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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29 02:36:56

요네하라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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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原万里, 1950-2006

1. 개요2. 생애
2.1. 어릴 적2.2. 작가 및 통역가
3. 작품 일람4. 여담

1. 개요

일본러시아어 동시 통역사 및 작가.

2. 생애

2.1. 어릴 적

1950년일본 도쿄도 주오구에서 태어났다. 일본공산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이 프라하로 이주하여 1959년에서 1964년까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공부했다.

프라하 거주 당시 다녔던 소비에트 학교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 주재하던 각국 외교관이나 공산당 고위 간부, 고위 관료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일종의 특수 명문학교였고, 이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공산주의 사회에는 계급이 없어야 되는데, 왜 우리 학교 친구들은 다들 특권계급 티가 줄줄 날까?"라는 의문을 여러 번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 외교관의 딸이었던 친구의 집에서 입주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가정부를 다락방에서 재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굳어버렸다고 할 정도. 하지만 프라하를 떠나고 20~30년 후 옛 친구들의 자취를 찾아 다시 프라하에 찾아갔다가, 소비에트 학교가 있던 시절부터 학교 앞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노부인과 대화하면서 일본인러시아어를 잘하는 것을 신기해하는 노부인에게 '어렸을 때 소비에트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소비에트 학교를 기억하고 있던 노부인이 '그 학교는 스쿨버스도 운영했고, 선생님들도 매일 옷을 바꿔입는 멋쟁이였고, 학생들도 있는 집 자식이라는 티가 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주변에서 보기에도 그렇게까지 티가 났단 말인가'라고 또 한번 씁쓸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특수한 학교답게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수준의 학생들간의 관계, 또는 학교 내의 분위기에서도 각국의 정치적 상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자신이 자국을 대표한다고 느끼고 있었고, 서구권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소련 및 동구권 출신 학생들이 서구권 출신 학생들(대부분 서구권 공산당의 대표로 파견된 인사의 자녀들[1][2])과 관계를 자제한다거나, 티토가 지도하는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관계가 경색되자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체제를 소개하는 유고슬라비아 학생에게 소련 출신 교장이 직접 시비를 걸었다고 할 정도. 당장 요네하라 마리 자신도 당시 국제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 좌파로 분류되던 일본공산당 출신인 자신이 우파로 분류되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출신의 학생과 친구가 되면 '사상이념이 사람 사이의 우정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유고슬라비아인 친구를 사귀려고 했다고 할 정도. 물론 학교를 떠난 후에도 이런 정치적 특수성은 여전해서, 30년만에 옛 친구들을 찾으러 떠난 길에 유고슬라비아 출신 친구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그 친구 아버지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구성국이던 보스니아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다거나[3], 그리스 출신 친구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자 대뜸 '혹시 정치적 암살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라는 대화를 주고받는 등[4], 꽤나 황당하기까지 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2.2. 작가 및 통역가

그 후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서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어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까지 수료했다.

러시아어 번역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이후 취직이 되지 않자 시간때우기 겸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것이 계기라고 한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얼마 후 동구권 붕괴 소식이 들려오자 갑자기 사장이 휴가를 한달이나 내주면서 "앞으론 죽도록 바빠질테니 최소 몇년간은 쉬고싶은 생각 안 나도록 푹 쉬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련 및 동구권이 개방되면서 러시아어 번역자의 업무량이 폭주했고, 이 당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이 때 받은 번역료 덕분에 친구들을 찾아 동유럽에서 돌아다닐 때 객실 하나를 전세내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 러시아어통역협회에서 초대사무국장을 지냈고 1992년 SJ상을 수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작가로서는 주로 에세이를 집필했으며, 본인의 경험을 녹여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대체로 개인의 경험과 내면으로 대표되는 미시서사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 문단 주류와는 달리 대하서사에 가까운 거시서사를 익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평생 독신으로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다녀서 유부녀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2006년 56세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일람

4. 여담


[1] 요네하라 마리가 프라하 생활에 대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소비에트 학교의 학생 중 동구권 국가 출신 학생들중에는 대사등 외교관 자녀들이 많았지만 서구권 국가 출신 학생들은 외교관이 아니라 단순한 서구권 공산당 간부의 자식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학생의 비율 자체도 동구권 국가 출신이 훨씬 많았음은 당연하다.) 당장 요네하라 마리의 아버지인 요네하라 이타루 역시 중의원 의원까지 지낸 인물이기는 하나 프라하에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공직이 아닌 일본 공산당 대표로써 국제 공산당간의 교류협력조직에 파견된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물론 간단한데, 공산당이 유일정당으로 집권당인 동구권 국가에서는 외교관등 주요 공직자가 모두 공산당 소속인 것이 당연하지만 공산당의 집권 사례가 거의 없는 서구권 국가에서는 공산당 소속 인물이 주요 공직자가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특히 국내 정치에서는 공산당이 국회의원이나 장관등을 배출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해외에서 자국을 대표해야 하는 외교관이 지나치게 강한 정치적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백안시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네하라 마리가 다닌 소비에트 학교는 체코슬로바키아등 소련의 위성국에 설치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교장 및 교사까지 모두 소련 본국에서 임명하여 파견하고, 교육과정 및 학사관리까지 모두 소련 본국에서 관리하고 학적자료도 소련 본국으로 보내서 관리한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소련의 통제 하에 있는 학교였기에, 서구권 국가 중 체코슬로바키아와 외교관계가 있는 국가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외교관 자녀가 다닐만한 학교는 아니었다. (60년대 기준으로 친 소련적인 입장인 공산당 소속 인사가 아니면 자기 자식을 보낼 생각이 들지 않고, 학교측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2] 이런 학교 환경 역시 요네하라 마리의 성장배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예를 들어 요네하라 마리 자신도 부유한 시골 지주집안 출신에 여러차례 국회의원(중의원)을 지낸 아버지를 둔 상당히 유복한 집안 출신이지만 동구권 국가의 노멘클라투라를 부모로 둔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서민적이라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요네하라 이타루가 파견된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 편집부는 당시 국제 공산주의 정당간의 협력조직으로써 여기에 대표로 파견된 인물들은 체코 내에서 각국 대사와 같은 수준의 예우를 받고 있었고, 이에 따라 관사로 아파트도 제공받았는데 이 아파트는 일본에서 방문한 손님들이 '아주 멋진 호화 아파트다'라고 감탄할 정도로 넓고 시설도 좋았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일본 특유의 주거환경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수준의 아파트를 제공받은 루마니아 대표는 '집이 너무 좁아서 못 견디겠다'며 굳이 관사를 나가서 집세를 내고 더 큰 집을 빌렸다는 것. 그리고 이에 요네하라 마리는 '이 집은 충분히 좋은데 왜 한 가족이 못 살겠다는건지 모르겠다'고 의아하게 여겼음을 기록했다.[3] 정확히 말하면 친구를 찾기 위해 일단 친구의 아버지(=친구네 집안)의 행적부터 추적하고 있는데, 친구 아버지의 성만 알지 이름은 몰랐던 것. 그래서 성씨와 함께 '젊은 시절 반 나찌 파르티잔(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활동을 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를 역임했다'는 경력만으로 그런 사람을 아냐고 물어보자 '그 집안에는 6형제가 있는데 모두 반나치 파르티잔 활동을 했고, 그중 외교관 경력이 있는 건 막내인데, 막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이전) 보스니아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는 대답이 줄줄 흘러나올 정도. 요컨데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는 누구나 이름 정도는 알만한 정치 명문 집안이었던 셈이다.[4] 그리스는 1974년까지 반공 성향의 군사독재정권이 통치하고 있었기에 60년대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해외 망명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당연히 그리스 정부는 심한 갈등관계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요네하라 마리의 그리스인 친구였던 리차의 아버지는 체코에 대표로 파견될 정도로 공산당 내 주요 인사였으니 당연히 정치적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던 것. 그리고 요네하라 마리 자신도 이런 사정을 대강 알고 있으니 친구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수십년만에 전해듣고 '혹시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정치적 암살이었을 가능성이 있느냐?'는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것이고, 이 소식을 요네하라에게 전해준 친구 아버지의 지인 역시 자기 딸뻘 되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황당하게 여기지 않고 '다행히 그건 아니고, 단순한 사고였던것 같다'고 침착하게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