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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燕 | ||
189년 ~ 238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후한 | 위 | |
별칭 | <colbgcolor=#fff,#1f2023> 동연(東燕), 공손연(公孫燕) | |
위치 | 중국 랴오닝 | |
수도 | 양평성(襄平城)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성 | 공손(公孫) | |
국가원수 | 후 → 왕 | |
주요 국왕 | 초대 연왕 공손연 | |
언어 | 상고 중국어[1], 한문 | |
문자 | 한자 | |
종교 | 유교, 도교, 불교, 중국 토속 종교 | |
종족 | 한족[2] | |
주요재상 | 왕건,(? ~ 238), | |
현재 국가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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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요동에 할거했던 공손씨 일족의 정권. 존속기간은 189년 ~ 238년 6월이다.[3] 중심지는 양평현(襄平縣)[4]으로 현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이다.원래 국호는 연(燕)나라지만 구별할 때는 훗날에 세워질 여러 연[5]과 구분하기 위해 동연(東燕) 또는 성씨를 붙여 공손연(公孫燕)이라고 칭한다. 다만 국내외 사학계에서도 명칭이 조금씩 다르며, 그나마 범칭이라면 공손씨 정권, 또는 요동 공손씨 정권이라는 용어가 통용된다.
2. 상세
중국이 후한 말의 난세로 혼란한 틈을 타 요동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으며, 중국 동북부의 이민족을 관리했다. 스스로 왕을 칭하기도 했으며, 거의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으나 결국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6]같은 공손씨지만, 후한 말에 유주를 중심으로 할거했던 공손찬과는 관련이 없다는 게 특기할 만한 점. 사실 동연이 자리잡았던 요동 지방에는 '제후의 후손'이라는 뜻의 '공손(公孫)'씨를 쓰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성씨는 같지만 본관이 다른 것. 간단히 말해 한국의 수많은 김씨, 이씨와 같다고 보면 된다. 성이 같다고 반드시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었다는 것. 공손도를 양자 취급했던 집안도 공손씨이고, 공손도를 벼락출세한 놈 취급하고 공손강을 하인처럼 부렸던 사람도 공손씨인 공손소다. 물론 공손강이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 태수가 된 다음에 곧바로 공손소를 처형시켰다.
한국사와도 꽤 많이 엮인다. 요동군뿐만 아니라 그보다 동쪽에 있는 현도군과 낙랑군까지 판도에 넣고 있었기 때문. 물론 현도군과 낙랑군의 명목상 종주권자는 요동군 태수인 동연의 수장이 아니라 후한에게 선양받은 위나라의 황제였지만, 실제로는 요동군 태수에 불과한 동연의 집권자가 행정 구획 변경 및 태수 임명을 자행하면서 실질적인 세력가로 군림하였다.
자꾸 고구려가 침공해오고 인구가 삼한으로 빠져나가는 흐름이 계속되자, 나눠서 관리를 쉽게 하고 삼한에 대한 통제력을 보다 높여보기 위해 보다 남쪽에 있던 낙랑군의 대방현 외 6개 현을 나누고, 그 전까지 토착 예맥계 호족들의 저항 탓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던 옛 진번군 영역을 통합해 대방군을 신설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공손도의 종가 딸(宗女)과 부여의 위구태왕 사이에서 혼인 동맹이 맺어지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산동 반도 방면으로의 진출도 꾀했던 것으로 보이나 원소가 원담을 파견해 청주를 장악하게 한 시점에서 잃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10대 산상왕 시기 고구려 왕위 계승 전쟁에서 고발기를 지원하면서 고구려의 내정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해 보았지만 고발기가 패배하면서 시도에만 그쳤다. 다만 패배 후 고발기를 지원하던 고구려 5부 중 소노부 30,000명이 동연으로 망명해 왔다는 기록이 맞다면 엄청난 이익을 본 게 된다. 당시 30,000명이면 소국 하나의 규모가 되기 때문.[7][8]
고구려나 위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선비족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오히려 유화책을 폈기 때문에 요동 공손씨 세력을 한화(漢化)한 선비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진위는 불명이다. 공손씨 일족이 몰살당한 후 요동은 조위와 서진의 지배를 거쳐 모용선비의 땅이 되었다.
동연과 관련된 유적들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요서, 요동, 산동 지역에서 후한 중기부터 나타나는 석판으로 벽을 만들고 여려 공간 구성을 갖추고 벽화를 장식한 석판묘들이 그것이다. 요서, 요동, 산동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으며, 확인된 석판묘는 약 100여 기에 달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요양에서 확인된 것이며 시기적으로도 동연의 존속기간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요양 삼도호, 남환가, 상왕가촌 고분군 등이 있다. 북한의 안악 3호분도 묘제의 유형 상으로는 석판묘에 해당하며, 천정구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단 이 동연은 전성기 기준으로 판도를 따지면, 전국시대 연나라에게 패배하여 요동과 청천강 이서 일대를 잃기 전의 고조선과 거의 강역이 비슷하다. 꽤 이목이 쏠리는 부분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요동 동부의 변경 일대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영역 자체에 대한 장악력 및 통제력은 연맹 체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4~3세기 이전 고조선보다 강했다는 것뿐이다. 다만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 고조선조차 국력이 조위보다 훨씬 딸렸을 전국 시대의 연나라에게 결국은 밀려났는데, 동연은 도대체 뭘 믿고 조위에게 항거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는지 의문이다. 고조선은 그나마 연나라 외에는 다른 적수가 없었으나, 동연은 고구려와 관계가 전반적으로 최악이었고 삼한과도 그다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3. 공손씨 일족
동연의 역대 국왕 | ||||
공손도 | 공손강 | 공손공 | 공손연 |
- 공손도(公孫度): 동연의 제1대 군주.
- 공손강(公孫康): 공손도의 아들. 동연의 제2대 군주.
- 공손공(公孫恭): 공손강의 동생. 동연의 제3대 군주.
-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과 공손연이 나이가 어려 그가 대신 군주가 되었다. 음경이 위축되는 고자였다.
- 공손강 시기에 위나라로부터 영녕향후라는 직책을 받았다.
- 228년 공손연에 의해 축출되었다.
- 공손연(公孫淵) : 공손강의 차남. 마지막 군주.
- 기타 인물
4. 매체에서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중국 영토 바깥의 세상이 구현되지 않은 탓에, 원래라면 성 2~3개 정도에는 해당하고 부여 같은 동맹군도 있던 이 세력이 요동(양평) 하나 딸랑 가지고 있는 하드코어급 난이도의 가난뱅이 세력으로 전락했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게 코에이 삼국지는 동아시아 역사 시뮬레이션이 아니기 때문에 '삼국지'의 무대 내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은 그와 그의 세력을 너무 강하게 만들었다가 공손찬, 원소, 조조가 활약하기가 힘들어지는 일이 생겨선 안 되기 때문이다.본래 삼국지가 다루는 시대 당시 후한의 영토는 오늘날 중국에서 신장 위구르 대부분, 티벳, 내몽골 일부를 제외한 중원 전 지역과 베트남의 과반수 지역, 한반도 북부 등이 포함되는데 요동 공손씨 세력의 영토는 이중에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일부 지역(낙랑군, 대방군)까지 포함된다. 낙랑군은 고대에는 요동군과 비슷한 규모를 자랑하던 꽤 번성한 구역이었고 특히 공손씨가 관심을 쏟고 개발하던 지역이라 낙랑군을 구현하거나 요동의 도시 규모를 대도시로 설정했다면 지금보다는 사정이 나을 것이고 당대부터 꽤나 부유한 대국으로 묘사되는 동맹 부여나 낙랑과 교역하거나 신속한 삼한세력까지 구현한다면 역사상의 조위가 공손씨 정권을 위협적으로 봤던 것이 납득될 정도의 세력이 구축되겠으나[10], 여러가지 어른의 사정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나올 일은 없다.
공손도 및 공손강, 공손공 등 그의 일족들은 여타 하드코어급 군주들 중에서도 명실상부한 삼국지 시리즈 최고 난이도로 악명이 높다. 유일한 영지인 양평(요동)이 비옥하지 못한 지역인 데다가 양평에서는 이렇다 할 인재조차 나오지 않는 등 장수도 부족한 판에 세력 확장을 위해서는 강대 세력인 공손찬, 원소, 조조 세력을 순서대로 뚫고 중원으로 진출해야 한다. 그나마 후방에 다른 적이 없어서 화북 세력 방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양평에서 북평까지는 평야 지형이라 지형을 활용한 우주방어를 펼치기 까다롭고 시리즈에 따라서는 오환족 등 이민족의 침략까지 감수해야 한다.[11] 특히 조조가 하북을 제패한 상황에서 능력치도 암울한 군주인 공손공 혼자 존재하는 210년 이후 유비 입촉 시나리오에서는 그야말로 불지옥 난이도를 자랑한다.
예외적으로 삼국지 7편에선 양평 동쪽에 낙랑군이 추가로 있고 디폴트로 비어있는 공백지라 바로 먹을 수 있어서 얘네들 사정이 좀 낫다.[12] 그리고 삼국지 7편이나 9편, 11편은 동중국해 해상으로 청주(북해, 성양), 오와 낙랑이 연결돼 있어서 원소나 위나라에 막혀 나갈 길도 없는 다른 시리즈보다는 좀 더 전략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또한 3편이나 4편, 8편, 10편과 같이 방랑군이 존재하는 시리즈에서는 방랑을 통해 양평을 떠나 아예 다른 곳에서 새살림을 차리는 방법도 있으며, 발탁무장 시스템이 존재하는 9PK, 12PK, 13PK의 경우 인재 확보를 위해 발탁무장을 활용해 보는 방법도 존재한다.
4.2. 토탈 워: 삼국
190년 군웅할거 캠페인, 194년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 200년 갈라진 운명 캠페인에서 논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하며, 공손도가 세력을 이끌고 있다. 출시 당시에는 요서지역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1.6.0 패치로 본진인 요동이 추가되면서 요동도 점거하고 있다.182년 천명 캠페인의 경우 유주 전역이 유우의 영토로 설정되어 있어서 등장하지 않는다.
[1]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2] 여러 이민족들과 국경을 접한 지역이었던 만큼 선비, 고구려, 부여, 오환 등의 이민족들이 섞여 살았을 수도 있다.[3] 각각 공손도가 서영으로부터 요동 태수로 천거된 시점과 손자 공손연이 사마의에게 토벌당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다.[4] 훗날의 고구려 요동성.[5] 전연, 후연, 북연, 서연, 남연 등이 있고, 특히 전연, 후연, 북연을 묶어서 삼연이라 한다.[6] 이 공격에 고구려 동천왕이 군대를 지원했다. 실제 목적은 위나라 군대를 탐색하는 것이었고 이후 동연이 몰락하면서 완충지대가 사라져 자연스레 사이가 악화된다.[7] 중국 전사를 보면 50만 대군, 100만 대군이라는 말이 쉽게 등장하는데 삼국지 당시 한나라 전체 인구 수가 3000만명 정도이고 삼국지 이전의 안정된 시기에도 500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말이 안 되는 군인 수이며, 중국 특유의 과장된 기록으로 보인다.[8] 고구려 모본왕, 태조대왕 등과의 전쟁사를 보면 30,000명도 안 되는 군대로 고구려가 한나라를 격파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점을 미루어 보아 당시 20,000~30,000명의 대군이면 국운을 걸고 싸우는 대규모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의 인구 수를 생각해도 100만 대군이면 농사가 거의 불가능하다[9] 이후 고발기에게 3만의 군대를 주어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산상왕의 아우 고계수한테 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10] 두말할 것도 없이 이들을 다 합치면 대략적으로 전성기의 고구려 영역은 된다.[11] 특히 삼국지 9에서는 바로 옆에 오환이 있는데 삼국지 9 AI 특성상 이민족들은 플레이어 무장에게만 집중적으로 쳐들어온다. 문제는 오환대왕 포함 8만 명이 쳐들어오면 공손도 세력에 야전 병법이 강한 장수들이 없어서 아무리 성 주변 병법 버프를 받아도 그냥 눈뜨고 멸망 당해야 한다.[12] 삼국지 10 한국어판에서도 등장하긴 하나 공백지가 아닌 단순 거점으로 나올뿐더러 당시 동북공정 논란 때문에 게등위의 태클로 짤리고 대신 동답이라는 지역으로 개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