리학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으며, 역사학은 시작부터 끝까지 사료와 유물놀음인데다가, 탄소연대측정까지 동원하는 등 사회과학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2] 문예학 또한 문예창작학과 혼동되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 실상은 인문학보다 사회과학 쪽에 가깝다.

자꾸 학문의 분류를 늘어놓는 이유는 동문서답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란 것이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3] 그런 점에서 철학은 학문이라기보다는 수학이나 통계학과 더불어서 메타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법철학, 과학철학등 많은 분야에서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또한 현대의 철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성과를 버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설명 할 수 있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고대의 성과를 논리적 도구로서만 바라볼 뿐 그 시대의 우주론이나 원소론까지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영역이지 철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신학은 학문이다.

사실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이나 전투적 무신론 같은 종교계가 아닌, 다른 학계에서는 신이나 종교를 부정하는 학자가 있을지언정 논란 문단처럼 신학이 아예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자연과학계에서도 수십 년간 정체된 분야가 있다거나 (제약분야의 Eroom의 법칙), 진실성이 의심되는 분야 (초끈이론)가 있다거나, 내부적인 한계를 증명하는 주장(힐베르트 10번 문제)이 있는데다가 애초에 논란 문단 자체가 형이하학만 학문[4] 이라는 대전제를 먼저 깔아두고, 신학은 형이하학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므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오류(전건부정의 오류)와 신론을 제외한 신학의 다른 분야는 종교학과 겹치므로 신학은 신론이라는 오류(범주의 오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신론이 학문이 아닌 것도 아니다. 과학적 방법론으로 다룰 수 없는 분야일 뿐이다.

신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존재를 기반으로 짜여진 학문이 의미가 없다고? 그렇다면 자연에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이 서로 합의하여 탄생한 수라는 가공의 개념을 중심으로 짜여진 수학, 마찬가지로 화폐와 경제를 중심으로 짜여진 경제학, 사상을 도그마로 삼고 사회를 바라보는 정치학도 의미 없는 학문인가? 정치학의 경우엔 고전정치학이 해당되지만 고전정치학 또한 학문이 아닌게 아니다. 이렇듯 가설을 중심으로 현상을 탐구하는 연역적 탐구방법론 자체가 의미가 없는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언뜻 신학에서만 신과 사후 세계, 영혼과 귀신 같은 증명 불가능한 비과학적 개념들이 쓰일 것 같지만 오히려 다른 학문에서도 인권, 도덕, 선악, 아름다움 등 증명이 불가능한 개념들은 차고넘친다.[5] 게다가 그 증명불가능한 개념들은 마치 신학과 종교처럼 통일된 공식을 보이지 않고 의견 차가 갈려서 사상, 철학, 취향 등 다양한 분파가 형성되어 있다. 수조차도 다양한 수 체계가 형성되어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개념들과 그 개념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학문들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이러한 학문들이 실생활에서 쓰이는 것처럼 신학도 종교계와 사회문화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무신론에서는 앞서 말한 것들은 실재하므로 신학과 동일선상에 놓기 어렵다고 바라보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문화권마다 정의와 개념이 조금씩 다르거나 아예 부재한 경우도 존재한다. 신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합의할 수 없는 개념이고, 문화권, 종교마다 개념과 속성이 다르다.

논란 문단에서의 신학이 다른 학문과 연관성이 짙다는 것이 신학의 학문적 지위를 공고히하지 않는다는 주장 또한 연역적 탐구방법론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수학을 예를 들자면, 논란 문단의 논리로 수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부터, 수학의 학문성 역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과 철학과의 연관성을 인용하지 않는다면 회의적으로 보일 것이다. 신학에서 신이라는 입증과 반증이 불가능한 개념을 가정해야 그 가치를 온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처럼, 수학도 사람들과 수라는 개념을 약속하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 정수론, 이산수학, 응용수학을 전개해나갈 수 없다.

거기에 논란 문단에서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종교학은 결코 경성과학 위주의 학문이 아니다. 탄소연대측정법으로 귀납적으로 종교의 역사를 탐구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가설을 중심으로 종교현상을 탐구하는 연역적 탐구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게 결코 아니다. 그래서 논란 문단에서의 종교학은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라는 억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종교라는 카테고리에 신과 인간에 대한 연구를 무시하고 종교계(혹은 사회)에 대한 연구만 하는게 과연 학술적으로 합리적인가? 애초에 논란 문단은 경성과학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의 과학을 비과학과 연성과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과학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논란 문단의 "종교학이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라는 주장 자체도 학계의 분류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주장이지만, 인문학의 학문적 가치를 부정하면서 사회과학 내부의 연성과학적 방법론을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철학을 논리학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거나 역사학에서 자연과학이 중요한 고고학 분야만 부각시키는 것도 다 인문학의 경성과학적 방법론만 짜집기한 악마의 편집이다. 그래서 논란의 주장대로 인문학을 사회과학(의 경성과학적 방법론)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철학의 다양한 견해와 사상 및 방법론과 역사학의 사관(史觀)[6]과 연역적 탐구방법론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그렇다쳐도, '문학은 언어과학과 커뮤니케이션학만 중요한 사회과학인가?', '문예창작학은 연성과학과 비과학이 자주 사용되므로 학문이 아닌가?'라는 비판과 논란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환원주의가 비판을 받는 것과 맥락이 마찬가지이다.

후술할 내용은 신학의 학문적 자세와 신학의 학문적 영역과 신학 내부의 과학적 방법론과 형이하학적 요소과 고대 학문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서술하여 신학의 학문성을 변증하겠지만, 결국 이를 읽는 사람이 과학적 방법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분야는 학문이 아니라는 도그마를 고집한다면 신학, 인문학, 더 나아가 사회과학의 연성과학적 분야에 대한 그 어떤 변증도 의미없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경성과학만 인정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일단 신학은 그 이름 때문에 '신'에 대한 것을 다루는 학문, 즉 신의 존재유무나 기타 형이상학적인 내용만을 다루는 내용이라 오해되기 쉬우나 이름만 그럴뿐 전반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는 종교학과 비슷하다. 단지 종교학이 '비교종교학'에 가까우며 여러 종교를 다룬다면, 신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이라는 존재를 전제로 한 유신론 관련 종교들(우리에게 가장 익숙한건 기독교)을 주로 다루는 것이다. 기독교를 예로 들어보면 신학 안에는 신의 존재유무 같은 형이상학적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고 오히려 비율로 따지면 적은 편이다. 유신론 항목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수천년간 온갖 인물들이 지겹게 해온 얘기들을 반복해봤자 결론이 날리가 없으며,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한 연구만 하기엔 부적절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7]

신학을 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성서학, 인문학, 교회학 같은 분야이다. 해당 종교(혹은 무종교)의 경전 및 관련 문구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며 해당 종교의 인문과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서학은 이미 근현대의 역사학적 방법론을 비롯한 각종 검증된 방법론들이 사용되고 있는지 오래이다. 또한 성서학 외에도 '기독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등, 기독교 쪽의 신학은 신학/기독교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이름만 신학일뿐 이미 '기독교학'으로 봐도 무방하다. 신의 존재유무를 당위의 차원에서 다루는게 신학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즉, 신학은 단순히 신론만 다루는 학문이 절대 아니다. 위의 내용에선 이에 대해 종교학의 하위분야라고 고백하는 자승자박이라 주장하지만 상술했듯 이는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신학(Theology)을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좁은 (중세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쓴 반론이다. 즉 현대 학계에서 신학(Theology)이라는 용어는 해당 종교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적 노력 전반을 의미하고, 그 방법론과 접근면에서 종교학과 구분하기 위해 쓰는 경향이 강하다. (흔히 신학을 지칭하는)기독교학, 불교학, 이슬람학 등은 신학(Theology)의 하위 분과라 할 수 있는 것. 딱히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이라 지칭해도 되지만 그러면 탈종교적인 종교학과 학명이 겹치게 되니까 편의상 구분하는 것. 즉, 신학은 신성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연구가 불가능함을 명시하며 경전을 해석해서 합의한 교리를 따르지만 교회와 종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 있는 학문이다. 논란 문단의 "신학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지 않는 학문"이라는 주장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게다가 설령 하위분과가 맞다고 해도, 그게 문제일까? 물리학이 과학의 하위분과라 해서 물리학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 것과 같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논란 문단은 국어교육학계에게 국어학계와 영역이 영역이 겹친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인간에겐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엔 한계가 있다. 미래학에서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분야를 강인공지능이 연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것을 떠올려보자 신성도 인간이 인식할 수 범위 밖의 분야이기 때문에 신성이 이해가 온전히 가든 말든 어차피 상관없으며, 타학문도 다 각자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신의 견해를 내놓는 것이다. 미래를 온전히 예측하긴 힘들지만 그 누구도 미래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말하진 않는다.

또한 대중들의 또 한가지 큰 착각 중에 하나는 '신학자 = 골수 종교인' 정도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신학자 중에 특정 종교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업계의 접근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의 경우 과학자나 수학자가 뜬금없이 기독교를 연구할 확률보다는, 평소에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던 종교인이 흥미를 가지고 연구에 매진한 끝에 신학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 말이다. 허나 이런 케이스가 많다고는 하나 신학자가 모두 골수 종교인은 아니며, 설령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위의 성서학 부분에서 말한대로 개인적인 신앙을 연구 결과에 억지로 접목시키지는 않는다. 좋은 예로 국내에도 여러권의 서적이 번역되어 소개된 바트 D. 어만 (Bart D. Ehrman, 1955 ~ )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서 매우 유명한 성서학자이자 신학자이지만,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의 경우 특성상 고고학이나 유대교와 연관될수밖에 없는데, 이쪽에도 기독교인이나 특정 종교인이 아니면서 성서나 기독교 관련에 관심을 가지고 신학자가 된 학자들도 많다. 윗 문단의 반론에선 신학을 신에 대한 신앙이 전제된 학문이라며 줄곧 반박하고 있는데, 엇나간 반론이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위 항목에 최근 추가된 '신학은 이데올로기이며, 종교나 종파라는 이익집단의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이론적 토대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같은 주장과 여성학과 비교하는 주장 역시 엇나간 반론이다. 이미 이 항목에서 신학이 성서 연구, 고고학 같은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학문을 포함하고 이것이 주류라는 것. 신학자 중에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도 많다는 것을 언급했음에도 반론측에선 끝까지 신앙이 전제된 학문이란 지극히 좁은 의미의 신학 정의를 고집한다. 신학이 무조건 왕권 다지기를 위해 썼다,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이다 등의 발언 역시 마찬가지.

또한 신학이 학문이면 톨킨학이나 혈액형성격설도 학문이냐는 황당한 질문도 있는데, 이 역시 학문의 특성을 제대로 모르고 단순비교를 한 것으로 보인다. '톨킨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은 없지만 톨키니스트들이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이 남긴 문서에 대한 문학+언어학+사회학+문화학적 접근을 하는 행위 자체는 학계의 연구 대상이다. 사회학계에서 연구를 할 수도 있고, 문학계에서 연구를 할 수도 있다. 혈액형성격설도 자연과학적으로는 논파된 학설이지만 혈액형성격설을 사용하는 용례와 사회문화적 영향력도 학계의 연구대상이다. 심지어 논란 문단의 첫 문단에서 언급한 점성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런 부류의 학문적 범위를 통컬어서 인문학이라 부르곤 한다. 인문학 또한 여러 하위학문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보니 막상 이게 뭐냐고 물으면 딱 잘라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을 학문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인문학은 인간이 보고 겪은 실제의 바탕에서 생겨난 사상을 글로 체계화시킨 학문인 것처럼, 신학 또한 인간이 '종교'라는 틀안에서 보고 겪은 실제의 바탕에서 생겨난 사건과 사상을 글로 체계화시킨 학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의 존재유무만 논하고 믿어라! 하고 끝나는게 신학이 아니다.

그리고 논란 문단에서 현대 철학이 중세 시절부터 수많은 반론과 연구로 학문이 형성됐지만 신학은 그러지 않는다며 주장하는데, 이는 종교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종교 갈등의 본질적인 원인이 뭔지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오히려 신학은 종교가 태동했던 시절부터 심도깊은 경전 연구와 신자들의 수많은 논박과 주류 교파와 비주류 교파의 경쟁, 타종교 신자와의 수많은 논박을 통해 교리를 강화하고 수정하며 발전해왔다. 교리는 갑자기 뚝하고 나타난게 아니라, 경전과 영적 지도자의 행적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합의를 통해 탄생한 연구 결과이다. 당연히 신학계도 시대에 따라 새로운 논의가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며, 새로운 학설과 새로운 학파[8]가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당장 기독교만 봐도 고대의 유대교 시절부터 현대까지 종파마다, 학파마다, 신학자 개개인마다 수많은 논박을 통한 신학 연구로 경전을 해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과 경전의 의미를 간결하게 연결해주는 교리를 강화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게다가 타종교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다. 불교도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와의 논박, 이슬람교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이 유명하다. 주류 종교들이 교세가 큰 이유가 그만큼 신학 연구를 소홀히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이 학계에서 높은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은 그만큼 충분히 학문이라고 불릴만큼 학문적 논의가 활발해서 그런 것이지, 무슨 종교계가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으로 학계를 꽉 잡고 있어서 그런게 아니다.

그리고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신학이 과학의 이론을 무조건 배척하다가 결국 받아들여서 자기네 나름대로 끼워맞췄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 역시 일방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종교와 과학 그리고 신학과 과학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과학혁명은 중세의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정리한 자료로 인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종교와 신학은 과학을 억압하고 배척해온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된 관계에 있거나 혹은 더 나아가 협력해왔다는 것이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그리고 현역 신부나 목사들이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말하는 학문, 곧 좁은 의미의 신학을 거론한다고 하더라도, 신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존재를 가지고 계속 딴지를 걸거라면 이전 내용에서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 과학에도 비슷한 분야는 존재한다. 바로 다중우주에 대한 것이다. 세계적인 물리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오늘날도 연구를 하고 있고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가는 분야지만, 정말로 이 우주가 여러개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지는 관측이나 실험을 통한 입증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기존의 자료들을 토대로 가설을 세워놓고 추측을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다중우주를 연구하는 것을 '학문이 아니다'라고 격하하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 아닐 것이다. 또한 현대 신학들은, 역시 현대 철학들과 같은 원리로 과학적 영역에 대한 월권은 금하고 있다. 종파에 따라서 스펙트럼이 넓기는 하지만 가톨릭, 성공회 등 굵직굵직한 종파들이 적지 않게 이를 분명시하고 있다. 만약 과학적 사실에 모순되는 것들은 학문이 아니라는 레토릭을 용인한다고 한들, 과학과 유사과학을 나누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러한 레토릭을 피해갈 수 있는 종파들의 신학은 엄연히 학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종파의 신학자들도 과학에 대한 월권을 한 역사가 있기는 하지만, 근대에만 하더라도 철학 등에서도 과학에 월권 행위는 있었으므로 신학 비학문설의 정당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신학이 과학적 성과에 끼워맞추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어느 학문이든간에 과학의 성과에 월권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21세기의 기본 상식이다. 성선설/성악설 논쟁하던 철학자들이 진화심리학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여 거기에 맞춰 새로운 논의를 쏟아내는게 철학의 바람직한 현상이듯이, 신학 역시도 그러할 뿐이다. 게다가 논란 문단에서 과학은 마치 주류 학설이 안 바뀌는 것마냥 서술하는데, 과학은 늘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는 역동적인 학문이다. 신학에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논의와 이론이 자주 등장하는 학문인데, 논란 문단은 이러한 과학의 매우 기본적인 특성조차 간과하고 있다.

또한 학문이라는 것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전개되어야만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합리성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해괴한 주장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 있는데, 철학계 내부에서도 플라톤에 동의하는 자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이데아론에 동의하는 자들, 이데아 개념을 부정하는 자들 등 많은 이견이 있다. 하지만 플라톤 철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는 거의 없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반론과 비판을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철학의 가장 큰 줄기 중 하나로 대우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대의 사상가들은 철학과 신학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다시말해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사상처럼[9]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학문으로 취급되는 고대의 가르침들도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대화편의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는 신적 존재를 우선 상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며, 윤회가 있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주장들은 대화편의 '부가적인 덧붙임' 수준이 결코 아니며, 소크라테스-플라톤 사상의 나머지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신들을 모독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해명하려고 한다. 또한 로마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법이 신으로부터 온 자연법에 의거했다고 믿었으며, 이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법률론」이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의 「로마법 대전」에서도 명명백백하다.[10]
법학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인지이며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인식이다.
로마법 대전」, 법학제요 中
마르쿠스: 나는 극히 지혜로운 이들의 생각이 이랬다고 생각하네. 법률이란 인간들의 재능으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며 백성들의 어떤 의결도 아니라는 것이네. 명하고 금하는 예지를 갖고 전 세계를 통치하는 영원한 무엇이라는 것이네. 그래서 현자들은 최초 최후의 법률은 이치에 따라서 만사를 강제하거나 금지하는 신의 지성이라고 말해왔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들이 인류에게 준 법률은 의당히 칭송을 받아야 하는 것일세. 신들이 인류에게 준 법률이란 명하고 금하기에 적절한, 현자의 이성이자 지성일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법률론」, 2.4.8
마르쿠스: 대자연에서 유래하는 이치가 엄연히 존재했고 그 이치는 바르게 행동하도록 촉구하고 범죄에서 돌이키도록 불러세우지. 그 이치가 문자로 쓰이게 된 이후에야 법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치가 발생했을 때부터 이미 법률이었다네. 그리고 그것은 신적 지성과 동시에 발생했지. 따라서 참되고 으뜸과는 법률이야말로 무엇을 명하고 금할 만한 격식을 갖추었는데, 이 법률은 다름 아닌 유피테르의 바른 이성이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법률론」, 2.4.10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조언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참견도 하면서, 공적으로는 여러분의 무리 앞에 올라와 국가를 위해 조언하는 일에 엄두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스러운 일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까닭은, 내가 여러 번 여러 곳에서 그 말을 하는 걸 여러분이 직접 들은 적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 어떤 신적인 혹은 신령스러운 것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멜레토스가 고발장에 써서 희화화한 것도 바로 이런 것이고요.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는데,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하게 말리긴 해도 하라고 부추기는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이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테네인 여러분, 이 점을 여러분이 잘 알아 두었으면 하는데, 내가 오래전에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려고 시도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득울 주지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의 발언, 31c-e

즉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호가 정치 활동 참여를 제지한 데 대해 '내가 정치를 했으면 죽었을 것이고, 이는 나에게도 시민들에게도 도움이 안된다'라는 해석을 가한다. 다시말해 신앙에 있어서 소크라테스의 '검토'란 신의 계시에 대한 이성적 해석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방법론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정암학당쪽 역자인 강철웅씨는 작품 안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아주 '중세적'인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심지어 철학 중에는 종교철학도 있고, 유머 철학 같은 장난 같은 학문도 있다. 그리고 학문의 내용이 과학계와 충돌하기도 한다. 서구에선 과학자가 종종 철학자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대체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 과학내부에서도 환원주의적 통섭을 주장하는 등. 의외로 현대 학문들은 무척 다양한 입장과 방법론이 교차하고 있다. 위 반론에선 현대 철학이 자연과학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철학의 다양함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하는 주장. 자연과학계에서 직접적으로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현대 철학이 아주 많이 있다. 최근에 순수 철학에서 과학적 방법론의 비중을 늘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변적 영역을 버린 건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이는 철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신학 역시 마찬가지다. 성서 고고학이나 비평학 등의 분야는 철학보다도 역사학과 밀접하므로 특히나 과학적 방법론이 중요해진다.

게다가 논란 문단의 "플라톤 철학이 철학계를 대표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예시가 효력이 없다"는 주장의 논거가 "새로운 논의와 학설이 등장하지 않는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당연히 플라톤 철학을 포함한 고대 철학도 관련 연구자들의 새로운 연구와 학설과 논쟁이 활발한 분야이다. 결국 자신들이 지레짐작해서 만든 편견을 갖고 다른 학문을 매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고대 철학이 철학계에서 사료 정도로 취급 된다는 주장 역시 전혀 철학을 모르고 하는 말. 고대, 중세 철학은 단순히 사료로 취급되는 분야가 아니라 엄연히 재해석, 연구되고 있는 현역 철학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논란 문단의 주장은 과학적 방법론 같은 일부 방법론을 현대 학문의 유일한 기본적 자세로 전제하고는 신학이 이를 만족시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제 자체가 과학만능주의에 입각한 잘못된 논리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은 넓은 의미로 학문과 동일시 되기도 하며 국어사전에도 나오며 종교학은 사회과학에 속하고 신학은 아니다 같은 반론 역시 엉뚱하다. 한국말인 과학과 달리 서구권에서 Science는 넓은 의미로 학문이라 정의되지 않는다. 국어사전은 인정하지만 영어사전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또한 그런 논리라면 역으로 신학은 (사실 넓은 의미로 따지면 신학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체계만 갖추면) 충분히 '학문'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학문'이란 단어로 국어 사전을 찾아보자. 또한 사회과학에 속하지 않은 철학, 인문학 등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뜻도 된다. 애초에 국어사전에 나온 과학의 넓은 의미는 '학문'을 '과학'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거지, '과학'만이 '학문'이란 뜻이 아니다.

게다가 신학과 다른 학문이 분리되지 않았을 당시에는, 신학은 메타과학에 매우 가까웠다. 원래 타학문의 영역에서 신앙적 자세를 학문적 방법론의 기본 자세로 채택하고 있다가 점차 타학문들이 태동하면서 독립한 것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신학만 갖고 있었던 영역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메타과학이 아니라 독립적인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오히려 다른 학문들과 분리되면서 태동하였으며,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범위는 오히려 상술했듯 신학은 성경신학(경전학) → 조직신학(교의학) → 역사신학(교회사학), 실천신학 → 종교신학 순으로 꾸준히 넓어졌다. 그래서 신학이 다른 학문에게 범위를 빼앗긴게 아니라 과학이 발전하면서 당시의 경전학 및 교의학과 과학과의 연계성이 끊겼다는 것으로 보는게 옳다. 오히려 현대 신학은 교리를 역사학, 문화학, 사회학, 자연과학으로 분석하며 신학과 타학문의 연계성은 이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학은 이미 현대사회와 학계에서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신학교도 존재하고, 국제적인 학회도 존재하며, 논문도 계속 나오고 있다. 신학을 학문으로 보고 연구하며 토론하는 움직임은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으므로, 신학이 학문이 아니다라는 시각은 현재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를 종교 권력 때문이다라고 윗 문단에서 반론하지만, 이는 전세계 학계를 너무 무시한 의견이다. 학문적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분과가 있다면 당연히 학계 차원에서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신학이 반드시 신앙을 전재로 하지 않는다는 건, 위에서 이미 여러번 설명한 바 있다. 종교 등의 이익집단을 뒷받침 하는 것이 신학이란 편견 역시 마찬가지. 앞서 말했듯 신앙인이 아닌 신학자도 있으며, 성서고고학이나 성서비평학이 발견한 사실은 역으로 제도적 종교의 도그마를 공격하기도 한다. 게다가 고전과 현대를 망라하고 신학계에서는 신앙보다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는 종교현장의 폐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있다. 신앙을 지키는 것과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신학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고전적인 신학의 정의가 '특정 종교의 신에 대한 숭배와 신앙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각 종교의 고전신학의 일부 진영에서는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며 다원화된 신학의 정의를 거부하고, 신앙을 위한 인도 혹은 지도로서 신학을 정의 내리기도 한다. 특히 실존주의 사조의 분파인 신정통주의 계열 교단에서 이러한 경향이 심하다.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는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이 그 예시.[11] 물론 이런 발언은 신학을 자신들의 종교를 수호하기 위한 학문으로 바라보는 고전신학적 관점이거나 신학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성직자가 종교를 이끄는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지양하자는 의미가 강한 평화주의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현대신학 학계에선 일반적으로 신학을 '신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 전반'(불교처럼 신을 가정하지 않는 종교 역시 존재한다.) 으로 정의하며 특정 종교 신도의 신학에 대한 정의는 폐기한지 오래다. 신학이 학문이 아니다는 입장은 전자의 정의를, 신학은 학문이다는 입장은 대체로 후자의 정의를 택하고 있는 것. 문단이 생긴지 오래되었고 수정도 많았지만 양 입장이 같은 말만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 #

물론 고전신학을 학문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어디까지나 실존적인 것만 학문적인 의논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이 신학을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비판 문단에서 칸트가 특수형이상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것 등)을 반박할때 고전신학은 인문학적인 의미의 학문성보다 신앙을 중시하기 때문에 현대신학에 비해 고전신학이 실존주의적 관점에 있어 학문성이 떨어져 보인다는 것이고 만약 실존적이지 않은 것(신앙)도 학문으로 논의가 가능하다는 관점을 가진 경우에는 고전신학도 학문으로써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원화된 현대신학은 특정 종교 신도의 신학에 대한 정의는 폐기하였지만 엄연히 서구에서도 고전신학은 여전히 존재하며 오히려 고전신학계의 규모가 더 크다. 신학계 전반에서도 특정 종교에 대한 신학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만약 그렇다면 신앙적인 종교계가 사멸하고 다원적인 학문적 논의만 존재해야한다. 당연하겠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실존주의에서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신학의 형이상학적 요소들도 엄연히 학문적으로 바라보는 신앙적인 관점이 여전히 존재한다. 오히려 종교계를 전반적으로 따져봤을 때 이런 고전적인 관점이 현대적 관점보다 우세하다. 당연하겠지만 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신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런 신앙적인 사람들이 매우 많다. 물론 머리 숫자가 진리를 결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론 문단을 자칫 오해하여 현대신학이 학문적인 신학에 가깝고 고전신학은 학문적인 가치가 떨어진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데, 오히려 현재 신학계는 고전적인 관점을 가진 신학자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고전신학에 대해 학문적 활동과 연구가 여전히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서 고전신학의 학문화가 굉장히 활발하다. 고전신학 또한 앞서말한 신학의 학문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고전신학을 여전히 중세적인 신학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즉, 고전적인 관점으로도 신학의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가 얼마든지 넘쳐난다. 오히려 종교계는 현대신학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왜냐하면 각 종교계에게 있어서 고전신학은 각 종교의 사유지 같은 개념이고 현대신학은 모든 종교의 공유지라서 상대적으로 연구와 적극성이 떨어진다.[12] 그렇기에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뿐이지 일반적으로 고전신학도 학문으로 분류한다. 실존주의 성향이 강한 학자들은 신학을 강하게 비판하나 그렇지 않은 학자들도 얼마든지 많아서 고전신학도 여전히 학계에서 학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대중들이 신학에 대해서 주로 고전신학을 연상하는 것도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신앙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필수적인 고전신학의 특성상 형이상학이 일부 포함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편견과 다르게 고전신학이라고해서 특수형이상학만 취급하는건 절대로 아니다.

신학이 근본적으로 특수형이상학에 해당한다는 의견 역시 마찬가지. 정말로 그런 의견이 학계에서 우세한지에 대한 문제는 제껴두고라도 어디까지나 신학의 정의를 종교적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고전신학에 한해서 성립되는 의견이며 상술했듯이 특수형이상학은 고전신학에서도 일부에만 해당된다. 신학은 특수형이상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신학은 고전 신학에 비해 범주가 많이 확장되었고 현대신학이던 고전신학이던 학문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기에 많은 나라의 학계에서 학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학은 새로운 시도를 위해 인문학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이 있다. 각 종교마다 각자의 사회를 이루고 있기에 어찌보면 필연적이다.

신앙을 학문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에서 형이상학의 범주 외라면 그건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이다라는 의견이 많이 보이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신학을 신론만 다루는 학문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이고 신학과 종교학은 다루는 영역이 거의 겹친다. 분파와 집중하는 부분, 논조가 다를 뿐이다. 게다가 어차피 신학과 종교학은 구별이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예를 들어 신학자가 종교사를 연구한다던지 비신자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던지 하는 일들이 많다.[13] 위에서 언급했듯 종교학은 비교종교학처럼 여러 종교를 포괄 연구하고 신학은 기독교학, 불교학으로 특정종교학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면 편하다. 물론 교계, 학계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어쩌면 미래에는 신학의 형이하학적 부분들이 종교학과 통합되고 남은 신학은 종교 내부에서만 살아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관점도 있지만 일단 현재는 신학은 분명히 관점 차이로 종교학과 구분되어 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고전신학도 형이하학적 비중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오히려 신학에 있어 형이하학적 부분의 중요성이 커지면 커졌지 신앙 때문에 그런 부분들을 내팽개칠거라는 편견도 잘못되었다. 교계에서도 신과 종교의 관계를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받아들이는 부류도 있을 정도로 스펙트럼이 매우 넓으며 "학문의 이름보다 학문의 범위가 훨씬 큰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에 신학과 종교학을 칼같이 구분하는 것은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신학의 범위가 꾸준히 확장되면 일반대중에게 종교가 더욱 친숙해지므로 종교계도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도 이름은 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산수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증명, 논리, 공간, 위상을 다루는 학문으로 발전했다. 게다가 허수, 복소수, 사원수처럼 실존하지 않는 개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이 실존하지 않아도(쉽게 말해서 보이지 않아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불가능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수학은 그러한 형이상학적 개념을 포함한 수 체계를 중심으로 짜여진 학문이다. 심지어 수학도 자연수를 숭배했던 종교집단인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력이 지대했으며, 비록 신비주의적 측면으로 국한되었지만 일부 영지주의자들과 카발라 계열 종파들도 수 체계를 신성과 접목했던 역사가 있기에 신학과의 접점이 있다. 현대 신학자들도 수 체계가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신론을 변증하기도 한다.

논란 문단의 "특정 종교의 관점으로 연구된 논문이 타종교나 비종교인들에겐 반쪽짜리 연구"라는 주장도 엉뚱하다. 고전 신학계의 논문과 연구성과를 비종교인들에겐 열람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아니고, 고전 신학계가 학문 체계를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니며, 애초에 근본적으로 교리 차이 때문에 관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연구자들이 숙지하고 있다. 근본적인 견해차가 없어져야 완전한 연구가 이뤄진다는 것인가? 논란 문단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자연과학에서도 학파들의 견해차가 존재하는데도? 어차피 연구자가 어떠한 종교적 관점을 가져도, 심지어 비종교인이라도 신학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은 상술했으니 또 언급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것은 논란의 인용처럼 환단고기는 진리적 명제로 삼고 학문적으로 탐구해도 마땅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환단고기의 경우는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이기에, 환단고기의 형성과정과 종교적 용례는 학문적으로 탐구할만 하지만[14] 그 내용 자체는 학술적 증거로서는 가치가 없는 사례다. 창조설도 비슷하다. 디시인사이드 무신론 갤러리에서 창조론과 창조설을 임의로 과학계와 종교계에서의 용례로 분리하여 취급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무위키에서도 이를 분리하여 서술하고 있기에 헷갈릴 수 있겠지만 자연과학계에서는 유사과학이지만 인문학에서는 종교학 및 문화학적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는 사례이다.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신학 전공이지만 불가지론자 교수가 있듯이, 단순히 신을 존재한다는 개인적인 믿음과 무관하게 그저 순수히 '신'에 대한 연구도 가능하다.

그리고 반론 문단에서의 첫 단락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형이하학만 학문이라는 대전제를 먼저 깔아두고, 신학은 형이하학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므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오류(전건부정의 오류)에 빠져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애초에 학문은 형이하학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형이하학만 학문이라고 여기는 사상적 조류가 경험주의인데, 경험주의가 현대 사회와 현대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을지언정 경험주의가 허용하는 학문만 학문이라는 합의는 경험주의 내부의 합의지, 학계 전체가 동의하는 합의가 아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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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로 현대 물리학에서[2] 역사학에서는 아무리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학설이 있어도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된 결과와 어긋난다면 폐기되기도 한다.[3] 반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모르는 것 뿐이라면 학문 분과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4] 논란 문단은 칸트가 특수형이상학에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언급했다.[5] 재미있게도 이러한 개념들의 기초나 기준을 종교가 정한 경우가 많다. 종교와 신을 부정할 경우 이러한 개념들을 준수할 근원적인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무신론도 꽤 비판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무신론 비판을 펼치는 학자로 조던 피터슨이 있다.[6] 말 그대로 역사를 보는 관점이다. 종교의 견해 차이와 비슷하다.[7] 이는 독일 철학자인 월터 아놀드 카우프만 (Walter Arnold Kaufmann, 1921 ~ 1980)이 종교와 신학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Walter Kaufmann, The Faith of a Heretic, (Garden City, New York, Anchor Books, 1963) pp. 114, 127–128, 130.[8] 이를 중요 교리로 채택한 신학자가 등장하면 새로운 종파 혹은 교파가 등장[9] 더 깊게 파고들자면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역사 속의 소크라테스에 가까운지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가정해서 대화편의 소크라테스는 순수 100% 소설 캐릭터라고 전제하더라도, 신에 대해 이야기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바뀌는 것일 뿐 본 항목의 논의와는 큰 연관이 없다.[10] 키케로 시대의 로마는 플라톤 시대의 아테네보다는 신들을 보편적 원리로 보는 시선이 더 강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인격신이라는 요소는 언제나 전제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밀라노 칙령 이후의 저작인, 다시말해서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쓰여진 「로마법 대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11] 재미있게도 일부 종교 비판자들 역시 같은 이유로 신학의 학문성을 부정한다.[12] 어디까지나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비유일 뿐이다. 각 종교계가 자신들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신념을 학문화시키지만 현대신학과 고전신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고전신학이 현대신학의 요소를 받아들이고 고전신학자들이 현대신학을 연구하는 등 각 종교의 신념을 지키는 선에서 경계가 점점 없어져가는 추세이다.[13] 이걸 문예학이라 해야 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지만 학계에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적으로 본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종교 경전을 목적으로 쓰여지고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련된 연구 대상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이 학술적으로 합리적인가?[14] 환단고기가 주류 역사학계에게 위서로 판명된 것처럼 기독교에서 거짓 경전으로 판명된 경전을 종교학 및 문화학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문이 위경학이다. 이 또한 신학의 하위 학문이다.[15] 다만, 재미있게도 경험주의 사조의 분파인 은사주의 계열 교파인 오순절교회나 오순절교회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개신교 교단들에서는 당연히 신학의 학문성을 긍정한다. 이쪽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성령이 주시는 감동과 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에 "성령이 주시는 계시의 매커니즘(5중 복음)" 같이 신학의 학문화를 매우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반인들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악상이 매우 기본적인 원리인 작곡학과 학문성이 비슷하다. 전통주의 사조의 분파이자, 축자영감설성서무오설을 중요시여기는 보수주의 장로회도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기에 이쪽도 신학의 학문성을 강조한다. 다만 이쪽은 성령이 성경과 조직신학을 통해 주시는 계시(특별은총)을 매우 중요시 여기기에 종교철학, 번역학, 통역학과 학문성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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