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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2:23:46

아이신기오로 이힌

애신각라 혁흔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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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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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녀
※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
<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愛新覺羅 奕訢
애신각라 혁흔
파일:Prince_Gong.jpg
시호 화석공충친왕(和碩恭忠親王)
별호 악도당주인(岳道堂主人)
애신각라 혁흔
아이신기오로 이힌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ᡳ ᡥᡳᠨ[1]
愛新覺羅 奕訢
출생 1833년 1월 11일
사망 1898년 5월 29일 (향년 65세)
지위 화석공친왕(和碩恭親王) / 육왕야(六王爺) ⇒ 의정왕(議政王)
부친 청 선종 도광제
모친 효정성황후
자녀 영수고륜공주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함풍 연간2.3. 신유정변2.4. 동치중흥2.5. 광서 연간
3. 평가4. 여담5. 가족 관계
5.1. 부인5.2. 자녀들
6. 대중매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9세기 청나라 제8대 선종 도광제의 제6황자이자 양무운동을 구상하고 기획한 정치인이다.

명청교체기 청군의 산해관 돌파와 중원 정복을 이끈 황부섭정왕 도르곤 이래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린 황숙이자, 서태후아치에너미였다. 본명은 만주어로는 이힌,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는 혁흔이며, 흔히 공친왕(恭親王, Prince Gong)[2][3]으로 불렸다. 서태후와 결탁한 소위 '청류파'라고들 불리는 수구보수 세력으로부터의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고, 민간에서도 귀자육(鬼子六)[4]이라고 불리며 경멸을 받았지만, 청나라의 개혁 의지를 가졌던 노련한 황족으로 오늘날까지 높게 평가되고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33년 도광제몽골 출신 후궁정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혁저가 모친인 효전성황후를 잃은 후, 정귀비의 손에 자랐기에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청소년기에는 차기 대권 다툼으로 인해 라이벌 의식이 다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혁흔은 어릴 때부터 제1차 아편전쟁으로 부황 도광제가 수모를 겪는 일에 울분을 쌓으며 자라면서도 청나라가 서양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져 있음을 냉정히 인식하고, 각종 서양의 신문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제왕학의 근본인 유학이나 무술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며 일찍부터 차기 황제감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혁저는 스승의 조언으로나, 스스로 느끼기로나 동생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임종을 앞둔 도광제에게 혁흔이 청나라의 국정 현안에 대해 물 흐르듯 읊은 것과는 달리 아버지가 아프신 것은 자식의 죄라며 일종의 감성팔이(?)를 시전하여 덕치와 인치를 실현할 황제감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결국 도광제가 붕어한 이후 건청궁에서 유조를 확인한 결과, 혁흔은 친왕에 봉하고 혁저를 황태자로 봉한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5] 그렇게, 도광제의 후계자로 혁흔이 아닌 혁저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암군 함풍제였다.

2.2. 함풍 연간

형에게 제위를 내줬지만
"선황께서 물려준 백홍도를 차고 다녀도 좋다."
는 허락까지 받을 정도로 능력은 높이 평가받아 함풍제 즉위 초부터 군기처에 들어갔고 몽고도통[6]을 겸직하며 종친 관련 업무까지 도맡았지만, 사실상 옹정제 시절의 8황자 염친왕 윤사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즉, 언제라도 트집을 잡혀 자살당할 수 있는 불안한 처지였다.

그나마 정태비로부터 친모 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고 자라 효성도 지극했던 함풍제[7] 덕에 함풍제의 치세 전반기에는 그럭저럭 지냈지만, 모친상 때문에 경황이 없었던걸 잘 알면서도, 함풍제가 어머니 장례 때문에 근무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군기대신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아무래도 잠재적인 역적 1순위로서 견제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8]

하지만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발칵 뒤집혔는데도 톈진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자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다이렉트로 두들기는 대사건이 터져 함풍제가 열하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서양 오랑캐'라면서 서양인들을 멸시하던 대신들은 함풍제를 따라 열하로 도망갔고, 공친왕이 베이징에서 남은 외교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베이징 조약이 그 결과로, 그는 영시위내대신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내각대학사 숙순 등의 권신들이 다 망쳐놓은 판이 원명원이 박살나는 것을 넘어 망국으로까지 이어지는 참화를 막기 위해 굴욕적이기만 한 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정은 공친왕의 북경 잔류파와 열하 몽진을 따라간 열하파로 쪼개지게 되었는데, 공친왕은 스스로 청나라판 토목의 변을 꾀한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용퇴를 청했으나 형 함풍제가 스스로 동생보다 못하다고 걷잡을 수 없는 질투에 빠졌는지, 열하에서 정무를 뒷전으로 밀어놓고 주색잡기에 몰두하며 현실도피에 빠진지라 자연히 조정의 실권은 내각대학사 숙순이 아닌 공친왕이 차지하게 되었다. 공친왕은 이 기회에 국가 개혁을 시도하려고, 서양 열강과의 근대적 외교와 외국어, 과학기술 등의 신식 교육을 추진하는 신설기관을 제창했으니, 그것이 바로 총리각국사무아문, 일명 총리아문이었다. 이것이 양무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던 중, 술로 세월을 보내던 형 함풍제가 해를 넘겨도 열하에서 돌아오지 않다가 끝내 붕어했다.(1861년)

2.3. 신유정변

함풍제는 죽기 직전 숙순을 비롯한 8대신에게 보정대신의 지위를 주고, '동도당'과 '어상'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각각 동태후와 동치제[9]에게 주었다. 이는 실질적인 정무는 보정대신들이 돌보되 최종 결정은 황제와 태후가 하라는 것이었지만 이 결정은 숙순과 서태후 모두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숙순 측은 "대청국의 천하를 어찌 여자가 다스릴 수 있느냐?"는 논리였고 권력욕이 강했던 서태후는 "역대 왕조의 전례가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었다.

양측의 투쟁이 이어지던 중 함풍제의 영구를 북경으로 옮겨야 했는데, 일단 동치제와 두 태후가 먼저 북경으로 돌아갔고, 보정대신들은 영구와 함께 돌아와야 했으므로 그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 서태후와 공친왕이 북경에서 계략을 꾸며 숙순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권력을 잡게 되었다.

2.4. 동치중흥

혁흔은 의정왕(議政王)으로 군기대신에 복귀하여 조카인 동치제의 사실상 섭정으로 군림했다. 또한 증국번, 이홍장 등의 한족 관료를 기용하여 양무운동을 지지하고, 동치중흥(東治中興)이라 불리는 청조 세력의 일시적인 부흥을 실현했다. 그러나 그 입장을 위협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서태후가 믿고 황제를 맡긴 사부 우키거리 워신[10]은 정통 보수파 유학자[11]였는데, 동치제의 양육과 교육에 있어 구시대적인 제왕 교육에만 골몰하고, 양무에 힘쓰는 혁흔과 그 밑에서 일하는 총리아문 관리들을 까내리며 매국노로 매도하는 인물이었다. 서태후는 그런 인물을 갈아치우기는커녕 혁흔을 제어하기에 좋은 도구처럼 쏠쏠하게 써먹었다. 동치 4년(1865년)에 혁흔은 서태후에게 참언을 했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의정왕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실각했지만, 머지 않아 복귀했다. 동치 12년(1873년)에 동치제가 원명원의 복원 공사를 발안하자 반대했기 때문에 다음해 동치 13년(1874년)에 황제에 의해 작위가 강등당할 뻔했지만, 서태후의 주선으로 철회되었다.

2.5. 광서 연간

광서 원년(1875년)에 동치제가 붕어하고, 조카인 광서제가 즉위할 때도 정권에 머물렀으나, 1881년 서태후와 함께 권력의 한축이었던 동태후가 훙서하고, 광서 10년(1884년)에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서전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서태후에 의해 군기대신·총리아문대신에서 파면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순친왕과 사촌동생인 경친왕이 취임했다. 그러나 광서 20년(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리아문과 총리해군의 명을 받아 외교와 군무를 통괄하고 군기대신으로 복직하여 국난을 감당했으나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맞이했고, 4년 후인 광서 24년(1898년) 6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일본 제국에게 패전한 후 더욱 급진적인 변법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광서제에게 간언하여 황제가 밀어주던 옹동화 등의 급진개혁파를 견제[12]하면서도 보수파를 등에 업은 서태후에게 퇴위를 요구하던 광서제와 서태후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빡친 서태후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나이가 많고 몸도 성치 않았던 혁흔의 죽음으로 양파의 대립은 결국 표면화되어, 무술정변이 일어났다. 양계초
"공친왕의 죽음이 양측 모두에게 큰 관건이 되었다."
라고 평가했다.

작위는 손자인 부위가 계승했다. 장자였던 재징은 아버지 혁흔보다 앞서 1885년에 사망했고, 차남 재형의 아들인 부위가 백부 재징의 양자로 입적되어 1898년 작위를 어어 받았다.

3. 평가

도광제함풍제의 보정 8대신을 비롯한 청나라 황족들이 시대에 뒤쳐진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동안 청나라의 명운을 멱살잡고, 끌어올리려고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당대에는 공친왕이 양이[13]라는 말을 과감하게 포기하며 제창한 양무라는 말조차도 "오랑캐를 뭐하러 본받느냐?!"며 "저런 미친 소리를 하는 공친왕은 황자가 아니라 귀자다."라고 하는 패드립이 나왔을만큼 중화사상에 취한 중국인들에게 평생까임권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형 대신 혁흔이 제위를 이어받아야 했다"는 한탄이나 가정이 나올 만큼 평가가 후해졌다.

특히 중국에서는 시간이 지나서야 평가가 오른 반면, 청나라를 건드리던 제국주의 서양 열강들의 영향으로 외국에서의 평가는 예전부터 높았다. 서양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오랑캐로 업신여기지 않는 유일한 황족이었으니 충분히 그럴만도 하다. 귀자라는 말도 서양에서는 공친왕을 까는 게 아니라, 공친왕을 업신여기는 중국인들에 대한 조소 내지는 공친왕에 대한 동정의 의미로 주로 쓰는 편이다. 그러나 서태후의 권력욕을 과소평가하고, 첫 발을 잘못 디딤으로써 권력 유지를 위해 그 무슨 짓도 자행할 수 있는 서태후와 그녀를 중심으로 뭉친 보수파와의 세력 다툼에서 열세에 밀린 점, 그리고 청나라가 정체된 사이 급변하고 있었던 국제 정세가 너무 안 좋게 흘러갔던 점 등의 여러 악재로 인해, 양무운동으로 대표되는 공친왕의 개혁 의지는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신문물을 도입하고,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며, 어린 유학생을 뽑아 서양에 보내는 등 개혁에 열정적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청나라의 황숙이라는 한계가 분명했기에, 전제군주정이라는 국체와 중화사상으로 뭉친 동아시아의 화이 질서를 포기하는 데엔 소극적이었다. 공친왕은 그의 대표적인 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총리아문과 예부의 공존이라는 2중적인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 이로 인하여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지배층이 통치하고 있었던 이웃 나라 조선은 더욱 오랫동안 중화사상에 취하면서, 종국에는 (중국도 일단은 모면한) 일본 제국에 의한 국권 침탈이라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14]

오죽했으면 고종이 총리아문을 불신하다가 "서태후가 밀어주는 이홍장이라는 한족 관리가 뜨고 있다"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공친왕과 손절한 후 이홍장에게 연줄을 댔을 정도였다. 총리아문과 예부라는 불안정한 2중 외교체제는 고종이 주목한 이홍장에 의해서도 고쳐지지 않아 한나라삼국시대 이래 잃지 않았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으며, 류큐 왕국이 일본 제국에 병탄되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15] 훗날 대만마저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혁흔이 제위를 이어받았어도 20세기 중반 이후로까지 제국을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힘을 얻기도 한다. 대체로는 국제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별개로, 실무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개혁 의지를 관철하기에 부족한 정치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서태후와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지만, 대체로는 애증이되 '애'보다는 에 가까운 관계였다. 공친왕이 정권을 잡는데는 서태후의 권유가 결정적이었으며, 섭정의 자리를 반납당한 것 또한 서태후의 견제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서태후에 의해 아이들이 동치제와 함께 양육[16]되었고, 서태후의 동생인 계상(桂祥, 예허나라 구이샹)이 공친왕을 사부로 모셨을만큼 개인적으로도 얽혀있는 관계였다.

동치 연간에는 초토화된 원명원의 복원을 반대하면서도 개인 계좌에서 20,000냥을 인출하여 헌납하면서 "국고만은 쓰지 마십시오"라고 충언을 했지만, 어머니인 서태후에게 효도 좀 해보려던 조카 동치제로부터 차라리 황위를 내놓을까 하며 역적 대접이나 받고, 세습망체의 친왕작이 군왕작으로 강등되었다가 서태후가 신하들의 술렁이는 반응에 못 이기는 척 복권을 권해서 친왕작을 회복하기도 했다.

특히 동태후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갔던 점이 서태후에게는 굉장히 눈엣가시였다. 이는 공친왕 혁흔의 차남이었던 재형(載瀅)이 동치제의 붕어 이후, 방계승통을 이어나갈 종법상의 적절한 황제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신유정변 때 행동대장 노릇을 했던 순친왕 혁현의 꼬맹이 외아들 재첨(載湉)을 뺏어다가 황제 겸 인질로 삼으며, 순친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공친왕을 견제하게 하고, 동태후의 석연찮은 사망 이후 승전보도 전해오면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그런대로 분전하던 청불전쟁에서 이홍장을 시켜 강화를 한 후, 공친왕에게 복건함대 전멸의 책임을 묻는 서태후의 노련한 술수로 이어졌다.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러시아에게 뺏긴 점, 양무운동을 계기로 한족들이 본격적인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면서 만주족의 민족 정체성이 흐려져갔다는 점 등을 아쉽게 여길 수 있지만, 사실 이는 만주족이 지난 100여 년 동안 정체성을 재고하는 데 무관심했던데다가 청나라 국정의 무능력으로 쌓이고 쌓여왔던 적폐가 크게 폭발한 것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만주의 기상을 가르치는 청 황실의 제왕 교육에서 우수한 실력을 뽐냈던 공친왕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설령 만주족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청말의 황족 한 사람에게만 묻는다하더라도, 공친왕보다는 꼭두각시 황제들의 제왕 교육에 무관심한 채, 권력의 단맛에만 취했던 서태후에게 묻는 것이 적절할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서태후보다도 마카오에서 예수회 수도자들이 끊임없이 들여오며 소개하던 서구의 신문물을 사적인 유희거리로만 여기고, 중화사상에만 취한 채 근본적인 개혁을 방임했던 강건성세 이래의 역대 황제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라의 명운이 달린 격동의 시기에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킨 이들이 받는 충(忠)자를 붙인 공충친왕(恭忠親王)으로 추봉되고 태묘에 배향된 데서 알 수 있듯[17], 여러모로 현실에 냉정하게 대처하며, 청 왕조를 구해내려고 분투한 마지막 황족 명신으로 꼽히며, 오늘날 중국에서도 "변법파를 견제하며, 전제군주정의 유지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라는 등의 이런저런 비판은 받을지언정, 서태후보다 심하게 욕을 먹지는 않는다.

다른 청말민초의 황족들과 비교해봐도 공친왕만큼 주도적으로 국정에서 목소리를 내며 성과를 낸 인물은 거의 없다. 혁광은 청나라를 팔아먹은 '만청제일탐관'이라는 혹평을 들을 지경이었고, 동생인 순현친왕 혁현은 서태후로부터 아들을 지키는데에 급급했으며, 조카였던 광서제는 그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100일 천하로 끝나 유폐되었다가 독살당했다. 또한 다른 조카인 재풍도 꼬맹이 황제인 선통제 부의를 가슴에 안고 중흥을 꾀하기엔 이미 나라가 다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복벽운동을 한다며 일본 제국에도 손을 벌렸다가 훗날 딸 [[카와시마 요시코]가 만주국의 남장 간첩으로 성장하게 만든 숙충친왕(肅忠親王) 선기 같은 인물들도 그리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실질적으로 망해가는 청나라의 아이신기오로 종친들 중에서는 식견, 능력, 성과 등 여러 면에서 가장 우수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비슷한 시기 조선을 이끌던 흥선대원군에 비해 훨씬 좋은 대접을 받는다. 청나라의 중원 정복을 이끈 공로로 같은 시호를 받은 옛 개국공신 섭정왕 도르곤과 여러모로 비슷한 포지션이지만, 효장문황후와 궁합이 잘 맞아 난세였던 명청교체기의 국정 운영에서 탄력을 받았던 도르곤과는 달리 서태후의 권력욕에 밀려나며 고생을 해야 했던 비운의 황숙이 공친왕 혁흔이었다. 어찌 보면 실패한 도르곤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다. [18]

4. 여담

제6대 고종 건륭제의 부패한 총신이었던 니오후루 허션이 제7대 인종 가경제에게 숙청당하면서, 화신의 가산이 국고가 아닌 내탕금으로 몰수되었고, 그가 살던 북경의 대저택도 황실 자산으로 귀속되었다. 이후 이 저택은 건륭제의 막내아들이자 가경제의 동복 아우였던 황17자 경의친왕 영린에게 하사되었으나, 30여 년이 지나 제3대 경군왕인 혁채가 부패 혐의로 작위를 박탈당해[19] 가산이 몰수되면서 저택 역시 다시 황실에 귀속되었는데, 제9대 문종 함풍제가 즉위한 후 이 저택을 이복동생인 혁흔이 물려받아 오늘날에는 공왕부(恭王府)로 남아있다.

아예 부지에 칭화대학이 들어서버린 돈왕부나,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티베트 불교이 된 옹왕부 등 여러 왕부들이 헐리거나 개조당한 것과는 달리, 공왕부는 오늘날에도 북경에서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왕부로 꼽히며, 많은 중국 드라마 세트장의 원형이 되었다. 중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면 이곳에 처음 왔어도 낯익어보일 정도로, 예전에는 공왕부에서의 직접 촬영이 흔했지만, 문화재 보존 의식의 함양으로 지금은 영상물 촬영이 전보다는 드물어졌다.
젊은 강희제가 중병에 걸린 조모 효장문황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목욕재계한 후, 친필로 쓴 '복'()자 앞에서 3일 밤낮으로 기도하자, 조모가 쾌차하여 그 후로도 10수년을 더 장수했는데, 훗날 건륭제가 조부인 강희제의 친필 '복'()자가 새겨진 비석을 화신에게 하사하면서 화신의 인생이 활짝 폈다.
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복자비[20]를 비롯해 많은 유적이 남아있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및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되었다. 공왕부에 가보면 사진은 물론 실물 인형까지 전시되어 있는 공친왕 혁흔만큼의 체감은 아니지만, 간신배였던 화신이 남긴 흔적도 상당히 많다. 또한 《홍루몽》의 공간적인 배경이 된 부잣집이 현실에서는 화신의 저택이었다는 설도 전해지는지라, 《홍루몽》을 읽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한편 서태후의 수양딸이었던 영수고륜공주가 바로 공친왕 혁흔의 장녀였다. 처음엔 서태후를 닮아 포악한 성품이었다지만 부찰 지단(富察 志端)[21]이 요절한 후, 성격이 차츰 부드러워졌고, 이후 폭주하는 서태후에게 제동을 걸었다. 특히 무술변법 전후로 광서제를 폐위시키려 했던 서태후를 극구 말렸다.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여 한 대를 건너뛰고, 공친왕작을 계승한 손자 부위[22]는 자신보다 어린 순친왕가의 해외 유학파 출신 황숙들이 안전한 퇴위와 황실의 안위 보장에 골몰할 때, 당장 있는 군대를 싹 긁어모아 원세개 및 혁명군 토벌에 나서야 한다고 우겨댔을 정도의 열혈 복벽파였다. 심지어 부왕인 혁흔의 시절부터 모았던 문화유산을 일본 상인에게 전부 팔아넘기는 바람에, 미국 뉴욕에서 공왕부의 문화재들만으로 대규모의 경매가 열렸을 정도였다. 그렇게 가산을 있는대로 털어 만몽독립운동을 추진해 만주국 수립의 결실을 보고 사망하여 '공현친왕'으로 추봉되었으나, 제3대 공친왕이자 혁흔의 증손자였던 육첨은 이 집안 내력이 문제가 되어 중년의 나이에 문화대혁명에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래도 육첨은 2016년까지 93세의 나이로 장수했다.

5. 가족 관계

5.1. 부인

5.2. 자녀들

6. 대중매체

<일생위노>, <제국의 눈물>(원제: 홍장녹와) 등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진보국이었는데, 참고로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역은 왕강이 맡았다. 조선 사극에서 수양대군 때문에 형 문종 역의 배우가 중장년으로 묘사되는 현상이 여기서도 빚어진다. 1861년 신유정변 직전인 베이징 조약 시기의 공친왕 혁흔의 사진을 보면 수염도 별로 없는 평범한 20대 후반 남성의 외모였지만, 베이징 조약에 나서는 배우는 거의 아버지뻘이다. 호사가들의 what if 놀음에 의해 혁흔이 황제로 즉위했다면 청나라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상상하는 대체역사물은 의외로 적은 편이지만, 홍콩이나 대만 등지에서는 서태후와 공친왕의 불륜을 그려내는 창작물도 나왔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서태후를 아주 보내버리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홍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조선의 중재로 만주에 신설된 동삼성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사실상 좌천된 것이지만, 천명이 아이신기오로를 떠났을 때 "중원에서 쫓겨날 동포들의 터전을 미리 가꾼다"는 생각으로 정무에 열중하여 다방면에서 본인도 놀랄 정도의 성과를 보았다. 그래서 "대청 부흥이니 뭐니 집어치우고, 아예 이대로 독립하여 칸 노릇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도 했지만, 조카인 광서제의 고군분투를 보고 결국 청나라의 충신으로 남아, 실제 역사처럼 공충친왕(恭忠親王)으로 추봉된다. 여기서는 서태후와도 손절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아서 실제 역사보다 오래 사는 등 상당히 버프를 받았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어째 실제 역사에서보다도 더 불쌍하게 그려진다. 불곰국과 폭군 고종대왕 치세의 조선, 태평천국으로 모자라 서태후, 이홍장, 셍게린첸 등의 깽판으로 인해 딸을 고종에게 시집보내면서 도르곤과 의순공주 사이의 국혼이 거꾸로 그려지고, 조선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공친왕(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항목 참조. 그래도 원역사에 비하면 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펄 벅 여사의 작품인 《연인 서태후》에서도 상당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후궁 시절의 서태후에게 국제 정세와 정치를 가르치며, 특히 유약하고 일이 잘못되면 아편을 삼키겠다고 울부짖는 함풍제와는 달리 침착하게 서양의 침략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치제 즉위 이후로는 때때로 서태후에 대한 견제에 나서 서태후의 뒷배만 믿고 횡포를 부리던 환관 안덕해를 동태후의 명령을 받아 참수당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서태후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하면서 비중이 줄어든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경친왕 혁광이 공친왕의 아들로 묘사되는데 이는 엄연히 틀린 사실이다. 아마 '혁' 자 돌림을 성으로 오해한 것 같다.[23]

1995년 홍콩에서 개봉한 <외전혜옥란>[24]에서는 배우 양가휘가 공친왕 역할을 맡았다. 위험에 처한 자희를 구한 인연으로 청혼까지 하지만 그녀가 입궁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조금 받았어도, 황제의 승은을 입고도 마음이 약해지는 그녀를 안아주기는 커녕 되려 모질게 대한다.[25] 그녀는 결국 자신을 이용해 조정을 장악하지만 얼마 안 가 공친왕이 토사구팽을 당한다. 구숙정이 서태후로 출연하는지라 단순 19금 영화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권력을 탐하다가 나중엔 권력의 화신이 되어가는 서태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된 영화다. 특히 이 영화에서 양가휘는 섹시하면서도 비정한 공친왕을 매력적으로 연기했다.[26]

7. 둘러보기

청사고(淸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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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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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출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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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말민초 및 20세기부터 관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구개음화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이41으로 표기하고 발음한다.[2] 공친왕작은 원래 청나라 역사에서 이전에도 임명된 바 있는 작위였다. 제3대 세조 순치제의 5남이자 제4대 성조 강희제의 이복동생이었던 상녕이 공친왕으로 임명된 바 있었는데, 상녕이 준가르의 갈단 칸과의 결전에 나섰다가 참패하자 강희제가 격노하여 작위를 박탈해버렸다.[3] 이 Prince Gong이라는 영어 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에 제정된 한어 병음에 따른 것으로, 19세기 근고한어 시대에 작성된 북경조약 등의 공문서 영문본을 비롯한 서양측 문서에는 Prince Kung으로 표기된 경우가 더 많다.[4] 귀자(鬼子)는 당시 외국인들에 대한 멸칭으로, 서양인들은 '서양귀자', 일본인들은 '일본귀자' 등으로 불렀다. 따라서 '귀자'라는 호칭은 외국에 빌붙은 매국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은 집안에서의 서열이 6번째라서 붙은 것이었다.[5] 후계자를 지명하는 공문서인 '건청궁 유조'에서 다른 황자를 일부러 황제 다음가는 친왕에 봉하는 예는 청나라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예는 제4대 성조 강희제가 황4자 윤진에게 (자신이 유폐시킨 황태자 윤잉에 대한 죄책감으로) 윤잉의 가족들을 잘 챙겨주라 당부하고 제5대 세종 옹정제가 부황의 유언대로 윤잉의 가족들을 잘 챙겨준 것밖에 없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아비의 허물을 황족 자녀들에게까지 연좌하지는 말라는 (누르하치와 슈르하치 시절부터 이어진 집안 전통에 따른) 뜻이었을 뿐 황8자 윤사나 티베트에 나가 있었던 황14자 윤정에 대한 조치까지 강희제가 일부러 못박은 것은 아니었다.[6] 어머니가 보르지기트씨였으니만큼 몽골 왕공들과도 인맥이 있었다. 이 시기에 떠오른 대표적인 몽골 인맥이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었다.[7] 임종 직전에는 아예 정태비를 황태후로 높였고, '효정황후'라는 시호까지 올렸다. 청나라에서 황제의 대복진도 아니고, 차기 황제의 생모도 아닌데 황후로 대우받은 보기드문 사례였다. 다만 아무래도 약간 애매한 지위 탓에 효정'성'황후라는 도광제의 시호를 붙이는데는 이르지 못했는데, 이 '성'자는 동치 연간에 공친왕의 버프로 붙어 '효정성황후'라는 정식 시호가 나왔다.[8] 어머니 임종 직전에 황후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어머니의 넋두리를 듣고, 황태후로 높여달라며 공친왕이 형 함풍제 앞에 찾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 설도 있다. 함풍제 스스로도 자신을 키워준 양어머니가 눈을 감기 전에 황태후로 모시려 했으나 그걸 공친왕이 먼저 요청한터라 단단히 삐졌고, 결국 함풍제가 양어머니를 황태후로 존숭하기는 했으나 공친왕이 먼저 선을 넘은 책임을 지고 군기처를 나와야 했다고 한다.[9] 사실상 서태후가 담당했다.[10] 오제격리 왜인, 烏齊格里 倭仁[11] 국구인 알루트 초치와 함께, 보기 드문 몽골 출신 진사였다. 하지만 여느 한족들보다도 훨씬 원리주의적으로 성리학을 맹종했으며, 깊은 학식을 바탕으로 많은 한족 유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12] 황제가 신임하던 이들 변법파에서 추진하던 개혁이 사실상 청나라의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외국과의 합방론까지 나올 지경이었으니 청나라 황족으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었다.[13] 서양 오랑캐[14] 병인박해로 인해 일어난 병인양요 때는 "불란서는 무서운 놈들이니 천주교고 뭐고 알아서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경고를 보냈지만,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응답했다.[15]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대권 후보 시절, 공친왕과 이홍장을 직접 만나 조정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미국인인 그랜트가 중국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리 없었고, 그는 오히려 "일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고 판단했다.[16] 큰딸 영수고륜공주는 아예 서태후의 수양딸로 입적되었고, 아들들도 자금성에서 동치제와 함께 공부하며 자랐지만, 재징과 재형이 동치제와 친하게 지내는걸 아니꼽게 여긴 서태후가 측근 환관들을 시켜 왕따를 시킨다거나, 동치제가 모후한테 혼날 때마다 아무리 어미라도 황제에게는 매를 들 순 없으니 황제 대신 회초리를 맞는 등 자금성에서 고생만 했다.[17] 이라는 시호는 사실 공친왕의 사망으로부터 한 달도 안되어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 광서제가 실권을 행사하는 동안 받은 시호라 광서제의 개혁에 대한 의지가 엿보이지만, 무술변법이 100일 천하로 끝난 후에도 유지되었다. 개혁파에게는 서양의 침략을 저지하고, 양무로 적폐를 일신했기 때문에 높이 인정받고, 보수파에게는 나라 안팎의 적들을 막으려고 힘쓴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아 인정받는 최고의 시호라고 하겠으나, 살아있을 때 쌍방으로부터 매국노니 적폐니 욕먹었던 걸 생각하면…[18] 하지만 도르곤은 자손을 두지 못했고 사후 부관참시 당했다.[19] 다만 친척인 아이신기오로 이쾅이 다시 패자, 패륵, 군왕, 친왕으로 승급하며 경친왕작을 회복했다.[20] 원래 자는 으로 새겨져 있었으나,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만지고 가서 금박은 다 벗겨져버렸고, 유리를 씌워 보존해놨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은 다들 유리라도 만지고 간다.[21] 1861년 신유정변 때 축출당한 부찰 경수와 수은고륜공주의 아들로, 영수고륜공주에겐 고종사촌이었다.[22] 생부는 혁흔의 2자 재형이었는데, 재형은 제8대 선종 도광제의 황8자 혁합의 사후 양자로 출계했다가 형 재징이 요절하는 바람에 장자인 부위를 형의 양자로 출계시켜 공친왕작을 잇도록 했다. 그러나 혁흔 사후에 터진 의화단의 난에서 서태후가 의화단과 연통하던 황족들을 대거 손절하면서, 버이러 작위를 박탈당하고 공왕부에서 말년을 보냈다.[23] 사실 실제 청나라 때의 만주족은 중원 입관을 기점으로, 이름의 첫 글자를 한족식 한글자 성처럼 쓰는 수명성 문화가 생겨났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24] 원제: 慈禧秘密生活(자희비밀생활)[25] 그 예로 궁중 살인사건의 목격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고, 옷과 소지품까지 모두 우물에 버리는 등 증거까지 인멸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26] 참고로 당시 양가휘가 다작을 하면서 코믹한 이미지로 굳혀지는 것을 우려한 이한상 감독이 그를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게다가 <연인>으로 섹시한 이미지까지 굳혀져 그에게 들어오는 작품들 중에는 3급물(19금)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다작을 줄이고 연기에 집중하기 위해 고른 작품이 이 영화와 <수호전지 영웅본색>이다. 두 편 모두 수작이고, 양가휘의 연기력이 돋보인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