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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3:12:03

오병이어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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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해석4. 후일담 및 유사 사례5. 번역명에 얽힌 비화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www.giaoly.org/Jesus-give-them-to-eat.jpg
The Feeding of the 5,000 /

그리스도교성경에 언급되는, 만나와 더불어 먹을 것 관련해서 최고로 꼽히는 기적. 그 상징성 때문인지 다음의 4대 복음서 전부에서 언급되는 몇 안 되는 기적이기도 하다.당시 사람들은 이 기적을 만나와 연관지어서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 문서의 제목인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시다 등으로 풀어서 말한다.

아무래도 인류의 기본 욕구인 '먹을 것'과 관련되어서 그런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많이 퍼진 이야기다.

2. 내용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바구니[1])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
마태오 복음서, 공동번역 성서
예수가 갈릴리(갈릴래아) 호수 근처 들에 있을 때 많은 무리가 뒤따랐는데, 날이 슬슬 저물어갈 쯤에 제자들이 날도 늦었고 하니 사람들을 돌려보내서 뭐라도 좀 먹이자고 말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이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으로도 모자랍니다"라고 난색을 표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데나리온이니, 200데나리온이면 엄청난 금액이다.[2] 당시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어떤 아이가 제자 안드레아스를 통해 예수에게 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밖에 없었다.[3]

예수는 사람들을 50명씩 모여앉게 한 다음, 빵과 물고기를 갖고 감사기도를 하고는 제자들에게 이를 분배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누어준 식량이 어찌된 영문인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성인 남성이 5,000명[4]이나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모아 담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더라는 것.[5]

3. 해석

이 일화를 두고서 갖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단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교인의 기본적인 관점은 실제 예수의 기적으로 나타난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기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 마당에 '먹을 것이 늘어났다'는 기적을 믿지 못할 이유가 딱히 없다. 반대로 비기독교인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은 남몰래 후원을 받은 것이라든지, 참석한 이들이 각자 먹을 것을 내놓으면서 나눠먹은 덕분이라는 식으로.

다만 의외로 신학적 관점에서도 현실적인 해석을 내놓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8~19세기를 살았던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신학자 H.E.G. 파울루스를 위시하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사실 수많은 군중이 몰래 자기 먹을 것을 하나씩 갖고 있었는데, 어린애가 자기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서로서로 광주리에 식량을 담기 시작해서 그런 기적(?)이 나왔다'는 해석을 했다. 나름대로 감동적이면서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초자연적인 '기적'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베푸는 선행 또한 종교가 추구하는 큰 미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종교계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일례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장례 미사에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추도사에도 이러한 해석이 언급된다. 이 해석을 바탕으로 몇몇 사람들은 예수가 빵과 고기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람들이 자기 것을 내놓는 것이 더 큰 기적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은 이성의 시대에 종교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인데, 가톨릭 해방신학에서도 이 해석을 채용했고 또 신천지같은 사이비 종교에서도 이런 해석을 채용한다. 해방신학이나 이런 교파가 아니더라도 일반 개신교회 및 관련 단체에서 나눔과 기부의 정신을 강조하며 이와 비슷한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기적보다는 선행이 상대적으로 쉽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해석을 반기는 교인들도 많지만 또 반대로 예수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좋은 깨우침을 주는 스승이 아니라 메시아라는 증거이기도 한 '초자연적 기적'을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한 평범한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신성을 끌어내린다며 불쾌해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사실 예수가 빵과 고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초자연적인 모습이기는 해도 일단 예수 한 명이 결심하면 가능한 반면 사람들이 알아서 자기 소유를 내놓는다는 결단을 내리는 게 어디 쉬운가? 물론 간혹 자신의 전재산을 내놓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저렇게 수많은 사람이 모인 상황에서는 방관자 효과에 의해 누군가는 해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라도 안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런데 예수도 아닌, 일개 평범한 사람이 너도나도 나섰다는 것은 군중심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보통 일이 아니긴 하다. 예시를 들면 현재에도 남이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 일도 아닌데 다 같이 힘을 모아 도와준 일이 뉴스에 보도되는 걸 생각해 보자, 심지어 그 일이 수십 명 정도여도 뉴스를 타는데 수천 명이 저랬다면 군중심리가 작용했더라도 상식적인 일은 아니다.[6] 실제로 이 해석은 기독교의 이상[7]이 직접 드러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만민의 모범이 되어 한 집단을 먹여살린 것 자체는 기적에 비해 소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해석 또한 기적이라 불릴 만 한데, 궁극적으로 '혈연이 없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교통한 것'이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인류사 최대의 난제다.[8]

다만 이 해석에도 맹점은 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예수는 이 사람들을 속물 취급하며 결국 떠난다. 비록 완전 스스로 나선 것만은 아니라도 그래도 남을 위해 스스로 먹을 것을 내놓는 사람들을, 그것도 '예수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에만 눈이 멀었다는 이유로 떠난 것은 설명이 어렵다.

또 한 가지 해석 방법으로 5,000명이 넘는 추종자 중에서 부자가 있었고, 그들이 예수의 열악한 상황을 지켜보고 남몰래 음식을 끼워넣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다만 사람 한명이 5,000명이 먹을 식량을 몰래 숨기고 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명이 아니라 몇십명의 부자가 힘을 합쳤다면 가능할지도...

아예 오역 때문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조철수 교수의 책 《예수 평전》에 따르면 ‘오천 명’이라 번역된 아람어 본(페시타) 신약성서에는 ‘오천’이라고만 돼 있다. 오천은 히브리어로 ‘하메셰트 알라핌’이다. 그런데 이를 ‘하메셰트 알루핌’으로 읽으면 ‘다섯 천부장’(1,000명 조직의 대표)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모음 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알라핌을 알루핌으로 읽는 식으로 보면 오천을 오천 명의 군중이 아니라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으므로, 조 교수는 ‘빵을 먹은 이들이 다섯 천부장이었다’는 말은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이 참석한 그날의 특별한 만찬 의례에서 그들 가운데 5명의 천부장을 선출했다는 얘기고 예수가 그들에게 성찬의례를 베풀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여 번역의 오류가 만든 오해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의견은 신약 성서는 애초에 그리스어로 쓰여졌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번역의 오류라면 옳게 번역된 사본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 문제가 된다.

해석이 어찌하든 간에 여러 학자들은 이 기적이 후대 교회의 성체성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성찬례는 지금은 천주교든 정교회든 개신교든 굉장히 간소화되어서 조촐하게 빵 한 조각 먹고 마는 형태지만 초기 기독교의 성찬례는 교인들이 모여서 각자 음식을 가져 온 것을 나누며 끼니를 먹는 것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를 미화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변개한 것이든, 저자가 신학적 의도를 담아 은유를 위해 변개한 것이든, 아니면 구전 전승 중에 변개가 된 것이든 이것이 후일 성찬례의 기원이 된 것은 확실시된다. 다만 예수가 최후의 만찬 전 공생활 중에 정말로 성찬례와 유사한 의례를 제정했는지 아닌지는 아직은 논란거리이다. 예수 후대에 형성됐다고 보는 측은 성찬의식의 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해 삽입된 구절이라고 보고 있다. 생전에 제정한 게 맞다고 가정하면,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음식을 몰래 꺼내서 불어난 것'이라는 교훈적 해석이 사실인 셈.

다르게는, 열두(12) 광주리가(광주리가 아니라 바구니 - 헬라어로 코피노스로 이는 광주리에 해당하는 스푸리스보다 작은 것이다.) 남은 것은 12지파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각각 육지와 바다를 상징하는 빵과 물고기를 통해 세력의 번성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교세 확장 같은 과격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외에도, 소위 번영복음 주의자들이 말하는, “먼저 자신이 물질의 풍성함을 누려야 더 크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라는 사상에 반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소년의 한끼 도시락 정도의 불과한 적은 물질로도 얼마든지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보통은, 비록 가진 것이나 능력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크게 쓰임 받을수 있다는 내용으로 교회에서 설교되고 있다.

개드립으로는 예수가 실은 외계인이었고 남몰래 가지고 있던 분자 증폭기를 사용해서 물고기의 분량을 늘린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4. 후일담 및 유사 사례

이 이야기를 후일담까지 포함해서 보면 사실 배드 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제공받은 사람들은 예수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로움에만 관심이 쏠려서 실망한 예수가 이들을 피해 떠나갔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할 때엔 오병이어 자체보다는 이 후일담을 오히려 중점적으로 거론하면서 물질만능주의 혹은 기복신앙을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먹을 것이 자동으로 불려지는 기적 이야기는 세계를 막론하고 어딜가나 존재한다. 한국만 해도 바닷물이 짠 이유와 관련된 민담으로 어떤 사람이 소금을 만드는 마법의 맷돌을 얻었는데 그걸 바다에 빠뜨린 뒤에도 계속 소금을 만들어서 바닷물이 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수분도 이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다만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독교를 타고 전세계급으로 알려진 이야기인지라 인지도가 더 높은 것.

마이너 버전으로 칠병이어의 기적도 있었다. 이때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4,000명이 모였다고 하며, 유태인들이 아니라 이방인 대상으로 행한 기적이라고 전한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오병이어에는 열두 바구니로 나와 있으나 칠병이어에서는 일곱 광주리로 나온다. 칠병이어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곱 개의 떡과 물고기 두어 마리였다.

예수는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적을 보인 바 있다. 결혼식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하인들을 시켜 항아리에 맹물을 채우게 하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군중들이 떠나고 예수의 말대로 제자들이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호에 있었는데, 밤이 된 후 폭풍우가 몰아닥쳤고 그 가운데에서 예수가 물 위를 걸어오는데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놀라지만 예수가 자신이라며 안심시킨다. 그러자 베드로가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다고 하자 예수는 오라고 하며 베드로도 물 위를 걷는데, 그 순간 파도가 베드로 쪽으로 와서 베드로는 겁에 질려 물에 빠지고 만다. 그 모습을 본 예수는 한 손으로 베드로를 구해주며 "이 어리석은 자여, 왜 의심했느냐?" 라고 탄식하며 같이 제자들이 있는 배로 올라오고, 올라서자마자 폭풍우는 가라앉았다고 한다.

적은 양으로 많은 이를 배불리 먹인 이 일은, 훗날 성인들도 해냈다고 한다. 예컨대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요한 보스코 신부는 빵 15개로 300명을 먹인 적이 있다. 잡지 내친구들에 연재된 만화에서 한 바구니밖에 없는 군밤을 자신들을 따라온 그 많은 아이들에게 양껏 나눠주고도 절반이나 남았더라는 일화도 소개되었다. 산타클로스의 유래로 잘 알려진 니콜라오 주교의 일화에도 이와 비슷한게 있다. 미라 지방이 식량난에 허덕이자 폭풍에 밀려 그 지역에 들른 식량 운송선의 선장들에게 식량을 나눠달라 부탁했는데, 주교의 간청에 마지못해 식량을 나눠줬음에도 출항하고 다시 확인하니 식량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의외로 후대에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해낸 사례가 꽤 많은 기적. 기독교 사람 뿐 아니라 힌두교나 불교 쪽에서도 종종 보이는 신통력으로, 서양에서 힌두 철학을 가르쳤던 스와미 라마가 젊은 시절에 힌두교 종단에서 고위직[9]을 맡고 일을 하던 어느날 신도들 가운데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주리고 있을 때, 도력이 높은 비구가 찾아와 그릇 하나를 주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먹을 것을 꺼내먹으라고 자비를 베푼 적이 있었다. 이 그릇은 음식을 무한대로 담고, 또 아무리 꺼내도 계속 나오는 신통력이 붙은 물건으로 스와미 라마가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한다.[10] 물론, 이 그릇의 신통력 때문에 욕심꾼들이 계속 들러붙자 결국 제자들을 시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버리도록 했다고 한다. 불교 쪽에서도 도술로 이름 높은 사명당이 묘향산의 서산대사와 내기를 할 때 쇠로 만든 바늘을 국수로 만들어 대접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기적은 각지의 문화권의 영성세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보편적인 신통력 중 하나다.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사실은 구약에서도 이런 '불려먹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기근 동안에 과부네 집에 신세지면서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한 일이나[11],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바구니로 100명이 먹은 일. 위에서도 그렇고 아무래도 규모가 좀 작긴 하다. 명색이 선지자란 분이 성인보다도 더 적다니... 선지자가 성인 기적보다 규모가 적은게 당연한거 아니야?

그리고 불려먹기와는 상관은 없지만 저런 먹을 것과 관련한 기적이 몇개 더 있는데, 탈출기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알아서 잡혀준 것[12]이나 솔로몬의 전성기 당시 수백마리의 동물들이 알아서 모여든 것 등이 있다.

심지어 기독교와 상관없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으로 변장해 마을을 들렀는데, 모든 집이 손님을 거절하고 마지막으로 들른 바우키스와 필레몬 노부부의 집에서 접대를 받는 장면인데, 식사를 대접해주고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따라주는데 따라도 따라도 포도주가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노부부는 두 손님이 신인 것을 알게 된다.

예수가 매달려 죽었다는 성유물성십자가의 조각도 점점 양이 불어나서 모두 합치면 어마어마한 크기가 된다고 하는데, 이는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 기독교에서 성유물에 대한 공경이 너무 지나쳐 이익을 목적으로 가짜 성유물을 마구 만들어내던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주인공 윌리엄 수사가 "우리 주님은 각목 2개로 만든 십자가가 아니라 널찍한 숲 위에서 돌아가신 모양이다."라고 탄식하는 대목이 나오고, 마크 트웨인 역시 "예수님이 못박히신 십자가의 조각들을 모두 모으면 배 한척은 충분히 만들겠다! 그 배 타고 돌아다니면서 전도나 해라!" 라고 풍자한 바 있다.

2019년에 7세기 없어진 이스라엘의 교회 터에서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

세인트 영멘 11권에서 금붕어 사료값을 아끼려고 예수가 빵을 만들었다가 금붕어도 같이 늘어났다. 이 금붕어들은 성인들의 식량이 되려고도 하고 산소 펌프값을 아끼기 위해 팔다리가 생기고 폐호흡을 하는 진화를 했다.[13] 나중에 범천을 불러서 적당한 곳에 방생을 부탁했는데 범천이 금붕어들을 방생한 곳은 갠지스 강.[14] 이 금붕어들은 갠지스 강 도착 3일 후 이족보행을 하면서 "나...무..." 라고 말했다. 16권에서는 붓다, 루시퍼와 함께 코스트코에 가서 산 디너롤 빵을 나눠 담다가 차 뒷자리가 가득 찰 정도로 늘리는 바람에 루시퍼가 지옥 밑바닥에 얼려뒀다고 한다.

FNC 엔터테인먼트가 상호명을 여기서 차용했다고 한다.

아이템 복사라는 개드립도 있다. 3일 정지는 덤.

노라조샤워에서도 패러디했다. 비누 5개와 때 타올 2개로...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장각이 자기 추종자들에게 짜장면울면을 만들어 주면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언급한다. 예수는 신통력이 부족해서 좀 남게 만들었지만 자기는 딱 맞게 만들어줬다는 개드립이 일품. 그 후 시대적으로 장각이 예수를 알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며 나레이션과 말다툼도 한다.

판소리 버전

서양 어딘가에서 플라스틱 술통을 이어붙여 십자가를 만든 사례가 있다. 예수 역할을 맡은 남자가 이 십자가를 진 채 캔맥주를 마셨다. 한국 커뮤니티의 네티즌들은 이 상황을 보고 재미있는 댓글을 달았다. 이를테면 예수는 인간의 죄를 짊어졌는데, 이 죄가 술(酒)이었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따라, 주(酒)님은 와인 디스펜서가 되어 물을 술로 바꾸고 안주를 복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어 롱기누스라는 이름의 병사가 창을 들어 예수를 찔러봤는데, 피 대신 맥주가 흘러 상황이 이상함을 느꼈다고 한다. 최후에 숙취로 3일간 고생하다 부활했다고 한다.

5. 번역명에 얽힌 비화

번역본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말 그대로 '다섯(五) 빵(餠) 두(二) 생선(魚)의 기적(奇跡)'이라는 뜻이다. 사실 餠은 이 아니라 을 뜻하는 것이지만 왜 병이 쓰였냐 하면, 중국어에서 병(餠, 발음은 관화로 bing3, 광동어로 beng2)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하듯이 쌀가루 반죽을 찧어 만든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를 반죽해서 굽거나 발효시켜 부풀린 뒤 쪄낸 것을 포함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15] 즉, 중국어에서 '병餠'은 서양의 빵과 상당히 유사한 것을 포함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빵(포르투갈어 pao~)의 번역어로 성경에 쓰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餠을 흔히 '떡'으로 알고 있던 한반도에선 이 때문에 전파 초기엔 아예 빵 대신 떡을 그 자리에 두기도 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빵보단 떡이 더 친숙한 표현이기도 했으니 일종의 초월번역이었던 셈이다. 참고기사 두산대백과의 해석(분명하게 '빵'이 아닌 '떡'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중화권에선 비스킷 등의 과자를 餠[16]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살던 시절의 빵은 발효는 하긴 하지만 보리가루나 거친 밀가루를 뭉쳐놓은, 거의 떡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부들부들한 흰빵은 부자들이나 먹을 수 있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 부자들조차도 조리가 번거로워서 자주 안 해 먹었다.

이러다 보니 성경의 말씀을 따른답시고 당대 교회들은 신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전통으로 자리잡아버려서 한국 교회들은 빵이 아닌 떡을 나눠먹는 모습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시대가 지나서 성경을 좀 더 심도깊게 연구하고자 번역본이 아닌 원어를 직접 습득해서 원본 성경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런 의역들이 발견되어서 이제는 원래대로 빵을 나눠먹는 교회들이 생겼다.

또, 기독교를 믿는 한국인들이 북미, 서유럽 문화권 사람들인 것은 아니듯이, 종교는 문화권의 맥락에 따라 의례가 바뀌기도 한다. 가령, 아프리카 흑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흑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 새벽기도 전통 역시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기독교 관습인데, 오히려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의 열성적인 새벽기도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어느정도 규모가 큰 교회 내부의 식당에 가보면 식당의 이름을 오병이어에서 따온 곳이 많다. 명동성당의 기념품점인 1898+도 이름은 명동성당의 축성일에서 따왔지만 로고는 두개의 작대기(물고기)와 다섯개의 동그라미(빵)으로 오병이어를 형상화했다.

떡(성경) 문서도 참조.

6. 관련 문서


[1] 광주리가 아니라 바구니가 바른 번역으로 원어 헬라어로 코피노스며 이는 광주리에 해당하는 스푸리스보다 작은 것이다.[2] 노동자의 하루 일당인 1데나리온은 은 값만으로 환산하면 겨우 3000원 정도이지만, 현재와 당시의 은의 가치나 추출 기술력이 차이나므로 정확한 비교는 아닐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노임을 가지고 계산하면, 좋게 쳐줘서 하루 일당 = 10만 ~15만 원이라고 하면 약 2천만~3천만 원 정도이다. 이것을 5천 명이 나눠먹는다고 환산하면 아무리 한국 빵값이 워낙 비싸다고는 해도 겨우 1인당 4천~6천 원 정도가 되며 이 마저도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금액이다. 확실히 한끼 빵값으론 모자라다.[3]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오늘날 먹는 것과 별다를 것 없는 둥글납작한 빵을 먹었다. 물고기란 갈릴리 호에서 잡아 북어처럼 말린 민물고기였을 것이다.[4] 성인 남성 따지면 5,000명이므로 그들을 따라온 여성이나 아이, 노인들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시절에는 기계가 없어서 자동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모든 일을 육체노동으로 처리했던 만큼, 일하고 나서 재충전을 위해 필요한 식량의 소비량도 엄청났다.[5] 이 때문에 '열두 광주리'라는 말은 기독교계에서 이웃돕기 운동을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상징적, 관용적 용어가 되었다.[6] 이 해석대로면 마르코 복음서 8장 18~21절에 나타난 '먹을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뉘앙스가 좀 미묘해지는데, 이는 예수가 사람들이 베풀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면 해결된다. 즉 예수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먹을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연결하면 얼추 맞는 말이 된다.[7] 사랑하고 스스로 베푸는 것[8] 《The Righteous Mind》457p.[9] 30도 안된 나이에 힌두교 최고위직인 '샹카라차라'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샹카라차라는 불교로 치면 종정 혹은 총무원장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한 종파를 대표한다.[10] 시험삼아 그릇에다가 우유를 부어넣었는데, 아무리 부어도 흘러넘치지 않았다고 한다.[11] 이 때 남아있던 식량은 밀가루 약간과 극소량의 기름이었다. 이 과부는 마지막으로 아들과 함께 이거나 먹고 죽을 생각이었던 것이 엘리야가 찾아올 당시의 상황.[12] 성경에는 이 때 유대인들이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과식 후 죽은 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13] 그리고 예수는 진화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14] 붓다는 거기서 살면 우주에 던져도 살 수 있을 거라며 황당해했다.[15] 이러한 중국식 '병餠'의 예시로는 월병이나 만터우 항목 참조.[16] 다이제스티브 비스킷을 직역해서 消化餠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