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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7:38:34

양상문/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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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롯데 자이언츠 코치 1기 시절2.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3.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 시절4.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시절6. 롯데 자이언츠 코치 2기 시절7. 야인 시절8. LG 트윈스 감독 시절9. 롯데 자이언츠 감독 2기 시절10.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11. 한화 이글스 코치 시절
11.1. 2024년
12. 지도 스타일

1. 롯데 자이언츠 코치 1기 시절

태평양에서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친 직후인 1994년에 8년 만에 고향팀 롯데로 다시 돌아와 1군 투수코치로 재직하다 1997년 시즌 후에 한번 잘리고[1] 1998년 한 해를 백수로 지낸다. 그러다 1999년에 다시 롯데로 돌아와서 2001년까지 투수코치를 했다. 이 시기에 신고선수 출신의 박지철과 삼성에서 이적한 박석진을 전천후 스윙맨으로 키워내고 에밀리아노 기론의 투구폼을 약간 보정해 주면서 롯데의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한다.

참고로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중 펠릭스 호세 퇴장 사태 당시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선수단 철수를 주도했던 박정태를 뜯어말린 사람이 바로 양상문 코치였다. 구단 직원까지 막무가내로 밀쳐내며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외야 출입구로 나가려던[2] 박정태를 홀로 막아섰다. 박정태가 훗날 이 상황을 회상했는데 "당시에 아무 것도 주변에 보이지 않았는데 옆을 보니 양상문 코치님이 계셨다"고 말했다. 양상문의 설득에 넘어간 박정태와 롯데 선수단은 결국 덕아웃으로 발길을 돌렸고 선수들에게 "오늘은 무조건 이겨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주형광, 박지철, 박석진, 손민한, 김태석 등의 성장에 도움이 돼었다. 손민한은 "희망이 안 보였던 제 야구인생에 새로운 빛을 찾아주신 분"이라고 양상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고 양상문이 후에 롯데 감독이 될때 다시 만나서 커리어하이를 찍고 리그 MVP까지 수상했다.#[3]

2.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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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LG 트윈스 코치시절

그 후 2002년 LG 트윈스로 팀을 옮겨 김성근 감독 밑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 전 시즌 팀 방어율이 5점대를 넘으며 막장이 된 LG 투수진을 개선시켜 팀 방어율을 3점대 중반으로 낮췄고, 이동현[4]의 포텐을 터뜨렸고 류택현큰 승호[5]#, 심지어 엘팬 모두가 포기했던 김민기, 경헌호까지 각성시키며 LG의 좌투수난, 불펜투수난을 해소시킨 업적을 남겼다. 적어도 2002~2003년에는 뛰어난 투수코치라는 평판을 얻었다.

이 당시 김성근 감독도 투수코치로서 양상문의 능력을 거듭 높이 평가했으며 투수 관련 권한은 모두 양상문에게 일임했었다. 지금도 김성근 감독은 의외로 양상문의 코칭 능력을 준수하게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훗날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아직 병역을 필하지 못해 해외 전지훈련에 가지 못한 고효준의 전담 인스트럭터로 양상문을 붙여준 적도 있다.

3.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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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롯데 자이언츠 감독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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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한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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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대학 후배 선동열과 함께.

2003년 시즌 종료 후, 백인천의 후임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취임 당시 나이가 불과 42세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LG 트윈스의 신임 감독에 부임한 1961년생 동갑내기 이순철과 더불어 현직 최연소 감독이었다.[6]

참고로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부산고 출신 감독이다. 그 전까지는 경남고와 부산상고 출신만 감독을 역임했다. 당시 롯데는 8888577의 절정기로 전년도 성적이 딱 3할을 간신히 찍었던 막장의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2004년 시즌에 팀을 맡았던 양상문 감독 체제 하에서 롯데는 그 해도 꼴찌로 끝마치긴 하였지만, 막장이었던 전년도에 비해 50승을 기록했고 승률을 4할대로 끌어올리며 나름 고무적으로 마무리했다. 이어 2005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4년만에 팀이 선전하자 엄청 많은 부산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와주었고, 특히 4회까지 0대8로 뒤지다가 13대11로 승리한 LG와의 5월 26일 경기에 부산 팬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결과적으로 4년 연속 꼴지의 사슬을 끊고 5위를 기록하고 신인 선수들을 키워내 롯데 부흥의 기틀을 잡은 터라 재계약이 유력해 보였으나 구단의 새로운 투자계획이 발표되면서 재계약이 무산되었다. 롯데 팬들은 물론 야구계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7]

사실 이 시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상당히 호의적인 편인데, 일단 4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던 팀을 이듬해 5위로 끌어올렸고, 백인천 시절 트레이드당할 뻔하는 등 부진에 빠져 있던 에이스 손민한을 다시 일으켜 세워 2005년 MVP를[8] 타게 하기도 했으며, 이대호[9], 박기혁, 강민호,장원준[10], 최준석, 김주찬, 이원석[11] 이정민, 이정훈, 이명우, 이왕기 등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는 등 리빌딩에 꽤 공헌했다는 평가다. 여하튼 그의 재임기간에 롯데가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막장팀에서 그래도 미래가 존재하는 팀으로 바뀐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로이스터 시절에 롯데가 상위권으로 도약한 데는 양상문 감독 재임 시절의 리빌딩이 기여한 바가 분명히 있다. 그의 뒤를 이은 강병철 감독이 다시 77을 기록한 것도 고평가에 한몫했다.

물론 어두운 면도 있다. 가장 큰 것은 리빌딩 과정에서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고참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더구나 그 본보기가 공교롭게도 박정태였던지라 당시 일부 롯데 팬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욕을 얻어먹었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쾌조의 컨디션이었던 박정태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개막 엔트리에서 빼버리고 롯데 2루수급 자원들이 돌아가면서 줄부상을 당해도 끝끝내 박정태를 올려서 쓰지 않고 외면했다. 당시 롯데 주전 2루수였던 조성환이 4월 24일 LG전에서 사구를 맞고 손등 골절로 시즌 아웃되고 난 후, 대체 자원인 신명철박준서까지 죄다 줄줄이 부상으로 쓰러져 2루수 자원이 바닥인 상태에서마저도 끝끝내 박정태를 올려 쓰지 않고 그 해 입단한 대졸 신인 박진환을 올렸고, 또다른 베테랑 박현승 또한 양상문 감독 재임기간 중에는 거의 전력 외 취급을 받았다. 꾸준히 1할대의 타율을 마크하던 박기혁은 전 경기를 선발로 기용하면서도 고참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자, 롯데팬들이 참다참다 5월달부터는 롯데 구단 홈페이지 갈매기 마당에 '박정태 1군 등록 릴레이'를 펼치고 심지어 홈경기 외야석에 '우리는 악바리 박정태를 원한다' 는 플랜카드를 걸고 시위까지 벌이며 농성을 벌였다. 결국 박정태는 8월 초에야 1군으로 콜업될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양상문은 어쩌다가 한 타석씩 대타로만 기용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12] 그러나 당시 팀을 장기적인 계획하에 리빌딩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노장 박정태를 배제하고 신진 선수들을 기용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팬들의 수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상문은 이 기조를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특히 감독 첫 해인 2004년 당시 아직 포텐이 터지지 못한 이대호, 김주찬, 박기혁 셋은 거의 전 경기를 선발출전해 양상문과 더불어 죽도록 까였다. 당시 이대호 기용에 대한 롯데팬들의 울분

다만 상술했듯이 의도적으로 박정태박현승 등 베테랑들을 배제한 것이 이듬해 패착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욕을 먹어가며 키운 어린 선수들이 시즌 초반 선전해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5월부터 연패를 거듭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양상문 체제 하에 베테랑들이 정리되거나 부진한 롯데로서는 위기에서 중심을 잡고 이끌어 줄 리더십이 부재했다. 결국 다시는 상위권으로 올라갈 탄력을 받지 못하고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후임 강병철 또한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편이라,[13] 강민호를 전 경기 선발출전시키며 밀어줬고, 전역한 김주찬 또한 죽도록 욕을 먹어가며까지 끝까지 기용했으며, 정보명이나 이승화, 이인구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해 기회를 주면서도, 전임 양상문과는 달리 고참을 기준없이 홀대하지 않고 최소한 공정한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양상문 재임 기간 동안 경기를 거의 뛰지 못해 은퇴 위기에 내몰렸던 노장 박현승은 강병철 감독 밑에서 다시 기회를 얻어 2007년 0.325의 타율을 기록하며 가까스로 부활할 수 있었다.

비록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팀 성적을 전년도 꼴찌에서 5위로 끌어 올리는 등 리빌딩의 성과가 보이자 프런트는 상위권 전력이라고 오판을 하게 되었고, 양상문 감독과의 재계약 대신 롯데의 2회 우승을 이뤄낸 강병철을 다시 데려 오게 된다. 당시 야구인들은 양상문의 재계약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었고 구단 간부들 조차 "서울에서 나온 보도자료를 보고 알았다"고 할 정도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이번 감독 교체가 올해 롯데의 전력과 성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구단의 내년 시즌 성적에 대한 지나친 '조급증'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감독 마다 '색깔'이 서로 다른 만큼 강 신임감독이 자신의 스타일 대로 팀을 재편할 경우 양 전 감독이 지난 2년간 주력한 롯데의 '체질 개선'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찮았다.

게다가 프로야구계의 '관례'에서 벗어나 마무리훈련을 시작한 후에야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경질을 발표하고 '전화 한통'만으로 감독 경질 사실을 통보한 것은 선수단 보다는 구단의 입장만을 생각한 처사라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롯데 구단으로부터 예의 없는 대접을 받은 것. 실제 부산 사직구장에서 마무리훈련을 하고 있는 롯데 선수단은 감독 교체 후 크게 술렁였다.#
마무리 훈련에 들어가고나서 경질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팀과 계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팀을 구할 수 없던 양상문은 mbc 해설위원으로 2006년에 활동했다.

총평을 하자면 전임 백인천에 의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롯데를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5위로 끌어올리고 유망주들을 키우며 미래가 기대되는 팀으로 만들었던 부분은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 평가들은 뎁스 육성이 절실했던 LG 감독 시절에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4.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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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LG 트윈스 코치시절

2007년부터 2008년까지 LG 트윈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첫 해인 2007년에는 2년 연속 꼴찌를 달리던 팀 방어율을 6위로 끌어올렸으나, 2008년 도로 꼴찌[14]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사실 이 시기는 이순철이 팜부터 1군까지 팀을 싸그리 초토화시킨 이후 후폭풍을 맞고 있던 시기라 코치 입장에서 뭘 어찌할 도리조차 있었을 리 만무하고 2007년만 해도 제대로 된 선발은 봉중근[15], FA로 데려온 박명환[16] 외에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정찬헌, 정재복만 건지는데 만족해야 했다.

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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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9~2017).svg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시절

2009년에는 정영기 감독을 이어 롯데 2군 감독이 되었다. 2009년 롯데는 2년 연속 2군 남부 리그를 우승했다.[17] 박정태로 감독이 교체된 이듬해인 2010 시즌에도 롯데 2군은 퓨처스(구 2군) 남부리그 4위를 기록했다.

2009년 2군 감독으로 성적과 육성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들었다. #

성적 이상으로 선수 육성에 방점이 찍히는 2군에서 화수분처럼 자원을 배출시켜서 1군을 지원했다. 포수 장성우, 내야수 김민성 박종윤 문규현, 외야수 박정준 손아섭 전준우 등이 급성장해 1군의 부상 도미노를 받쳤다.

롯데 로이스터 감독이 2군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꿨다. 2008년만 해도 ‘2군은 마이너’란 인식이 강했지만 2009년엔 “써보니까 2군도 잘 하네”로 변했다. 이젠 로이스터가 11월 직접 2군‘시찰’을 예고할 정도로 변했다.

무엇보다 2군 선수들이 하려는 의욕을 갖게 된 점을 양 감독은 가장 소중한 수확으로 꼽았다. 그러나 취임 초기엔 ‘2군 우승 해봤자 1군에서 몰라준다’란 상실감이 넘쳐 동기 부여가 잘 안됐고, 4월 한때 9연패를 당해 꼴찌까지 추락했다. 여기서 양 감독은 선수들을 골고루 쓰되 장기적인 안목으로 꾸준히 기용해 개인별 장단점을 파악했고 의욕을 되살렸다.

다음 해인 2010년에 롯데 주축 선수들의 잇단 부진 속에서도 롯데가 신진 선수들로 화수분 야구를 하고 가을야구를 가는데에 양상문 전 2군 감독과 2군 코치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로이스터 감독은 평가했다.# 손민한, 조정훈, 이명우 3명의 선발투수가 줄줄이 부상으로 낙마하고 박기혁, 홍성흔, 조성환 등 부상 선수가 끊임없이 속출하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투수진의 이재곤과 김수완, 야수진의 전준우, 문규현, 박종윤, 정훈 등 2군에서 성장한 선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했다.

6. 롯데 자이언츠 코치 2기 시절

베이징 올림픽과 롯데의 선전으로 부산에 다시 돌아온 야구 열기와 함께 로이스터의 인기는 종교 수준으로 열광적이었다. 양상문이 롯데 2군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로이스터 개인 팬들은 양상문을 로이스터 감독 연인 방해물로 취급했다. 로이스터 팬들은 양상문을 견제하고 거짓들까지 지어내며 많은 억까를 했다. 투수코치가 되고 나서도 양상문은 로이스터 대신 욕받이 포지션이었다. SK 왕조 시절 김성근 팬들이 이만수를 견제 했던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로이스터의 인기가 SK 왕조 시절의 김성근보다 훨씬 많았다. 아래 서술된 비판들은 대부분 억까다. 로이스터 팬덤과 양상문 억까에 대한 글

2010년에는 페르난도 아로요 코치의 뒤를 이어 로이스터 감독의 부름을 받고 롯데의 1군 투수코치를 지냈다. 2010년 양상문 코치 하에서 롯데 투수진이 폭망했다고 평하는 팬들도 있지만 이전 시즌 혹사로 인해 조정훈, 손민한 두 에이스가 동시에 이탈한 점을 감안하면 아로요 시절보다 2단계 떨어진 팀방어율 6위를 기록했던 2010년이 객관적으로 나빴다고 보긴 어렵다.

2010년 양상문 투수코치 시절을 비판하는 이들에 따르면 2007 시즌에 팀 세이브 최하위였다가 아로요 투수코치 하에서 2008, 2009 시즌을 거치며 안정적으로 변해왔던 불펜진의 경우 2010 시즌 들어서 양상문 코치가 오자마자 문자 그대로 사망 상태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2010년 롯데 투수진 자원 자체가 썩 좋지 않았고 부상이 많았다. 특히 손민한조정훈 두 에이스의 동시 이탈은 뼈아펐다. 이는 선발야구를 하고 있던 롯데에게는 엄청난 악재였다. 2009년 다승왕을 차지하며 맹활약했던 조정훈은 급격한 이닝 증가로 부상의 우려가 컸었는데, 역시나 2010년 초부터 부상으로 고전하더니 결국 이탈하여 이듬해에 공익으로 훈련소에 입대하고 말았다. 전국구 에이스 손민한의 이탈 역시 타격이 컸다. 부상으로 2009년 WBC에서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던 손민한은 부상 와중에도 2009년 14경기에 등판하며 팀에 기여했다. 그러나 손민한은 2010~2012 세 시즌 동안은 아예 한 경기도 나오지 못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또한 외국인 용병 두 명 모두 투수인 경우가 많았던 당시 타 팀에 비해서, 투수 사도스키와 타자 가르시아를 용병으로 쓰던 롯데는 상대적으로 투수력에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2010년에는 선발진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부상으로 빠지다보니 불펜 투수들의 출장 수가 늘어나며 혹사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고, 전반적으로 투수 운영에 큰 어려움에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선수보는 눈이 없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 주장은 다소 편파적이다. 조정훈을 뽑은 스카우터진에게 왜 쟤를 뽑았냐고 조정훈이 보는 앞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근데 양상문의 말도 틀린 게 아닌 게, 당시 타팀에서는 윤석민, 오승환 등을 뽑았던 것 비해 롯데는 상위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훈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정훈 선택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롯데 팬들 사이에 말이 말았다. 조정훈이 2009년 팬들과 전문가들의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포크볼을 뿌려대며 공동 다승왕[18]을 차지할 때는 롯데의 선택이 옳고 양상문의 판단이 틀린 듯 하기도 했으나... 김수완은 원래 양상문이 2군에 있을 시절 방출하려고 했었으나 박정태를 위시한 2군 코칭스탭들이 뜯어말려서 방출은 면했다.[19] 이후 김수완이 잠깐 반짝했을 때 김수완을 방출하려 했던 양상문이 까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시즌 초 양상문이 직접 선발후보가 될 수 있다라고 했던 진명호의 경우 2009년 3경기 선발로 나와 3경기 동안 7⅓이닝 동안 16실점 하면서 평균자책점 19.64라는 아름다운 성적을 기록하면서 진명호를 추천한 양상문까지 같이 까였지만, 양상문 해임 1년 후 2011년에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오히려 팬들로부터 혹사 걱정을 받고 있다.

가장 간단하게 납득하고 싶다면 LG와 롯데의 경기를 보자. 양상문이 투수코치를 넘어 감독까지 하는 곳투수코치를 넘어 감독까지 했던 곳의 대결을 보면 확연히 이해가 될 것이다.

2010년 8월 13일 라이언 사도스키가 볼넷으로 만루를 채웠을 때 양상문이 올라왔었는데, 그 후 이종범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았다. 그러자 인터넷에서는 양상문 디버프, 양상문 왜 올라왔냐!면서 까댔다. 사도스키는 결국 퀄리티 스타트를 했으니 까일 여지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 연임 지지 광고가 팬들에 의해 올라왔는데, 고작 사흘만에 천만 원을 찍었다. 이에 롯데 프런트는 당혹감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팬들은 '계획이 들통나서 당황했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름아닌 양상문이 로이스터의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설이 퍼진 이후였기 때문이다. 2010년 롯데의 성적을 보면 문제는 불펜진인데 롯데의 블론세이브가 2010년 16개인데[20] 이 중 절반만 세이브 했어도 시즌 2, 3, 4위 싸움은 혼전이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롯데의 엄청난 공격력을 고려해본다면 1위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임을 첫 번째가 감독이 져야 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는 투수코치다. 그런데 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감독을 잘라 놓고 역시 책임을 져야 할 투수코치가 차기 감독이 된다면... 이 광고는 롯데 팬들이 구단을 얼마나 불신하는지 잘 보여주며 만약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얼마나 많은 팬을 잃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결국 롯데 구단이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3년 연속 고배를 마신 제리 로이스터 감독, 박영태 수석코치, 한문연 배터리코치와 함께 세트로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함에 따라 롯데에서의 코치 생활을 마감했다. 로이스터 연임 찬성과 반대를 떠나서 롯데에 관심있는 이들은 대체로 박영태, 양상문 해임에 한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환호하는 모습을 보였다.[21]

7. 야인 시절

퇴진이 발표된 후인 2010년 10월 6일, 롯데 자이언츠 사이트의 팬 게시판인 갈매기 마당에 작별 편지(?)를 올렸다. 투수코치에서 물러남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한 마디로 간추리면 자기는 다 잘했고 실패는 전부 다 제리 로이스터 때문이라는 자기변명이다.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일개 코치가 공개적으로 상관인 감독을 비판한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사례로 이 당시 야구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고, 언론으로부터도 적절치 못한 처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같이 짤린 박영태 前 수석코치가 그나마 허심탄회하게 소감을 밝히고 쿨하게 물러나는 인터뷰를 한 것과 대비되어 더더욱 까였다.[22]

이후 롯데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물러난 양승호 감독의 빈 자리를 찾고 있는 모교 고려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갈 거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고려대에서는 일단 길홍규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승격시킨 채 대학리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창원시를 연고로 한 제9구단 엔씨소프트의 감독 선호도 조사에서 선동열, 제리 로이스터 다음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가을의 전설 최동원보다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기사 롯데 감독 시절 4년 연속 꼴찌였던 막장팀을 일으켜 세워 리빌딩을 하면서 동시에 성적도 어느정도 냈던 감독으로써의 역량이 크게 반영된 듯 하다. 반면 최동원 감독은 한화 2군 감독 시절의 성적 때문에 감독으로써의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2011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의 요청으로 SK 와이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합류, 병역 문제로 인해 해외 출국 가능 나이를 넘겨 스프링캠프에 가지 못하고 국내에 잔류하게 된 고효준을 전담 지도하게 되었다.

김성근 SK 감독은 양상문의 지도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했으나, 3월 17일 시범경기에서 놀라운 양상문 매직의 힘, 월미도 바이킹 제구! 하지만 이때 임팩트가 엄청나서 그렇지, 막상 정규 시즌에 들어왔을 때는 고효준은 전년에 비해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탈삼진과 승수가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좌완 롱맨 보직도 꾸준히 등판했고, 스프링캠프를 못 간 것치고는 준수한 시즌을 보낸 편이었다.

8. LG 트윈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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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감독시절

8.1.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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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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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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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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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롯데 자이언츠 감독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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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18~2022).svg 롯데 자이언츠 감독시절

2018년 10월 19일 LG 트윈스 단장직에서 사임 의사를 밝힌지 불과 몇분 뒤 롯데 자이언츠의 신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23][24] 이로써 2010년 이후 9년만에 고향팀으로 돌아왔으며, 감독으로는 2005년 이후 14년만에 돌아온 셈. 다만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환영과 비판이 엇갈리고 있으며, LG의 팬들은 양상문이 아예 LG에서 나가게 됐다며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 미묘한 분위기이다.

양상문은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애정이 확실한 사람이고, 리빌딩을 병행하면서도 나름 5위라는 성적을 이끌어내며 롯데의 암흑기를 끝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 투수 조련 능력이 좋으니 취약한 불펜에 힘을 채워 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유망주에게도 기회가 많이 갈 것이라는 전망. 롯데에서도, LG에서도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많이 줬던 만큼 리빌딩에 적합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2018시즌 LG 투수의 몰락에 양상문이 감독 시절 행한 이닝 쪼개기와 이른바 '출첵야구'도 한 몫을 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25] 또한 '투수는 몰라도 타선 운영에는 별 재능이 없다, 공격에서 구시대적 스몰볼을 선호했다[26], 베테랑들과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도 꽤나 존재하는 편. 다만 팀 내 최고참인 이대호부터 양상문의 양아들이었으며, 주장인 손아섭 또한 2009년 2군에 있을 당시 양상문 밑에서 지도를 받아 이후 롯데를 대표하는 타자로 자리잡은 것을 감안하면 이전 롯데나 LG 감독 시절 같은 베테랑 배척이 일어날 확률은 훨씬 낮다.

우선 감독이 되고 나서 NC에서 짤린 최기문 코치와 야인으로 있던 윤재국 코치를 영입하고[27] 그 이후 경찰청에서 투수코치를 맡고 있던 강영식 코치와 개성고에서 코치를 하던 이우민 코치, 두산에서 작전코치를 하던 공필성 코치를 다시 롯데로 불러들였다. LG에서 엄청난 욕을 먹던 강상수를 데려오지 않았고[28] 예전에 강민호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최기문 배터리코치를 다시 영입해오며 평가가 조금 올라갔다. 그 외 강영식과 이우민도 현역 시절부터 성실성이 높다는 호평을 많이 받아 왔기에 이 부분 역시 평가가 좋다.

그리고 2019년 다시 감독이 되면서 10개 구단 감독 중 최고령 감독(만 58세)이 되었다.[29] 사실 감독 치고는 비교적 평균에 속하는 나이긴 한데, 전반적으로 10개 팀들의 감독 연령이 높지 않으므로 그런 듯 하다.

9.1. 2019년

해당 문서로. 약 13년만에 고향으로 금의환향했지만 창단 최초 10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취임 272일만인 2019년 7월 19일 이윤원 단장과 함께 동반 사임했다. 올시즌 불명예 최초 기록을 여러번 쓴 롯데 자이언츠는 감독 부임 첫 해 중도 사퇴라는 기록 또한 쓰게 됐다.[30][31]

고향팀인 롯데에서 마지막으로 불명예 퇴진을 하면서 추후 타 팀에서도 감독은 되기 어려운 전망이 지배적이다.[32]

후임으로 공필성 수석코치 체제로 2019 시즌을 최하위로 마무리한 뒤 허문회 감독이 선임되었다.

하지만, 롯데에 유망주라는 유산은 인정해야 한다.

1년 뒤 롯데 자이언츠는 202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투수,야수,포수 각각 최대어인 김진욱나승엽 그리고 손성빈을 지명할 수 있었고, 나승엽은 메이저리그행을 포기하고 롯데에 입단하여 롯데가 2021 KBO 신인 드래프트의 승리자가 되며 양상문 감독의 유산이라며 재평가가 되고 있다. 기사

10.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2022년 12월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SPOTV 해설위원을 그만두진 않았고 두 직책을 겸임했었다.

11. 한화 이글스 코치 시절

2024년 6월 2일, 고려대 선배이기도 한 김경문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양상문에게 수석코치 직위를 제안했는데, 현재 맡고 있는 해설위원 활동 때문에 고사했다는 게 한화 구단 관계자를 통해 알려졌다.[33]

그러나 7월 1일에 갑자기 배지헌 기자의 트윗을 통해 현장에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배경이 독수리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화 투수코치로 복귀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올해 투수코치로 부임한 뒤 내년부터 사퇴 의사를 밝혔던 손혁 단장의 뒤를 잇는 새 단장으로 낙점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양상문의 단장으로서의 평가는 좋은 편이며, 특히 유망주를 선별하는 능력이 좋다는 평이 많기 때문에 한화의 현 상황에 어울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2024년 7월 5일에 한화 이글스의 1군 투수코치로 합류한다는 공식 기사가 떴다. 이로서 지도자 경력 처음으로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제3의 팀 유니폼을 입고 정식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됐고,[34] 지난 2019년 7월 롯데 자이언츠 감독직을 사퇴한 뒤 약 5년만에 현장으로 돌아왔다. LG 시절 코칭스태프로 함께 했던 김정민 배터리코치와 LG 감독 시절 자신의 애제자였던 채은성과 재회하게 되었다.

11.1. 2024년

7월 9일 고척 키움전 투수코치 복귀전에서 8회말 3:2 한 점차 리드 상황, 기존 필승조 멤버였던 이민우와 한승혁 대신 좌타 라인을 상대하기 위해 신인 황준서를 올리는 실험을 했는데 볼넷 2개를 내주고 강판됐고 뒤늦게 한승혁을 올렸지만 3루수 하주석의 송구실책으로 어이없이 경기를 내주었다.

7월 11일 고척 키움전, 7회말 4대3 또 다시 한 점차 불안하게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8점대 불펜 투수 박상원을 마운드에 올렸고 어김없이 1사 이후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면서 위기를 자초했다. 이번에도 불을 끄기 위해 한승혁을 올렸는데 볼넷 이후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1차전과 같은 패턴으로 리드를 빼았겼다.

이후 김규연과 주현상의 3이닝 역투로 간신히 동점을 유지했지만 11회말 올라온 투수 김서현이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스윕까지 넘볼 수 있던 시리즈를 1승 2패로 마감했다.

팬들은 최원호 전 감독 당시 겪었던 실험적인 투수 운용을 다시 보고 있다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7점차 널널한 상황에서 필승조 이민우를 등판시키거나, 1점차 타이트한 상황에서 신인인 김서현, 황준서를 등판, 심지어 불펜 중 최악의 성적을 기록중인 박상원을 1점차에 등판시키며 결국 동점을 허용하는 등 팀 투수조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펜 성적이 안정되고 동시에 투수 교체도 점점 정석적으로 가져가면서 결국 부임 직후의 모습은 팀 투수 이해도 부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하듯 양상문 코치가 부임한 후반기 한화의 불펜 WAR은 1위이다. 투수들의 코멘트로 보아 멘탈 관리까지 확실하게 해주는 듯.[35]

특히 김서현박상원은 코치와 선수로서 스타일이나 궁합이 좋은지 양상문 코치가 부임하고 나서 확실히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서현은 전반기에 140km/h까지 저하되었던 구속이 본래 투구폼으로 회귀하여 다시 150km/h 중후반으로 완벽히 회복되었으나 문제는 고질적인 제구 문제가 남았다. 그러나 양상문 부임 이후 감독과 합심하여 심리적 안정과 동시에 강속구를 스트라이크 존으로 넣는 공격적인 피칭으로 상대타자를 찍어누르는 파워피처로써 자신감을 얻음과 동시에 주무기인 슬라이더 또한 더욱 날카로워져 현재 필승조를 뛰고 있을 만큼 확실한 투수가 되었고, 박상원 또한 전반기의 부진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퀵 후크 겸 롱 릴리프로 각성하면서 팬들이 그토록 바랬던 2018년 시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김범수의 포크볼 의존도를 낮추고 좌타자 상대 슬라이더에 각에 집중하게 해 어느정도 안정감을 찾게 했다. 양상문의 투코 부임이전 선발진의 평자책이 6점대, 불펜진의 평자책이 5점대 후반이었지만 부임 이후 선발진 평자책이 5점대, 불펜진 평자책이 4점대 초반으로 낮춰졌다.

특이사항으로 본인 담당이 아닌 야수 채은성은 전반기 내내 죽을 쑤고 있다가 양상문 부임 이후 살아나고 있다.[36] LG 시절 채은성을 양아들 소리까지 들으면서 기용했고 '대선수가 되세요'라는 멘트까지 남겼을 정도로 각별한 사제지간인지라 채은성도 심리적 안정감을 얻은 듯하다. 이후 이글스tv를 보면 콩국수에 넣는 조미료로 소금이냐 설탕이냐[37]며 채은성과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양측이 얼마나 편하게 대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외국인 투수인 라이언 와이스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변화구의 각을 살리기 위해 투구폼을 조금 더 간결하게 바꿔줬다고 한다. 그 결과 와이스는 스위퍼를 포함한 여러 변화구의 각이 좋아지며 엄청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2. 지도 스타일

경험이 많고 공부하는 지도자로 알려져있으며 선수들 개성에 맞추어 선수마다 다르게 지도한다. 급하게 선수를 바꾸려고 지도하지 않고 천천히 선수를 성장시키는 방식이다. 일방적 지시가 아닌 쌍방적 소통을 통해 선수가 스스로 깨달아서 시도하게 하는걸 잘한다.

단점 메우다가 장점 없어지는 지도 방식보다 장점 살리기에 집중하는 지도 방식을 선호한다. 구속이 빠른 어린 투수들 성장에 포심같은 오리지널 구종을 많이 던지는게 좋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변화구 손장난질을 해서 직구 위력을 떨어트리는 것보다 직구를 많이 던지는 연습을 해서 제구를 잡고 싸울 수 있는 패기에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38] 경험이 없는 어린 투수들이 단기간에 제구를 잡으려고 손장난질을 시작하면 타자에게 끌려다니는 자신감 없는 피칭에 적응되고 직구 구위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해설위원 시절 150km 중반을 포심을 던지던 소형준이 포심을 포기하는걸 보고 보고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롯데, LG에서 코치,감독 시절에 유망주 육성 능력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야구계에서 받는다. 많은 투수들에게 슬라이더를 업그레이드시켜주었고, LG에서 수준급 커브볼러들을 대량으로 찍어내며 재미를 보았다. 양상문 이전부터 커브를 장착한 봉중근과 류제국은 차치하더라도 신정락, 임정우, 임찬규, 정찬헌은 리그 최상위권의 구종 가치를 뽐냈으며 진해수 역시 좌타자의 몸쪽과 바깥쪽 모두를 공략하는 제3구종으로 커브를 사용해 좋은 성과를 냈다. 임정우에게 스플리터도 가르쳐주었다. [39][40]

자신이 점찍은 유망주는 얼만큼 욕을 먹더라도 터질 때까지 꾸준히 기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롯데의 이대호, 강민호, 장원준, 그리고 LG의 채은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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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IMF 외환 위기의 여파로 다수의 구단들이 인력 구조조정을 하던 시기였다. 코치로 이름을 알린 야구인들 중에 1997~1999년에 프로팀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외환 위기의 불똥으로 본의 아니게 구단을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도 이 부분에 대한 고증이 잘 되어 있는데 부산 갈매기 코치였던 성동일은 연봉이 반토막났고 서울 쌍둥이 코치였던 성동일은 아예 코치를 그만 둬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2]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은 경기장 구조상 1루 외야석 뒤에 원정팀 버스를 대놨다. 그래서 원정팀이 퇴근할 때는 항상 1루측 파울지역을 걸어서 외야 출입구로 나갔다.[3] 손민한은 양상문 이후의 강병철, 로이스터 포함 대부분의 감독들과 갈등이 있었는데 양상문만은 각별히 따랐다. 양상문이 롯데 감독에서 짤렸을 때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언론사에 양상문을 찾아달라고 요청했었다.[4] 양상문을 매우 존경한다고 한다.[5] “같은 왼손 출신인 양상문 투수코치의 조언이 힘이 된다. 부담 갖지 않고 게임을 즐기면서 위기 관리 능력도 향상되는 것[6] 다만 양상문이 학교를 1년 조기입학하는 바람에 고려대 79학번으로 60년생들과 동기고, 반대로 이순철은 고교 시절 1년 유급해 62년생-81학번과 동기기 때문에(덕분에 이순철은 빠른 63년생인 선동열과 친구로 지낸다) 실질적으로는 2학번 차이난다.[7] 당시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는 팀을 상위권 전력이라고 오판해서 우승을 내부목표로 정하고 순조롭게 리빌딩을 진행중이던 양상문을 짜르고 우승 경험이 있는 강병철을 영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8] 프로야구 역사상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팀에서 시즌 MVP가 나온 것은 2005년의 손민한과 2012년의 박병호 단 두 명뿐이다.[9] 양상문 가장 존경한다고 하고 아버지라고 생각해 스승의 날이 아닌 어버이날에 연락을 매년 연락을 드린다[10] 강민호와 장원준도 양상문을 아버지라고 부른다[11] 2023년 키움으로 이적하고 양상문 해설과의 경기 인터뷰에서 아버지라고 불렀다.[12] 당시 롯데의 베스트 라인업 가운데 2할 5푼 이상을 치는 선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음에도, 타격감 유지가 힘든 대타 포지션에서도 출루율이 5할을 넘을 정도로 감이 좋았던 박정태를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한 점에서 어떻게 보면 선동열양준혁에게 했던 짓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13] 롯데 감독 2기 시절 김시진이나 장효조 등의 노장을 배제하고 전준호, 박정태, 김응국 등의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한화 감독 시절에도 욕을 먹어가며 이정훈, 이강돈 등을 정리하고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를 신인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밀었다. SK 감독 시절에도 무수한 욕을 먹어가며 채종범, 이호준, 이진영을 밀어주었다. 자세한 건 강병철의 양아들 항목 참조.[14] 시즌 성적은 46승 80패로 8위 6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666858)로 개판 난 개망신 당하고 또 떨어져서 옷을 벗어 망신 당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15] 메이저에서 선발로 뛴 기간은 얼마없지만, 중간계투로 뛴 경험이 꽤 있다. 마이너에서는 선발로 많이 뛰었다고[16] 박명환이 유튜브에서 밝히는 바에 팔꿈치가 탈이나서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무시하고 계속 투수 로테이션을 짜고 있었다고... 그렇게 양상문에 의해 부랴부랴 복귀한 박명환은 이듬해 부활은 커녕 퇴물로 전략해 버린다. 근데 양상문 스타일에 근접한 선수가 박명환 이였다고 한다. 근데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17] 나는 갈매기 영화에서 서울 히어로 과즈의 2군 구장이었던 고양시 원당구장에서 어깨 통증으로 힘들어하던 손민한에게 장난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18] 두 명도 아니고 로페즈, 윤성환과 3인 공동 다승왕이었다.[19] 김수완은 인터뷰 때 유독 양상문에게는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단이 그 건 이후 언론플레이까지 했으니...[20] 주자가 루상에 있는 상태에서 블론세이브되는 터브 블론세이브는 절반인 8개.[21] 다만 한문연 코치 해임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호불호가 갈렸다. 그래도 박영태, 양상문이 잘린 것에 대해 대부분 기뻐한 것은 사실이다.[22] 하지만 로이스터 안티 성향인 갈매기 마당의 일부 팬들은 글 내용에서 보다시피 투수코치 말도 안 듣는 로이스터야말로 막장 감독이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양상문을 무능한 감독 덕에 함께 휩쓸린 희생양으로 몰았다.[23] 양상문, LG 단장 사임 먼저? 롯데 감독 선임 먼저?[24] 사실 이에 대한 사유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본 영상의 후반부 참조.[25] 투수코치였던 강상수의 합작도 있었지만. 그래도 강상수 코치는 KIA 타이거즈 투수총괄로 갔다가 5월 김기태 경질과 함께 강등되었다.[26] 이는 2019 시즌에 구시대적 레벨스윙 및 스몰볼을 고수하는 1군 타격코치 김승관을 그대로 선임하는 행보로 현실화되었다. 당장 두산 베어스정경배 코치도 메이저리그를 벤치마킹하고 공부하려는 자세와 대조되는 부분.[27] 그러나, 윤재국 코치는 김성근 사단으로 분류되어 능력에 의문표가 붙고 있다. 김성근이 2017년 경질된 이후로 김성근 사단의 코치들은 재취직이 힘든 상황.[28] 정작 강상수는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고 KIA 타이거즈 코치로 갔다.[29]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감독 1기 시절에는 부임 당시 만 42세로 리그 최연소 감독이였다. 물론 며칠 뒤 1961년생 동갑내기이자 생일이 더 늦은 이순철이 LG 감독으로 부임하며 기록이 깨졌지만.[30] 다만 사임이 본인의 의사가 아닌 구단 고위층에 의한 경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 따진다면 롯데에서 부임 첫해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세 번째 감독이다. 양상문 이전 부임 첫 해 도중 경질된 감독은 성기영우용득.[31] 그리고 2020년에는 손혁이 부임 첫 해 중도 경질된 감독이 되고 말았다.[32] 김재박의 경우 현대 유니콘스에서 한국시리즈 4번 우승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LG 트윈스 감독 재임시절 팀을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감독직을 다시 맡기는커녕 야인으로 떠돌고 있다. 하지만, SK 와이번스의 인스트럭터 출신으로 민경삼 단장 겸 대표이사로 인해 가능성이 아에 없지는 않다. 양상문은 이후 현장에 복귀했을 땐 감독이 아닌 코치로 복귀했다.[33] 아이러니하게도 양상문이 2003년 10월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수석코치로 영입하려고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이 다름아닌 고려대 선배 김경문이었다. 실제로 롯데 수석코치 부임이 유력했고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갑자기 두산 베어스에서 김경문에게 감독 제안을 했고, 결국 두산 감독으로 선임되며 무위로 끝난 바 있다. 21년 후 상황이 반대로 재현된 셈.[34] 정식 코치가 아니었던 인스트럭터 시절 제외. 2011년 SK 와이번스의 단기 인스트럭터를 맡았기 때문이다.[35] 동기부여 목적인지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의 불펜 대기실에는 '내가 던지는 이 공 안에 최강한화를 외치는 팬들이 있다.'라는 글귀를 붙여두었다. LG 감독 시절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다." / 롯데 감독 시절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보지 않는다." 라는 글귀를 붙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36] 전반기 0.652에 불과한 OPS가 후반기 들어서 8월 9일 기준 1.175를 기록하고 있다.[37] 현재 전라도에서만 콩국수에 설탕을 타먹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콩국수에 소금을 넣어 먹는다. 그래서 인천 출신인 류현진과 경상도 출신인 양상문은 콩국수에 설탕 타먹는 건 난생 처음이라는 입장이고 전라도 순천 출신인 채은성은 콩국수에는 역시 설탕이고 그럼 왜 미숫가루에 소금이 아니라 왜 설탕을 넣느냐며 항변하였다. 참고로 콩국수에 소금을 넣는 이유는 수박에 소금을 뿌리는 이유와 비슷하다.[38] 단기적으로는 승부하다 안타를 맞고 실점할 수 있지만, 젊은 투수가 장기적으로 더 좋은 투수가 되기 위해 거쳐야할 성장통이다.[39] 그런데 투수코치가 구종을 가르치는거라고 많은 팬들이 생각하는데 구종은 선수의 손 모양, 신체 조건, 손 재주에 따라 익힐수 있는지 없는지 나뉜다. 구종 잡는 법은 인터넷만 봐도 자세하게 나온다. 일반적으로 선수가 동료들한테 배우거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경우가 많다. 투수코치의 역할은 폼과 메카닉 수정, 심리적인 코칭, 피칭 디자인 같은 부분이 크다.[40] 포심과 슬라이더를 중시하는 점 등에서도 보이는 부분이지만 양상문이 선호하는 스타일인 투수는 박명환이었다. 다만 이런 특성 때문에 09~10시절 롯데 투수들이 다 비슷비슷해지는 결과가 나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