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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2:16:14

어린이 영화

1. 개요2. 역사3. 특징
3.1. 주요 패턴
4. 작품 목록
4.1. 대한민국4.2. 미국4.3. 일본4.4. 기타

1. 개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하며, 가족 영화와 겹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비디오 시장을 타겟으로 다수 제작되었던 저예산 어린이 영화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아동용 애니메이션특촬물 카테고리에도 일부 겹쳐 있다.

2. 역사

대한민국은 1990년대 이전에 어린이들이 즐기고 놀 거리가 많이 없었다.[1] 1990년대 들어 컴퓨터가 보급되었지만 대중적이지 않았고, 인터넷PC통신은 요금이 비쌌고 어른들이 주로 사용했다. 케이블 방송은 전국적인 보급률이 떨어졌고[2], 텔레비전도 평일 낮시간대에 지상파 텔레비전에서 낮방송을 해주지 않았던 시절로 낮 시간에 3사 채널을 틀어봐야 6~7시간 정도씩 삐소리나 치치직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디오테이프의 전성시대였다.

당시에는 어린이 인구가 2010년대 이후보다 훨씬 더 많았던데다가 사교육 비중이 비교적 적었다.[3] 비디오 게임의 가격대도 당대 기준에서 제법 비싼데다가 오락실은 지금보다도 불량했고, 즐길려면 용돈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오락실에 대해서 퇴폐적인 이미지가 강했던지라 전반적인 게임에 대한 인식도 박했다. 결과적으로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여가선용이 독서나 TV 정도밖에 없었다. 일 다니던 어른들의 근무 요건도 현재보다 열악했기 때문에[4] 어른들의 오락 문화 소화율은 별볼일 없었으므로, 막 개화해 가던 미디어 시장의 주역은 단연 어린이였다. 그 중심은 극장 → VTR로 이어지는 대여용 비디오 시장이었다. 할 게 없었으니 오락을 즐기고 싶은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보게 된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일본 매체의 경우는 현지화를 거쳐서 수입되었기는 했었지만, 폭발적인 히트를 쳤던 슈퍼전대 시리즈 특촬물 후뢰시맨으로도 수요를 채울 수 없을 만큼 시장 규모는 컸다.

이미 1960~70년대에 <꿈초롱 둘이서>나 <똘똘이의 모험>, <별3형제>, <엄마없는 하늘아래> 같은 어린이 대상 영화들은 언제나 나왔으나 주로 교양성이나 감동을 강조했고, 사람들이 아는 형태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온 특촬식 작품들이다.

1990년대 말 이후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이 대중화되면서 어린이들의 눈높이가 높아졌고, 어린이 영화라는 장르가 거의 사장되었다. 명절이나 어린이날 등 특정 시기에 관객 특수를 겨냥한 어린이 영화들이 아예 나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대부분 퀄리티나 흥행면에서 영 좋지 않은 성과를 기록했다.

3. 특징

주연배우들은 탤런트나 연극배우, 영화배우가 아니라 당대에 이름있는 코미디언이나 무술배우 등 위주로 캐스팅했다. 아무래도 정극을 하는 딱딱하고 난해한 분위기의 배우보다는 웃기고 가벼운 분위기의 코메디언들을 아이들이 접근하기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심형래가 어린이 영화의 주연배우로서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5] 이 심형래를 필두로 이용식, 김정식, 조춘, 이봉원, 이창훈 등 아예 전원 코미디언이나 무술배우 위주로 주연진이 구성되었으며, 배우 손영춘도 KBS 주말연속극 <순심이> 때 써먹은 '칠득이' 캐릭터로 어린이 영화를 몇 편 찍은 바 있다. 특이하게 가수 중에서는 김흥국이 많이 출연했는데 그를 스타덤으로 올려준 노래인 호랑나비가 엄청 웃긴 춤을 추는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어린이용 잡지 표지모델은 물론이거니와 각종 TV CF를 꿰차며 종횡무진하던 개그맨들의 위엄은 현재의 1류급 배우 뺨치는 수준. 물론 당시 주요 광고 대상도 어린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즘 세상에 과자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그 때에 비교하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다.

주요 제작자로는 대원미디어 창업주 정욱이 있고, 영화감독으로써는 남기남이 크게 활동했으며, 지금은 비난받는 입장인 김청기 또한 우뢰매 등으로 한가락 하던 시절. 기존 정극 영화 기법은 모조리 무시하다시피 하면서 아예 철저하게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재미에만 포커스를 둔 것이 어린이 영화이며 그래서 코메디언을 필두로 아역배우나 아역을 하는 게 가능한 성인 여배우들, 일부 액션배우들을 조합해서 어린이 영화를 촬영했다. 또한 베테랑 조연배우 박종설도 <영구와 땡칠이> 같은 남기남 감독 작품에 많이 나온 편이다.

예외가 있다면 태어나서 단 한번도 코미디언을 해본 적이 없는 100% 정극 배우 출신의 독고영재가 악역으로 출연한 키드캅이 있고, 강남길이 나왔던 <영웅 후레쉬(1990)>도 있었다. 우뢰매 시리즈 3~5탄에 나온 유명 배우 김수미와 남궁원, 박암, <스파크맨>에 나왔던 김성원, <변신전사 트랜스 토디>에 나왔던 이일웅 등도 있지만 사실상 카메오 내지 일회성이었다.

주의할 점은 그 시대의 어린이 영화들은 대부분 퀄리티가 낮고 매우 쌈마이틱하다. 심지어 어린이 드라마보다 더 괴악한 것도 있다. 어린이 영화라는 인식 때문에 일반 영화보다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식의 무성의함이 은근히 보인다. 하지만 그게 컬트적인 매력이며, 당시 시대상도 알 수 있기는 하다.

왕룡이나 강용규[6] 감독 등의 예처럼 1970~80년대에 한창 액션 영화를 찍던 사람들이 스태프나 감독, 보조출연자[7], 대역 등으로 넘어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액션의 질은 좋은 편인 작품들도 많기는 하다. 요즘은 이런 걸 수집하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심지어 비디오를 떠서 영상파일로 만들어 불법 공유를 하기도 한다. 몇몇 작품은 DVD로 복각판이 나오기도 하며, 인터넷 중고사이트 등지에서 비디오 원판으로 구하려면 돈 좀 써야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법복제 대신 한국영상자료원에 보내기도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필름이나 비디오 테이프 기증을 받는 편이다.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이자 평론가인 송락현은 2013년에 공동저자로 참여했던 <정욱과 대원>을 통해 어린이 영화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평가했는데, 이 장르가 한국 영화 제작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친 숨은 면도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특히 대원미디어 창업주 정욱에게 발탁된 남기남 감독은 에로영화 제작 경력이 있음에도 어린이 영화치곤 수작을 만들어냈으며,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실험적인 시도들도 나름 있었다. 특히 이쪽에서 더 부각된 건 특수효과인데, 특수효과의 장인 정도안(데몰리션 대표)과 특수분장 감독 신재호가 어린이 영화로 경험을 쌓은 이들이다. 참고

이런 류의 영화를 주로 찍어내던 회사로는 범영화제작소[8], 대원동화, 대영팬더 등이 있다.

1980~90년대 어린이영화 장르와 팬층이 형성되었던 과정이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과 유사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반적인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의 정의와는 많은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선술했듯이 주로 TV에서 인기를 끌던 코미디언들을 주연으로 특촬풍의 연출로 철처히 어린이 대상을 노린, 저예산 영화들이고, 제목이나 내용 역시 기존의 헐리우드, 일본산 작품들을 어설프게 흉내내거나 표절한 작품들이 많은 건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과 비슷하다.

3.1. 주요 패턴

4. 작품 목록

4.1. 대한민국


파일:external/shszone.cafe24.com/shszone_4600.jpg

4.2. 미국

한국 어린이 영화들보다 퀄리티가 월등하다. 적어도 성인 관객들도 재밌게 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4.3. 일본

4.4. 기타



[1] 사실 이 시기에는 한국의 대중문화 자체가 중장년층 지향인 감이 있어서, 어린이는커녕 10~20대도 딱히 즐길 게 별로 없었다. 2020년대에 K-POP의 주축인 아이돌도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올 시기에는 비주류처럼 여겨졌다.[2] 그나마 보급이 원활하게 된게 1990년대 말엽이다.[3] 사실 이 당시에도 교육열은 심해서 교실 이데아 같은 노래가 히트쳤을 정도이지만, 21세기의 경우처럼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조기교육을 시킨다는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은 어느정도 봐주었다. 그 대신에 아동 체벌은 심심치 않던 시절이기는 했다.[4] 토요일까지 직장에 근무해야했고, 주요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격주 주5일제가 점차적으로 도입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법적으로 규정된것이 아니라서 여전히 주6일을 내내 일하는 직장들이 많았다.[5] 이 당시의 심형래는 흥행력으로 따진다면 충무로 톱에 해당될정도로 엄청난 스타였다. 다만 이후로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기보다는 거액이 드는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여럿 찍다가 높은 흥행성적으로도 감당이 안 돼서 제작비 회수에 실패하고 몰락했다. 심형래의 문제점 중 하나가 판을 지나치게 크게 벌여서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되어야 본전을 뽑을 수준으로 기상천외하게 비용을 많이 들인다는 점이다.[6] 봉만대 감독의 스승이기도 하다.[7] 코미디보단 액션 분위기를 강조했다면 무술배우들이 대부분의 배역을 꿰차기도 한다.[8] BUM영화제작소라고도함. 반달가면, 산지니 시리즈가 대표작이며 나중에 피구왕 통키 실사화로도 유명해졌다.[9] 이런 건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흔한 클리셰이다.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 극초반에 이런 연출이 나오는 학생이 있을 정도다.[10] 특히 1954년작은 경우에 따라 호러 영화로도 볼 수 있고, 실제로 몇몇 영화 관련 정보 사이트에서는 장르를 호러물로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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