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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13:51

웨이크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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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섬 전투
The Battle of Wake Island
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USMC-M-Wake-17.png
[1]
일시
1941년 12월 8일 ~ 23일
장소
웨이크섬
교전국[[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국|]]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윈필드 S. 커닝엄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제임스 P.S. 데브루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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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T. 엘로드|]]
[[틀:깃발|
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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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시게요시|
이노우에 시게요시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야마구치 다몬|]]
결과
일본 제국 해군의 승리
병력 미국 해병대 449명
기타 등등[2]
경순양함 3척
구축함 6척
경비정 2척
병력 수송함 2척
피해 122명 전사[3]
49명 부상
2명 실종
항공기 12기 손실
820명 전사
333명 부상
경순양함 1척 중파
구축함 2척 침몰
잠수함 1척 침몰
초계정 2척 파괴
항공기 21기 파괴

1. 개요2. 배경3. 전투
3.1. 일본군의 공습3.2. 1차 상륙3.3. 1차 상륙과 2차 상륙 사이3.4. 양쪽의 반응3.5. 2차 상륙
4. 이후5. 전쟁 범죄6. 관련 링크

[clearfix]

1. 개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일본군의 미국령 웨이크섬(Wake Island) 공격. 사실 섬이나 수비대 규모를 생각하면 가벼운 교전 끝에 함락되어야 정상이고, 일본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입증한 전투였다. 일본군은 승리하긴 했으나 미군보다 몇 배나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2. 배경

진주만 공습을 준비하면서 일본군은 서태평양상의 미국령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최우선적 공격 대상은 필리핀북마리아나 제도 남단의 섬이었으며, 중부 태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섬 웨이크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일본의 팽창위협에 맞서기 위해 1939년부터 웨이크섬을 군사기지화했지만, 수비대는 제1해병방위 대대(대대장 제임스 데버루 해병 소령)로 규모는 적었고, 방공시설이나 장비, 활주로 등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전 직전에 5인치(127 mm) 해안포 6문과 3인치(76 mm) 대공포 12문, 12.7 mm 중기관총 18정, 7.62 mm 경기관총 30정 등 해안포와 대공포, 기관총 등 중화기만큼은 제대로 장비했고, 엔터프라이즈가 실어다준 미 해병대 제211해병공격비행대대(VMA-211) 50 파견대(파견대장 폴 퍼트남 해병 소령)의 F4F-3 와일드캣 12대가 막 배치되었다.[4]

웨이크섬에는 민간인도 있었는데, 이 섬에 중간 기착하는 여객용 비행정을 관리하는 팬 아메리칸 항공 직원들이 있었다. 다행히 이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웨이크섬에서 대피할 수 있었다.

3. 전투

3.1. 일본군의 공습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한 시간 후 웨이크섬에 일본군이 공습을 개시했다. 마셜 제도에서 발진한 미쓰비시 G3M 3 중형 폭격기 36대가 공습하여 주기장에서 대기 중이던 와일드캣 8기가 완파되었다.[5] 여러 방어시설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지상 비행장을 굳건히 사수하던 해병항공병 55명 중 23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전과를 확인하고는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다.[6]

그러나 다음날 벌어진 공습에서 일본군은 폭격에서 살아 남은 와일드캣 4대에게 폭격기 2대를 상실했다.

3.2. 1차 상륙

12월 11일 새벽, 일본군은 3일간에 걸쳐 대대적인 공습으로 충분히 섬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고 판단하고 상륙을 개시했다. 순양함들이 포격해도 미군이 대응하지 않자, 일본군은 웨이크섬의 방어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생각하고 해안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미 해병대는 일부러 포격을 하지 않고, 일본군 함정들이 해안포의 유효사거리 내로 진입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해안포는 군함[7]에서 떼어온 5인치(127 mm) 해안포 6문이었다.

사거리에 일본 상륙함대가 들어오자 미 해병대는 해안포로 포격을 개시, 일본 함대는 집중포격을 얻어맞았다. 일본군 초계정 1척이 피탄되어 좌초했고, 수송선 1척은 포탄 한 발을 맞았다. 일본 구축함들은 수송선의 후퇴를 엄호하며 해안포에 맞섰지만, 미 해병대의 2번째 포격에서 상륙함대의 기함인 경순양함 유바리가 피탄당했고, 카미카제급 구축함 하야테가 해안포 포격 2발을 화약고에 맞고 2분만에 격침되며 탑승자 168명 전원이 전사했다. 하야테함은 전쟁에서 침몰한 일본의 첫 군함이었다. 구축함 오이테도 포탄에 맞고 사상자 19명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경순양함 텐류와 타츠다의 엄호 아래 구축함 야요이, 무츠키, 키사라기를 투입해서 응전했으나 거센 반격에 부딪쳤다. 야요이는 명중탄 1발을 기록했지만 포탄에 맞아 1명이 전사에 17명이 부상당했고, 유바리는 포탄 11발을 맞고 대파되었다. 일본군은 놀라 퇴각했지만, 와일드캣 4대가 상륙선단을 공격하여 텐류와 순양함 공고마루에 기관총탄을 명중시켰다. 그리고 키사라기는 헨리 T. 엘로드(Henry T. Elrod) 해병 대위가 조종하는 와일드캣의 100파운드 폭탄에 후미를 맞고 폭뢰발사기가 폭발하면서 승조원 전원과 함께 침몰했다.[8]

이 전투로 일본군은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이에 반해 12월 11일 전투에서 미국군은 전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3.3. 1차 상륙과 2차 상륙 사이

13일에는 초계중이던 와일드캣이 부상해있던 일본군 잠수함을 폭탄으로 공격했다. 직격탄은 아니었지만 잠수함 근처에서 터졌기 때문에 선체에 큰 손상을 입고 결국 침몰했다.

15일에도 잠수함을 발견해 공격했지만 격침에는 실패했다.

3.4. 양쪽의 반응

일본군은 패배에 충격을 받고는 반성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 일본 해군의 명예를 걸고 웨이크섬을 점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 상륙부대 사령관 가지오카 소장은 증원을 요청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 귀환하던 항모 히류소류, 괌 공격에 나섰던 함대에 포함된 제6전대의 중순양함 아오바ㆍ 키누가사ㆍ카코ㆍ후루타카 등 4척을 차출했고, 구축함 아사나기ㆍ유나기 2척과 특설함선으로 구축함 오보로, 육전대 병력을 추가하여 대대적으로 전력을 증강하고 폭격을 강화했다.

한편 예상치 못한 승리에 미국이 열광했다. 상급부대가 필요한 게 뭐냐고 무전으로 묻자, 웨이크섬 해군부대장 윈필드 S. 커닝엄 해군중령이 "일본놈을 더 보내라."라고 응답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일반 시민들의 열광은 더욱 고조되었다. 실제로는 웨이크 섬 수비대장인 커닝엄 중령이 그런 전문을 보낸 적은 없고, 해안포 조준경과 예비 부속품, 사격통제레이더 등 보급품 목록을 보냈다고 한다. 다만, 기자들에게는 개전 초 연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국민들을 위한 선전으로 그렇게 발표되었다.

이런 승리의 도취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여전히 일본군의 강력한 재공격이 뻔했으므로 병력충원이 시급했다.

12월 15일, 미군 수뇌부는 웨이크섬 증원부대로 제4해병방위 대대와 제211해병공격 비행대대를 보내기로 결정, 수송선단 제14기동부대가 하와이에서 출발하여 웨이크섬 동쪽 680 km까지 접근하였다. 하지만 미 함대는 웨이크섬 인근 해역에서 상륙을 준비하다 대규모 일본 해군 선단을 발견했지만, 진주만 공습 이후 얼마 남지 않은 해군 함대를 사지로 내몰 수 없다고 판단하여 23일 밤에 회항하라고 지시했다.

참고로 이 부대는 윌리엄 홀시가 직접 지휘하겠다며 나서다가 만류받고는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지휘 중이었는데, 회항 명령을 받고 분노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웨이크섬 구원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두고 당시부터 반발이 많았다. 플레쳐나 홀시 같은 일선 제독들은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으로는 반발심이 생기는' 형태였고,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이나 후임 니미츠 제독은 구원 포기를 지지했다. 심지어 웨이크섬 수비대인 제1해병방위 대대장 제임스 데버루 해병소령도 전후에 발표한 회고록과 인터뷰 등에서 웨이크섬 포기와 철수 명령은 현명한 판단이었고 이를 이해한다고 밝혔다.

3.5. 2차 상륙

23일, 이전의 전투를 전훈 삼아 일본군이 해군육전대 1500명을 웨이크섬에 상륙시킴으로써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활주로 인근에선 일본군 1개 중대가 사상 60여 명에 중대장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좁은 지형 속에서 미 해병대의 기관총에 고착견제되어 일본군의 피해는 점점 늘어만 갔다. 웨이크섬의 부속도서인 윌크스 섬에서는 아예 통째로 1개 중대(100명)가 미군 1개 소대에게 완전히 전멸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선전 속에서도 미군의 중요 거점들이 하나둘 함락되고, 건재한 부대들간에도 통신망이 두절되어 아직도 저항 중인 부대를 두고 지휘부는 전멸했다고 오판했다. 일본군 중순양함과 구축함대가 해안포 위협을 무릅쓰고 깊숙히 들어와 포격을 가하는 등 일본군의 공세도 격렬해져 더이상 수비가 불가능해지자 오전 8시 수비대는 항복을 결정했다. 그 와중에도 통신망 두절 때문에 지휘부가 항복하기로 결정했음을 전파받지 못한 소부대들이 자체적으로 반격하여 일본군이 일시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하는 등, 미군의 저항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없다.

미군 소부대가 계속 저항하자 일본군은 미 해병대 제1해병방위 대대장 제임스 데버루 해병소령에게 항복 권유를 하도록 시켰다. 24일 13시 30분을 기해 잔존부대가 모두 항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 초기 가장 격렬했던 전투는 이렇게 미 해병대의 패배로 끝났다.

4. 이후

일본군은 미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크게 놀랐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목표한 요충지들을 모두 타임 테이블대로 딱딱 점령했지만 보잘것없는 이 작은 섬을 함락시키는 데는 열흘이 넘게 걸렸고, 전사자는 800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구축함 2척과 잠수함 1척 격침, 항공기 최소 21대가 격추되었다. 12월 9일 이후 일본 해군육전대에는 전사자 125명에 부상자 125명이 발생했고, 함선 8척이 손상을 입어 92명이 전사했으며 195명이 부상을 입었다. 항공기 28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공중에서도 비슷한 숫자가 격추 또는 추락하는 등 전력손실이 일본군의 예상을 가볍게 압도했다.

반면 12월 9일 이후 미군은 미 해병대 전사자 49명, 실종자 2명, 부상자 49명, 해군 전사자 3명, 원주민 전사자 10명, 민간인 전사자 60명 이상이 발생했고, 미국인 총 433명이 포로로 잡혔다.

태평양 전쟁의 판세가 기울어질 때까지 미군은 굳이 웨이크섬을 탈환하려 하지 않고 그저 기뢰와 잠수함으로 섬을 봉쇄했다. 1942년 2월 24일 미 해군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대규모 공습을 가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수시로 대규모 공습을 가해 섬의 군사시설을 모두 박살내는 선에서 관심을 끊었다. 이후 일본이 항복한 뒤 일본군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Gallirallus_wakensis.jpg
이 전투로 인해 생물학적으로도 큰 손실이 있었다. 고립된 일본군은 자신들의 보급난을 해소하기 위해 웨이크뜸부기를 모조리 잡아먹어 멸종시켰기 때문이다. 웨이크뜸부기는 날지도 못했고,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해 경계하지도 않았지만 미군도 굳이 웨이크섬을 개발하거나 뜸부기들을 사냥하려 하지 않았기에 다른 비슷한 처지의 섬에 고립된 새들과 달리 오래 살아남았으나 결국 일본군에 의해 멸종했다.

5. 전쟁 범죄

1943년 10월 5일 미 해군 항공모함 렉싱턴이 다시 대규모로 공습하는 것을 일본군 수비대장 시게마쓰 사카이바라 제독이 전면적 상륙 시도로 오판하고 겁에 질려 민간인 포로 다수를 학살했다. 이 때문에 전후 교수형을 받았고 부관[9]도 같이 사형당했다. 학살이 일어난 날, 미국인 포로 한 명이 처형장에서 탈출해 근처의 바위에 98 US PW 5-10-43이라고 새겨놓았다. 이는 '1943년 5월 10일 미국인 포로 98명(이 처형당함)'이라는 뜻이라 지금도 남아 있는 그 바위를 98 Rock이라고 부른다. 이 글자를 새긴 미국인은 이후 일본군에 잡혀 일본군 수비대장에게 참수되었다. 미국은 훗날 이때 처형당한 민간인 유해를 발굴하여 태평양 국립묘지의 G 구역에 이장했다.#

웨이크섬은 전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일본군이 점령했다. 개전 직후 미국이 빼앗긴 영토 중 종전 당일까지 탈환하지 않은 곳은 웨이크섬이 유일하다. 기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미국 영토 중 필리핀이나 마리아나 제도의 괌 섬, 알류산 열도의 일부 섬 등은 전쟁기간 동안 모조리 재탈환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웨이크섬은 지리적으로 외딴 태평양 한가운데 있었고 전략거점으로 격전이 벌어진 과달카날 섬,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섬, 필리핀 열도, 괌 섬, 이오지마 섬, 오키나와 섬과는 다르게 크기도 작아서 일본 본토를 폭격 거점으로 공략하기 위해 미국이 필수적으로 탈환해야 할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6. 관련 링크



[1] 파괴된 일본 정찰선[2] 민간인[3] 민간인 70명 포함[4] 참고로 이 와일드캣 셔틀 임무 덕분에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 공습을 피할 수 있었고, 이것이 태평양 전쟁 전체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켰다.[5] 4기는 일본군의 접근을 파악하려고 정찰비행 중이었다.[6] 실제로 같은 시기에 벌어진 제1차 괌 전투에서 일본군은 이틀 동안 섬에 포격을 가한 후 상륙했는데,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20분 만에' 미국 해병 수비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7] 전함 텍사스 등 기존 함선에서 포곽의 부포 수를 줄이면서 나온 것을 가져와서 설치했다.[8] 키사라기를 격침시킨 헨리 T. 엘로드(Henry T. Elrod) 해병 대위는 이 공로로 제2차 세계 대전 최초로 의회 명예 훈장이 수여된 조종사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41년 12월 23일에 전사했다. 이후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 45번함에 이름이 붙여졌다.[9]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