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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 페돈 이지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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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2357><colcolor=#fff> | |||
출생 | 1919년 5월 5일 | ||
그리스 왕국 엘라이오초리 | |||
사망 | 1999년 6월 27일 (향년 80세) | ||
그리스 아테네 | |||
재임기간 | 제167대 총리 | ||
1967년 12월 13일 ~ 1973년 10월 8일 | |||
초대 그리스 군사정권 대통령 | |||
1973년 6월 1일 ~ 1973년 11월 25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72357><colcolor=#fff> 배우자 | 니키 바실리아디스 (이혼) 데스피나 세레티 | |
자녀 | 3명 | ||
학력 | 그리스 육군사관학교 (졸업) | ||
종교 | 정교회 (그리스 교회) | ||
최종 당적 | 국민정치연합 | ||
군사 경력 | |||
복무 | 그리스 왕국 육군 | ||
1940년 ~ 1973년 | |||
최종 계급 | 대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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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군사정권의 초대 대통령.2. 생애
2.1. 초기
1919년 5월 5일에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카이아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으며 그는 1937년에 고등학교를 마친 후 그리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10등으로 졸업했다.[1]2.2. 군 생활
졸업 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에 포병 중위로서 참전해 추축국에 맞서 싸웠고 그리스 침공으로 나라가 아돌프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1944년 초에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를 떠나 중동으로 가서 중위로 승진했으며 1944년에는 다른 우파 장교들과 함께 우파 준군사 조직 IDEA의 설립에 큰 기여를 했다. 참고로 1943년에 그가 보안 대대[2]를 창설하는 데 관여하며 그 대대에서 활동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1946년부터 1949년 동안 벌어진 그리스 내전에서 그는 소령으로 승진했고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되었으며 그리스의 우익 청년 장교들의 비밀 단체에 들어가서 그리스를 군대가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1953년에는 미국의 CIA로부터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6년에는 파블로스 국왕을 퇴출시키기 위한 쿠데타 미수 사건에도 가담한 바가 있고 1959년부터 1964년까지는 중앙정보국(KYP)에서 근무하며 CIA와의 연락책 역할을 했으며 1961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65년 7월 15일에 콘스탄티노스 2세에 의해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해임되자 그리스에서는 좌파와 우파간의 다툼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그리스의 국왕이 종종 총리를 지명해도 그리스 의회의 반국왕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리로 지명되는 사람을 불신임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가 점차 꼬이기 시작했다.
2.3. 정치 생활
2.3.1. 그리스 총리
4.21 쿠데타 당시 아테네를 점거한 반란군. |
쿠데타 당시 라디오 방송 녹음
1967년에 육군 대령으로 승진한 그는 좌파의 승리가 예상됐던 그리스 총선으로부터 정확히 1개월 전인 1967년 4월 21일에 쿠데타로 집권함과 동시에 7년 동안의 그리스 군사정권의 문을 열었다.
그리스 군사정권은 가히 남아메리카의 극우 군사정권을 연상시킬 정도로 잔혹한 정권이었는데 그는 공산주의 음모가 그리스의 관료, 학계, 언론 및 군대에 침투하여 공산주의의 장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세우고 이 쿠데타를 국가를 구하기 위한 혁명이라고 부르며 집권 직후부터 무자비한 독재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의 모든 정치 활동과 정치적 시위, 파업,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하고 군사법원을 설치한 후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그리스 헌법 제14조를 정지시키며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렇게 쿠데타 직후 계엄선포와 군사재판소 설치로 고작 며칠 만에 그리스인 1만 명 이상이 체포됐고 6천 명이 에게해의 야로스 섬으로 추방됐으며 체포된 사람들 중 3,200명이 중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3]
특히 그는 그리스인은 문명의 창조자이며 나머지 세계는 그리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취지의 극단주의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내세우며 기독교적 가치, 순수혈통, 조국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했고 국민의 모든 생활을 감시했으며 정권에 대한 아주 작은 비판을 한 사람도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후 비밀경찰에 의한 반정부 인사에 대한 체포와 고문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마리아 파란두리,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같은 음악가들은 군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물론 이 쿠데타는 대한민국의 5.16 군사정변과 비슷하게 '4.21 혁명'이랍시고 추앙되며 국가기념일로까지 지정되었으며 1968년 9월 29일에는 군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한 개헌 승인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열고 92.21%의 찬성 득표를 얻은 후 1968년 11월 15일에 발효되었다. 물론 이 엄청난 찬성율은 스가 언론과 포스터를 통해 '예'라는 단어를 지배적으로 홍보하며 사실상 모두 찬성투표를 하라고 홍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또 국가도 기존에 쓰이던 자유의 찬가에서 쿠데타를 찬양하는 '4월 21일 찬가'로 바꾸었다.[4]
당시 그를 반대한다고 지목받은 사람들 수천 명은 감옥으로 끌려가 피해자와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사람들의 정치 활동 및 결사에 관한 자백을 포함한 정보 추출을 명목으로 더러운 전쟁 당시 남미의 군부 정권들과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치하의 에티오피아에서의 고문을 연상시키는 악랄한 고문을 당했다.
섬이나 외딴 마을로 추방된 사람들도 상황이 매우 나빴는데 겨우 외딴 곳으로 추방된 정도가 아니라 나치 강제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다고 해도 현지인과의 대화가 전면 금지된 채 하루에 2번씩 경찰에게 일과를 보고해야 했고 끊임없는 감시를 당했다. 심지어 야로스 섬으로 추방된 사람 중에는 임산부까지 있었으며 이곳에서 사망한 사람은 그리스 군부가 인정한 수치로만 22명에 달한다. 이 사실상의 정치범수용소는 정권 초반기에 서독의 슈테른지 소속 기자들이 비행기를 타 항공사진을 찍으면서 실체가 드러났고 이에 적십자를 포함한 각국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1968년 11월에 폐쇄되었다.[5] 다만 의외로 그는 후술할 파니굴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정치범들에게 사형 선고를 남발하지는 않았으며 형량은 높아야 종신형에 그쳤다.
2.3.1.1. 무자비한 검열
그는 좌익이나 현대 퇴폐의 징후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한 문화 검열을 자행했는데 이 시기에 군사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유명했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모든 곡이 금지당하는 것은 기본이었고[6] 남자의 장발은 히피주의의 타락한 현상으로 취급받으며 투옥 대상이 된 데다 여성의 미니스커트 착용도 탄압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평화 기호의 사용과[7] 일반 시민이 공공장소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파파도풀로스 시기에는 이 글에 서술된 것과 같이 온갖 문학 작품들이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심지어 그는 아리스토파네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들이 쓴 모든 작품들까지 금서로 지정했는데, 이는 그리스가 고대 그리스인과 같은 이교도나 공산주의자 같은 무신론자가 아닌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출처
거기에 파파도풀로스 시대에는 알파벳 Z의 사용도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요르요스 람브라키스[8] 암살 사건 이후 Z가 살아있다는 뜻의 Zi의 이니셜로 자주 쓰여 반정부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르헨티나의 후배 군사독재자 호르헤 비델라처럼 현대 수학과 관련된 서적과 국제 백과사전까지 금서로 지정했다. 이렇게 그의 집권 초반 3년 동안 금서로 지정된 책이 1,046권이 넘는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의 문화 검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968년 여름에 치안부 사무총장이었던 이오아니스 라다스(Ιωάννης Λαδάς, 1920~2010) 대령은 에이코네스(Eikones)라는 잡지에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 격분하여 그 잡지의 사무실을 찾아가 편집장이던 파나이오티스 람브리아스(Panayiotis Lambrias)를 찾아가 손수 폭행했는데 이 사건이 해외에까지 알려져 BBC의 그리스 지국이 이 사건을 보도하자 라다스는 기자 회견에서 BBC는 동성애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BBC가 자신이 일종의 비공식 정권 대변인으로 만들었다는 황당한 발언을 남겼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소크라테스가 쓴 동성애 관련 서적은 금서로 지정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정부를 비판한 예술인들도 탄압당해 유명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 국적을 박탈당했다.
다만 그도 대외 눈치는 봤는지 군부에 정치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서유럽의 음악과 영화를 향유하는 것은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그의 집권기에 그리스의 대중음악가들도 팝과 록 음악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었고, 특히 그는 그리스 전통 음악에 대해서는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 선배격인 포르투갈의 3F 정책과 비슷한 맥락일 가능성이 있다.
2.3.1.2. 경제 정책
그가 집권할 동안 그리스는 관광 사업을 장려하고 친기업 정책 등을 실시하며 7~12%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고 그리스는 건설 지역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수력발전소 등 여러 인프라를 구축해 나갔으며 물가상승률과 실업률도 낮은 수치를 유지했다. 덕분에 1973년 그리스의 1인당 GDP는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기며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물론 이전에도 그리스의 경제성장률은 파파도풀로스 시기와 비슷한 편이었지만 그 경제성장 기조를 유지했다는 것은 고평가할 만하다.[9]덤으로 그는 이전까지 소홀히 다뤄졌던 농촌에 대한 정책들을 실시하며 농촌을 개발하고 농가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며면서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10] 다만 경제학자들은 이 시기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일어난 낭비와 사기들을 지적하고 있으며 특히 파파도풀로스 시대는 온갖 부정부패 스캔들로 악명이 높았다.
2.3.1.3. 반독재 운동들
1967년 12월 그의 독재에 대항하는 국왕 지지파의 역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진압당해 국왕은 이탈리아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돼 1968년 11월 3일에는 가택연금 중에 사망한 야당 지도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의 장례식 동안 5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생하자 군부는 이 시위에 참여한 41명을 체포했고 1970년 9월 19일에는 지질학 학생 코스타스 게오르가키스(Κώστας Γεωργάκης, 1948~1970)가 그의 독재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하기까지 했다. 게오르가키스의 분신자살은 큰 반향을 일으켜 학생들의 반독재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실제로 1973년 2월 17일부터 학생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거의 2개월 동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심지어 1968년 8월 13일에는 그가 라고니시에 있는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소유 초호화 여름 별장에서 아테네로 돌아오는 해안 도로에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Αλέξανδρος Παναγούλης, 1939~1976)가 폭탄을 설치해 암살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는데 이후 파나굴리스는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죽일 능력이 없다. 나는 폭군을 죽이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며 이 암살 시도가 합법 정부를 파괴하고 국민의 자유를 폐지한 독재자를 처단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파나굴리스는 1968년 11월 17일에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적인 압력으로 교도소에 수감하는 것으로 감형되었고 1971년 9월 1일에는 미국인 2명과 아말리아 플레밍[11]을 포함한 4명이 파나굴리스의 석방을 모의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1973년 8월 19일에 파나굴리스는 군사정권이 모든 정치범에게 부여한 일반 사면으로 사면되었으나 이로부터 3년도 안 지난 1976년 5월 1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파나굴리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자유, 민주주의, 인권, 시민적 및 정치적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2.3.2. 그리스 대통령
1973년 5월 23일에는 니콜라오스 파파스(Νικόλαος Παππάς, 1930~2013) 제독이 주도한 해군에 의한 쿠데타 시도도 있었는데 또 다시 그리스 국왕의 지지자들이 대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점진적인 자유화를 시작하여 정권을 합법화하려고 시도했으며 결국 동년 6월 1일에 계속 눈엣가시 같던 군주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고 당시에는 군주제였던 그리스를 공화국으로 바꾸고 동년 7월 29일에 있던 국민투표가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 78.4%의 찬성률로 통과되면서 헌법을 개정하여 엄청난 권한의 임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임시 대통령이 된 그는 내각 내에 있던 군인 13명을 사직시키고 쿠데타 초기부터 그리스를 통치해 온 혁명 평의회를 해체한 후 총리,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 온갖 직책을 혼자서 겸임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계엄령 폐지나 군대의 역할 축소, 검열 완화, 모든 정치범 사면 등 광범위한 자유화 조치를 명령했다. 그는 1973년 10월 7일에는 군사정권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고 민간인 내각을 임명하며 1974년에 의회 선거를 준비할 것임을 발표했다.그러나 1973년 11월 14일에 아테네 국립기술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이 '빵-교육-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독재 시위를 벌였는데 수천 명의 시민, 노동자, 파파도풀로스의 핵심적인 지지자들이었던 농민들도 가세했고 이 시위는 3일 동안 지속되었다. 이에 그는 군 투입을 결정하고 11월 17일에 탱크를 보내 대학교 정문을 부순 후 군과 경찰들을 동원해 구타와 실탄사격을 퍼부으며 시위를 유혈진압했는데 그 결과 확인된 인명피해만 40명 사망[12], 1,103명 부상에 달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시위에서의 실제 사망자는 83명이며 부상자는 2천 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13][14]
이 시위 진압으로부터 얼마 안 지난 1973년 11월 25일에 그의 자유화 정책에 불만을 품고 학생 시위를 틈타 부대 지휘관들에게 쿠데타에 참여할 것을 선동했던 강경파 군인이었던 디미트리오스 이오아니디스[15] 장군에 의해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를 쫓아낸 디미트리오스 이오아니디스는 반체제 인사들을 구금하고 고문한 비밀경찰인 그리스 헌병대(ESA) 장관, 즉 그의 심복이었다. 그를 가택연금시킨 이오아니디스는 권력을 잡은 후 그의 자유화 정책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리고 키프로스에 친그리스 쿠데타군을 지원해 친그리스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했으나 1974년 키프로스를 침공한 튀르키예군에게 참패하여 북키프로스를 빼앗기고 결국 1974년 7월 24일에 권력에서 물러나면서 군사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2.4. 이후
그리스가 민주화된 후 그는 1974년 9월 3일에 국가반란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975년 7월 28일부터 동년 8월 23일까지 열린 쿠데타 공모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는 23명이 회부되어 그를 포함한 3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며[16] 그는 "나는 혁명의 지도자이며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남겼다. 동년 10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는 상술한 대학생들의 시위 진압에 관련된 재판이 열려 32명이 회부되고 2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17] ESA에서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한 100~400명의 보안군과 경찰들도 재판에 회부되었다.[18] 이 재판에서 드러난 군부 정권의 실체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정권이었다.그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아테네의 코리달로스 감옥에서 복역했으며 1984년 1월 30일에는 국가정치연합(EPEN)이라는 극우 정당의 명예 지도자로 추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EPEN은 정계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19] 1996년에 해체되었고 같은 해 8월에 그는 비뇨기암 치료를 위해 라이코 병원으로 옮겨졌다. 참고로 1980년에는 교도관 당국을 설득하여 감옥에 에어컨, 냉장고, TV를 들여오고 정기적으로 테니스를 즐기는 등의 호화 생활을 즐겼다는 것이 폭로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감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싫어했던 것 두 가지가 바로 '고문'에 가까운 소음 공해에 매우 황당하게도 연못과 수도꼭지 조합의 모양이 낫과 망치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2.5. 사망
1999년 6월 27일에 그는 암이 악화되어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조국을 구했고 결국 공산주의자들한테 패배해서 이런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과거 기록을 인정하고 양심의 가책을 표명하라는 사면 제안도 거부했다고 한다.한편 그를 쫓아낸 이오아니디스도 1975년 1월 14일에 체포된 후 상술한 재판에서 반역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35년을 교도소에서 살다가 2010년 8월 16일에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여담
- 아내가 2명 있었다. 첫 아내는 1942년에 결혼한 니키 바실리아디스(Niki Vassiliadis)로, 둘 사이에는 1남 1녀가 있었으나 파파도풀로스는 1957년부터 육군지리국 요원이었던 데스피나 세레티(Despina Sereti)와 불륜 관계를 가지다가 1968년에 비공개로 결혼하여 딸 1명을 낳았다.
-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유랑극단’은 파파도풀로스 시절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당연하겠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파파도풀로스는 그리스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공공의 적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1] 참고로 그의 집권 시기에는 파파도풀로스가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고 포장되었다.[2] Τάγματα Ασφαλείας. 그리스를 점령한 추축국이 독일군을 지원하며 그리스의 반나치 레지스탕스를 '사냥'하기 위해 만든 반유대주의+반공주의 단체. 참고로 이 단체는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과 강간, 보복 처형으로 악명이 높았던 데다 신병이 입대할 때 해야 하는 맹세 내용도 대략 "나는 독일군 총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신께 이 거룩한 맹세로 맹세합니다."라는 대놓고 나치를 숭상하는 내용이었다.[3] 당시 그리스 인구는 852만 명도 되지 않았다.[4] 물론 민주화 후 원상복귀되었다.[5] 참고자료[6] 실제로 테오도라키스의 곡은 파파도풀로스가 집권한 지 2개월도 안 된 1967년 6월 1일부터 금지되었으며 테오도라키스 본인도 1968년 8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군부 당국에 의해 구금되기도 했다.[7] 실제로 1971년 9월경에는 아테네에서 소녀 2명이 Y자가 거꾸로 된 반지를 끼고 있다가 경찰에 의해 그 반지가 압수당하는 일도 발생하기도 했다. 출처[8] Γρηγόρης Λαμπράκης, 1912~1963. 2차 대전 동안 그리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에도 반전 활동을 이어나가다가 1963년 5월 22일에 연설을 마친 직후에 극우주의자 2명에게 머리를 곤봉으로 가격당한 후 뇌 손상을 입어 5일 뒤인 1963년 5월 27일에 사망했다. 그리스가 민주화된 후에는 민주주의의 상징격 인물이 되어 아테네의 축구경기장 등 전국의 거리와 광장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그리스판 장준하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9] 참고로 파파도풀로스가 물러난 직후인 1974년 경제성장률은 그리스 경제위기 이전 최저치인 -6.4%였다.[10] 반면 도시의 중산층들은 파파도풀로스를 지지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독재정권이 일시적일 것이며 군인들이 질서 회복에 따라 자유 선거를 실시할 것이라는 믿음이 퍼지면서 파파도풀로스 정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11] Amalia Fleming, 1912~1986. 원래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이었으나 1차 대전의 영향으로 아테네로 망명했으며 이후 세균학자로 일하다가 남편과 함께 그리스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하다가 게슈타포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2차 대전 후에는 남편과 이혼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이중 국적(그리스, 영국)을 가지고 세균학을 연구하다가 1953년에는 이미 사별한 알렉산더 플레밍과 짧게나마 결혼생활을 했다. 1967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후 그녀는 그리스로 영구 이주하여 정치범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후원했다. 참고로 이 재판에서 플레밍은 1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한 달도 안 되어 건강 문제로 석방되고 그리스 시민권을 박탈당한 후 영국으로 추방되었고 런던에서 다수의 반군부 인사들이 망명하는 것을 돕다가 그리스가 민주화된 후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에 가입해 3번이나 의회에 입성했으며 이후에도 유럽 인권 위원회의 의원이자 국제앰네스티 그리스 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다가 1986년 2월 26일에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2] 사망자 중에는 5세 소년과 76세 노인도 있었다.[13] 충격적이게도 이 학살 당시 그리스의 1인당 GDP는 약 2503달러로 그해 막 세계 평균(약 1188달러)의 2배를 넘긴 선진국에 준하는 나라였다! 참고로 그리스 이상으로 경제 상황이 좋은 국가에서 이 정도의 폭동적 시위진압이 일어난 경우는 1961년 파리 학살이 전부다.[14] 1974년에 민주화까지 이루어지면서 그리스는 선진국에 진입했다. 참고로 파파도풀로스가 집권했을 당시인 1967년 기준 그리스의 1인당 GDP는 1068.1달러, 세계 평균 1인당 GDP는 665.6달러로 세계 평균의 1.6배인 중진국 상위권이었다.[15] Δημήτριος Ιωαννίδης, 1923~2010. 파파도풀로스가 집권한 쿠데타 당시 그리스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으로서 쿠데타 계획과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파파도풀로스가 각광을 받을 수 있도록 본인은 소위 흑막으로 머무르는 것을 더 즐겼다.[16] 그 외에는 이오아니디스를 포함하여 12명 종신형, 4명 20년형, 1명 5년형, 3명 무죄가 선고되었다.[17] 특히 이오아니디스는 사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판결되어 7회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8] 참고로 이 고문경찰들에 대한 재판은 당시에는 전례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재판을 바탕으로 한 논문까지 써질 정도로 학계에 큰 인상을 줬다.[19] 1984년부터 1996년까지 총 8번의 선거(그리스 의회 5회+유럽의회 3회)에 참여했는데, 의석을 차지한 선거도 딱 하나(198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2.29%의 득표율로 1석 획득)밖에 없었던 데다 나머지 선거들은 1.17%의 득표율을 기록한 1989년 유럽의회 선거 빼고는 모두 1% 미만의 득표율을 얻으며 문자 그대로 처참히 망했다.[20] 이쪽은 파파도풀로스의 사망으로부터 20년도 더 후인 2021년 사망했다.[21] 엄밀히 따지자면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포함된다 할 수 있지만, 프랑코가 1975년 시점에서 스페인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이었지만 정치 체제상 선진국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자국의 선진국 진입을 목격하고 죽은 독재자는 싱가포르의 리콴유도 있지만 애초에 리콴유는 단 한 명의 정적도 죽이지 않은 온건한 독재를 펼쳤기 때문에 전두환, 파파도풀로스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리콴유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과 같은 시기에 독재정권이 종식된 대만과 한국보다 늦게 민주화된 동유럽 선진국들도 민주화 전 마지막 독재자들이 자국민 학살을 저지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장제스는 그의 아들 장징궈가 죽은 후(1991년)에야 대만 경제가 선진국 수준이 되었기에 논외.[22] 물론 임팩트는 퇴임으로부터 얼마 안 가 수감되고 사반세기 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옥사하며 죗값을 제대로 치른 파파도풀로스보다 죽기 직전까지 멀쩡히 대외 활동까지 한 전두환이 압도적으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