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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3:11:51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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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몽 관계
, 무신정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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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쟁 전 상황
2.1. 외교상황
2.1.1. 옹호2.1.2. 비판
2.2. 관군의 유명무실화
3. 최우의 항복4.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최우5. 몽골의 침공(1232 ~ 1259)
5.1. 무신정권의 직무유기
5.1.1. 외교실패
5.1.1.1. 최우에 대한 변론
5.1.2. 방어전 회피
5.2. 별초와 야별초5.3. 강화도 천도에 대한 평가
5.3.1. 옹호5.3.2. 비판
5.4. 무신정부의 친몽파 비호 정책
5.4.1. 반론
5.5. 최씨 정권과 김준 정권의 수탈
5.5.1. 최씨 정권5.5.2. 김준 정권
5.6. 파탄 국가(Failed State) 고려
6. 고려 왕조를 전복할 의사가 없었던 몽골7. 무신정권의 강화도 파천에 대한 평가
7.1. 긍정적 평가
7.1.1.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잘라이르족의 해군7.1.2. 고립되지 않았던 강화도7.1.3. 당시 고려군의 무기7.1.4. 강화도 주둔군까지 야전에 투입해도 장담할 수 없던 회전
7.2. 부정적인 평가
7.2.1. 몽골측의 강화도 정벌 능력과 그에대한 가정7.2.2. 몽골 제국이 수전에 약했다는 의견에 대한 반박7.2.3. 강화도의 요새로서의 능력에 대한 반박7.2.4. 강화도 파천 시절 고려 정부의 병력 규모
8. 몽골의 복속한 나라들에 대한 처우에 대하여
8.1. 무신정권 옹호8.2. 무신정권 비판
9. 결론10.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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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의 1차 침공이있었던 1231년부터 고려의 태자가 몽골 조정에 직접 입조하기 직전인 1259년까지의 여몽전쟁 기간동안 벌어진 무신정권의 무능한 전쟁수행 과정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 문서이다. , 해당 문서에는 이해를 돋기위해 전쟁 전 상황 또한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 행보에 대해서는 반박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 같은 무신정권이라고 해서 집권자들의 행보가 전부 똑같았던 건 당연히 아니므로 각 집권자 별로 비판점과 옹호점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좋다.

2. 전쟁 전 상황

2.1. 외교상황

2.1.1. 옹호

고작 거란 유민의 군대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몽골의 개입 여지를 주고, 마침내는 침략 구실까지 이끌어낸 상황은 당시 무신정권에도 큰 책임이 있지만, 상황이 그리 흘러가서 선택의 여지가 없던 부분도 많았다.

우선, 고려의 북방 방어선을 최종적으로 박살낸 건 거란전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있던 조위총의 난이다. 이 당시 집권자는 이의방이었고, 그 이후로 4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무능했고, 왕들도 마찬가지로 명종 같은 암군이거나 신종, 고종처럼 힘이 없거나 희종처럼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리려 했으나 힘이 없어 안타깝게 실패한 케이스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40년이 되도록 고려의 방어선은 복구되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최충헌은 이때까지 벌써 12년을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최우 입장에서는 조위총의 난이나 대거란전쟁에서의 졸전에 직접적인 책임은 일단 없다.[1] 따라서 이 부분은 최충헌의 책임과 최우의 책임을 어느 정도는 분리해서 볼 필요도 있다.

몽골 조정에 입조해서 국체를 지킬 수 있던 것은 대부분 애초부터 몽골과 큰 외교적 마찰이 없었거나, 혹은 오히려 몽골의 적의 적이라서 몽골에게 적대했다가 피 볼 이유가 없는 사례들이 대부분이다. 전자가 옹구트족[2] 같은 케이스고, 후자가 위구르[3], 아르메니아, 안티오크[4] 등의 케이스다. 아예 몽골을 배신했지만 결론적으로는 고려와 비슷하게 결혼동맹의 형태로 정복된 케레이트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케레이트의 옹 칸은 막판에 배신하기 이전에는 오히려 메르키트에게 복수해서 아내를 되찾는 걸 도와주고 칭기즈 칸의 세력을 거기까지 키우게 도와준 은인이었다. 고려가 케레이트처럼 자비로운 처사를 기대할 정도로 몽골에 빚을 지운 건 당연히 아니고, 순전히 타이밍을 기막히게 맞춘 원종 덕에 거기까지 간 거지 전쟁이 개시되는 시점에서 고려인들이 예상할 수 있던 몽골에게 패했을 때 자신들의 미래는 케레이트가 아니라 서하나 호라즘에 가까웠다. 그나마 국체를 유지한 루스 공국들은 사실 전쟁 당시 피해면 몰라도 전쟁 후의 대우는 대칸의 직할령 울루스와 장인-사위 관계를 맺었던 고려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 이전의 외교적 마찰이 고려만큼 심각하지도 않았다.

여러 조건이나 이전에 몽골에게 정복당한 케이스들을 살펴봤을 때, 일단 저구유가 죽었던 그 시점에서 최우와 고종에게는 "일단 항전하다가 기회를 엿본다"라는 선택 외에 어떤 선택지도 없었다. 비슷한 외교마찰을 겪었던 호라즘[5]이 어떤 꼴이 나는지 이미 그 결과가 나와있던 마당에 아무것도 안하고 싹싹 빌어도 몽골이 자신들을 갈아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여몽전쟁 초기에 투입된 몽골군의 숫자가 적었던 것 때문에 이들이 2선급 병력이었다던가 하는 통념이 의외로 퍼져 있지만, 이것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이들의 초기 지휘관 살리타이와 후기 지휘관 자릴타이는 모두 잘라이르 부족 출신의 고위 지휘관으로, 잘라이르족은 몽골의 명장 무칼리의 휘하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강도높은 실전경험을 쌓은 정예병들이었다.[6] 살리타이 본인의 상관이었던 무칼리나 혹은 수부타이 같은 몽골 역사상 최고 명장들에 비하면 좀 초라해 보일 수 있기는 해도 살리타이가 어디 여진에서 굴러먹다 온 쭉정이는 절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잘라이르족의 3만 병력 중 전부가 몽골족은 아니라고 해도[7] 이 병력은 예방전쟁이라고 절대 만만히 볼 병력 숫자가 아니었다. 예방전쟁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항복할 의사가 없다면 그냥 밀어버리는 게 당연하므로 고려를 몽골이 여차하면 멸망시킬 의사가 없었다는 주장에도 의문점이 생길 수 있다.

2.1.2. 비판

몽골의 침략 위협이 가시화되어가고 있던 무렵, 압록강 이북의 동진국(東眞國, 1215~1233)[8]에선 고려에 여러차례 동맹을 제의해오지만 당시 무신정권 집권자이던 최충헌이 동진의 동맹 요청을 묵살해버림으로서 고려는 몽골과 외교-군사적으로 맞설 수 있는 유리한 카드를 스스로 강바닥에 내던져버리고 만다. 되려 고려가 몽골과 밀착 관계를 맺을 것을 우려한 동진이 선수를 쳐서 몽골의 고려 침략 명분이 되는 '저고여 암살사건'을 일으키게 되는바, 저고여 암살사건은 동진의 여진족들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몽골 사신을 국경 지역에서 피살한 사건이었다. 저고여 암살사건이 있고나서 몽골은 사건의 진상규명에는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은채 오로지 고려 정부만을 일방적으로 범인으로 몰아가며 침공을 감행하는데, 이것은 일찍부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기회와 명분을 찾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몽골과 고려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였다.

몽골이 처음 고려를 쳐들어올 무렵 몽골의 주력 병력은 금나라와의 장기전에 투입되고 있었다. 1231년 살리타이(?~1232)가 이끄는 몽골 분대[9]가 압록강을 건널 무렵 툴루이(1191~1232)와 사천택(1202~1275)이 지휘하는 몽골 주력 12만이 각각 금나라의 영토인 동관(潼關)과 위주(衛州)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의 실효 지배 영역은 동으로는 대흥안령을, 서로는 카스피해를, 남으로는 황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고[10], 몽골의 주요 원정은 오랫동안 중국과 서아시아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고려를 쳐들어온 몽골 병력은 언제나 소규모 분대 단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몽골의 고려 침공 중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나타난게 1차 침입때인 2,4000여 명이다.) 이러한 몽골의 고려 침략은 금나라를 원정하면서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 전쟁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는데[11], 고려 최씨 정권이 정신만 차리고 있었다면 동시 다발적 공격을 펼치는 몽골을 상대로 충분히 국토를 수호하는게 가능했다는 얘기가 된다. 고려로서는 몽골의 침공 길목인 함신진(의주)을 동진국에 내주고 동진의 영토에서 몽고군을 저지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었다. 비슷한 사례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조선 영토에서 일본군을 저지하였다. 기병 전력이 우수한 동진의 여진족 병사들로 하여금 야전에서 몽고군을 막게 하고, 수성전에 능한 고려군이 동진의 주요 물자 보급로를 방어하며 후방을 지원하는 전술을 펼친다면 국내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몽고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정부 실권자들 중 전쟁에 대비하는 인물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다음의 기록은 그 당시 고려 정부가 국가 방위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최충헌은 스스로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성하다고 장담하여, 매번 변방에서 급보가 올라오면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로 역마를 귀찮게 하고 조정을 놀라게 하는가?”라고 하고, 보고하는 사람을 유배 보내었다. 그러자 변방 장수들이 해이해져 말하기를, “반드시 적병이 두세 성을 함락시킨 연후에야 급보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거란 군사가 침입하였지만, 개경에서 아무런 대비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모두 최충헌을 원망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고종3년(1216), 최충헌 열전 ㅡ

물론 당시 불안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최씨 정권의 입장에선 외적과 맞서는 거 자체가 정권의 운명을 걸어야 할만큼 모험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외적과 맞서는 것이 정 두렵다면 몽골이 국왕의 입조를 요구해왔을때 순순히 고려왕을 수행하며 나아가 칸(Khan)을 접견했어야 마땅하다. 몽골은 직접 군주가 와서 입조하는 나라들에 대하여 예외없이 침략을 멈추고 독립을 보장해주었다. 위구르바우르추크 아트 테긴이나 옹구트알라후시 테긴, 수코타이 왕국람캄행 대왕, 아르메니아 왕국헤툼 1세, 모술바드르 앗 딘 룰루, 안티오크 공국보에몽 6세, 룸 술탄국클르츠 아르슬란 4세, 조지아 왕국다비트 나린다비드 라샤, 블라디미르 공국야로슬라프 2세야로슬라프 3세, 노브고로드 공국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등은 모두 군주 또는 왕세자로서 직접 몽골 조정에 입조하여 전쟁도 피하고 국가의 독립도 지켜낸 사례들이다. 따라서 몽골의 요구에 따라 국왕이 입조했더라도 침략은 정해진 수순이며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일부 회의론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특히 룸 술탄국이나 조지아 왕국, 블라디미르 공국은 초반에 몽골을 상대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패전 후에 국왕이 몸소 몽골 조정에 입조하여 약간의 군사 원조를 조건으로 국가의 독립을 지켜낸 사례다. 몽골이 피정복지에 허용한 이와 같은 자치의 배경에는 유목 제국의 특성상 통치 보다는 정복에 주력하고 그에 필요한 우군 확보에 군사 외교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군주가 직접 나서 항복을 표하는 나라들은 몽골로부터 안보와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고려 얘기로 돌아와서, 군사적 능력도 없으면서 몽골의 입조 요구를 무시하고 도망다니며 자국을 '무방비 상태'의 전쟁터로 몰아넣은 최씨정권의 행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매국 행위로서 지탄받아 마땅하다. 최씨 정권 본인들 스스로도 우를 범한게 뭐냐면, 섬에 고립되어 스스로 정치적 지지 기반을 잃어버리고 나중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을때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점이다. 차라리 최씨정권이 처음부터 몽골의 신하를 자처하고 강대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옆에서 임금을 보조하며 정상적인 통치를 펼쳤더라면 장기간 전시 상태로 인한 국가 마비 상황도 없었을 것이고, 본인들 가문도 역사의 대역죄인이 되어 멸문지화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고려 지도부처럼 무책임하고 아둔한 정부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2.2. 관군의 유명무실화

고려시대 관군은 '2군 6위[12]'의 정부군과 일반 농민들로 이루어진 '백정대'(또는 백정군)로 이원화된 체제였다.(후술) 그러나 몽고침입 무렵 무신정권의 오랜 세월에 걸친 수탈과 국가 정규군의 사병화 작업으로 2군 6위는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대체된 상태였다. 이 당시 국가 공익을 위해 종사하는 공병(公兵)으로서 정규군은 이미 증발하고 없었던 것이다.[13]

다음의 기록들은 몽골이 고려를 쳐들어오기 전에 고려군은 이미 국가 정규군으로서 관군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당시 금산왕자(金山王子)의 병사들이 북쪽 변방을 난입하였으므로, (중략) 5영군(五領軍)[14]을 모으게 하였다. 경도(京都) 백성들을 조사하여 직(職)의 유무를 논하지 않고 무릇 종군(從軍) 가능한 자들은 모두 군대에 속하게 하고 또한 승려들도 징발하여 군사로 삼으니 합쳐서 수만에 달하였다. 정숙첨 등이 순천관(順天館)에서 군사를 점검하였는데, 당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崔忠獻) 부자의 문객(門客, 사병)으로 삼았고, 관군은 모두 노약자인 데다가 여윈 군졸들이어서 원수(元帥)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ㅡ <고려사 세가>, 고종3년(1216), 조충열전 ㅡ
당시에 장군을 파견하여 거란군을 막도록 했는데, 날쌔고 용감한 군사는 최충헌 부자의 문객(門客, 사병)인 반면 관군(官軍)은 약골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중략).... 문객 중에서 관군을 따라 종군하겠다고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먼 섬으로 유배 보내었다.

ㅡ <고려사 세가>, 고종3년(1216), 최충헌열전 ㅡ
고종(高宗) 4년(1217) 5월에 대장군(大將軍) 임보(任輔)를 동남도가발병마사(東南道加發兵馬使)로 삼아 개성[城中]의 공(公)·사(私) 천예(賤隷, 노비)를 뽑아 부오(部伍)에 충당하고, 이를 파견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ㅡ
고종(高宗) 5년(1218) 7월에 재추(宰樞)들이 의논하기를,생도(生徒)로서 아직 관리의 명부[仕版]에 오르지 못한 자는 시(詩)로써 시험하여 80인을 선발하고, 합격하지 못한 자는 모두 종군(從軍)하게 합시다.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ㅡ

위의 기록들은 여몽전쟁의 서막이 된 강동성 전투(1219)의 초입 부분이다. 몽고에 패주한 '거란 잔존병'[15]들이 고려에 들이닥쳤을때 정부가 보인 일련의 대응들을 통해 몇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1) 관군의 노쇄화와 무용(無用)함을 통해 당시 관군이 국가 정규군[16]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번상입역(番上立役)[17]의 부위군으로 이루어진 경군(京軍)의 노쇄화는 이미 오래전에 고려 군사 기반인 부병제가 붕괴되었음을 뜻한다.

(2) 직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승려, 노비, 생도까지 닥치는대로 징집해가며 임의적으로 관군이 급조되는 모습을 통해 당시 관군의 실체는 민간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군사들 중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최씨정권의 문객(門客, 사병)으로 삼았으며, 문객 중에 관군을 따라 종군하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유배보내었다는 기록을 통해 정부군과 관군의 분리 및 단절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1차 몽골 침략군이 개경에 당도하였을 때의 기록인데, 역시 무신정권의 사병화된 정부군은 존재하지만 침략군을 방어할 국가 정규군으로서 관군은 부재함을 나타내어 정부군과와 관군의 단절을 재확인할 수 있다.
몽고군이 선의문(宣義門) 밖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 (중략) .... 최우(崔瑀)와 사위 대장군(大將軍) 김약선(金若先)은 가병(家兵)으로 자신을 지켰고, 성을 수비하는 자는 모두 늙고 쇠약한 남녀뿐이었다. 최우가 어사(御史) 민희(閔曦)와 내시낭중(內侍?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몽고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하였다.

ㅡ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8년 11월 ㅡ

적이 쳐들어와 국토를 유린하는 와중에도 사병 확충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최씨 정권의 모습과 사병 중 관군을 따라 종군하겠다고 요청해온 자들을 처벌한 행위, 그리고 적이 도성 밖에 당도하자 사병으로 자신들만을 호위하게 하고 성의 방비 업무는 전적으로 민간인들에게 떠넘긴 행동을 통해 여몽전쟁 당시 관군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민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국가 공병(公兵)으로서 정부군의 부재 상황을 반영하여 <고려사>는 무신정권의 정부군을 '야별초'(夜別抄)라 하여 관군과 구분해두고 있다. 요컨대, 대몽항쟁 기간 <고려사> 기록에 등장하는 관군(官軍)은 무신정권의 정부군이 아니라 민간인 군사 조직인 백정군(白丁軍)을 가리키는 것이다.

『식목형지안(式目形止案)』에 실록된 북계 41성 주진군(州鎭軍) 군액현황표에 따르면 고려시대 군사체계는 일반 농민들인 백정(白丁)[18]도 백정군(白丁軍)이라 하여 관군에 포함시켰음을 알 수 있다.[19] 백정은 평시에 군역(軍役)을 부담하지 않고 농사를 짓다가 전시가 되면 상비군과 더불어 전쟁에 동원되곤 했었는데 백정군은 바로 이 '비전투 병력'인 농민군[20]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름만 관군인 일반 농민들이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잡척(雜尺)이라 불리는 천민 계층도 관군에 배속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군사조직은 정규군에 해당하는 상비군과 민간인들로 구성된 비상비군으로 이원화된 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는 유사시 일반 농민은 물론 전 계급이 병사가 되는 전시 총동원 체제였던 것이다.[21]

훗날 일본 원정을 앞두고 고려 국왕이 원나라 황제에게 하소연하는 대목에서도 당시 고려의 관군이 농민 출신의 민간인들로 구성되었음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저희 나라는 원래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터라 그들을 몇 달 동안이나 부역시킨다면 농사일은 어떻게 될지 우려됩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5년(1274), 2월 ㅡ
"저희 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관계로 군인과 농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위에 생활마저 매우 피폐한 실정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5년(1274), 4월 ㅡ
"현재 탐라(耽羅)를 수비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사 1천 명은 앞서 일본 정벌 때에 본국에서 차출한 병력 5,300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구가 드물어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없는 터에 다시 정토군(征討軍) 4,700명을 더 차출한다면 도저히 그 수를 채울 수가 없을 것이 우려 됩니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6년(1280), 11월 ㅡ

국가의 최정예들은 모두 최씨정권의 사병으로 강화도에 배치되었고 그나마 있던 관군들도 모두 경기도 해안가에 배치되었기에 강화도와 경기도 해안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지역민들과 소수의 지방군으로 버텨야하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3. 최우의 항복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무신정권의 수괴 최우[22]가 고려 국왕 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귀주성 '과 '자주성'이 항복하도록 한 사건은 당시 무신정권이 군사적으로 몽골과 맞서려는 의지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박서, 김경손 장군이 지휘하는 귀주성 군민들과 최춘명(崔椿命)이 이끄는 자주성 군민들은 무자비한 몽골군의 파상공세로부터 성을 장기간 사수해냄으로서 몽골군의 남하를 겨우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우는 구원 병력을 보내 이들을 돕기는 커녕 벌써부터 몽골과 물밑 협상을 진행하며 간을 재고 있었다.

몽골의 침공 소식을 뒤늦게나마 입수한 고려 정부는 삼군(三軍, 3군)을 구성하여 안북성(安北城, 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몽골군과 대치토록 했으나 문제는 정규 병력의 부재와 고려 지휘관들의 전략 실수,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휘관들부터 병사들을 내팽개치고 도주해버리는 어이없는 행동으로 애써 모은 농민군을 절반 가량을 날려먹게 된다. 특히 무신정권 수괴 최우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음은 물론 도방 병력을 내보내지도 않았으니 패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3군은 전, 후, 좌, 중, 우군으로 편성된 5영군을 좌, 중, 우군으로 개편한 고려의 군사 편제였다. 몽골이 쳐들어오기 몇 해 전 거란 금산왕자(金山王子)가 이끄는 유민들이 고려를 쳐들어왔을때 민간인들로 급조된 5영군의 무용(無用)함과 훗날 백정(白丁)[23], 잡색(雜色)[24], 승려 등으로 조직된 고려군이 진도의 삼별초군을 토벌할 당시에도, "삼군(三軍)이 진도(珍島)를 토벌하였다."(三軍討珍島)[25]라고 되어 있어 3군은 편제상의 칭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북성 전투에서 격파당한 3군은 여러 도의 농민들은 물론 초적떼까지 닥치는대로 끌어모은 비정규 병력이었다.[26]

비록 안북성에서 3군의 절반 이상을 잃긴했지만 수도 개경에는 1만여 정도로 추정되는 최씨정권의 사병들[27]과 비록 비전투원들이긴 하지만 호국 정신에 불타는 3만여명의 승려들[28]이 주둔해 있었다. 이 당시 고려를 침공해온 몽고군 병력은 3만이 채 안되었는데[29], 그마저도 주력 병력이 아니었으며 금나라를 원정하면서 고려에 들어와 국지전을 수행하기 위한 병력이었다.[30] 더군다나 몽골 분대 1만이 귀주성의 항전으로 북방에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최씨정권의 가병들과 승려들, 주민들이 합세하여 응전하는 동안 안북성 전투에서 흩어진 농민군들을 재소집하여 외부에서 성을 구원한다면 충분히 몽고군을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에 맞설 군대를 보내면 권력을 잃게 될까봐 겁을 먹은 최우는 맞서 싸우기는 커녕 당시 허수아비 임금 고종을 강압적으로 귀주성의 '박서'와 '김경손'[31], 자주성의 '최춘명'에게 성문을 열도록 재촉하고, 이에 항명하는 최춘명을 처형하려고 한다. 이때 최춘명은 한 몽골 관리의 만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국토와 국민을 수호하는 용장을 국가 지도부가 죽이려하고 되려 자국을 쳐들어온 적군이 이를 말리는 아이러니였다.

4.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최우

1차 몽골 침략군이 되돌아간 뒤 최우가 벌인 ''다루가치 주살모의사건'(1232)과 '서경 주민 강제 이주 사건'(1233)은 모두 무신정권의 외교 실패와 전략 실패를 제대로 보여주는 예다.

최우와 강화를 맺은 몽골은 고려로부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은 후 고려 임금의 내조(來朝)와 72인의 다루가치(민정 감독관)들을 서경을 비롯한 북계 주현에 두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물러났다. 그런데 정작 몽골군이 되돌아가고나서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최우가 서경에 주둔한 다루가치들을 주살할 계획을 세움으로서 몽골의 2차 침략의 빌미를 만들고 만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국왕을 협박해 몽골군에 항전하던 장군들의 항복을 강요하고 이에 항명하는 장수의 목을 치려고 하던 인물이 막상 몽골군이 물러가자 역으로 몽골을 자극해 재침의 빌미를 제공해버린 기 막힌 상황이다. 최우의 '다루가치 주살모의사건'은 당시 최씨 정권의 반대 세력이 많던 '고려 제 2의 도시' 서경(西京, 현재 평양)이 다루가치들과 공모하여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해 계획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최우의 계획은 사전에 다루가치들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긴 했지만 이듬해 서경에서 친몽 세력들이 일으킨 반란(필현보의 난, 1233)은 그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무엇보다 당시 고려에 주둔한 원의 다루가치들은 병권과 군대를 거느린 지휘관이 아니라 단순히 항복한 나라의 약속 이행을 감시하는 하급 관리들에 불과했는데 굳이 이들을 살해하여 위기를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최씨 정권이 몽골과 항전할 의지가 있었더라면 몽골이 고려에 다루가치를 주둔시키는 것을 처음부터 단호히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몽골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고 왕의 내조까지 약속한 상황에서 몽골군이 물러난 이후엔 약속을 파기하고 몽골 관리들을 죽이려 해서 몽골을 자극해 재침의 빌미를 만든 것은 그 자체가 외교 파탄이었고, 최우 개인의 판단 착오로 국가 전체를 전화(戰火) 속에 몰아넣은 매우 무모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최우는 서경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서경 주민 전원을 강제로 섬으로 이주시켜 고려 제 2의 도시 서경이 사람 한명 없는 폐허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서경은 고려 제 2의 도시이자 방어선 역할도 수행하는 도시였는데 최우는 단지 자신의 권력에 해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 아침에 황무지로 만든 것이다. 이때문에 북계서해도의 핵심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던 서경이 최우에게 당해 하루아침에 몰락했고 향후 북계와 서해도 지역은 몽골군이 쳐들어올때마다 속소무책으로 털리게 된다.

5. 몽골의 침공(1232 ~ 1259)

몽골의 1차 침공이있었던 1231년부터 고려 태자가 몽골에 입조하기 직전인 1259년까지의 시기이다. 약 30여년간의 세월 동안 총 아홉 차례의 침공을 당했으며 침공을 당할때마다 매번 몽골에 왕족과 조공을 바쳐야만 했으며 고려의 전 국토가 몽골군에게 초토화되는 등 많은 인적, 물적 피해들을 입어야만 했다.
여름 4월. 임술 상장군(上將軍) 조숙창(趙叔昌)과 시어사(侍御史) 설신(薛愼)을 파견하여 몽고에 가게 하여 신하를 칭하는(稱臣) 표문을 올리고, 나(羅)·견(絹)·능(綾)·주(紬) 각 10필과 각종 금은으로 만든 술그릇, 그림을 그린 말다래(畵韂), 그림을 그린 부채 등의 물건을 바쳤다. 또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금은으로 만든 그릇, 비단, 수달 가죽, 그림을 그린 부채, 그림을 그린 말다래 등을 주고 휘하의 관원 16명에게까지 또한 차등 있게 주었다. 살리타이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르기를, ... (중략) ... "또한 조(趙) 병마사(兵馬使)에게 부탁하시기를 의주(義州)의 민호(民戶)의 정황을 조사해보라고 하셨는데, 일이 이미 시행되어 그 지역에 군대(兵馬)를 보내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의주성의 성주(城主)와 민호(民戶) 등이 작은 뗏목을 타고 급히 도망가다가 풍랑으로 모두 빠져 죽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조사할 수 없음을 모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밖에 보내신 글 안에 언급된 것은 일일이 보고드릴 것입니다."

ㅡ <고려사>, 1232년 4월 12일 ㅡ
또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狀)에서 말하기를, "신(臣)이 한두 가지 소망하는 일들은 이미 올린 표문(表文)에 갖추어 말씀드렸으나 오히려 마음에 답답하고 막힌 것은 모두 다 아뢰지 못하였고, 표문에 쓸 수도 없어서 다시 장계(狀啓)로 아뢰고자 합니다. 저희 나라는 본래 해외(海外)의 작은 나라로 지난 시대 이래 반드시 사대(事大)의 예를 행한 연후에야 나라를 능히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대금(大金)을 섬겼는데, 금이 멸망한 연후에 조공(朝貢)의 예가 처음으로 폐지되었습니다. ... (중략) ...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천지와 부모의 자애로움으로 저희 나라에 다른 뜻이 없음을 헤아리시고 대군에게 수레와 깃발을 돌리라는 칙령을 내리시어 영원히 소국을 보호하신다면, 신(臣)은 더욱 노력과 정성을 다해 매년 토산물을 바쳐 진정한 충성을 표할 것이고 더욱 황제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것입니다. 이는 신의 뜻이니 폐하께서는 조금이나마 가련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1232년 11월 ㅡ

5.1. 무신정권의 직무유기

1231년 고려에 대한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고 이듬해 강화도로 들어간 무신정권40여년간 국왕을 무시하고 월권을 휘두르며 국가 안보를 내팽개치고 직무유기와 수탈을 일삼아 고려의 수많은 백성들을 모두 사지로 내모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아래의 이규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시의 내용이 현실과 너무 괴리감이 심하며 백성들의 고통은 완전히 무시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무신정권(최씨정권)의 직무유기와 상황인식은 굉장히 처참한 지경이었다.

거기다 이러한 무신정권의 수준이 말해주듯이 몽골은 '고려 국왕의 입조'라는 약속이행을 요구하며 고려에 총 아홉 차례나 침입해왔으나 무신 정권의 수뇌부들은 몽골이 쳐들어올때마다 제대로 된 군사적 대응을 보여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32]

심지어 몽골이 쳐들어오기 전 단 한번도 외교적 대응책을 강구해본 적도 일절 없었다. 특히 이 시기 고려 무신정권은 몽골군이 국경을 넘어와 강토를 유린하고 강화도 코 앞까지 당도하였을때야 적국의 사신을 알현하는 일만 되풀이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매번 국민들을 수탈하여 거두어들인 막대한 공물을 바쳤음에도 몽골의 침략을 저지하지도 못하고 할 생각조차 없었다.

몽골이 이렇게 고려를 계속 쳐들어온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신정권이 몽골의 입조 요구를 끝까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몽골은 고려에 쳐들어올때마다 임금이나 태자의 입조를 줄기차게 요구했었는데 그때마다 최씨 무신정권이 보인 행보는 여러 핑계를 대며 입조 기일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왕의 사촌을 임금으로 속여 내보내거나, 왕의 차남을 세자로 속여 보내는 등 몽골 황제를 속이는 기만을 하였고 이는 몽골을 분노하게 만들어 재침의 빌미를 거듭해서 제공한 것이었다.

사실 최씨 정권이 몽골의 입조 요구를 끝까지 따르지 않아 화를 자초한데에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자신들의 권력을 잃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최씨 정권의 '벼랑끝 외교'는 나라와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최씨 정권이 이처럼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고려 백성들은 몽골군의 침략과 약탈, 살육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최씨 정권이나 고려 왕족들, 귀족들은 강화도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으면 그만이지만 내지의 백성들은 조정에서 아무런 보호를 해주지 않다보니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는 수 밖에 없었다.

외교란 외세로부터 나라와 국민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미 국가 안보가 개박살나고 국민들이 떼죽음을 당하고난 후에야 조공을 바치는 일을 되풀이하는게 외교가 될 수 없다. 이러다보니 최씨 정권의 대몽 외교는 외교라고도 부를 수 없는 명백한 매국 행위였다. 다음은 무신정권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 대표적 사례다.

1254년, 몽골의 몽케 칸이 사신을 보내 강화도 고려 조정의 실권자 최항을 비롯한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였으나 최항이 요구를 거부하여 고려는 몽골의 6차 침략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에 분노한 몽골은 그 해 군대를 파견했고 몽골군이 전라도, 경상도 지역까지 쳐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20만이 넘는 인구가 몽골에 인질로 끌려간 후에야 최항은 고종을 승천부(昇天府)로 내보내 몽골 사신과 회견토록 한다. 20만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동안 정부군을 출동시켜 단 한 차례의 군사 작전도 감행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아울러 몽골군에 의한 체포, 구금, 납치 등 예상되는 위기 상황들이 산재함에도 최항이 달랑 80명의 호위병사들만 딸려보내 국왕인 고종을 적국의 사신과 회견토록 한 것은 그가 고려 왕실을 우습게보고 있으며 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결국, 이러한 최씨 정권의 월권 행위와 고려 왕족들의 무능함이[33] 결합하여 여기저기서 반란과 친원파가 속출하는 발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국가 지도부의 명백한 매국 행위들을 보고서도, 단순히 몽골 간섭기 동안 국가 지도부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국가의 자주성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에 국권을 특정 세도가(家)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족벌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5.1.1. 외교실패

13세기 중반 고려는 사실 병자호란 직전의 조선과 비교할때 외교적 자세를 취하기 한층 더 수월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란과 침공으로 쇠퇴해가던 명나라와 아직 산해관도 넘지 못한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과 달리 13세기 중반 중국의 정세는 이미 몽골 제국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설령 남송이 위기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몽골의 몰락은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은 몽골이 명확하게 쥐어가고 있었다. 아니, 13세기 중반 시점에 이미 몽골 제국은 동아시아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넘어서 동유럽러시아우크라이나까지 침공하여 러시아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정도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패권국이었다. 고려 정부는 몽골 제국이 아주 강대하며 전쟁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씨 정권은 정확한 보고가 올라오면 그 신하를 숙청하는 식으로 스스로 의사결정의 문을 닫아버렸다.

특히 1234년에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중국 전역에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한 몽골은 곧 유라시아 전역으로 세를 뻗어나가며 쉴새없이 남송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몽골은 오랫동안 변방에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몽전쟁 30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전투가 전개된 기간 보다는 '휴식기가 더 길었던 것'이다. 실제로, 1239년 4월부터 1247년 6월까지 약 8년 동안은 몽골의 침공이 없던 휴식기였다. 몽골의 침략을 당하던 해에도 중간 중간에 휴식기가 이어지곤 했다.

이러한 대외적 상황은 고려로서는 몽골로부터 독립을 담보받고 국가 안보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고려 국왕이 서둘러 몽골에 입조하여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무신정권이 거느린 사병을 파견하여 몽골의 후방을 돕는 시늉만이라도 해도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침략을 피할 명분을 만들게 되는 것이었다. 원군을 파견해 시간을 버는 동안 국가 지도부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복귀하여 내정을 정비하고 정상적인 통치를 실시해 국력을 길러 몽골 침공에 대비했더라면 고려가 무기력하게 몽골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몽골 역시 자신들을 도와 정복 사업에 참여하는 민족들을 우대해주었다. 대표적으로 거란인들과 키르기즈인들이 그랬고,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웅구트인, 위구르인들이 그랬다. 열거한 민족들은 모두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는 대가로 자치권을 보장받는 등 몽골로부터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1260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1260년 3월, 태자 왕전(훗날 원종)이 몽골 조정에 입조하여 정식으로 항복을 표하자 30여년간 이어져온 전란은 멈추었다.

이후 몽골에서는 아리크부카쿠빌라이간의 계승전쟁이 벌어지고 새로 황제로 등극한 쿠빌라이는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여전히 남송은 장강을 경계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1260년부터 이후 10여년간의 휴식기가 고려 국운을 결정지을 터였다.

그러나 1260년 초 최씨 정권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김준[34]이 다시 반기를 들었고 국왕의 환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무신정권의 전횡과 수탈은 126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고 이로써 국가 주권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는 영영 날아가고 만다.

1270년 마침내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었을때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거부할수있는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엔 강화도에 들어가 국토와 백성을 방치하고 오랜 기간 전횡을 일삼아 국가 경제와 민생을 파탄낸 최씨, 김씨 두 무신정권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신정권이 한민족 최대의 수난기인 원 간섭기를 불러온 원흉이라 할 수 있겠다.
5.1.1.1. 최우에 대한 변론
상술하였듯이, 저구유가 피살당한 시점에서 고려에게 몽골에 무릎 꿇어서 화를 피한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건으로 전쟁 명분을 만드는 이들을 상대로 저자세로 나가 봤자 전란을 피할 수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이런 외교적인 상황은 몽골을 적으로 맞은 나라들 중에도 최악에 가까웠다. 예방전쟁이건 정복전쟁이건 이런 우발적인 사건 때문에 강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날벼락같은 사태 전부를 당시 조정이나 최우에게 책임을 물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35]

물론 뭘 골라도 지뢰밭이었던 최우와 달리, 이미 원종이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는데도 자기 권력 유지 때문에 고집을 부려 나라를 다시 위기에 빠트릴 뻔한 김준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불가능하다.[36]

5.1.2. 방어전 회피

여몽전쟁 30년 동안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들어가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일말의 군사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의 군사분계선에 해당하는 북계 방어선을 스스로 포기하여 국토와 국민을 무방비 상태로 외침에 노출시켰으며 중간 중간에 몽골 침공이 없는 휴식기가 이어졌음에도 육지로 나와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적군이 쳐들어왔을때 방어군조차 제대로 파견하지 않았다. 여몽전쟁 30년 동안 확인되는 총 56회의 전투[37] 중 야별초(夜別抄)[38]가 몽골군을 상대로 기록한 교전 횟수는 고작 5차례로서 3차 침입때와 9차 침입때 각각 3차례와 2차례의 교전 횟수를 기록하여 거의 활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야별초의 교전 횟수 뿐만 아니라 몽골군을 상대로 교전한 야별초의 병력 규모다. 무신정권은 두 차례의 교전에서 고작 160~200명의 야별초 대원만을 내보냈을 뿐이다. 나머지 세 차례의 교전도 야별초가 현지 주민들을 규합하여 척후병 또는 본대와 뒤처진 소규모 몽골군을 방어하는 형태의 일회성 작전으로 전개되어 그 규모가 미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전들은 모두 정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지휘관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 후방 지원을 받으며 몽골군 주력을 섬멸하는 조직적 군사 작전이 아니라 지휘관 개인 또는 부대원들의 자발적 의지와 판단에 의한 일회성 군사 시위였다. 여몽전쟁 동안 야별초가 몽골군을 상대한 총 5차례의 교전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몽골의 3차 침입(1235년 7월 ~ 1239년 4월)
최우(崔瑀) 도방(都房)이며 야별초도령(夜別抄都領)인 이유정(李裕貞)이 적과 싸우겠다고 자청하자 병사 160인을 주어 파견하였다.

ㅡ 1235년 8월 21일 ㅡ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이임수(李林壽)와 박인걸(朴仁傑)이 각각 100여 인을 이끌고 나뉘어서 몽고군 진영으로 향하였다.

ㅡ 1235년 8월 25일 ㅡ
보다시피 정부 수뇌부의 의사가 아닌 일개 지휘관들의 자발적 자원 요청으로 고작 160~200명의 군사를 내보내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통해 병력을 내보내게 된 원인이 무신정부 수뇌부와 지휘관들 사이의 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기록은 이유정과 그를 따르는 병력이 모두 전멸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박인걸과 이임수 역시 별다른 기록 없이 전사자들을 내었다는 기록을 통해 이들의 작전이 실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유정(李裕貞) 등이 해평(海平, 경상북도 구미)에서 몽고군과 싸웠으나 패전하여 군사가 모두 죽었다.

ㅡ 1235년 9월 ㅡ
박인걸(朴仁傑) 등이 공주(公州) 효가동(孝加洞, 충남 공주시 소학동)에서 몽고군과 마주쳐서 싸웠는데 16인이 전사하였다.

ㅡ 1236년 12월 ㅡ

반면 지평현 전투는 정부군이 지역민들의 힘을 빌려 승전할 수 있었는데 단순히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라고만 나와 있고 그 구체적인 교전 규모는 나와있지 않다.
야별초(夜別抄)가 지평현(砥平縣, 경기도 양평) 사람들과 함께 밤에 몽고군을 공격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으며 말과 나귀를 노획하여 돌아와 조정에 바쳤다.

ㅡ 1235 10월 ㅡ
분명한 것은 이후 몽고군이 3년여간 전국을 휘젓고 다니며 국토를 유린하는 것으로 보아 상기한 전투가 고려를 쳐들어온 몽골 주력 병력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1238년에는 몽고군이 경주 지역까지 이르게 되어 황룡사는 이때 몽고군에게 파괴된다.
몽고군이 의주강(義州江)을 건너 오물지천(烏勿只川) 및 삭녕진(朔寧鎭)에 주둔하고, 유격병(遊擊兵)이 가주(嘉州) 및 안북부(安北府)의 운암역(雲岩驛)에 주둔하였다. 가주와 박주(博州) 사이에서 불길이 하늘에 닿았다. 또 선주(宣州)의 형제산(兄弟山) 들판 17곳에 나누어 주둔하였고, 마침내 자주(慈州)·삭주(朔州)·구주(龜州)·곽주(郭州)의 사이에 두루 퍼졌다. 선봉은 황주(黃州)에 들어가 신주(信州)·안주(安州)의 두 주에 이르렀다.

ㅡ 1236년 6월 ㅡ
몽고군이 동경(東京, 경주)에 이르러 황룡사탑(黃龍寺塔)을 불태웠다.

ㅡ 1238년 윤4월 ㅡ


몽골의 9차 침입(1258년 4월 ~ 1259년 3월)
다음은 9차 몽골 침략때 정부군이 활약한 기록이다.
몽고군의 척후병 1,000기(騎)가 수안(遂安, 황해도 수안군)으로 들어왔다. 야별초(夜別抄)를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禦之)

ㅡ 1258 4월 ㅡ
몽고군이 성주(成州) 기암성(岐巖城, 평안남도 성천)을 공격하였는데, 야별초(夜別抄)가 성 안의 사람들을 이끌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ㅡ 1259 1월 ㅡ
등주(登州)·화주(和州) 등의 여러 성의 반란한 백성이 관인(官人, 몽골인)을 자칭하고 몽고인을 인도해 와서 한계성(寒溪城)을 공격하였다.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夜別抄)를 이끌고 출격하여 섬멸하였다.

ㅡ 1259 2월 ㅡ
상기한 전투들 역시 그 교전 규모나 양상, 피해 상황 등은 나와 있지 않고 단순히 '이겼다.', '섬멸하였다.'라고만 나와있을 뿐이다. 특히 첫번째 기사는 '방어하게 하였다.(禦之)'라고만 되어 있어 실제 교전이 일어났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한계성 전투에서 정부군이 상대한 적군은 그 주축이 몽고군이 아닌 고려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어 내전 양상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교전이 있고난 후에도 어김없이 몽고군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통해 상기한 교전들 역시 몽골 주력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몽고군이 착량(窄梁)에서부터 와서 갑곶강(甲串江, 강화 해협) 밖에 진을 치고 온 산과 들을 에워쌌다.

ㅡ 1258년 9월 ㅡ
이 해에 전국의 곡식이 모두 몽고군에게 약탈되었다.

ㅡ 1258년 미상 ㅡ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몽고 척후기병이 서경(西京, 평양)을 지나갔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도성(京城)에 계엄을 내렸다.

ㅡ 1258년 6월 ㅡ
서경(西京)에 주둔하던 몽고군(蒙兵)이 청송현(靑松縣)·안악군(安獄郡)·풍주(豊州)·해주(海州)에 함부로 들이닥쳐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여 갔다.

ㅡ 1259년 7월 ㅡ

이상이 여몽전쟁 30년동안 정부군이 몽고군을 상대로 기록한 전투 내용의 전부다. 고작 5회의 소규모 교전에서 3번의 승전을 기록했으며 그 중 하나는 고려 난민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마저도 지휘관 개인이나 부대의 자의적 의사에 의한 것으로서 일회성 작전 후에는 어김없이 전국이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처럼 최씨정권은 정부군을 파견하여 단 한 차례의 방어전도 감행하지 않았는데 그들로서는 권력을 담보받을 수 있는 최상의 조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사실은 최씨정권이 몽골로부터 그렇게 안전을 담보받고 있는 동안 내지의 백성들은 곳곳에서 죽어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육지에 주력 병력을 파견하면 강화도의 방비가 뚫리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섬에만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도에 불과하기에, 국경을 스스로 포기하여 전국을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한 최씨 정권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씨정권 휘하에는 침략군을 저지할만한 충분한 병력이 있었음에도[39], 단 한 차례도 병력을 파견해 방어전을 펼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국가 안보를 팔아먹은 매국행위로서 욕먹어 마땅하다. 설사 병력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병사들을 모집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여 외침으로부터 국토와 국민을 수호하는게 정부가 해야할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국민을 수호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정부에 과연 군대가 존재할 이유가 있을지 따져볼 문제다. 외적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정권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은 계속 거두어들이고 있었다는거 자체가 이미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이었다.

5.2. 별초와 야별초

대몽항쟁 기간 동안 고려사 기록에 등장하는 별초(別抄)와 야별초(夜別抄)가 서로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일반 별초는 야별초와는 그 기원과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병종이었다. 별초의 기원은 무신정변 직후인 1174년(명종 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신정권의 전횡과 횡포로 국가 치안이 붕괴되어 전국에 도둑이 들끓게 되자 지역 사회의 방범을 위한 일종의 민방위로서 별초가 조직되었다. 별초는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선발되어 구성되는 임시적인 성격[40]의 부대로서 이것이 도성(개경)에서 선발되면 경별초(京別抄), 지방에서 선별되면 외별초(外別抄)라 하여 그 앞에 각 지역의 이름을 붙여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최충헌 집권기인 1220년대에 이르러 그 일부 구성원이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흡수되면서 기존의 별초로부터 독립하여 야별초(夜別抄)가 따로 탄생하게 된다. 이들 야별초는 무신정권의 도방(都房, 사병의 숙위기관)에 배속되어 6개의 번(番)으로 나뉘어 군사훈련과 숙위(宿衛, 숙식과 호위)를 번갈아 하는 무신정부의 정규 부대였다. 반면에 기존의 별초는 무신정부의 야별초에 속하지 않은 일반 농민들로 구성되어[41], 몽고군이 쳐들어올 무렵 대몽항전을 이끄는 주요 전투원이 되었다. 일례로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몽고군이 충주성에 도달했을때 천민들로 이루어진 '잡류별초'들이 성을 방어해내었다. 그런데 이후 도망갔다 돌아온 '양반별초'들이 혼란 중에 물건이 없어진 것을 두고 잡류별초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며 오히려 이들을 죽이려하자 분노한 잡류별초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1232, 충주성 반란) 최우가 강화도 천도를 서두르게 되는 계기가 된다.

5.3. 강화도 천도에 대한 평가

5.3.1. 옹호

강화도 천도는 고려사에는 1232년에 진행됐다고 기재돼 있다. 1차 침입이 끝난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뒤에 일어난 일로, 당시 상황은 일부 명장들의 분투에도 개경이 위협받았던 풍전등화 상황이었다. 고려 정부로써는 당연히 더 이상 야전으로는 몽골군을 상대할 능력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항전 의지가 있다면 강화도나 아니면 몽골군의 공략이 어려운 다른 섬들로 천도하는 건 최씨 정권이 아니라 더 유능한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어도 당연히 가장 가망 있는 선택지로 둘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천도는 전황이 불리하면 일이 터지기 전에 하는 건 직무유기가 절대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본인이 가장 먼저 격문(선전포고문)을 사신 손에 들려 보내놓고도 6개월이나 뭉개고 있다가 홍타이지가 쳐들어오자 급하게 강화도로 들어가려다가 실패했다. 이런 꼴이 안 나려면 결국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 미리 천도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는가?

5.3.2. 비판

하지만 무신정권 옹호론자들은 몽골 침략 당시 고려 조정강화도로 옮긴 행위가 몽골에 대한 항전 의지를 보인 거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외침을 당해 국가 지도부의 거처를 옮기는 행위는 몽골 침략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국 역사상 비일비재하게 있어왔던 일로서 '조정을 옮기는 행위' 자체가 외적에 대한 항전 의지를 표방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거란의 2차 침공 당시 현종나주로 피신했고, 공민왕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갔다. 임진왜란때 선조의주로 피난갔고, 병자호란때 인조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대구부산이 차례로 임시수도 역할을 수행했다. 열거한 사례들은 모두 적군이 압도적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함락을 코 앞에 두고 일어난 일들이다. 반면에 몽골 침략 당시 고려 정부는 소규모 적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국가의 인구와 자원 중심지인 수도를 포기했는데 정부 스스로 '직무유기'를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5.4. 무신정부의 친몽파 비호 정책

여몽전쟁 기간 동안 무신정권이 취한 친몽세력 비호 정책은 훗날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나오게 되었을때 친원파가 고려 내정 깊숙이 자리잡는 발단이 되었다. 필현보(畢賢甫)와 더불어 서경반란(1233)을 주동한 홍복원(洪福源)은 몽골로 달아나 귀주를 비롯한 서경 이북의 40여 성들을 몽골에 갖다 바치는데[42] 홍복원의 가족들은 되려 최우로부터 관직까지 하사받으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게 된다. 최우는 홍복원의 딸을 위해 직접 주례를 서기도 하며 아예 홍복원에게 벼슬을 제안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의 침략을 두려워한 최씨 정권이 친몽 세력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포섭하는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무신 정권 두령(頭領)들은 최우의 예를 따라서 친원파들을 포섭하는 정책을 연달아 펼치게 된다. 최우의 뒤를 이은 최항은 몽골이 고려를 쳐들어왔을 때 투몽해 부역하다 돌아온 장수 윤춘(尹椿)[43]에게 집과 쌀 200곡, 콩 100곡을 내리고 친종장군(親從將軍)[44]으로 승진시켰다. 또한 몽골에 투항하여 동경총관(東京摠管)을 지내고 온 송산(松山)에게도 하인을 비롯한 많은 양의 선물을 하사하였다. 최항의 뒤를 이은 최의는 원나라에 귀순하여 몽골에 6차 고려 침략의 명분을 제공하고 돌아온 민칭(閔稱)[45]에게 집과 미곡, 의복을 내리고 산원(散員)[46]으로 임명하였다. 최의의 뒤를 이은 김준은 투몽하여 몽골 장수 야속달(也速達, 예수데르)의 양자가 되어 몽골을 위해 부역하다 돌아온 한홍보(韓洪甫)의 귀순을 허락하고 신변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친원파들은 몽고의 1차 침략이 시작된 이래로 공민왕대(代)까지 고려사에 끊이지 않고 나타나 고려가 멸망할때까지 골칫거리가 되는데 몽골의 눈치를 보던 고려 정부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친원파들을 비호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 고려 정부 자체가 거대한 친몽, 친원파 집단이었던 셈이다.

5.4.1. 반론

다만 그렇다고 제시된 인사들은 진짜 매국노였던 홍복원을 제외하고는 순수하게 부원매국노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복잡하며, 심지어 홍복원에 대한 처우조차도 어느 정도는 변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윤춘은 원나라로 홀랑 넘어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은근슬쩍 돌아온 사람이 아니다. 윤춘은 압해도 전투 이후 1256년에 고려에 재귀순하면서 압해도 전투를 몽골 측에서 바라본 내용을 최항에게 상세하게 보고했다. 그가 가져다준 정보는 자릴타이와 그의 군대가 해안가에 배치된 투석기를 무서워한다는 매우 유용한 정보였으며, 더불어 이현이 몽골에게 아부하면서 "우리 물자가 모두 육지에서 나오니 해로를 틀어막으라"라고 주장한 데 대한 대항책으로 해도 입보책을 강화해서 실시하고 섬의 생산량을 늘려 대항할 것을 간언하기까지 했다.[47]

송산과 한홍보는 윤춘만큼의 공은 없으나,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고 은근슬쩍 돌아온 놈을 최항이 잘 대해준 게 아니라 다시 몽골에서 탈출해 귀순한 일종의 재귀순자다.

마지막으로 민칭은 최의에게 이제 몽골이 더 이상은 전쟁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당연하지만, 몽골에 항복했다가 다시 도망쳐온 이들은 윤춘이나 민칭처럼 중요한 정보원일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재귀순자들은 일단 중요한 선전도구가 된다. '적들이 얼마나 잔학무도한 놈들이면 항복한 사람들까지 도로 도망오겠냐?' 같은 메세지를 아군에게 보낼 수 있는 것. 이런 이들을 처벌하는 건 당연히 뒷날의 귀순자를 막는 실책이고, 최항이나 최의가 아무리 무능했어도 짐작했을법한 일이다. 이들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재귀순자들에게 부역 책임을 물어 처벌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홍복원은 좀 복잡한 경우인데, 고려사의 홍복원 반역열전에 따르면 원래 홍복원이 몽골로 도망치자 고려 정부는 재빠르게 홍복원의 가족들을 모조리 생포하여 유배시켜버렸다. 하지만 홍복원이 몽골 치하의 고려인들을 지배하는 직위에 오르는 등 예상 이상으로 몽골에서 권력이 커지자 당황한 최우가 도로 가족들을 불러내 벼슬자리도 주고 어르고 달래보려고 한 것이다. 고작 매국노 한 놈한테 휘둘리는 모습이 썩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지만, 최우도 홍복원이 좋아서 이렇게 대우해준 것은 아니다.

5.5. 최씨 정권과 김준 정권의 수탈

무신정권은 강화도 파천 40여년 세월 동안 강화도는 물론 내지에 대한 끊임없는 수탈을 자행하여 국고를 탕진시키고 국가 경제를 파탄낸 원흉이었다. 이 시기 <고려인들의 적은 고려 정부>였다고 해도 실로 과언이 아니었다. 무신정권이 자행한 수탈과 만행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5.5.1. 최씨 정권

1256년, 신안 압해도에서 해전이 벌어져 최고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몽골 수군 70여척이 지방군과 주민들에게 격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춘은 재귀순 후 최항에게 이 전투를 몽골군 시점에서 본 정황을 보고하면서 섬의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킬 것을 간언한다. 이는 최항의 부친 최우의 해도 입보책을 강화시키자는 술책이었고, 이 정책의 방향성 자체는 옳았다. 문제는 그 수단이 개판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폭압적인 무신정권 아니랄까봐 이 정책 역시 매우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저질렀는데, '수로방호별감'들이 이런 임무를 맡았다. 그 중에서도 '최항의 사냥개' 송길유(宋吉儒)[48]의 악행이 자자했다.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의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길유는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옮기기를 싫어할까 염려하여 공사(公私)의 재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보다 먼저 최항이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주민들을 모두 몰아서 섬 안으로 들어가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워서 굶어 죽은 자가 열에 여덟ㆍ아홉은 되었다."

─ 고려사절요 1256년 ㅡ

당연하지만 청주는 내륙인 충청북도의 중심도시로, 이곳 주민들이 해안가 사람들보다 섬 생활에 적응이 힘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데도 최항은 이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밀어붙인 것이다. 그나마 억지로라도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 신세는 나은 편인데,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때려죽이고 재산까지 불태워버리는 악행을 저질러 그들 중 8~9할이 아사했다.
"송길유가 경상도 수로방호별감이 되어 각 고을의 인물을 검찰(檢察)하여 섬으로 들여보내는데, 영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때려 죽이고, 혹은 긴 새끼로 사람의 목을 잇달아 엮은 다음 별초를 시켜 양 끝을 잡고 끌어서 깊은 물 속에 던져 거의 죽게 되면 꺼내고 조금 깨어나면 다시 그와 같이 하였다."

─ 고려사절요 1258년 ㅡ

애초부터 대규모 인구이동정책에서 부작용이 아예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특히 타지로 옮겨가는 사람들 전부가 처음부터 잘 적응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최우나 최항이 할 일은 국고나 개인 재산을 풀어서 섬으로 옮긴 사람들을 지원했어야 할 것이다. 윤춘의 계책 또한 '섬의 경제력을 강화시켜서 방비를 튼튼하게 만들자'지, '사람들을 타지에 떨어트려서 거지꼴로 만들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항은 국고를 열었던 건 이런 섬 이주민이나 지방군이 아니라 자기 사병들이었다.
8월에 신흥창을 열어서 최항의 가병을 진휼하였다."

ㅡ 고려사절요 1258 ㅡ

다음은 모두 『고려사』가 전하는 기록들이다.
"(최)우가 제 집을 짓는데, 도방(都房)과 사령군(四領軍)을 모두 부역시켜 배로 옛 서울 송도의 재목을 실어 오고, 또 소나무ㆍ잣나무들을 실어다 집의 동산에 심은 것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그 원림이 넓기가 무려 수십 리였다."
"12월에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또 안양산(安養山)의 잣나무를 옮기어 집의 후원에 심었다. 안양산은 강도(江都)에서 여러 날 걸리는 거리인데 문객인 장군 박승분(朴承賁) 등으로 감독하게 하였다. 때는 추위가 한창이어서, 일꾼들 가운데 얼어 죽는 자도 있어 연로에 있는 군현(郡縣)의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그 소요를 피하였다."
"5월에 최이가 종실의 사공(司空) 이상과 재ㆍ추들을 위해 그 집에서 잔치하였다. 이 때 채색 비단으로 산을 만들어 비단 장막을 두르고 가운데 그네를 매었는데, 문수(文繡)ㆍ채화(綵花)로 장식하였다. 또 팔면(八面)을 은단추와 자개로 꾸민 4개의 큰 분(盆)에 각각 얼음 봉우리가 담겨 있고, 또 4개의 큰 물통에 붉은 작약과 자줏빛 작약 10여 품(品)을 가득히 꽂았는데, 빙화(氷花)가 서로 비치어 겉과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였다. 기악과 온갖 잡희를 베풀고, 팔방상(八坊廂)의 공인(工人) 1천 3백 50여 명이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 들어와 풍악을 연주하니, 거문고와 노래와 북과 피리의 소리들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팔방상에게는 각각 백은(白銀) 3근씩을 주고, 영관(伶官)과 양부(兩部)의 기녀(伎女)와 광대에게도 각각 금과 비단을 주니, 그 비용이 거만(鉅萬)에 달하였다."

고려백성들은 몽골군 침략과 약탈에 시달리는 동시에 강화도의 최씨정권의 수탈에 시달렸다. 그 결과 30년 전쟁동안 백성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동안에 강화도에서는 왕족과 귀족들이 격구하면서 반찬투정하는 등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졌다. 이러한 지배층 수탈에 분노한 고려백성들이 조세와 공물을 거두러온 관리를 죽이고 몽골군에 항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5.5.2. 김준 정권

김준은 애초 최씨 가문의 가노('집안의 노비')였다가 최우의 신임을 얻어 무신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되는 인물이다.[49] 그는 유경 등이 왕실을 복구하기 위해 최씨 정권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을 때 같이 거사에 동참하여 최의를 살해하고 도방의 권력을 틀어지게 된다.(뒤통수) 이후 눈치를 보고 있다가 고종이 몽골에 태자 '왕전'(훗날 원종)을 볼모로 보내고 환도를 시도하자 이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김준이 권력을 잡게된 첫 해에 개경에는 큰 가뭄이 들었는데 그가 보인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경성에 크게 기근이 들어 남쪽 고을로 얻어먹으러 가는 자가 길에 계속 이어졌다. 중방과 어사대에서 사람들이 성문을 나가지 못하게 금하니 굶어죽는 자가 많았다.”

ㅡ <고려사 절요>, 고종 기미 46년(1259) ㅡ
(준이) 농장을 각 고을에 벌여 두고 가신(家臣) 문성주(文成柱)로 하여금 전라도를 관장(管掌)하게 하고, 지준(池濬)으로 충청도를 관장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다투어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삼아 백성에게 볍씨 한 말을 주고 으레 쌀 한 섬을 거두었다. 여러 아들이 그것을 본받아서 다투어 무뢰배들을 모아서 권세를 믿고 방자. 횡포하게 남의 전토를 침노하여 빼앗으니, 원망이 심히 많았다. 준이 일찌기 왕을 제집에 맞으려고 이웃집을 철거하고 그 집을 넓히는데, 깊은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도 밤낮으로 역사를 재촉하여 집 높이가 두어 길이 되고 뜰 넓이가 백보(百步)나 되었다. 그 아내가 그래도 부족하게 여겨 말하기를, “대장부의 눈구멍이 그렇게도 작은가” 하였다.

ㅡ <고려사절요>, 원종 9년(1268) ㅡ

이러한 최씨 정권의 만행을 보고서도 고려가 대외적으로 철저히 짓밟힌 원인을 몽골 제국 하나에서만 찾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성을 포기하는 지나친 논리 박약이며 민족의 자립성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단순히 '고려 vs 몽골 제국'간의 이중 대결 구도로만 설정해놓고 분석하는 것은 지극히 1차원적인 해석으로서 문제의 본질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특히 저러한 일차원적인 해석을 했을때 발생하는 문제점은 '몽골 침입'이라는 '대외적인 재난상황'에서 매국을 일삼았던 무신정권친원파, 그리고 무능했던 고려 왕족들마저도 "고려"라는 국가 집단에 묻혀 대몽항쟁의 영웅들로 칭송받게 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수정해야할 부분이다.

5.6. 파탄 국가(Failed State) 고려

고려는 무신정권 때부터 이미 파탄난 상황이었다. 다음은 무신정권하에서 일어난 고려의 국가 파탄(failed state) 사례들이다.

무신정권으로 지역 방비와 전후 복구 임무를 맡고 지방에 파견된 고려 관리들은 가는 곳마다 근무 태만과 수탈을 일삼았다. 서해도(西海道) 양산성(椋山城: 황해남도 안악) 방호별감(防護別監)[50] 권세후(權世侯)는 술만 마시고 있다가 성이 몽골군에 함락되자 목을 매 죽었다. 동주산성(東州山城: 강원도 철원) 방호별감 백돈명(白敦明)은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 가을걷이를 하자는 주민들을 창고에 가두고 이를 만류하는 아전의 목을 베었다. 이후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도 전에 군졸들과 함께 달아나 성이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나득황(羅得璜)은 고종 때 집권자 최우의 명에 따라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51]이 되어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함으로써 원성이 높았다. 그가 제주부사(濟州副使)를 지낼 적에 현지 사람들은 "제주는 옛적에 작은 도적을 겪었는데 지금은 큰 도적을 만났다."며 크게 괴로워하였다.(나득황이 제주부사로 부임해오기 전 송소(宋佋)가 제주부사로 있다가 장죄(贓罪)를 지어 파면당했는데 여기서 '작은 도적'은 송소를 가리킴.) 나득황 외에도 최보후(崔甫侯), 하공서(河公敍), 이경(李瓊) 등이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으로 임명되어 각 도(道)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현지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소복별감(蘇復別監)[52] 고정매(高鼎梅)는 지역의 소복(蘇復)에는 힘쓰지 않고 주색을 탐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였다. 서해도(西海道) 소복별감 송극현(宋克儇)은 낭실(莨實) 308곡(斛)을 거둬들여 최항(崔沆)에게 뇌물을 바치고 어사(御史)가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는 탐관오리를 빗대어 '낭실어사'(莨實御史)라고 불렀다. 경상도 수로방호별감(水路防護別監)[53] 송길유(宋吉儒)[54]는 백성들을 강제로 섬으로 옮기고 토지와 재물을 빼앗아 굶어죽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강화도 내부의 사정도 외부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55] 변식(邊軾), 낭장 안홍민(安洪敏), 산원(散員) 정한규(鄭漢珪) 등이 수탈을 일삼아 주민들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댔다. 심지어 횡천(橫川, 강원도 횡성)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사주를 받은 지역 보안군에게 부모와 처자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무리를 이끌고 도적이 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달에 횡천현(橫川縣 : 지금의 강원도 횡천군)에서 도적떼가 일어나 횡천현과 홍천현(洪川縣 : 지금의 강원도 홍천군) 백성 30여 명을 살해했다. 앞서 횡천현의 거주민 요가대(尿加大)라는 자가 아들 여덟 명과 사위 한 명과 함께 산골에서 물고기와 짐승을 잡아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두 고을 사람들이 그 지역을 순행하던 야별초 지휘(夜別抄指揮)더러 그들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야별초[56]가 그 집을 가 보았더니 마침 아홉 명은 사냥하러 나갔으므로 그 부모와 처자만을 붙잡아다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홉 명이 복수하겠다며 마침내 도적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충청도(忠淸道)까지 와서 밤중에 얕은 강물을 건너는 그들을 본 사람들이 북쪽 오랑캐 군사로 오인했는데 놀란 조정에서 야별초를 시켜 정탐해 본 결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ㅡ <고려사절요>, 몽고 지원(至元)원년(1264) ㅡ
위의 사례는 전시나 내부적 반란, 폭동, 기타 소요사태 등으로 인한 계엄 상황이 아닌 평시에조차 무신정권의 치안 유지군이 원래 임무인 치안유지는 할 생각은 안하고 오히려 민간인을 약탈하고 살해하는 초법 행위를 자행한 것으로써, 당시 고려는 무시정권으로 사법 기능 자체가 마비된 식물 정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더 심하게는 이 관리들이 정작 몽골군이 쳐들어왔을때는 몽골군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몽골군에 투항하거나 항간의 역할을 수행하는 매국노가 되는 일이 흔했다. 좋은 예로 양근성(陽根城: 경기도 양평) 방호별감 윤춘(尹椿)은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으며 이후 장정 6백여명을 이끌며 몽골군을 도왔다. 천룡산성(天龍山城: 충북 충주)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과 황려(黃驪: 현재 여주) 현령(縣令) 정신단(鄭臣旦) 등도 윤춘의 예를 따라 투항한뒤 몽고군의 충주성 공격을 도왔다. 서북면 병마사 기관(記官) 최탄(崔坦)은 무신정권 수괴 임연을 친다는 명목으로 남하하여 자비령 이북 60여 성들을 점거한후 몽골에 갖다 바치고 칸(Khan)의 신하가 되었다.(최탄은 이때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금패를 하사받고 동녕부 총관에 임명된다.[57]) 소복별감 김수제(金守磾)와 별장(別將) 우정(于琔)은 몽고군에 투항한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일러바치며 매국 행위를 벌였다. 안북(安北, 황해북도 안주) 별초도령(別抄都領) 원진(元振)은 고을의 부사(副使) 문수(文秀), 김맥(金脉) 등을 죽인후 옹진(甕津, 황해남도 옹진군) 현령 정숭(鄭崇)과 함께 몽고에 투항하였다. 심지어 국가 요직을 차지한 관리들이 몽골에 투항하여 부역할 때도 있었다. 이현(李峴)과 송의(宋義)는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추밀원부사 출신으로서 몽골에 귀화했는데, 특히 이현(李峴)은 몽골군이 고려에 쳐들어올때 길잡이 역할을 하며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그 외에도 국방부 요직에 해당하는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육자양(陸子襄)이 몽골에 투항하는 등 무신 정권하의 관리들은 국가에 도움은 하나도 되지않고 국가 안보에 끝없는 위협만 되었다.

한편에선 중앙에서 파견한 고려 관리들의 경제적 수탈에 신음하던 백성들도 견디다못해 관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몽고군에게 넘겨주고 귀순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다음의 기록은 그 당시 고려 백성들이 오히려 몽골군을 환영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려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많은 고려인들이 중국으로 도주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왕명을 받들어 지방에 내려간 관리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침탈해 왕에게 바침으로써 총애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도리어 몽고군의 침략을 환영하는 실정이었다.

ㅡ <고려사 세가>, 고종 43년(1256), 2월 ㅡ
강원도 이천(伊川) 광복산성(廣福山城)과 황해도 곡산(谷山) 달보성(達甫城)에서는 피난민들이 방호별감들을 사로잡아 몽고군에 투항하였다. 동북면 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동계 15주 피난민들을 강제로 죽도(竹島)로 옮기고 양곡을 거두려다 정주(定州), 등주(登州), 문주(文州) 등 여러 성의 주민들로부터 공분을 사 박인기(朴仁起), 김선보(金宣甫) 등과 함께 살해당했다.[58] 쌍성총관부는 이때 고려로부터 이탈해온 동계 지역에 설치된 것이다. 이때 몽골로부터 쌍성총관부 총관에 임명된 조휘(趙暉)는 고려 반민(反民)들을 이끌고 몽고군의 한계성(寒溪城: 강원도 인제군) 공격을 도왔으며, 왕이 몽골 장수에게 보내는 사자(使者)와 선물들을 약탈해가기도 하고, 동진(東眞)의 여진족 유민들과 고려 난민들을 규합하여 춘주(春州: 강원도 춘천)의 천곡촌(泉谷村)을 침범하기도 하며, 양주(襄州: 강원도 양양) 난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주사(知奏事)를 잡아 가는 등 활발한 반정부 행위들을 벌였다. 그때마다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고려 정부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북계(北界) 별초도령(別抄都領) 이양저(李陽著)는 군사들의 진영을 초도로 옮기려다 반발을 사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외 북계의 애도(艾島)와 갈도(葛島) 두 섬에 노역하러 온 난민들이 경별초(京別抄)[59] 지휘부를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항거와 몽고에의 귀순이 이따랐다. 이렇게 귀순해오는 고려인들이 많아지자 원나라는 아예 요동 지역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를 따로 설치하고 홍다구와 영녕공 왕준으로 하여금 각각 요양(遼陽, 랴오양)과 심양(瀋陽, 선양)의 고려인들을 관리하도록 하는데, 충렬왕대(代)인 원세조 27년(1290)에 이르러 요양과 심양의 고려 유민의 숫자는 각각 2만과 3만을 상회하게 된다. 동녕부가 고려에 반환되고나서 서간도(동녕로)로 정주지를 옮긴 유민들의 숫자까지 합하면 여몽전쟁과 원강점기 전 시기를 통틀어 최소 10만 이상의 고려 유민들이 중국 동북방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60] 당시 고려의 인구 규모(300~400만)를 감안할때 상당수가 유민이 되어 중국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예쿠(Yeku)의 부관으로 고려에 들어온 몽골 장수 왕영조(王榮祖, 왕릉쭈)[61]는 고려 정부 때문에 폐허가 된 서경(西京)을 복구하고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해 정식으로 통치하기 시작하는데, 서경만호부(西京萬戶府)[62]는 이때 고려 역사상 처음 등장하며 서경 주변 천 여리를 통제하에 두게 된다.[63] 왕영조는 몽고군 10개 부대를 지휘해 서경의 옛 성을 재건토록 했으며 둔전을 실시해 백성들을 구휼하였는데 고려 관리들의 폭정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사방 팔방에서 귀순해왔다. 이렇듯 당시엔 고려 정부 때문에 수탈과 죽임을 당하는 고려 백성들이 되려 고려를 쳐들어온 몽고군에게 구제받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로 몽골령이 된 서경으로 귀순해오는 고려 백성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음은 1270년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사절을 보내 이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국자사업(國子司業) 박항(朴恒)을 몽고에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게 하고 아뢰기를, “소방(小邦)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미 다시 옛 수도에 도읍하고 남은 백성을 불러 모아서 마음을 가다듬어 직책에 이바지하는데, 지금 어리석은 백성중에 부역을 피하는 자, 죄를 범하고 도망하는 자, 공사(公私)의 노비(奴碑)로서 천한 신분을 면하려는 자들이 서로 거느리고 주둔한 몽고 병마(兵馬)에 의탁하여 서경에 가서 함부로 횡행하고, 심지어는 평민을 꾀어가는 일이 날로 더욱 증가하니, 앞으로 이름 금하지 않는다면 신과 함께 상국(上國)에 직공(職貢)을 닦을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일일이 모두 찿아 돌려 보내어 소방으로 하여금 만세에 영원히 상국을 섬기게 하소서”하였다.

ㅡ <고려사절요>, 몽고 지원 7년(1270년) ㅡ

물론 고려 난민들 중에는 죄를 짓고 처벌을 면하기 위해 몽골로 귀부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장기간 전쟁은 필연적으로 난민들을 발생시키기 마련이고, 그 난민들의 절대 다수는 선량한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몽골로 귀부한 고려 난민들을 전부 범죄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오늘날 시리아 난민들은 전부 ISIS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물론 피난민들 중에 일부 범죄자나 테러리스트 무리가 끼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일뿐이고 시리아 난민 절대 다수는 무고한 민간인들인것처럼 몽골로 귀부한 고려 난민들의 절대 다수는 고려 정부의 학정을 피해 달아난 민간인들이었다.

고려 권력층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징세 대상인 주민들이 외국 영토로 도주하는게 당연히 고깝게만 보였을 것이다. 원종이 그들을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애둘러 표현한 이유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은 원종이 자기 입으로 스스로 밝혔듯, '부역을 피하려는 자', '노비로서 천한 신분을 면하려는 자'들로서 이들은 모두 고려 정부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채 단순히 '고려 난민=범죄자'로 규정하는 것은 마치 오늘날 탈북자들은 죄다 간첩이라거나, 일제강점기때 '조선총독부'의 핍박을 피해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빨갱이' 혹은 '쪽바리'라고 매도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6. 고려 왕조를 전복할 의사가 없었던 몽골

몽골이 고려 왕조를 전복시킬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그 당시 몽골이 고려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의 성격과 양상을 분석해볼때 분명해보인다.

첫째로, 몽골은 단 한번도 해군을 동원해 강화도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7차 침입때 몽골 장수 차라대(車羅大, 자랄타이)가 함선을 동원해 서해안을 약탈하였으나 심혈을 기울인 대규모 해전은 자릴타이가 직접 지휘하고 군함 70여척[64]을 동원했던 압해도 해전이 전부였고 단 한번도 강화도 상륙 작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고려 정부 옹호론자들은 몽고군이 강화도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로 (1)강화 해협(염하)의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물살이 세기 때문에 건너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 (2)강화산성이 거친 물결을 뚫고 들어오는 몽고군으로서는 넘기 어려운 진입 장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 (3)강화도 북쪽과 서쪽은 워낙 갯벌이 넓어서 몽고군이 이 쪽으로 들어오면 갯벌에 허우적거리게 되어 기동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공격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을 든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역사스페셜에서도 한 차례 논박되어졌듯 모두 틀린 가설들이다. 먼저 (1)에 대해 반박을 하자면, 나중에 몽골군은 염하보다 훨씬 물살이 센 울돌목장죽수도, 맹골수도를 휘젓고 다니며 삼별초가 방어하던 진도를 함락시킨다.[65] 또한 강화 해협의 물살이 세다고는 하나 상앗대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수심이 매우 얕아서 썰물때는 바닥이 드러나기도 하며 해협의 폭이 불과 2~30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점,[66] 따라서 썰물때나 결빙이 되어 유속이 약해지는 겨울철에 뗏목으로도 충분히 건널 수 있는 점[67], 실제로 훗날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44척의 뗏목으로 이곳을 도하하여 강화도를 점령한 점 등을 고려하면 당시 몽골군이 정복 의사가 있었더라면 강화 해협을 건너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2)에 대한 반론으로는, 회회포[68]를 비롯한 각종 최신식 공성용 무기들을 잔뜩 보유하고 있던 몽골군에게 강화 산성이 큰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점과 섬의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면 고려군 병력이 분산되어 빈 틈이 생기게 되고 몽골의 주력 병력이 이 틈을 타 들어가게 되면 진도에서와 같이 무리없이 섬을 함락시킬 수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진도의 삼별초군은 용장산성을 쌓고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좌, 중, 우군으로 분산 공격해들어온 여몽연합군에 측면과 후방이 노출되어 제대로 깨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3)에 대한 반론으로는, 강화도 북쪽과 서쪽에 긴 갯벌이 있다고 한들 한여름 썰물 때에 공격을 하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고 따라서 밀물 때에 공격을 한다거나 혹은 겨울철 갯벌이 얼어붙은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하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한 점이다.

두번째로, 단 한번도 점령지에 총독을 파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몽골은 매번 고려에 들어와 자유롭게 영토를 약탈하고 다녔음에도 단 한 차례도 점령지에 다루가치를 두어 통치를 실시하지 않았다. 몽골의 1차 침입때 서북 14개성에 주둔했던 다루가치들도 모두 하급 관리들로서 그들은 스스로 군대를 소집하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나중에는 1년 만에 본국으로 되돌아간다.

만약, 몽골이 처음부터 고려를 정복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내지를 접수한뒤 조운 수로를 봉쇄하여 강화도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썼을 것이다.

몽골의 5차 침입때(1253) 사령관 예쿠(Yeku)의 부관으로 고려에 들어온 왕영조가 평양에 관청을 설치하고 서해도를 통치하기 시작하지만 왕영조 개인의 결정이었으며, 왕영조 본인 스스로도 군사적 야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당시 몽골 황제가 고려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영조가 고려 평양(平壌)으로 옮겨 지키니,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그를 효유하여 말하기를, "저 작은 나라가 험함을 믿고 스스로 지키고 있으나 가마솥 안의 물고기라서 오래지 않아 스스로 죽을 것이니, 완급을 조정하고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대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ㅡ『원사』, 권149 , 왕영조 열전 ㅡ

세번째는, 고려로 쳐들어온 몽골군의 병력 규모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할때 중국이나 일본,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유럽을 원정할 때처럼 대규모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몽골의 총 아홉 차례의 고려 침략 중 가장 많은 병력 수를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1차 침입 당시 함신진(咸新鎭, 의주)에서 보인 2만 4천여명이었다. 그마저도 함신진을 점령한 후에는 북로군, 남로군, 본대로 나뉘어 각각 8,000명씩 흩어져 국토를 유린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몽골의 2차 침입때 있었던 그 유명한 처인성 전투(1231)도 기록에 잡히는 몽골군의 숫자는 불과 500여명에 불과하다.[69] 고려와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보여지는 몽골군의 침투 병력은 많아야 대게 1만명 남짓이다. 결코 3만을 넘어갔던 적이 없다. 이러한 점들을 놓고 보건데 몽골군이 고려에 들어와 수행한 군사 작전은 그 규모상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한게 아닌 약탈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공격의 배경엔 당시 금나라남송을 원정하면서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고, 한때 금[70]과 송[71]의 우방국이었던 고려의 기를 꺾어놔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역으로, 그러한 소규모 몽골 분대에 전 국토가 속소무책으로 유린당하며 쑥대밭이 되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당시 고려의 실세이던 최씨 정권으로 대변되는 무신 정권이 몽골군에 대항할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반증한다.

네번째로 , 몽골에게 있어서 고려는 지리적 요충지가 아니었다. 몽골의 주력 병력에 무참히 짓밟힌 대표적인 나라들인 서하호레즘, 아바스 왕조, 키예프 공국 등을 보면 모두 몽골의 서방 원정 "길목"에 위치한 나라들로서 몽골로서는 반드시 무너뜨리고 지나가야만 하는 나라들이었다.[72] 적어도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기획하는 1268년 이전까지 고려는 "길목"에 해당하지 않았다.

다섯번째로, 중원의 두 강대국 금과 송나라를 상대로 국운을 건 총력전을 개시하고 있던 당시 몽골의 대외적 상황이다. 원나라 최고국정회의기구인 추밀원부사에서 고려 정벌을 두고 논의된 다음의 내용들은 당시 몽골이 송나라의 개입을 경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5월에 마형(馬亨)이 아뢰기를, "신 마형이 삼가 황제폐하께 아뢰옵건대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봉한 땅으로서 한(漢)과 진(晉) 모두 군현으로 삼았으니, 지금 비롯 내조한다고 하지만 그 속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 (중략) ... "만에 하나 소국의 권신[73]이 방자하고 흉악하게도 반역을 일으켜 산으로 둘러치고 물에 의지하면서 송과 더불어 연맹하여 섬(강화도)에서 저항한다면, 우리 성조에 비록 용맹한 병사 백만이 있을지라도 시간이 흘러도 그들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니, 심히 대국에 이로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추밀원에서 갖추어 아뢰자 (황제가) 옳게 여겨 받들기를,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참정(參政) 아무개가 회답하여 아뢰기를, “이미 행한 것은 지난 일이니, 각 사람은 마음을 다하여 그 말을 반드시 듣고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ㅡ <원사元事>, 1269년(지원 6년) ㅡ
요컨대, 원나라는 고려를 중원의 속국으로 인식했음과 동시에 고려 정부가 궁지에 몰리면 송나라와 연합해 반격을 꾀할 것을 극히 우려했던 것이다. 실제로 몽골이 송나라를 상대로 총력전을 개시하고 있던 1239~1246년은 몽골의 고려 침략이 없었던 휴식기였다.

결과적으로, 몽골은 고려를 정복할 의사가 없음을 이미 여러차례 피력하였다. 다음은 1254년 승천부에서 고종을 접견한 몽골 사신 몽고대가 고종에게 한 말이다.
"대군(大軍)이 경내로 들어온 이후로 하루에 사망하는 자가 몇 천, 몇 만인씩이나 되는데, 왕께서는 어찌 한 몸만 아끼고 만백성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왕께서 만일 일찍이 출영(出迎)하였다면 어찌 무고한 백성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여 땅바닥에 버려지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야굴 대왕의 말은 곧 황제의 말이고, 나의 말은 곧 야굴 대왕의 말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만세토록 화친하여 사이좋게 지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ㅡ <고려사절요> , 고종 41년 ㅡ

몽골 장수 왕영조[74]가 1259년 서경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고려 사신 이응에게 한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대 나라 왕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가. 어째서 윤춘(尹椿)과 송산(松山)의 말만 듣고 항복하지 않는가?[75] 항복하면 우리가 추호도 침범하지 않겠다.”

ㅡ <고려사절요> , 고종 46년 ㅡ

쿠빌라이 칸 역시 조서를 내려 고려를 정복할 의사가 없음을 피력하였다.[76]
"거듭 생각컨데, 도서(島嶼)의 쇠잔한 백성들이 오랫동안 도탄(塗炭)에 빠지었으니, 군사의 힘이 있는 대로 끝까지 토벌하는 것이 나의 본심이 아니다." .... (중략) ....
"내 마음에서 결단을 내리어 거듭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도망한 사람들의 말로써 집정(執政)을 이간하지 말게 하며, 유언비어로 정한 맹세를 어기지 말게 하고, 오직 성의(誠意)를 보이기를 일삼아 과거 너의 잘못을 일체 묻지 말게 하노니, 마땅히 넓은 은혜를 베풀어 원근(遠近)의 교화를 새롭게 할 것이다." .... (중략) ....
"멀리 생각건대, 상하고 다친 백성들을 마땅히 어루만지고 편안히 하여야 할 때이니 저 바다(강화도)에서 나와 평지에 살게 하여 큰 칼은 팔아 소를 사며, 작은 칼은 팔아 송아지를 사고, 방패와 창을 버리고 따비와 쟁기를 잡게 하며, 무릇 원조하고 구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근로(勤勞)를 꺼리지 말라. 부요하고 번성할 징조가 있어야 예의(禮義)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빨리 강계(疆界)를 바로잡아 백성의 마음을 정하게 하라. 우리 군사는 다시 한계를 넘지 않겠다. 큰 호령이 한 번 나왔으므로 나는 식언(食言)하지 않겠다."

ㅡ <고려사절요> , 세조 중통(中統) 원년(1260) ㅡ

7. 무신정권의 강화도 파천에 대한 평가

7.1. 긍정적 평가

7.1.1.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잘라이르족의 해군

고려 원정에서 몽골군이 대규모 섬 공략전을 펼친 건 딱 한번이다. 1256년의 압해도 해전이 바로 그것인데, 이 해전은 총사령관 자릴타이(차라대)가 직접 지휘하고 70여척의 군함을 동원해서 단단히 준비하고 쳐들어간 전투였다.

압해도의 현 면적은 49.12제곱킬로미터로,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보다 훨씬 좁다. 당시 섬의 정확한 인구는 불명이나, 현 인구도 약 6천명 수준으로 지금보다 인구부양력이 낮던 당시 기준으로 그닥 인구가 많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압해도의 지리적 위치 덕에 다른 섬들보다 좀 더 인구 및 병력 분배가 많았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강화도보다 병력 숫자나 방비태세 등 모든 면에서 낙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자릴타이는 졌다. 압해도 주민들이 투석기를 곳곳에 설치해 방비했으므로 압해도 주민들과 주둔 군사들의 분투의 결과물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자릴타이와 그 휘하 몽골군의 한심한 수전 능력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목포 코앞 조그만 섬도 투석기 때문에 못 점령하는 몽골 해군의 능력으로 강화도 공략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타 지역을 점령하던 몽골군의 수전 능력을 거론하기 이전에 당장 고려로 원정을 왔던 잘라이르족의 군대가 이렇게 수전 능력이 형편없음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몽골군의 수전 능력에 대한 저평가에 의구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잘라이르족은 육상에서는 금나라와 정면충돌한 용사들이었을지 몰라도 해상에서는 그냥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77]

7.1.2. 고립되지 않았던 강화도

물론 강화도가 혼자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면 누가 방비하던간에 결국 방어력에 한계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화도는 여몽전쟁 기간 내내 고립된 적이 없었고, 이곳을 고립시키려는 몽골군의 시도는 여지없이 실패했다. 당연히 고립되지 않고 외부와 교류하고 행정력을 발휘하는 실제 역사의 강화도는 고립되었다는 가정 속의 강화도보다 몇 배는 함락하기 어려웠다.

신편 한국사는 압해도 전투 자체를 고려의 해도 입보책에 대한 파훼법으로 규정하고, 이 전투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이후 대규모 침공이 더 이상 없이 소규모 국지 해전만 반복되었음을 지적한다.[78] 이를 볼 때, 그나마 존재하던 잘라이르족 해군의 전력은 압해도 전투 이후 사실상 지리멸렬한 소규모 전투만 수행 가능한 수준으로 전락했음이 매우 명백해진다. 윤춘의 증언에서 압해도 해전에서 몽골군에 대규모 피해가 났다는 정황은 없으므로, 결국 몽골 해군이 섬을 대규모로 공격할 능력이 자신들에게 없음을 알아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자릴타이는 처음부터 강화도를 제대로 공격하거나 고립시켜 위기로 몰아갈 의지가 없던 게 아니라, 시도했으나 비참하게 실패한 뒤 자신들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전략적인 목표를 종전협상으로 바꿨다는 해석이 더 그럴듯하다. 또한, 이러한 국지 해전들의 사례나 김방경 열전에서 김방경이 위도에 파견되어 선정을 펼친 언급 등은 명백하게 서해의 섬들이 고려의 행정력 휘하에 있음을 드러내며, 이현의 강화도 고립 계략을 파훼하는 윤춘의 계책 또한 고려 조정이 섬들에 농경지를 개간시킬 수준의 행정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79] 그것도 각종 병크로 고려 백성들의 민심이 급속도로 떠나가던 최항 집권기에 말이다. 진짜로 섬에 고립된 상황에 가까웠던 삼별초의 강화도나 무능한 김경징과 강도유수 이전엔 군사경험이 전혀 없던 장신이 지키던 병자호란 때 강화도는 이 당시 강화도보다 훨씬 쉬운 목표였을 것이다.

7.1.3. 당시 고려군의 무기

계속 언급되는 압해도 전투에서 계속 언급되는 것은 포차, 즉 투석기다. 자릴타이가 저거 한방 맞으면 배가 부서진다며 두려워했는데, 자릴타이가 겁먹은 나머지 과장을 했기야 했겠지만, 그 크기와 명중률이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압해도의 고려군만 투석기를 보유하고 있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이전에 박서가 구주에서 몽골군과 서로 투석기로 돌을 날려 공방전을 벌였다는 기록을 볼 때 당시 고려의 중앙 파견군과 지방군을 가리지 않고 투석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강화도 수비군도 투석기를 보유했거나 하다못해 즉석에서 만들어 운용할 기술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는 건 당연한 추론이다.

즉, 고려군의 투석기는 화포보다 원시적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해전이나 상륙전에서 그 존재감이 매우 큰 무기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시의 상륙전이라고 결코 병력만 있으면 수행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7.1.4. 강화도 주둔군까지 야전에 투입해도 장담할 수 없던 회전

살리타이나 자릴타이 휘하 몽골군의 숫자가 적다는 것만으로 이들이 전면전에 적합하지 않은 병력이라거나[80] 정예도가 한참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은 이미 위의 전쟁 전 상황 문단의 옹호론 부분에 언급된 것이다. 더불어, 몽골 자체가 유목민족이었기에 기마병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인데, 더욱이 이들 중 과반수+수뇌부인 자릴타이부터가 금나라의 중무장 기보병들과 충돌하며 경험치를 많이 쌓았을 잘라이르족 출신들이라는 문제까지 있다. 고작 1만 정예병으로 막아내는 걸 장담할 수 있던 상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국사에서 유목제국을 상대로 거둔 가장 모범적인 승리가 귀주대첩인데,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적보다 두배의 병력으로 포위섬멸전을 해서 승리할 수 있었다. 즉 보병 위주의 군대가 기병 위주의 군대를 상대로 싸운다면 자국 영토에서 싸운다고 해도 이 정도 병력차와 포위섬멸을 할 수 있을만한 조건을 갖춰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이미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때부터 서서히 붕괴되어가던 고려 정규군이 과연 이런 식으로 공세를 펼쳐서 포위섬멸을 할 역량을 갖춘 병력을 모을 수 있었을까?

물론 이와 별도로, 자기 사병들을 아끼느라고 김경손 등 지방에 부임해서 싸우는 장군들에게 병력을 매우 미흡하게 지원했던 것은 분명히 무신정권의 오점이 맞다. 다만 이들을 쪼개서 방어선에 투입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모아 회전에서 맞붙어서 승리하는 건 절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지가 있다고 뒤집을 수 있는 전황이었는지 의문이다.

아니 그 전에 침공군이 3만 인데 중앙군이 1만 남짓이란 건 정권 보위나 간신히 할 수준이란 뜻이다. 아니 일단 제대로 된 근거를 가져오지 않으면서 생각없이 그냥 권위에 의한 오류나 저지르는 비판을 한다고 착각하는 비난 측에선 침공한 몽골군이 5000~24000이라고 우기는데 대체 5천이란 건 무슨 생각인지 모르곘다. <고려사절요>에 "삼군이 동선역에 진을 쳤는데 돌연히 8천여 명의 몽골군사가 급습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몽골군이 3개 부대로 편성해 진격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몽고군의 수는 대략 24,000~30,000으로 추정되는 게 현실이다.

또한 2군 6위의 편제를 보면 의장대 같은 실전과는 동떨어진 병력도 있는데다가 고려군의 주력은 보병이다. 보병으로 촉수질을 하며 내려오는 기병들을 상대하려면 침공군 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이 필요하고 개별 전투에서도 몇 배나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귀주대첩에서도 고려군은 요군의 2배 이상의 병력을 동원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원말명초 당시 명이 북원 원정을 할 때 북원이 동원 가능한 병력보다 까마득 하게 많은 15만, 20만의 병력을 동원 했다.
홍무 20년, 풍승(馮勝)에게 명령하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 부우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 보병과 기병 20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중략)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명사(明史)》 풍승전}}}
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중략) 창졸간에 그 앞에 이르자,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명사(明史)》 남옥전}}}

7.2. 부정적인 평가

무신정권과 고려정부 옹호론자들은 그들이 강화도에 40여년간이나 지체할 수 있었던 이유가 강화도가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박을 하자면, 무신 세력들이 미비하게나마 강화도에서 자신들의 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론적으로 몽골이 강화도를 정복할 생각이 애시당초 없었기 때문이다. 몽골로서는 굳이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안되는 고려 정부를 전복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7.2.1. 몽골측의 강화도 정벌 능력과 그에대한 가정

몽골은 총독을 파견하여 고려를 다스릴 생각이 애시당초 없었기 때문에 매번 고려에 들어와 내륙을 약탈하며 자유롭게 휩쓸고 다녔음에도 단 한 차례도 다루가치를 두어 통치를 실시하지 않았다.[81] 그렇기 때문에 당시 강화도 정부는 일부 지역에 대한 조운 체계를 부분적으로 유지하며 내지에서 주민들을 수탈하여 거둔 세금으로 강화도를 방비할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1252년 추밀원부사로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부하여 5차 몽골 침략군의 앞잡이 노릇을한 이현(李峴)이 지휘관에게 조언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도읍이 섬에 있어서 세금과 공물이 모두 육지에서 나옵니다. 대군이 가을이 되기 전에 들어간다면, 도성 사람들은 세금과 공물을 받지 못해 위급하게 될 겁니다."

ㅡ <고려사 세가> ㅡ
만약,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계획이 있었더라면 전면전에 나서 대규모 병력으로 내지를 접수한뒤 병자호란때와 같이 수륙 양면에서 강화도를 포위하여 고려 정부의 숨통을 압박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부는 조운이 끊겨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 섬에 고립된채 몽고군과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아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 그러한 사례를 잘 보여주는 전투로는 병자호란 말고도 십자군 전쟁때 있었던 아크레 공방전을 들 수 있다. 당시 지중해 연안 도시 아크레에 포위된채 십자군을 상대로 1년 넘게 항전을 벌이고 있던 사라센군은 해안가마저 포위당하자 외부로부터 물자 공급이 끊겨 기아에 시달리다 결국 성문을 열고 만다. 당시 중동 세계 최고의 명장이던 살라딘이 이끄는 사라센군은 아크레를 구원하기 위해 주력 병력 2만을 보내 도시를 구원하게 하지만 끝내 육지와 해로를 차단한 프랑크군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당시 아크레는 후방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장기간 수륙 양면 봉쇄 작전으로 인한 식량 공급 부족으로 결국 도시가 함락되고 말았는데 몽골의 일개 분대에 전 국토가 뒤집어지고 아수라장이 되는 고려가 외부의 지원병 없이 자신들 보다 배 많은 적군들로부터 갯벌을 파먹으며 강화도를 방어해낸다? 외부의 지원 없이 고립된 도시의 자원과 병력만으로 적의 장기 봉쇄 작전을 감당해낼 수 있는 군대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 초창기 오스만 튀르크군을 상대로 수차례 방어전에 성공한 비잔티움도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 국가들로부터 물자와 병력 수송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튀르크군이 골든 해협(Golden Horn)을 봉쇄한 후부터 외부로부터 물자를 조달받지 못하게 되면서 전력을 상실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결국 튀르크군의 손에 떨어지고 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전투에서는 수비병들이 그리스의 불을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들과 대포들로 무장하고 싸웠음에도 결국 압도적 병력의 튀르크군의 봉쇄 전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하물며 당시 변변찮은 화약 무기조차 없었던 고려가 강화도에 포위된 채로 세계 각지에서 동원해온 최신식 무기들을 갖춘 십 수 만, 수 십만 몽고 제국 전사들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장면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13세기면 아직 대포도 나오지 않은 시절이고[82], 당시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첨단 무기라고 해봤자 조잡한 투석기가 전부인데[83] 고작 불화살이나 투석기만으로 영원성 전투로도스 섬 전투, 갈리폴리 전투에서와 같이 지형적 이점을 이용한 화력 전술을 펼쳐 적에게 대규모 피해를 입히는 시나리오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언급한 전투들은 모두 화약과 대포가 전쟁의 주력 무기로 자리잡고난 15세기 이후에 벌어진 방어전이었기에 가능했던거다. 되려 13세기 몽골 군대는 일단 한번 점령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기일이 얼마나 걸리든 집요한 봉쇄 작전으로 아무리 험난한 요새라도 기어이 함락시키기로 유명했다. 해발고도 3,500미터에 달하는 험준한 엘부르즈 산과 드넓은 카스피해(海)로 둘러쌓인 천혜의 암살단 요새(Assassin Creed)를 불과 닷새만에 함락시킨 사례나,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있고 나머지 한 면은 산에 접해있어 '동양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불리는 양양성(襄阳城)을 무려 2년간이나 봉쇄해 함락시킨 사례도 있다. 당시 몽골은 양양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중동의 군사 전문가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5,000여척의 함선들을 제조하게해 양쯔 강의 지류인 한수(漢水)를 봉쇄하여 외부로부터 물자가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을 완벽히 차단했다. 군과 주민들이 지위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체 합심하여 적과 맞서는 남송인들의 항전 의식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몽골 군대는 양양성을 점령하고 나서도 주민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84] 그러나 국가 지도부가 영토와 주민들을 내팽기치다시피한 고려는 몽골군 입장에서 매우 만만한 먹이감이었기 때문에 몽골군이 강화도를 치는 시나리오를 가정한다면 여타 고려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대량 학살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에하나, 몽골이 강화도를 치는 시나리오가 실제로 일어났더라면 강화도는 아크레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보다 더한 끔찍한 말로를 맞이했을만큼, 당시 고려 실권자들의 전술적 가치는 실로 무의미하고 위태로운 것이었다.(무신 정권의 전술실패는 몽골 침입으로 전국이 불바다가 되고 인구의 1/3이 감소하는 것으로 이미 드러났다.)[85]

문제는 당시 북중국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몽골 제국[86]이 마음만 있었다면 강화도를 포위할 정도의 배와 수군을 동원하는 일은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몽골 병사들이 유목 민족의 특성상 물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강화도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당시 몽고 제국은 단순한 스텝과 초원의 패자를 넘어 중원과 인도, 서아시아 및 동부 유럽 전역을 장악한 세계 제국이었다. 새로 몽고 제국의 군인으로 징집된 병사들 중에는 해전에 능한 민족들이 많았고, 몽골은 실제로 이들을 해군 사령관으로 등용하여 여러 전투에 활용하였다. 몽골은 꽤 여러 전투에서 수군을 운용한 사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호라즘 원정에서 탈주한 호라즘 샤를 찾아 남한 면적의 4배나 되는 카스피해를 휘젓고 다닌 사례[87]나 1264년, 1284년, 1285년, 1286년, 네 차례에 걸쳐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을 정벌한 사례[88]등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 원정 역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일본 원정은 비록 태풍 때문에 실패로 끝나지만, 몽골은 2차 일본원정(1281)에서도 한족들을 동원해 남중국해에서 함대를 띄어 일본 규슈까지 직진으로 원정할 정도로 모험을 감행하였다. 특히 동남아시아 원정에서는 광저우 출신의 한족들을 동원해 자바 섬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89] 비록 400여년 후의 일이지만 병자호란(1637) 당시 청나라는 한족 출신의 경중명, 공유덕, 상가희로 하여금 보름만에 80여척의 함대를 건조하게 해 불과 5천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강화도를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당시 강화도 방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이 방어 임무를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었을때 청군은 일개 뗏목으로 강화 해협을 건너 강화도를 정령하였다. 청군이 뗏목으로 해협을 건너는 동안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 병사들은 단지 1차 사격만 감행할 수 있었을 뿐이다.(청군이 도하한 김포 대곶과 강화도 사이의 거리는 불과 30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삽시간에 강을 도하한 청군은 조선군이 1차 사격을 끝내고 2차 사격을 시작도 하기 전에 상륙하여 조선군을 도륙, 패주시킨다.

또한 고려해야할 점은 당시 강화도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정규군의 숫자다. '강화도 파천'(1232~1269) 기간 동안 고려 정부가 동원할 수 있었던 가병(家兵)의 규모는 최대치로 잡아도 1만을 밑돈다.(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강화도 파천 시절 고려 정부 병력' 항목을 참조) 당시 몽골이 강화도를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한다고 가정할 때 고작 1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유라시아 각지에서 동원해온 최신식 무기를 갖춘 십 수만, 수 십만 몽고 제국의 육,해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떠서 강화도를 방어해내는 것은 하늘에서 "기드온 300용사"가 재림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민간인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당시 강화도 인구 규모(최대 10만)를 고려할때 징발할 수 있는 장정의 수는 3만이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민심을 잃을대로 잃은 강화도 정부가 고려 민중들로부터 의병 원조를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몽골의 총 아홉 차례 침입 동안 고려 왕실을 복구하기 위한 단 한 차례의 의병 운동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놓고 보았을때, 일각에서 최씨 정권을 비롯한 고려 무신 정권을 계속 유지시켜준 것은 다름 아닌 외세였다.는 풍자에 가까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7.2.2. 몽골 제국이 수전에 약했다는 의견에 대한 반박

몽골이 이후 진도의 삼별초군을 토벌한 사례를 보면 거친 바다가 몽고군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려 최정예 부대이던 삼별초군은 고려 조정이 육지로 나오고난 후에도 진도와 제주도로 주둔지를 옮겨다니며 산성을 쌓고 농성했으나 불과 1만이 채 안되는 몽고군에 격파당하고 만다. 특히 진도는 한반도 3대 급류로 손꼽히는 울돌목과 장죽수도, 맹골수도로 둘러쌓인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음에도 몽고군의 일격에 각개격파 당하고 마는데, 이것은 제해권을 상실한채 섬에 고립된 채로는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지세를 활용한 전술을 펼치는 것이 애초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훗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 수군의 승전을 이끈 이순신 장군의 명량 해전이 있었던 곳도 바로 진도의 울돌목이었다. 당시 조선군은 내지를 어느정도 확보하고 있었기에 섬과 육지 양 쪽을 오가며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당시 조선 수군이 강화도의 고려군처럼 외부와 단절된채로 섬에만 짱박혀 있었더라면 그러한 전술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7.2.3. 강화도의 요새로서의 능력에 대한 반박

13세기 강화도가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가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가장 적나라한 사건은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하던 바로 그 무렵, 무신정권의 주력 부대(이자 고려 정부의 주력 부대)인 '삼별초'가 무신정권이 40여년간 기지로 삼고 주둔해오던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주둔지를 옮긴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최씨 정권 옹호론자들의 말대로 강화도가 난공불락의 요새라서 몽골이 점령하지 못한다면, 어째서 고려 최정예 부대인 삼별초가 강화도보다도 물자와 자원과 인프라가 훨씬 빈약한 진도와 제주도로 차례로 거처를 옮기며 몽골군에 저항했겠는가?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은 지금에 와서는 충분한 가설이 되지 못한다.

첫째, 삼별초가 봉기하자 강화도 주민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는데, 탈출하는 자들도 있었던 반면, 삼별초가 호적 문서를 불태우자 신분이 낮은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강화도로 몰려들었다. 이승휴(李承休)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불한당들이 까마귀떼처럼 강화도로 몰려들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당시 삼별초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몽골의 6차 침입 이후 피해가 누적된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의 주민들이 삼별초를 반겼다. 경상도에서는 아예 삼별초에 호흥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밀성 반란, 1271)[90] 심지어 수도 개경에서조차 그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숭겸, 공덕의 난, 1271) 둘째, ‘바다와 섬으로 깊이 들어가 진을 치고 몽골과 맞선다’는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 전략은 김준임연 정권 시기부터 대몽고 강경책이던 '해도재천도론(海島再遷都論)’으로서 이미 꾸준히 거론되고 있던 전략이었고, 당시 삼별초 수장이던 배중손이 이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기 직전 강화도의 요새들을 다 허물어 버렸기 때문에 전력이 감소된 강화도를 포기했을 것이라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이후 진도로 거점을 옮긴 삼별초가 용장산성을 쌓고 여몽연합군에 맞선 것을 보건데, 삼별초가 굳이 강화도에 남고자 했다면 요새를 다시 구축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고려 최정예 군사 집단인 삼별초조차도 강화도를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여기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를 감행한 이유는 군사적 이유에서였다기 보다는 지리적으로 개경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고, 인근 섬 중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해도(海島)였기 때문이다. 즉,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삼별초는 '강화도 - 진도 - 제주도'로 옮겨다니면서 항전하지만, 저항을 시작한지 3년여만에 여몽연합군에게 정벌당하면서 대몽투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고려 수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몽고군이 삼별초를 토벌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먼저 도움을 요청한 쪽은 고려 정부였다. 다음의 기록들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중서성(中書省)에서 문서를 보내 이르기를, "진도(珍島)의 적들이 관민(官民)을 노략질하며 30여 곳의 여러 섬을 함락시키자 그 힘이 점차 왕성해지고 뜻이 더욱 교만 방자해졌습니다. 비록 투항하겠다고 말하지만 이는 실로 진실된 마음이 아니니, 서둘러 공격하여 큰 해를 제거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약 장마철에 이르게 되면 결국 공격하여 취하는 것이 어려워지므로 본국에 명령하여 병선 140척을 추가 징발하여 힘을 합쳐 적(삼별초)을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군량과 각종 물품을 힘을 다해 공급할 것이며, 놓치거나 틀리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요."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절요>, 원종12년(1271) 4월 미상(음) ㅡ
계미 이창경(李昌慶)과 문선렬(文宣烈)을 몽고(蒙古)에 파견하여 신년을 하례하고, 또 세자의 혼인을 허락한 것에 대하여 사의(謝意)를 표하였다. 또 아뢰기를, “역적(삼별초)의 나머지 종자들이 제주(濟州)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여러 섬과 포구 사이를 횡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 육지로 나올까 염려되니 그들을 섬멸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우리나라에서 도망쳐 들어간 사람들을 반환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11월 23일(음) ㅡ
갑신 합문부사(閤門副使) 금훈(琴熏)을 원(元)으로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보고를 잘 듣고 각별한 동정을 베풀어 수비군에게 지시하여 그 혁혁한 군세로 적도(제주도)를 토벌하게 함으로써, 완고한 자들(삼별초군)을 말끔히 소탕하고 우리의 남은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3년(1272) 5월 27일(음) ㅡ

주목해야할 점은, 당시 유라시아 전역을 손에 넣은 몽고 제국이 뛰어난 해전 능력을 갖춘 전사들과 조선업자들을 동원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7.2.4. 강화도 파천 시절 고려 정부의 병력 규모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강화도에 주둔한 고려 정규군의 병력 규모이다. 당시 강화도 무신정권의 주력 부대는 사병 집단인 삼별초였다. 여기서 '주력'이란 말은 전투 수행 능력 외에도 '최다 규모의 부대'를 뜻한다. 최씨정권은 강화도에 들어가기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 공병의 사병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었기 때문에[91] 원종의 개경환도 무렵 삼별초군의 병력 규모를 연구해보면 대몽항쟁 기간 동안 강화도 정부가 동원할 수 있었던 고려 정규군의 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다.

김동전 교수는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출항하던 무렵의 병력을 함선 1,000여척에 15,000여명으로 파악하였다.[92] 참고로, 저 15,000명엔 삼별초 출신 외에도 강제로 끌려가게 된 강화도의 주민들과 위에서 살펴보았듯 신분 상승을 꿈꾸며 각지에서 몰려든 노비와 하층민들, 그리고 그들의 식솔까지 포함된 숫자이니 실제 전투원들의 숫자는 많게 잡아야 8~9,000여명 정도였을 것이다.

한편, 원종의 삼별초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삼별초군은 강화도에 남아 항전하는 쪽과 관군에 편입되는 쪽으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삼별초군은 몽골과의 항전을 택했는데, 이러한 선택을 한 배경에는 몽골이 삼별초 명단을 요구해오자 처벌이나 인사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삼별초 토벌을 위해 새로 구성된 '여몽연합군'에 편성된 고려군의 숫자는 불과 6,000여명. 그마저도 노비, 백정, 승려, 산직 관리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모은 숫자였다.
몽고(蒙古)에서 주부개(周夫介)를 보내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중략) "경이 의당 주변에서 군사 6,000인을 징발하여 진도(珍島)를 쳐서 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일이 일찍 끝난다면 경의 백성에게 더욱 이익이 될 것이다." (중략) 부위병(府衛兵, 정규군)을 사열하였는데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이에 문,무 산직(散職)[93], 백정(白丁)[94], 잡색(雜色)[95] 및 승도(僧徒, 승려)를 아울러 사열함으로써 이를 충원하였다.

ㅡ <고려사 절요>, 원종12년(1271) 4월(음) ㅡ
따라서, 저 6,000이라는 숫자가 고스란히 정규군이 되는게 아니다. 다음에서 보여지듯 몽골 최고사령관과 여러 고려 대신(大臣)들이 참석한 열병식(閱兵式)을 묘사한 기록은 그 당시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고려 관군의 규모는 고작 500여에 불과함을 나타낸다. 그마저도 타고다닐 말이 없어 행인의 말을 빼앗는 자가 많았다는 기록을 통해 숫적 열세뿐만 아니라 군장비 면에서도 지극히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탈타아(脫朶兒, 톡토르)[96]와 재추(宰樞)[97]가 교외에서 열병(閱兵)하였는데 500여 인이었다.[98] 도령(都領)과 지유(指諭)에게는 1인당 말 1필을 주고 군졸에게는 10인당 말 1필씩 주었는데, 군대가 행군하기 시작하자 군졸 중에는 지나가는 사람의 말을 빼앗은 자가 많았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 5월 1일(음) ㅡ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놓고 볼때, '강화도 파천'(1232~1269) 기간 동안 무신정권이 동원할 수 있었던 상비군의 규모는 최대치로 잡아도 절대 1만을 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 또 다른 합리적 근거로 뒷받침 되는데, 고종 3년(1216)에 최충헌이 자신의 가병들을 사열하고 있는 장면이다.
최충헌(崔忠獻)이 가병(家兵)을 열병하였다. 좌경리(左梗里)부터 우경리(右梗里)까지 군사들이 몇 겹으로 대열을 이룬 것이 2~3리에 연이어 뻗쳤다. ... (중략) ... 아들 최우(崔瑀)의 가병들은 선지교(選地橋)부터 이령(梨嶺)을 지나 숭인문(崇仁門)에 이르렀는데, 깃발과 북을 이용하여 전투를 연습하였다.

ㅡ <고려사 절요>, 고종3년(1216) 12월 ㅡ
먼저, 최충헌의 가병이 대열을 이루어 행진한 2~3리는 약 1KM(=1,000m)에 해당하니[99], 병사들이 앞, 뒤 보통 1.5m 간격으로 진군한다고 가정할때, 한 줄에 최대 660여명의 무리가 설 수 있다. 이러한 줄이 몇 겹으로 편성되었다고 하니 최대 4~5열로 진군한다고 가정할때[100] 대략 2,700~3,300여명에 이르는 병력이 나온다. 아들 최우가 이끄는 가병들이 행진한 선지교에서부터 숭인문 까지의 거리는 2km에 달하는데, 같은 계산법을 적용했을때 최충헌 가병의 두 배인 5,400~6,600명에 달한다. 따라서 두 부자의 가병들의 숫자를 합한 8,000~9,900여 병력은 당시 강화도에 들어간 무신정권이 동원할 수 있었던 사병의 최대 규모다. 이 수치는 위에서 추론한 8~9,000여의 병력과 거의 일치한다.

비록 10,000명이 채 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고려를 쳐들어온 몽고군의 병력수(5,000~ 24,000)를 감안할때 무신정권이 의지가 있었더라면 충분히 국토를 수호해낼 수 있는 병력이었던 것이다.

8. 몽골의 복속한 나라들에 대한 처우에 대하여

8.1. 무신정권 옹호

몽골이 쳐들어와서 한참 싸우고 있던 당시 고려의 시각으로 봤을 때, 몽골은 싸우다 항복하더라도 잔혹한 처사를 가하는 야만적인 학살자들이었다. 싸우기도 전에 우호 관계를 맺고 복속되는 건 상술되었듯이 저고여 피살 사건 이후로 이미 고려로써는 고르는 것이 불가능했던 선택지였다.

호라즘의 몽골 사신 건 처형으로 몽골이 학살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건 당대 호라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부당한 평가다. 이 처형건은 오트라르를 점령하고 이 사건의 책임자였던 오트라르 총독에게 쇳물을 부어 죽이는 혹형으로 처형하면서 이미 그 청산은 끝나버린 뒤였다. 당시 몽골이 도덕적인 국가였다면 이쯤에서 사건을 끝내고 화의를 맺거나, 호라즘을 멸망시키더라도 그 피지배민들은 평화롭게 복속시켰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의 처절한 약탈과 학살, 노예화 등 문명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짓거리들을 마구마구 저지르고 다녔었다. 이런 만행에는 사신 처형이 명분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서하 역시 마찬가지. 위구르인들이 배경에 있다고 해서 몽골인들이 잔혹하지 않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몽골과 위구르의 관계는 당연히 위구르가 을이고 몽골이 갑이었다. 몽골이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면 적당히 지배층 일부를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해 위구르인들에게 던져줘서 달래는 식으로 마무리지으면 그만이었다. 호라즘과 마찬가지로 몽골이 몽골초원 외부의 적대적 정주민들에게는 자비심이고 뭐고 없었다는 사례가 될 뿐이다.

고려의 전쟁 이전 외교 상황도 그렇거니와, 몽골과 싸우다 점령당한 성들에 대한 처사를 볼 때 몽골의 태도는 호라즘이나 서하 정복 때와는 달라졌다고 볼 만한 여지도 없다.
또 백돈명(白敦明)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동주산성(東州山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었다. 민(民)을 몰아 입보(入保)시키고 출입을 금지하자, 그 주리(州吏)가 여쭈어 말하기를, “벼를 아직 거두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적병들이 이르기 전에 번갈아 나가 베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백돈명은 듣지 않고 드디어 그를 베어버리니, 인심이 분노하고 원망하며 모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몽고병(蒙古兵)이 성 아래에 이르자, 백돈명이 정예(精銳)한 군사 600명을 내보내 맞아 싸우게 했으나, 사졸(士卒)들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금화감무(金華監務)가 성(城)이 장차 함락될 것을 알고 현리(縣吏)들을 거느리고 도망하니 몽고병이 마침내 성문을 공격하고 쳐들어와 백돈명과 그 주(州)의 부사(副使)·판관(判官) 및 금성현령(金城縣令) 등을 죽이고 부녀자와 어린 사내아이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

ㅡ <고려사 열전> 백돈명 열전

백돈명은 심히 어리석은 작자로, 부하 하나가 "아직 수확이 끝나지 않았으니 우리가 선제공격해서 적의 진군을 늦춰 시간을 버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해도 듣지 않아 민심이 그를 떠났다. 당연히 백성들과 군대가 산성의 사령부에 반항적인 상황이었으므로 몽골군이 조금만 세심하게 처신했다면 성도 점령하고 민심도 덩달아 얻을 절호의 기회였다. 근데 몽골은 쳐들어와서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포로로 잡아가버렸다. 호라즘이나 서하의 도시들에 대한 처분과 다르다고 볼 수가 없다.
권세후(權世侯)란 자가 있었는데 서해도(西海道) 양산성(椋山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으면서 몽고(蒙古) 군사들을 방어했다. 성(城)은 4면이 깎아지른 절벽과 같았고, 오직 사람과 말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 하나 밖에 없었다. 권세후는 험준한 지형만을 믿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방비는 하지도 않고 호언장담만 늘어놓았다. 몽고 군사들은 대포를 설치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부수었고 화살을 비 오듯 쏘면서 또한 바위 벼랑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왔다. 〈몽고 군사들이〉 불화살을 초가집에 쏘아 성 안의 인가(人家)들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정예한 군사들[甲卒]이 사방에서 쳐들어오니 성이 결국 함락되었는데, 권세후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성 안의 죽은 사람이 무려 4,700여 명이었으며, 10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사로잡힌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은 군사들이 나누어 가졌다.

ㅡ <고려사 열전> 권세후 열전

백돈명만큼 어리석지는 않지만, 권세후 역시 무능하긴 도찐개찐이였다. 그런데 몽골군은 여기서도 심각한 만행을 저질렀다. 10세 이상의 남자를 다 죽였다는 기록이 눈에 띄는데, 어딘가 익숙한 대목이다. 그렇다. 바로 칭기즈 칸이 타타르인들을 처분할 때 내린 지시와 정확하게 판박이다. 비록 타타르처럼 민족 전체는 아니고 한 성의 백성들에 대한 처분이긴 하지만, 고려가 타타르만큼 몽골에 심각한 원한을 산 일도 없는데도 고려인들은 타타르인들과 비슷한 처사를 받은 것이다.

이런 짓을 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몽골은 절대 고려에게 자비심을 보인 적이 없고, 고려인들도 이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 집권 이후에 몽골에 항복한 사례들과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쿠빌라이 칸 자체가 매우 특출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그동안 몽골의 권력자들과 달리 정주민의 문화를 존중하고 유화적으로 대할 수 있던 유연성이 있던 인물로, 정주민들에게는 한없이 잔혹했던 칭기즈칸이 원한관계 없는 유목민들에게만 보였던 '자비심'을 정주민들에게까지 확대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당장 현지 고려 지방정부에게 반항적이던 백성들까지 처참하게 약탈/학살당하는 걸 본 고려인들이 당시 대칸이던 오고타이나 몽케가 쿠빌라이 같은 자비심과 인내심을 가졌으리라 생각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여문환이 참혹하게 죽지 않은 것도 몽골이 원래 자비로운 나라라서가 절대 아니라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어 몽골을 그렇게 바꿔놓은 결과물이라는 것이다.[101] 당연히 이런 일들은 모두 여몽전쟁이 끝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니 여문환 같은 사례를 가지고 고려 조정이나 최씨 정권을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8.2. 무신정권 비판

무신정권이 몽골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게속 항전한 것이 옳았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몽골이 항복한 정복지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파괴했기 때문에 항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몽골은 무조건 정복지에서 파괴와 살육, 약탈만을 자행했는가? 하면 이것도 엄연히 틀린 주장이다. 만약 몽골이 가는 곳마다, 지배하는 곳마다 죽음과 파괴만 있었더라면, 2세기 가량 제국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경우 몽골 제국의 몰락은 실제 역사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것이다.

흔히들 몽골 전사들의 무자비함과 야만성을 강조할때 자주 끄집어내는 일화가 호라즘서하 대학살인데 호라즘 학살은 몽골이 보내온 사신들을 참수한게 그 원인이 되었으며, 서하 대학살 역시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몽골에 귀부한 위구르인들과 서하인들 간의 수 세기에 걸친 민족 갈등이 원인이었다.[102] 바그다드 학살 역시 인도에서 모로코에 이르는 전 이슬람 세계를 동원하겠다는 아바스조 칼리파의 도발이 몽골 전사들에게 위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부 이라크와 달리 모술을 중심으로한 북부 이라크는 당시 룰루 왕조의 지배자이던 바드르 앗 딘 룰루가 서둘러 훌라구 칸에게 항복함으로서 파괴와 학살을 면할 수 있었으며 왕조도 유지할 수 있었다.

모술의 사례 외에도 위구르옹구트, 수코타이 왕국, 아르메니아 왕국, 안티오크 공국, 트라페준타 제국, 룸 술탄국, 조지아 왕국, 블라디미르 공국, 노브고로드 공국 등도 모두 군주 또는 왕세자가 직접 몽골 조정에 입조하여 전쟁도 피하고 국가의 독립도 지켜낸 사례들이다.

이처럼 몽골은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한 군주나 귀족들을 결코 사로잡지 않았으며 그들을 다시 돌려 보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1254년 고려 국왕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몽골 사신을 접견할 적에 몽골은 고종을 인질로 사로잡거나 신변의 위협을 가하는 등의 행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1260년에 태자 왕전이 입조하면서 약속대로 몽골의 침략이 멈추었으며 그 후로도 연이어 고려 국왕이 원나라에 입조하여 칸을 접견하고 오기도 했다. 당시 고려에서는 김준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 대신 월권을 휘두르며 몽골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음에도 몽골은 고려왕을 다시 돌려보내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당장 몽골의 남송 원정 과정만 봐도 몽골은 투항해온 남송 황제 공제를 영국공에 봉하고 부마로 삼는 등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였다.[103] 게다가 투항해오는 남송 출신의 귀족들 역시 왕공제후로 임명해가며 적극적으로 투항을 장려했는데 나중에 전체 원 국토의 1/3을 이 왕공제후들이 관할하게 된다. 또한 전성기 몽골 군대가 무려 5년 넘게 저항한 양양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그곳 주민들을 보호하고 항전을 이끌었던 여문환을 그대로 성주 자리에 있게 해준 것을 보면 몽골이 저항하다 항복한 적국의 지휘관들을 일방적으로 노예로 만들거나 죽였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몽골의 학살과 식민지배를 연이어 겪어야 했던 나라는 무신정권의 오판과 권력욕 탓에 몽골의 항복 권유를 계속 거부하고 본토가 계속 방치당했던 고려가 유일했다.

9. 결론

1970년대부터 군사정권의 영향을 받은 한국 학계에서는 그동안 군인 반란분자들인 고려 무신정권대몽항쟁을 이끈 영웅 집단으로 미화해왔다. 무신정권이 당시 내린 대전략의 선택이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냐에는 비판과 긍정이 병립하는 상황이지만, 그 세부 수행에 있어서 무신정권이 매우 무능하고 무책임했으며,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탐학질에 힘을 쏟았던 것은 절대 옹호될 수 없는 것이다.

대몽항쟁에서 고려는 국력에 비교해 볼 때 놀라운 분투를 했고 그 결과물도 비슷한 수준의 외교마찰을 겪은 나라들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 분전과 결과물에 무신정권이 보태준 건 아무것도 없다. 실질적인 승전은 거의 지방군들과 현지 백성들, 그리고 그곳에 파견된 장군들이 이뤄냈을 뿐이다. 애당초 최씨정권과 그 이전의 무신정권 집권자들이 고려의 국력을 철저하게 망쳐놓지 않았다면 그렇게 적은 힘으로 고려인들이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후협상에서 얻어낸 결과물 또한 무신정권이 아닌 왕실이 일궈낸 것이며 무신정권은 오히려 쓸데없는 고집으로 그것을 망쳐놓을 뻔 했다.

몽골과의 전쟁기간(1231~1259) 동안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고려 백성들의 삶은 말그대로 피와 굶주림이 낭자하는 파탄에 이르렀고, 이후 고려 정부가 몽골에 공식으로 항복한 후에는 '10년간의 유예기'(1259~1268)를 거쳐 사실상 원(元)의 속국(1268~1356)으로 전락하여 40여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을 계속 당해야만 했다.

10. 관련 자료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병지(高麗史兵志)》
《동사강목(東史綱目)》
《원사(元史)》


[1] 이 부분은 수백년 뒤 인조와 다른 점인데, 인조는 이괄의 난을 자기 실수로 초래했으며,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에서의 초라한 졸전에도 직접적인 책임이 명백하게 있다. 물론 최우도 한 짓거리가 있어서 능력 면이면 모를까 인성이나 책임감에서는 오히려 인조보다 평가가 더 나쁘다.[2] 사실 당시 옹구트족은 몽골 초원에 살던 유목부족들 중에 좀 이질적인 수준일 뿐이었기에 칭기즈 칸이 그들을 그리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타타르처럼 원수였던 것도 아니고.[3] 서하의 피지배민들이었다.[4] https://en.wikipedia.org/wiki/Principality_of_Antioch#Fall_of_the_Principality[5] 그나마 고려 조정은 저구유를 직접 죽였다는 근거가 전혀 없기에 호라즘에 비하면 훨씬 참작의 여지가 있다.[6]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온 1231년 시점에서 금나라는 이미 만주를 완전히 상실했고, 고려보다 서쪽에 위치한 몽골군은 황하를 넘니 마니 하는 때다.[7] 사실 몽골제국의 덩치가 이 시점에서 많이 커졌다고는 해도 칭기즈 칸이 건국했던 '예케 몽골 울루스'에 속해있던 국민 수는 당연히 유목민족이니만큼 몽골인의 숫자 자체가 그닥 많지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몽골족 자체가 인구 적은 극초기 예케 몽골 울루스 내에서도 케레이트나이만 등에 인구수가 한참 밀리던 민족이니만큼 몇명이 몽골족이니 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 그 중 몇명이나 유목민 기마병이었냐는 문제면 몰라도.[8] 금나라 출신의 관료 포선만노가 1215년 여진족들을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9] 병력 수는 24,000여로 추정된다.[10] 몽골은 1233년 동진국을, 1234년에 금나라를, 그리고 1276년에야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게 된다.[11] 최윤진, 「고종 18년 여몽전쟁의 전개와 그 성격」, 『동아대하교 교육대학원』, 2006 참고.[12] 고려 정규군으로 그 수는 전성기 기준으로 4,5000명이었음[13] 윤용혁, 「최씨무인정권의 대몽항쟁자세」, 『사총·강진철교수회갑기념한국사학논충』 , 1977, pp. 304~315. 최윤진, 「고종 18년 여몽전쟁의 전개와 그 성격」, 『동아대하교 교육대학원』, 2006[14] 고려 중앙군. 나중에 3군(三軍)으로 편제됨[15] 몽골, 동진, 고려 연합군이 거란 난민들의 최후 거점지인 강동성을 탈환했을때 사로잡은 거란민들의 숫자는 5만이었다. 부녀자, 어린 아이, 노약자들이 포함된 숫자이니 실전투원들의 숫자는 많게 잡아야 3만 정도다. 적의 소규모 패잔병들을 막아낼 상시 병력이 없어서 민간인들을 강제 동원하고 있는 고려의 막장 상황을 잘 보여준다.[16] 전시를 대비해 정기적으로 훈련받는 군대[17] 윤번으로 수도에 올라와 지는 군복무[18] 여기서 백정은 흔히들 '도축업에 종사하는 천인'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고려시대의 백정은 조선시대의 백정과는 그 지위가 전혀 다른 '평시에 군역을 지지 않는 일반 농민 계층'이었다.<한국민족대백과/'백정'>[19]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13_0040_0020_0020_0020[20] 고려시대에 농사와 군역을 병행하던 병농일치의 농민군인 정용군 또는 보승군과 혼동하지 말도록 하자. 정용, 보승군은 정규군으로서 윤번으로 수도에 올라와 정기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국경을 방비하는 업무를 맡았으며 그 수는 전성기 기준 38,000여명이었다. 하지만 몽골이 쳐들어올 무렵에 이들은 몰락하여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21] 이 점은 조선과 고려 병역체계의 차이점 중 하나이다. 조선은 평시엔 군역을 지지 않는 일반 농민 계층을 보인 또는 봉족으로 분류하였고 정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는 조선의 인구가 더 많았음에도 조선의 군사 수가 적어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22] 최충헌의 장남이다.[23] 고려시대 군역을 지지 않았던 농민[24] 군역의 의무가 없는 천민 집단[25] <고려사절요>, 원종12년(1271), 5월(음)[26] 마산(馬山) 초적(草賊) 괴수 2인이 스스로 항복하고 최우(崔瑀)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청컨대 정예병 5,000인으로 몽고군을 격퇴하는 것을 돕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우가 크게 기뻐하여 매우 후하게 상을 주었다. <고려사> 최우(崔瑀)가 사람을 보내 광주(廣州) 관악산(冠岳山)의 초적(草賊)이 주둔한 곳에 가서, 적의 괴수 5인과 정예 50인을 회유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우군(右軍)에 충당하였다. <고려사>[27]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강화도 파천 시절 고려 정부의 병력' 참조.[28] 문제는 이들을 최우가 팔만대장경판의 제조에만 동원하는 바람에 오히려 성 안의 식량만 축내다 돌아가는 일이 벌어진다.[29] 3만 몽골 병력은 최대치다. <고려사절요>에 "삼군이 동선역에 진을 쳤는데 돌연히 8천여 명의 몽골군사가 급습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몽골군이 3개 부대로 편성해 진격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몽고군의 수는 대략 24,000~30,000으로 추정된다.[30] 당시 고려를 침공해온 몽골군에는 요동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투항한 한족 및 여진족들도 상당수 포함이 되 있었다.[31] 귀주성 전투의 영웅 김경손은 훗날 그의 명성을 시기한 최우의 아들 최항에게 죽임을 당한다.[32]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방어전 회피' 항목 참조[33] 다만 고종과 고려 왕족들도 어쩔수없던것이 실권을 최씨 정권에게 전부 뺏긴한터라 그들도 할수있는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최씨 정권은 국왕을 두명이나 폐위시켰다. 특히 희종은 최충헌을 타도하려고 했으나 많아봐야 1천명에 불과한 최충헌의 사병과 싸울 군사력이 없다보니 역으로 폐위당한것이다.[34] 그는 원래 최씨 가문의 가노(집안 노비)였다.[35] 정묘호란, 병자호란 직전 조선의 상황과 비교하며 당시 고려를 저평가하는 일이 부당한 이유다. 정묘호란은 인조 스스로가 초래한 이괄의 난이 기폭제였고,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는 아예 자기가 선전포고를 보내버리는 대형사고를 쳤다. 당시 국제정세와 관계없이 인조 본인이 홍타이지에 맞설 능력이 없음이 불 보듯 뻔했는데도 말이다.[36] 사실 김준은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우만큼 막강한 권력을 부리던 자는 아니었으므로 김준보다는 김준 정권 전체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37]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0_0030_0010_0030_0040_0050&whereStr=%40where+%7B+IDX_TITLE%28HASALL%7C%27온수현%27%7C100000%7C0%29+or+IDX_CONTENT%28HASALL%7C%27온수현%27%7C100%7C0%29+or+IDX_ALL%28HASALL%7C%27온수현%27%7C1%7C0%29+%7D[38] 무신정권의 군대로 그 당시 고려의 유일한 정규군이었다. 일반 별초와 구분된다.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별초와 야별초' 항목 참조.[39] 이 시기 고려 정부의 병력에 관해서는 본 문서의 '강화도 파천 시절 고려 정부의 병력' 참조[40] 별초(別抄)의 뜻 자체가 '특별히 가려 뽑은 군대'라는 뜻이다.[41]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2605247&cid=51885&categoryId=53483[42] 이후 홍복원은 몽골이 고려를 쳐들어올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하며 고려 군민들을 수탈하였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골로부터 관직을 하사받고 원 간섭기 동안 고려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며 수탈을 일삼았다.[43] 윤관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44] 고려시대 2군 6위의 하나인 응양군 소속의 장군[45] 황려(黃驪 :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사람으로 고종 41년(1254) 원나라와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이 왕의 친자(親子)가 아니라는 사실을 원의 황제에게 일러바치며 몽골의 6차 고려 침략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후 민칭은 고려에 귀순하여 최의(崔誼)에게 금패(金牌)를 바치면서 원의 침공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최의(崔誼)로부터 집과 미곡(米穀), 의복을 받고 산원(散員)으로 제수되었다. ㅡ 『고려사』 권99, 열전12 ㅡ[46] 고려시대의 중앙군인 2군·6위(二軍六衛)의 정8품 무관직[47] 물론 최항은 이걸 제대로 시행하는 게 아니라 해안가가 아니라 내륙의 청주 주민들을 섬에 몰아넣는 희대의 뻘짓을 저질렀다.[48] 동사강목은 그를 '최항의 사냥개'라고 표현하고 있다. 최항의 명을 받아 김경손 장군을 시해한 인물이기도 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발이 썩어 들어가 사망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조차 그를 혹리 열전에 담아놓고 있으니 얼마나 송길유의 악명이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49] '최항의 개' 송길유로부터 천거받아 전전승지(殿前承旨)가 되었다.[50] 고려 후기 왜(倭)와 몽고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 등 요지에 파견된 군대의 지휘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51] 고려시대때 특별히 조사할 일이나 또는 징세할 일이 있을때 임금의 명령을 받고 지방에 파견되는 임시 관직[52] 고려 정부가 몽골군이 되돌아간후 전후 복구를 위해 지방에 파견한 임시벼슬 혹은 관리[53] 몽골 침략기 동안 백성들을 강제로 섬으로 옮겨 고기방패로 삼는 가장 악질적인 임무를 수행하던 직책이었다.[54] 그는 무신정권 수괴 최항의 명으로 귀주성 전투의 항전을 지휘한 김경손을 살해한 인물이기도 하다.[55] 고려시대 최의(崔竩)가 강화도의 세금을 걷기 위해 설치한 관직[56] 무신정권의 치안 부대[57] 1290년 몽골이 동녕부를 고려에 돌려줄때도 최탄과 함께 반기를 든 한신, 계문비, 현효철 등이 충렬왕으로부터 대장군에 봉해지게 되는데 당시 몽골의 눈치를 보던 충렬왕이 친원파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58] <고려사> 제130권 열전43[59] 수도 민방위[60] 위은숙, <13~14세기 고려와 요동지역의 경제적 교류>, 영남대학교 참고.[61] 일명 왕만호(王萬戶).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몽골인은 아님이 분명하다. 기록상으로 볼때 왕영조는 몽골에 귀부한 금나라 사람으로 보여지며 아마 한족일 것으로 추정된다.[62] 훗날 공민왕이 동녕로(서간도)의 친원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설치한 서경만호부와 다르다.[63] 중국에서 1리는 약 0.5km이니 1,000여리는 무려 500km에 달한다. 서경(평양)을 중심으로 직경으로 계산했을때 위로는 함신진(의주), 아래로는 남경(서울), 서로는 서해안 여러 섬들과 동으로 원산만까지 통제하에 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훗날 조휘, 최탄 등이 각각 동계북계 지역에서 봉기하는 것을 보면 왕영조가 관리한 1,000여리는 심히 과장된 얘기라고 보여진다. 즉, 영향력은 발휘하되 실제 관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북계 지역에서 봉기하는 최탄이 자비령을 경계로 삼아 몽골에 귀부한 것을 보면 왕영조의 서경만호부가 통치한 실효 영역은 자비령 이남, 즉 오늘날 평양을 포함한 황해도 일대로 비정된다.[64] 그마저도 모두 고려에 들어와 급조한 배들이었다.[65] 참고로 울돌목과 장죽수도, 맹골수도는 한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급류 지대다.[66] 김포 대곶(大串)과 강화도 광성보는 손돌목(孫乭項)을 사이에 두고 그 거리가 고작 2~300m에 불과하다. 강화 해협의 가장 넓은 곳도 폭이 1km를 넘지 않는다.[67] 500m 전후까지의 거리는 부교 설치도 가능하다. 당장 여몽전쟁보다 600년도 더 전에 있던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양제랴오허에 부교를 깔아서 도하했다.[68] 양양성 전투에서는 중동 출신의 군사 기술자 이스마일 알 아딘이 개발한 회회포가 사용되어졌는데, 300kg의 바위를 무려 500m 밖까지 쏘아올릴 수 있었다.[69] 성을 방어한 김윤후 스님이 이끌었던 의병들은 1,100여명 남짓이었다.[70] 고려 조정은 1126년(인종 4년)에 금과 이미 군신관계를 맺은바 있다.[71] 송은 전통적인 고려의 우방국이었다.[72] 물론 해당 국가들이 몽골이 보내온 사신을 죽이는 등 몽골을 도발한 점도 있었다. 서하는 오래전에 몽골에 귀부한 위구르인들과 원수지간이었다.[73] 여기서 '소국'은 고려를 뜻하며, '권신'은 쿠데타로 원종을 폐위시킨 무신정권 수괴 '임연'을 가리킴[74] 왕릉쭈. 몽골의 5차 침입때 고려에 들어와 서경을 개간하고 만호부를 설치해 장기간 주둔했던 몽골 장수다. 고려인들은 그를 가리켜, '서경 만호'라는 뜻의 ‘왕만호’라고도 불렀다. 몽골에 귀부한 금나라 사람으로 보여지며 독자적으로 서경에 관청을 설치하고 고려에 장기간 주둔할 정도면 당시 몽골 장수로서 왕영조의 지위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75] 윤춘과 송산은 일찌감치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투항해 부역을 일삼다가 다시 고려에 귀부한 간신배들이었다.[76] 1260년 고려 태자가 몽골 수도 개평부를 방문했을때 쿠빌라이가 태자를 돌려보내며 전한 조서이다. 당시 고려 태자는 김준이 본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돌아갈지 말아야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77] 삼별초의 난 진압은 1270년대에 있었던 일이고, 이때는 이미 남송 영토의 상당수가 몽골에게 넘어간데다 고려의 항복으로 전선도 훨씬 좁아졌기에 직접적인 비교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78] 그나마 몽골이 이겼던 아주 전투도 고려 쪽 함선이 고작 9척이던 소규모 전투였다.[79] 애당초 최항이 해도 입보책 강화에서 저지른 병크도 강화도 조정이 섬들과 내륙에 행정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하지도 못했을 일이다.[80] 사실, 제국을 세우기 전에는 약탈이 곧 목구멍에 포도청이던 유목민족에게 전면전이니 아니니 하는 구분 자체가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81] 몽골의 1차 침입때 서북 14개성에 주둔했던 다루가치들은 하급 관리들로서 현지에서 세금과 군사를 조달할 권한이 없었다. 그마저도 1년 만에 귀국한다.[82]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는 대포의 원형이라 부를 수 있는 총포가 사용된 최초의 전투이기는 하나 이때는 살상용이 아닌 단순히 몽고의 말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ㅡ 아민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ㅡ[83] 게다가 당시 강화도에 투석기가 있었을지도 의문이다.[84] 당시 몽골군을 상대로 5년 넘게 항전을 지휘한 여문환(呂文煥)은 항복한 후에도 몽골로부터 성주로 재임명받았다.[85]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고려 인구 감소는 100만으로 추정이 되며, 이 수치는 동시대 러시아(키예프 공국)가(이) 몽골의 침략으로 입은 인구 소실의 두 배다.[86] 몽골은 이미 1234년에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중국 전역을 손에 넣었다.[87] 페르시아 조선업자들이 동원되었다.[88] 수전에 능한 여진족 해적들이 동원되었다.[89] 당시 자바 섬에 자리 잡던 싱하사리 왕국의 군주 컬타나가라가 왕국에 방문한 원나라 사신의 코를 자르는 등 원나라의 조공 요구에 강력한 거부의사를 표현하자 응징을 목적으로 자바로 원정을 한 것인데, 정작 응징 대상이었던 컬타나가라가 케디리(Kediri)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살해당하자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다가 당시 싱하사리 왕국의 왕자였던 비자야의 요청으로 케디리의 반란을 진압했는데, 반란이 진압된 뒤에 비자야에게 배신 당하고 대패해 철수했다.[90] 물론 이 반란은 사전에 진압되어 삼별초와 연락이 닿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파토나고 만다.[91] 윤용혁, 「최씨무인정권의 대몽항쟁자세」, 『사총·강진철교수회갑기념한국사학논충』 , 1977, pp. 304~315. 참조[92] https://www.jeju.go.kr/culture/history/hangmong/sambyeolcho/sambyeolcho03.htm?[93] 관리이긴 하지만 실제 근무처가 없는 일종의 명예직[94] 고려시대 군역을 지지 않는 일반 농민[95] 군역의 의무가 없는 천민 집단[96] 톡토르는 당시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몽골 장수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다루가치(감독관)'이였다.[97] 고려시대 국왕을 보조하고 국정 전반에 관해 논하던 2품 이상의 재상들[98] 아마 이들은 강화도에서 탈출해온 삼별초 출신들일 것으로 생각된다.[99] 1리는 약 400m에 해당한다.[100] 당시 열악한 고려의 가도(街道) 상황을 고려할때 동시에 다섯 명 이상의 장정들이 줄지어 행군하기엔 무리이지만 최대치를 고려한 것이다.[101] 사실 그렇게 어느 정도 바뀌기는 했어도 남송에 대한 몽골의 처사는 여전히 가혹해서 남송의 한족들은 모두 최하층 계급인 '남인'으로 분류당했다. 호라즘이나 서하보다는 나은 사례라고는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102] 서하 대학살을 주동한 인물도 칭기즈 칸에 귀부하여 양자가 된 위구르족 출신의 바우르추크 알트 테긴이었다.[103] 그러나 송 공제도 결국 후환이 될 수 있다는 명분으로 끝끝내 사사당하는 비운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