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요코미조 마사시 横溝正史[1] |
출생 | 1902년 5월 24일 효고현 고베시 |
작고 | 1981년 12월 28일 (향년 79세) |
작품 |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
취직 | 1926년 하쿠분칸 입사 / 1932년 퇴사 |
학력 | 구제국오사카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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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 본격파 추리 소설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는 필명으로, 당초에는 별도의 필명이 없이 본명인 마사시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이름의 '正史'를 '세이시'로 잘못 읽은 동료 작가들이 '요코세이(ヨコセイ)'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세이시'가 아예 그대로 필명으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한다.2. 생애
1902년 고베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혼했다.초등학교 시절, 오스틴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나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읽으며 추리 소설(당시일본에서는 탐정소설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에 대한 흥미를 키웠다. 특히 르블랑의 《813》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외국의 추리잡지 등을 접하며 훗날, 추리소설 잡지의 편집자로서 또 작가로서의 소양을 기르게 된다.
1920년에 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하고, 고베 제일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다가, 다음해인 1921년, 오사카약학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이 시기 추리소설 게재에 열의를 보였던 잡지 《신청년(新靑年)》에 틈틈이 투고하게 되고 첫 단편 <무서운 만우절(恐ろしき四月馬鹿)>로 1등 수상을 하고 상금 10엔(현재 가치 40~50만 원)을 받았다.
1924년 전문학교를 졸업 후에는 집안에서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약제사로 종사한다. 원고 투고도 게을리 하지 않아 그 와중에도 몇몇 작품이 《신청년》에 게재된다. 1925년 ‘탐정생활을 취미로 하는 모임’에서 드디어 에도가와 란포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권유로 1926년에 도쿄로 상경, 하쿠분칸(博文館) 출판사에 입사하고 1927년에는 잡지 《신청년》의 편집장을 맡는다. 이후 《문예클럽(文藝俱樂部)》과 《탐정소설(探偵小說)》의 편집장을 역임하고 1932년 잡지가 폐간이 된 것을 계기로 퇴사 후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신청년》에 작품을 기고했는데 갑작스레 연재를 할 수 없게 돼 《흑사관 살인사건》으로 잘 알려진 오구리 무시타로가 이름을 알리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1934년부터는 폐결핵이 악화되어, 5년간 나가노 현에서 요양생활을 하면서, 하루 서 너 페이지 글을 쓸까 말까하는 불우한 시기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요코미조는 유머와 위트가 풍부한 비교적 밝은 작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35년 《도깨비불(鬼火)》을 계기로 전통적인 인습을 배경으로 한 탐미적이고 으스스한 작풍으로 변해간다. 아마도 당시 폐결핵으로 인해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던 점, 또 검열 때문에 작품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삭제해야 했던 우울함에서 기인했던 것 같다. 이유야 어쨌든 이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가장 주된 특징이 된다.
1939년에는 도쿄로 돌아오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전쟁중에는 작가 활동을 제대로 못해서 경제적으로도 쪼들리게 되고, 병도 더욱 악화되어 죽음을 각오한 적도 있었지만, 패전 후에 치료약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쟁은 일본 추리소설의 암흑기를 가져왔다. 당시, 정부에서 추리소설 창작과 출간을 제한했고 에도가와 란포를 비롯한 여러 추리소설 작가들은 소년물이나 SF물, 역사물 등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요코미조 세이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시기에 몇 권의 시대물을 발표한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추리가 가미된 시대물을 주로 썼다. 당시 인기있던 장르인 에도 시대의 경찰이 활약하는 체포이야기(捕物帳)에 편승한 <인형 사시치의 체포장(人形佐七捕物帳)>을 이 시기에 완성했다. 이후 약 180편의 시리즈 단편을 발표했고, 1936년 영화화를 시작으로 16편의 영화화, 8번의 TV 드라마화로 방영했다.
1942년 피난 도중 요코미조 세이시는 지인에게 존 딕슨 카의 작품을 소개받는데, 선명한 트릭과 특유의 오컬트적인 분위기에 깊이 감명받았다고 한다. 요코미조는 ‘본격(本格)의 거장’ 즉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하는 추리소설의 거장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딕슨 카 등 고전 작가의 영향 때문이다.
작가생활 초창기 요코미조의 소설은 탐미적 성향의 미스터리물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초창기 걸작으로 평가받는 '도깨비불(鬼火)'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후 영미권의 황금기 퍼즐러 탐정소설에 자극받은 요코미조는 1936년 자신이 기존에 집필해왔던 탐미적이고 괴기적인 성향을 유지하면서도 본격 추리 소설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유리 린타로 시리즈 첫번째 장편[2] '진주랑(真珠郎)'을 발표한다.[3] 이후 10여년에 걸쳐 차례로 발표된 유리 린타로 시리즈는 2차 대전 후 철저한 논리성을 추구하는 본격 추리 소설인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 이어지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평가받고 있다.
2차대전(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을 통치하게 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칼싸움이나 복수 등을 다루는 것에 검열하기 시작했고,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같은 현대를 시대배경으로 논리적인 본격파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추리소설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데 요코미조 세이시의 활약 또한 이 무렵부터이다. 1946년 창간된 추리소설 전문지 <보석>에 발표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데뷔작 《혼징 살인사건》은 제1회 탐정작가클럽 상 장편 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원래 이 작품에서만 등장시킬 생각이었던 긴다이치 코스케가 (다른 탐정을 구상하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계속)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일련의 탐정소설을 발표한다. 《옥문도》, 《팔묘촌》, 《이누가미 일족》, 《악마의 공놀이 노래》 등의 명작을 차례로 발표, 일본 본격 추리 소설의 거장으로 숭앙받는다.
요코미조 세이시 나이 예순, 일본 추리소설은 다시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사회파’라는 흐름이다. 서양에서 고전 퍼즐 미스터리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하드보일드가 떠오른 것처럼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1960년대 들어서는 마쓰모토 세이초 등의 사회파 미스터리가 대두하여, 집필량이 줄고 1964년부터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한 동안은 붓을 쉬었지만, 1968년 주간 소년 매거진에 《팔묘촌》이 만화화되고 큰 인기를 얻었다. [4] 이것을 주목한 카도카와 서점이 1971년에 《팔묘촌》을 카도가와 문고 1호작으로 문고본으로 내고, 70년대 초반 코단샤가 전집을 출판 다시 주목을 받고, 영화산업에 진출하고자 했던 KADOKAWA 서점이 원작을 삼아 1976년 영화 《이누가미 일족》[5]이 흥행에서 대성공하여 폭발적인 요코미조 리바이벌 붐을 맞았다. 이런 인기에 보답코자 요코미조도 다시 펜을 들어, 정력적으로 신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옥문도(1947)』, 『팔묘촌(1949)』, 『이누가미 일족(1950)』은 본격의 흐름이 완전히 끊긴 1960년대 후반부터 코믹스, 영상 등으로 리메이크되면서 엄청난 상업적 성과를 이뤘고, 이후 80년대부터 대두하게 되는 신본격 무브먼트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중적인 인기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노년에도 요코미조는 작품 활동을 늦추지 않았다. 1974년 《가면무도회(假面舞蹈會)》 1975년 《병원 비탈길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病院坂の首縊りの家)》 1979년 《악령도》 등을 연이어 발표, 전후 본격 추리소설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당당하게 드러냈다.
전후 일본 추리소설을 이끌어오던 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요코미조 세이시는 계속 현역 작가로 남아 있었다. 1981년 79세의 나이에 결장암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에도 새로운 작품의 구상을 가다듬고 있었고 큰 구성의 미필 원고가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본격이라는 흐름을 이끌어내고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영원한 명탐정을 탄생시켰으며, 두 번의 전성기를 거쳐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요코미조 세이시. 그는 일본 추리소설의 산 역사이자 정신인 것이다.
2000년 문고본만으로 이미 판매량이 6천만 부를 넘어섰으며 그가 창조해 낸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본의 국민 탐정으로 불린다.
《흑사관 살인사건》의 오구리 무시타로와 친분이 있었으며, 오구리가 요절했을때 그 충격으로 앓아눕기도 했었다. 인법첩 시리즈로 유명한 야마다 후타로와는 나이 차이가 나는 후배였지만, 자주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술친구였다고 한다.
전전 쇼와 시대 추리소설 작가로서는 유일한 평생 현역 작가였다는 점 때문인지,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왕년의 동료 작가들에게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 주거나 하는 면모도 있었다고 한다.
3.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호러 대상
요코미조 세이시 리바이벌 붐이 일던 1980년부터 시작한 추리소설 신인상. KADOKAWA가 주최하고 있다. 대상 수상자는 400만엔의 상금과 긴다이치 코스케 조각상이 부상으로 주어진다. 제20회까지는 요코미조 세이시 상이었다가 이후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21회~38회)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2019년 39회부터 주최측이 동일한 일본 호러 대상과 결합하여 지금의 명칭이 되었다.의외로 초창기에 추리소설계에서 별 좋은 평가를 못 받았는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복면좌담회에서 이 상을 탄 신인들이 활약을 못한다고 까인 적도 있다. 다만 이후 점차 좋은 작가들을 배출하면서 에도가와 란포상을 잇는 추리소설 신인상으로 부상했다. 은근히 대상 수상작이 없는 해가 많은데 우수상이나 가작 수상작들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 때문에 출판작 자체는 적지 않다.
에도가와 란포상과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미스터리 작품 전반을 모집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시가 일본 본격 미스터리계의 최고존엄으로 평가받는 만큼 란포상에 비하면 본격 미스터리도 평가받는 편이다. 물론 애초에 주최측이 '엔터테인먼트성이 넘치는 작품'을 모집한다고 선언하는만큼 전반적으로는 호러나 서스펜스 계열이 섞인 작품들이 많은데 이것 역시 요코미조의 작품관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 일본 호러 대상과 통합된 것도 애초에 두 신인상이 모집하는 작품 성향이 비슷했던 탓으로 보인다.[6] 어디까지나 비교적 본격도 고려된다는 수준이지 진짜로 본격에만 철저한 아유카와 데쓰야상이나 장미의 마을 후쿠야마 미스터리 문학 신인상과는 다르다.
4. 작품
4.1. 주요 작품
- 유리 린타로 시리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이전에 발표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초기 탐정 소설 시리즈. 이 시리즈의 첫번째 장편 《신주로(真珠郎)》와 1946년에 발표된 마지막 장편 《나비 살인사건(蝶々殺人事件)》은 에도가와 란포나 사카구치 안고와 같은 동시대 거장들로부터 세계적인 걸작이라 극찬을 받았으며, 요코미조 본인이 뽑은 본인 작품 베스트 10에서 각각 9위와 5위를 차지했다.[7]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해당 문서 참조.
- 체포장 시리즈
- 인형 사시치의 체포장
- 시라누이 체포 이야기
- 사콘 체포장
- 배우 분시치의 체포력
- 설앵초(雪割草) - 요코미조 세이시 유일의 가정소설.[8]
- 아동 소설
- 유령 철가면
- 진주탑
- 괴수남작
- 야광괴인
- 대미궁
- 황금 지문
- 금색의 마술사
4.2. 미디어화
- 인형 사시치의 체포장(人形佐七捕物帳)
도쿠가와 이에나리 시대, 에도를 무대로 오캇비키(岡っ引き)[9]로 활약하는 인형처럼 잘생긴 미남 사시치(1794년생)의 범인 체포담. 1938년 <하고이타의 비밀>을 시작으로 1953년에서 1961년에 걸쳐 총 16차례 영화화되었으며, TV 드라마로도 8차례 제작되었다. 이 중 1965년판에는 가수 가쓰미 시게루가 레귤러급으로 출연한 바 있으며,[10] 2016년판은 총 12화 방영으로 카나메 준이 주연을 맡았다.
- 후루야 잇코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TBS 테레비 계열에서 방송되었던 후루야 잇코[11] 주연의 드라마 시리즈. 크게 1977년작 '요코미조 세이시 시리즈 Ⅰ'과 1978년작 '요코미조 세이시 시리즈 Ⅱ', 그리고 1983년부터 2005년까지 제작된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 나뉜다. 이 드라마 시리즈 한정으로 긴다이치에게 추리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물구나무를 서는 버릇이 있다는 설정이 붙었다.[12]
다만 이 시리즈 중 일부는 원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아닌 작품이 드라마화 과정에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 편입된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3차례 드라마화된 《신주로》(真珠郎)로, 이 작품은 원래 유리 린타로 시리즈의 장편이지만 드라마화 과정에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 편입되었고[13] 그에 따라 일부 설정도 변경되었다. 예를 들어 원작에 등장하는 시나 코스케[14]라는 인물의 경우 1978년작에서는 긴다이치와 이름의 한자가 '耕助'로 동일한 관계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하지메(肇)'로 개명되었고, 2005년작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15]
- 이나가키 고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2000년대 초중반 이나가키 고로를 주역으로 내세운 SP 드라마 시리즈가 나온 적이 있다. 여기서는 긴다이치가 사건해결을 해오면 그 이야기를 요코미조에게 이야기를 하여 요코미조가 그에 맞춰서 소설을 집필했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드라마의 스토리의 맨 앞과 맨 마지막엔 항상 요코미조 세이지가 등장한다. 요코미조 세이지 역 담당배우는 코히나타 후미요.
- 탐정 유리 린타로
후지 테레비 계열에서 2020년 6월 16일부터 7월 14일까지 방영된 5부작 드라마. 유리 린타로 시리즈를 드라마화했으며[16],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전전 쇼와 시대에서[17] 현대의 레이와 시대로 바뀌었고, 스토리와 각종 설정도 변경된 시대 배경에 맞게 각색 및 변경되었다.
5. 기타
- 폐소공포증이 있어서 전차 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부득이하게 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술을 담은 병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 전차에 타고 있는 내내 틈틈이 마셔야 버틸 수 있을 정도였고, 아내와 함께 전차에 탈 때는 늘 옆에서 아내가 요코미조의 손을 잡아 줘야 했다고 한다.
- 상당한 애주가로, 만년에도 술을 끊지 못하고 주사를 심하게 부려서 아내를 곤란하게 하기도 했다.
- 클래식 음악을 즐겼다고 한다.[18]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나비 살인사건>, <가면무도회>, <미로장의 참극> 등 클래식이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이 있는 것도 이 영향이다.
- 약학을 전공하고 한때 약국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작중에 각종 독극물의 이름이 자주 나오지만, 의외로 작중에서 독살이 주요 살해 수법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 편이다.
- 출생의 비밀이라고 해야 할지… 가정사가 엄청나다. 부모가 각각 가정이 있는 유부남,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불륜을 저질러서 낳았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는 그 배다른 형(?)을 투영한 듯한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이러한 가정사가 반영되어 상당히 막장드라마삘이 상당히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 세계를 드러낸다.
6. 관련 문서
[1] 흔히 본명으로 알려져 있는 요코미조 세이시라는 이름은 正史를 음독한 것이다.[2] 일반적으로 유리 린타로 시리즈의 첫 작품은 1933년에 발표된 중편 <사로잡힌 여자(憑かれた女)>로 알려졌으나, 이 작품의 경우 원래 시리즈에 속하지 않는 단일 작품이었다가 전후인 1946년에 개작되면서 유리 린타로 시리즈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1935년작 단편 <수인>이 실질적인 첫 작품에 해당한다.[3] 구체적으로는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4] 본격 추리물 만화가 아니라 이 당시 일본은 호러 요괴 붐이었고, 팔묘촌은 호러 만화 취급을 받았다.[5] 이 영화에서 원작자 요코미조 세이시가 단역으로 출연한다. 초반부에 코스케에게 손님이 와 있다고 알려주는 여관 주인으로 등장.[6] 카도카와 호러 문고 레이블의 작품들은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는 작품들도 나올 정도로 대체로 호러와 미스터리의 경계에 있는 작품들이 많다[7] 참고로 이 두 작품은 모두 TBS 테레비 드라마판에서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 편입되었다.[8] 주로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에 걸쳐 신문에 연재되던 여성 대상 통속소설의 총칭. 원래는 '가정에서 읽기에 좋은 소설'이라는 의미였으나 정작 주된 내용은 현대의 막장 드라마처럼 연애와 불륜, 남녀의 정사를 다루는 것이 주류인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여학교들에서는 금서 취급을 받았다.[9] 평민 신분으로 경찰이 고용한 개인 탐정 및 정보원 비슷한 직업, 일본 경찰 역사 문서 참고.[10] 가쓰미 시게루는 인형 사시치의 체포장에 출연하기 전 에이트맨 애니메이션판 주제가를 부른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후에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고 이후 공식적으로는 연예계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11] 이 드라마 시리즈를 통해 긴다이치 코스케 전담 배우로 유명해진 중견 배우. 후루야 잇코는 예명으로 본명은 후루야 가즈유키(한자 표기는 古谷一行로 동일하다). 드래곤 애쉬의 보컬 후루야 켄지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Viva La Revolution 앨범 TV CF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TBS 테레비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주제가 '실전화(糸電話)'도 본인이 직접 불렀다. 1977년부터 2005년까지 이 시리즈에서 긴다이치 역을 전담했기 때문에 지금도 일본 시청자들 중에는 후루야가 연기한 긴다이치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22년 8월 암 투병 끝에 향년 78세로 사망.[12] 《특수전대 데카레인저》의 센짱이 무언가 생각하거나 추리할 때 물구나무를 서는 버릇이 있다는 설정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13] 원작 소설이 유리 린타로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주역 탐정 캐릭터 역할이 넘어가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14] 원작 소설은 이 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15] 2005년작은 원작의 이름만 가져온 수준으로 완전히 다르게 각색되어서 등장인물도 긴다이치 코스케를 제외하고는 모두 설정이 바뀌거나 일부 인물은 아예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이외에 1983년 테레비 아사히 계열의 토요 와이드 극장에서 방영되었던 신주로는 주연 배우가 오노데라 아키라(小野寺昭)로 다르고, 원작의 시나 코스케는 작중 역할이 긴다이치에게 흡수되면서 TBS테레비의 2005년작 신주로와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16] 드라마화된 작품은 《하나도쿠로》, 《은색의 무도화》, 《사로잡힌 여자》, 《나비 살인사건》. 이 중 장편인 나비 살인사건은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어 각각 4화, 5화로 방영되었다.[17] 구체적으로는 다이쇼 시대 연간에서 전전 쇼와 시대. 《나비 살인사건》의 경우 태평양 전쟁 직후와 작중의 사건이 발생한 시점인 쇼와 12년(1937년)을 오가며 진행된다.[18] 매니아까지는 아니고 약간의 교양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