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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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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3. 고려4. 조선5. 일제강점기 그리고 경성부 편입
5.1. 만일 경성부 편입 대신에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5.2. 보설: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시흥군의 운명은?
6. 대한민국7. 관련 문서

1. 개요

영등포구 행정구역 변천사
년도 당시 행정구역
1896 시흥군 상북면 / 하북면
(始興郡 上北面 / 下北面)
한성부 성저십리 연희방 여의도계
(漢城府 延禧坊 汝矣島契)
시흥군 상북면 원지목리
(始興郡 上北面 遠芝牧里)[1]
1911 경성부 연희면 여의도리
(京城府 延禧面 汝矣島里)
1914 시흥군 북면
(北面)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
(高陽郡 龍江面 汝栗里)
시흥군 북면 도림리
(北面 道林里)[2]
1917 시흥군 영등포면/북면
(永登浦面/北面)
1931 시흥군 영등포읍/북면
(永登浦邑/北面)
1936
1943
게이조부 에이도호구 (경성부 영등포구)
(京城府 永登浦區)[3]
시흥군 동면 도림리
(東面 道林理)[4]
1946 서울특별자유시 영등포구
(永登浦區)
1949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永登浦區) [5]

'영등포'란 지명의 유래에는 정설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무속 신앙으로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날이라 하여 무당이 보름동안 영등굿을 했는데, 지금의 영등포구 신길동 50번지 일대 방아곶이 나루터부근에 성황당이 있었고 이 곳에서 영등굿을 하였기 때문에 영등포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또, '영등포'라는 이름은 음차이기 때문에 한자 명칭도 英登浦, 永登浦 등 다양했다.

참고로 이 문서는 리그베다 위키 시절, 서울특별시자치구 중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지역사 하위문서이며, 특별시/광역시를 통틀어 모든 자치구 중에서도 최초로 만들어진 지역사 하위문서이기도 하다.

이 문서는 현재의 영등포구 지역을 위주로 작성되었지만, 과거에 영등포구에 소속된 지역까지 아우른다.

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때에는 '잉벌노'('늠내')이라는 지역의 일부였으며, 통일신라 때는 곡양현의 일부였다. 단 양화동은 제차파의현 소속이었고, 통일신라 때 공암현(孔岩縣)이었다가, 이후 부평도호부[6] 전신인 수주군(樹州郡)에 병합되었다.

3. 고려

태조 때 곡양현이 금주(衿州)로 개편되자 이에 속했다. 한편 양화동이 속한 옛 공암현은 충선왕 때 양천현으로 부평에서 재분리되었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prior_to_1413_2.jpg
고대 이후 조선 건국 이전까지의 영등포구 지역 모습
(지도 상 경계는 편의상 현재의 행정구역 경계를 따랐음)

4. 조선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896_revised01.jpg
구한말(1896년) 당시 영등포구 지역 모습[7]

대체적으로 금천현(지금의 금천구가 읍치)의 변두리였다.

금주가 금천으로 이름이 바뀌고(1413년) 금천현 자체가 인근 과천시 지역의 과천현과 현재의 강서구/양천구 일대인 양천현과 합치고 찢어지길 반복하다(1414년) 결국 세조 이후 금천현의 경계가 확정(1416년). 그 뒤로는 이름만 금천현 → 시흥현 → 시흥군으로 변경되면서 유지되었다. 이 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영등포(英登浦)란 명칭이 처음 쓰였다.

단 여의도는 조선 건국 이후 한성부 성저십리에 편입되었다. 양화동은 양천군(양천현) 소속이었다. 원래 안양천 합류부가 현재의 염창동 - 영등포정수장 사이가 아닌 영등포정수장 - 선유도 사이였기 때문. 1935년 안양천 제방 축조 이후 안양천의 유역, 즉 물길이 바뀌면서 양화동이 영등포 권역으로 편입된다.

5. 일제강점기 그리고 경성부 편입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14_revised01.jpg
1914년에 여의도는 고양군에 편입되었고, 지금의 양화동은(원래 양천군의 일부였으므로)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통합되어 시흥군 북면이 되었다.[8][9]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17_revised01.jpg
1917년 북면 중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영등포면으로 분리하였으며,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36_revised01.jpg
1936년에 영등포읍 전역과 북면의 일부 지역, 김포군 양화리가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상술하였듯이 안양천의 유역이 서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면의 잔여 지역은 동면에 편입되었다. 한강 이남 지역 중에 처음으로 서울로 편입된 것이다. 경성부의 남부 경계는 지금은 복개된 대방천[10]이 기준이 되었다. 다만 대방천이 복개될 당시에 직강화도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재의 대방천로와 당시 경성부 경계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영등포읍에 자리잡은 일본인 유지들이 경성부 편입을 반대하면서 영등포부 승격을 주장했다. 이 때 당시 영등포는 공업도시로 성장하여 자족도시로 발돋움하려는 채비를 하고 있었고, 읍 차원에서도 독자적인 도시계획을 마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935년 경성부의 확장을 앞두고 영등포읍 의회에 의견을 구했을 때도 일본인 의원들은 반대하는 기류였으나 조선인 의원들은 찬성하는 의견이 주였고, 한동안 결론을 못 내다가 결국 우리는 반대하지만 총독부에서 사실상 결정을 내린 상황이라 받아들인다. 대신 시설 투자 등의 우선권을 줄 것. 이라는 의견으로 정리되었다. 총독부가 이렇게 일본인 유지들의 반대를 씹은 데는 인천권의 경성부 추가 편입을 살짝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 지역의 경성부 편입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경성부 편입은 시기상조[11]라는 지역 여론이 강했었고 1925년 한강 대홍수 사태[12]로 편입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경성부 확장 초안에 한강 이남지역은 여의도, 노량진과 흑석동이 포함되었다가 갑자기 영등포(영등포읍 일대 및 북면 일부)도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만약에 유지들 의견대로 경성부 편입대신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서울 서남부와 광명시 일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마냥 서울특별시와 접하는 희대의 광역시급 서울 근교 위성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은 서울 주변의 (사실상의) 위성도시가 서울에 병합된, 지금까지의 유일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광주 광산구의 서울 버전?

영등포로서의 독자적인 지역 정체성은 그 잔재가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으나(출처: 뿌리깊은 나무 - 서울편), 지금은 완전히 서울특별시에 동화된 상태이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43_revised01.jpg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설치된 7개 구 중 하나로(용산, 중, 종로, 서대문, 동대문, 영등포, 성동), 70년 가까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자치구다. 서울 서남부의 터줏대감.

5.1. 만일 경성부 편입 대신에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virtual_yeongdeungpo-city.gif

만일 경성부 편입 대신에 영등포 지역 일본인 유지들의 주장대로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서울특별시와 한강을 사이로 접경하는, 인구 200~300여만 정도의 희대의 위성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인천이나 안산 같은 도시가 한강을 사이로 서울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격

경기도 영등포부는 광복 이후에는 경기도 '영등포시'가 되어 한강 이남 최대의 서울권 위성도시로 성장했을 것이며, 영등포와 구로공단[13] 일대의 공업지대를 기반으로 직할시로 승격했을 여지도 있을지도 모른다. 공업지대라는 기반 덕분에 서울 바로 옆에 있는 위성도시치고는 자족기능을 어느정도 갖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광명시의 경우와 딴판 다만 인천과 다르게 해안도시와 같은 특수성은 없기 때문에 경기도 산하의 초대형 특정시로 남았을 가능성이 더 있었을 것이지만, 인구의 급속한 증가 문제 때문에 1980년대에 직할시로 승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영등포시가 직할시로 승격했다면 1973년에 시로 승격된 안양시를 병합하는 형태로광산구의 영등포 버전? 시역이 확장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안양시 승격 대신에 시흥군 안양읍을 영등포시 남구 or 안양구로 편입했었을 수도 있었고... 한편으로 지금의 강남 지역은 서울 편입 대신에 경기도의 위성도시(베드타운) 개념으로 개발되었을지도 모른다. 1963년 서울 대확장도 정치적 힘겨루기 끝에 가까스로 단행된 것이라...

시역도 지금의 영등포구(대림동 포함), 동작구(신대방동 포함. 사당동 제외), 구로구 신도림동/구로동이상 영등포시 북구, 금천구, 관악구(남현동 제외) 일대이상 영등포시 동구 뿐만 아니라 지금의 광명시[14]영등포시 서구안양시영등포시 남구(or 안양구) 일대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본격 오리지널 시흥군의 부활? 그리고 옛 부천군 소사읍 동부 지역인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천왕동 일대도 지리적, 생활권상 문제로 영등포시에 편입되었을 수도 있었다.[15] 200만명대로 성장한 영등포시는 수원시 못지 않게 광역시 승격 문제로 시끄러웠을것이다. 물론 이미 직할시로 승격해버렸다면 그런 논란은 없었겠지만.

그러나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광역화 차원에서 서울 대확장이 단행되었을 경우 영등포시가 통째로 서울특별시에 병합될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3년 서울 대확장도 정치적 힘겨루기 끝에 가까스로 단행된 것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만큼 영등포시가 서울에 병합되는 확률은 높진 않았을 듯. 특히 실제역사처럼 정부가 위성도시 육성정책을 고수해온 경우라면 서울에 병합될 가능성은 희박했을 것이다.

아무튼 영등포가 독자 승격했다면 시흥군의 역사도 지금보다는 덜 꼬였을 것이다. 영등포가 서울특별시의 일부가 아닌, 오리지널 시흥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대도시로 존속했더라면 말이다. 각종 역사 서적에서는 조선시대 시흥은 지금의 영등포시 일대다라고 쓸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영등포구의 사례의 정반대가 광명시인데, 같은 원 시흥군 출신에 비슷한 생활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광명시의 경우 인접 대도시 편입이 예정되어있었다가 위성도시 육성이라는 명분으로 주민들의 희망과 반대로 강제로 시 승격된 케이스다.

5.2. 보설: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시흥군의 운명은?

시흥군 항목 참조. 문서 내용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반면 영등포구의 역사와는 별 상관없는 내용이므로 분리한다.

6. 대한민국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49_revised01.jpg
1949년에 현 영등포구 전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다.[20] 이는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되지 못한 시흥군 옛 북면 지역(1936년에 시흥군 동면으로 이관)이라는 잔여구역(지금의 대림동, 신도림동, 구로동, 신대방동) 정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60년에는 당시 영등포구 지역이 서울시내통화권으로 편입되었다.

1962년 12월 11일에 김포군 양서면과 양동면 전역(현 강서구 대부분과 양천구 전역, 부군면 통폐합 이전 양천군 영역),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오쇠리 2개 리(현 강서구 오곡동, 오쇠동)와 소사읍 7개리(현 구로구 중 안양천 이서 지역인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온수동, 궁동, 항동, 천왕동), 시흥군 동면 시흥리·가리봉리·봉천리·신림리 4개리(현 관악구 봉천동·신림동과 금천구 전역, 구로구 가리봉동)[21]와 신동면 전역(현 서초구 대부분과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을 편입[22]하여 서울특별시의 서남쪽을 모두 관할하는 큰 구가 되었다. 즉, 김포공항부터 양재동까지가 전부 영등포구 관할이었다. 이 때문에 영등포구를 포함해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서초구가 '범(凡) 영등포 권역'으로 분류된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63_revised01.jpg
1962년 12월 서울 대확장 당시 지금의 영등포구 지역 모습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seoul1963expansion.jpg
1962년 12월~1973년 6월까지의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상황. 영등포구와 성동구가 정말 크고 아름답다. 현재의 강남지역을 예전에는 영동이라 불렀는데 (영동대교가 그 흔적) 이는 영등포구 동쪽이라 해서 영동(永東)이라 불렸던 것이다.

1967년경에는 서울특별시 산하 영등포'시'로 승격되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23]

197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영등포구 인구가 무려 1,182,759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뭔 구 하나 인구가 현재 울산광역시 인구보다 많았네 그 당시 영등포구는 현재와는 달리 서울 서남부 전역을 포함하고 있는 방대한 지역인데다가 분구도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이에 필적하는 인구가 거주한 자치구가 아직까지도 없다.[24][25] 인구가 많고 관할구역도 넓어 영등포구청에서 모든 사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등포구에 양서출장소(공항동에 소재하며 외발산동, 내발산동, 방화동, 공항동, 오쇠동, 오곡동, 과해동을 관할, 현 강서구 일부), 양동출장소(등촌동에 소재하며 등촌동, 가양동, 염창동, 마곡동, 신정동, 신월동, 목동을 관할, 현 강서구 일부 및 양천구 전역), 관악출장소(시흥동에 소재하며 현 금천구 전역, 구로구 가리봉동, 관악구 봉천동·신림동을 관할), 오류출장소(오류동에 소재하며 현 구로구 오류동, 고척동, 개봉동, 궁동, 천왕동, 항동, 온수동을 관할), 신동출장소(양재동에 소재하며 현 서초구 전역 및 관악구 남현동, 동작구 사당동을 관할)를 두어 행정기능을 분산했다.

그 후 1973년 구의 동쪽이 관악구[26]로 분구되었고, 개봉동-시흥군 서면 광명리(지금의 광명시 광명동)쪽 경계가 미세조정되었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singil-daebang-boundary.jpg
1975년 관악구 대방동와 신대방동의 각 일부를 신길동에 편입하여(현재의 신길6동과 신길7동의 대부분 지역), 대방로를 기준으로 경계를 조정하였다.[27] 또한 영등포구 독산동(현재의 금천구 독산동) 일부 역시 관악구 신림동에 편입되었다(현재의 행정동 조원동 일부).

1977년 구의 서쪽이 강서구, 1980년 구의 남서쪽이 구로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때 영등포구에 잔류한 신도림동 지역은 대림동이 되었다. 구로구 분구 당시에 지금의 광명시 광명동과 철산동을 구로구에 편입시키는 안이 검토되기도 하였다.[28]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80_revised01.jpg
1980년 당시 영등포구 모습. 구로구, 강서구(양천구 포함), 관악구(동작구 포함), 서초구(분리직전 성동구 소속)가 영등포구에서 떨어져나갔다. 영등포구 분할 당시에 이미 관악구(현 동작구)로 넘어간 신대방동, 대방동, 노량진동 등지를 도로 영등포구에 편입시키는 안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영등포구/역사/yeongdeungpo-1995_revised01.jpg
1995년 이후 현재의 영등포구 모습

7. 관련 문서



[1] 지금의 대림동, 도림동 지역.[2] 사촌리(문래동) + 도야미리(신도림동) + 원지목리(도림동, 대림동) 통합[3] 1936년 1943년 2번에 걸쳐 개편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림동은 이때 경성부에 편입되지 못하여 시흥군 동면에 이관되었다. 대림동이 서울시에 편입된 것은 1949년.[4] 도림리 중 지금의 문래동(구한말 사촌리), 도림동(구한말 원지목리 일부) 지역만 1936년에 경성부 편입.[5] 시흥군 도림리는 '영등포구 신도림동(新道林洞)'으로 편입됨.[6] 현재의 부평, 부천 일대[7] 지도에 오류가 있다. 여의도한성부에 속했으므로 ○○군 ○○면 ○○리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다. 구한말 당시 여의도의 행정구역은 한성부 연희방 여의도계였고, 경술국치와 동시에 경성부 연희면 여의도리가 되었다가 4년 후 부군면 통폐합밤섬(율도)과 행정구역을 합치면서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되었다.[8] 한편, 3년 전인 1911년 현재의 금천구 시흥동에 있었던 시흥군청도 영등포로 이전한다.[9] 이 지도에는 동면에 잔류한 상도리가 북면으로 표기된 오류가 있다.[10] 보라매역 남쪽에서 시작하여 신도림역 동쪽에서 끝나는 도로인 대방천로가 이 하천의 복개로이다.[11] 영등포에 거주하던 조선인과 일본인 주민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입장을 보였다.[12] 지금의 영등포구 일대를 차지하던 옛 시흥군 상북면, 하북면 일대는 저지대 범람원 지대로 홍수의 피해가 잦았던 곳이었다. 조선후기 인구 조사자료를 보면 당시 영등포 일대의 인구가 서면(광명시), 현내면(금천구)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13] 구로공단이 서울시 도시계획과 맞물려 개발된 건 사실이나 궁극적인 건설주체는 서울시가 아닌 중앙정부였고, 지금의 금천구 지역은 경부선 철도를 끼고 있기에 영등포권 지역이 서울시가 아닌 영등포시 소속이었더라도 구로공단 조성 계획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14] 지금의 광명시 지역이 서울 편입 예정지의 개념으로 주거지로 개발되었으나 서울 집중문제로 서울 편입이 무산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영등포가 서울특별시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시로 존재했다면 광명시 승격 대신에 영등포시 편입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즉, 이런 시나리오에선 '광명시' 자체가 아예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15] 여담으로 이들 지역은 부평도호부 수탄면이었다.[16] 구 시흥군 북면[17] 구 시흥군 서면[18] 구 시흥군 동면[19] 구 시흥군 안양면[20]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은 1947년 안양면으로 옮겨갔다.[21] 참고로 이 때 유일하게 남은 시흥군 동면 안양리는 현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이 되었다.[22] 서울特別市·道·郡·區의管轄區域變更에關한法律(서울특별시·도·군·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 법률 제1172호, 1962.11.21. 공포)
大韓民國憲法第5號(대한민국 헌법 제5호, 1960.11.29. 일부 개정)
公布式令(공포식령, 대통령령 제429호, 1950.12.30. 일부 개정 · 공포)
[23] 1970년대 중반에는 지금의 광명시도 서울특별시 산하의 광명시로 편입해오는 방안이 검토되었다.[24] 당시 영등포구 인구는 현재 경기도 제1도시인 수원시 인구와 맞먹는다. 그것도 무려 47년전의 구 인구가.[25] 각 광역시별로 인구 최대치를 찍은 구를 비교하자면 인천광역시 북구(현 부평구)가 계양구를 분구하기 전 1995년 인구에서 75만명, 대구광역시 서구달서구 분구 직전인 1987년 57만명, 부산광역시 동래구금정구 분구 직전인 1988년에 89만명, 대전광역시 중구가 1987년 서구 분구 직전 54만명, 광주광역시 서구가 1995년 남구를 분구하기 직전의 인구가 47만명으로 가장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울산광역시 중구북구가 울주구(현 울주군) 일부와 함께 북구로 쪼개지기전 1996년 29만명을 기록했다. 즉, 영등포구 외에 가장 인구가 많았던 기록을 가진 구는 1975년 서대문구가 인근 자치구들한테 행정동을 넘기기 전인 1월 초 인구가 101만명, 1987년 송파구 분구 직전의 강동구가 113만명, 1973년 성북구도봉구(분구 당시에는 지금의 노도강지역을 전부 관할함)분구 전 111만명, 동대문구성동구가 시기는 다르지만 분구 직전 94만명 정도를 기록하였다.[26] 이와 함께, 방배동과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일대를 제외한 지금의 서초구 일대가 성동구로 이관된다.[27] 이 때문에, 해당 지역에는 현 주소로는 신길동이지만 이름에 '대방'이 들어간 시설이 여전히 꽤 남아있다(대방역, 대방초등학교, 대방동아파트, 천주교 대방동성당 등).[28] 이게 무산되어 생긴 결과가 1981년 광명시 승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