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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12:19:20

예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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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러두기
2.1. 사료로서의 복음서
3. 탄생 배경4. 탄생5. 공생애 이전의 삶6. 공생애7. 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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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수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일러두기

역사적 예수, 곧 역사 비평적 방법론의 관점에서 본 예수의 생애에 대해 작성하였다.

본 문서의 서술이 예수의 역사적 행적을 완전히 재구성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 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자의 생각과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예수에게 투영하는 것이므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1]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연구자들 내에서도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은 있기에 불완전하게나마 역사적 예수를 논할 수 있다. 또한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이 서방 그리스도교의 역사 비평적 성서 주석학과 상당히 많은 개념이 겹치기에 교계에서 가르치는 예수와 역사적 예수의 차이도 21세기 기준으로는 상당히 흐릿해져 있다. 개신교 쪽은 교단 성격마다 제각각인 감은 있으나, 소수 급진파 신학자나 교단의 일탈이라 말할 단계는 옛날에 지났다. 따라서 역사 비평적 관점의 연구 성과가 잘 반영되어 있다면 굳이 '역사적 예수'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이 문서를 읽을 때는 이를 감안해야 하며, 기여자들도 이 점들을 고려해서 작성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 문서 참고.

2.1. 사료로서의 복음서

고대의 많은 역사서들이 그렇듯이, 복음서 역시도 사건을 있는 그대로 녹음/녹화한 기록이 아니며, 그렇기에 사료 비평의 대상에 포함된다. 특히 교회는 예수가 부활하였으며 교회와 함께하고 현존한다고 믿었기에, '지상에서 활동하신 과거의 예수'와 '부활하신 지금의 예수'가 복음서에 혼재되어 있다.

그런데 동시에, 각 복음서는 교회에서 각자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듯이 초대 교회 역시도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였고, 예수는 '거짓 형제'를 식별할 기준이었다. 따라서 4복음서는 '거짓 형제'를 경계하고 예수를 기준 삼아 일치하려 한 초대 교회의 검증 과정을 통과한 기록이기도 하다.

종합하자면,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의 다음 비유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예수의 삶에서 유래한 이야기들을 서술함으로써 역사상 실제로 일어난 사실들을 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이 점은 특히 루카 복음 1장 1-4절에 분명히 드러난다). ...... 그것은 역사적 예수를 그대로 찍은 사진이라기보다는 그분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이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us Im Spiegel der vier Evangelien, 김병학 옮김, 분도출판사, 2009, pp.504-509.
분명히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사진이 아니며, 그보다는 각 저자가 자신의 화풍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거짓 형제'들을 경계하던 초대 교회 공동체들은 유다풍 그림, 거친 펜선 그림, 희랍풍 그림, 빛과 어둠의 미장센이 가득한 그림이 자신이 증언하는 예수의 모습과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 4장의 그림을 (물론 사진이 아님을 전제하면서도) 사료로 삼아 예수의 모습을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3. 탄생 배경

예수의 조상이나 가계는 역사적으로는 불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에 귀족이나 제사장 출신도 아닌 서민의 집안에서 가계를 기록하는 경우는 없었고 대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까운 조상 정도의 계보나 자신이 어느 지파 소속인지만을 기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경 기록에서 기적이나 신비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본다면, 로마 제국의 사실상 식민지인 이스라엘 왕국[2]의, 북부 지역인 갈릴래아 지방의, 촌락 나자렛에서 목수 요셉성모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파에 대해서는 바오로의 서간에서 "유다 지파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서술되어 있다. 바오로가 유대인이기에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라는 것만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증거로는 상당히 빈약하다. 대다수의 역사적 예수론에서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며,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의 족보는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을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인 결과 "신학적 진술의 역사화"로서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3]

"신학적 진술의 역사화"이론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우선, 다윗의 자손이라는 조건이 메시아로 인정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문제를 제시한다. 가령 2세기 초 바 코흐바(Bar Kochba, Simon ben Kosibah)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음에도 랍비 아키바 등에 의해 메시아적 인물로 추앙받았다. 아울러 주의 형제 야고보 등 초기 교회에서 알려진 예수의 친족들이 다윗 자손이라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 묵인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유대인들이 사생아라는 비난은 가했을지언정 다윗 자손이라는 주장에 대해 논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다윗 혈통이 전적으로 꾸며진 것이라고 본다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지적한다.

또한 신약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바오로의 서신에서도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4]하며, 제일 이른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당당하게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주장한다는 점 역시 근거로 지목된다.[5]

어쨌건 성경에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6] 루가의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나자렛의 요셉에게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 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구세주의 동정녀 출생 신화 부분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주장된다.[7]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거슬러가고, 루카 복음서는 아담과 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서술한 것이며, 루카 복음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모든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두 복음서 모두 다윗의 후손인 나자렛의 요셉성모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으며, 예수는 그때 출생하여 나자렛에서 자랐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관념을 적용한 서술. 마태오 복음서에는 나자렛에서 살던 마리아-요셉 부부가 왜 뜬금없이 베들레헴에 있었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지만 루카 복음서는 호적 조사 때문에 잠시 간 것이라고 한다. 단 역사적으로는 어느 시점의 호구 조사인지 불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메시아가 태어날 수 있는 지역임을 강조하기 위해 2장 6절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라는 미가서 5장 1절, 사무엘하 5장 2절을 섞은 인용을 하고 있다.

설명하자면, 당시 유대 땅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왕족, 귀족의 후예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남유다 지역에 몰려서 살았는데,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귀족, 왕족 출신들도 내려와서 같이 살게 되면서 하나의 타운을 형성한다. 그 타운은 크게 도시들의 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크게 예루살렘, 여리고, 베들레헴 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 필자는 위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베들레헴도 과거에 왕족들이 타운을 형성했던 고을이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덧붙이려는 의도로 헤로데 대왕과 제사장들의 대화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역사적 예수론에서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예수 탄생 서술은, 실제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로 해석된다. 예수가 나자렛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팩트이기 때문에,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구약 성경 해석에 끼워 맞추기 위해 어떻게든 구약 성경상의 근거를 붙이다 보니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 서술되었다.

4.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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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는 목자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헤로데 대왕 통치 시절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고,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호구 조사를 할 때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8] 하지만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이 된 건 기원후 6년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기원후 1년은 물론 기원전 4년에도 호적 조사는 없었다.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첫 호구 조사라는 기록을 따라도, 기원후 6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 로마 기록을 대입하면 좀 더 아스트랄해진다. 로마 제국의 경우는 인구 조사관이 따로 있어서 각지의 인구를 조사한 통계를 남기는 경우인데, 기록에 의거하면 내전 등의 요인으로 해서 켄소르(Censor), 즉 조사관이 인구 조사를 한 것이 기원전 8년과 기원후 14년으로 기록된다. 달리 말해서, 기원후 6년의 조사 역시 불분명하며, 적어도 경전 기록대로 하여 황제가 지시한 호구 조사나 공식 조사는 아니거나 혹은 애초에 그조차 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탄생기를 몰랐다는 것이 확실하며, 예수의 탄생기는 복음서 저자들이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반영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상 깊게 기억하는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이야기. 마태오 복음서만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지만, 루카 복음서를 신뢰하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처음 온 사람들은 당대에는 그지없이 가난한 이들인 목자들이었다.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이 바친 세 보물인 황금, 유향, 몰약은 현대 신학에서는 세속의 왕권, 종교적 권력,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금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부의 상징이며, 유향은 당시 종교적 의례를 위한 필수품이었으며, 몰약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장례 때 죽은 이의 유해를 수습할 때 바르는 것이었다. 특히 몰약은 장례식 용품을 갓난아기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론 꽤나 황당하지만, 신학적 의미를 고려하면 밑에 서술하듯 그리스도교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예수의 부활임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루카 복음서에서 목자들이 예수 탄생을 처음 경배한 것은 루카 복음서의 "예수는 세상에서 제일 미천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목자는 당시부터 이미 극히 가난하고 별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재산을 지키는 막노동으로서 매우 낮은 직업으로 취급되었기 때문. 루카의 기록에서 목자를 예수 탄생을 처음 경배하는 이들로 설정된 것은 신학적 의미가 크다.

흔히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알려져 있지만, "예수의 실질적인 탄생일에 관하여 구약 전승과 신약 성서에는 기록된 바가 없고,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의 날짜나 교회에서 성탄의 의식(儀式)을 실제로 시작한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2세기 말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는 5월 20일의 특별한 축일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나 4세기 말까지는 기념일의 의식이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336년, 성탄 축일을 12월 25일로 지키는 관습이 서방 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로마인들의 이교적인 국가 축제일이었던 '무적의 태양의 탄신일'(Natale Solis Invicti)을 그리스도교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는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부터 태양을 최고신으로 공경하여 태양신의 신전을 건립하고 그 건립일을 축제일로 지정했던 것이다. 이 태양신에 그리스도를 대치시켜 354년 로마의 리베리오 주교는 이날을 성탄으로 판정하여 그해 로마 축일표에 기록했고 5세기 초에 이날을 예수 성탄 축일로 정식 선포한 것이다."(가톨릭 대사전)[9]

일단 목동들이 밖에서 을 치다가 노숙할 정도였으면 겨울은 아니며, 오히려 초여름으로 추정된다. 12월 25일이란 날짜는 3세기경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인기 있던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적의 태양신)의 생일이었다. 가끔 솔 인빅투스와 미트라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미트라를 포함한 각종 태양신을 짬뽕시킨 신이 솔 인빅투스이다. 간단히 말하면 태양으로 묘사되는 모든 신적 존재를 축하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태양이 가장 고마운 시기는 역설적으로 태양이 가장 짧은 날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0] 그래서 로마인들은 12월 25일에 솔 인벡투스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축제를 벌였다. 공교롭게도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천체가 태양이었다. 태양이 지고 뜨는 것을 부활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솔 인벡투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시다"라고 말한 것. 율리우스력에서는 12월 25일이 동지, 즉 해가 뜨는 시간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에는 동짓점 절입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게 아니라, 달력에서 대충 며칠쯤에 오면 그날이 무슨 날이라고 정하자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로마 제국 시대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포용(정복)하기 위해 임의로 정한 날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소수 신자들 중에선 세속화된 크리스마스를 안 지키고 진짜 탄생일로 추정되는 날을 계산해서 기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쪽 또한 부정확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참고할 유일한 기록인 성경 자체가 저자들이 예수의 탄생 시기를 전혀 몰랐으니 정확한 날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다.

그 외에 예수가 3월 25일, 즉 춘분 무렵에 수태되었다는 신비적 이유로 9개월을 더하니 자동적으로 12월 25일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꽤 정밀한 전례학 자료 고증을 통한 설도 새로 제시되었으나, 대부분 책들이 전례학과는 거리가 먼 데서 자료를 찾다 보니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 공인되기 이전인 2세기 중엽 무렵부터 예수의 탄생에 대한 논란이 나타났으며, 3세기부터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기념했다는 설도 강조되고 있다. 12월 25일이라는 날짜에 여러 의미들이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립적일 듯하다.[11] 또한 출생 당시 양치기들이 양을 치고 있다는 기록이 루카 복음서 2장 8~20절에 나오는데, 당시의 양치기들은 겨울에 바깥일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9월이라는 기록이 신빙성이 더 있을 수 있다. 이전 판본에서는 1월 4일이라고 했는데, 이건 정교회에서 아직도 율리우스력을 쓰기 때문에 동짓날이 달라진 것이다. 태양력 문서에 보다시피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은 그레고리력 제정 당시 10일 차이가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불문하고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에는 마구간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저 말구유에 뉘었다는 서술이 있을 뿐이었다. 사실 마구간으로 간주하는 것도 서방 그리스도교권의 이야기고, 그리스를 비롯한 동방 교회권은 예수가 마을 인근의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정교회 전승에 따르면 요셉은 방이 없자 마을 인근의 동굴로 피신해서 짚을 깔고 낳았다고.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기념 성당도 그 동굴 위에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여관에 방이 없다는 이유로 마구간에서 출산한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지 않은가? 당시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부유한 가정 아니면 가축이 사는 공간과 사람이 사는 공간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유럽,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중세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집은 가축 사는 곳과 사람 사는 곳이 나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인들은 해당 성경 구절을 듣고서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12]"라는 구절을 "여관에 자리가 없어서, 아기가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말구유에 눕혔다."고 해석하는 것 자체는 현대인들 기준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 구유에서 포에 싸진 상태로 구유에 뉘어졌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하느님의 가호를 받은 존재라는 증표였다는 견해도 있으며 유대교에서 포와 구유는 하느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또한 일부 역사학자들의 학설에 따르면 그 당시 그리스 의사들은 아기 요람으로 말구유를 사용하면 아기가 편안하게 잘 수 있다고 말구유 사용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헤로데 대왕이 자신의 자녀가 아닌 엉뚱한 자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태어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두려움을 느끼고 베들레헴의 갓난아기들을 학살했다고 서술했으나,[13] 역사적 사실로 보이진 않는다. 애초에 위에서 서술하였듯 동방박사의 방문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기 때문. 굳이 따지자면, 인구 조사 자료를 토대로 추산하면 약 20명의 아이를 죽였을 거라 추산할 수 있긴 하다. 현대 신학에서, 헤로데 대왕의 유아 학살 부분은 구약 성경에서 출애굽기모세 신화를 모티프로 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해석하는 메타포로서 서술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한편, 유대교의 경전인 '(예루살렘) 탈무드'에는 예수 탄생 시기에 '판델라'라는 로마의 군인의 간통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해당 사건에서 태어난 아기를 예수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4][15][16]. 다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탈무드의 속보성이 오히려 복음서보다도 늦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탈무드 자체가 복음서의 처녀 수태 설화의 영향으로 예수의 사생아설을 주장한다는 반박도 존재한다.

한편, 처녀 수태에 신화는 복음서보다 속보성이 빠른 아테네 신화나 그리스 신화(오르페우스, 디오니소스[17], 페르세포네, 페르세우스[18])에 이미 존재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예수 탄생 신화가 고대 신화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보는 주장도 존재하며[19][20]. 이러한 주장[21]에서는 처녀 수태 및 부활 신화까지도 예수와 매우 유사한 신화가 고대 신화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주로 오시리스[22]의 부활 신화나 사자의 서의 내용을 그 대상으로 꼽는다[23].

그러나 이에 대해 성서 주석학[24]에서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철저히 비헬라스적인 유대인이었다며 전술된 주장들을 일축한다. 처녀 수태를 비롯한 예수 관련 신화들은 그리스 신화와 무관하게 철저하게 유대교적 맥락에서 생성되었다고 본다. 앞서 언급된 오르페우스 신화나 디오니소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 모두 예수 신화의 처녀 수태와 플롯도 전개도 전혀 다르며[25], 예수 신화의 문맥이나 인용문은 전부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성경의 저자들이 재해석하거나 짜깁기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지적한다.[26][27] 가령 마태오 복음의 경우, 서로 다르게 전승된 공생활-죽음-부활의 내러티브를 탄생 내러티브와 결합하고[28] 여기에 구약 인용구를 덧붙이는 모습을 보인다.[29]

한편, 마태오 1장 23절의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공동번역) 는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이 '젊은 여인'[30]으로 쓴 것과는 달리 '동정녀'라 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마태오가 칠십인역에 따라 인용했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은 이 '젊은 여인'을 '동정녀'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기원전 2세기(또는, 그 이전)부터 유다교 내의 어떤 전통이, 앞으로 일어나리라 고대되는 이 특이한 탄생을 동정녀 모친에게서 나오는 메시아의 탄생으로 이해했음을 뜻한다. 마태 1,23에 이어서 고대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신탁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적용시켰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이사야서 7장 14절 주석)[31]

5. 공생애 이전의 삶

예수의 오랜 나자렛 시절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자세한 것을 모른다. 복음서는 침묵하고 만다. 어린 예수를 마리아가 길렀고, 그다음 요셉이 토라로 안내해야 했다. 회당에서 예수는 성서 봉독과 그 해석 설교를 들었다. 평소에는 직업을 구사했다. 예수의 직업과 요셉의 직업에 "장인"τέκτων이라는―흔히들 "목수"라고 번역하는―같은 낱말이 쓰인다.[32] ...... 물론 장인을 목수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을 너무 좁혀 놓는 것이다. 장인은 나무만이 아니라 돌도 다룰 줄 알았고 따라서 석수이기도 했다(참조: LXX 2열왕 5,11). 파피루스 문서의 그리스어에 장인들τέκτονες은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도록 되어 있다: 수문 건설, 양수차 정비, 문 짜고 집 짓기, 안장 수선 등.[33] 그들의 활동분야는 다방면을 아우른다. 더욱이 이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이것이 확인되는데, 한 장인을 두고 "그 손이 온갖 예술작품을 이루더라"는 말이 나온다.[34]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101-102쪽.

예수의 직업은 성경에서 '목수의 아들 또는 목수'로 등장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기 쉬운 가구 제작자보다는 활동 범위가 넓은 직업이다. 그리스어 텍톤(τέκτων)은 목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석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장인'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 이러한 직업상의 영향인지, 성경 속의 예수는 건설의 비유를 여럿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마르코의 복음서 14장 58절(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의 복음서 2장 19절(공동번역)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7장 24-27절(공동번역)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10-11절(공동번역)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절(공동번역)

기존 4대 복음서는 인간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보여주기 위해 쓰인 것이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그나마 예수를 가장 인간적으로 조명한 복음서는 루가의 복음서이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친척 관계로 묘사하며, 세례자 요한 잉태 여섯째 달에 예수가 잉태되었다고 말한다. 또 예수가 12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담을 나눴으며[35]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36] 위경인 베드로 복음 등에서는 어린 시절의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으나, 위경으로 지정되어서 가십거리 이상은 되지 못하는 듯.

어쨌든 예수가 태어나고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치를 날이 차자 요셉 부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물을 바쳤는데, 그날 성전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와 있었다. 시므온은 '메시아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마침 시므온은 마음이 동하여 성전에 나왔는데 마침 그때 예식을 치르고 나오는 예수를 만나게 된다. 시므온은 단번에 아기를 알아보고는 아기를 안고 '주인이시여, 이제 약속대로 저를 쉬게 해 주시는 군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찬송한 후, 요셉 부부를 축복하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아이는 수많은 이들을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할 것이며, 비난의 표적이 되기 위해 부름받았다. 그때 당신은 마음 아프겠지만 그것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당신이 대표하는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생략하지만 공통적으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세례자 요한은 자기 다음에 나타날 구세주를 예견하기 위한 존재였기 때문이고, 예수가 그 구원자였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지만, 복음서 본문에서도 세례자 요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등의 내용을 보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형과 더불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두 가지 가장 믿을 만한 정보로 여겨지는 일이 많으며, 역사적 예수 연구의 출발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30살 즈음까지 목수 일을 했던 것은, 세상에 필요한 일이라면 결국 다 영혼 구원에 간접적으로라도 도움을 주는 일이므로, 사역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들도 믿음으로 했을 때에는 다 거룩한 것임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37]

6. 공생애

예수께서는 서른 살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는데
루가의 복음서 3장 23절 중(공동번역 성서)
예수는 모종의 이유로 세례자 요한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30살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예수의 신학 핵심은 주기도문/주님의 기도로 요약되는 신의 정의(正義) 실현과 죄의 용서였다. 이 신학은 당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던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과 다니엘서의 종말론, 에세네파의 메시아론이 혼합된 복합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흔히 오해되는 부분이지만, 예수와 바리사이의 대결을 '율법 준수의 널널함 vs 율법 준수의 엄격함'으로 봐서는 안 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5장 17-20절, 공동번역성서, 산상 수훈

가령 혼인에 대해서는 예수가 바리사이보다 훨씬 더 엄격한 해석했으며[38], 율법을 준수하며 성전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바리사이와 공통되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읽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맥락화하여 읽는 것 역시도, 유다교 내부에서 존재하던 독법이었다. 가령 마카베오기는 안식일 율법을 재맥락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따라잡은 그 군대는 맞은쪽에 진을 치고 안식일에 그들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 그러나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카베오상 2장 32-41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그렇다면 예수의 율법 해석이 가진 독특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리사이가 '깨끗함'을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동안 예수는 '깨끗함'을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39]
예수가 비교적 가까이 대한 바리사이들도 깨끗함과 불결함의 구분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 점에서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예수에게도 깨끗함과 불결함은 거룩함과 속됨에 비할 만한 것이었다. 예수에게 관건은 성령께 의탁하여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안에서 나오는 것, 곧 악한 말과 행동으로 불결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사람을 참으로 더럽힐 수 있는 것이다. ......
예수는 근본적인 면에서 바리사이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불결함의 원인이 어디서 발단하는지 던진 물음에서 구별된다. 예수는 오직 이 문제에서만 바리사이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러나 깨끗함과 불결함의 근본적인 차이는 엄연히 남아 있다. 차이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예수는 깨끗함을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여겼다. 예수에게 관건은 깨끗함을 지키고 부정을 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끗함을 적극적으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더러워지는 이유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깨끗함을 유지하려면 감염될 만한 불결한 것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피해야 한다. 즉 경계선을 긋고 구별할 때만으로 깨끗함을 지킬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바리사이'라는 단어는 "제한하다, 구획하다, 경계를 정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죽은 사람으로 인해 불결해지지 않으려면 시신과의 접촉을 피하고,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에게 '피하기'와 '거리 두기'가 가장 중요한 실질적인 규정이다. 반면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깨끗함을 지닌 사람은 접촉하여 불결해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전염성이 강한 깨끗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 깨끗함으로 불결한 것을 청결하게 바꿔 놓는다. 그의 깨끗함은 공격적이고 승리를 거둔 것이어서 불결함을 거뜬히 물리친다.
그러므로 예수는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칠 수 있었고, 하혈하는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져 낫게 할 수 있었으며, 죽은 이에게 손을 대어 깨어나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수는 세례 때 받은 성령으로 더러운 영들(악마들)을 몰아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당대의 믿음에 따르면 대부분의 질병은 악마의 활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악마는 (더러운) 죽은 영이기 때문이다. ...... 예수는 깨끗함이라는 원천을 내면으로, 마음으로 옮겨 놓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윤리화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주술적인 영향에 대한 두려움을 바르고 단정하게 살아가라는 경고로 대체한 계몽가가 아니다. ...... 이렇게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깨끗함'을 적극적이고 전투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30-133쪽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오해는 바리사이에 관한 것이다. 신약에서는 바리사이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며 비판하지만, 신약의 서술을 신앙으로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바리사이를 절대악처럼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리사이 신학의 긍정적 면모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인정되며, Martin Ebner, Stefan Schreiber 등의 공저 《신약성경 개론》에서는 바리사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리사이(Pharisäer): 초기 유다교 평신도 운동의 주창자들로서, 통상 사제들만이 준수하는 정결 규정들의 보편화 및 민주화와 일상에서 그것들의 실행을 통해, 이스라엘을 거룩하고 사제다운 백성으로 만들고자 했음.
-《신약성경 개론》, Martin Ebner/Stefan Schreiber(Hrsg.), 이종한 번역. 902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슈베르트는 바리사이 율법해석의 민주적 원칙을 거론한다.(Die jüdischen Religionsparteien im Zeitalter Jesu. In: Kurt Schubert (Hg.), Der historische Jesus und der Christus unseres Glaubens.(Wien 1962) ...... 진지한 종교성으로, 성덕의 추구로, 공중과 동떨어지지 않은 생활로 그들은 광범한 민중 속에서 큰 존경을 누리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지적하기를, 백성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하도 커서 기도든 제사든 예배행사 일체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한다.(Josephus, Ant. 18,15) 게다가 그들은 평신도 운동으로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처지였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특별히 매력을 발휘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80-82쪽.
또 하나의 오해는, 예수가 종교적 개인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그리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이사야 62장 5절) 예수의 활동은 언제나 어디서나 '백성'을 향한 정향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개인을 향해 결단을 호소할 때도 그를 이 백성의 일원으로 바라본다. 예수의 구원 제시를 개인 치유로 이해한다면 몹시 오해가 될 것이다."(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 256-257쪽) 물론 1세기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사제들과의 긴장은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종교적 개인주의자 혹은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는 2장 17절에 시편 69,10을 인용하며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일을 옳다고 평가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40]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 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23-125쪽
품위없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과 상종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예수의 행동은 의식 변화를 부르짖는 열정적 호소, 회개의 호소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제도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 끼이게 되는데, 율법 관행인 안식일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재생시키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다.[41]
-《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370쪽.

그렇기에, 예수의 행적이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되거나, 유대교를 완전히 뒤집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유대교는 구약 성서에서도 이미 이사야서나 다니엘서요나서 처럼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한 신학 전통 또한 가지고 있었다.[42] 예수의 성전 정화에서도 언급되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같은 식으로. 예수는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단 유대교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하는 신학의 계승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 예수가 말한 죽은 자의 부활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기원전 3세기~1세기 유대교 특유의 신학이다. 사두가이들이 예수에게 부활 교리에 관해서 시비를 거는 장면[43]이 있는데,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유대교에서는 영혼 불멸 교리를 믿지 않고 죽은 자가 묻힌 곳에 영혼도 잠든다든가, 죽을 때 영혼도 사라진다든가 하는 식의 믿음을 가졌다. 예수의 주장은 우연이건 필연이건 유대교 특유의, 일신교가 가질 수 있었던 개방성과 보편성을 계승해 갖춘 결정체였다.

이러한 예수의 행적에 대해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를 '갈릴래아의 견유'[44]라고 설명한다. 다만, 크로산은 자기 저서에서 각지의 여러 권위자들이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했지만 서로 모두 달랐다는 이야기 역시 함께 언급한다. 역사적 예수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말했듯 역사적 예수론이 해석하는 예수는 각기 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을 투영하는 것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데, 크로산을 비롯한 예수 세미나가 바로 이러한 케이스에 부합한다. Gred Theißen는 북미의 예수 연구 분위기를 (예수 세미나를 겨냥하여) '캘리포니아의 예수'라고 비꼬았다.[45][46]

복음서들 중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카 복음서 셋과 요한의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행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셋이 다소 비슷한 서술을 보이기 때문에 이 셋은 '공관 복음서'라고 부른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초반부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파하고 후반부에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과 시골 마을을 3번에 걸쳐 왔다 갔다 한다. 이 부분을 역사성을 반영해서 해석하면 공관 복음의 서술을 따르면 예수의 활동 시기는 불과 1년 이내인데 요한 복음서를 따르면 3년이 된다. 어디가 더 믿을 만한 서술인지는 진실은 저 너머에. 공관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중 어디가 어느 부분에서 더 역사성을 담고 있는가는 근대 이후 신학에서는 오랜 논쟁거리다. 일단 공관 복음서의 저술 연대가 요한복음서보다 앞선다는 것에는 성서 주석학의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더 빠른 저술이 더 높은 역사적 정확성을 지녔으리라는 전제가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47] 공관 복음서 역시 저자들이 그리스도론적 케뤼그마에 집중한 글인 데다가, 일단 상식적으로도 예수가 1년 이하로 활동했다고 가정하기는 너무 짧다. 일단 전통적인 독법에선 루카복음서에서 예수가 30살 즘에 공생애를 시작했단 구절과 요한복음서의 서술을 결합해서 예수가 33살을 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7. 죽음과 부활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AD 55년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3-8절, 공동번역성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같은 책 15장 17절)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 신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부활절을 가장 중요한 축일이자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유월절(=과월절=파스카 축일)을 맞아 예루살렘에 내려가 있을 때 목요일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고 금요일 새벽에 잡혀서 금요일 낮 3시쯤에 죽었다고 기록한다.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적 행적은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최후의 만찬은 오히려 수많은 신학자와 역사가들에게 실제 있었던 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후술할 부활 사건도 여러 해석이 존재하는데 최후의 만찬에 대해선 해석이 거의 갈리지 않는다. 예수가 분위기를 읽은 것이건 누군가에게 귀띔을 받은 것이던 예수는 자신이 잡혀 죽을 것이며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직감했고,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나눠주며 식사 때마다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의 뜻을 이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

만찬 이후 예수는 유대인, 대제사장을 포함한 반대자들에게 잡혀[48] 유대 총독 본티오 빌라도에게 재판에 회부되고, 반란군에게 내려지는 극형인 십자가형의 판결이 내려져 죽게 된다.

성경에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판결을 망설이거나 심지어 사형을 막으려 했으나 군중의 여론이 두려워 죽이게 된 듯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한 통치를 가했고, 심지어 과잉 진압으로 유대인들의 불만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해임된 사람이다. 당시 유대는 시리아 속주에 포함된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속주의 총독과는 다르게 사법권이 제한되는 자리다. 빌라도는 어디까지나 법적인 총독인 시리아 속주의 총독을 대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시리아 속주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해서 사실 집행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즉 원래대로라면 십자가형 같은 형벌은 형식적이라도 시리아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는 일관적으로 빌라도는 예수를 체포 바로 다음 날에 죽였다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총독 허가 없이 빌라도 선에서 끝내버렸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망설이기는커녕 규정도 무시하고 빠르게 처리한 셈. 복음서의 묘사처럼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을 가능성은 낮다. 차라리 '위험 분자에 해당되긴 하지만 비교적 위험성이 낮은 잡범'으로 간주하고 속전속결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망설였다는 구절은 '예수는 죄가 없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교로마 제국에 대립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썼을 가능성이 높다. 복음서가 쓰이던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숭배한 예수가 반란 혐의로 잡혀 사형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범죄자를 숭배하는 잠재적 반란 분자로 간주되어 잡혀 죽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예수의 일대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무덤에 매장된 지 사흗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여[49]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준 뒤 예루살렘 동쪽의 올리브산(감람산)에서 승천했다고 한다. 세 밤이 지나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 지 사흗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 지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날째다. 즉 온종일 시신인 상태로 누워 있던 건 토요일 하루뿐이었고 48시간도 안 돼서 부활한 거다. 신자들도 많이 헷갈리는 점이다.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다음의 사건들에 동의하고 있다.

특히 예수가 잡힌 즉시 순식간에 와해되었던 제자들과 신자들이 갑자기 열렬하게 그리스도가 부활했음을 외치며 순교했다는 점에서, 실제로 예수가 부활했느냐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들이 모종의 경험을 했고 그 경험으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주석학자 Gerhard Lohfink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52] 우선, 예루살렘에 남은 여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다. 이때는 아직 예수 발현을 목격하지 않았다. 한편 갈릴래아로 도주한 베드로는 호수에서 예수 발현을 제자들 중 최초로 체험하는데[53] 이를 통해서 일종의 신앙 고백인 다음 두 구절이 유래한다:
정녕 주님은 부활하여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장 34절)[54]
그리스도께서는 ... 케파[55]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장 3-5절)
그 후 베드로 일행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예루살렘 일행의 빈 무덤 발견을 전해 듣게 되면서 극도의 종말론적 기대가 공동체를 압도한다.[56]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 강림 체험을 하면서 교회사의 시작이 된 것이다.

한편 빈 무덤에 관해서는 시체 도적설[57], 재매장설[58] 등이 소수설로서 존재하기도 한다.[59]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단순히 시체가 사라진 빈 무덤만으로는 '부활'이라는 명제하에 다시 추종자들의 신앙심이 공고해졌다 하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부랴부랴 도망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듣고 어떤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잘 맞지 않는다. 탄압이 두려워서 도망가는 판국에 빈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는 다시 결집하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60] 또한 예수의 제자이든 적대자이든 간에, 사람이 빈 무덤을 봤을 때의 통상적인 반응은 '누가 시신을 옮겼다'는 것이지 부활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서들에서도 이를 지적하는데,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1세기 유다인들은 빈 무덤을 시신 도난으로 이해했고(마태 28,11-15), 요한 복음서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비슷하게 이해했다.(요한 20,15) 결국 빈 무덤은 부활의 증명서가 아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울기 시작한다(20,11.13.15). 그녀는 처음에 단순히 예수님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한 것인데, 사실상 이것이 훨씬 더 있을 법해 보이는 반응이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영적독서를 위한 마르코 복음》, 황종렬 옮김(성요셉출판사, 1991), 337쪽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은 부활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아닙니다. 신앙을 일으키는 요인은 부활자가 이 뽑힌 증인들과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무덤은 그러고 나서―언젠가 그런 표현이 있었듯이―마치 승전 트로피처럼 부활신앙에 덧붙여져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 또는 예수의 무덤은 잘못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미 신약성서에 예수 반대자들의 시신도난설이 있는데, 사실 이런 가설이 우리 시대에까지 계속 살아 있고 심지어 근래의 예수책들에서도 다시 채택된 일조차 있지요. 결국 그분은 뽑힌 증인들 앞에 살아계신 분으로서 부활자의 증언인 것입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61] 방송 대담[62]
케뤼그마에 견주어, 이야기에서는 예수의 매장 또는 무덤의 위상이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코린토 1서 15장의 케뤼그마에서 예수 매장에 관한 언급이 예수가 참으로 죽었다는 사실의 확증이라면, 이야기에서는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이라는 승리의 기념물이 된다. 하지만 케뤼그마에 중심을 두고 있는 이야기는, 부활 신앙이 빈 무덤에 집착하지 않고 케뤼그마에, 따라서 케파와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에서 체험한 내용에 뿌리박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4), 202쪽

결국 다양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게 되는 훨씬 더 강력한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절망에 빠져서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추종자들이, 갑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모진 고문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도 불사하며, 그들이 모두 입을 모아 "예수의 부활"을 외칠 수 있을 정도의 초월적 경험이 말이다.[63]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이 언제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빈 무덤을 확인했다는 기사만 들어 있다. 그것이 사흘 뒤라는 것도 복음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라 바울 서신에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바울 서신으로 알려진 성경 중에서 성서학자들이 바울의 친서라고 동의하는 7편의 성경에서 바울은 끊임없이 예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을 증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예수 부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서부터 자기주장을 펼쳐 나가는 것이다. 지나친 표현일 수 있지만 어쩌면 바울은 부활을 자기주장을 펼쳐나가는 근거로 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부활과 관련한 바울의 말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앙적 진술로 이해해야 한다. 가장 이른 바울 서신인 고린도전서도 예수 사후 25년이 경과되고 나서 기록되었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지만 예수 추종자의 일부가 그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트 어만 저, 강창헌 번역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확실시하는 것은, 이 '제자들의 예수 부활 체험[64]'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확립에 제일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 예수의 부활 사건이 없었으면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예수는 수많은 예언자 중 하나로서 구전으로만 기억되다가 잊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한편에서는 다양한 이견과 해석이 나온다. 육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을 제자들이 나름 해석한 것이라든가,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합리화를 시킨 것이라든가. 예를 들면 존 도미니크 크로산[65]은 부정하며 부활이 육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의미의 부활이라고 본다.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체는 매장되지 않고 버려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음에도 십자가 처형자의 유골은 1967년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단 1구가 전부다. 이는 처형 후 얕은 땅에 대충 묻히거나 십자가에 방치된 채로 들짐승들에 의해 뜯어 먹혀서 찾을 잔해조차 없기 때문이다.[66][67] 더군다나 성경에도 인정하듯이 제자들은 예수가 잡힐 때 죄다 도망가서 예수의 죽음이나 매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전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파에서는 요한 복음서의 전승에 따라 사도 요한이 예수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잘 보면 알겠지만 '예수가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부활로 설명되는 무언가를 마냥 부정하기도 어렵다. 핵심 제자인 사도들이야 예수의 처형 당시 도망쳤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예수 처형 당시의 정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사도들 외의 제자 중에는 누군가 처형을 목격하고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키레네 출신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들었다는 서술[68], 안식일로 접어들 무렵 무덤에 묻혔다는 서술과, 무덤을 내준 사람의 이름 또한 4복음서에 일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또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 당시를 직접 본 제자라고 인정하는 편집 흔적이 자주 있어서 실제 사도 요한은 아니더라도 사실적인 증언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예수의 시신이 그냥 버려졌다는 설을 밀어붙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69] 제자들의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해서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는 견해 또한, 예수 사후의 사도들의 선교 이야기인 사도행전 때문에 부정된다. 예루살렘에서 선교 때 사도들이 '당신들도 다 알다시피' 라는 말을 꺼낼 정도로 많은 수의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한 전제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아니더라도 예수 사후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이들이 예수 처형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남겼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원수난사화, 곧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체 예수 텍스트이며,[70] "빈 무덤 발견 이야기는 원수난사화에 속해 있었"다.[71]

한편으로 성경에서 인정하듯 제자들은 예수가 잡히자마자 바로 튈 정도로[72] 미묘하게 약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의 부활에 회의적이었던 제자들도 더러 있었는데, 위에 서술했듯 그들이 갑자기 결집한 데에는 무언가 "사건"이 있었다는 설명이 더 합치되기 때문에 적어도 '빈 무덤'설은 거의 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형태이던 간에 그의 제자들이 다시 모이고, 그걸 부활로 해석할 강한 무언가는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계에선 예수 부활 체험이 제자들의 내면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곧 부활 체험은 제자들도 기대나 예상을 하지 않았던, 외부에서 제자들에게 뜻밖에 들이닥친 무언가라는 것이다. 스승이 부활할 거라는 기대나 죄책감 같은 내면적 요인이 부활 체험을 부른 게 아니라, 부활 체험이 제자들의 내면을 바꾼 것이다.

다음은 불어권 주석학자들의 논문 모음집[73]의 머리말과, 거기에 실린 논문 발췌이다.
자크 슐로셔(Jacques Schlosser)는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하는 체험을 어떤 수준으로 분류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를 찾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자료들을 연구한다. ... 그는 심리학, 역사학, 문학적 지시들을 모두 수렴하면서, 역사학자가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보고하는 경우 이 지시들만으로 충분한가를 자문한다. 달리 말해, 이 체험은 주관적 체험에 속하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파스카 신심은 하느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보통 기준에 입각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파스카 신심을 말하기 위해, 종교사에서 반향을 찾을 수 있는 주변의 본보기들에서 표현을 끌어온 것인가?
슐로셔는 파스카 체험이 독특한 표시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이 체험을 보충적인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들이닥친 위기와 급변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본다. 제자들에게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게끔 하는 무엇인가가 일어났던 것일까? 슐로셔는 중요한 증언인 1코린 15,3-8을 개략적으로 살피면서 '오프테'(ophthē) 동사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어서 그는 체험의 특성이 들어 있는 추가 지시들을 수집한다.
슐로셔는 연구를 마치면서 제자들이 눈으로 본 것이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거나 또는 그것이 파스카 이전에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들로 형성된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는 그것을 "특별한 체험 ... 무엇인가 아무 이유 없이 뜻밖의 방식으로 외부에서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말한다.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 머리말 18-19쪽.
마르코는 체포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낸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여기서 '그들'은 명백히 예수의 동료들을 말한다. 의인이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고통받는 의인" 이야기에 나오는 전통 모티브라 하더라도, 이 간단한 진술을 십중팔구 당시에 일어났던 일과 일치한다. ... 광야의 예언자인 요한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예수에게 맞선 소송은 하느님 백성의 고위 성직자들이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어쨌든 매우 다양한 파스카 이야기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이야기들이 증언하는 것은 제자들이 어찌할 수 없이 보이는 것 앞에서 체념했으며, 부활이 완전히 "뜻밖의 사건"[74]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 "실패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환상 곧 집단적 강박관념의 산물로서 부활을 만드는 것은 텍스트들의 분명한 방향을 거스르는 일이다."[75] ... 뮐러 자신도 인정하듯이,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의 새출발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렇게 돌변한 강력한 동기를 추정케 한다. 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는 이미 같은 말로 문제를 제기했다. 제자들의 돌변은 "만일 그 사이에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곧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다시 살아났다고 그들을 확신시켰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76]
-Jacques Schlosser. 〈환시, 무아경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 (위 책 215-217쪽)
파스카 체험은 보통의 환시들과는 달리 선행된 기대나 신앙의 결실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논문(위 책 236-237쪽)

이와 관련하여 BBC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일부 해석에서는 예수가 물리적으로 유사 부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약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점은 사실이나, 6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매달렸던 점[77]을 근거로 하여 예수는 단기적으로 의식을 잃었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사망 판정을 받은 뒤 무덤에서 기적으로 의식을 회복하는 현대 의학 관점에서 '소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78][79][80] 이러한 해석에서는, 이후 예수가 망명하였으며 망명한 예수를 후대에서 신격화하기 위해 예수가 하늘로 승천한 것으로 성경을 가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 소수 견해[81]와 전승에서는, 제자들을 찾아가 부활을 보인 후 로마 제국의 정치적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인도로 망명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러한 주장과 전승은 예수의 무덤이 인도의 카슈미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직 인도시로말라바르 가톨릭-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의 전승과 그 전승을 확대 해석한 측뿐으로, 그들의 전승을 기록한 토마스 행전[82]의 속보성은 비교적 늦은 관계로 신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되지는 않고 있다.[83]
한편, 예수가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으므로 현대 의학적으로 소생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84], 소생했더라도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신체로 인해 제자들을 찾아가 신적인 이미지를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른 연구 결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어깨가 탈구됐고, 그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동맥이 파열된 것이 직접적인 사인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부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일부 수사본들이 빈 무덤 내러티브에서 종료됨[85]을 들어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것은 신앙 고백이지만, 마르코 복음의 내부 내러티브는 부활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샤를르 페로는 "모든 것이 이미 사전에 이야기되었기 때문"에 "마르코에게 부활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르코 복음의 중심에 위치한9,1~9) 예수의 변모 이야기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태오와 루카가 마르코를 따르고 있고 2베드 1,17-18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전해진다. 요한 복음사가는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지만 온전히 그 후광 속에 남아 있다고 하겠다. ..마르코는 수난 이야기 전에 하가다적인 이야기를 나름대로 배치해야 했다. 그리하여 변모 이야기는 복음서의 중심에 위치하여 예수의 신원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수준에 알맞게 설명한다. 마르코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교리 교수 내용을 취하면서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부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보기에 마르코는 그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변모 이야기가 시나이와 관련된 예수의 신원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기의 종말론적인 신원이 교리 내용의 중심을 차지했다. 모세처럼 아니 모세 이상으로 예수는 이미 변형 내지 변모하였다(이 두 표현은 희랍어로 같은 단어이다). 그는 신적 현존의 구름에 둘러싸여 영광의 세계에 속해 있다. 사실 다른 복음서들은 다소 고풍스러운 방식으로 부활 이야기를 전하는 데 더욱 흥미가 있었고 바오로는 십자가에 집중하면서 부활하신 분과 신자들의 만남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1코린 9,1; 15,7 이하; 갈라 1,15 이하). 그러나 마르코에게 부활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미 사전에 이야기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음 전체가 부활 이야기이고 그 정점은 변모 사건이다. 이 말로써 다른 부활 이야기들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를 지칭하기 위한 영광의 언어들이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본질적인 신분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넘어서서 이미 변모 사건 안에 집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변모 이야기가 일종의 서론처럼 수난 이야기에 결부되자 변모 이야기는 부활을 예고하고 앞당겨 보여 주는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부활 사건을 통해 변모 사건 역시 올바르게 회상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리고 복음서의 다양성으로부터 우리는 초대 전승이 이미 부활 이전에 자리매김한, 형언할 수 없는 예수의 이 체험을 메아리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체험을 옳게 말하기 위해서는 부활 사건이 또한 불가결하였다(마르 9,9)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천주교 서울대교구 백운철 스테파노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54-355쪽
더군다나 마르코 복음서의 종결은 나름대로 1고린 15장과 상응한다.
나아가 코린토 1서 15장의 '묻히셨다'는 마르코 복음서 16장의 무덤 장면에 상응하는 내용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코린토 1서 15장의 '케파에게 나타나셨다'는 마르코 텍스트의 현재 형태에서는 16,7의 베드로(그리고 제자들)가 부활하신 분을 뵙게 되리라는 약속과 상응한다.[86]
-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 202쪽
그리고 애초부터 마르코 복음서를 부활 반증의 근거로 말하는 것은 바울로 서간의 연대를 도외시한 주장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복음서 중에서는 연대가 가장 빠르지만, 신약의 책들 중 가장 빠른 책은 아니다. 바울로 친서는 복음서들보다 저술 연대가 빠르다고 널리 인정되며, 이미 고린토 1서 15장에서도 부활 신앙이 확인된다. 따라서 부활신앙이 복음서의 저술보다 연대상 앞선다는 것은 분명하며, 부활 신앙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예수 사망 후 12제자들이 단지 꿈 내지는 종교적인 환영 체험을 하고 이를 예수의 빈 무덤과 연관하여 예수의 부활로 해석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며[87][88][89] 이러한 시각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죽은 후 예수의 부활을 강렬하게 열망하던 중 일상 및 종교적 상황에서 환상적, 종교적 체험을 겪고 그것을 예수의 빈 무덤과 연관 지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행적이 이와 관련된 증언을 하고 있다고 본다. 베드로의 환시 및 꿈을 통한 계시, 사도 바오로의 회심 체험 등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전근대인들은 꿈이나 환시, 점술, 제비뽑기 등을 종교적인 체험이나 암시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90][91]

사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들과 십자가형을 받은 그곳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 부활을 보였으면 부활의 진실성을 통해 훨씬 더 빠르고 쉽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수 있었을 텐데, 예수가 소수의 추종자 내지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나타났기에[92] 12제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순교하게 됐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예수의 사망일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 예수가 안식일 직전 금요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월절은 항상 매월 15일 즉 만월에 시작되니까, 빌라도 재위 기간 중 유월절이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 해는 30년과 33년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죽을 때 사방이 어두웠다고 전하는데,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33년 4월 3일 금요일 저녁, 예루살렘에서 부분 월식이 일어났다는 점을 지목해서 33년을 사망년도로 간주한다. 지질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 33년 4월 3일 금요일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가 죽자 땅이 흔들렸다는 기록과 일치한다며 같은 날짜를 예수의 사망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 연구 모두, 복음서가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비유로서 서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몰몬교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후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부활했던 빈 무덤이라 추정되는 곳엔 후대에 성묘 교회가 세워졌다.


[1] 슈바이처역사적 예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투영한다. 슈바이처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죽여서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인물로 표현된다. 슈바이처는 대속론을 믿지 않고 역사적 예수만 믿었다.[2] 헤로데 대왕 당시는 헤로데가 로마를 등에 업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라서 아직 공식적으로는 로마의 땅은 아니었다. 헤로데 대왕이 죽자마자 후계자들의 통치권은 로마에게 뺏기지만.[3] 레이몬드 E. 브라운, 『메시아의 탄생』, CLC, 2014, 825-826p. 이하 『메시아의 탄생』으로 표기[4]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2번이나 강조하는 바울이 다윗의 혈통에 무관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으며, 다윗 혈통에 대해 오류를 범할 경우에는 그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에 의해 공격당할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메시아의 탄생』, 831p[5] 『메시아의 탄생』, 828-830p[6] 그러므로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가 또한 14대이다. 마태오 복음서 1:17(공동번역성서)[7] 단, 조로아스터교의 동정녀 신화는 조로아스터의 정액이 풀려져 있던 호수에서 동정녀가 목욕을 해서 조로아스터의 자식을 잉태한다는 내용이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신화와 서사 구조적으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8] 태어났을 때 그 바로 위에서 크게 빛나는 별이 밤하늘에 떴다고 한다.[9] 가톨릭 대사전의 해당 문서에선, 이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전통적인 기념일."로 설명하고 있다.[10] 뜨거운 여름날 내리쬐는 태양은 피서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맙게 여길 리가 없다.[11] 세례자 요한이 니산월 14일(태양력 3월 말경)인 파스카에 태어났다는 계산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티쉬리 15일(태양력 9월 말경)인 초막절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성서학적 해석으로는 초막절 출생은 의미가 있다.[12] 루카의 복음서 2:7[13] 이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의 부름으로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는데, 헤로대 대왕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에 가지 않고 나사렛에서 머물게 된다.[14] Patrick, "John The Apology of Origen in Reply to Celsus", pages 22–24, 2009 (ISBN 1-110-13388-X)[15] Schafer Peter, "Jesus in the Talmud",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15–24, 2009 (ISBN 9781400827619). 해당 자료는 에세이지만 '사피엔스'처럼 수많은 조사와 논문을 근거로 뒷받침하고 있다.[16] Tabor, James D. "The Jesus Dynasty: A New Historical Investigation of Jesus, His Royal Family, and the Birth of Christianity", New York: Simon & Schuster, 2006 (ISBN 0-7432-8723-1)[17]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인간)인 세멜레가 제우스로 부터 받은 죽은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 비교의 교리에 따르면 제우스의 아들 자그레우스가 티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가 디오니소스로 부활했다고 한다)의 심장 일부분을 음료 형태로 마심으로써 임신한다.(출처 : Hyginus, Gaius Julius, Fabulae in Apollodorus' Library and Hyginus' Fabuae: Two Handbooks of Greek Mythology,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07,ISBN 978-0-87220-821-6). 상술한 바와 같이 죽임을 당한 후 2번 태어나므로 이를 부활로 보는 견해가 존재하며, 인간 어머니와 신인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반인반신으로 볼 수 있다.[18] 페르세우스 어머니 다나에가 금빛물로 목욕함을 통해 제우스의 아들인 페르세우스를 임신하게 된다. (출처 : Warner, Marina, "Alone of All Her Sex: The Myth and Cult of the Virgin Mary", Oxford University Press)[19] Warner, Marina, "Alone of All Her Sex: The Myth and Cult of the Virgin Mary",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963994-6, 2016[20] Litwa, M. David, Iesus Deus, "The Early Christian Depiction of Jesus as a Mediterranean God", Minnesota Fortress Press, ISBN 978-1-4514-7985-0, 2014[21] 이집트 학자인 제럴드 메이시 (Gerald Massey, 1828-1927)가 이집트 '사자의 서'를 해석하여 주장함[22] 이집트의 신이자 왕으로서 지지를 받다가 이를 시기한 세트(남동생)에게 죽음을 당하고 이시스(여동생)에 의해 부활한 후 죽은 자의 나라인 두아트의 왕이 된다. (출처: Pinch, Geraldine "Egyptian Mythology: A Guide to the Gods, Goddesses, and Traditions of Ancient Egypt"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ISBN 978-0-19-517024-5)[23] Eddy, Paul Rhodes; Boyd, Gregory A, "The Jesus Legend: A Case for the Historical Reliability of the Synoptic Jesus Tradition", Grand Rapids Michigan Baker Academic ISBN 978-0801031144, 2007[24] 그리스도교 안의 주석학과 세속적 주석학에서 그렇게 한다.[25] 사실 각 그리스 신화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전문가들의 분석도 볼 것 없이 일반인들이 봐도 전혀 비슷하지 않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부활에 실패하며, 디오니소스 신화는 정본에서는 처녀 수태도 부활도 존재하지 않고 오르페우스 비교에 나오는 자그레우스 신화에서만 처녀 수태와 부활이 나온다. 오시리스 신화 또한 부활이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플롯에서 상당히 차이가 많다.[26] Bart D. Ehrman, "How Jesus Became God: The Exaltation of a Jewish Preacher from Galilee", Harper Collins, 2014 ISBN 0062252194, 9780062252197, 국내 번역서 바트어만,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갈라파고스 출판사, 2015[27] The Historical Jesus: Five Views, October 8, 2009, by James K. Beilby., 국내에서는 <역사적 예수 논쟁>, 2014, 새물결플러스 번역 출판함[28] "우리는 탄생 이야기들의 기원과 전수 과정은 예수님의 사역, 죽음, 부활 이야기들의 기원이나 전수 과정과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자료를 결합시킨 것은 한 명의 복음서 기자이다.[책 속 주석: 마태복음의 유아기 내러티브와 복음서 나머지 부분의 문체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은 처음 두 장이 다른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을 배제시킨다]"(『메시아의 탄생』 74쪽)[29]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태오 복음의 탄생 내러티브를 저자 혼자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마태오 이전 전승(pre-Matthean)이 탄생 내러티브 안에 들어있으며,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천사, 이집트로의 피신, 헤로데의 유아 학살 등은 마태오 이전 전승에 속한다.(참고: 『메시아의 탄생』 172쪽) "Knox, W. L., Sources, II 125는 '마태가 유아기 내러티브의 편집 과정에서 보통 이상의 개정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보통이라는 것은 복음서의 주요 내러티브 속에서 마태가 마가복음을 개정한 정도를 말한다."(『메시아의 탄생』 165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Joachin Gilka)는 마태오와 루카가 사용한 전승의 원천이 분명히 가계 전승(家系傳承)들과 관련된다고 말했다.(Joachim Gnilka, Das Matthäusevangelium. Erster Teil, Herders theologischer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vol. I/1, Freiburg-Basel-Wien 1986.)[30] "히브리어에서는 한 낱말로 되어 있으면서 앞에 정관사가 붙은 “젊은 여인”은 동정이냐 아니냐, 미혼이냐 기혼이냐의 명확한 구분 없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경우 '처녀'를 의미하기는 하지만(이러한 의미에서 '동정녀'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뜻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젊은 기혼 여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이사야서 7장 14절 주석) "히브리어 '알마עַלְמָ֗ה '는 '젊은 여인'을 뜻하며, 결혼한 여자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처녀, 동정녀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굳이 결혼한 여자와 구분되는 처녀를 지칭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버툴라בְּתוּלָה ) 이를 '동정녀'라고 번역한 것은 70인역에서 이루어진 일이다(παρθένος). 더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어, 이사야와 아하즈는 그 젊은 여인이 누구를 일컫는지 알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부인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제기되는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하즈의 아내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언제나 이 '알마'를 아하즈의 아내 아비야로 보았고, 그 아기는 히즈키야라고 보았다. 히즈키야와 관련된 연대표에 불확실한 부분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예언을 히즈키야에게 적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중략) 아하즈가 임금이 된 직후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 일어났고, 그때에 아하즈에게 아직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히즈키야의 탄생은 다윗 왕실의 미래를 위한 훌륭한 표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9쪽-140쪽)[31] 이사야서 이야기를 더 상세히 덧붙이자면, 구약 성경은 1차적으로는 당대 독자를 향해 저자가 서술했을 문필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데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성서 주석학의 폭넓은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있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교황청 성서위원회, 《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번역은 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137-138쪽에서 발췌)" 그리고 유다 왕국 내부의 왕자 탄생이 글의 전후 맥락상 이사야서의 1차적인 문필적 의도로 추정되기에, 이사야서의 해당 어휘는 '동정녀'보다는 '젊은 여인'으로 읽어야 원문 문맥에 가깝다.(앞에서 '젊은 여인'에 단 각주를 참고하라) 다만 그렇다고 한들 이사야서의 '젊은 여인' 독법이 '동정녀' 독법을 온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70인역이나 타르굼 등의 고대 번역은, 고대인이 구약을 바라본 '신학'을 현대인에게 보여주며, 실제로 구약을 번역할 때 (70인역뿐만이 아니라) 타르굼 등 고대 번역은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로 쓰인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도 어떤 시대의 예언이 다른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볼 수 있"다((안소근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137쪽). 즉 이사야서의 해당 부분을 '젊은 여인'으로 읽으면서도 마태오의 '동정녀' 독법의 타당함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동의하느냐와는 별개로, '구약 성경'이라는 문헌이 그 내부에서 사용하는 독법에 부합한다. 바로 그렇기에 마태오 1장 23절에서는 '동정녀'로,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는 '젊은 여인'으로 읽는 그리스도교 번역들(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NRSV, NABRE)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후대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성경 저자의 '1차적 의도'와 후대 독자의 '수용' 사이의 이 미묘한 긴장에 대해서는, 성경 문서의 성서 주석학을 통한 성경 읽기 부분을 참조.[32] (발췌자 주석)마태오 13장 55절; 마르코 6장 3절[33] (책 속 주석)Friedrich Preisigke - Emil Kießling, Wörterbuch der griechischen Papyrusurkunden II (Berling 1925-1931) 585.[34] (책 속 주석)Homeros, Ilias 5,60-61[35] 부모가 동행 중에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갔는데 다음 날에 없어진 것을 알고 수색 끝에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찾아냈다.[36]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37] 프로그래밍 개발자에 비유하자면, 전면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프론트엔드 개발자에 해당하고, 사역자들이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놓는 평신도들은 백엔드 개발자에 해당한다.[38]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장 11-12절, 공동번역)[39] 참고: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 《예수》)[40] 발췌자 주석: 이 부분에도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베르거, 같은 책, 169쪽)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베드 4,8과 잠언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같은 책 169쪽)[41] (책 속 주석)참조: J. 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Göttingen 1970) 96: "이렇게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것과 정확히 부합한다."[42] 일신교는 '우상 숭배'에 대한 적대에서 다신교와의 충돌이 있기는 하지만, 천하 사람들을 유일신의 자녀로 인식하기에 세계 시민적이고 평화 지향적인 면모가 분명하게 있다. 가령 "다니엘서는 야훼라는 신명 사용을 삼간다(9,2.4.13-14에만 나온다). 그 대신 '하늘의 하느님/주님/임금님'(2,18.19.37.44; 4,34; 5,23)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구약 성경 중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시기의 책들인 에즈라기·느헤미야기·유딧기·토빗기와 엘레판틴 유다인들의 서간에서 주로 확인되는 이 명칭을 통해, 야훼는 이스라엘·유다 종교에 국한됨을 벗어나 보편적인 하느님으로 되시는 바, 그분의 주권이 모든 지상 통치자의 제국들을 대체한다. .. 야훼는 유배 중·후 시기에 보편적인 민족신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이스라엘 또는 유다의 '민족신'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되었다. 신명기 32,8-8에서 야훼가 이스라엘을 당신 몫으로 차지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들에게 배당하셨다면, 이제 다니엘서에서는 이 관점이 바뀐다. 여기서는 세계 지배의 다른 모델이 설계되는바, 이에 따르면 모든 민족은 야훼에게 복속된 제후들이나 천사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이스라엘은 미카엘 천사의 다스림을 받는다(다니 12,1; 참조: 10,13). 7장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도 이 민족들의 천사들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야훼께서 그에게 통치권을 영원히 넘겨주신다." by 헤르베르트 니어Herbert Niehr, "다니엘서",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882-883쪽[43] 마태 22;23~33, 마르 12;18~27, 루가 20;27~40[44] 犬儒, Cynic. 헬레니즘 철학의 한 사조였던 키니코스 학파 계열의 사상가. 이들은 들개처럼 사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견유라고 번역한 것이다. 인류 문명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거부하고 철저한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세상을 떠돌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료 행위를 했다고 한다.[45] Gerd Theissen & Annette Merz, 《역사적 예수》, 43[46] 바로 이러한 점에서 19세기식 역사적 예수론이 큰 약점을 지녔는데, ㄱ. 종교적 개인주의 ㄴ. 성전에 대한 적대감 ㄷ. 탈교권주의 ㄹ. 이완된 율법 해석 등의 요소는 (비록 '이완된 율법 해석'은 19세기 계몽주의보다 훨씬 오래된 오해이지만.) 19세기 계몽주의가 '1세기 유다인' 예수를 통해 정당화하고자 한 자신의 이상향이다. 오늘날 예수 연구에서는 다음 명제를 매우 중요시한다: "나자렛 예수는 유다인이다."[47] 요한복음을 사실 기록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단순화해서는 안된다. " 공관 복음서의 저술 방식과 의도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역사 비평적 방법에 대해 새로이 반성하고, 또 요한의 자료들을 더욱 차분히 연구한 결과,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예전의 양자택일을 버리게 되었다. 요한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해답이 전에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라는 뜻이다. 우선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많은 사실을 요한도 전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 여러 기적, 그 가운데에서도 빵의 기적이 특히 이러한 부분에 속한다(1,19-51; 2,13-21; 6,1-21).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도 전체적으로 마찬가지다(12─21장). 요한복음서와 공관 복음서의 해당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요한 역시 교회 전통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전하고자 하였으며, 또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러 사항과 관련해서, 역사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독창적 요소들이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곧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유다 지방이나 로마 제국의 제도와 관계되는 사항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저자가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는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은 기원후 66-72년에 벌어진 유다 독립 전쟁 이후에는 없어져, 요한 복음서와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 것들이다. 이로써 요한이 자기의 작품을 예수님 역사의 실제적 상황과 관련지으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서는 단순히 역사와는 관련이 없는 신학적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요한복음서 입문)[48] 감람산 중턱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던 도중 선택한 12제자 중 한 명인 이스카리옷 유다가 입을 맞추는 신호를 보내 배반하게 되어 잡히게 된다.[49] 양손과 양발의 못 자국, 사망 직후 확인 사살을 위한 왼쪽 허리에 난 롱기누스의 창자국도 재생된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50] 무덤에 관한 기록은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51] 게리 하버마스의 조사에 의하면 약 75%의 학자들이 동의한다.[52]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53] 로핑크는 요한 복음서의 완성 연대가 가장 늦음에도 불구하고, 21장은 최초의 예수 발현에서 유래했다고 본다.[54]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 것이다. '루카는 이런 언급을 하고도 베드로에게의 최초 발현을 안 다룬 애매한 태도를 왜 보였는가?' 로핑크는 예루살렘 발현을 중시하는 루카에게 이 '갈릴래아 발현'을 넣을 자리가 없었다고 본다. 즉 호수에서의 발현을 예루살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55] (편집자 주석) 베드로.[56] 즉 '빈 무덤'을 발견하고 그 기대 때문에 '예수 발현'을 체험한 게 아니라, 갈릴래아 일행과 예루살렘 일행이 각각 별개로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것이다.[57] H. S. Reimarus. et. al, "Brief Critical Remark on the Object of Jesus and His Disciples As seen in the New Testament", London & Edinburgh: William & Norgate, 1879. <국내 번역서. 타이센, "역사적 예수">[58] H. J.Holzmann, J. Klausner 학자 주장[59] 이와 관련하여는 '이기천, 예수 부활의 역사성 연구,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신학과 신약신학 전공, 2009. 2'에 잘 소개되어 있으며, 해당 논문은 예수의 부활을 지지하는 논문이나, 국내 논문 중에서는 예수의 빈 무덤 및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서 긍정설과 부정설을 모두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60] 더구나 로핑크의 재구성에 의하면 베드로를 포함한 갈릴레아 일행은 예수 발현을 체험했을 때 '무덤이 비어있다'는 걸 몰랐으며, 예루살렘 귀환 후에야 알았다.[61] 뮌헨 대학교 신약 주석학 및 성서 해석학 교수.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의 제자로, 독어권 성서 주석학계의 거인이다.[62] 1992년 5월 28일, 독일 Bayern 방송국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톤 켄테미히가 뮌헨 신약학자 요아힘 그닐카에게 묻는다」(Jesus, der Christus. Anton Kentemich befragt den Müncher Neutestamentler Joachim Gnilka)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대담. 번역은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6쪽[63] 이 초월적 경험이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해 죄를 대속하여 돌아가셨지만, 메시아로서 죽음의 권세를 누르고 부활하셨다. 이를 믿는가?"라는 물음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는 데 있어서의 밑바탕이었다. 이런 초월적 기적이 밑받침되지 않아 망한 사례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꼽을 수 있다.[64] "예수가 부활했다"는 명제는 역사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받아들였다"는 명제는 역사학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학계의 지지를 받기에 역사적 예수를 논할 때는 이런 표현이 쓰인다.[65] 크로산은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리스도교 회의주의자이다. 다만 '유대인 예수'에 주목하는 근래 학계의 흐름과는 떨어져있다. 비록 크로산의 저술들은 읽어볼 만한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다수설을 대변하는 학자는 분명히 아니다.[66] J. D. Crossan,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Harper Sanfrancisco), 1995, 124-127[67] M. A. Powell, "예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 192[68] 전후 맥락과 별 상관 없는 사건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에, 진술의 사실성을 더하는 부분으로 해석된다.[69]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지나치게 회의론적인 주장 때문에 같은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비판을 여러 번 받아왔고, 그가 주장하는 '비종말론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예수'는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계의 다수론(종말론적인 유대인 예수)과 거리가 있다.[70] 참고: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4), 195쪽.[71] 요아힘 그닐카,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4), 197쪽.[72] 때문에 빈 무덤이 제자들의 자작극이라면, 서로를 불신하여 신앙심으로 다시 뭉치지는 못했을 것이다.[73]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74] (논문 내 주석)R. Penna, I ritratti originali di Gesù il Cristo. Inizi e sviluppi della cristologia neotestamentaria. I. Gli inizi (Studia sulla Bibblia e il suo ambiente), Milan, san Paolo, 1996. pp. 180-181 참조.[75] (논문 내 주석) D. Marmuerat, "Cequ'ils n'ont pas dit de Pâques", MB 25 (marsavril 2000), pp. 31-35(p.32).[76] (논문 내 주석)R. Pesch, "La genèse de la foi en la résurrection de Jésus. Une nouvelle tentative", dans M. Nenzerath, A. Schmid et J. Guillêt èds. La Pâque du Christ, Mystère de salut. Mélanges F. X. Durrwell (Lectio Divina 112), Paris, Cerf, 1982, pp. 51-74(p.54)에서 인용.[77]
십자가에서 사망에 이르는 주요 원인이 양손이 고정된 것에 비해 몸무게에 의해 가슴 근육이 내려앉아 횡격막이 상승하여 질식하게 되는 점임을 고려하면 6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이며, 심지어 2-3일 동안 생존하는 사례도 존재하였다고 한다. 그 외 기타 원인으로 탈수 및 출혈로 인한 저혈량 쇼크도 있을 수 있다.
[78] O'Collins. et. al, "Focus on Jesus: Essays in Christology and Soteriology", Fowler Wright Books. p. 169, 1966 (ISBN 0-85244-360-9)[79] Michael Baigent, "The Jesus Papers: Exposing The Greatest Cover-Up In History", HarperSanFrancisco, 2006 (ISBN 978-0-06-082713-7)[80] 의학 지식이 부족했던 당시 관점으로는 이를 부활한 것으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81] 인도의 종교자인 미르자 굴람 아마드(Mirza Ghulam Ahmad)https://www.alislam.org/library/books/Tadhkirah.pdf[93] 및 미허바바(Meher Baba)[94], 역사학자인 Holger Kersten[95][82] 토마스 행전에서는 사도 토마스가 예수님과 함께 주후 47년경 탁실라(Taxila)의 군다포르(Gundafor)왕의 궁전을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83] 인도 무덤에 대한 반박 자료 참조 Historia animae utilis de Barlaam et Ioasaph (spuria): Einführung 2009 3110210991 "...Jahrhunderts, in dem auf die Barlaam-Parabel vom König und seinem weisen Ratgeber[84] Edwards et al, "On the Physical Death of Jesus Christ".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255 (11): 1455–63, 21 March 1986 (doi:10.1001/jama.1986.03370110077025)[85] "거의 모든 수사본에는 9-20절이 계속되지만, 주요 수사본들에서는 마르코 복음서가 8절로 끝을 맺는다. 9-20절은 2세기에, 다른 복음서들에 들어 있는 부활하신 분의 발현과 승천 이야기와 또 그분의 분부를 새롭게 종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종합에는 그리스도와 부활 이후의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요소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이 긴 끝맺음도 마르코가 직접 썼다는 것이 2세기부터 인정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여러 교부가 의심을 품기도 하였다. 아무튼 마르코 복음서가 이렇게 갑자기 8절로 끝나는 것이 놀라워, 많은 학자들은 이 복음서의 끝부분이 일찍이 소실되어, 이 9-20절의 말로 대체되었다고 여긴다. 사실 복음서 저자가 8절에 이어 결론을 기록하였는지, 그랬다면 부활하신 분의 몇몇 발현을 이야기하였는지, 아니면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갈릴래아 발현의 전통을 참조하라는 것만으로(7절) 충분하다고 여겨 8절로 마무리를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성경』 마르코 16장 주석)[86] (책 속 주석)오늘날 대체로 복음서의 거시적 텍스트(Makrotext) 안에서 14,28과 상응하는 16,7을 마르코의 편집으로 보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마르코가 입수한 수난사화에 상응하는 문장이 들어 있었으리라 추정되는데, 케뤼그마에서 유래했을 이 문장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베드로(또는 케파?)에게 나타나셨다." GNILKA, Mk II 338-339 참조.[87] Gregory W. Dawes, "The Historical Jesus Question", 334쪽, 2001[88] Rush Rhees, "The Life of Jesus of Nazareth", 2007[89] Ehrman, Bart, "How Jesus Became God. The Exaltation of a Jewish Preacher from Galilea, Harperone", 2014, 국내 번역서 <바트어만,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갈라파고스 출판사, 2015>[90] Bermejo-Rubio, Fernando, "The Process of Jesus' Deification and Cognitive Dissonance Theory", Numen, 2017[91] Komarnitsky, Kris, "Cognitive Dissonance and the Resurrection of Jesus", The Fourth R magazine, 2014[92] 허호익, "예수그리스도 바로보기", 한들출판사, 2003, p526쪽 셀수스의 주장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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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Korbel, Jonathan; Preckel, Claudia (2016). "Ghulām Aḥmad al-Qādiyānī: The Messiah of the Christians—Peace upon Him—in India (India, 1908)[94] Meher Prabhu Lord Meher, "The Biography of the Avatar of the Age", Meher Baba, Bhau Kalchuri, Manifestation, Inc. 1986, p. 752[95] Reinhard Feldmeier Die Bibel: Entstehung - Botschaft - Wirkung 2004 Page 164 "In Deutschland war es vor allem Holger Kersten, der mit seinem Buch »Jesus lebte in Indien« (zuerst 1984, Neuauflage 1993)23 die These vom Indienaufenthalt Jesu populär machte. Die bereits oben angesprochene »Lücke im Leben Je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