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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2:13:21

외화상점


1. 소개2. 상세3. 나라별 실상
3.1. 소련3.2. 북한3.3. 동유럽3.4. 중국3.5. 쿠바

1. 소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 있었던 자국 돈이 아니라 외화 혹은 외화태환권만 받고 사치품을 판매하던 특수한 상점.

2. 상세

1990년 평양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외화상점에서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졌다.
농촌 할머니 하나가 송신농민시장에서 마늘을 팔아 생긴 돈을 가지고 여기저기 물건을 사러 다니다가 어떻게 이 외화상점에 들어왔다. 다른 상점에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 상점에는 즐비하였다. 할머니는 이것저것 다 마음에 드는 대로 상품을 골라 전표를 떼게 하였다. 그리고 출납구에서 일이 터졌다.
할머니는 김일성의 머리가 그려져 있는 1백원 짜리 돈 2장을 구멍 안에 들이밀었다. 출납원이 보니 외화가 아니고 국내돈이어서 다시 내밀었다.
"이런 돈은 쓰지 못해요. 다음 손님!"
할머니는 리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돈을 쓰지 못한다니 무슨 소린가. 할머니는 다시 디밀었다.
"자, 그러지 말고 빨리 돈을 받아!"
"할머니, 이런 돈은 못써요. 외화를 가져오라요!"
"외화가 뭐나? 난 그런 것 없어. 날이 저물기 전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 하니 빨리 표를 끊어 달라!"
"할머니, 떼를 쓰지 말라요! 여기는 국내 돈을 안 쓰고 외국돈만 쓰는 데야요."
"외국돈만 쓰다니, 어떤 돈 말인가?"
"예, 미국 딸라, 일본 엔, 서독 마르크 같은 것들만 써요."
"이런 미친년 보았나. 양코배기 돈을 쓴다고? 쪽발이 놈들 돈을 쓴다고? 이년아, 이 돈은 귀하신 수령님 초상이 있는 귀한 돈인데 이 귀한 돈을 쓰지 않고 더러운 양코배기 돈만 쓴단 말이가? 이년이 환장을 했나?"[1]
물론 결과야 뻔하다. 할머니는 끝내 아무 물건도 사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북조선 정권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고영환, 〈평양 25시〉
본질은 자국에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외국인 혹은 외화를 소유한 자국민[2]들로부터 귀중한 자원인 외화를 모으기 위해 생겨난 수단이다. 계획경제의 비효율성 탓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뭇 사회주의 나라의 종특이라고 할 만한 만성적인 외화 결핍 그리고 소비재 양적 부족 및 질적 하락이 맞물려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영리를, 다른 한편으로는 구하기 어려운 소비재와 사치품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물론 주 목적은 전자였지만 어쨌든 외화상점은 사회주의 국가의 공민이 공식 유통망에서는 구할 수 없는 상품들을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다.[3]

비단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더라도 초인플레이션이나 전쟁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그냥 상점에서도 자국화폐보다 외화를 더 선호해서 외화상점처럼 운영되는 경우도 있다. 소련 붕괴 직후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권 국가들이 자국 화폐의 가치가 위낙 떨어지다보니 상당수 상점이나 시장에서 외화를 더 선호해서 외화상점처럼 운영되기도 했고[4] 가장 최근의 예로는 베네수엘라레바논이 있었고, 짐바브웨, 유고슬라비아 전쟁기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대표적인 예이며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예 자국 통화를 폐지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2010년대의 짐바브웨가 대표적인 예였고 에콰도르, 엘살바도르가 대표적인 사례다. 외화가 없으면 자국 화폐를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쓰는 방식으로 최대한의 구매력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는데 튀르키예와 브라질에서는 진짜로 월급날을 전후한 며칠 사이에 물건을 사재기하는 식으로 버텼고 러시아와 아르헨티나에서 물가상승 이유가 있을 때마다 외화나 생필품을 사재기한다는 뉴스가 뜨는 것도 이 때문이다.

3. 나라별 실상

3.1. 소련

시초는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있었던 토르그신(Торгсин, "외국인과의 거래"를 뜻하는 러시아어 Торговля с иностранцами의 약자)으로, 외화·귀금속·보석 등을 받고 물건을 팔았는데 훗날과 달리 내국인의 외화 사용을 특별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1964년에는 베료즈카(Берёзка)라고 불리는 외화상점이 생겨났다. 외화 또는 외화와 바꾼 수표를 가지고 물건을 살 수 있었는데 외국인과 달리 일반 소련 공민은 외화를 직접 사용할 수 없었고 반드시 소련 루블로 액수가 표시된 태환수표를 환전하여 쓰도록 되어 있었다. 소련 정부가 자국민의 외환 소지와 거래를 중대한 범법행위로 단속했기 때문이다.

당시 베료즈카에서 팔리던 다양한 부류의 상품들. 소련 하면 바로 연상될 만큼 널리 알려진 텅 빈 매대와 기나긴 대기 줄도 베료즈카에서는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베료즈카가 문을 열면서 세수 확충에는 기여했지만 동시에 시장에서 외화거래가 급속히 활발해지는 바람에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 간의 격차가 커지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값싼 물품을 구매하는 정도야 큰 부담은 없었지만 자동차나 명품 같은 비싼 물품은 몇년치~몇십년치 봉급 수준이라서 부담이 컸다.

당시 소련에서 나고 자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의 에 따르면 소련인들이 가는 외화상점에는 흔히 생각하는 각종 외제 사치품들이, 외국인들이 가는 외화상점에는 소련제 고급 기념품이나 심지어 반체제서적(!)이 팔리는 등 품목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기에 개혁의 일환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외환거래와 대외무역이 합법화되면서 존재 의의가 없어진 베료즈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만 이후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은 이전과는 반대로 일반인들의 구매력이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인구의 대다수가 여전히 비싼 외제품은 고사하고 국산품도 못 사는 다른 의미에서의 부조리상이 펼쳐졌다(...). 물가가 폭등하여 루블화 가치가 위낙 떨어지다 보니 많은 상점이나 시장에서 외화를 더 선호해서 외화로 물건값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러시아 경제가 안정화된 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며 극동지방에선 90년대 후반까지도 유지되다 2000년대 들어서야 완전히 근절되었다.

3.2. 북한

아마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개중 많은 수가 구매력이 뒷받침되는 평양에 있지만 지방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장마당과 함께 북한의 시장경제화를 견인하는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다.

계획경제가 작동했던 김일성 시대에는 바꾼돈표(태환권)를 발행하였지만 김일성 사후 물가가 폭등하고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격차가 매년 벌어짐에 따라 번거로운 태환권을 폐지하고 그냥 대놓고 외화를 쓰는 모양이다. 2009년의 화폐개혁이라는 대참사가 있고 나서는 아예 자국 화폐가 천시받는 지경이 되어 그 뒤로는 '외화'상점이 아닌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는 화폐가치가 안정화되었지만 갈수록 숫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실정이며 종류도 종합봉사시설, 백화점, 식당 따위로 점점 다양해졌다.

3.3. 동유럽

동독에서는 인터숍(Intershop), 폴란드에서는 페벡스(Pewex, "내부 수출 기업"을 뜻하는 폴란드어 Przedsiębiorstwo Eksportu Wewnętrznego의 약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투젝스(Tuzex, "국내 수출"을 뜻하는 체코어 Tuzemský export의 약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는데 소련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1960~70년대에 생겨났다가 체제 전환기에 소멸했다. 처음에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게였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면서 외화만 있다면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트편은 동독의 인터숍을 소개하고 있다. (단 인터숍이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단지 서독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한[5] 면세점이라는 게 특이할 뿐인데, 이를 두고 이게 좀 모순적이지 않냐고 묻자 어차피 자본주의 국가에서 만든걸 자본주의 시민에게 파는 것이고 우린 중간 이익을 보는 것 뿐이라고 대답하는 가게 직원을 보여주며 작가"공산주의도 돈 앞에서는 무력한 모양이지?"라고 마무리한다. 이 당시에 서독에 친적과 가족, 친구가 있거나, 연줄이 있는 사람들은 일정액의 서독마르크화를 얻을수있었기 때문에 서독마르크화로 서방제품을 마음대로 살수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박탈감을 느낄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980년대 폴란드가 배경인 <마르지>에도 당시의 페벡스가 나온다. 어린 소녀인 주인공이, 물건은 없고 직원들은 불친절한 일반 가게에 비해 "여기 오면 딴 세상에 온 것 같다. 좋은 냄새가 나고, 모든 게 번쩍번쩍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카펫과 매끈하고 밝은 나무색의 가구도 있다. ...(중략)... 게다가 여기 종업원들은 배급표를 내라고 하지도 않고 웃으며 맞이한다."며, 하지만 달러로 계산해야 해서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갖고 싶었던 바비 인형을 못 사서 슬퍼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3.4. 중국

우호상점(간체 友谊商店, 번체 友誼商店)이라는 이름으로 1958년에 상하이 우호상점이 개점하면서 우호상점이라는 개념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로 베이징과 광저우 등 주요 대도시와 외국인들이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잇따라 문을 열었다. 고급소비재 시장 자체는 1951년부터 존재는 해 왔지만 소규모 상점인지라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것을 외국과의 무역교류가 늘어나자 외국인들과 외화를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특산품과 주요 식품들, 외제상품등을 주로 판매했지만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우호상점들도 피할 수 없어서 1966년부터 196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 의해 상당수의 우호상점들이 자본주의와 부패의 상징이라며 약탈당하거나 강제로 폐점당했고 다시 제기능을 하게 된 것은 문혁의 바람이 잦아든 1970년대에 와서였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우호상점의 점포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창업과 자영업이 급속히 활성화되었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크게 늘면서 외화의 유입이 급속히 늘어남에 따라 이에 대응해서 우호상점의 다점포화를 노렸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중국 대중들도 외국인들과 화폐교환을 하는 방식으로 태환권을 얻어 우호상점에서 쇼핑하기도 했다. 당시 우호상점에 팔았던 외제품들은 원산지에 비해서도 비싸서 바가지가 심하다는 원성도 듣기는 했지만 외제품 구입에 있어서 우호상점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우호상점뿐만 아니라 일반백화점에서도 외제품을 잇따라 취급하기 시작한 데다 대도시는 물론 지방 방방곡곡에서 대형쇼핑물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태환권 제도도 1994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폐지되면서 우호상점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2000년대에 와서는 대부분의 우호상점들은 문을 닫게 되었다. 1980년대에야 호기심이나 명품 구매를 이유로 들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경제력의 향상에 따라 시설이 훨씬 좋고 접근성도 괜찮은 쇼핑물과 대형마트, 백화점에서 우호상점에서 파는 것과 똑같은 명품과 수입품을 똑같이 팔고 있으니 굳이 우호상점으로 갈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남은 우호상점들은 명품 판매를 주로 하면서 여전히 운영되고 있기는 하다.

여담이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의 우호상점은 고객서비스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외국인 손님이나 대만, 홍콩, 싱가포르 사업가들이 우호상점에 들를 때마다 불평했던 것 중 하나가 종업원들이 너무 통명하게 대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우호상점의 서비스가 좋지 않았던 것은 중국에서 고객응대서비스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우호상점이 이상한 것은 아니기는 했다.

3.5. 쿠바

쿠바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외국인만 갈 수 있도록 지정되었으나 경제난에 빠지자 경제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일반인들이라도 달러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상점이 되었다. 쿠바가 태환권 사용을 권장하면서 2004년부터는 태환권으로 물건을 사는 곳이 되었다가 2019년부터는 미국경제제재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여파로 다시금 달러로 결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외화상점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고 해도 파는 물건의 가격대가 쿠바 물가 기준으로 비싸기 때문에 부유층이 아니라면 문턱이 높다. 그럼에도 물건의 품질이 상당히 높고 수량도 꽤 풍족하기 때문에 인기는 꽤 높다.

[1] 이것도 90년대 초반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고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기 때문에 괜히 외화상점에서 소란을 피웠다가는 적국의 역공작으로 간주되어 사회안전성에서 공짜로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게 된다.[2] 외교관이나 파견인력, 대외무역일꾼, 송출 노동자, 기타 여러 목적으로 해외로 다녀올 수 있도록 허가받은 사람들, 그리고 외국으로부터의 송금 수급자들 등등.[3] 재미있는 점은 공산정권 시절에는 이 유통의 중앙집중화가 큰 비판을 받았는데 막상 상점들이 민영화된 후 대형유통체인점의 진출로 인해서 유통의 중앙집중화 현상이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공산정권 시절에는 대충 물건을 땜빵하는 데 집중했다면 민간유통업계에서 수익을 중요시하다 보니 물자의 양과 질, 그리고 가격은 다르다는 큰 차이점은 있기는 하다.[4] 다만 이 나라들은 경제가 정상화되면서 일반 결제에까지 외화를 쓰지는 않는다.[5] 비슷한 맥락에서 동독의 플래그 캐리어인 인터플뤼크는 당시 구매력이 낮았던 (상류층과 전문직 종사자들은 대부분 전쟁 이후 최대한 서독 본토로 이주했기에 베를린에 남은 사람들은 대개 이주할 여력이 없는 노동계급 시민들과 서독에서 넘어온 소수의 병역기피자들 뿐이었다.) 서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저가 항공사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노선망 중 제2세계 이외의 국가로 향하는 노선들은 특별히 허가를 받은 소수의 동독인들을 제외하면 전부 서베를린에서 저렴한 가격에 휴가지로 향하는 승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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